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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비리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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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비리흐
크리비리흐 위치

크리비리흐(우크라이나어: Кривий Ріг, 러시아어: Кривой Рог)는 우크라이나 중부에 위치한 도시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주 남서부에 위치한다. 동유럽의 주요 철강산업 도시로 면적은 407.3km², 인구는 약 60만 명이다. 1775년 5월 8일에 신설되었으며 1919년 시로 승격되었다. 도시 이름은 우크라이나어로 '구부러진 뿔'을 뜻한다.[1]

개요[편집]

크리비리크는 중앙 우크라이나 지역의 드니프로페트롭스크주에 속한 도시로 세계적인 철광석 산지이다. 우크라이나에서 8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며 면적은 2번째이다. 동유럽 최대의 철광 및 제철산업 단지인 크립바스(Kryvbas)의 중심지이다. 군부대의 월동기지 역할을 하던 작은 마을이었으나, 1880년대 철광석이 개발되고 제철 , 제련산업이 발달하면서 1919년 도시로 승격됐다. 크리비리크는 드니프로페트롭스크주 남서부 지역과 인근 키로보흐라드(Kirovohrad)주의 일부 지역에 걸친 철광석 산지 및 제철, 제련산업 단지는 우크라이나 경제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크리비리크는 18세기에 자포로지아 카자크(Zaporozhian Cossacks)에 의해 건설되었다. 크리비리크는 1880년대 초에 놀라운 속도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크리비리크의 도시화는 계획된 것이 아니었지만, 광산 개발로 인해 급격히 진전됐다. 프랑스와 영국의 투자는 철광석 매장량 조사와 광산 개발 붐을 일으키는 데 일조했다. 돈바스로 철광석을 운반하기 위한 철도선이 1884년 개통되면서 주요 산업도시로 한층 더 성장했다. 1919년에는 도시의 지위를 얻었다. 소련 당국의 국유화와 투자는 도시의 광범위한 발전으로 이어졌다. 1934년 최초의 제철공장이 들어섰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나치에 점령됐던 크리비리크는 1965년 경제개혁 이후 재정적으로 성장했다. 또, 우크라이나가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후 투자가 늘어나고 2014년 유로마이단 혁명을 겪으면서 특히 도심에서 광범위한 재정비가 이루어졌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철광석 산지이며 ‘키간트’, ‘사크사간’ 등의 철광 채굴 기업 이외에도 광산기계 수리 및 건설자재 공장이 있다. 크리비리흐 철광상은 이 도시를 중심으로 남북 약 100km까지 분포되어 있으며 편마암·결정편암·철을 포함한 규암(珪岩)으로 구성되어 있다. 철은 헤마타이트계(系)인데 품위가 높은 것은 철함유량이 46%에 달한다. 추정 매장량은 20억t, 채굴량은 연평균 5,000만t이다. 제강원료는 우크라이나 국내뿐만 아니라 체코, 폴란드 등지에도 대량 수출한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첫 날, 러시아군에 의한 폭격이 있었다. 또한 이 도시 근처의 인훌레츠 강의 댐이 폭파되어서 피해를 입기도 했다. 러시아군은 이쪽으로 무리하게 진격을 시도하다 그대로 남쪽으로 밀려났다.[2][3]

지리 및 기후[편집]

크리비리흐 중심가는 삭사한강의 지류인 인훌레츠강의 동안(東岸)에 있다. 두 강이 합류하면서 만드는 크리비리크의 지리적 특징은 이 도시의 개발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도심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작은 호수를 따라 빙하기 바위가 퇴적되어 만들어진 지역이 있다. 그곳은 아직도 야생초목지로 남아 있다. 폐광과 광산 폐기물 등으로 인해 환경 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이 때문에 주거여건이 가장 나쁜 곳 중 하나라는 조사결과도 있다.

기후는 대체로 건조한 대륙성 기후를 보인다. 여름에는 따뜻하고 겨울에는 추우며, 강수량은 비교적 적은 편이다. 도심 지역은 온난화의 영향으로 겨울에 눈이 흔하지 않지만, 변두리 지역은 눈이 더 자주 내리고 폭설로 인해 도로가 폐쇄되는 경우도 있다.[4]

역사[편집]

크리비리크 인근 지역에 우크라이나 카자크의 준자치 정치공동체인 자포리지아 시치(Zaporizhian Sich)가 인훌레츠(Ingulets) 팔란카(Palanka, 행정단위)를 세운 것은 1734년이다. 당시의 마을과 월동기지 목록에 크리비리크가 언급돼 있다. 1770년 자포리지아 시치의 월동기지가 이곳에 만들어졌다. 1775년 5월 8일, 제1차 러시아-투르크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 당국은 이 카자크 정착지에 우편국과 철도선을 개설하여 북쪽으로는 드니프로강변의 크레멘축(Kremenchuk), 남쪽으로는 흑해 연안의 오차코프(Ochakov) 등에 배치된 러시아군의 모든 수비대와 연결시키고자 했다. 이렇게 세워진 우편국에는 5명의 카자크가 있었다.

18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 3개의 물방앗간이 이 지역의 가장 큰 산업시설이었다. 최초의 석조주택이 세워진 것도 1828년이다. 1800년대 가장 높은 건물은 유대교 회당이었다. 1860년에야 군(郡)이 되었다. 우크라이나의 지질학자 올렉산드르 폴(Олександр Поль)이 이 지역에서 철광석 매장량 조사와 생산을 개시하면서 크리비리크는 전기(轉機)를 맞이한다. 그는 중앙 우크라이나 지역의 철광석 산지 및 제철산업 단지를 일컫는 크립바스를 발견한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 폴의 발견으로 광산 구역이 생겼다. 1874년 러시아 제국의 알렉산드르 2세(Александр II)는 505km에 이르는 철도를 개설하게 했다. 덕분에 이곳의 철광석을 인근 지역의 공장들로 연결할 수 있게 되면서 급격히 발전하기 시작했다.

1880년 폴은 500만 프랑의 프랑스 자본을 끌어들여 철광석 회사를 설립했다. 그가 1882년 외곽의 광산에서 150명의 노동자를 통해 추출한 철광석은 1만6400t이었다. 크리비리크는 러시아 제국 최대의 광석 채굴 지역이자 자본주의의 중심지가 됐다. 크립바스 지역의 첫 지하 갱도는 1886년에 생겼다. 이 지역의 또 다른 핵심산업인 제련산업은 1892년 첫 제철 용광로가 가동되면서 시작됐다. 학교들이 세워지고 공중 전기선이 개설됐다. 새로운 노동자들도 몰려들었다. 그러나 곧 채굴량이 수요를 초과하게 됐다. 광산들은 일시적으로 채굴을 중단하거나 채굴량을 절반가량 줄여야 했다.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은 매우 열악했고 고용도 불안정했다. 휴업으로 수천 명이 실직했다. 광산의 작업환경으로 인해 폐암과 결핵, 천식 등을 앓는 경우도 많았다. 노동자 계층에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됐다. 노동자들의 시위는 파업과 폭력사태로 이어졌다. 1905년에는 러시아에서 유대인에 대한 조직적인 약탈과 학살을 동반한 폭동을 의미하는 포그롬(Pogrom)도 이 지역에서 발생했다. 많은 젊은 유대인이 이곳을 떠났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수출 시장이 막히고 많은 노동자가 군대에 징집되었다. 전후 이 도시는 소비에트의 치하에 들어갔다. 1918년 2월 12일 이 일대에서 건국을 선언한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Donetsk–Krivoy Rog Soviet Republic)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SFSR)의 자칭 구성 공화국이 되어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이 공화국은 국내외에서 모두 인정을 받지 못한 채 1918년 3월 20일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독립이 발표되면서 해체되었다. 1919년 크리비리크의 지위는 예카테리노슬라프현의 한 도시로 바뀌었다. 1919년 말에는 러시아 백군 의병대에 의해 잠시 통치됐다.

1920년 1월 17일 적군에 다시 함락됐을 때, 인구는 2만2571명이었다. 1924년에야 55.3km의 식수관이 지하에 깔렸고 광산 운영이 재개되었다. 1929년 첫 채굴연구소가 문을 열었다. 1931년에는 제련제품 생산의 토대가 마련됐다. 이곳의 용광로에서 3년 후 강철이 생산됐다. 도시는 다시 빠르게 성장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독일군에게 점령됐다. 1941년 8월 15일부터 1944년 2월 22일까지의 독일군 점령기 동안 이 도시에서 5천여 명의 유대인이 살해됐다. 소련군은 크리비리크와 이 도시 남동쪽에 있는 망간 산지인 니코폴(Nikopol)을 되찾기 위해 독일군과 격전을 벌였고, 독일군은 퇴각하는 과정에서 도시를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다.

1940년대 말 소련의 노동생산성 향상 운동인 스타하노프(Stakhanovite) 운동 등의 영향으로 도시는 급격히 재건됐다. 새로운 광산과 제철공장, 신발 및 모직공장 등이 새로이 건설됐다. 크리비리크 공항은 국제공항이 됐다. 1990년까지 크리비리크에서 생산된 철광석은 소련 전체 생산량의 42%, 우크라이나 생산량의 80%를 차지했다. 전후 도시에는 주거지가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혁신적 기술 덕분에 임시병영과 주택이 빠른 속도로 건설되기 시작했다. 특히 1960년대부터는 값싼 신소재인 콘크리트와 철재가 본격적으로 이용되면서 도시에는 현대식 아파트와 대로가 들어서는 등 재개발이 진행됐다.

1991년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이 도시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한동안 범죄가 급증하기도 했다. 2005년 이 지역 최대의 국영 제철기업인 크리보리즈탈이 민영화되면서 지역 내 투자도 증가했다. 아르셀로미탈 크리비리크(ArcelorMittal Kryvyi Rih)는 2011년 기준으로 3만7000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700만t 이상의 철강제품과 1700만t 이상의 철광석을 생산한 우크라이나 최대의 민간기업이다.[5]

지도[편집]

유럽 국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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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크리비리흐〉, 《위키백과》
  2. 크리비리흐〉, 《나무위키》
  3. 크리비리흐(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4. 크리비리크(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5. 크리비 리〉, 《요다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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