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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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5대 궁궐 소개 == | == 조선 5대 궁궐 소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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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은 정치, 외교, 문화의 중심이자 왕실 가족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한 나라의 도성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조선은 유교적 정치이념과 풍수지리 사상에 바탕하여 수도와 궁궐터를 정했다. 조선의 수도인 [[한양]]은 [[백악산]], [[목멱산]], [[타락산]], [[인왕산]]을 경계로 하고 있다. 백악산 아래 법궁인 경복궁 이외의 다른 궁궐들도 이후에 조성되었으며, 왕은 시대적 상황이나 필요에 따라 여러 궁궐을 옮겨 가며 사용하였다. | 궁궐은 정치, 외교, 문화의 중심이자 왕실 가족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한 나라의 도성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조선은 유교적 정치이념과 풍수지리 사상에 바탕하여 수도와 궁궐터를 정했다. 조선의 수도인 [[한양]]은 [[백악산]], [[목멱산]], [[타락산]], [[인왕산]]을 경계로 하고 있다. 백악산 아래 법궁인 경복궁 이외의 다른 궁궐들도 이후에 조성되었으며, 왕은 시대적 상황이나 필요에 따라 여러 궁궐을 옮겨 가며 사용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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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수립 후 정부는 궁궐을 원형대로 복원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일제가 경복궁의 정전인 경복궁 근정전을 가로막아 지은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헐린 전각과 문루들을 단계적으로 복원하였다. | 대한민국 수립 후 정부는 궁궐을 원형대로 복원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일제가 경복궁의 정전인 경복궁 근정전을 가로막아 지은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헐린 전각과 문루들을 단계적으로 복원하였다. | ||
+ | [[파일:경복궁 전경.jpg|썸네일|300픽셀|'''[[경복궁]]''' 전경]] | ||
+ | [[파일:창경궁 전경.jpg|썸네일|300픽셀|'''[[창경궁]]'''(昌慶宮) 전경]] | ||
+ | [[파일:창덕궁 전경.jpg|썸네일|300픽셀|'''창덕궁'''(昌德宮)]] | ||
+ | [[파일:현재 덕수궁.jpg|썸네일|300픽셀|'''[[덕수궁]]''']] | ||
+ | [[파일:경희궁.jpg|썸네일|300픽셀|현재 남아있는 '''[[경희궁]]''' 전경]] | ||
=== 조선의 시작과 끝, 경복궁 === | === 조선의 시작과 끝, 경복궁 === | ||
[[경복궁]](景福宮)은 태조 1년인 1395년 9월, 조선 건국 후 가장 먼저 지어진 궁궐이다. 조선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양에 새로운 도읍을 만들었다. 경복궁 주변에 국가의 근간이 되는 종묘와 사직을 세웠고 정신적 지주가 되고 교육을 담당할 문묘, 성균관도 만들었다. 하지만 제7대 임금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후 창덕궁으로 옮겨갔고, 후대 임금들도 경복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 [[경복궁]](景福宮)은 태조 1년인 1395년 9월, 조선 건국 후 가장 먼저 지어진 궁궐이다. 조선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양에 새로운 도읍을 만들었다. 경복궁 주변에 국가의 근간이 되는 종묘와 사직을 세웠고 정신적 지주가 되고 교육을 담당할 문묘, 성균관도 만들었다. 하지만 제7대 임금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후 창덕궁으로 옮겨갔고, 후대 임금들도 경복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