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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수마트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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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수마트라주(인도네시아어: Provinsi Sumatera Selatan)는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남부에 위치해 있는 주이다. [1][2][3]

개요[편집]

남수마트라주의 면적은 91,592㎢이며 인구는 8,497,200명(2019)이며 주도는 팔렘방이다. 남쪽으로는 람풍주, 서쪽으로는 븡쿨루주, 북쪽으로는 잠비주, 동쪽으로는 방카섬, 블리퉁섬과 접한다.

석유, 천연 가스, 석탄 매장량이 풍부한 편이며 말레이인, 자와족, 순다족, 미낭카바우족,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을 비롯한 여러 민족들이 거주한다.

민족은 말레이인 34%, 자바인 27%, 코므링인 5,7%, 순다인 2.5%, 화교 1.1%, 기타 38.8%이다.

2020년 기준 주지사는 헤르만 드루(Herman Deru)이다.[4]

자연환경[편집]

수마트라는 열대우림기후 지역으로 다양한 생태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빙하기에는 육지와 연결되어 있으며, 간빙기에는 분리된 섬의 특성상 유라시아 남부의 다른 지역과는 다른 독특한 생태환경과 종 구성을 보인다. 또한 인도양 방향의 산악 지대는 고산의 생태구조를 보인다. 특히 수마트라 북동 해안의 일대에는 세계적인 규모의 이탄 습지 우림(Peat Swamp forest)이 발달하여 있다. 수마트라의 산림은 근대와 현대를 거치며 산림 지원의 확보와 농경지 확대를 목적으로 급격하게 파괴되었다.

현재는 원래 수준의 50% 정도 수준의 열대우림만이 남아 있다. 이로 인해 독특한 수마트라 섬의 생태계 전반이 위협받고 있다. 예를 들어, 섬 환경으로 육지의 유사 종보다 크기가 작은 특성을 가졌던 수마트라 호랑이, 수마트라 코뿔소, 수마트라 코끼리, 오랑우탄 등의 종이 서식지를 잃어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특히 수마트라 북동 해안의 일대에는 세계적인 규모의 이탄 습지 우림(Peat Swamp forest)이 발달해 있다. 이탄 습지 우림이 전지구적 탄소 순환과 생태계 보호에 핵심적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저개발지인 수마트라섬 일대에 대한 개발지를 확보하고, 쌀 수확량을 늘리고자 하는 인도네시아 당국의 정책으로 인해 많은 부분이 파괴되어 왔다. 그 이외의 산림도 목재 채취와 팜 오일 플랜테이션 개발로 인해 많은 부분이 파괴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산림파괴는 엔소(ENSO, El Niño–Southern Oscillation) 현상과 함께 결합하여, 산불피해 빈도를 늘리고 있다. 수 년에서 수 십년 주기로 발생하는 엔소 현상은 수마트라섬에 가뭄을 일으키는데, 이로 인해 인도네시아의 산림, 특히 파괴된 이탄 습지 우림의 이탄층에 화재를 유발한다. 특히 인도네시아의 열대우림과 이탄 습지층에 발생한 산불은 진화가 어렵기 때문에 종종 그 빈도와 규모가 커져, 환경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대기오염을 일으켜 주변국까지 영향을 주는 연무 현상(haze)를 일으키고 있다.

수마트라섬은 일부 고산 지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열대우림기후(Af)를 보인다. 수마트라섬 중앙에 적도가 지나기 때문에, 연중 기온변화가 크지 않다. 고산 지대의 경우에는 다소 온도가 떨어져 온대 기후로 분류될 수 있는 지역도 있다. 강수량은 대부분 연 1,000~4,000mm 정도이며, 산세가 험한 인도양 방향의 강수가 비교적 많고, 안다만해와 자바해 연안이 다소 적다. 연평균기온은 지역에 따라 22~29℃를 보이며, 공통적으로 연교차에 비해서 일교차가 크다.[5]

역사[편집]

수마트라의 역사는 단일하게 기술되지 않는다. 자연 및 문화적 조건에 맞게 지역별로 각각 전통 왕조의 경험은 매우 다르다. 아체는 인도네시아 역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지역이다. 그 이유는 아체가 인도 상인들로부터 이슬람을 받아들인 관문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아체는 인도네시아에서 이슬람의 확산이 시작된 곳으로,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이슬람을 확산케 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슬람은 서기 1250년경 아체 판수르와 라무리 왕국(Kingdoms of Fansur and Lamuri)에 도착했다. 17세기 초 아체의 술탄국은 말라카해협 지역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하며 문화적으로 발달된 국가였다. 아체는 네덜란드 식민 정부와 그로부터 독립한 인도네시아 정부 모두 정치적 독립을 위한 저항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수마트라 동쪽 해안에는 약 1500년경 나구르(Nagur), 아루(Aru), 파나이(Panai), 바탕기우(Batangiou) 등 여러 왕국이 있었다. 이런 왕국들은 농장 소유 기반의 한 가족으로 구성된 작은 왕국이었다. 그러다가 16세기에 시싱가망가라자(Sisingamangaraja) 후예들에 의해 왕국도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이 왕국은 점차 전역의 영향권을 확대했다. 이에 16세기 북부 수마트라에는 나구르, 시싱가망가라자 왕의 통치하에 있는 바탁(Batak) 왕국, 아루 세 왕국이 있었다. 그러나 세 왕국 간의 전쟁으로 아체, 믈라카, 포르투갈, 미낭카바우 등 외부 영향이 쉽게 유입되었다. 아체의 술탄국은 동부 해안의 이슬람화에 성공했고, 파드리 전쟁의 다른 지역에서도 남부 타파눌리 왕국에 이슬람을 전파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세 개의 큰 왕국은 델리, 세르당, 아사한, 랑카트 술탄국, 마로파트, 링가 왕국 등 여러 개의 작은 왕국과 술탄국으로 분열되었다.

서부 수마트라는 1347년 아디탸와르만(Adityawarman)이 세운 파가루융(Pagaruyung) 왕국의 중심지였고, 이 당시 이 왕국은 힌두-불교 문화였다. 16세기에는 이 지역에 처음 온 유럽인은 1523년경에 도착한 파르망티에(Jean Parmentier) 프랑스 여행자였다. 16세기부터 인도, 영국, 포르투갈, 네덜란드와의 교역항으로 많은 상인들이 오고 갔던 무역 도시이고, 주된 무역 상품은 후추를 비롯한 각종 향신료와 코코넛이었다. 이후 네덜란드 당국의 통치에 접어들면서 이곳에 네덜란드령 통치 부서가 설립되었다. 또한 인도네시아 원주민들과 네덜란드 고위 관료의 의사소통을 돕기 위해 고용된 현지화된 화인들도 이곳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과거의 모습은 현재 파당 중심부에 위치한 강가 주변에 남아있다.

인도네시아 고대사에 대표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스리비쟈야(Srivijaya) 왕국의 중심지역이 남부 수마트라이다. 이 왕국은 무역의 중심지가 되며 해상 강국이 되었고, 동남아시아섬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했음에도, 서쪽으로 3,300마일이나 떨어진 마다가스카르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여전히 스리비자야 왕국의 중심지였던 지역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다. 스리비자야는 10세기 내내 동남아시아의 해상 무역로를 통제하였으나, 세기 말이 되자 동부 자바의 메당(Medang) 왕국이 새로운 해상 세력으로 성장하면서 스리비자야의 지배권은 도전받기 시작하였다. 중국 송 왕조 시기, 수마트라의 스리비자야 왕국은 산 포시(San-fo-tsi)라고 불렸고, 자바의 메당 왕국은 셰 포(She-po)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11세기 중반 스리비자야 왕국은 인도 왕국에 의해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다.

그 이후 이슬람의 영향으로 이슬람 왕국이 세워졌다. 그리고 수마트라의 가장 남쪽인 람풍주의 경우는 16세기부터 반튼 술탄 왕국(Banten Sultanate)의 영향권에 있었고, 19세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에 의해 완전히 영향력이 사라지기 전까지 유지되었다.

남수마트라주는 1945년까지 네덜란드의 식민 통치를 받았다. 1964년에는 람풍주, 1967년에는 븡쿨루주, 2000년에는 방카블리퉁주에서 분리되어 남수마트라주에서 분리되어 신설되었다.[6]

팔렘방[편집]

인도네시아를 구성하는 주요 섬 가운데 하나인 수마트라섬 남부에 위치한 남수마트라주의 주도로, 방카 해협으로 흘러드는 무시강 하구의 양쪽 연안에 있다. 대습원(大濕原)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으나 그 중에서도 약간 높은 지대를 차지하고, 또 오지(奧地)에서 흘러내리는 강의 합류 지점과도 가까운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고대부터 수마트라의 요지로서 번창하였다. 팔렘방이라는 지명은 '젖은 곳'이라는 뜻의 렘방(lembang)과 관련이 있는데, 무시강의 양안에 위치한 습지라는 지형적 특성에서 유래한다.

인도네시아뿐 아니라 말레이제도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들 가운데 하나로서 7~13세기에 말레이제도에서 존속하였던 스리비자야(스리위자야) 왕국의 수도였다. 스리비자야 왕국은 말레이 지역에서 해상무역의 중심지로서 중국·인도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과 교역하며 9~11세기 초반까지 전성기를 누렸으며, 탐라국(지금의 제주특별자치도)과 교류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스리비자야 왕국의 수도 팔렘방은 불교문화의 중심지로서 671년 당나라 승려 의정(義淨)이 6개월간 머물렀는데, 당시 중국의 승려들이 인도로 순례를 떠나기 전에 팔렘방에 머물며 산스크리트어를 배우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스리비자야 왕국은 1025년 인도 촐라왕조의 침략을 받아 팔렘방 등의 도시가 수탈당한 뒤로 해상 무역에서 농업 중심으로 전환하면서 세력이 약화되어 소국으로 전락하였으며, 13세기 말 자바섬을 거점으로 마자파힛 왕조가 흥기하면서 더욱 위축되었다. 15세기 초에는 진조의(陳祖義)가 이끄는 중국 해적단에게 점령당하였으며, 16세기에는 자바섬 북부에서 번성하였던 이슬람 국가인 데막 술탄국(Demak Sultanate, 1475~1554)의 지배를 받았다. 데막 술탄국이 붕괴된 뒤 1659년 팔렘방 술탄국이 성립되었으며, 17세기에 들어 네덜란드가 말레이제도에 진출하면서 1617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교역소가 팔렘방에 설치되었다. 1825년 팔렘방 술탄국은 네덜란드에 의하여 폐지되었다.

네덜란드의 통치하에서 팔렘방은 다시 경제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19세기 후반부터 고무 재배가 시작되어 1920년대에 주요 수출품이 되었고, 유전 개발이 시작되어 1900년에 이미 3개의 석유회사가 운영되었다. 팔렘방 유전의 연간 산유량은 일본의 연간 석유 소비량을 웃돌 정도였으며, 이로 인하여 태평양전쟁 중인 1942년 일본군에 점령당하였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8년에 성립한 남수마트라 자치국의 임시 수도가 되었다가 1950년 8월 17일 연방제를 폐지하고 단일국가로 출범한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7]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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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남수마트라주〉, 《위키백과》
  2. 남수마트라〉, 《나무위키》
  3. 인도네시아의 주〉, 《위키백과》
  4. 두산백과:수마트라섬 도시구조 및 행정〉, 《네이버 지식백과》
  5. 두산백과: 수마트라섬 기후와 자연환경〉, 《네이버 지식백과》
  6. 두산백과: 수마트라섬 역사〉, 《네이버 지식백과》
  7. 두산백과: 팔렘방〉,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동남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동남아시아 국가
동남아시아 도시
동남아시아 지리
동남아시아 바다
동남아시아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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