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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치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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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치먼드
리치먼드 위치

리치먼드(Richmond)는 미국 버지니아주주도이다. 리치몬드라고도 쓴다. 리치먼드는 미국의 수도워싱턴디씨로부터 남쪽으로 두 시간 거리에 있으며 남북전쟁 당시 아메리카 연합국(아메리카 남부 연합)의 수도였다. 인구는 약 23만 명으로 버지니아주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광역권 인구로는 126만 명으로 버지니아주에서는 워싱턴디씨 광역권과 버지니아 비치-노퍽-뉴포트 뉴스 광역권에 이은 세 번째의 광역도시권이다.[1]

개요[편집]

리치먼드는 미국 버지니아주의 동쪽 피드먼트대지와 해안평야의 경계에 있는 제임스강(江)의 폭포선 도시이다. 피터즈버그·헨리코군의 일부, 체스터필드군·하노버군와 함께 대도시권을 이룬다. 1607년 크리스토퍼 뉴포트(Christopher Newport)가 이끈 영국의 탐험대가 처음 탐험하였고 1644년 찰스요새, 1645년 모피, 피혁, 담배를 위한 교역소가 설치되었다. 1737년에는 윌리엄 메이오(William Mayo) 대령이 도시를 건설하였다. 1780년에 임시로 주도가 되었다가 1782년 5월에 시가 되면서 공식으로 주도가 되었다. 지명은 제임스강이 영국 템스강과 비슷하다고 하여 템스강변에 있는 리치먼드어폰템스에서 딴 것이며, 지금도 두 도시는 자매도시로서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독립혁명 때는 영국군에 약탈당하였고 1860년까지 6개의 철도가 들어왔다. 남북전쟁 때 남부연방군의 수도가 되었고 1865년 4월 3일 북군에 점령당하였다. 현재는 담배 거래의 중심지인 동시에 담배제조, 출판, 인쇄, 제지, 기계, 화학, 비료, 식품가공 공업이 성하다. 리치먼드대학교(1830), 버지니아유니언대학교(1865), 버지니아주립대학교(1968) 등의 교육시설과 도서관, 미술관, 박물관 등이 있고 부근에 리치먼드국립전장공원이 있다. 미국독립혁명 때인 1775년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가 세인트존스교회에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유명한 연설을 한 곳이기도 하다. 거리에는 남북전쟁 당시의 유적 등 사적이 많이 남아 있다.[2]

역사[편집]

유럽인 정착자들이 도착하기 전에는 포와탄 동맹의 인디언 종족들이 리치먼드 지역에 살고 있었다. 도시의 역사는 1607년에 크리스토퍼 뉴포트 선장이 리치먼드 대지가 되는 지역에 영국인 정착자들을 이끄는 탐험에서 시작된다. 2번의 정착은 실패하였고, 1644년 포트 찰스 요새의 건설이 새 정착자들과 그들의 공동체들이 담배, 모피의 교역지로 끌어들였다.

1742년에 읍으로 설립되었을 때 인구가 250명 밖에 안되었다. 1780년에 버지니아 주가 주도를 윌리엄스버그로부터 중앙에 위치한 리치먼드로 옮겼다. 리치먼드에는 그때 주민들이 684명 밖에 안 살았으며, 1782년에 도시화되었다.

1781년 미국독립전쟁 동안에 베네딕트 아놀드가 이끄는 영국군들이 리치먼드를 공습하였다. 아놀드는 배신자로 변절하여, 영국군에 입단한 미국인 장군이었다. 그의 부하들이 리치먼드를 약탈하고, 몇채의 건물들을 불태웠다.

전쟁이 끝난 1783년에 리치먼드는 번영의 시기로 들어갔다. 1790년에는 인구가 3,761명에서 1800년에는 5,737명으로 도달하였다. 도시는 담배와 노예 거래의 중심지로 발달하였다. 19세기 중반에는 철도가 놓이면서 리치먼드는 상업과 산업의 중심지로 빠르게 번창하였다. 1860년에는 약 38,000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1830년대부터 남북 전쟁이 시작될 때까지 리치먼드는 미국에서 중요한 노예 시장들 중의 하나였다. 노예 상인들은 매년마다 수천 명의 노예들을 사고 팔았다.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리치먼드는 앨라배마주 몽고메리를 대신하여 남부 연방의 수도가 되었다. 1865년 4월 1일 북군 셰리던 장군의 군대가 남군 비게드 장군의 군대를 격파하여, 이로 인해 남부군 방위의 중심이 깨지고 리치먼드가 북군에게 점령되었다. 남군의 리 장군이 북군의 그랜트 장군(제18대 대통령)에게 항복하여 남북전쟁이 끝났다. 전후에 다시 부흥과 재건에 앞장섰다.

1900년대 초반에는 도시는 많은 산업을 끌어들였다. 1950년에는 230,310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인권 운동자들이 리치먼드를 고발하였는 데, 백인들이 사는 지역이 리치먼드의 흑인 투표인들에 위협을 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1977년에는 흑인들이 시의회에 뽑히는 데, 9석 중에서 5석으로 이겼다. 그해에는 헨리 L. 마시 3세가 첫 흑인 시장으로 뽑혔으며, 1982년까지 그 직에 있었다. 20세기 말부터는 워싱턴 D.C. 광역권이 급속히 성장하면서 버지니아 주에서도 오히려 비중이 줄어들어 있다.[3]

경제[편집]

리치먼드의 시민들은 대부분 연방, 주, 지방 정부와 관련된 일을 한다. 금융업이 도시에서 가장 큰 개인 고용주들이며, 은행, 보험, 크레디트 카드, 중개업 등에 관련된 일들이다. 제조업과 통상업, 다른 서비스업들은 리치먼드 경제의 중요한 업계들이다. 리치먼드의 생산품은 담배, 기계 등을 생산하며, 담배 제품과 식품, 약품 등을 포장하는 편이다. 리치먼드 타임즈-디스패치는 도시의 일간 신문이며, 남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으로 순위에 든다.

교통[편집]

워싱턴 D.C.에서 남쪽으로 160km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도로철도 등이 발달해 있어 항공 수요는 워싱턴 D.C. 쪽으로 빨려들어가는 편이다. 암트랙은 시내 북쪽의 Staples Mill Road Station에 정차하며 Northeast Regional이 하루 5회, 워싱턴, 뉴욕, 보스턴 방면으로 운행한다. 이외에 뉴욕에서 다른 쪽으로 빠지는 열차가 하루 4회 다닌다.

리치먼드 전투[편집]

리치먼드 전투는 미국 남북전쟁 최후의 결전이다. 파이브 포크스 전투(Battle of Five Forks)라고도 한다. 3월 31일 딘위디 코트 하우스 전투 이후, 피켓은 북군 5군단에서 지원군이 도착했다는 것을 알아내고서는 해처스 런의 후방 위치로 퇴각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리 장군은 피켓에게 해처스 런의 후퇴를 중단시키고, 그 보병 사단과 3개 기병 사단으로 파이브 포크스의 교차점을 확보하도록 명령했다. "파이브 포크스"는 화이트 오크 도로와 스콧 도로, 포즈 도로 (혹은 처치 도로), 그리고 딘위디 코트 하우스 도로의 교차로를 말하는 것이었다.

피켓의 부대는 화이트 오크 로드를 따라 통나무와 흙으로 방어선을 약 2.8km 정도 구축하고 기병대로 두 측면을 방어했다. 셰리던의 기습 계획은 전선에 걸쳐 기병으로 가벼운 압박을 하여 남군을 쉽사리 못 움직이게 해두고 가버누어 워렌 소장의 제5군단으로 전부 남군의 왼쪽 면을 집중 공격하는 것이었다. 잘못된 지도 정보로 셰리던은 적의 왼쪽이 실제보다 훨씬 동쪽에 있는 것처럼 믿고 있었다.

남북 전쟁의 막바지인 1865년 4월 1일에 진행된 애퍼매턱스 방면 작전의 일부로 버지니아 피터스버그 근처 딘위디 카운티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는 남군의 마지막 패배를 결정지은 의미에서, 때로는 ‘남부 동맹의 워털루’로 불리기도 하며, 북군의 필립 셰리던 소장이 남군 로버트 E. 리 장군 휘하의 북버지니아 군의 조지 피켓 소장과 싸웠다. 이 전투에서 피켓이 패배하자 리는 피터스버그 근처 참호 선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릴 수 밖에 없었고, 철수를 시작한 후 4월 9일에 애퍼매턱스 코트 하우스에서 항복으로 이어졌다.[4]

버지니아 코먼웰스 대학교[편집]

버지니아 코먼웰스 대학교(Virginia Commonwealth University)는 미국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에 있는 주립대학교이다. 1968년 리치먼드 직업전문학교와 버지니아 의과대학의 통합으로 탄생했다. 버지니아 의과대학은 1838년 리치먼드에 문을 연 햄프턴-시드니 대학 의학부가 전신으로, 1854년 독립하여 버지니아 의과대학이 되었다. 리치먼드 직업전문학교는 1917년 문을 연 버지니아 사회복지학과가 전신이다. 인문과학대학, 경영대학, 예술대학, 교육대학, 의과대학, 간호대학, 약학대학 등 12개 대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216개의 자격증 및 학사, 석사, 박사학위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 버지니아 노화센터, 환경연구센터, 공공정책센터 등 다수의 연구기관들이 있다. 몬로파크 캠퍼스와 버지니아 의과대학캠퍼스 등 두 개의 캠퍼스가 있다. 도서관에는 총 210만 권의 도서와 30만 8,000 권의 전자책, 7만 6,000개의 오디오 자료가 비치되어 있다. 카타르의 에듀케이션 시티에 VCU 예술대학 분교가 있다.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선정한 세계 100대 대학 중 하나인 VCU는 국제교육사무소를 설치하여 유학생들을 지원하고 있다.

2006년 VCU는 버지니아 주 대학들 가운데 최초로 재학생 수가 3만 명을 넘었다. 신입생의 77%, 재학생의 22%가 학교 기숙사 생활을 한다. 2010년 미국국립보건원으로부터 2,000만 달러에 달하는 지원금을 받아 대학의 실험 결과를 환자 치료에 응용하기 위한 전국적 연구 컨소시엄에 합류하였다. 교내에는 미술, 밴드, 치어리딩, 합창, 성가대, 컴퓨터, 드라마, 무용, 동성애, 국제문제, 재즈밴드, 오케스트라, 사진, 정치 등 137개의 동아리가 있다. 인기있는 교내 행사로는 대학 볼링대회, 조직적 시장축제, 불쌍한 굶주린 예술가 축제, 봄향기 축제 등이 있다. 리치먼드의 번화가에서 서쪽으로 2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약 243㎢의 캠퍼스에는 기숙사를 포함하여 158개 동의 건물이 있다.[5]

지도[편집]

미국 남부 행정 지도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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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리치먼드 (버지니아주)〉, 《위키백과》
  2. 리치먼드(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3. 리치먼드, 버지니아주〉, 《요다위키》
  4. 파이브 포크스 전투〉, 《위키백과》
  5.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870805&cid=43142&categoryId=43142 버지니아 코먼웰스 대학교]〉,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북아메리카 같이 보기[편집]

북아메리카 국가
북아메리카 지역
카리브제도 국가
북아메리카 도시 1
북아메리카 도시 2
북아메리카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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