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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무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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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手搏)은 한국의 전통 무술 중 하나로, 다양한 무술 기술과 철학을 포함한 고유한 전투 예술이다. 수박은 주로 발차기, 손기술, 그리고 몸싸움을 포함하여 다양한 공격과 방어 기술을 통해 상대를 제압하는 데 중점을 둔다. 고대 한국에서부터 전해져 내려온 무술로, 현대에는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고 발전되었다.

개요[편집]

수박은 주로 을 써서 상대를 공격하거나 수련을 하는 한국 전통의 맨손무예 수벽치기이다. 수벽치기 · 수박(手拍) · 수벽타(手擘打)라고도 한다.

수박이나 수벽은 모두 손뼉을 가리키는 말로 추측되며, 그것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여러 표기가 나온 것이다. 이런 명칭은 수벽치기가 손바닥을 마주치면서 수련하는 방법을 기초로 삼는 데서 온 것으로, 발 사용을 기본으로 삼는 택견[托肩]과 대조를 이룬다.

변변한 무기를 갖지 못했던 원시시대에는 짐승을 잡거나 상대와 겨룰 때 발로 차거나 으로 치거나 붙들어서 둘러메치기도 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경험이 쌓임에 따라 점차 전문적인 부문으로 세분화되고 세련미도 더해져서 택견이나 수박, 씨름으로 발전해 왔을 것이다. 따라서 이 세 가지의 무예는 한몸에서 나온 부분인 셈이다.

수박이 한국에서 언제부터 행해졌는지 분명히 말하기는 어려우나, 4세기경 고구려 무덤의 벽화(만주 집안현의 무용총이나 황해도 안악의 미천왕 무덤)에 씨름과 다른 모습이 그려져 있어 이것이 수박이나 택견을 묘사한 것으로 여겨지므로, 삼국시대에 이미 유행했으리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또한, 18세기에 나온 ≪무예도보통지 武藝圖譜通志≫에도 이에 관한 상세한 설명과 그림이 실려 있는데, 고구려 벽화의 그림과 매우 흡사하게 묘사되어 있다.[1]

상세[편집]

수박(手搏)이란 고대부터 한반도에서 전래된 맨손 격투기의 명칭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며 실제로 한국 국내 무술인들이 한국의 맨손 격투기의 원형이라고 전하고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 중 안악 3호분과 무용총의 '수박도'는 이 수박을 그린 그림이고, 백제의 금동대향로나 신라의 무사용 토우를 통해서도 다양한 맨손 무예를 연마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석굴암 입구의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이 취한 자세 역시 수박을 표현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후 고려시대에 '수박희'라는 명칭으로 이어져 내려와 크게 발달했다. 본래 천민 출신인 이의민은 수박 경기에서 맹활약해서 의종의 눈에 띈 것이 출세의 시작점이었다. 무신정변 직전인 1170년 8월 30일에는 의종이 흥왕사에서 무신들을 위로하고자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戱) 대회를 열기도 했다. 두경승은 일찍이 국왕의 친위대인 공학군에서 근무할 때 수박을 잘하는 사람들과 같은 부대에 편입됐으나, 장인 문유보가 "수박은 천한 기술이므로 장사가 할 일이 못 된다"라며 반대하자 가지 않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럼에도 따로 수박을 익혔던 것인지 1190년 무렵에는 이의민과 격투 실력을 겨룰 정도였다고 한다.

최충헌 또한 1209년 9월 9일 중양절을 기념해 도방의 힘있는 이들로 하여금 수박을 하도록 하고 승자에게 벼슬을 내린 적이 있으며, 충혜왕 대에는 이 직접 행차하여 수박희를 구경했다는 기사가 세 차례 나타난다. 이를 통해 고려 후기에 이르면 수박이 격구, 석전과 비견될 만한 규모의 국가적 행사로 자리잡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초기에도 풍습이 그대로 계승되어 궁중과 민간에서 성행했을 뿐 아니라, 무인 등용의 기준이 되기도 했다. 1397년에 반포된 《경제육전》에서는 수박을 무사 선출 시험의 일종으로 지정했으며, 1410년 1월 21일에는 병조와 의흥부에서 수박을 통해 방패군에 보충할 인원을 선발했다. 이외에도 태종·세종 대에는 주로 갑사와 방패군을 대상으로 한 수박 경기가 자주 개최되었다. 세조 대에 이르러서는 향리와 관노들이 수박을 통해 신분 상승을 노리는 일이 많아졌을 정도로 그 인기가 상승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충청도 은진현과 전라도 여산군의 경계에 있는 작지(鵲旨)라는 마을에서는 매년 7월 15일(백중)마다 두 도의 백성들이 모여 수박으로 승부를 다투었다고 한다. 이처럼 15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명절 놀이로 자리잡을 만큼 널리 유행했던 수박은 16세기 이후 문헌상으로 나타나지 않다가, 1790년의 《무예도보통지》에서 비로소 다시 언급된다. 1798년의 《재물보》에는 "수박과 각력은 오늘날의 탁견과 같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조선 후기에는 수박이 이미 택견을 비롯한 여러 맨손 무예로 분화되었을 것이라 유추할 수 있다.[2]

기법[편집]

고려시대에도 수박은 매우 중요한 무예로 여겨져 무사들은 반드시 이의 기법을 익혀야 하였다. ≪고려사≫ 열전 정중부전(鄭仲夫傳)에 따르면 의종이 보현사(普賢寺)에서 무사들의 수박경기를 구경하였고, 최충헌전(崔忠獻傳)에도 수박에서 이긴 군사에게 벼슬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도 군대 안에서 열병이나 기타의 중요 행사가 있을 때 수박 겨루기를 벌였고, 민간에서도 이를 명절놀이의 하나로 여겨 7월 백중날 연산(連山)의 작지(鵲旨)에서는 충청도와 전라도의 선수들이 모여 큰 대회를 열기까지 하였다.

≪무예도보통지≫에는 경기방법에 대한 내용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수박에는 신법(身法) · 수법(手法) · 각법(脚法)을 기초로 하는 25법이 있었고, 그 밖의 비법이 10종이나 되며, 치는 술법에도 운혈(暈穴) · 아혈(亞穴) · 사혈(死穴) 등이 있어 치는 부위에 따라 상대가 기절하거나 어지럼증을 느끼거나 하는 등 수박술(手搏術)의 변화가 무궁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18세기에 들어와 큰 변화를 겪은 듯하다.

이에 대하여 ≪동국여지승람≫에서 "전에는 서로 상대하여 갑이 돌마세(揬馬勢)를 취하면 을은 요단편세(拗單鞭勢)로 대하고, 갑이 칠성세(七星勢)로 덤비면 을은 기룡세(騎龍勢)로 막아서 공격과 수비에 모두 자연세를 이용하였으나 지금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 자세만을 취하니 본래의 뜻에서 어그러진다. 더구나 갑의 어떤 동작을 을이 곧 뒤따라 취하여 흉내뿐인 그림자 경기처럼 되었다."고 한탄하였다.

이것은 아마도 예전에는 전투적이고 실용적인 면에 치중하여 갖가지 기술을 변화무쌍하게 이용했으나 이 무렵에 이르러서는 체조처럼 일정하게 약속된 동작에 따라 행하게 되었던 때문이 아닌가 한다.

따라서 당시의 수박은 체계화 내지 정리화되기는 하였으나 그만큼 현실감이나 변화감이 약화되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 뒤 없어진 것으로 알려졌다가 최근에 택견 전승자 신한승(申漢承)이 수박의 계보를 추적, 발굴하였으나 1987년에 세상을 떠남으로써 제자 육태안(陸泰安)이 이를 전수받아 일반에 선보이고 있다.[1]

송도 수박[편집]

수박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측으로 이름이 좀 난 곳은 송도수박을 계승한다는 송준호가 있는데, 선친 송창렬(1932 ~ 2017)이다. 이들은 송도 수박을 전통 무예라 말하고 있는데, 송준호와 송창렬이 주장하는 계보를 살펴보면 전통 무예로서의 존재 자체는 상당히 신빙성이 높다. 송창렬은 이것을 천일룡이란 사람에게 배웠다고 한다. 천일룡은 일제강점기때 부유한 집안이었던 송창렬 옹의 선친이 하던 공장의 공장장이었는데, 본래는 보부상이었고 주먹을 꽤나 쓰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어릴 적 송창렬이 하도 학교에서 일본인 학생들에게 맞고 오자 송창렬의 부친이 천일룡에게 싸움 좀 가르치라고 했다. 그래서 그 때부터 개성에 있던 여우골이란 곳에 가서 송창렬은 천일룡에게 무술을 배웠고 이후엔 되려 일본인 아이들을 패고 다녔다고 한다.

천일룡은 송창렬에게 수박을 가르치면서 이건 아주 오래된 것이고 '수박타'라고도 했다고 한다. 이후 그렇게 매일 배우다가 남북이 갈리고 나서 천일룡은 고향인 북한으로, 송창렬은 부산에 정착하게 되면서 이후로 영영 보지 못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그로 인해 송창렬은 수박을 완전히 배우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그의 아들인 송준호가 학교에서 두들겨 맞고 오자 직접 가르쳤다고 한다. 송준호는 다른 수박의 모습들을 찾기 위해 신한승처럼 전국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명성황후의 조카이자 개성 출신으로 대한체육회 초대 회장의 친형 민완식을 만나 민완식 선생이 자신이 했던 무술과 송준호가 하는 수박이 같다고 증언했으며, 춤으로써의 수박을 하는 김학현을 만나 사사하는 등 여러 수박을 섭렵했다고 한다.

무예진흥법에서는 송도 수박이 복원무예로 분류되어 분기탱천하고 이를 시정 요구 중이라고 한다. 중국의 조선족까지 오가며 조사한 송도 수박의 계보를 보면 부정적인 여론과 달리 전통 무예일 가능성도 꽤 있기는 하다. 무예진흥법에서는 1종목 1단체로 전승종목으로 분류되었고 대한체육회 발간 <2018 전통무예 백서>에 씨름, 국궁, 수박, 택견 4가지가 전승된 무술이라고 분류했다. 태권도진흥법에 의해 설립된 법정기관인 태권도진흥재단 산하 국립태권도박물관에 송창렬의 사진과 수박 소개 패널이 설치되었다. 2017년 문화재청 2019국가무형문화재 조사계획에 의해 현장조사가 되었다.

2001년 8월 18일, 송도 수박은 대한수박협회아카이브라는 이름으로 단체를 조직했다. 한국에서 송도 수박이 인정받지 못하자 대한수박협회는 2015년에 중국 연변으로 건너가 조선족 무예, 무용으로 중국문화재로 신청한다고 한다. 2016년 들어서는 택견을 걸고 넘어지면서 택견이 사기 문화재라는 등의 주장을 하고 있다. 단, 그 실상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비방은 충주택견을 향한 것이며 표현에 다소 과격함이 있지만 수박협회의 행동이 전부 근거없는 것이라고는 하긴 힘들다.[2]

실체[편집]

하지만 이들이 현재 택견을 물고늘어지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송도수박을 검증하면, 그 자료가 부족하다는 택견에 비해서도 믿을 만한 문헌사료나 증언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예를 들어 송도수박 측은 옛 문헌에 나타난 택견에 관한 기술들을 두고 모조리 현재의 택견과 전혀 무관한 것이라 주장하고 있는데, 그런 식이면 전래 문헌의 수박과 송도수박의 관련성을 부정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송도수박 측은 재물보에 빤히 "예전의 수박(+각력)이 지금의 탁견과 같은 것"이라고 한 문장조차 한사코 그런 뜻이 아니라고 우길 정도로 막무가내인데, 그런 잣대를 송도수박에 동일하게 적용하면 그것의 역사성을 증명하기도, '수박희', '수벽치기' 따위와 동류의 기예임을 증명하기도 불가능해진다.

당장 송도수박이란 명칭부터 송준호의 창작이다. 송도수박 측은 송도수박이란 명칭이 조선상고사에 나오는 것이며 송준호가 만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조선상고사에서 수박이 언급되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송도(松都: 開城)의 수박(手拍) 이 곧 '선배' 경기의 하나이니, '수박'이 지나에 들어가서 권법(拳法)이 되고, 일본에 건너가서 유도(柔道)가 되고, 조선에서는 이조에서 무풍(武風)을 천히 여긴 이래로 그 자취가 거의 전멸하였다.

보다시피 신채호는 '송도수박'이라는 고유명사를 언급했던 것이 아니라 개성 지역에 남아 있는 수박이란 뜻으로 "송도(개성의 별칭)의 수박"을 운운했던 것뿐이다. 당연히 송준호를 이를 보고 송도수박이라는 명칭을 창안했을 것이다.

또한 송덕기는 당시 노인들에게 조선말에 성행한 택견에 대한 기억이 아직 생생할 때인 1950년대에 경무대에서 택견을 시연한 일이 있었던 반면에, 송창렬이 고래의 수박을 전수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증언 대부분은, 송창렬 본인 아니면 특수관계인인 송준호에게 나온 것이며 공개 시기도 2000년대로 너무 늦다.

송준호가 2010년에 작성한 글에 따르더라도 송창렬의 기능 보유를 증언하는 인물은 2002년에야 등장하며 그나마도 글을 쓸 당시에 고인인 사람이었다. 진술 내용도 송창렬의 동작이 본인이 예전에 누구한테 배운 것과 같다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기 짝이 없다.

만약에 전통무술 행사에서 만난 사람이 "우리 아버지가 하시는 것이 선생님이 예전에 배우신 것과 비슷하지 않느냐"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물어본다면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혹여 그런 식의 유도신문이 있진 않았는지, 정확히 어떤 질문을 했으며, 대답한 이가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에 대해 동일성을 인정했는지 등이 밝혀져야 그와 같은 진술을 중요한 증거로 활용할 수 있다. 그리고 질문자는 그 문제에 이해관계가 없는 제3자인 것이 유리하다. 그런 부분들이 결여된 진술도 전혀 가치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것들이 충족된 진술에 비해 현저히 가치가 떨어짐이 당연하다.

저 오진환의 진술을 비롯해 송도수박의 정통성을 지지하는 외부 증언들은 전부 대한수박협회 회장 송준호가 '발굴'한 것들이며, 송준호를 거치지 않은 독립적인 증언은 단 하나도 없다. 송창렬에게 수박 기술을 가르쳐 줬다는 천일룡이라는 인물도 하필이면 한국 전쟁 당시에 북에 남은 사람이라 추적이 안 된다.

문제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다음은 2009년에, 국민체육진흥공단에서 '전통무예진흥법' 시행에 따른 실태 조사를 했을 때 수박협회 측에서 작성한 보고서의 일부다.

수박 기법 수련 순서

혼자 익히기: 서기- 옆구리치기- 날숨,들숨하기- 어깨치기- 게걸음(별법)- 건들대기- 옆파리치기- 기움받기,풀기- 이마치기- 들어막기- 곰손걸며치기- 잡고치기- 뿌리치기- 떼밀기- 눌러잡고 들어밀기- 허벅치기(넘어뜨리기)- 수박치기- 제팔치기- 만자풀이- 무릎세우기- 앞,뒤로 흔들기- 궁글리기- 배치기- 엉덩이들이대기등이며

마주 익히기: 손목부딛기를 중심으로 기술을 주로하여 손질과 발질 그리고 넘어뜨리기(용쓰기)를 수련한다. 이후 수박춤을 익힌다.

택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이는 문화재 택견의 수련 체계를 모방한 것이다. 혼자 익히기 - 마주 메기기 - 본때뵈기 순서로 짜여진 문화재 택견의 수련 방식이 혼자 익히기 - 마주 익히기 - 수박춤으로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다.

물론, 대개 두서가 없는 전통문화의 교습 과정을 정리하고자 새로이 합리적인 수련 체계를 세운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 수립을 위해 기존의 문화재를 참고한다고 해도 문제는 안된다. 그런데 수박협회는 대외적으로 전통문화에 외래적, 근대적 요소가 유입하는 것은 절대 용인할 수 없다는 식으로 굴며, 더구나 그것을 빌미로 문화재 택견을 맹렬히 공격하는 단체가 아니던가? 송도수박 측이 '택견의 무형문화재 지정이 취소되어야 하는 이유'로 나열하는 것을 자기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고 있으니, 외부인으로서는 믿음을 주기 힘들 수밖에 없다.

설령 진짜로 저 인터뷰를 통해 송창렬이 실제로 그런 말을 했고, 그게 거짓이 아니라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송준호는 왜 본인이 보유한 기예를 천일룡이 선친에게 일러준대로 수박타, 수박치기라고 하지 않고 수박이라고 하는 것일까? 수박타나 수박이나 한끗 차이니 그게 그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문화재 택견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것을 보면 송도수박 측은 '오리지널리티의 왜곡 / 변형'에 대해 매우 민감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지 않은가.

현재 송준호 등이 어떤 이름을 내세워서 활동하고 있는가를 상기하면, 이는 송창렬의 기예를 옛 문헌에 나오는 수박, 특히 조선상고사에 나오는 "송도의 수박"과 연관지어서 유구함을 선전하기 위한 의도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는 뒤집어서 생각하면 송 부자가 보유한 기예의 유구함을 입증할 자료가 그만큼 부족하다는 것일 것이다.

괜히 무형문화재 지정에 번번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렇듯 원형성이나 전승 사실에 대한 증거 자료 면에서 부실하기 짝이 없는 송도수박이 문화재 지정을 위한 예비조사라도 받았다는 것은 결국 문화재청의 심사가 엄정하지 않았다는 뜻밖에 되지 않으며, 만약에 송도수박이 택견에 대해 주장하는 엄정함을 송도수박에 적용하는 순간 무조건 탈락이다. 충주 택견 측에서 송도수박의 어그로에 이렇다 할 반응이 없는 것도 그런 널널함이 유지되는 한 택견이 퇴출될 일은 절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태권도계는 자신들의 무술이 가라테의 변용이라는 과거사를 세탁하기 위한 역사 왜곡으로 워낙 악명이 자자하기 때문에 태권도박물관에 송창렬 소개 패널이 설치됐니 하는 사실도 송도수박의 역사성을 입증하는 증거가 되기 힘들다.

만약에 수박 내지 수박타에 관한 송 부자의 증언에 추호도 왜곡이 없다면 송도수박 측으로는 이와 같은 문제제기들이 굉장히 억울한 일일 수도 있다. 절멸 직전 상태인 무형문화재의 보유자가 원형성이나 전승 문제에 대해 대외적인 공인을 얻기에 충분할 만큼 다양한 증거를 제시하기 힘든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송창렬이 소싯적인 1940년대에 천일룡이라고 하는 장사에게 체계적으로 무술을 배웠다는 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 그 무술의 이름이 '수박타'라는 것, 그것이 근래에 출현한 것이 아닌 고구려의 혼이 서린 "송도의 수박"이 전승된 기예라는 것, 송 부자가 그 '송도수박'이란 것을 일말의 첨삭이나 변형 없이 보존했다는 주장 등이 모두 참일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이를 뒷받침할 증거가 턱없이 부족하다. 이를 타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증거의 보강이다. 애먼 다른 무형문화재를 걸고 넘어지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2]

문화재 택견 측과의 분쟁[편집]

이들은 원래 송도수박의 무형문화재 채택을 위해 힘써 왔으나, 그것이 여의치 않자 이제는 택견을 무형문화재에서 퇴출시키고자 문화재청에 지속적으로 민원을 제기하는 한편 인터넷 게시판 이곳저곳에서도 언론 플레이를 하고 있다.

송도수박 측이 문제삼는 것은 택견이 제대로 된 무술이 아니라는 수준이 아니다. 이들은 아예 택견이 전통 문화라는 사실을 부정한다.

사실 이들의 주장 중에서도 문화재 택견(충주 택견) 측에서 주장하는 전승 계보도가 의심스럽다는 것이나 신한승이 문화재 채택을 위해서 원형에 없는 여러 외래적 요소(단급제도, 투로 등)를 삽입했다는 것 등(문화재청에서 태권도와 같은 형식과 체계제도를 만들어서 협회로서 기능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를 택견 그 자체를 훼손한다고 주장)에 대해서 주장하였고 , 이미 택견계 내부에서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문제는 이들이 그런 부분을 빌미로 아예 택견 자체를 가라데를 변형한 날조된 전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택견에 현대에 차용한 요소를 제거한다고 해도, 송덕기가 남긴 택견 기술과 택견판에 대한 경험담들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고, 송덕기 본인이 감수자 또는 시연자 등으로 직접 참여한 택견 관련 저서들이나 송덕기로부터 직접 택견을 배운 제자들의 증언들을 보건대 택견이 하나의 체계를 갖춘 무술이자 전통문화라는 증거는 부족하지 않다.

사실 어떤 무형문화가 옛날과 같지 않다고 해서 전통임을 부인하는 자체가, 전통이란 개념에 대한 몰이해에 비롯된 것이다. 봉산탈춤에는 프랑스, 독일 같은 서양 나라들이 언급되고, 판소리는 기존의 12마당만 불려지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새로운 노래들이 창작되고 있으며 그 중에는 스타크래프트를 주제로 한 것도 있다. 살아 숨쉬는 모든 전통은 변화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변하기 때문이다.

한편 송도수박 측은 자신들의 끈질긴 민원 내지 로비 행위를 통해 일부 관련 부처의 택견 관련 설명이 바뀐 것을 대단한 성과라도 되는 양 선전하며 그것을 다시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는 근거로 삼고 있는데, 당연히 그런 식으로 행정기관이 민원인의 압력에 굴복하는 것은 학문적 진실과는 무관하다.

사실, 현 택견 기능 보유자인 정경화가 수박의 무형문화재 지정을 위한 추천인을 한 적이 있을 정도로 원래 문화재 택견 측과 송도수박 측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구글링하다 보면 송창렬과 정경화가 같이 찍은 사진도 나온다. 전술한 것처럼 송도수박 측이 수박의 문화재 지정을 위해 문화재 택견을 참고했음도 역력하다. 그러다 2016년부터 사이가 틀어져 서로 원수처럼 되어 버렸다. 서로 원수라기에는 송도수박 측이 일방적으로 어그로에 끄는 것에 가깝지만,4 송도수박 측에서는 문화재 택견 측이 수박 무형문화재 지정을 방해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자세한 사정은 본인들만이 알 일이다.

단, 송도수박 측이 예전에 문화재 택견을 열심히 참고하고 연구한 것이 지금에 와서는 그 사람들 약점을 잡는 데 활용되고 있음은 분명하다.[2]

특징[편집]

  • 발차기와 손기술
수박은 다양한 발차기와 손기술을 통해 상대를 공격하고 방어하는데 중점을 둔다. 특히 발차기의 경우 다양한 각도와 방식으로 공격을 가할 수 있어 매우 효과적이다.
  • 전신 운동
수박은 전신을 사용하는 운동으로, 체력을 기르고 근력을 강화하는 데 탁월하다. 몸의 모든 부분을 활용하여 기술을 수행하기 때문에 균형 잡힌 신체 발달이 가능하다.
  • 전통과 철학
수박은 단순한 격투 기술을 넘어, 예의와 존중, 인내심과 같은 무술의 정신과 철학을 중시한다. 이를 통해 수박 수련자는 기술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성장할 수 있다.
  • 민첩성과 균형
수박은 빠른 움직임과 균형을 강조한다. 상대의 공격을 피하거나 반격을 가하기 위해 민첩하게 움직이며, 균형을 유지하여 효과적인 기술을 구사할 수 있다.
  • 자기 방어
수박은 자기 방어 기술로도 뛰어나며, 다양한 상황에서 자신의 몸을 보호할 수 있는 기술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는 실생활에서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동작[편집]

기본 자세
  • 정립(正立): 자연스럽게 선 상태로 중심을 잡고 동작 준비한다.
  • 저립(低立): 무릎을 약간 굽혀 하단 중심을 안정화한다.
  • 측립(側立): 한 발을 옆으로 내딛어 방향 전환을 준비한다.
공격 동작

손을 사용하는 동작

  • 정권타(正拳打)
  • 주먹을 쥐고 직선적으로 상대를 가격한다.
  • 주요 목표: 상대의 얼굴, 흉부.
  • 장타(掌打)
  • 손바닥을 이용해 밀치거나 타격한다.
  • 주요 목표: 복부, 턱.
  • 권횡타(拳橫打)
  • 주먹을 가로로 회전시키며 측면을 타격한다.
  • 주로 상대방의 옆구리나 턱 공격한다.

발을 사용하는 동작

  • 정각차기(正脚蹴)
  • 앞발로 직선적으로 찰 때 사용한다.
  • 주요 목표: 하단의 다리, 중단의 몸통.
  • 측각차기(側脚蹴)
  • 옆으로 회전하며 발의 옆면으로 공격한다.
  • 주요 목표: 갈비뼈, 턱.
  • 낮은 발길질
  • 발을 낮게 차서 상대의 무게중심을 흔든다.
  • 주로 무릎이나 발목을 겨냥한다.
방어 동작
  • 상단막기: 손으로 머리 위쪽을 보호하며 위에서 오는 공격 차단한다.
  • 중단막기: 팔을 가로로 뻗어 중단 높이의 공격 방어한다.
  • 하단막기: 팔을 아래로 내려 다리나 발을 막는다.
  • 회전 방어: 몸을 비틀어 상대 공격의 방향을 흘려내거나 피한다.
회피 동작
  • 후퇴 반보: 한 발을 뒤로 빼며 상대 공격을 피한다.
  • 측면 이동: 몸을 옆으로 돌려 공격 방향에서 벗어난다.
  • 몸 비틀기: 중심축을 유지하며 몸을 돌려 회피와 반격 준비한다.
연결 동작(콤비네이션)
  • 타격 - 회피 연결: 정권타를 날린 뒤 몸을 낮추며 측면으로 이동한다.
  • 차기-막기 연계: 발차기 후 즉시 팔을 올려 상대의 반격 방어한다.
  • 유연한 움직임: 정권타와 장타를 연속적으로 연결하여 공격과 방어를 조화한다.
리듬과 흐름
  • 수박의 동작은 끊김없이 이어지며, 리듬을 유지하면서 상대의 의도를 교란한다.
  • 빠름과 느림의 조화를 이루며 상대에게 예측 불가능한 동작 연출한다.
수박 동작의 특징
  • 모든 동작은 단순하면서도 실용적이며, 빠르게 익히고 실제로 적용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
  • 공격과 방어의 균형을 중시하며, 중심 이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전환이 가능하다.
  • 전통 철학을 기반으로 한 절제와 내적 강인함의 표현이 강조된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1.0 1.1 수박〉,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 2.0 2.1 2.2 2.3 수박(무술)〉,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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