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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웨이환초'''<!--미드웨이 환초-->(Midway Atol)는 [[태평양]] 한가운데에 있는 [[환초]]이다. '''미드웨이섬'''<!--미드웨이 섬-->(Midway Island) 또는 '''미드웨이제도'''<!--미드웨이 제도-->(Midway Islands)라고도 부른다. 미드웨이환초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미드웨이 해전]]의 격전지로 유명했다. 미드웨이환초는 태평양 항로의 중간 지점이 되므로 '중간 지점'이라는 뜻의 이름이 붙여졌다. [[미국]]은 1867년 8월 28일에 일방적으로 미드웨이환초의 [[영유권]]을 선언했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B%AF%B8%EB%93%9C%EC%9B%A8%EC%9D%B4_%ED%99%98%EC%B4%88 미드웨이 환초]〉, 《위키백과》</ref> | '''미드웨이환초'''<!--미드웨이 환초-->(Midway Atol)는 [[태평양]] 한가운데에 있는 [[환초]]이다. '''미드웨이섬'''<!--미드웨이 섬-->(Midway Island) 또는 '''미드웨이제도'''<!--미드웨이 제도-->(Midway Islands)라고도 부른다. 미드웨이환초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미드웨이 해전]]의 격전지로 유명했다. 미드웨이환초는 태평양 항로의 중간 지점이 되므로 '중간 지점'이라는 뜻의 이름이 붙여졌다. [[미국]]은 1867년 8월 28일에 일방적으로 미드웨이환초의 [[영유권]]을 선언했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B%AF%B8%EB%93%9C%EC%9B%A8%EC%9D%B4_%ED%99%98%EC%B4%88 미드웨이 환초]〉, 《위키백과》</ref> |
2023년 6월 29일 (목) 11:0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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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웨이환초(Midway Atol)는 태평양 한가운데에 있는 환초이다. 미드웨이섬(Midway Island) 또는 미드웨이제도(Midway Islands)라고도 부른다. 미드웨이환초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미드웨이 해전의 격전지로 유명했다. 미드웨이환초는 태평양 항로의 중간 지점이 되므로 '중간 지점'이라는 뜻의 이름이 붙여졌다. 미국은 1867년 8월 28일에 일방적으로 미드웨이환초의 영유권을 선언했다.[1]
개요
미드웨이환초는 태평양에 위치한 미국령 군소제도(United States Minor Outlying Islands)의 하나로 서쪽의 샌드섬과 동쪽의 이스턴섬, 그 사이의 스핏섬으로 구성되어 있는 작은 산호초이다. 하와이제도의 북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간점'이란 이름 뜻처럼 아시아와 북아메리카 대륙 사이의 대략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면적 약 5㎢. 인구 약 1천(1990). 길이 25km의 미드웨이환초(環礁)는 북위 28°15', 서경 177°20' 해상에 있다. 1859년 미국의 브룩스가 발견한 후 1867년 미국령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미국과 일본의 격전지로, 이곳에서 일본이 패함에 따라 전세가 역전되었다. 태평양 전쟁의 전황을 바꾼 미드웨이 해전으로 유명하다. 미국령 군소 제도는 모두 공식 깃발이 없다. 위 깃발은 미국 어류 및 야생동물관리국 직원인 스티브 드라이든(Steve Dryden)이 고안하여 2000년 6월 4일 미드웨이 해전 58주년 기념식에서 공개된 비공식 깃발이다. 미드웨이환초는 바다거북, 게 등이 어획된다. 미국의 해군기지가 있고 태평양을 횡단하는 해저 케이블의 중계지이다.[2]
지리
미드웨이환초에서 가장 큰 샌드섬의 면적이 5km²가 안되고 세 섬을 다 합쳐도 6.2km² 가량밖에 안되는 작은 섬으로 1859년에 발견되었다. 1903년에 섬에 통신소가 설치된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개발이 진행되어 1930년경에는 호화 휴양지로 자리잡게 되었다. 1940년 들어 미국과 일본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1941년에 미국의 해군기지가 건립되었고 이후 1993년까지 운영되었다. 이스턴섬에는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 군용 비행장 헨더슨 비행장(Henderson Field)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종전 이후로는 사용이 중지됐고 섬 자체도 1970년대 이후 인원이 전원 철수한 상태이다. 2014년 기준으로 섬의 인구는 60명 가량인데 이들은 모두 비행장이나 항구 시설의 관리 인원 등이고 실질적으로 여기에서 거주하고 있는 인구수는 0이다. 이 때문에 미국령이긴 하나 미국령 군소제도(United States Minor Outlying Islands)로 분류되어 섬 행정을 특이하게도 미국 어류 및 야생동물관리국(United States Fish and Wildlife Service)에서 관할하고 있다. 미드웨이에 들어가려면 관리 당국에 사전신청을 하고 허락을 받아야 하므로 사실상 일반인이 출입하기는 어려운 지역이다. 비행장은 샌드섬의 헨더슨 비행장(IATA: MDY, ICAO: PMDY)으로 과거 이스턴섬에 있던 비행장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민간용으로도 개방된 상태이다. 다만 거주하는 사람이 없고 일반인의 출입 역시 통제되고 있기때문에 알로하 항공과 에어택시처럼 전세기를 빌려주는 몇몇 업체에서 등록한 소수 차터편을 제외하면 정기 운항편은 없으며 주로 문제가 생긴 비행기들의 비상착륙을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헨더슨 비행장 덕분에 쌍발기들이 ETOPS 규정을 충족하면서 아시아에서 호놀룰루로 가는 비행을 할 수 있다. 2011년 3월에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 당시 1.5m 높이의 쓰나미가 미드웨이섬을 강타하여 이 곳에 서식 중이던 11만 마리 이상의 바다새들이 몰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3]
미드웨이 해전
미드웨이 해전(영어: Battle of Midway)은 1942년 6월 4일부터 6월 7일까지 벌어진 태평양 전쟁의 결정적인 해전이다. 이 해전은 진주만 공격이 있은 지 6개월 뒤, 그리고 산호해 해전이 있은 지 1달 뒤에 발생했다. 체스터 니미츠, 프랭크 잭 플레처, 레이먼드 A. 스프루언스가 이끄는 미국 해군은 야마모토 이소로쿠, 나구모 주이치, 곤도 노부타케가 이끄는 일본 제국 해군의 공격함대를 미드웨이환초에서 격퇴하였고 일본군 함대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혔다. 군사 역사학자인 존 키건은 미드웨이 해전을 "해전 역사상 가장 놀랍고 결정적인 타격"이라고 불렀고 해전 역사학자인 크레이그 사이먼즈는 미드웨이 해전을 "전술적으로 결정적이었고 전략적으로 영향을 남긴 살라미스, 트라팔가르, 쓰시마와 더불어 세계사에서 가장 중대한 해전 중 하나"라고 불렀다. 이전의 진주만 공격 때처럼 일본의 작전은 태평양의 전략적 강국인 미국을 제거하여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을 자유롭게 설립하는 것을 추구하였다. 일본은 사기를 저하시키는 또 다른 패배로 인해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항복하기를 바랐고, 일본이 태평양에서 우세를 점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미국 항공모함을 함정으로 끌어들여 미드웨이를 점령하는 것은 도쿄를 공습했던 둘리틀 공습에 대응하여 일본의 방어 교두보를 확장하는 전체적인 "장벽" 전략의 일부였다. 또한 이 작전은 피지, 사모아, 하와이를 공격하는 더 넓은 작전의 사전작업으로 여겨졌다.[4]
작전은 일본이 미국의 대응을 잘못 가정하고 초기에 부대를 잘못 배치하여 불리하게 바뀌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군 암호해독자들이 일본군이 계획한 공격의 위치와 날짜를 판단할 수 있게 되어 사전에 경고를 받은 미국 해군이 매복을 준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6월 5일 일본군은 야마모토(山本) 해군대장이 지휘하는 전함 11척, 항공모함 8척, 순양함 18척 등 연합함대 주력과 나구모(南雲) 중장 지휘하의 기동부대를 합친 350척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미드웨이섬의 미군기지 공격과 미해군 기동부대를 유인, 섬멸하기 위한 작전을 펼쳤다. 일본으로서는 이 작전을 입안중이던 4월에 J.H.둘리틀의 폭격기대에 의하여 도쿄(東京)가 첫 공습을 받자 이 작전에 제해수역(制海水域)의 확대까지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색적(索敵)을 게을리한 것과 암호가 미국측에 해독된 탓으로 대기중이던 미국의 급강하 폭격기대의 급습을 받고 나구모 함대는 주력 항공 모함 4척과 병력 3,500명, 항공기 300대를 상실하는 참패를 당하였으며, 제공권 상실로 작전을 중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본 제국 해군은 진주만을 공격했던 중형항공모함 아카기, 가가, 소류, 히류를 잃었고, 중순양함 미쿠마도 이 해전에서 잃었다. 미국 해군은 중형항공모함 USS 요크타운과 구축함 USS 해먼을 잃었다. 미드웨이 해전과 솔로몬 제도 전역의 소모전 이후, 증가하는 사상자들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일본은 항공 모함을 비롯한 물자와 숙련된 조종사들과 같은 인원 대체 능력이 떨어지게 되었다. 한편 거대한 산업 능력 및 부대 훈련방식 덕분에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입은 손실을 쉽게 대체할 수 있었다. 과달카날 전역과 더불어 미드웨이 해전은 태평양 전쟁에 전환점을 마련한 전투로 평가받는다. 태평양전쟁 개전 이래 태평양, 인도양에서 우위를 지켜 온 일본의 해군 기동부대는 이 해전의 패배 이후 전국의 주도권을 미군측에 내주게 되어 전쟁 수행상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미국의 승리 원인으로는 우선 여러 운도 있었지만 이기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유일하게 대전 내내 일본을 압도했던 정보력이 꼽힌다. 일본군의 공격 위치를 정확히 알고 미리 함정을 파 준비할 수 있었으니, 정보력이 가진 힘 덕분에 미국은 승리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운도 준비된 자에게 따른다는 말을 떠올려보면, 미국은 일본에 비해 훨씬 준비되어 있었고, 그 준비의 바탕에는 정보력 덕분에 일본군의 정확한 공세 위치와 시간을 읽어낼 수 있었던 점이 컸다.
태평양 전쟁에서 중대한 전환점이자 미국이 태평양 제해권을 지키는데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해전으로, 일본에게 기습당해 벌어진 양국의 전력차를 극복하고 자만한 일본의 공세를 저지함으로써 전시 생산체제가 구축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벌었고 1년 후 미국은 압도적인 생산량과 질 좋은 무기들을 바탕으로 한 물량공세로 일본을 몰아 붙이게 된다. 일본은 전쟁 발발 직후, 다소 미흡했던 미국의 태평양 함대 전력 덕분에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벌인 남방작전 등 태평양 전역을 넘어 샌프란시스코까지 노리자는 계획을 짤 정도로 온갖 재미를 보던 행위에 본격적으로 제동이 걸리게 되었다. 미드웨이 해전과 이후 과달카날 전투 이후 일본군은 미군을 상대로 수적, 질적 우세에 서지 못하게 된다. 미드웨이 해전의 여파로 이후 이어진 과달카날 전역에서 일본군은 항공기, 조종사, 수송선박을 비롯한 인적, 물적 소모를 감당하지 못하고 패배하게 된다. 즉 쌓아둔 물량을 굴리던 일본, 진주만에서 털리며 자원과 공장은 많지만 물량은 없던 미국의 대결이라는 1막이 끝나고, 본격적인 생산력 대결에 들어간 2막이 시작된 것이다.[5]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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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