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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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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프라하 위치

프라하(체코어: Praha, 영어: Prague, 문화어: 쁘라하)는 체코수도이다. 인구는 약 128만 명이며, 광역도시권을 모두 포함하면 인구는 약 216만 명에 달한다. 프라하는 체코의 도시 중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이며 유럽연합에서 14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프라하의 중심지 구시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1]

개요[편집]

  • 행정 단위: 체코 수도
  • 면적: 496km²
  • 지역어: 체코어

프라하는 체코 중서부, 체히 지방의 중심부에 있으며, 블타바강이 중심을 가로질러 흐른다. 스트르셰도체스키주가 프라하의 사방을 둘러싸고 있으며 그 행정 관청 또한 프라하에 위치한다. 프라하는 풍부한 역사와 함께 중부 유럽의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지다. 유럽 철도의 중심지로, 유럽의 각국과 연결되며 하항(河港)이다. 로마네스크 시대에 세워져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를 거치며 번영한 프라하는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였다. 여러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주거지였으며 특히 카를 4세(Karl IV, 1346~1378) 대제(大帝)의 활동지였다. 합스부르크 왕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중요한 도시였다. 이 도시는 보헤미아 개혁, 프로테스탄트 개혁, 30년 전쟁, 그리고 20세기 역사에서 양차 세계대전과 전후 공산주의 시대에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라하에는 20세기 양차 세계대전의 폭력과 파괴에서 살아남은 유명한 문화 명소들이 많다. 주요 명소는 프라하성, 카를 다리, 프라하 천문시계 등이 있는 올드타운 광장과 유대인 구역, 페트린(Petřín) 언덕, 비셰흐라드(Vyšehrad) 등이다. 1992년 이후 광범위한 역사적 중심지인 프라하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포함되었다. 도시에는 10개 이상의 주요 박물관이 있으며 수많은 극장, 갤러리, 영화관 등이 있다. 현대적인 대중교통 시스템이 프라하 안팎을 연결한다. 중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카를대학교를 비롯해 여러 공립 및 사립 학교가 있다. 영국 러프버러 대학교가 주관하는 세계화와 세계도시 네트워크(GaWC, Globalization and World Cities Research Network) 연구에 따르면 알파 글로벌 도시로 분류된다. 프라하는 또 여행가격 비교 웹 사이트인 트립어드바이저(Tripadvisor)가 조사한 2016년 세계 최고의 여행지 순위에서 6위에 올랐다. 도시생활의 질(質)을 비교하는 사이트인 머서(Mercer)의 2019년 조사에서 프라하는 세계 69위의 살기 좋은 도시로 선정되었다. 풍부한 역사 유적으로 유명해서 2017년 현재 매년 850만 명 이상의 해외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2017년 프라하는 런던, 파리, 로마, 이스탄불에 이어 유럽에서 관광객이 많은 도시 5위에 올랐다.[2]

지리 및 기후[편집]

프라하는 체히 지방의 중심부에 놓여 있으며 블타바강이 중심을 가로질러 흐른다. 중앙보헤미아 주가 프라하의 사방을 둘러싸고 있으며 그 행정관청 또한 프라하에 위치해 있다. 2020년 체코 통계청의 조사에 따르면, 프라하의 면적은 496km²이며 인구는 130만 명에 이른다.

프라하는 해양성 기후와 습한 대륙성 기후의 영향을 동시에 받는다. 겨울에는 평균 기온이 0°C 빙점이고 햇빛이 거의 들지 않아 추운 편이다. 눈이 20cm 이상 수북이 쌓일 때는 드물지만 11월 중순부터 3월 말 사이에 눈이 덮이는 날이 많다. 겨울에는 온화한 때도 있다. 여름은 보통 햇빛을 많이 받고 평균 기온은 24°C이다. 여름에도 밤에는 꽤 시원하다.

프라하와 인근 보헤미아 저지대의 강수량은 수데테스(Sudetes)산맥과 다른 산맥의 비 그늘에 위치하기에 연간 500mm를 약간 넘을 정도로 적은 편이다. 가장 건조한 계절은 보통 겨울이고 늦은 봄과 여름은 가끔 천둥과 함께 꽤 많은 비가 온다. 10월 중순과 3월 중순 사이에 해발 고도가 높은 지역이 오히려 기온이 높은 기온 역전현상이 비교적 흔하며 이때에는 안개가 끼거나 추운 날이 이어진다. 프라하는 서풍이 지속되고 평균 풍속이 시속 16km에 이르는 세찬 바람이 부는 도시인데 이 바람 때문에 공기가 맑아지는 효과가 있다.[3]

역사[편집]

고대 및 중세[편집]

프라하 주변의 보헤미아 지방엔 구석기 때부터 인류가 정착해 살았다. 유대인 고(古) 지질학자 데이비드 솔로몬 간츠(David Solomon Ganz)는 독일의 신학자, 개신교 개혁가, 역사가인 키리아쿠스 스판겐베르크(Cyriacus Spangenberg, 1528~1604)의 말을 인용하여 이 도시는 기원전 1306년 보이야(Boyya) 왕에 의해 보이하엠(Boihaem) 왕국으로 세워졌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5~4세기경 켈트족이 이 지역에 출현하여 현재의 프라하 교외인 자비스트(Závist)에 작은 성읍(城邑)을 포함한 정착촌을 세우고 '=보이(Boii) 족의 고향'=이라는 뜻으로 보헤미아(Bohemia)라고 명명하였다. 기원전 1세기 말에 켈트족은 북쪽에서 내려온 마르코만니(Marcomanni), 콰디(Quadi), 롬바르드(Lombard), 수에비(Suebi) 등 게르만의 여러 부족에 의해 서서히 쫓겨났다. 현재의 프라하 지역을 중심으로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가 그린 2세기 지도에는 카수르기스(Casurgis)라는 게르만족의 도시가 언급되어 있었다.

서기 5세기 후반에 서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 게르만족의 대이동 기간에 보헤미아에 사는 게르만 부족들은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중부 보헤미아 지역에서는 6세기에 슬라브 부족인 베네디(Venedi)족이 주도권을 잡았다. 그 후 300여 년에 걸쳐 체코 부족들은 이 지역에 몇 개의 요새화된 정착촌을 건설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곳이 샤르카(Šárka) 계곡, 부토비체(Butovice), 레비 흐라데츠(Levý Hradec) 등이다.

프라하성 공사는 9세기 말경에 착공되었다. 또 다른 저명한 프라하 요새인 비셰흐라드 프레미슬리드(Vyšehrad Přemyslid)는 프라하성보다 약 70년 늦은 10세기에 세워졌다. 프라하성당 공사는 1344년에 착공했으나 여러 사정 때문에 완공되지 못하다가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완공되었다.

프라하와 관련한 전설의 기원은 8세기 체코의 공작부인이자 예언자인 리부셰(Libuše)와 그녀의 남편인 프레미슬(Přemysl)에서 비롯된다. 전설에 따르면 리부셰는 블타바 산꼭대기에 있는 바위 절벽에 나와 "나는 영광이 별에 닿을 위대한 도시를 본다"라고 예언했다. 그녀는 그 자리에 프라하라는 성과 마을을 건설하라고 명령했다. 이 지역은 귀족들의 중심지가 되었고 그 귀족 가운데 보헤미아의 왕이 나왔다. 신성로마제국 오토(Otto) 2세 치하의 이 지역은 973년에 주교 교구가 되었다. 1344년 프라하가 대주교 교구로 승격되기 전까지는 마인츠(Mainz) 대주교의 관할이었다.

프라하는 965년 스페인 태생의 유대인 상인이자 여행가인 이브라힘 이븐 야쿠브(Ibrahim ibn Ya'qub)가 회상했듯이 많은 유대인을 포함한 유럽 전역의 상인들이 즐겨 찾는 무역 중심지였다. 1270년에 지어진 유대교 회당 시나고그가 아직도 이 도시에 있다. 프라하는 또한 한때 중요한 노예 시장의 본거지였다.

블타바강 개울이 있던 자리에는 블라디슬라우스(Vladislaus) 1세가 1170년에 처음으로 다리를 놓았다. 이 유디트(Judith) 다리는 그의 아내 유디트를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 이 다리는 1342년 홍수 때문에 파괴되었지만, 그 다리의 원래 초석의 일부가 강에 남아 있다. 다리는 재건되었고 카를 다리로 이름이 지어졌다.

카를 4세 시대[편집]

카를 4세가 1346~1378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보헤미아 국왕을 겸임하며 새로운 룩셈부르크 왕조를 열어 통치했을 때에 프라하는 번성했다. 프라하는 자연스레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로 변모했고 로마, 콘스탄티노플에 이어 유럽 3대 도시로 커졌다.

카를 4세는 기존 구시가 옆에 신시가 조성을 지시하고 직접 도시설계에 동참했다. 그의 재위 직전인 1342년에 홍수로 유실된 유디트 다리 자리에 카를 다리를 세웠다. 1357년 7월 9일 오전 5시 31분, 카를 4세는 직접 다리의 초석을 놓았다. 첫 번째 기초석을 세운 정확한 시간은 왕실 점성술사와 수학자들이 교량 공사를 시작하기 가장 좋은 시기로 선택한 구시가지 교각탑에 135797531이라는 앞뒤로 읽어도 똑같은 숫자를 새겼기 때문이다. 1347년 카를대학교를 설립했는데, 이 대학은 중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남아 있다. 카를 4세는 고딕 양식의 성 비투스(St. Vitus) 성당을 로마네스크 로툰다 자리에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인 1344년에 프라하는 대주교 교구로 승격되었다.

화폐 제조창이 있는 프라하는 독일이탈리아의 은행가들과 상인들에게는 무역의 중심지였다. 프라하에서 장인 길드의 세력이 높아지고 빈곤층이 늘어나면서 사회질서가 더욱 격동되었다. 말라 스트라나(Malá Strana) 지구와 프라하성 남쪽에 있는 '배고픔의 장벽'은 1360년대 기근 때 건설되었다. 이 벽은 카를 4세가 백성들에게 식량을 주려고 취로사업 방식으로 지은 것이다.

카를 4세는 1378년에 사망했다. 아들 웬체슬라우스 4세(Wenceslaus IV, 1378~1419)의 재위 기간에는 극심한 혼란기가 이어졌다. 1389년 부활절 동안 프라하 성직자들은 유대인들이 미사 성찬용 성체를 모독했다고 발표했고 성직자들은 폭도들에게 유대인 주거지를 약탈하고 불태우도록 부추겼다. 전체 유대인 인구 3천여 명이 살해되었다.

카를대학교의 신학자이자 교목인 얀 후스(Jan Hus)는 1402년 프라하의 베들레헴(Bethlehem) 예배당에서 설교하기 시작했다. 존 와이클리프(John Wycliffe)에게서 영감을 받은 후스는 부패한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성토했다. 후스의 추종세력이 늘어나자 위협을 느낀 교회는 후스를 재판에 회부했다. 후스는 이단으로 사형 판결을 받고 1415년 말뚝에 묶여 화형에 처해졌다.

4년 후인 1419년 후스의 추종자 얀 젤리브스키(Jan Želivský)는 후스의 죽음에 항의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체코 원생(原生) 민족주의와 원생 프로테스탄티즘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므로 기존세력과 타협할 수 없어 '후스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얀 젤리브스키 장군이 이끄는 반군은 1420년 비트코프(Vítkov) 언덕 전투에서 지기스문트(Sigismund) 황제 군대를 격파했다.

후스 전쟁 중에 프라하가 교회측 십자군과 용병대의 공격을 받았을 때 반군 민병대는 프라하 기장 아래에서 용감하게 싸웠다. 이 제비꼬리 현수막은 가로 1.8m, 세로 1.2m 크기로 백합꽃들이 뿌려진 붉은 들판과 중앙에 은빛 도시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이 군사기 중 하나를 1648년 프라하 전투에서 스웨덴군이 전리품으로 챙겼다. 스웨덴군은 블타바강의 서안을 점령하고 동안쪽으로 진격하다 쫓겨갈 때 이를 갖고 가 스톡홀름의 왕립 군사 박물관에 소장했다. 이 깃발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훼손 상태가 심각하다.

그 후 2세기 동안 프라하는 상인 도시로서 역할을 강화했다. 주목할 만한 고딕 건축물이 많이 세워졌고 프라하성에 블라디슬라프(Vladislav) 홀이 추가되었다.

합스부르크 시대[편집]

1526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페르디난트 1세가 보헤미안 영지를 통치하게 되었다. 당시에 프라하에는 프로테스탄트 사상이 인기를 얻고 있었기에 가톨릭에서는 이를 차단하려 고심했다. 1576년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된 신성로마 황제 루돌프(Rudolf) 2세 치하에서는 신교, 구교 대립이 아직 본격화하지는 않았다. 루돌프 2세는 프라하성에 거주하면서 천문학자, 마술사, 과학자, 음악가, 화가 등을 환대했다. 루돌프 황제 자신이 예술 애호가였고 프라하는 유럽 문화의 수도가 되었다. 이 시기는 도시의 번영기였다. 당대의 명사로는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Tycho Brahe),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화가 아르킴볼도(Arcimboldo), 연금술사 에드워드 켈리(Edward Kelley)와 존 디(John Dee), 시인 엘리자베스 제인 웨스턴(Elizabeth Jane Weston) 등이다.

1618년 신교, 구교 세력 사이에 치열한 30년 전쟁이 일어났는데 프라하 신교세력의 2차 반란도 그 원인이 되었다. 유럽 전역이 전화(戰禍)를 입었는데 특히 프라하와 보헤미아에는 가혹한 시기였다. 합스부르크의 페르디난트 2세는 물러났고 그의 보헤미아 국왕 자리는 프레데릭 5세가 차지했다.

그러나 프레데릭 5세의 군대는 1620년 프라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화이트 마운틴 전투에서 패배했다. 그 이듬해인 1621년 프라하의 올드타운 광장에서 27명의 체코 개신교 지도자들이 처형되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 프라하는 강제로 로마 가톨릭으로 되돌아갔고 체코의 다른 도시들도 그 뒤를 따랐다.

30년 전쟁의 막판 무렵인 1648년 프라하 전투 때문에 프라하는 큰 진통을 겪었다. 전쟁 전 6만 명이었던 인구가 2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17세기 후반에 프라하의 인구는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은 10세기 말부터 프라하에 있었고 1708년까지 프라하 인구의 약 4분의 1을 차지했다.

1689년 큰 화재가 프라하를 황폐화시켰다. 하지만 이 때문에 도시의 개축과 재건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1713~1714년 페스트가 프라하를 강타하여 1만2천~1만3천 명이 사망했다. 1744년 프로이센의 프레데릭 대왕(Frederick the Great)은 보헤미아를 침공했다. 그는 두터운 포위망을 뚫고 프라하를 점령했다. 그후 프라하를 떠난 그는 1757년에 다시 프라하를 공격했고 이때 프러시아의 포격으로 프라하 도시의 4분의 1 이상이 파괴되었다. 특히 성 비투스(Vitus) 대성당은 크게 훼손됐다. 그러나 한 달 후 프레데릭 대왕은 패배하여 보헤미아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다.

프라하의 경제는 18세기 동안 계속 발전했다. 인구는 1771년까지 8만 명으로 늘어났다. 부유한 상인들과 귀족들은 미술과 음악이 가득한 궁전, 교회, 정원으로 도시를 발전시켜 오늘날까지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바로크 양식의 도시를 만들었다.

1784년 요제프(Josef) 2세에 의해 말라스트라나(Malá Strana), 노베 므네스토(Nové Město), 스타레므네스토(Staré Město), 흐라드차니(Hradčany) 등 4개 자치체가 단일체로 통합되었다. 요제포프(Josefov)라고 불리는 유대인 지역은 1850년에야 포함되었다. 프라하에서는 공장들이 인근 지역의 탄광과 철공소를 이용할 수 있어 산업혁명이 큰 효과를 거두었다. 첫 교외 지역인 카를린(Karlín)은 1817년에 만들어졌고 20년 후 이곳의 인구는 10만 명을 넘어섰다.

1848년 유럽 혁명의 물결이 프라하에 전파되었지만 강경하게 진압되었다. 1861년 시의회에서 '체코 국가 부흥당'은 과반수 의석을 차지했다. 1848년에는 프라하 시민 가운데 독일어 사용자 수가 대다수였다. 그러나 1880년에는 14%로 4만2천 명, 1910년에는 6.7%로 3만7천 명으로 줄어들었다.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서 체코어 사용자들이 프라하로 대거 이주했기 때문이다.

20세기[편집]

제1차 세계대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패배와 체코슬로바키아의 탄생으로 끝났다. 프라하는 수도로, 프라하성은 토마시 가리구에 마사리크(Tomáš Garrigue Masaryk) 대통령의 집무실로 활용되었다. 이 시기에 프라하는 고도로 발전된 산업구조를 가진 진정한 중부 유럽의 수도였다. 1930년에 이르러 인구는 85만 명으로 늘어났다.

독일아돌프 히틀러는 1939년 3월 15일 독일군에게 프라하에 입성할 것을 명령했고 프라하성에서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를 독일의 보호령으로 선포했다. 프라하는 역사의 대부분 동안 체코인, 독일인, 독일어 구사 유대인 등을 지닌 다민족 도시였다. 체코가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던 1939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대부분의 체코 거주 유대인들은 독일군에 의해 추방되어 학살당했다. 1942년 나치 독일 치하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국가 영웅 요제프 가브치크(Jozef Gabčík)와 얀 쿠비시(Jan Kubiš)는 독일의 유력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를 '유인원 작전'이란 비밀 공작으로 암살했다. 히틀러는 피비린내 나는 보복을 지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막을 고할 즈음인 1945년 2월 프라하는 미국 공군의 몇 차례 폭격에 시달렸다. 701명이 사망하고 1천 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많은 건물과 공장이 폭파되었고 에마우스(Emmaus) 수도원, 파우스트 하우스, 비노흐라디(Vinohrady) 시나고그 등 역사 유물도 일부가 파괴되었다. 그나마 다행스런 것은 상당수 역사 건축물들이 전화(戰禍)에서 벗어났다는 점이다. 당시 여느 도시들이 엄청난 파괴를 당한 것에 비하면 피해는 적은 편이었다. 미국 조종사에 따르면 역설적으로 이는 운항 실수의 결과였다. 1945년 3월 프라하의 군수공장을 노린 급습으로 370여 명이 숨졌다.

독일이 항복하기 이틀 전인 1945년 5월 5일 체코의 레지스탕스 세력이 점령하 독일군에 게릴라전을 벌였다. 4일간의 처절한 시가전으로 체코인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5월 9일 새벽에 소련 적군의 제3 공작군은 독일군의 저항을 거의 받지 않고 프라하를 접수했다. 프라하에 거주하던 독일인 5만 명은 전쟁의 여파로 피난하거나 베네슈(Beneš) 법령에 의해 체코 국외로 추방되었다.

냉전시대[편집]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라하는 소련의 군사적, 정치적 지배를 받는 도시였다. 소련 지도자 스탈린의 거대한 기념비는 1955년에 레트나(Letná) 언덕에 세워졌다. 1967년 6월 열린 제4차 체코슬로바키아 작가동맹회의에서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와 클리마(I. Klima) 등 작가들은 공산당 독재정권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1967년 10월 31일 학생들은 스트라호브(Strahov) 기숙사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로 인해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제1 서기가 물러났고 후임자로 알렉산더 두브체크(Alexander Dubček)가 1968년 1월 5일 취임했다. 소련은 러시아에 능통한 두브체크에게 호의를 가져 그의 취임을 지지했다. 그러나 그는 소련의 꼭두각시가 되기를 거부하고 3월부터 본격적으로 개혁운동을 벌였다. 그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를 주창하고 공산당의 권력 독점도 포기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공산당 간부들이 교체되었고 언론에 대한 검열제도가 폐지되었다. 시장경제 체제도 일부 도입되어 시민들은 소규모 자영 점포를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일련의 민주화 혁명을 '프라하의 봄'이라 부른다.

이런 와중에 6월 27일 체코슬로바키아 지식인 70명이 서명한 '2000단어 선언'이 발표되었다. 민주화 개혁을 가속화하고 폭을 더 넓히라는 요구를 담은 선언문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 운동을 바라보는 소련의 시각은 부정적이었다. 동유럽 전체로 이런 운동의 물결이 퍼지면 소련의 동유럽 지배체제가 붕괴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마침내 소련, 폴란드, 동독, 헝가리, 불가리아 등 바르샤바 조약 회원국 군대들로 구성된 동맹군 50만 병력은 1968년 8월 21일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했다. 이들은 탱크를 몰고 수도 프라하에 입성했다. 8월 23일 두브체크를 비롯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간부들은 소련군들에게 붙들려 모스크바로 압송되었다. 그들은 브레즈네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의 민주화 철회를 요구하는 위협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여러 개혁 조처들은 백지화되었다. 얀 팔라흐(Jan Palach)와 얀 자지크(Jan Zajíc)는 1969년 1월과 2월에 소련의 강압에 항의하며 자살했다.

벨벳 혁명 이후[편집]

1989년 11월 17일 프라하 시내의 나로드니 트리다(Narodni Trida) 광장에서 50년 전 나치 독일의 체코 침공을 규탄하는 집회가 열렸다. 참가자 청년 일부가 반정부 시위를 벌이자 경찰이 이들을 강제 진압했다. 이에 따라 반정부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결국 후사크 정권은 붕괴되었다.

1990년 6월 선거에서 작가 바츨라브 하벨(V. Havel)이 이끄는 '시민 포럼'은 과반수 득표로 집권했다. 7월 5일 하벨은 새로운 이름으로 탄생한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 나라에서 민주화 혁명은 유혈 사태 없이 부드러운 융단 위를 걷는 것처럼 진행되었다 하여 흔히 '벨벳 혁명'이라 한다. 1993년 1월부터 체코슬로바키아로 양분되었는데 이 일도 내전 없이 진행되어 '벨벳 이혼'이라고 부른다.

벨벳 이혼 이후 프라하는 새로운 체코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1995년부터 프라하에 고층건물이 대량으로 지어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에 프라하는 다시 유럽의 중요한 문화 중심지가 되었고 특히 세계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2000년 프라하에서 국제통화기금(IMF) 및 세계은행(IBRD) 연례총회가 열렸는데 이때 반(反)세계화 폭동이 일어났다. 2002년 여름 프라하는 홍수를 당해 건물과 지하 교통 시스템을 손상시켰다.

프라하는 2016년 하계 올림픽 유치에 나섰지만 대상 도시 후보 명단에 오르지 못했다. 2009년 6월 세계 경기침체로 인한 재정압박의 결과로 프라하의 관계자들은 2020년 하계 올림픽 유치 계획을 취소했다.[4]

경제[편집]

프라하의 경제는 체코 국내총생산(GDP)의 25%를 차지한다. 체코에서 가장 높은 성과를 내는 지역이다. 1990년 이후 도시의 경제구조는 제조업 중심에서 서비스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제조업은 제약, 인쇄, 식품 가공, 운송 장비 제조, 컴퓨터 기술, 전기 공학과 같은 업종이다. 서비스 분야에서는 금융 및 상업 서비스, 무역, 음식숙박업, 행정 등이 가장 중요하다. 서비스가 고용의 약 80%를 차지한다.

관광은 프라하 경제의 중요한 부분이다. 체코 전체 관광 수입의 절반이 프라하에서 얻어진다. 프라하의 숙박시설은 약 7만3천 개 베드 규모이며 그 대부분인 5만1천 개가 1990년 민주화 이후에 지어졌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 이 도시는 할리우드 영화와 발리우드(Bollywood) 영화의 인기 있는 촬영지였다. 촬영배경인 건축물이 품격 있고 제작비용이 싼 데다 영화 인프라가 잘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교통[편집]

프라하의 교통수단 가운데 대중교통이 52%를 차지한다. 프라하는 연간 누적 계산으로 12억 명의 여객이 있을 정도로 세계에서 대중교통 이용률이 높은 도시이다. 약 300개의 버스 노선과 34개의 전차 노선을 가지고 있다. 또 페트린 언덕, 므라조브스카(Mrázovka) 언덕, 트로야(Troja) 동물원 등 3개소에 케이블카가 있다.

프라하 전차 시스템은 세계에서 12번째로 긴 구간인 142km이며 운행 차량은 857대로 모스크바와 부다페스트에 이어 세계에서 3위의 규모이다. 이 시스템은 연간 누적 계산으로 3억6천만여 명의 승객을 수송하는데 이는 부다페스트, 취리히 등과 더불어 최고 수준이다.

메트로, 전차, 시내버스, 환전소, 여객선 등 모든 서비스는 지불 증명제로 운영되는 공통 승차권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서비스는 프라하 공공 교통 회사와 몇몇 다른 회사가 운영한다. 최근 프라하 통합운송(ROPID) 지역조직이 블타바강에서 페리호 운항을 프랜차이즈화하고 있는데 이 역시 일반 운임과 함께 대중교통체계의 일부분이다.

프라하의 철도역은 체코 철도 체계의 중심점이다. 전국 각지와 해외 각지로 노선이 이어지고 있다. 프라하에서 베를린, 뮌헨, 함부르크, 뉘른베르크, 드레스덴 등 독일 대도시에 연결된다. 오스트리아, 그라츠, 린츠와 폴란드의 바르샤바, 크라쿠프,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와 코시체,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스위스의 취리히와도 연결된다. 여행시간은 드레스덴까지 2시간, 러시아 모스크바까지는 28시간이 걸린다. 프라하의 주요 국제 철도역은 흘라브니 나드라지(Hlavni nádrazyi)이다.

바츨라브 하벨(Václav Habel) 국제공항은 2018년 1680만 명의 승객을 태워 중부 유럽에서 가장 붐비는 공항으로 나타났다. 이 공항은 유럽 전역에서 운항하는 항공사인 스마트윙스(Smartwings)와 체코 항공의 허브다. 프라하의 옛 공항인 크벨리(Kbely) 공군 공항도 여전히 국제공항으로 사용된다. 이 공항엔 프라하 항공 박물관이 있다. 인근 레트냐니(Letňany) 공항은 주로 민간 항공과 에어로클럽 항공에 이용된다.

관광[편집]

소련 독재체제인 '철의 장막'이 1990년 무너진 이후 프라하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 중 하나가 되었다. 프라하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유럽의 다른 주요 도시들보다 훨씬 적은 피해를 입었다. 다행히 대부분의 역사적 건축물이 보존되었다. 프라하는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네오르네상스, 네오고딕, 아르누보, 입체파, 신고전주의, 초현대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이 세계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형성된 도시이다. 프라하는 풍부한 역사 유적 덕분에 2017년 현재 매년 840만 명 이상의 해외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필수 관광지로는 프라하성, 비투스(Vitus) 성당, 시내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블타바(Vltava)강에 놓인 카를 다리, 바로크 양식의 성니콜라스(Nicholas) 성당, 바로크 양식 요새 건물의 일부인 피세크(Písek) 문, 페트린(Petřín) 언덕 꼭대기에 있는 높이 64m의 페트린 전망대, 민주화 운동의 성지인 바츨라프 광장, 존 레논 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박물관, 종교개혁가 얀 후스(Jan Hus) 동상, 천문시계, 고딕 양식의 유대인 회당 시나고그 등이 꼽힌다. 프라하 천문시계는 1410년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세계에서 셋째로 오래된 천문시계이다.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천문시계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술집 중 하나인 U 메드비드쿠(Medvídků)는 1466년에 설립되었다. 2008년에 알레그로(Allegro) 레스토랑은 중부 유럽의 옛 공산주의 지역 전체에서 최초로 미슐렝 별을 받았다. 레스토랑은 2011년까지 그 별을 유지했다. 2018년 현재 프라하에는 라 데귀스타시옹 보엠 부르좌즈(La Degustation Bohême Bourgeoise)와 필드(Field) 등 2개 레스토랑이 미슐렝 별을 받은 식당이다. 또 저렴한 가격에 맛있는 음식을 파는 대중식당에 주어지는 미슐렝의 빕 구르망(Bib Gourmand) 대상 식당도 비스트뢰트(Bistrøt) 104, 디비니스(Divinis), 에스카(Eska), 마소 아 코블리하(Maso a Kobliha), 나 코프치(Na Kopci), 산스호(Sansho) 등 6개가 있다.

말라스트라나(Malá Strana), 스타레므네스토(Staré Město), 지즈코프(Žižkov), 누슬레(Nusle) 등 프라하 시내 각 지역에는 수백 개의 식당, 술집이 있다. 특히 체코 맥주를 주로 파는 술집이 많다. 프라하에서는 매년 5월 17일간 체코 맥주 축제가 열린다. 이 축제에서는 70여 개 브랜드의 체코 맥주를 맛볼 수 있다. 또한 1년 내내 몇 개의 소규모 맥주 축제가 열린다.

체코 맥주는 역사가 길며 993년 브레브노프(Břevnov) 수도원에서 양조되었다. 프라하에서 생산되는 전통 브랜드 맥주는 스타로프라멘(Staropramen), U 플레쿠(Fleků), U 메드비드쿠(Medvídků), U 트리 루지(Tří růží), 스트라호프(Strahov) 수도원, 브레브노프 수도원 등이다.[5]

지도[편집]

유럽 국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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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프라하〉, 《위키백과》
  2. 프리하(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3. 프라하(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4. 프라하〉, 《요다위키》
  5. 프라하〉,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동유럽 같이 보기[편집]

동유럽 국가
동유럽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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