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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륜'''(중국어:蔡伦{{발음|蔡伦}})은 중국 후한 중기의 환관. 나무껍질, 베옷, 고기잡이 그물 등을 분쇄하여 만든 '채후지(蔡侯紙)'라는 종이를 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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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륜'''(중국어:蔡伦, {{발음|蔡伦}})은 중국 후한 중기의 환관. 나무껍질, 베옷, 고기잡이 그물 등을 분쇄하여 만든 '채후지(蔡侯紙)'라는 종이를 발명하였다.
  
 
== 개요 ==
 
== 개요 ==

2024년 11월 28일 (목) 10:30 판

채륜

채륜(중국어:蔡伦, cài lún)은 중국 후한 중기의 환관. 나무껍질, 베옷, 고기잡이 그물 등을 분쇄하여 만든 '채후지(蔡侯紙)'라는 종이를 발명하였다.

개요

채륜은 후난(湖南) 출생의 환관으로 종이를 만드는 기술을 발달시켰다. 중국은 필기의 재료로 비단이나 간독(簡牘 대쪽과 얇은 나무쪽) 등을 썼으며 전한(前漢)시대에는 이미 풀솜이나 마를 펴서 만든 종이를 사용하였다. 당시 궁중의 집기 등을 제조·관리하는 상방령 (尙方令) 이란 직책을 맡고있던 채륜은 이 기술을 발전시켜 나무껍질, 베옷, 고기잡이그물 등을 합쳐 분쇄하여 종이를 값싸게 만드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그 발전된 종이를 "채후지(蔡侯紙)"라 불렀다.

<후한서> '채륜전'에는 "채륜이 나무껍질, 넝마섬유, 포, 어망 등을 사용하여 종이를 만들어 원흥 원년(元興元年, 105년)에 황제에게 바쳤다"고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채륜은 제지법을 발명했다기보다는 기존의 제지기술을 개량하여 널리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채륜이 발전시킨 제지법은 동아시아에 확산되어 학문이나 예술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114년 용정후(龍亭侯)로 책봉되어 장락(長樂:福建省) 태복(太僕:卿)이 되었으나, 안제(安帝) 즉위 후에 정쟁에 말려들어 음독 자살하였다.[1]

채륜의 생애

채륜은 명제 때 환관으로 황실에 들어갔다. 그는 3대 장제의 황후인 두태후의 편에 기대 권력을 얻었고, 상방령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상방령은 황실에 필요한 물건이나 칼, 무기 등을 제작하고 기술을 만드는 부서의 책임자였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물건 만들기에 재능이 있고 학문을 좋아하는 결백한 사람이었다고 나와 있다. 채륜은 국가 기획기관인 유악에 참가해 정책 입안에 참여할 정도로 화제에게 깊은 신뢰를 얻어 왕에게 자주 간언을 올리는 위치까지 올랐다.

채륜은 105년 기존의 포장지 개념이었던 종이를 개량하여 글을 쓸 수 있는 종이를 개발하였다. 그가 만든 종이는 학문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전에는 무게가 많이 나가고 부피가 큰 대나무, 나무판자 아니면 값이 비싼 비단을 이용해야 했기 때문에 많은 한계가 있었다. 채륜이 글을 쓸 수 있는 종이를 개발하게 되면서 이전과는 다른 문자의 기록과 학문전달의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승승장구하던 채륜은 화제가 죽은 후 어린 상제를 대신하여 섭정하던 화제의 황후인 등태후와 함께 권력을 유지하였다.

채륜은 121년 등태후가 사망하고 안제가 친정을 시작하면서 권세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안제는 3대 장제의 아들로 황태자 자리에 있다가 두태후에 의해 축출된 유경의 아들이다. 그는 빼앗긴 권력을 되찾기 위해서 자신의 아버지인 유경이 황태자 자리에 쫓겨나게 된 경위를 조사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두태후의 중상모략에 의해 무고하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때 두태후와 함께 계략한 사람이 채륜이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채륜은 바로 형장으로 끌려나올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에 사대부에게는 형벌을 내리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에 채륜은 형장으로 출두하기 전 사자가 내민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후대의 환관들에게는 전한 시대의 사마천, 명나라의 정화와 함께 유능한 환관으로 추앙받았다고 한다. 이외에도 삼국지연의 초반에 원소가 명환관의 예로 태사공(사마천)과 용정후를 언급하는데, 여기서 용정후가 바로 이 사람. 이 외에 채륜과 같은 청류파 환관은 후한 말에 여강이라는 인물이 있었다.[2]

종이의 발명

종이는 AD 105년 중국 후한(後漢)의 채륜(蔡倫)이 발명하였다. 그 이전에는 사람이 무엇을 기록하는 재료로서 돌·금속·찰흙 외에 동물의 가죽이나 뼈, 나무껍질·나무·대나무 등을 이용하였다. 이러한 기록을 위하여 쓰인 재료들 중에서 오늘날 종이에 가장 가까운 것은 이집트의 파피루스(papyrus)였다. 고대 이집트 사람은 나일강변에 야생하는 파피루스라는 갈대와 비슷한 식물을 저며서 서로 이어 기록하는 재료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 파피루스는 지금도 나일강변에 많이 야생하는데, 키가 2~3m 이상이며 굵기는 둘레가 10cm 정도이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이 줄기를 얇게 저며서 가로·세로로 맞추어 놓고 끈기가 있는 액체를 발라서 강하게 압착시킨 후, 잘 건조시켜 기록하는 재료로 사용하였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종이를 발명한 사람은 중국인이다. AD 105년 후한의 채륜이 나무껍질·마·넝마·헌 어망 등을 원료로 하여 종이를 초조하는 방법을 발명하여 황제에게 보고하였다. 그는 당시 궁중의 용도(用度) 관계 장관과 수공업 분야의 주임직을 겸하고 있었다. 채륜이 발명한 제지술은 나무껍질(꾸지나무의 섬유라고 분석되었다)·마설(헌 어망이라고 분석되었다)·넝마(비단·마의 직물류로 분석되었다) 등을 돌 절구통에 짓이겨 물을 이용하여 종이를 초조하는 원리였는데, 이것은 현대의 초지법(抄紙法)과 같다. 당시는 역사적으로 한(漢)나라가 재건된 후 50여 년이 지났기 때문에 통일왕조로서 기초가 다져진 때였으므로, 정치적·문화적 필요에 따라 기록을 위한 재료가 많이 쓰이고 있었다. 궁중에서 채륜의 업무가 바로 수공품을 원활히 조달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는 비능률적인 재래방법에 대하여 연구를 거듭하였으며, 그 결과 제지술을 발명하였다.

중국에는 그 이전부터 풀솜 찌꺼기를 이용하여 기록하는 재료를 제조하는 기술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채륜은 기술의 발명자라기보다는 완성자 또는 개량자라고 할 수 있다. 근래에 채륜 이전의 종이라고 볼 수 있는 재료가 발굴되어, 그를 제지술의 발명자라는 설에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가 있다. 어떻든 그의 설계와 지도에 의하여 만들어낸 종이는 당시 황제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기에 충분했다. 원료는 거의 폐물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값이 싸고, 많은 양을 일시에 생산할 수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사용하거나 휴대하는 데에 기존의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편리하였다. 그리하여 당시의 사람들은 종이를 '채후지(蔡侯紙)'라고 불러서 채륜의 공을 찬양하였으며, 그때까지 대신 사용되던 비단과 구별하기 시작하였다.

종이의 발전

채륜 이후에도 종이 개량은 계속되어 죽간竹簡과 목간木簡의 사용은 점차 줄어들고 기록도구로 종이가 각광받게 되었다. 또한 후한 말 제지 기술자 좌백左伯(생몰연대 미상, 자는 자읍子邑)이 좌백지左伯紙라는 품질 좋은 종이를 만들어 종이가 널리 보급되었다. 그가 만든 종이는 질이 좋아 채륜의 것보다 훨씬 나았다. 더 나아가 동진東晋 시대에는 기록도구로 죽간과 목간을 사용하지 않고 종이만 사용했으며, 또한 불교와 도교가 백성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자 경전을 정리하기 위해 종이의 수요는 더욱 늘어났다. 그리고 드디어 6세기 초 종이는 일상용품으로 자리 잡았다.

제지 기술의 발달과 종이의 보급은 학문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3-4세기경에는 제지 기술이 한국과 일본에 전해져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중국의 제지 기술은 서양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기록에는 751년 당나라와 사라센(중세의 유럽인이 서유럽의 이슬람교도를 부르던 호칭으로 고대 그리스, 로마에 살던 라틴문화권 사람들이 시리아 초원의 유목민을 사라세니Saraceni라고 부른 데서 연유했다) 제국과의 전쟁에서 당나라가 패함에 따라 당나라의 제지 기술자가 포로가 되어 아라비아인들에게 제지 기술을 전파했다고 한다. 제지 기술은 지남침, 화약, 인쇄술과 함께 중국의 4대 발명으로 꼽힌다.

채륜은 삼·아마 등에서 섬유를 분리하여 이것을 얇은 막상으로 걸러서 떠내어 종이를 만들었다. 이 방법은 후에 710년경 중국인 포로에 의해 사마르칸드에 전파되었으며, 12세기에 이르러 무어인이 에스파냐에 도입하여 점차로 유럽에 퍼지게 된 것이다. 그 후 7세기 동안 유럽에서는 식물섬유·넝마를 원료로 하는 수공적인 제지가 행해졌고, 19세기에 이르러서야 기계화가 시작되어 1798년에 로베르가 연속식 초조기를 고안하고, 1808년에 푸르드리니어 형제가 개량·제작에 성공하였으며, 또한 이와 거의 동시에 디킨슨이 환망식 초지기를 발명하였다. 인쇄술의 발달은 제지기술의 발달을 초래하였으며, 이에 따른 원료의 대량생산이 요구됨으로써 1840년에 켈러의 쇄목펄프 발명을 시작으로 1854년에 소다 펄프가, 1866년에 아황산 펄프가, 1884년에 크래프트 펄프가 발명되었다. 한국은 예부터 닥나무의 인피섬유를 이용한 한지가 사용되었으며, 1902년에 기계에 의한 제지술이 일본으로부터 도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영상

각주

  1. 채륜(蔡倫,?~121?)〉, 《두산백과》
  2. 채륜〉, 《위키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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