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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한-중 FTA가 발효됨에 따라, 양국은 상품 교역과 투자 중심에서 유통, 환경, 서비스 등을 포함한 전방위적 산업협력을 추진하고 있고, 한국의 대 중국 투자 및 산업협력 분얀느 점차 동부연안에서 중서부로, 노동집약적 제조업에서 첨단제조업 및 서비스업 등으로 확대 중이다. 양국 정부는 인공지능, 빅데이터, 바이오, 신에너지 등 첨단 산업 분야를 적극 육성 중이기에, 신산업 분야에서 경쟁과 동시에 협력할 공간도 확대될 것으로 예상되며, 한-중 FTA 서비스투자 후속협상이 타결될 경우 시장 개방을 바탕으로 양국 경협의 제도화 수준이 향상될 것으로 기대된다. | 2015년 12월 한-중 FTA가 발효됨에 따라, 양국은 상품 교역과 투자 중심에서 유통, 환경, 서비스 등을 포함한 전방위적 산업협력을 추진하고 있고, 한국의 대 중국 투자 및 산업협력 분얀느 점차 동부연안에서 중서부로, 노동집약적 제조업에서 첨단제조업 및 서비스업 등으로 확대 중이다. 양국 정부는 인공지능, 빅데이터, 바이오, 신에너지 등 첨단 산업 분야를 적극 육성 중이기에, 신산업 분야에서 경쟁과 동시에 협력할 공간도 확대될 것으로 예상되며, 한-중 FTA 서비스투자 후속협상이 타결될 경우 시장 개방을 바탕으로 양국 경협의 제도화 수준이 향상될 것으로 기대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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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中國, China)은 동아시아 지역에 위치한 국가이다. 정식 국가 이름은 중화인민공화국(中华人民共和国)이다. 중국의 수도는 베이징(Beijing, 北京, 북경)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다민족 국가로 총인구의 91.5%가 한족(漢族)이며, 그 밖에 56개의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행정구역은 베이징(Beijing, 北京, 북경)을 포함한 4개의 직할시, 하북성을 포함한 23개의 성, 네이멍구자치구를 포함한 5개의 자치구, 홍콩을 포함한 2개의 특별행정구로 구성되어 있다.
목차
개요[편집]
중국은 공식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PRC; 중국어: 中國人民民和国国; pinyin: Zhonghuah Rén Genghghéguo)은 동아시아에 위치한 사회주의 국가로 1949년 10월 1일에 건국되었으며 수도는 베이징이다. 중국의 국토 면적은 약 960만 평방킬로미터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국가이며, 23개 성, 5개 자치구, 4개의 지방자치단체 와 2개의 특별 행정 구역으로 구성되었다.
중국은 현재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로 2020년 기준 인구는 약 14억 2천만 명이다. 현대 표준 중국어와 표준 한자는 국가 공통 언어와 문자이며 민족 자치 지방의 기타 소수 민족은 민족언어와 문자를 사용할 수 있다. 1986년부터 9년제 의무교육 제도가 시행되었으며, 정부는 공립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수업료를 지원한다. 2020년 인구 조사 에 따르면 전국 문맹률은 2.67%이다. 고등교육을 받는 인구는 2억 4천만 명에 달했다.
중국은 현재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2021년 국내총생산(GDP)은 17조7000억 달러로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구매력 평가 기준으로는 세계 1위이다.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중국은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주요 경제국 중 하나가 되었고 실질적인 GDP 성장률은 경제 총량 상위 20개국 중 1위를 차지했다. 현재 중국은 대외무역 규모 면에서 세계 1위이며, 세계 최대 상품 수출국이자 세계 2위 수입국이다. 중국 대륙 일인당 GDP는 1990년 347달러에서 2021년 12,600달러(IMF데이터) 가까이 약 35배 성장했다. 동부지역의 일부 도시 일인당 GDP는 이미 2만 달러를 초과했으며 중국의 '빈곤문제'도 경제성장과 함께 개선, 832개 국가급 빈곤현은 2020년 말까지 '탈빈곤'을 완성했다. 그러나 중국국가통계청 데이터에 따르면 중국은 아직도 6억명의 월 평균 수입이 1,000위안으로 지역발전불균형 및 빈부격차 2가지 문제를 여전히 해결과제라고 정했다.
BC 221년 진(秦)나라의 시황제(始皇帝)가 처음으로 통일을 이루었다. 1912년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ROC)이 중국 최후의 통일왕조인 청 왕조를 대체하면서 중국 군주제가 붕괴되었다. 국민당 정부가 들어섰으나, 정치적 혼란이 이어지면서 각지에서 군벌정부가 권력을 휘두르는 군벌 시대로 돌입하게 되었다. 이후 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5·4 운동의 반제국주의 강령을 중심으로 창당된 중국공산당은 1920년 이후 세력을 급격히 키웠고, 국민정부과 계속해서 내전을 벌였다. 중일 전쟁 이후 중국 대륙의 주도권을 두고 1946년 제2차 국공 내전이 발발하였고, 그 결과 타이완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한 영역이 공산당 측으로 넘어가 1949년 마오쩌둥을 초대 국가주석으로 하여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이 선포되었다.
소련의 막대한 영향력을 받는 중국공산당은 마오쩌둥으로 대약진 운동을 펼쳤고, 문화 대혁명도 실시하며 사회주의 국가의 틀을 굳히려 하였다. 다만 대약진 운동도 경제 성장으로 이어지지 못해 실패하였고 문화 대혁명도 수많은 국가적, 문화적 피해와 민간인 피해를 남겼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은 사회주의의 한계를 실감하게 되었고, 이후 소련의 영향력이 낮아지면서 덩샤오핑의 지도로 개혁·개방을 시행하면서 시장경제체제가 도입되어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받아들였다. 덩샤오핑은 흑묘백묘론을 내세우며 광활한 영토와 막대한 인구를 바탕으로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어냈고, 화평굴기를 외교 기조로 삼아 평화로운 공존 및 팽창 정책을 추구하였다. 이에 중국과 미국은 투키디데스의 함정 상황에 놓여있다는 평가가 있다.
상징[편집]
국명[편집]
중국은 영어로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약칭 'China'(차이나)라고 쓴다. 한자로는 "中華人民共和國" 또는 '中國'이라고 쓴다. 중국어(간체)로는 "中华人民共和国" 또는 '中国'이라고 쓴다. 중국 대륙의 본토에 위치해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대만에 있는 정부와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대만(Taiwan)에서는 자신을 '중국'이라고 부르며,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해서는 중국 본토라고 부른다.
'중국'이라는 명칭이 최초로 나타난 것은 기원전 11세기 주나라의 청동기에 새겨진 글자다. 문서상으로는 시경의 大雅民勞篇 중 "惠此中國, 以綏四方"이라는 구절의 '중국'이 가장 이른 기원이다. 이는 지리적 중심부, 즉 주나라의 수도 지역을 의미했다. 당시 '國'은 아직 '나라'의 의미를 갖지 않았다. 중원(中原), 중화(中華)라고도 했다. 주변에 비해 발달된 문명을 가졌던 자신들을 동이, 서융, 남만, 북적 등 주변 '오랑캐'와 구분하기 위해 쓰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랬던 것이 춘추시대 들어 주나라의 제후들이 서로 치고받기 시작하면서, 각기 주나라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중국(=주나라)이라는 말을 신나게 팔아댔다. 이렇게 황하 중하류의 구 주나라 세력권 일대의 도시들이 서로 자기네가 주나라의 수도('중국')라고 자칭했고, 그 바깥 지역에 위치한 진(秦), 초(楚), 오(吳), 월(越)나라 등을 '오랑캐나라'(夷狄之邦)로 불렀다. 이때까지는 나라를 뜻하는 자가 國이 아니라 邦이었던 것이다.
결국은 오랑캐 취급받던 진나라가 중원을 처음으로 제패하여 중구난방 난립하던 '중국'은 다시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통일 진나라가 고작 15년만에 망해버리고 한나라가 들어서게 되고, 초대 황제인 유방(劉邦)의 이름을 피휘하느라 邦 대신 國을 쓰기 시작하여 중국의 개념이 '중원을 차지한 하나의 나라'로 정착된 것이다.
중국 대륙에서는 전통적으로 왕조 이름이 국명처럼 쓰였으며 중국이라는 명칭은 나라 이름보다는 지역 이름에 가까웠다. 더불어 중원의 동의어였던 것에서 의미가 넓어져 한족 정통 왕조의 지배 영역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다.
중국을 국명으로 최초로 내세운 민족은 뜻밖에 한족이 아닌 만주족들이였는데, 만주족인 청나라가 네르친스크 조약 당시 스스로를 만주어로 "ᡩᡠᠯᡳᠮᠪᠠᡳ ᡤᡠᡵᡠᠨ(dulimbai gurun, 가운데에 있는 나라)"으로 칭한 것이 처음이다. 아편전쟁 이후 체결된 난징 조약에서는 만주어가 아닌 한문으로도 스스로를 中國/中国으로 일컬었다.
중국이라는 명칭이 국명으로 쓰이지는 않았지만 아편전쟁 이후 근대화의 물결이 중국을 덮치면서 중국인들도 민족주의에 눈뜨게 되었다. 이에 따라 중국인들은 왕조와 관계없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국명이 필요함을 느꼈다. 결국 신해혁명으로 만주족의 청나라를 무너뜨린 중국인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中國/中国, 中華/中华와 'republic'의 번역어인 민국(民國/民国)을 조합한 중국 대륙 사상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中華民國/中华民国)을 세웠고, 약칭으로 중국(中國/中国)이라 하였다. 이후 중국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여 세운 오늘날의 중국은 기존의 중화(中華/中华) + 정치 체제를 이르는 '인민공화국'을 추가한 중화인민공화국(中华人民共和国)을 정식 국명으로 택하고 약칭을 중국(中國/中国)이라 하여 지금에 이른다. 국공내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은 타이완 섬에 있는 중화민국과 정통성 경쟁을 해왔고, 타이완 섬의 중화민국을 정통 중국으로 보는 국가를 중심으로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해 중공(中共) 등 다른 명칭을 쓰기도 했지만, 지금은 국제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이 정통 중국으로 간주되어 타이완 섬의 중화민국이 아닌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으로 칭한다. 지금도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고 명목상 중국 대륙의 정통 국가임을 주장하는 중화민국(대만)에서는 이 나라에 대해 공식적으로 중국 대륙(대륙), 중공 등의 용어를 사용하지만, 대만 민족주의가 어느 정도 자리잡은 현재에는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을 그냥 '중국'으로 칭하는 사람들이 많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당시에는 새로운 중국을 수립했다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신중국(新中國/新中国)이라 한 적도 있다. 대비되는 용어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 중화민국을 이르는 구중국(舊中國/旧中国)이다.
영어에서는 이 나라를 차이나(China) 혹은 피플스 리퍼블릭 오브 차이나(People's Republic of China)라 하고 다른 유럽 언어에서도 대체로 비슷한 명칭을 쓴다. 가장 유력한 설은 진나라의 친(Chin)에서 유래됐다는 설이다. 이것이 산스크리트어에서 중국 지역을 칭하는 이름인 치나(Cīna)가 되었고, 이 낱말을 포르투갈인 상인들이 페르시아어를 거쳐 수입해 전 유럽에 보급했다. 앞의 C가 Ch, C, K, S 등으로 오락가락하는 탓에 영어명은 '차이나'이지만 북유럽 언어나 그리스어에서는 '키나', '키나스'라고 하는 등의 차이가 있기는 하다. 한자문화권에서 '중국'이 국명으로 확립되지 않았던 근대 시절에는 이를 한자 음역하여 중국을 支那라 칭한 적이 있지만 중국인 및 기타 화인(대만인, 홍콩인, 마카오인, 해외 화교들)들은 역사적 이유로 인해 이를 비하 명칭으로 받아들인다.
특이하게 러시아어를 비롯한 일부 슬라브어권에서는 Китай(키타이)라 하는데, 이는 본래 거란족을 의미한다. 근세 이전에야 러시아에서 중국이 워낙 멀다보니 동방에 뭐가 있는지도 잘 모르고, "동방에 키타이라고 날리는 애들이 있더라" 정도의 정보만 가지고 그 동네를 뭉뚱그려 키타이라 부른 게 그 시작이다. 이 영향을 받아 중앙아시아 언어에서도 중국을 키타이 비슷한 이름으로 칭하며, 그 외 다른 언어에서도 영어에서의 캐세이(Cathay) 등 거란의 이름에서 유래해 중국을 가리키는 표현이 좀 있다. 홍콩을 거점으로 하는 항공사인 캐세이퍼시픽도 여기서 유래하였다.
화교들이 많이 사는 동남아에서는 위의 경우와 달리 그냥 '중국'의 방언식 이름이 현지에서 중국을 이르는 명칭으로 정착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인도네시아어에서 중국은 Tiongkok이라고 하는데 중국을 이르는 민남어 발음에서 유래했다.
땅이 크고 인구가 많다는 뜻에서 자칭 '대국' 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국기[편집]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기는 오성홍기(五星红旗, wǔ xīng hóng qí)이다. 전국에서 응모된 약 3,000개의 도안을 심사해서 인민정치협상회의에서 선정하였는데, 1949년 9월 27일에 현재의 국기 디자인으로 최종 선정되었다. 오성홍기를 디자인한 사람은 저장성 출신 경제학자 쩡롄쑹(曾联松)이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언하면서 정식 국기로 채택되었다.
큰 별은 중국 공산당, 작은 별들은 각각 노동자, 농민, 소자산계급, 민족자산계급을 나타낸다. 붉은색은 공산주의와 혁명, 별의 노란색은 공산주의의 광명과 중국 인민의 종족성(주로 '황인종'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을 나타낸다. 4개의 작은 별의 중심에서 뻗은 직선은 큰 별의 중심에서 만나는데, 이는 중국 공산당의 영도하에 혁명인민의 대단결을 상징한다.
국가[편집]
- 의용군 진행곡
중국의 국가이자 항일 군가. 신문화운동(新文化運動)당시 위다푸와 같이 창조사회(Creation Society)에 속했던 좌파 시인이자 극작가인 톈한(田漢, 1898-1968)[2]의 가사에 작곡가 녜얼(聶耳, 1912-1935)이 곡을 붙였다.
텐한이 1934년에 풍운아녀를 위해 쓴 장편의 시 마지막 부분이 의용군 행진곡의 가사가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음악가 녜얼(聶耳)이 작곡을 하고 싶어했고, 1935년에 완성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49년에 건국했는데, 이 건국을 앞두고 1946년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가 개최됐다. 그 회의에서 중국의 국기, 국가, 국장 등 국가 대표 상징을 정하는데 의용군 행진곡이 대국가 즉, 국가를 임시 대표하는 곳으로 채택되었다.
1978년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잠시 가사가 바뀌었으나, 그 후 1982년 인민대회에서 다시 원래 가사로 바꾸었으며, 1982년 중국인민대표대회에서 의용군 행진곡을 정식 국가로 선정했고, 마침내 2004년에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에 명시됐다.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136조에 '중국의 국가는 의용군 행진곡이다.'라는 조항이 추가되어 공식적으로 중국의 정식 국가가 되었다.
지리[편집]
지형[편집]
중국 전체는 서고동저 형태의 지형으로, 대체로 동쪽에 저지대가 분포하고 서쪽에 산지가 분포하며 이로 인해 주요 하천은 서쪽의 산지에서 동쪽의 저지대로 흐르는 형태를 보인다. 중국의 지형 기복은 세 층위의 계단으로 설명할 수 있다. 가장 높은 층위는 해발고도 4,000m 내외의 지역으로 티베트고원이 대표적이며, 티베트 자치구(西藏自治区)와 칭하이성(青海省)에 해당하는 영역이다. 그보다 낮은 층위는 900-1,800m의 고도로 이루어져 있으며, 몽골고원, 타림 분지, 황토고원(黄土高原), 쓰촨분지, 윈난-구이저우 고원이 포함된다. 가장 낮은 층위는 이 둘에 해당하지 않은 동부의 저지대로 중국의 3대 저지대이자 주요 농업 지대인 둥베이평원, 화베이평원, 양쯔평원이 모두 포함되며 대개 해발고도 450m 이하의 지역을 말한다.
산지[편집]
중국은 3분의 1 이상의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중국의 주요 산맥은 서부 국경과 앞서 언급한 세 층위의 경계선상에 자리 잡고 있다. 서부의 국경지대 및 가장 위층과 두 번째 층의 경계를 이루는 산맥은 주로 동서 방향이다. 이 중 히말라야산맥은 중국과 네팔, 인도의 국경을 지나는 산맥으로 중국·티베트와 인도 문명과의 문화장벽과 기후지대를 구별하였으며, 중국과 인도, 동남아시아 주요 하천의 기원이 되기도 하였다. 쿤룬산맥은 티베트고원과 타림분지를 나누는 경계이자 중국의 최상위 층위 지형과 하위 층위와의 주요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쿤룬산(昆仑女神峰, 7,167m)이 최고봉이다. 중국 도교 신화와 풍수에서의 곤륜산에서 이름을 따왔으며, 서부에는 현재에도 활발히 활동 중인 화산지대가 이루어져 있어 불의 고리의 일부라 할 수 있다. 톈산산맥은 중국과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을 나누는 경계로, 키르기스스탄과의 경계 동쪽 부분에는 중국의 타림분지 또는 타클라마칸사막과 중가리아분지를 나누는 경계의 역할을 한다. 북쪽의 알타이산맥은 카자흐스탄과 중국을 나누는 역할을 한다.
중국 내 두 번째 층위와 세 번째 가장 낮은 층위의 경계는 하나로 연결되어 보이는 북동-남서 방향의 산맥으로 구분된다. 동북의 다싱안링산맥(大興安嶺山脈)은 아무르강 상류에서부터 내몽골과 동북 3성의 경계를 이루며 서남쪽으로 향하는 산맥으로, 해발고도는 1200-1300m 수준이고, 가장 높은 봉우리는 2035m이다. 주로 화산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국 동북지방을 향하는 동쪽 사면이 가까우며 몽골 평원 방향은 완만한 편이다. 타이항산맥은 중국 황토 고원과 허난성을 잇는 북동-남북 방향의 산맥으로, 해발고도는 1500~2000m 수준이다.
이 외에도 중국의 지역과 기후를 구분하는 산맥은 친링산맥, 난링산맥-우이산맥이 있다. 친링산맥은 중국 화북지역과 사천지방을 나누는 그리고 황허 유역과 양쯔강 유역을 나누는 산맥으로, 최고봉은 태백산(太白山, 3,750m)이다. 난링산맥과 우이산맥은 중국 중부 양쯔강 일원(화중)과 중국 남부(화남, 광둥성 등)을 나누는 경계로서 기능한다. 그 외에도 중국 동북지방의 아무르강을 따라 형성된 소흥안령 산맥, 중국과 북한의 경계를 이루며 백두산(장백산, 2744m)이 위치해있는 창바이산맥 등이 중요한 산맥으로 인식될 수 있다.
하천[편집]
중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하천은 황허와 양쯔강이다. 황허(Yellow River, 黃河)는 중국에서 두 번째로 긴 강으로 길이기 5,464km에 이른다. 칭하이성에서 발원하여 동북 방향의 황토고원을 향한 후, 남쪽으로 화베이평원에 이르고, 산둥반도 주변을 통해 바다로 빠져나간다. 황허강은 강물에 퇴적물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 유로를 넘어 범람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역사시대 초기부터 치수(治水)에 대한 노력을 수행하여 왔으며, 황허의 유로와 하류는 역사시대를 거치며 수차례 바뀌어 왔다. 강의 범람 이후 하류가 산둥반도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바뀌기도 하였으며, 보하이만에서 산둥반도 이남까지로 변경되기도 하였다. 현재 황허의 유로는 19세기 중반 이후의 유로로 산둥반도를 북서 방향으로 지나쳐 보하이만으로 빠져나간다.
양쯔강(Yangtze, 长江)의 길이는 6,300Km로,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긴 강이자 아시아에서 가장 긴 강이다. 양쯔강은 티베트고원에서 발원하여 쓰촨분지에서 주요 지류들이 만나 충칭과 호북성의 경계인 싼샤협곡 지나고, 양쯔평원 등의 화중지방을 거쳐 동중국해로 빠져나간다. 강이 매우 길기 때문에 지역과 구간마다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대표적인 예로 양쯔강을 지칭하는 영어 표현인 ‘양쯔(Yangtze)’라는 표현은 양쯔강의 하류인 난징(南京), 상하이(上海) 일원에서 부르는 양쯔강(揚子江)에서 따온 표현으로, 구간 이름을 전체 이름으로 치환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양쯔강의 주요 지류들은 쓰촨평원에서 하나둘 만나 충칭과 호북성의 경계에서 거대한 협곡을 형성하는데, 이를 ‘싼샤(협곡)‘라고 하고 현재는 이 지역에 거대한 댐인 쌴샤댐이 만들어졌다. 싼샤협곡에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다목적 댐인 싼샤댐이 건설되었으며, 양쯔평원의 양쯔강 주변에는 둥팅호와 같은 거대한 담수호들이 위치해 있다. 양쯔강의 출구인 상해 북부 일원에는 양쯔강삼각주가 형성되어 있다.
그 외에도 중국 동북지역에서 러시아와 경계를 이루는 아무르강, 랴오닝성의 랴오허강(요하), 중국의 화북과 화중을 나누는 경계인 화이허강, 광둥지역을 흐르는 주양쯔강 등이 주요한 중국의 하천이라 할 수 있다. 황허와 양쯔강, 화이허강 등 화북과 화중의 주요 하천들은 대운하(京杭大运河)로 연결되어 있다. 위 하천을 포함해서 바다로 나가는 하천 유역은 면적 기준으로 64%에 이르며, 여기에 중국 인구의 대부분이 거주한다. 그러나 나머지 36%에 해당하는 중국 서부 내륙 지역 유역들은 산맥에 가로막히거나 건조한 환경에 노출되어 바다와 연결되지 않는 내륙 하천인 경우도 많다. 바다로 나가는 하천은 동중국해, 남중국해, 황해 등 대부분 태평양으로 흐르지만, 일부 서남부 하천은 동남아시아 주요 하천인 메콩강 등으로 연결되기도 하며, 일부 하천은 인도양이나 북극해 유역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바다[편집]
중국은 동쪽으로 보하이해와 황해, 동해, 남쪽으로 남중국해를 접하며 이들은 모두 태평양에 연결되어 있다. 보하이해(渤海)는 요동반도와 산둥반도 사이에 있는 황해의 내만이며, 베이징 대도시권의 주요 해상교통로 역할을 수행한다. 보하이만(Bohai bay)라고 부르기도 하나, 텐진시 앞의 내만을 중국에서 보하이만(渤海湾)이라 부르기 때문에 이 경우 혼선이 있을 수 있다. 황해(黃海)는 황허에서 흘러나오는 퇴적물과 모래폭풍의 영향으로 바다가 황색을 띠며 한반도를 포함해 전세계적으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해안 중의 하나이다. 동중국해는 중국, 한반도, 일본(규슈, 오키나와)를 포괄하는 바다로 역시 태평양의 내해 역할을 하며, 교통로 및 무역로로 세계적으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바다이다. 남중국해의 경우 중국과 베트남,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필리핀 등의 국가들이 둘러싼 바다로 위 바다들보다 온난하고, 아열대성 해양 특성을 보인다.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의 주요 섬과 군도에서 연안국간의 영유권에 대한 대립이 나타나고 있다. 보하이해와 황해 일대의 해안은 황허의 영향을 받아 넓은 갯벌을 보이며, 양쯔강 이남에는 산맥을 만나 암석해안이 자주 나타난다. 북회귀선의 남쪽으로 맹그로브 숲과 산호초가 나타난다. 맹그로브 숲은 광둥, 광시, 하이난의 해안에 주로 나타나며, 남중국해의 많은 섬들은 산호초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후[편집]
연교차가 크고 건조한 지역이 많다. 강수량은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계절풍 기후(Cwa, Dwa)가 많고 온난 습윤 기후(Cfa)는 남방 해안지역에 국지적으로 있으며 몽골과 인접한 중북부와 서부는 건조기후(BS, BW)에 속한다. 중국/환경오염 문서에서도 볼 수 있듯 중국의 물부족은 수질오염 탓도 있지만 강수량이 불균형한 상태에서 수요가 늘어난 것이 크다. 전통적으로 도시 한복판에 눈이 많이 오는 걸 서설(瑞雪)이라며 좋아하는 것도 그만큼 눈이 귀해서다.
남동부 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이 건조한 편인데, 때문에 대부분의 중국인들이 남동부 지역에 몰려 살고 있다. 특히 중국 영토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서부 지역은 불모의 땅이 대부분이며, 남서부 지역은 해발고도 또한 4000m 이상으로 매우 높다. 또한 대륙의 동안에 위치했고 서부지역이 높은 고원과 사막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동위도의 타 지역에 비해 한랭한 기후를 나타낸다.
- 동북 지방(허베이, 네이멍구, 랴오닝, 지린, 헤이룽장)
대부분의 지역이 냉대기후이며, 여름은 무더우며 일부 지역은 높은 습도로 불쾌하나 내몽골 지역은 일교차가 크며 건조한 경향을 나타낸다. 헤이룽장 지역의 경우 9월이면 겨울이 찾아오고, 8월부터 영하의 기온을 나타내며 눈이 내린다. 헤이룽장 지역과 내몽고 북부의 경우 1월에 혹한이 찾아올 경우 섭씨 -50도 밑으로 떨어지기도 하며 -40도 밑으로 떨어지는 것은 일상이다. 베이징이 위치한 허베이 지역, 만주의 랴오닝 남부의 경우 동북 지역 한정으로 매우 온난하며 이 지역은 개성시, 평양시 등 한반도의 중북부지방(북한)과 유사한 기후를 갖는다.
- 동남 지방(산동,허난,장쑤,후난,후베이,저장,푸젠,광둥,구이저우 등)
평균적으로 동남 지역의 북부(산동,허난,장쑤)는 한반도의 중남부(남한)와 연평균온도가 비슷하며 여름은 비슷하거나, 더욱 고온다습하다 (난징 등 장쑤 일대).[3] 장마의 영향을 받으며 광둥 등 남부지역에서는 태풍의 피해도 매우 빈번하다. 전반적으로 온난 습윤한 기후를 나타내며, 벼농사의 적지 중 한 곳이다. 상하이, 광저우, 홍콩, 선전시 등 중국의 산업을 이끄는 도시들이 있으며 겨울의 기후는 대부분 지역이 최한월 평균기온 섭씨 -3도 이상으로 온난하다. 참고로 봄부터 여름까지는 서쪽의 티벳고원 700hPa 고도에 열저기압이 자리하므로 그 전면부인 이곳은 지상저기압이 위치한다. 따라서 봄 여름 내내 짓누르는듯한 층운이 자리잡는다. 이후에는 장마, 장마후엔 계절풍성 호우 등 여름 내내 비가 끊이지 않는 지역이다. 가을 이후나 되어야 이곳에서는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으며 따라서 내륙지역임에도 다습한 정글기후가 나타난다. 그렇다고 겨울에 덜춥냐면 그건 아니라.... 이 동네에서는 2~3월부터 반팔을 입고 11~12월까지도 입을 정도.
- 서북 지방(닝샤 후이 자치구,간쑤,신장위구르 자치구)
중국에서 가장 건조한 지역으로 주로 건조기후와 일부 냉대기후를 나타내며, 신장위구르의 고산지역에서는 한대기후 가 국지적으로 나타난다. 사막 지역답게, 여름은 매우 무더운 반면 습도가 낮아 동남 지역의 여름보다 체감상 견디기 쉬우나 절대적인 온도는 동남 지역보다 높은 경우가 많다. 중국의 역대 최고기온도 서북 지역에 위치한 신장위구르 자치구에서 기록되었다. 인구밀도가 낮으며 주요 도시로는 우루무치 등이 있다. 이 지역은 일교차가 매우 크며, 수시로 모래폭풍이 불어닥쳐 대기 질이 좋지 않다. 산업화로 인해 대기질이 나빠진 동부와 달리 이 지역은 자연적인 원인으로 원래부터 대기질이 나쁘다. 또한 아시아 대륙의 정중앙부에 위치하여 매우 큰 대륙도를 갖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거대한 고원과 북쪽으로는 거대한 시베리아 평원 사이에 있는 내륙지역이라 겨울이 매우 한랭하며 일부 고산지역은 연평균기온이 영하인 곳도 많다. 신장위구르 서부지역에는 파미르 고원과 톈산 산맥,카라코람 산맥 등이 있으며 이 지역의 한겨울은 섭씨 -40도 이하로 떨어지며 몹시 춥다.
- 서남 지방(티벳,칭하이,쓰촨,윈난)
윈난과 쓰촨은 겨울에 온난하고, 특히 쓰촨 분지는 기온이 높고 일조량이 적다. 반면 쓰촨 서부와 티벳, 칭하이는 제3의 극지대라 불리는 거대한 티베트 고원 지역으로, 전세계에서 대기질이 가장 좋은, 중국에서 항상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지역이다. 고원의 일부는 만년설과 빙하로 덮여 있고 연평균기온은 0-5℃ 정도. 매우 높은 해발고도로 적응이 어려워 고산병에 걸릴 수 있다. 여름은 시베리아와 같은 기온분포, 즉 매우 시원하고 쾌적해 7~8월에도 긴팔을 입을 정도고 겨울에는 -20-30℃의 혹한과 강풍이 매일 이어진다.
중국 사자성어에 중국 각 지역의 기후를 반영한 것이 있는데, 촉견폐일, 월견폐설, 오우천월 등이 그 예이다.
환경오염[편집]
개발도상국 특유의 현상이기도 한 극심한 환경오염은 자국을 넘어 전세계를 위협하는 큰 요소이다. 중국에서 발생하는 환경오염의 양상은 여느 개발도상국들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인구와 경제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환경오염도 스케일이 다른 수준이다. 특히 중국의 경제가 워낙 급성장하다 보니 이것을 시민 의식의 성장이 따라가지 못한 탓에, 중국 정부와 대다수 국민들의 환경 문제에 대한 몰이해와 무관심은 널리 알려져 있다. 환경오염으로 피해를 겪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 만큼 환경오염에 대한 문제 제기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먹고 사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 때문에 각종 공해 산업을 세계 각지로부터 유치하다보니 환경오염은 그동안 겉잡을 수 없이 커질 수밖에 없어 엄청난 규모의 환경오염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중국이 경제적으로 성장한 2010년대에 와서는 환경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 증가하고 있으며, 환경오염이 심한 지방에서 주민들이 시위를 벌이거나 지방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벌이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역사[편집]
선사시대[편집]
현재 중국의 영역은 유라시아 대륙의 동부에 위치한 광대한 영역과 다양한 지리적 조건을 갖춰왔고, 오늘날 중국인을 형성하고 있는 여러 민족들 또한 서로 다른 자연환경 속에 적응하며 독특한 개별 문물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크게는 정주지대의 강 유역을 중심으로 농업 문명이 발달하였고, 유목지대의 초원 지대를 중심으로 유목 문명이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을 포함한 고대 아시아인의 조상은 아프리카에서 인도, 동남아시아를 거쳐 이동해왔고, 약 20만 년 이전에 대부분의 지역에 인류가 거주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황허 강 중하류 지역에 성립한 옛 문명은 '황허문명'이라 통칭되는데, 양사오 문화, 룽산 문화 등 신석기 문명을 거쳐 상나라, 주나라로 이어진다. 1927년 중국의 베이징시 외곽 저우커우뎬(周口店)에서 제4기 홍적세(洪積世)의 중기 제2간빙기(第二間氷期) 지층에서 직립 유원인 다음의 고인골(古人骨)이 발견되어 북경인(北京人:Sinanthropus Pekinesis)이라는 학명이 붙여졌다. 그 후 마지막 제4빙하기에 현대 아시아인종의 조상인 상동인(上洞人)이 저우커우뎬의 석회암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신석기시대에 들어와서 최고(最古)의 채색토기 문화가 나오는데, 이는 흑·백·홍으로 문양(文樣)을 그린 토기로 화베이 일대에서 남쪽으로는 푸젠·타이완에 분포하는데 1921년 허난성 양사오유적(仰韶遺蹟)에서 출토되어 이 계통의 문화를 양사오문화라고 총칭한다. 그 다음에 나타난 흑색토기(黑色土器) 문화의 대표적 유적은 산둥성 룽산전(龍山鎭)에서 출토되었는데 이 이름을 따라 룽산문화라고 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6,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천성의 용마고성보돈유적과 호남성의 성두산 유적 등의 다양한 유적지의 발굴이 양쯔강 주변지역에 이루어지면서 '양쯔강 문화설'이 나타나고 있다. 이로 인해 '황허문명'이라는 개념은 더욱 폭넓은 의미의 '중국 문명'이라는 개념으로 대체되고 있다. 즉 기존에는 황허 유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양사오문화와 룽산문화가 발전하여 고대 국가를 형성하였다는 논의에 기초해 '황허문명'이라는 개념이 널리 쓰였지만, 오늘날에는 '중국 문명'이라는 개념이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고대[편집]
중국의 전설에 의하면 상고의 3황(三皇)·5제(五帝)(삼황오제)의 평화 시대를 거쳐 하(夏)·상(商)·주(周)의 3대(三代)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은허에서 발견된 귀갑수골(龜甲獸骨)에 새겨진 한자의 최고형(最古形)인 복사(卜辭)에 의하여 상대의 사회를 알 수 있다. 상나라는 웨이수이[渭水]에서 일어난 주(周)나라에 의하여 멸망되었는데 주나라는 왕권의 확립과 사회의 안정에 따라 제자백가(諸子百家)와 같은 문화가 발달하였다. 주나라는 BC 770년 수도를 낙읍(洛邑:지금의 洛陽縣)으로 옮겼다. 주나라의 동천 후 춘추(春秋:BC 770∼BC 403)시대를 거쳐 전국(戰國:BC 403∼BC 221)을 거쳤고 BC 221년, 진(秦)나라의 시황제(始皇帝)가 천하를 통일하였다. 진나라는 중앙집권적인 군현제도(郡縣制度)를 단행하고 행정·군사·감찰의 3권분립 체제를 세웠다. 또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축조하고 국위를 사방에 떨쳐 진(Chin)의 이름이 서쪽에 전해져 'China'라는 명칭의 기원이 되었다.
그러나 BC 207년 진은 멸망하고, 서민 출신인 유방(劉邦)이 장안(長安, 지금의 시안)을 수도로 한왕조(漢王朝)를 창업하였다(BC 202). 한대에는 서방과의 교통이 활발하여 그 문화가 수입됨으로써 중국 문화의 내용이 충실해졌다. 지방 호족(豪族) 세력이 발전하게 되어 한때 왕망(王莽)이 신(新)을 건국하였지만 15년 만에 무너지고 광무제 유수(光武帝 劉秀)에 의하여 후한(後漢:25∼220) 시대가 된다. 그러나 전한부터의 타성이 그대로 남아 184년 황건의 난을 계기로 몰락의 기로에 들었다.
중세[편집]
황건의 난으로 군웅할거된 중국의 국토는 조조(曹操)의 아들 조비(曹丕)가 낙양에 세운 위(魏)와 유비(劉備)가 청두(成都)에 세운 촉한(蜀漢), 그리고 양쯔강 중·하류에 손권(孫權)이 세운 오(吳) 등의 3나라로 삼국정립 시대가 되었다. 280년 위의 신하이던 사마씨(司馬氏)가 3국을 통일하여 서진(西晉)이 되었고, 4세기 초 흉노(匈奴)의 침입으로 난징(南京)으로 옮겨 동진(東晉)이라 하여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 후 송(宋)·제(齊)·양(梁)·진(陳)의 4조(四朝)와 오(吳)·진(晉)을 더한 6조(六朝)가 교대되었는데 이 시대의 문화는 귀족과 호족들의 풍족한 생활에서 전개된 화려하고 우미한 것이었다.
한편 화베이지방은 5호16국(五胡十六國)이 서로 싸우다가 선비족(鮮卑族)이 439년 북위(北魏)로 통일하여 송(宋)나라와 대항하여 남북조 형세를 이루었다.
수나라 문제(文帝)는 군권을 강화하고 과거(科擧)제도를 시작하였으며, 양제(煬帝)는 대운하를 만들었지만 고구려와 싸워 대패함으로써 내란이 일어나 618년 멸망하였다. 이연(李淵)이 장안을 점령하고 당(唐)나라의 제위에 올라, 이후 당나라는 넓은 대제국으로 영토를 확대하였다. 귀족의 취미와 외형의 미를 강조하는 당대의 문화는 국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이런 문화는 인접 국가에 파급되어 동아문화권(東亞文化圈)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후기로 오면서 귀족 계급이 몰락하고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 907년 주전충(朱全忠)의 후량(後梁)에 멸망되었다. 이후 5대 10여 개국이 흥망 하였다.
979년 송(宋)은 중국을 다시 통일하였으나, 문치주의(文治主義) 정책을 펼치면서 군사력이 약화되어 북방 유목민족의 세력이 크게 확장되었다. 거란족(契丹族)의 요(遼), 탕구트족(Tangut, 黨項族)의 서하(西夏), 여진족(女眞族)의 금(金) 등이 송(宋)을 압박하였다. 이들 나라들은 훗날 몽골족(蒙古族)이 세운 원(元)이나 만주족(滿洲族)이 세운 청(淸) 나라처럼 독자적인 문화를 지니고 중국문화에 큰 영향을 끼쳐 '정복왕조(征服王朝)'라고 불린다.
1127년에 송(宋)은 금(金) 나라의 압박으로 강남(江南)으로 옮겨갔지만, 1279년 칭기즈칸이 이끈 몽고군에 멸망하였다. 몽골족이 세운 원(元)은 1368년 주원장(朱元璋)이 세운 명(明)에 도성인 대도(大都, 지금의 베이징)가 함락되며 실질적으로 멸망했다. 명(明)은 1644년 민란 지도자인 이자성에 의해 멸망했고, 그 해에 산하이관(山海關)을 넘어온 만주족(滿洲族)의 후금(後金)이 베이징을 점령하면서 다시 정복왕조(征服王朝)인 청(淸)이 중국을 지배하였다.
근대[편집]
중국사에서 서양 세력이 침투하기 시작하여 전통왕조 체제에서 새로운 체제로 전환하는 시기로서 중국은 1840년 제1차 중영전쟁부터 1919년 5·4운동까지를 근대사로 구분하고 있다. 이는 청(淸)나라 말기부터 중화민국(中華民國) 초기까지에 해당된다.
청나라는 무역 개방을 요구하는 영국의 침략을 받았다. 이로써 동양의 전통적인 대제국은 서양 근대국가의 침략을 받게 되었고, 중국의 근대사는 피침사로 시작되었다. 이 전쟁에서 패한 청은 반식민지화의 길로 접어들었고, 서양 근대문명과 자본주의의 침투로 전통사회는 커다란 혼란에 빠졌다. 이에 불만을 갖고 홍수전(洪秀全)은 태평천국(太平天國)을 건설한다는 이상으로 농민전쟁을 일으켜 세력을 형성하였지만(태평천국의 난, 1850~1864), 결국 정부군에 의해 토벌되었다. 청나라는 1856년 애로호 사건으로 제2차 중영전쟁을 맞았고, 이로 인해 서양 열강의 반식민지화가 더욱 심화되었다. 청 황족이 거주하던 집단 거주지였던 원명원(圓明園)은 영·불 연합군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베이징(北京)이 점령되었다. 이후 청나라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베이징조약으로 화해하였다. 러시아는 영국, 프랑스와의 베이징조약을 주선한 대가로 중국으로부터 연해 변강주를 할양받았다.
1862년 열강의 중국 침략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양무운동(洋務運動)이 일어나 서양문물을 배우고 도입하자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그러나 서양의 물질문명을 수용하되 중국 전통의 정신과 철학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 정신을 유지하였다. 열강들의 중국내 세력 강화와 청일전쟁의 패배 등에 자극받아 캉유웨이(康有爲), 량치차오(梁啓超) 등 일부 선각자들은 국내 제도의 혁신을 통해 중국을 근대화시켜 난국을 타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변법자강(變法自强)운동을 일으켰다. 그 결과 광서제(光緖帝)는 이들을 중용하고, 과거제 개혁, 근대 학교의 설립, 관보 발행, 입헌정치 계획 등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어린 광서제와 서태후(西太后)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개혁정치를 반대하는 서태후와 조정 보수파 관료들이 정변을 일으켜 개혁파를 축출하고 실권을 잡았다(무술정변, 1898). 그리고는 개혁정치를 중단하고 과거체제로 회귀하였다. 이는 중국이 보수화의 길을 택하여 근대화가 지연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열강의 침투로 중국은 일본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열강이 전국을 분할 관리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특히 중국이 청-프랑스전쟁(1884~5)에서 프랑스에게 패하고 청일전쟁(1894)에서 일본에게 패함으로서, 베트남(월남), 조선 등에서의 종주권을 상실하였고, 타이완마저 일본에게 내주어야 했다. 그 결과 청조는 그 동안 동양의 강자로 군림하던 패권을 일본에게 내주게 되었고, 동양의 국제질서가 일본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열강들의 약취에 대항하여 1900년 의화단(義和團)이 봉기하여 외국 공관에 방화하는 등 저항하였으나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청 정부의 위약과 열강세력의 침탈 속에서 한족(漢族) 중심으로 멸만흥한(滅滿興漢) 운동이 일어났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쑨원(孫文)이 주동이 되어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났다. 이로써 1912년 전통왕조인 청조가 망하고 중화민국(中華民國)이 탄생하였다.
1914년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이 중국 경영에 소홀한 틈을 타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대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곧 독일이 경영하던 지역인 산둥반도 일대에 일본군이 상륙하고 항구도시인 청도(淸島)를 점령하였다. 일본은 중국 정부에 이권을 요구하는 내용의 21개조 요구를 하였고, 이에 대한 중국의 반일 감정이 일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되고 세계는 평화를 추구하게 되었다. 이때 한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 독립을 쟁취하려 하였고, 중국에서 또한 1919년 일본의 21개조 요구에 반대하는 5·4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 군국주의의 적극적 공세로 중국은 일본의 침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편집]
산업혁명을 치른 서구의 근대 문명은 청(淸)나라 말기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영국의 제1차 중영전쟁과 제2차 중영전쟁 이후 청왕조는 커다란 타격을 받았고, 지식인을 중심으로 서구의 근대문명 수용과 관련하여 봉건성과 식민지성을 두고 많은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서구 세력들의 물밀듯한 침점(侵占)으로, 홍콩(香港)을 영국에게, 만주 북방을 러시아에게 할양하고, 안남(安南) 등 조공국에 대한 종주권(宗主權)을 잃었으며, 국내 요소에 외국 조계(租界)가 많이 설치되어 청왕조의 주권이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동요 속에서도 근대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동치중흥(同治中興)을 통해 근대공업이 일기 시작하였으나 청일전쟁이 일어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청일전쟁 직후에는 캉유웨이(康有爲)의 점진개혁론이 활발하였으나 무술정변(戊戌政變)에 의하여 실패하고 의화단(義和團)의 북청사변(北淸事變)은 청왕조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러일전쟁 후 쑨원(孫文)이 신해혁명(辛亥革命)에 의하여 임시 대통령에 취임하여(1912) 2,000년 이래의 전제군주제가 무너지고 공화제의 중화민국(中華民國)이 탄생되었다. 그러나 그후 약 20년간 군벌의 압제에 시달려야 했다.
쑨원의 사후에 후계자가 된 장제스(蔣介石)는 북벌(北伐)의 성공으로 양쯔강 유역에 진출하였다. 난징사건(南京事件)이 일어나 소련과 단교한 장제스는 군벌 장쭤린(張作霖)을 몰아내어 국민정부를 정통정부로 만들었다(1928). 장제스는 소련과 단교하였을 때 중국 공산당도 탄압하였다. 이때 공산당은 지하로 숨어 소련의 원조를 받았다. 일본의 침공이 격화되자 장제스는 다시 공산당과 화해하여 일본에 대항하였지만, 그 동안에 공산당의 세력이 증대해갔다. 공동의 적인 일본이 패하자 국민정부와 공산당은 다시 적대관계로 돌아가 국공 내전이 계속되다가 국민정부가 패하여 타이완으로 물러가고 공산당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마오쩌둥의 시대[편집]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베이징에 세우고 국가주석 및 혁명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49년 12월 소련을 방문하여 1950년 2월 중소우호동맹호조조약과 기타 협정을 맺었다. 건국 후 1949~1955년까지는 초기 변혁기에 해당하며 자본주의를 적대시 하였으나 류사오치를 중심으로 정부의 능률적 경영이 중시되면서 중앙집권적 관료조직이 팽창하였다.
1955~1959년의 시기는 새로운 변혁기에 해당한다. 마오쩌둥은 실용주의 노선에 반대하면서 대중노선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마오쩌둥은 도시 중심의 공업화에 반대하고 중국의 공업화 이전에 농업집단화를 추진할 것을 주장하며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관료주의화된 당을 비판하고 당은 인민에 의해 끊임없는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 농촌의 99% 이상이 집단적인 인민공사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농업생산력은 하락하였고 자연재해로 중국 경제는 매우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우선시하였던 마오쩌둥의 농업집단화 정책은 실패로 끝나고, 공산당내 노선갈등이 다시 나타났다.
1959년부터 문화혁명 이전인 1966년 초반까지는 이념보다 다시 효율성과 전문성이 강조되는 시기가 되었으며 마오쩌둥은 2선으로 물러났다. 1959년 중공 당정치국 회의에서 펑더화이(彭德懷)는 마오쩌둥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덩샤오핑(鄧小平), 류샤오치와 연합하여 인민공사를 축소하고 자작경영을 늘였으며 급진적인 정책을 완화시켰다. 그러나 이는 잠시 동안의 실용주의 노선이 강화되는 시기이며, 이후는 다시 또 사회주의 이념 및 사상으로의 무장을 강조하는 이른바 문화혁명기가 도래하면서 중국은 혹독한 이데올로기적 실험을 경험하였다.
문화혁명기[편집]
새로운 변혁기인 문화혁명기는 크게는 1979년까지 지속되지만, 본격적인 전개는 1969년까지라 할 수 있다. 마오쩌둥은 류사오치와의 정책논쟁을 통해서 류사오치의 실용주의 노선이 불평등과 관료주의를 심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하고 군부의 린뱌오(林彪)와 연대하여 반격을 시도하였다. 즉 마오쩌둥은 이들의 노선에는 사회주의 체제를 부정하고 자본주의적 사상이 잔존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면서 사회주의 혁명의 완수를 위해 경제구조는 물론이고 사상의 개조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오쩌둥은 11전중회에서 《무산계급문화대혁명에 대한 결정》이라는 문안을 통과시키고 청년 대학생을 중심으로 결성된 홍위병을 앞세워 문화혁명을 추진하였다. 홍위병들은 공산당내 부르주아지적 요소를 몰아내기 위한 하방운동과 구시대적 문화유산 제거운동을 주도하였다. 문화혁명에는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江靑] 등 4인방도 합세하였다. 문화혁명 기간중 마오쩌둥의 노선에 반대하는 지도자들은 모두 유배되거나 숙청되었으며 당과 국가기구 등 마오쩌둥과 군중 사이에 놓인 공식기구들은 모두 불신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류사오치는 자본주의 추종자로 몰려 사망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초에는 마오쩌둥과 린뱌오 간의 연대가 무너지고 군부의 힘이 약해지면서 문화혁명초기 급진파들이 득세하는 양상이 약화되고 저우언라이와 같은 중도파가 권력을 쥐게 되었다. 문화혁명의 폐해가 너무 컸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정책의 전환보다는 문화혁명의 폐해를 수습하는 데 주력한 시기였다.
개혁개방 이후[편집]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덩샤오핑이 복권되었고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화궈펑(華國鋒)을 실각시키면서 중국의 실권은 덩샤오핑에게로 넘어갔다. 장칭 등 4인방은 문화혁명 기간 중의 죄목으로 처벌받았고 핍박받던 실용주의적 지도자들이 대거 복귀하였다. 1978년 3중전회에서 덩샤오핑은 개혁, 개방노선을 채택하면서 중국식 사회주의 근대화로의 급격한 변화를 추구하였다. 이후부터 현재까지 중국은 안정적인 실사구시형의 정책을 중심으로 발전을 추구하게 되었다.
새로운 집권세력은 농업·공업·국방 및 과학기술에서의 '4개 현대화' 추진을 정책목표로 세우고 미·일과의 국교정상화를 통해 서방과의 관계개선과 경제원조를 얻어냈으며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하여 눈부신 성장을 이룩하고 있다. 중국은 계획경제에 시장경제의 요소를 가미하여 점차 상품가격이 시장원리에 의해 결성되게 하고 있으며 기업의 독립채산제 확대, 농촌에서의 잉여생산물의 판매허용 등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여 경제발전과 생산력 증대를 최고의 정책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1980년대에도 지속적인 실용주의적 경제발전 노선은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 '선부론(先富論: 먼저 부자가 될 수 있는 사람부터 부자가 되어라)'으로 상징되는 덩샤오핑의 사상에 의해 진행되었으며,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정치개혁보다는 경제개혁과 개방에 더 중점을 두었다. 그런데 개혁, 개방이 가속화되면서 개혁과 개방의 속도에 대한 논쟁이 촉발되었고, 부정부패에 반대하고 정치적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학생, 지식인의 반대운동은 1989년 6월의 톈안먼사건으로 나타났다. 이 사태는 결국 보수파에 의해 무력진압으로 끝났지만, 당시의 총서기인 자오쯔양은 실각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상하이방을 대표하는 장쩌민이 총서기에 임명되었고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를 거치면서 개혁개방이 다시 전면적으로 가속화 단계에 진입했다. 경제 및 과학기술 등 기술관료 중심의 통치가 이뤄지면서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통해 세계경제로의 본격적인 편입이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2001년 세계무역기구 가입 이후, 중국 경제는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세계의 공장'으로 거듭났고 2008년 베이징에서 제29회 올림픽경기대회, 2010년 상하이 엑스포를 성황리에 개최하며 세계 강국으로의 부상했음을 전세계에 과시했다. 빠른 경제성장 속에서 중국의 경제발전 성과가 하나의 모델로 주목받는 동시에, 내부적으로는 선부론, 불균등 발전의 폐해에 대 조정작업이 시작되기도 하였다. 2002년 후진타오 총서기와 원자바오 총리 체제는 과학적 발전관과 조화사회론을 내세우며 소외된 저발전 지역에 대한 발전전략(동북진흥, 중부굴기, 서부대개발)을 추진하고, 성장뿐만 아니라 분배도 강조하기 시작했다.
2010년대 중국의 경제발전과 정치적 영향력 상승이 더욱 본격화되면서, 중국은 미국과 견주어 'G2'로 불리기 시작하였고 2010년대 중반 이후 미중 갈등이 본격화되면서 '신냉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현재의 지도자인 시진핑 주석은 2012년부터 집권하고 있다. 시진핑은 주석의 3연임을 금지하는 헌법을 폐기하며 장기 집권의 길을 열었으며, 집권 초기부터 실시한 반부패 운동을 통하여 정적들을 숙청하고 1인 독재의 지위를 굳히고 있다는 평가를 대외적으로 듣고 있다.
정치[편집]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당시에는 정당, 정파, 군, 기타 개인 등으로 구성된 인민정치협상회의가 중화인민공화국 정권을 탄생시킨 모체로서 국가권력기관의 핵심을 이루었으나 사실상 공산당의 절대우위가 인정되었고 1954년 이후에는 공산당이 정치권력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1949년 임시 헌법인 공동 강령의 채택 이래 중화인민공화국의 헌법은 1982년까지 4차의 개정을 거치는 동안 국가권력기관·인민해방군에 대한 권력구조 조정작업이 수반되었다. 헌법에 의하면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원수는 국가주석이고 최고권력기관은 전국인민대표대회으로 국가주석은 의전상의 지위에 지나지 않으나, 전인대 역시 공산당이 우위에 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총서기·정치국·군사위원회 주석)에 정치권력이 집중되어 있다.
형식적으로는 당과 정부는 동등한 권력을 가지나, 중국공산당은 정부보다 높은 위치에 있으며 실질적으로는 당 위원회와 당의 대표가 정부 요인 뿐만 아니라, 대학교 총장과 외국계 기업의 대표를 포함한 국가의 거의 모든 조직과 기관의 대표를 구성하게 된다. 명목상 중국공산당의 최고 지위는 총비서이고 이에 대해 전국인민대표회의가 통제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57조에 따라 전국인민대표회의를 중국 최고권력기관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가장 높은 직책을 전인대에서 선출된 의장과 부의장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전인대는 국무원과 공산당 위원회에 종속되어 있다.
실제로 국정을 움직이는 중심에는 공산당이 있으며, 당의 최고 지도집단인 정치국이 있고 정치국안에 상설집행기관인 정치국 상무위원회(政治局常務委員會)가 권력을 장악하는 구조이다. 중국공산당은 중앙뿐만 아니라 말단 행정기구까지 장악한다. 지방행정기구 역시 중앙과 같은 체제를 갖추고 있으며 각급 지방 행정기구는 해당 지역 공산당 서기가 실력자이며 공산당 부서기인 장이 행정을 관리한다.
형식적으로는 최고 기관인 전국인민대표대회(全國人民代表大會)에 권력이 집중되는 민주집중제를 취한다. 전국인민대표대회는 서구의 의회에 상당하는 기구로 32개의 성, 자치구, 직할시, 홍콩 특구 및 인민해방군에서 선출되는 대표로 구성된다. 헌법의 개정과 헌법 실시, 감독 및 기본 법률을 제정, 개정하며 국가 주석과 부주석을 선출하고, 국가 경제, 사회 발전 계획 및 진행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고 심의, 비준한다. 산하의 상무위원회가 소집하는 권한을 갖고 있다. 중국의 인민대표는 18세 이상의 중국 공민에 의하여 선출되는데, 인민대표는 직접선거를 거쳐 선출되지만, 인민대표의 상위 직책은 간접으로 선출된다. 전국인민대표대회의 대표들은 성급인민대표들의 선거로 선출된다. 사실상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제 체제로 유지되고 있으며, 그 외에 민주제당파라는 8개의 정당이 존재하지만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위성정당으로 사실상 정치적인 영향력을 거의 갖지 못한다.
국가 주석은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 선출하며, 임기는 5년으로 2회를 초과하여 연임할 수 없다. 국가주석은 국내외에 국가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며, 법률을 공포하고, 총리, 부총리, 국무위원, 각 부장, 각 위원회 주임, 국무원 비서장을 임명한다. 하지만 2018년 3월 11일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 헌법에 국가주석 임기를 폐지하였다.
총리가 수장인 국무원은 전국인민대표회의의 집행기관으로 법률에 근거한 행정법규 및 명령을 제정, 공포한다. 인민 경제, 사회 발전 계획을 수립하고 국가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한다.
인민검찰원은 중국 최고 검찰기관으로 지방의 각급 인민검찰원과 전국인민검찰원의 활동을 지도한다. 전국인민대표회의와 상무위원회의 감독을 받는다.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편집]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中国人民政治协商会议, Chinese People's Political Consultative Conference, '정협')는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이른바 통일전선 전술에 입각한 기구로서 공산당 영도 하의 다당제 합작과 정치협상의 중요기구이자, 사회주의 협상민주의 중요한 통로이자 전문 기구이다. 헌법에 명시된 기구는 아니지만 최고 국정자문기구라고 볼 수 있고, 헌법 서문에 규정된 '중국공산당의 다당제 합작과 정치협상 제도' 원칙에 의거하고 있다. 정협의 구성은 공산당과 8개의 민주당파 및 무당파인사, 8개의 인민단체, 소수민족과 각계 대표들, 홍콩·마카오 및 타이완·해외 동포의 대표 및 초청인사 등 34개에 달하는 각계 각층을 포괄한다.
정협 전국위원회는 전국인대와 마찬가지로 임기가 5년이며, 매년 봄 전국인대와 거의 같은 기간에 한 차례 소집되어 '전국 양회'로 불린다. 정협은 전국위원회와 지방위원회로 구성되고, 각급 지방위원회는 성(省)급, 지(地)급, 향(鄕)급에 설치된다. 정협의 주요 직능은 정치협상, 민주감독, 정치 참여와 논의로 규정되고, 전국위원회는 총 2,020명으로, 상무위원회는 주석 1명과 부주석 24명, 비서장과 상무위원 299명 등 총 325명으로 구성되며(2020년 6월 기준) 현재 정협 주석은 왕양(汪洋, Wang Yang)이다. 공산당 일당체제에서 기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지만, 사회가 다원화되면서 정협의 활동 또한 부분적으로 활발해지고 있기도 하다.
홍콩과 마카오의 일국양제[편집]
1997년 영국에서 반환받은 홍콩과 1999년 포르투갈에서 반환받은 마카오는 고도의 자치권을 가지고 다른 체제 하에 유지되며, 입법부의 일부 의원은 직접 선거로 선출된다. 이러한 자치 체제를 일국양제라고 한다. 그러나 홍콩인들과 마카오인들은 리보실종사건 등의 발생을 보며 지켜지지 않는 일국양제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특히 현재 홍콩같은 경우는 독립을 주장하는 본토주의가 유행할 정도이다.
타이완[편집]
타이완은 청나라 때 중국의 영토였다가, 일본과 청·일전쟁에서 진 후 센카쿠 열도(중국명:댜오위다오)와 타이완섬을 일본에 할양하였다. 이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고 중국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이 1912년에 수립되었으나, 워낙 국내 상황이 혼란스러웠던 탓에 제대로 된 통치를 하지 못했으며 타이완섬 등도 여전히 일본의 영향권 내에 속해있었다. 그러던 중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전쟁에서 무조건적인 항복으로 패망하자, 타이완섬은 당시 중국 대륙을 지배하던 국민당의 중화민국에 다시 편입되었다. 그러나 1945년부터 1949년 사이에 일어난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공산당이 중화민국 정부를 쫒아내고 대륙을 점거하였고, 한때 중국 전역을 다스리던 합법 정부인 중화민국과 장제스를 위시한 정부 수반들은 공산당을 피해 타이완섬으로 도피, 즉 국부천대를 하였다. 이후 마오쩌둥은 1949년 10월 1일에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였으나, 정작 1970년대까지는 미국을 포함한 다수의 서양 국가들과 국제 사회는 국민당의 중화민국을 중국의 유일 합법 정부로 인정하고 있었으며 UN에서의 상임이사국 지위도 중화민국이 여전히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1971년에 베트남 전쟁을 겪으며 외교적 돌파구가 필요했던 미국과, 국제적 고립에서 탈피하고자 했던 중화인민공화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자 그해 10월 25일에 2758호 결의안으로 중화민국의 중국 대표권을 탈취해갔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은 90년대 이후로 경제 개방 정책을 펴며 국력을 급격히 신장시켰고, 이 증대된 국력을 이용하여 중화민국을 외교적, 국제적으로 압박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하나의 중국 정책을 주장하며 중화민국의 국체를 인정하지 않으며, 현재 타이완섬의 중화민국은 옛 중화민국의 참칭 정부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대로 중화민국 측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을 반란 세력으로 보고 있으며, 여전히 중국 대륙의 합법적인 정부는 중화민국이라고 주장하면서 양안 관계는 아직까지도 안정을 찾을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행정기관[편집]
중화인민공화국의 최고행정기관은 국무원으로 즉 중앙인민정부이다. 국무원은 내정, 외교, 재정, 경제, 문화, 교육, 위생, 공공사업 등 행정사무를 조직하고 관리하여 행정결정과 명령을 반포하고, 전국 지방 각급 국가행정기관의 사업을 통일적으로 지도한다. 국무원은 총리, 부총리, 국무위원, 각 위원회 주임, 각부부장, 심계서 계장, 비서장으로 구성된다. 28개의 부서로 조직되어 있다.
사법[편집]
중국의 사법부는 광의의 차원에서 법원, 검찰, 변호사를 모두 포괄한다. 중국의 최고 재판기관으로서 최고인민법원, 최고 검찰기관으로서 최고인민검찰원이 존재하고, 각 급의 인민법원과 전문법원, 각급의 인민검찰원과 전문 인민검찰원으로 구성된다. 중국에서 법원과 검찰은 양면관계에 있다. 양 기관은 같은 행정직급에서 각각 재판과 공소를 담당하는 동등한 사법기구이나, 검찰이 법원의 판결을 감독하는 '감독-피감독 관계'에 있다. 즉, 헌법에 의거하여 검찰은 '국가의 법률 감독기관'으로서 정부뿐만 아니라 법원에 대해서도 '법률 감독'을 실시한다. 따라서 실제 관계에서는 검찰이 법원보다 우위에 있게 된다. 법원과 검찰은 공산당 정법위원회(政法委員會)의 지도하에 활동하는데, 공안 계통에서 중앙 및 지방의 정법위원회 서기를 맡는 경우가 많아서 법원과 검찰이 공안국보다 낮은 정치적 지위에 놓이곤 해왔다.
행정[편집]
현재 중국의 행정구역 체계는 가장 큰 단위에서 읍면급 단위까지 보편적으로 성급-지급-현급-향급 4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지역에 따라 중간에 생략되는 단계도 많아서 매우 복잡하다. 한국은 같은 구간을 광역-기초-읍면동 3단계로 나누므로 차이가 있다. 중국을 나누는 가장 큰 단위의 행정구역은 성급행정구(省级行政区)이다. 성(省), 직할시(直辖市), 자치구(自治区), 특별행정구(特别行政区)가 있다. 22개 성, 4개 직할시, 5개 자치구, 2개 특별행정구가 있다.
각 성에는 한국의 도청 소재지에 해당하는 성회(省会)가 존재하며, 그 외에도 인구가 대단위로 있는 직할시도 존재한다. '성회' 자체가 성도, 도청 소재지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충칭의 경우 인구가 약 7,000만 명에 달했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좀 정책적으로 줄인 상태(그래도 3,000만 명 이상). 충칭이 무진장 크기도 하지만. 거의 모든 중국의 시는 한국의 도의 면적과 비슷하다. 그리고 각 성의 면적은 한국보다 넓은 성들이 많다. 따라서 면적으로 비슷하게 대응시키자면 중국의 시, 지구-한국의 도, 중국의 현, 자치현, 구-한국의 시 이렇게 대응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쓰촨성 성 소재지인 청두의 면적만 해도 경기도, 인천광역시, 서울특별시 면적을 합친 것과 거의 비슷하다.
중국의 규모를 알 수 있는 대목으로 중국의 22개 성 중 10개 성은 한국보다 인구가 많으며 5개 성과 4개의 자치구는 한반도보다 면적이 넓다. 경제력에서도 거의 국가급이다. 가장 큰 인구와 경제규모를 가진 광둥성의 GDP는 한국과 비슷하다.
성과 같은 등급의 행정구역으로 주요 도시들을 직할시로 지정하였다. 과거 중화민국이 대륙을 통치할 당시에는 12개의 직할시가 있었으나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이래로 계속 격하되어 지금은 베이징(北京), 톈진(天津), 상하이(上海), 충칭(重庆) 4개가 남아있다. 유의할 점은 직할시라는 단위는 어디까지나 해당 자치체의 법적 위상을 분류하는 용어일 뿐, 중국의 직할시들의 풀네임은 그냥 '○○시'이다. 예를 들면 대한민국의 광역시 중 하나인 부산의 풀네임은 "부산광역시"지만, 상하이의 풀네임은 그냥 "상하이시"다. 주소를 쓸 때는 물론, 각 행정기관 이름에도 "직할시" 세 글자가 붙는 경우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예를 들어 상하이시 인민정부(上海市人民政府), 상하이시 공안국(上海市公安局) 등 정부기관명에도 "직할시"가 붙지 않는다.
성과 같은 등급의 다른 행정구역인 자치구는 소수민족이 모여사는 곳으로 신장위구르자치구, 티베트자치구, 닝샤후이족자치구, 네이멍구자치구, 광시좡족자치구 5곳이 있다. 이 곳은 제한적인 법령 제정권과 지역 언어 지정 및 사용 권리, 지역 경찰 등의 제한적인 자치 권한 등을 보유하고 있다.
또 다른 성급 행정구역인 특별행정구는 홍콩, 마카오 2개가 있는데 이전의 오랜 영국, 포르투갈 식민지배를 고려해 중국에 반환된 이후에도 1국가 2체제에 따라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별개의 국가로 취급될 만큼 고도의 자치권을 누린다. 여권/비자, 화폐, 법령, 올림픽 출전 등의 면에서 느낄 수 있다. 또한 중국 본토와 홍콩, 마카오를 각각 오갈 시에도 출입경 심사가 필요하다.
이들 지역 휘하의 행정구역은 아래 나올 중국의 일반적인 행정구역 편제가 아닌 옛 식민지 시절의 행정구역을 따른다. 홍콩은 영국 식민지 시절에 나뉘어진 구(區)를 사용하는데 한국의 자치구처럼 약간의 자치권이 있다. 반면 마카오에 설치된 당구(堂區) 는 한국의 일반구처럼 법인 지위가 없다. 따라서 마카오 특별행정구 정부가 마카오 전역의 행정을 담당한다.
타이완 성의 관할구역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이 지배하는 댜오위다오를 제외하고 중화민국이 영유하고 있어 명목상의 행정구역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푸젠성의 경우 일부 도서 지역은 중화민국이 지배하고 있어 분단되어 있다. 하이난성의 작은 섬들 중에도 실질적으로 다른 나라(중화민국 포함)들이 영유하고 있는 곳들이 많다.
각 성급 행정구역은 모두 한자 한 글자의 약자를 가지고 있는데, 지역 이름에서 한 자를 따온 경우도 많지만, 과거의 지역 이름에서 가져오거나 춘추전국시대 나라 이름에서 가져온 것 등도 많다.
명칭 약칭 성회/수부/정부소재지 둥베이 지방(东北地方) 헤이룽장성(黑龙江省) 黑(Hēi/헤이) 하얼빈시(哈尔滨市) 지린성(吉林省) 吉(Jí/지) 창춘시(长春市) 랴오닝성(辽宁省) 辽(Liáo/랴오) 선양시(沈阳市) 화베이 지방(华北地方) 베이징시(北京市) 京(Jīng/징) 퉁저우구(通州区) 톈진시(天津市) 津(Jīn/진) 허시구河西区) 허베이성(河北省) 冀(Jì/지) 스자좡시(石家庄市) 산시성(山西省) 晋(Jìn/진) 타이위안시(太原市) 네이멍구자치구(内蒙古自治区) 內蒙古(Nèiměnggǔ/네이멍구) 후허하오터시(呼和浩特市) 화둥 지방(华东地方) 상하이시(上海市) 沪(Hù/후) 申(Shēn/선)
황푸구(黃浦区) 안후이성(安徽省) 皖(Wǎn/완) 허페이시(合肥市) 푸젠성(福建省)[15] 闽(Mǐn/민) 푸저우시(福州市) 장쑤성(江苏省) 苏(Sū/쑤) 난징시(南京市) 장시성(江西省) 赣(Gàn/간) 난창시(南昌市) 산둥성(山东省) 鲁(Lǔ/루) 지난시(济南市) 저장성(浙江省) 浙(Zhè/저) 항저우시(杭州市) 타이완성(台湾省) 台(Tái/타이) 타이베이시(台北市) 중난 지방(中南地方) 허난성(河南省) 豫(Yù/위) 정저우시(郑州市) 후베이성(湖北省) 鄂(È/어) 우한시(武汉市) 후난성(湖南省) 湘(Xiāng/샹) 창사시(长沙市) 광둥성(广东省) 粤(Yuè/웨) 광저우시(广州市) 하이난성(海南省) (Qióng/충) 하이커우시(海口市) 광시 좡족 자치구(广西壮族自治区) 桂(Guì/구이) 난닝시(南宁市) 홍콩 특별행정구(香港特别行政区) 港(Gǎng/강) 중사이구(中西區) 마카오 특별행정구(澳门特别行政区) 澳(Ào/아오) 마카오반도(澳門半島) 시베이 지방(西北地防) 간쑤성(甘肃省) 甘(Gān/간) 陇(Lǒng/룽)
란저우시(兰州市) 칭하이성(靑海省) 青(Qīng/칭) 시닝시(西宁市) 산시성(陕西省) 陕(Shǎn/산) 秦(Qín/친)
시안시(西安市) 닝샤 후이족 자치구(宁夏回族自治区) 宁(Níng/닝) 인촨시(银川市) 신장 위구르 자치구(新疆维吾尔自治区) 新(Xīn/신) 우루무치시(乌鲁木齐市) 시난 지방(西南地方) 충칭시(重庆市) 渝(Yú/위) 위중구(渝中区) 구이저우성(贵州省) 黔(Qián/첸) 贵(Guì/구이)
구이양시(贵阳市) 쓰촨성(四川省) 川(Chuān/촨) 蜀(Shǔ/수)
청두시(成都市) 윈난성(云南省) 滇(Diān/뎬) 云(Yún/윈)
쿤밍시(昆明市) 티베트 자치구(西藏自治区) 藏(Zàng/짱) 라싸시(拉萨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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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편집]
군대[편집]
중국의 군대편성 특징은 인민해방군과 중국공산당 간의 밀접한 관계에 있다.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국가중앙군사위원회와 동일한 조직 및 인원)가 인민해방군의 조직과 활동을 통제하고, 인민해방군은 '국군'(國軍)이 아니라 '당군'(黨軍)으로 불리는 등 다른 나라의 군과 구별되는 많은 전통을 갖고 있다. 즉 인민해방군은 사회주의 정권 수립 전 공산당에 의해 창설된(1927년) 당의 군대이자,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였고, 당의 군대임과 동시에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국민의 군대라는 점이 강조되어왔다. 실질적인 최고지도자가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직책을 수행해왔고 현재 당 중앙군사위원회는 주석 1인(시진핑), 부주석 2인, 위원 4인으로 구성되어 전국의 무력을 지휘하며 주석책임제를 실시하고 있다.
당 중앙군사위원회가 전 무장역량에 대해 군정·군령 체계를 총괄적으로 지휘한다. 중국 헌법에 따르면 국가중앙군사위원회가 군을 지휘한다고 규정되어 있지만, 당 중앙군사위원회가 국가중앙군사위원회를 겸직하는 방법을 통하여 당이 인민해방군을 완전히 장악하는 형태를 취한다. 공산당의 군 통제는 당 중앙군사위원회의 통솔, 군정(軍政) 지도, 단위별 정치위원제, 당 조직에 의한 말단조직 장악 및 동향 파악 등의 형태로 강력하게 정착되어왔다. 현재 중앙군사위원회는 6개 부와 1개의 판공(辦公)청, 3개 위원회(기율검사위원회, 정법위원회, 과학기술위원회), 5개 직속기구로 이뤄져있고, 5개 전구(戰區: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에 대한 군령(軍令: 작전지휘), 6개 군종(육군, 해군, 공군, 로켓군, 전략지원부대, 연근보장부대)에 대한 군정(軍政: 영도관리)을 장악하고 있다. 2020년 현재, 중국군은 총 203.5만 명으로, 지상군 97.5만 명, 해군 25만 명, 공군 39.5만 명, 로켓군 12만 명, 전략지원부대 14.5만 명, 기타 15만 명이다. 그 외에 내부치안 병력인 중국 인민무장경찰부대(약칭 '무경') 150여만 명이 2018년 인민해방군의 지휘하로 들어왔고 정식으로 정규군이 되었다.
중국군은 1980년대 중반 이후 30여년 이상 동안 군 현대화를 실시해왔으나, 현대전에 부응하는 전투력을 갖추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있다. 특히, 시진핑 정권 들어 '싸워서 이기는 군대' 건설, 즉 '강군몽'(强軍夢)은 강대국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나 여전히 많은 도전이 남아있다. 중국군은 1980년대 중반 총 규모 400만 명에서 최근 200만 명 수준으로 크게 감소해왔고, 2015년 이후 중앙군사위원회 조직 및 체계 개편, 7개 군구의 5개 전구로 개편 등의 개혁을 실시했다. 또한, 중국군의 현대화 목표는 '현대화, 정보화, 합동화'로 요약되고, 2020년까지 기계화·정보화의 기본 달성, 2035년까지 현대화 기본 실현, 2050년까지 '세계 일류 군대'로 거듭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중국은 국제연합(UN)의 다섯 상임이사국 중 하나로서, 급속한 경제성장을 기반으로 글로벌 정치경제적 영향력이 크게 증대되면서 미국과 더불어 G2라고 불리기도 한다. 특히, 최근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기치로 내세우며 '강국화'(强國化) 의지를 명확하게 표출하면서 중국위협론 또한 크게 증대되고 있다. 중국의 외교안보 전략은 글로벌 부상의 의지와 연동되어 진화해왔는데, 외교 대상과 내용을 기준으로 대국(大國), 주변국, 개발도상국, 다자외교로 분류하여 각각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즉, "대국은 관건적 대상이고, 주변국은 가장 중요하며, 개도국은 중국 외교의 기반이고, 다자외교는 중요한 무대"라고 구분하였다. 하지만, 2017년 제19차 당대회 이후 중국이 추구하는 세계와 지역 구상 및 전략을 제시하면서 보다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대외관계 구축을 위해 노력 중이다. 즉, 중국 특색의 대국외교, 미국 등과의 신형국제관계 건설, 글로벌 거버넌스 체제 개혁, 인류운명공동체 구축, 일대일로 등을 제시하면서도, 평화공존 5원칙(주권의 상호존중 및 영토보전, 상호불가침, 상호내정불간섭, 호혜평등, 평화공존) 및 독립·자주·평화 외교정책을 기초로 평화·발전·협력·공영(상생)의 기치 아래 세계평화 수호 및 공동발전을 촉진해나간다는 기존 대외정책 기조와 크게 벗어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빠른 부상과 더불어 미중갈등이 격화되면서 중국의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대외관계 구축에 대해 많은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중국은 중국의 부상이 결코 '투키디데스의 함정'(Thucydides Trap)에 빠지지 않을 것임을 여러 차례 강조해왔고, 강국화 일정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가능한 한 미국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면서도 국제사회 내 위상강화와 보다 적극적이고 책임지는 대국으로서의 행보를 이어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시진핑 정부는 구체적인 전략과제로 주변 외교, 대국 관계, 개발도상국과의 협력, 다자외교, 일대일로 건설, 올바른 의리관(義利觀), 해외에서의 권익 수호 등을 제시하고 적극 이행하고 있으며, 주요 국제 및 지역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동참하면서 국제사회 내 위상 강화를 도모중이다. 하지만, 미중갈등의 격화 과정에서 신강 및 티벳, 홍콩·대만, 조어도, 남중국해 문제 등이 국제적으로 논란이 되면서, 중국의 주권, 영토보전, 안보상의 이익에 관련된 사안의 경우 과거에 비해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태도를 지속 유지할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2019년 9월 현재, 중국의 수교국은 총 180개국으로,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다. 1971년 10월 25일 유엔 가입과 동시에 상임이사국으로 인정받았고, '하나의 중국' 원칙을 내세우면서도 자유진영과의 관계회복을 이루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중국은 외교의 최대목표를 혁명의 보전과 정권 안정에 두고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며 반미, 반서방 친소외교를 1960년대까지 지속했지만, 1960년대 중반 이후 중소국경분쟁이 시작되면서 소련에 대항하는 반패권주의를 기본노선으로 삼아 미국, 일본과 협력을 도모하고 제3세계와의 유대강화에 노력을 경주했다. 1972년 미중 정상회담에 이어 1979년 미국과 국교수립 및 관계정상화를 이루었고, 일본과도 1972년 '저우언라이-다나카[田中] 공동성명' 이후 1978년 중·일평화우호조약을 체결하였다. 덩샤오핑 시대 외교정책은 철저히 실용주의적이고 국익을 중시하며 서방과의 경제협력을 얻어내는데 집중되었고,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등장 이후에는 소련과의 관계개선에 착수하여 1989년에는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여 양국간 정상회담이 열리기도 했다. 하지만 1989년 톈안먼사건의 무력진압으로 중국은 몇 년간 외교적으로 고립되기도 했고, 1999년 5월 발생한 NATO(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북대서양조약기구)의 유고슬라비아 중국대사관 폭격사건으로 긴장관계로 들어서기도 하였다.
중국은 영국과의 협상을 통하여 1997년 홍콩을 반환받았으며, 이어 1999년 12월에는 포르투갈로부터 마카오를 반환받았다. 중국은 홍콩과 마카오에 이후 50년간 각각 기존의 경제 사회체제 유지를 보장하는 '일국양제'(一國兩制)론을 천명하면서, 타이완 문제에도 적용하여 '하나의 중국'이라는 전제 하에 타이완이 중국과의 통일에 응하면 독자적인 군대보유와 경제제도를 유지함으로써 자치를 보장하는 통일정책을 내세우고 있다. 양안관계는 1987년 과거의 대립을 넘어 다각적인 양안간 교류·협력을 시작하였고 교류·협력이 지속되고 사회·경제적 통합이 강화되는 동시에 긴장국면이 병행되기도 했다. 하지만, 2016년 차이잉원(蔡英文, Tsai Ing wen) 후보의 타이완 총통 당선 이후 양안관계 진전의 속도가 조절되어왔고, 홍콩 시위 등 정치적 불안정, 미중 갈등의 격화 등과 더불어 양안관계 또한 불협화음과 관계발전의 기복이 불가피해 보인다.
아시아 전략[편집]
중국이 그간 일관된 전략으로서 아시아 지역 전체를 통괄하는 대외전략을 추진하였는가는 의문이다. 중국은 1990년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기구(APEC)에 가입함으로써 아시아지역 문제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또 베트남, 한국, 인도네시아, 싱가폴, 말레이시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크스탄 등 아시아 국가들과 적극적으로 수교를 하였다. 2001년에는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러시아 등 6개국이 함께 상해협력기구(SCO)를 설립하였다. 2002년부터는 동남아 국가연합(ASEAN)과 협력을 본격화하면서 그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하였다. 2003년부터는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6자 회담을 주선하기도 하였다. 시진핑 주석은 더 나아가 2013년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상 최초로 중국이 아시아 전체를 전략공간으로 하는 '일대일로' 구상을 추진하였다. '일대일로'는 비단 아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중국은 이처럼 아시아에서 양자 및 다자 관계에 적극 참여하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점차 넓혀나갔다. 브레진스키가 그의 저서 "거대한 체스게임(1997)"에서 크게 우려한 중국-러시아-이란을 연결하는 전략동맹을 실제 형성하면서, 미국과 서구 주도의 국제질서에 대항하는 세력으로서 아시아 전체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대외정책을 살펴보면, 중국은 그간 지리적 공간 중심의 전략보다는 시대적인 전략방향에 맞춰 나름의 유형화를 통해 자신들의 대외전략 목표를 설정하였다. 따라서 상기의 움직임들을 중국의 대아시아 정책 일반과 연동지어 설명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중국은 2000년대 들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국제질서 형성에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대외정책 영역을 세분화하였다. 2002년 제16차 공산당 대회, 2007년 제17차 공산당 대회에서 대외정책의 영역을 '발달국가,' '주변국가,' '제3세계,' '다자외교'로 구분하기 시작하였다. 아시아 외교는 이들 모든 구분을 다 포함한다. 아시아에는 러시아, 인도, 일본과 같은 대국이 포함되어 있고, 스리랑카, 캄보디아, 방글라데시, 아프가니스탄 같은 제3세계 국가들도 존재하며, 이미 언급한 바대로 APEC, ASEAN, ARF(아세안지역안보포럼), 상해협력기구,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와 같은 다자외교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1년 4월 후진타오 주석은 보아오 아시아논단 강연에서 중국은 시종일관하게 아시아를 중국 대외정책의 가장 중요한 위상에 놓고 있다고 언급한 바도 있다. 그러나 중국의 실제 대외전략은 지역에 기반하기보다는 중국 당대회에서 구분한 4가지의 큰 틀 안에서 추진된다고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주변외교 전략[편집]
중국의 4대 대외정책 영역 가운데 우리의 주목을 가장 끄는 것은 '주변외교전략'이다. 이는 주변을 네 개의 다른 주변(四夷), 즉 서융(西戎)・남만(南蠻)・동이(東夷)・북적(北狄)으로 구분하고 경계했던 과거 중국 중심의 대외관계 사상과도 맞닿아 있다. 중국이 안보적인 측면에서 가장 중시하는 영역이다. 2012년 3월 원자바오 총리의 정부공작보고에서 중국 외교의 새로운 포석으로서 '주변국가,' '발전중인 국가,' '발달 국가,' '다자' 외교로 순서를 정한 바 있다. 그 이후 중국의 부상으로 인해 미국과의 '대국 외교'가 잠시 그 수위를 차지하기는 했지만, 이러한 주변국 외교에 대한 강조는 시진핑 시기 들어 더욱 강화되었다. 시진핑 주석은 집권하자마자 동년 10월 중국 최초로 중앙주변외교공작 좌담회를 직접 주재하였다. 주변국 외교를 중국의 두개의 백년 목표와 중국의 꿈을 실현하는 데 있어 중시한다는 입장을 분명하게 표명한 것이다. 중국의 꿈을 실현하는 데 중국은 과거처럼 세계와 주변의 '중심국가'로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물론 미중 전략경쟁의 시대에 '중국 위협론,' '중국 혐오론' 등이 점차 확산되고 있어, '중국 중심론'의 주장은 가급적 신중하게 다루려 할 것이다.
중국의 주변국가 전략은 점차 더 정교화되고 있다. 그리고 중국은 다양한 형태로 아시아 다자외교에 참여하고 있다. 상해협력기구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6자회담은 개최자로서 깊이 개입하였고, 10+1 아세안 회의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남아시아 협의회는 적당한 수준에서 참여하면서, 미국과는 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나누는 공존형 분할 전략을 추진하였다. 일대일로 구상은 마오쩌둥이 중시했던 중국의 동부와 북부 지역 대신, 미국과의 직접적인 마찰과 충돌을 피하면서 상대적으로 저항이 적은 서부 지역으로 적극 진출하려는 전략구상이다. 특히 군사외교적인 접근 대신 모든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프라 건설을 위한 투자와 경제 지원을 통해 영향력을 자연스레 확대하는 전략이다. 중국은 이미 2003년 '이웃과 화목하고(睦隣), 이웃과 화평하며(安隣), 이웃과 같이 부유해지는(富隣)' 것을 목표로 하는 주변외교 3대원칙을 천명한 바 있다. 2007년 제17차 공산당 대회에서는 이웃을 선의로서 대하고, 이웃을 동반자로 삼는 외교정책을 추구한다고 하였다. 2012년 제18차 당대회에서는 이러한 원칙을 강조하고, 다시 자신의 경제발전이 이웃 국가들에게 혜택이 되게 한다는 원칙을 강조하였다. 특히 18차 당대회에서는 주변국 외교를 중국 외교에서 가장 중요(重中之重)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시진핑 시기 들어 중국은 주변국 외교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시진핑이 추구한 미국과의 평등성에 기초한 새로운 강대국 관계가 실현되기 어렵고, 오히려 전략경쟁이 가속화되면서 주변국들의 전략적 중요성은 더욱 부각된 것이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소련과 마찰을 빚은 1960년대 초, 그리고 천안문 사태로 국제적으로 고립된 1990년대 초에 주변국들과의 관계를 대폭 강화하는 조치를 취했었다. 시진핑 주석은 '친성혜용(親誠惠容)'의 대주변국 외교원칙을 추가하였다. 즉, '주변국들에 대해 친밀하고, 성의를 다하며, 혜택을 베풀고, 관용한다'는 것이다. 이는 미중 전략경쟁시대 중국판 Soft Power 전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외교상황에서는 미중 전략경쟁이 격화되고, COVID-19의 발단국으로써 비난받자 중국이 공격적인 태도로 전랑외교라는 비난을 받게 된 것은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지도부는 주변국 외교의 공간으로서 아시아 외교를 더욱 중시하고 있다. 시진핑 시대 중국은 이미 '중국 특색의 주변국 외교'를 추진하는 방안을 적극 모색 중이다. 2014년 상해에서 개최된 제4차 아시안 신뢰구축 정상회의(CICA)에서 "아시아의 안보는 아시아인이 해결한다"라는 유명한 화두를 이미 던진 바 있다. 이는 마치 아시아판 먼로선언이 아닌가 할 정도로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시진핑은 더 나아가 "공동안보, 포괄안보, 협력안보, 지속가능한 안보"를 내건 '아시아 안보관'을 제시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아시아는 상호협력과 공동번영을 핵심원칙으로 한 '아시아운명공동체'를 추진해야 한다는 목표를 제시하였다. 미중 간의 전략경쟁이 본격화되고, 미중 간의 경제 탈동조화의 추세가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중국은 보다 적극적으로 중국 중심의 아시아 지역질서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주변국가에 대한 관심 증대[편집]
시진핑 시기 중국의 주변국 외교에 대한 중시와 점증하는 관심은 중국내 학계에서 이미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중국주변학"이라는 학문적 분야가 새로이 탄생하였다. 2018년 상해 푸단대학에 '‘중국과 주변국가관계 센터'가 설립되었다. '중국주변외교연구총서'가 발간되었고, '중국주변외교학간(中國周邊外交學刊)'과 같은 정기 간행물은 물론이고 '중국주변외교연구논단'과 같은 토론회, 중국주변외교관련 보고서와 연구서들이 최근 쏟아져 나오고 있다.
더 나아가 중국 외교수사에서 간헐적으로 나오던 '주변'이란 개념이 이제는 본격적인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육지로 인접한 14개국과 해상으로 연결된 8개국을 넘어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중동 등을 다 포괄하는 대주변 개념과 연구들이 제시되었다. 중국 남해-대만해-동해-황해-일본해를 연동시켜 사고하는 오해연동(五海聯動)의 전략개념도 유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미중 전략경쟁 시기 미중 전략경쟁에 함몰되기보다는 자신의 전략이익을 지키려는 국가군들을 총칭하는 중간국가라는 개념도 나왔다. 여기에는 일본, 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의 국가들을 포함하고 있다. 중간국가 개념은 과거 미소 냉전시기 이들 초강대국으로부터 중국의 생존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중간지대론을 제시하고, 이들과 유대를 강화하고자 했던 중국의 1960년대 외교정책을 연상하게 한다. 현재 중국이 생각하는 천하 3분론은 미, 중, 그리고 이들 중간국가와 서유럽 국가들의 병존체제를 의미하며, 이들 제3지대는 향후 중국이 적극적으로 개척해야 할 외교공간이 된다.
한국에 대한 함의[편집]
한국은 중국의 주변국 외교에서 대단히 중요한 전략적 지위를 차지한다. 중국의 입장에서 한국은 '주변국가'이면서 '중간국가' 군에 속하며, 미중 전략경쟁에서 중국이 당분간은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고품질의 반도체 생산 역량을 갖춘 국가이다. 미국이 한국을 동북아 지역의 안정과 평화를 위한 핵심축이라 하였지만, 중국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로 한국은 중국의 주변외교전략의 핵심축이 된다. 중국의 주변국 외교 중시는 한국에게 그만큼 선택의 압력이 가중되고, 향후 미중 전략경쟁에서 더욱 고도의 외교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당분간 중국은 한국과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만, 한국의 신정부가 반중(反中)정책으로 전환하는 경우, 강력한 보복으로 맞설 개연성이 크다. 더구나 중국의 주변부 연구가 강화되는 것은 그만큼 중국의 전략 역시 풍부하고 세밀해질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중국 내의 변화와 연구동향에 대한 면밀한 관찰이 필요하다. 안타까운 것은 현재 한국의 외교안보 생태계가 이를 따라가기에는 너무나 조악하고, 정치 지도자의 관심이나 이해도는 현저히 뒤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국력[편집]
정치적으로는 UN 상임이사국 P5이자 핵무기 보유국이고 ICBM, SLBM 기술 모두 가지고 있다. 무기 수출은 3위를 하고 있다. 우주 분야에서도 러시아, 미국 다음으로 유인우주선, 우주도킹을 자력으로 할 수 있는 국가다. BRICS, 상하이 협력기구, AIIB의 구성원이기도 하다. 군사력에서 병력수로는 세계 최대 규모이며 세계 국방비 순위는 미국에 이은 세계 2위로 미국의 3분의 1 정도다. GFP에서는 군사력 3위로 평가되고 있다.
최근 몇년 간 빈부격차 수준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갔고 중국에서도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실제로 중국인 13억명 중 절반이 넘는 6억 명은 월수입이 1,000위안(한화 약 17만 원)도 벌지 못한다고 한다. 예전과 다르게 현재 중국 물가를 감안하면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수준. 이는 통계에서도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를 한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2012년 이후로 중국의 지니 계수가 0.7를 넘어섰고 2021년 기준으로는 중국의 지니 계수가 0.8을 바라보는 지경까지 들어섰다. # 지니 계수는 0에 가까울수록 빈부격차가 안정, 1에 가까울수록 완전불평등을 나타내는 지표이다. 0.5 이상은 폭등유발수준, 0.7은 사회적 혼란을 야기할 정도의 수준이다. 따라서 중국 정부는 중국 내의 빈부격차를 세계의 사회적 문제로 지정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세계 각국의 도움을 받아 여러 정책을 시행하고 있으나 별 다른 효과가 없어서 국민들의 질타를 받고 있다.
경제[편집]
중국은 2020년 경제규모(GDP)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교역규모 세계 1위, 외환보유고 세계 1위, 외국인 투자유치 세계 2위 등 빠른 경제발전을 이뤄왔다. 개혁개방과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후 '세계의 공장'을 넘어 '세계의 시장'으로 발전해왔고, 최근 첨단산업 및 신산업을 빠르게 육성하면서 질적 발전 또한 빠르게 제고하고 있다. 하지만, 경제 불균형, 취업 및 실업 문제, 환경 문제 등 많은 당면과제 또한 안고 있다.
- 경제현황
2020년 중국의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명목 14조 7227.3억 달러로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교역 규모 4조 6462.6억 달러(세계 1위), 외환보유고 3조 2165억 달러(세계 1위), 외국인직접투자 유치는 1630억 달러(세계 1위)를 기록하였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주요 국가 중 유일하게 플러스 성장(2.3%)을 기록하면서 미국과 경제규모 격차를 좁혔고, 사상 처음으로 외국인직접투자유치 세계 1위를 달성하였다. 2012년 이후 경제성장률이 연 8% 이하로 내려와 과거와 같은 고속성장은 아니지만 연 6% 수준의 중속성장을 유지하고 있고, 2019년 1인당 GDP(명목)가 처음으로 1만달러를 넘은 이래 2020년 10,504 달러를 기록하였다. 현재와 같은 추세라면, 2020년대 중후반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 경제대국으로 오르고 선진국 달성 기준(세계은행)의 주요 기준인 1인당 GDP(명목) 2만 달러 또한 달성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하지만, 타이완의 지역별 경제발전에는 많은 불균형이 존재한다. 개혁개방 이후 동남 연해지역의 주요 도시들이 빠른 경제성장을 이룩해온 반면, 중서부 내륙지방의 발전은 뒤쳐져왔고 사회주의 시기 주요 공업지대였던 동북 지역은 노후 공업지대로 낮은 성장률을 보여왔다. 2020년 경제규모 10조 위안을 넘은 성급은 두 개로, 광둥성이 11조 761억 위안, 장쑤성이 10조 2719억 위안을 기록하였고, 두 개 성의 GDP 합계는 하위(17-31위) 15개 지역보다 많으며 광둥성의 GDP 규모는 가장 낮은 티베트자치구(1903억 위안)의 59배 수준이다. 둥베이삼성(헤이룽장성, 지린성, 랴오닝성)의 전국 GDP 비중은 2000년 9.9%에서 2020년 5.0%까지 하락하였고, 2020년 경제성장률 또한 전국 평균(2.3%)보다 하회하였다. 도시 GDP 규모 순위에서도 2020년 총 23개 도시가 1조 위안을 넘어섰고 상하이(3조 8701억 위안)와 베이징(3조 6103억 위안)이 3조 위안 대, 선젼(2조 7670억 위안), 광저우(2조 5019억 위안), 충칭(2조 5003억 위안), 쑤저우(2조 171억 위안)가 2조 위안 대를 기록하였는데, 대부분이 동남연해 지역의 도시였다.
경제발전사[편집]
경제발전시기[편집]
중화인민공화국은 농업을 중심으로 한 대생산국으로 특히 1949년 정부수립 후 각종 산업의 생산고가 점차 증가일로를 걸어왔다. 제2차세계대전 후 중화인민공화국의 산업·경제의 발전단계는
- 1949~52년의 경제부흥기
- 1953~57년의 제1차 5개년계획기
- 1958~60년의 제2차 5개년계획기 (2년 앞당겨 달성)
- 1961~63년의 조정기
- 1966~70년의 제3차 5개년계획기
- 1971~75년의 제4차 5개년계획기
- 1976~85년의 경제발전 10개년계획
을 착수했으나 결함이 노출되어, 1979~81년의 경제조정기를 거쳐 1986~90년의 제7차 5개년계획에 이어 2010년까지 제9차 5개년계획에 들어갔다.
경제부흥기[편집]
이들 각 시기의 특징은, 경제부흥기에는 1952년에 이미 전전의 최고생산고에 도달하여 문자 그대로 경제재건에 성공했고, 제1차 5개년 계획기(1953~57년)에는 소련의 원조로 중공업의 확충이 단행되었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말기에는 (a) 중공업의 중시와 농업의 경시, (b) 중공업 편중, 경공업 경시, (c) 대규모화·기계화의 무리한 목표설정에서 오는 자금의 낭비와 국내기술의 부실, (d) 공업의 내륙편중 등의 결함이 노정되었다.
대약진운동[편집]
1958년에 시작된 제2차 5개년계획(대약진운동)에서, 마오쩌둥 전 주석의 정책으로 계획경제를 발전시키고자 했다. 경제부흥기의 미해결문제의 해결을 위해 (a) 농업과 지방공업, (b) 경공업과 중공업, (c) 중앙공업과 지방공업, (d) 대규모 공업과 소규모 공업, (e) 재래식 생산과 외래식 생산의 조화를 지향했고, 이 기간중 공업생산 증가율은 40%에 달했다. 그러나 공업발전은 내용적으로 극히 불건전하여 (a) 생산품이 품질조악으로 사용가치가 적었고, (b) 재래식 생산 방식은 원료, 노동력, 연료의 낭비를 초래했고, (c) 기술문제가 등한시되었기 때문에 사고의 발생률이 높았으며, (d) 공업부문의 균형적 발전이 저해되었다.
인민공사[편집]
농촌을 현대화시키기 위해 1958년부터 인민공사가 조직되었다. 소위 대약진기라는 이 시기에 이어 1959~61년에 걸친 연속적인 자연재해로 인민공사에 대한 회의가 고개를 들어 농업생산은 크게 줄고 공업원료는 부족하여 경공업생산도 그 파급으로 타격을 입는 등 농·공 사이의 균형이 크게 문제가 되고 게다가 1960년 7월 국경 분쟁으로 인한 중·소대립의 악화로 소련의 공업전문가들이 본국으로 돌아가고 소련의 무상원조, 자재지원도 중단되어 심각한 경제위기가 찾아들었다.
경제조정기[편집]
그래서 1961년부터는 경제조정기가 시작되어 농업재해, 대약진의 실패, 소련의 원조중단 등에서 온 위기를 극복하는 데 노력이 집중되었다. 1961년에는 조정·공고화·충실·생산제고 등의 목표로 정책이 전환되어 공업의 규모는 대폭 축소되었다. 1962년부터 농업생산이 호전하여 경제 전반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같은 해에는 농업, 경공업, 중공업의 순차적인 발전이 도모되어 공업의 위치가 2차적인 것이 되었으며 공업구조 내부의 조정이 중시되었고, 농업 지원도의 재고로 공업의 내적 충실화가 모색되었다.
현대공업체제[편집]
3차 5개년계획(1966~70년) 실시 이후 독립되고 거의 완전한 근대공업체제의 건설단계에 들어갔다. 1967년 이후 홍위병 난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각종 산업, 특히 광공업 부문에서 생산이 상당히 저하했다. 중국의 산업건설의 기본방향은 농업을 기초로 하고 광공업에 선도구실을 시키려는 것인데, 1968년 이후 홍위병 난동이 수습단계에 들어가면 생산도 다시 호전의 기미를 보였다. 결국, 국가 성립 후 1970년대 중반까지의 경제는 대약진정책의 실패와 문화대혁명에 의하여 뒤떨어져 있었다.
개혁개방[편집]
1978년에는 경제발전 10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4개 현대화에 착수했으나 각종 누적된 결함이 노출되어, 1979년 조정방향이 설정되면서 본격적인 개방과 개혁정책이 건의되었다. 1980년초에는 기업의 자율화, 외국기업의 투자 보강, 금융의 자율화, 세제 도입 등의 조치를 단계적으로 채택한 후, 1984년 대규모 경제개혁이 채택되었다. 이에 1985년 인플레와 과열경기현상이 나타났고, 1986년 4월 안정과 균형에 기저를 둔 지속적 성장을 목표로 한 제7차 5개년계획(1986~90년)을 채택했다.
세계의 공장[편집]
덩샤오핑에 의한 자본주의 경제제도 도입 등의 개혁 개방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경제는 급속히 발전하여 '세계의 공장'이라고도 불리고 있다.세계무역기구(WTO)의 발표로는, 2003년의 대 중국 직접투자는 535억 달러가 되어 미국을 제치고 실질적으로 세계 최대의 직접투자 수입국이 되었다. 세계 최대의 인구와 강한 경제력 덕분에 중국 경제는 아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산업[편집]
중국의 산업 구조는 전통적인 농업 중심에서 빠르게 공업(제조업) 중심으로 변화해왔고 최근에는 서비스업 비중이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며 서비스업 주도의 발전단계에 진입다. 2020년 중국 산업별 GDP 비중은 1차산업 7.7%, 2차 산업 37.8%, 3차 산업 54.5%로, 1980년 1차 산업 30%, 2차 산업 27.7%, 3차 산업 22.3%에서 40년 만에 크게 변화하였다. 거대한 내수시장, 완비된 제조업 체계, 강력한 정부 지원책 등을 바탕으로 중국 산업의 성장축이 전통제조업에서 첨단산업과 서비스업으로 빠르게 전환되며 산업고도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현재 중국은 제조업 규모 면에서 2010년 미국을 제친 이래 세계 제1위의 제조업 국가로서, 2019년 제조업 부가가치는 27조 위안으로 전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8.1%에 달했다. 중국은 2000년대 '세계의 공장'이라고 불리며 저렴한 가공제조업 위주의 상품을 주로 생산해왔으나 최근 '중국제조 2025', '인터넷 플러스' 등으로 제조강국으로의 도약과 정보통신기술(ICT) 중심의 혁신 기술을 적극 도입할 것을 천명하며 전통 제조업 업그레이드, 하이테크 신흥산업 및 현대적 서비스업 육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특히, 에너지절감 및 환경보호, 차세대정보통신기술, 바이오, 첨단장비제조, 신에너지, 신소재, 신에너지자동차, 디지털 혁신산업, 관련 서비스업 등 9대 전략적 신흥산업을 육성하면서 첨단산업 및 신산업에서 빠른 발전을 보이고 있고, 플랫폼/AI, 5G, 전기차/배터리, 반도체, 바이오/의료 등에서 미중간 기술패권 경쟁 또한 격화되고 있다.
농업[편집]
중국은 전통적으로 농업·농촌 사회로서 산업으로서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식량안보 차원에서도 국가의 주요산업인 농업부문은 중시되어왔다. 1981년 가구별 생산책임제를 도입하여 개별농가의 자류지(自留地)를 제외한 생산대(生産隊) 소유의 토지를 청부생산제(請負生産制)하에 분배하였다. 이에 따라 2∼3년 사이에 90% 이상의 생산대대(生産大隊)가 농가 생산책임제로 전환하였다. 이러한 농업자유화로 1982년 인민공사가 해체되어 과거 5만 6000개인 인민공사는 4만 3700개의 향(鄕)정부와 1만 1900개의 진(鎭)정부로 변신하였다. 그 결과 농업생산성이 증대되어 1984년까지 연 7.8%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후 1988년까지 농업에 대한 투자 감소와 원자재 가격의 상승으로 발전이 둔화되다가 1989년에 다시 1984년 수준을 회복하였고, 1993년에는 약 4억 6000만 톤의 곡물을 생산하였다. 제8차 5개년 계획(1991~1995) 기간중에도 농업발전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여, 면화 등 경제 작물생산을 꾸준히 확대시켜나갔다. 하지만, 이후 도시와 제조업 중심의 발전이 빠르게 지속되면서, 농촌의 많은 인구가 도시로 일하러 떠나고 농촌·농업·농민의 '삼농문제'(三農問題)가 2000년대 초반 이후 커다란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기도 했다.
2020년 농업 총생산액은 7조 1748.23억 위안으로 1980년 1454.1억 위안에 비해 49배 이상 증가했다. 2020년 곡물재배면적은 1억 1676.8만 헥타르(ha)로 1980년 1억 1723.4만 헥타르에 비해 다소 줄었지만, 2020년 연간 곡물생산량은 6억 6949만 톤으로 1980년 3억 2055.5만 톤에 비해 2배 이상 증가했다. 2020년 현재 중국 주요 곡물생산에서 세계 수위 수준이다. 우선, 쌀 생산량은 2억 1186만톤으로 세계 1위로, 주요 재배지역은 양쯔강 중하류 평원과 동북평원이다. 다음으로, 밀은 1억 3425만톤, 면화 591만 톤으로 세계 1위, 옥수수 2억 6067만톤은 세계 2위다. 하지만, 최근 중국은 대두, 옥수수, 밀, 설탕 등 각종 곡물을 사들이며 주요 농산물의 수입국으로 변화되고 있는 추세기도 하다.
중국 농업은 개혁개방 초기 농가 생산책임제를 기반으로 한 농업경영시스템의 개혁을 통해 성장의 토대를 마련한 후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성장을 이뤘는데, 1980년 이후 36년 동안 농업부가가치의 연평균 성장률(2010년 불변가격)이 4.6%에 달한 실적은 전세계 농업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단한 실적이다. 중국 농업은 전통 농업에서 현대 농업으로 전환 중이고, 2000년대 이후 농업노동력이 빠르게 감소하면서 토지/노동 비율의 증가추세가 뚜렷해지면서 향후 노동생산성이 주요한 변수로 작동할 것으로 전망된다.
공업[편집]
2020년 중국의 공업 총생산액은 31조 3071.1억 위안으로 1980년의 2014.8억 위안에 비해 155.4배가 증가했지만, 전체 비중은 43.9%에서 30.8%로 감소했다. 과거 중국 경제가 주로 제조업에 의존하여 성장한 반면, 최근 제조업의 성장이 다소 둔화되었지만, 여전히 세계 최고, 최대 규모의 공업 및 제조업 국가다. UN Comtrade 통계에 따르면, 2019년 수출품목 5,203개 중 중국의 세계 수출시장 1위 품목은 1,759개(세계 1위)로 전체의 3분의 1을 차지하였다.
소유형태별 구성에서 1980년 국유기업(공업총생산액의 77.6%)과 집체기업(공업총생산액의 22.4%)만 존재하였던 반면, 최근에는 개인 및 기타 경제유형(주식회사, 외자계, 민영, 홍콩·타이완·마카오계)의 수와 규모가 크게 증가하였다.
중국의 공업은 IT, 중화학공업, 제조업 비중이 높은 편이다. 2017년 규모이상 공업기업의 영업수익을 기준으로 보면, 컴퓨터, 통신 및 기타 전자기기 제조업 9.37%, 자동차제조업 7.47%, 화학원료 및 화학제품제조업 7.23%, 전기기계 및 기자재 제조업 6.33%, 흑샘금속제련과 압연 가공업 5.70%, 농부식품가공업 5.29%, 비금속광물제품업 5.22% 등의 순서를 보인다. 주요 업종 별로는 자동차, 조선, 철강, 섬유, 가전, 통신기기 등 많은 부분에서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고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하며,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선진기업들이 독과점을 형성하고 있는 분야에서도 빠르게 추격 중이다.
현재 중국은 제조업 규모 면에서 2010년 미국을 제친 이래 세계 제1위의 제조업 국가로서, 2019년 제조업 부가가치는 27조 위안으로 전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8.1%에 달했다. 또한 2006년 제11차 5개년 계획부터 질적 성장을 위한 제조업 구조조정 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중국 제품의 품질 및 기술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고급제품들이 출시되고 있다. 기존의 저부가가치산업은 중국 내륙 및 동남아 등 제3국으로 이전이 활발히 추진되고 있고, 자체적인 혁신역량을 가진 중국 로컬기업들이 소재 및 자본재 분야뿐만 아니라 가전, 휴대폰, 자동차 등 소비재 분야에서도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2015년 중국 정부는 《중국제조 2025》 정책을 발표하여 제조업 종합경쟁력을 2025년 독일 및 일본 수준으로 향상하고, 2035년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고 제조 강국이 되겠다고 천명하였다. 전략적 신흥산업 육성과 더불어, 차세대 정보기술, 고급 디지털 제어 공작기계 및 로봇, 항공우주설비, 해양공정설비 및 첨단 선박, 선진궤도 교통설비, 에너지 절약 및 신에너지 자동차, 전력 설비, 농업 기계 설비, 신소재, 바이오의약 및 고성능의료기계 등 10대 신산업을 선정하여 육성한다는 계획을 포함해 세부적인 로드맵도 제시했다. 아울러, 최근 IT 기술과 제조업의 결합은 중국 제조업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중국 내 바이두, 알리바바, 텐센트 등 IT 업체들이 부상하고 있고, 중국 정부는 이들의 빅데이터 및 인공지능 기술 등이 제조업과 결합되는 '인터넷 플러스 제조' 등을 강조하면서 제조대국에서 제조강국으로의 변화를 꿈꾸고 있다. 하지만, 중국 공업의 양적, 질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수요와 공급간 불균형, 심각한 환경오염, 각종 요소비용 증가, 무역환경 악화에 따른 수출 둔화 등은 과제로 남겨져있다.
서비스업[편집]
2020년 중국의 서비스업 총생산액은 55조 3976.8억 위안으로 1980년의 1023.4억 위안에 비해 541.3배 증가하였고, 전체 비중 또한 22.3%에서 54.5%로 크게 증가하였다. 과거 경제발전 과정에서 제조업을 중시하면서 서비스업의 발전이 상대적으로 낙후되었지만, 꾸준히 성장하여 2013년부터 제조업의 비중보다 높아졌고 성장과 고용 측면에서 모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우선, 2019년 서비스업의 성장 기여도는 63.5%에 달하였고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으로 대폭 감소하였음에도 47.3%를 기록할만큼 중국 경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지역 서비스업이 제조업과 농촌의 잉여노동력을 빠르게 흡수함으로써 노동시장 고용 충격을 완화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2020년 3차산업 취업인원수는 3억 5806만 명으로 전체의 47.7%를 차지하였는데, 1980년 5532만 명에 비해 3억 명 이상 증가한 수치다. 하지만, 이러한 서비스업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선진국에 비해서는 여전히 낮은 수준으로, 지속적인 경제성장시 서비스업의 성장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2020년 부가가치 총액으로 볼 때 도소매업 9조 5686억 위안(서비스업 전체의 17.3%), 금융업 8조 4070억 위안(15.2%), 부동산업 7조 4553억 위안(13.5%), 운수·창고·우편업 4조 1562억 위안(7.5%), 정보전송·소프트웨어 및 정보기술서비스업 3조 7951억 위안(6.9%), 임대 및 비즈니스서비스업 3조 1616억 위안(5.7%), 숙박·요식업 1조 5971억 위안(2.9%) 순이었다. 국민소득의 빠른 증가와 30-40대와 고령층을 중심으로 한 서비스 수요 확대,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후 서비스시장 대외개방 확대란 국내외 조건과 더불어 중국 정부는 내수 확대와 질적성장 구조로의 정책 전환을 추진하면서 서비스업 성장에 중점을 두어 적극 육성하기 시작하였다.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현대적 서비스업의 발전을 가속화하는 정책을 추진 중이며, 2019년 베이징을 필두로 야간경제 활성화 정책도 확산되고 있다.
중국의 서비스업은 인터넷 및 모바일기기 보급과 IT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데, 서비스 거래의 온라인화·디지털화와 더불어 디지털 혁신산업과 관련된 서비스(창업, 표준화, 검측, 홍보, 지재권 관련 등)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건강 양로, 문화오락 서비스업 등의 성장 속도도 높게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생산성이 낮은 업종(도소매업, 숙박요식업 등)을 중심으로 서비스업 종사자가 크게 늘어나면서, 생산성이 높은 업종(금융업, 정보통신업 등)간 노동생산성 차이가 주요 신흥국에 비해 크게 확대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서비스산업의 성장 잠재력은 매우 높지만, 전통적인 서비스업의 높은 비중과 낮은 노동생산성, 서비스업 전반의 경쟁력 강화 등을 주요 과제로 안고 있다.
소득분배[편집]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은 다른 한편으로 지역 간, 도시-농촌간, 빈부간, 민족간 격차를 크게 확대하면서 경제적 불균형과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확대해왔다. 일각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평등한 국가에서 가장 불평등한 국가로 변화했다는 비판도 나오는 실정이다. 소득 분배의 불평등 수준을 보여주는 지니계수로 볼 때, 1960년대 0.3 이하였지만 1990년대부터 0.4를 초과했으며 2017년 0.467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중국의 국가통계상으로도 극심한 불평등은 확인된다. 2020년 주민 1인당 가처분소득은 32,189위안으로, 도시주민이 43,834위안, 농촌주민이 17,131위안에 달하여 도시-농촌 주민간 소득비는 2.56이었다. 최근 농촌 주민의 소득 증가율이 도시보다 빠르게 증가하면서 최근 도시-농촌 주민간 소득비는 과거에 비해 감소 추세다. 하지만, 소득5분위 배율로 보자면, 상위 20%의 고소득그룹의 1인당 가처분소득(80,294위안)이 하위 20%의 저소득그룹(7,869위안)의 10.2배에 달하여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2018년 발간된 『세계불평등보고서』에 따르면, 상위 10% 소득자가 총소득에서 점하는 비율은 개혁개방 이후 빠르게 증가하여 2015년 40%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상위 10% 자산가가 총자산에서 점하는 비율은 2015년 65% 수준으로 빠르게 상승하여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국 정부는 2000년대 이후 조화사회 건설을 주창하며 사회보장제도의 확대·정비에 나섰고 최근 빈곤퇴치 공략전에 나서 2020년 전체 인민이 빈곤 탈출에 성공했다고 선포하기도 했다. 특히, 2020년 전체 주민이 도시와 농촌, 취업 유무에 관계없이 양로보험과 의료보험에 모두 가입할 수 있도록 정비했다. 중국 정부의 사회지출 수준은 꾸준히 증가하여 도-농간, 지역간, 빈부간 소득격차를 줄이는데 영향을 주었지만, 여전히 도시-농촌의 제도적 이원성, 취업·지역 등에 따른 다차원적 분절성, 여전히 낮은 사회지출비율과 조세부담률 등 많은 과제가 남겨져있다.
에너지·자원[편집]
중국은 영토가 넓고 지질 조건이 다양하며 총 157종의 광물이 매장되어 있고, 텅스텐, 안티늄, 희토류, 몰리브덴, 바나듐, 티타늄 등의 매장량은 세계 1위다. 석탄, 철, 아연, 구리, 은, 수은, 주석, 니켈, 인회석, 석면 등은 세계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광물 자원은 지역 분포가 고르지 않아 광물에 따라 일부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데, 전국적으로 효율적으로 조달해 사용할 수 있도록 교통과 운수 건설을 강화할 필요가 존재해왔다. 또한 석탄, 천연가스, 석유 매장량 또한 풍부하지만 생산이 소비를 따라가지 못하여, 세계 최대의 원유, 석탄, 천연가스 수입국이다.
중국은 세계 최대의 에너지 소비국으로, 2019년 BP의 통계에 따르면 전세계 에너지 소비의 24.3%를 차지하며 2018년 대비 전세계 에너지 증가의 4분의 3이상이 중국에서 비롯되었다. 전체적으로는 석탄 비중이 높고, 발전 방식에서는 화력이 약 70%를 차지한다. 2020년 1차 에너지 생산 비중은 석탄(67.6%), 석유(6.8%), 천연가스(6.0%), 기타(19.6%) 순이며, 에너지 소비 총량 비중은 석탄(56.8%), 석유(18.9%), 천연가스(8.4%), 기타(15.9%) 순이었다. 2019년 생산발전량은 7조 5,034.3억kWh로, 화력(69.6%), 수력(17.4%), 풍력(5.4%), 원자력(4.6%), 태양광(1.6%), 기타(1.4%) 순이다.
중국 정부는 에너지 대외의존도가 높아지며 에너지안보에 위협을 느끼면서 신재생에너지, 원자력 등 비화석에너지로의 과감한 전환을 시도하였고, 신재생에너지 분야에서 전 세계 최대의 투자국이자 최대 설비용량 보유국으로 부상하였다. 아울러 '일대일로'를 통한 에너지 협력에 적극 나서고 있다
무역[편집]
1949~1978년의 중국의 무역액은 큰 변화가 없이 적은 규모였고, 상대국도 대개 공산주의 국가들이었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무역액은 크게 증가하였고, 대상국도 전세계로 확대되어면서 급속하게 대외개방형 국가로 탈바꿈해왔다. 중국의 무역액은 1978년 206억 달러에서 2020년 4조 6462억 달러로 크게 증가하였고, 수출액이 2조 5906.5억 달러, 수입액이 2조 556.1억 달러로 무역수지는 5350.3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하였다. 무역상대국은 동남아시아국가연합(4.74조 위안), 유럽연합(4.5조 위안), 미국(4.06조 위안), 일본(2.2조 위안), 한국(1.97조 위안) 순이다. 수출 면에서는 미국(3.13조 위안), 유럽연합(2.71조 위안), 아세안(2.66조 위안) 순이고, 수입 면에서는 아세안(2.08조 위안), 유럽연합(1.79조 위안), 타이완(1.39조 위안), 일본(1.21조 위안), 한국(1.20조 위안) 순이다. 홍콩을 통한 수출이 1.88조 위안을 차지하는 특징을 보인다.
2020년 중국은 세계 최대 교역국가이자 수출대국이고 수입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다. 2020년 전세계 수출 중 중국의 비중은 14.7%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는데, 특히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이후 크게 증가해왔다(UNCTAD). 2019년 중국의 주요 수출품목은 기계전자상품(14589.53억 달러), 하이테크기술상품(7307.14억 달러), 자동데이터처리설비 및 부품(1655.30억 달러), 전화기(1259.52억 달러) 순이고, 주요 수입품목은 기계전자상품(9078.96억 달러), 하이테크기술상품(6377.92억 달러), 원유(2423.85억 달러), 철광석 및 기타 광물(1013.31억 달러) 순이다.
중국은 수출 주도의 성장으로 무역의존도(GDP 대비 수출과 수입의 합계)가 높았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 무역의존도가 축소되고 있다. 중국의 무역의존도는 2006년 64.5%로 최대를 기록한 이후 점차 감소하여 35.7%로 하락했다. 또한 중국이 세계 최대의 제조 대국으로 자리잡으며 수출과 수입의 대부분은 재화인데, 2019년 현재, 수출의 경우 재화(90.8%)와 서비스(9.3%)의 비중인데 반해 수입의 경우 재화(79.7%)와 서비스(20.4%)의 비중을 차지한다. 2010년 이후 수입 중 서비스의 비중은 10% 내외에서 빠르게 20.4%까지 증가해왔다.
교통[편집]
중국의 교통 체계는 광대한 영토의 수많은 점들을 가로지르며 도시와 도시, 지역과 지역을 선으로 연결하는 네트워크망으로 구성된다. 2000년대 중후반 이후 교통 인프라를 대대적으로 건설하여 세계 최장거리의 고속철로와 고속도로를 갖추었으며, 2035년까지 '전국 123이동교통권'(全国123出行交通圈, 도시 내 1시간 내 통근, 도시군 간 2시간 내 통근, 전국 주요 도시 3시간 내 이동) 및 '글로벌 123 쾌속 물류권(全球123快货物流圈, 중국 내 1일, 주변 국가는 2일 세계 주요 도시에는 3일 내 송달)'을 실현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두 개의 '123권'을 실현하기 위해 중국은 향후 15년간 철도, 도로, 수운, 민항, 우편 택배 등의 인프라 네트워크를 완비할 계획이며 2035년까지 중국의 국가 종합입체교통망은 총 70만㎞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구체적으로, 철도 20만㎞, 도로 46만㎞, 고등급 항로 2.5만㎞, 연안 지역 주요항구 27개, 내륙 주요 항구 36개, 민간 수송공항 400개, 우편 택배 허브 80개 가량이 갖춰질 것이다. 중국 정부는 교통 강국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질 높은 현대화된 입체교통망을 구축함으로써 경제 체계를 현대화하고 사회주의 현대화를 뒷받침하겠다는 입장이다.
2019년 총 여객운송량은 176억 435.69만 명으로, 여객부담은 도로(73.9%), 철도(20.8%), 민간항공(3.7%), 수운(1.5%) 순이고, 총 화물운송량은 471억 3624만톤으로, 화물분담은 도로(72.9%), 수운(15.9%), 철도(9.3%), 파이프라인(1.9%), 민간항공(0.02%) 순이다.
철도[편집]
철도는 현 중국 교통 체계의 골간으로 도시간 교통의 핵심을 이룬다. 2019년 철도는 36.6억명의 여객 운송, 4389억 톤의 화물 운송으로 교통량 측면에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2020년 철도 길이는 14.63만㎞이고, 그 중 고속철도가 3.8만㎞에 달하여 세계에서 가장 긴 고속철로를 보유하고 있다. 2035년까지 중국 전역의 철도망을 20만㎞로 늘이고 고속철로망 또한 7만㎞로 연장할 계획이다.
현존하는 철도망의 기본 특징은 남북과 동서를 횡단하는 간선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4종 4횡'(四纵四横: 남북방향 4개 노선과 동서방향 4개 노선)의 고속철로망이 앞당겨 구축되고 '8종 8횡'(八纵八横: 남북방향 8개 노선과 동서방향 8개 노선)의 고속철로망이 이미 밀집되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4종 4횡'은 베이징-상하이, 베이징-광저우-선전-홍콩, 베이징-하얼빈, 항저우-선전을 잇는 4개의 남북 방향과 칭다오-타이위안, 쉬저우-란저우, 상하이-청두, 상하이-쿤밍을 잇는 4개의 동서방향 철로로 구성되며, 총 운행경로 14,130㎞에 달한다. 이를 통해 베이징과 각 성의 성도급까지 최대 8시간 내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확장하고 고속철로 구간을 추가한 '8종 8횡'은 중국 내 대도시 81개를 연결할 계획이다. 아울러 중국과 주변 국가 및 유럽과의 국제철도 건설 또한 적극 추진되고 있다.
도로[편집]
2020년말 중국 도로 총연장은 519.81만㎞로 1980년 88.83만㎞보다 5.85배 증가하였고, 그 중 고속도로는 16.10㎞다. 고속도로(3.1%), 1급 도로(2.4%), 2급 도로(8.0%), 3급 도로(8.8%), 4급 도로(72.8%), 등급 외(4.9%)로 구성된다. 1988년 최초로 고속도로가 상하이에서 개통되었지만 본격적인 건설은 1992년 이후에 시작되었고 도로와 고속도로는 빠르게 확대·발전하면서 여객 및 화물수송량에서 철도를 제치고 가장 주요한 교통체계로 자리매김하였다.
1992년 이후 '5종 7횡'(五纵七横: 남북방향 5개, 동서방향 7개 노선)의 12개 고속도로를 계획하였고, 2005년 '7918망'(7918網: 수도인 베이징으로부터 방사선 모양의 도로 7개, 남북방향 9개, 동서방향 18개)의 총 연장 8.5만㎞의 고속도로 건설로 다시 계획하였다. 2013년 《국가도로망규획》(2013-2030년)은 국도건설 계획을 '12방사, 28종, 30횡'의 총 70개 노선에서 '12방사, 47종, 60횡'의 총 81개 노선으로 확장하였고, 고속도로 또한 '7918망'에서 '71118망'(7방사, 11종 ,18횡)의 총 규모 11.8만㎞로 확대하였다. 2017년 다시 2020년까지 도로 총연장 500만㎞, 고속도로 15만㎞ 달성을 목표로 하여 달성하였고, 14차 5개년 규획 기간(2021-2025) 동안 2.5만㎞의 고속도로를 추가 건설할 계획이다.
수운[편집]
중국은 해안선의 길이가 약 3.2만㎞ (대륙 1.8만㎞, 섬 1.4만㎞)로 세계 8위 수준이고, 수운은 크게는 내륙 수운, 연해 수운, 원양 수운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우선, 2020년 내륙 하천의 수운 총연장은 12.77만㎞다. 하천의 대부분이 화중지방과 화남지방에 편중되어 있는데, 대표적으로 창쟝(長江) 수역, 화이허(淮河) 수역, 주쟝(珠江) 수역 등 양쯔강 삼각주와 주쟝 삼각주 지역의 내륙 수운이 발전되어 있다. 수운의 여객 운송량은 1980년대말까지 꾸준히 증가하였으나 이후 철도와 도로의 발전에 따라 점차 낮아지고 있는 반면, 화물운송량은 대외개방 항구의 증가에 따라 크게 증가해왔다. 2019년 수운의 여객 운송량은 2억 7267.12만 명으로 총 운송량의 1.5%인데 반해, 화물운송량은 74억 7225톤으로 총 운송량의 15.9%를 차지하였다.
중국에는 항구가 2천 개 이상이 존재하며, 2019년 영업성 선석(Berth)은 22,893개로, 연해항구에 5,562개, 내륙항구에 17,331개였다. 항구의 1만톤 급 이상 영업성 선석은 총 2520개로, 연해항구에 2076개, 내륙항구에 444개였다. 2020년 민용선박(民用船舶) 보유량은 12만 6805척으로 지속 감소 추세다.
2019년 전체 항구의 물동량은 139.51억톤, 그 중 연해 주요항구의 물동량은 2019년 91억 8774만톤으로 1980년 2억 1731만톤에서 크게 증가하였고, 닝보(寧波)-저우산(舟山)이 11억 2009만톤으로 중국 내 1위를 차지한 데 이어 상하이, 광저우, 칭다오, 톈진, 르자오(日照), 옌타이, 다롄 등의 순이었다. 또한, 2019년 전체 항구의 컨테이너 물동량은 2.61억TEU로, 그 중 연해항구가 2.31억TEU를 차지하였는데, 세계 주요 10개 항만 컨테이너 순위에서 상하이(세계 1위), 선전(3위), 광저우(4위), 닝보-저우산(5위), 칭다오(7위), 톈진(10위)이 포함되며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항공[편집]
2020년 중국 민간공항은 240개, 민간항공기 6795대, 민간항공노선 수 5581건(국제 895건, 국내 4686건), 정기항공편 항로거리 942만 6300㎞(국제 382.87만㎞, 국내 559.76만㎞)로 민간항공산업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2019년 연간 여객수송량은 6.60억 명(국내선 5.75억 명)으로 전체 여객운송량의 3.7%를 차지하였지만, 화물운송량은 753.2만톤으로 전체 화물운송량의 0.02%에 그쳐 전체 운수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낮은 편이다. 주요 항공사로는 중국국제항공(國際航空), 동팡항공(東方航空), 난팡항공(南方航空)의 3대 국영항공사와 하이난항공(海南航空)그룹 등이 있다.
통신[편집]
중국은 2020년 휴대전화 가입자 수(15억 9407만대), 전화보유대수(1억 8190.8만대)로 세계 1위이며 휴대전화 보급률은 100명 당 113.9대다. 인터넷 이용자(9억 8899만명) 수 또한 세계 1위로, 그 중 휴대전화로 9억 8600만명이 웹서핑을 하고 있다. 인터넷 보급률은 70.4%이고 그 중 농촌 지역의 인터넷 보급률은 55.9%다. 많은 사람들이 휴대전화를 활용하여 인터넷에 접속하고 있고, 도시와 농촌간 인터넷 격차는 여전히 존재한다. 2020년 12월 중국 도시 네티즌은 6.8억 명, 농촌 네티즌은 3억 900만 명이다. 하지만 최근 농촌 인터넷의 보급이 크게 증가중인데, 농촌 인터넷 보급률은 2016년말 33.1%에서 2020년말 55.9%로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10억 명에 가까운 네티즌들로 구성된 전세계 최대의 디지털 사회로 변화 중인데, 최근 인터넷의 활용이 중요해지면서 중국 내 지역 간, 도농간, 빈부간 디지털 격차는 주요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 정부는 빈곤지구의 '마지막 1킬로미터(最後一公里)'까지 통신 네트워크 확대에 힘을 쏟고 있는데, 특히 '인터넷+'로 대표되는 정보통신기술과의 결합이 탈빈곤에 중요한 관건이라 보기 때문이다. 네티즌의 구성 또한 청년 중심에서 점차 미성년과 노인 집단으로 확대되는 추세다. 2020년말 현재, 20세 이하 네티즌이 전체의 17.1%, 60세 이상 네티즌이 11.0%를 기록하며 보다 다원화된 디지털 사회로 변화해가고 있다
사회[편집]
인구와 주민[편집]
중국의 사회는 신해혁명 이후 매우 근대화되었다. 신해혁명 이전에 중국 인구 80% 이상은 성씨를 가지고 있지 않은 백성들이였으며 이들은 한족으로 구분되지도 않았다. 만주족, 한족 등 족보 명칭은 소수 귀족 또는 강등된 귀족만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신해혁명 이후에 쑨원은 서양열강들처럼 근대화에선 농노비 해방의 중요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고 일부 족보 귀족들만 사용할 수 있었던 성씨를 백성들도 사용할 수 있게 하여 대대적 민적법을 실행하였다. 인구 다수였던 농노들을 해방시켜 산업활동을 할 수 있게 하였다. 신해혁명 이후, 만주족이 아닌 한족의 국가를 표방하고 인구 80% 이상의 성씨가 없던 백성들이 한족(漢族)으로 등록되었기 때문에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중국 인구의 92%는 한족이며 그 외 55개의 소수 민족들이 8%이다.
원래 중국은 현재처럼 인구가 많은 국가는 아니였다. 공산당의 정책은 가족의 구성 숫자대로 양식과 돈을 분배를 하는 정책을 썼기 때문에 인민들은 자녀가 많을 수록 분배되는 양식과 돈이 많았다. 그래서 당시 많은 자녀들의 숫자는 많은 양식과 돈의 분배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였으며 또한 농업에 종사하는 가족의 구성원이 많을 수록 분배가 많았기 때문에 농업 지역의 인구 수가 비정상적으로 늘었다. 이러한 가족 구성원 수대로 공정한 분배를 원칙으로 하는 공산정책으로 인해 중국인들은 가족의 숫자를 늘리려 하였고 이로 인해 중국의 인구가 늘어난 것이다. 이후 경제개방 정책을 펼쳐 도시에서는 가족 구성원 수대로 분배하는 정책을 줄이게 되었고 1970년대에는 1자녀 정책으로 자녀 수를 제한시켰다. 중국 전체의 인구는 2015년 말에 13억 5,569만 명이었으며,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인구증가율은 0.52%(2010년~2015년)이며 1995년 이후 1% 미만의 낮은 증가율을 지속하고 있다. 1979년부터 인구 억제책으로서 한 부부에 한 자녀라고 하는 정책이 실시되고 있다. 1자녀 가정에는 장려금, 학교에의 우선 입학 등의 혜택이 주어지나, 위반한 자에게는 반대로 벌금이 부과된다. 그러나 농촌 지역에서는 다(多)자녀의 전통적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강하여, 정책이 형해화된 지역도 많다. 중위 연령은 37.0세이며 2015년 노인 인구 비율이 9.55%로 고령화 사회에 해당한다. 2040년경에는 65세 이상의 노령 인구가 20%에 달하고, 초고령 사회가 도래하고 있다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이것을 반영한 것인지, 정부는 2002년 9월 1일에 "인구와 계획 출산법"을 시행하여, 조건부로 1자녀 정책을 완화하였다. 중국에서 가장 다양한 민족이 거주하는 성(省)은 서남부의 윈난성(雲南省)으로 35개 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2022년 7월 21일부터 중국의 인구는 감소하기 시작했다. 2022년 12월 중순 쯤 중국은 인도에 인구대국 1위 타이틀을 뺏기고 2023년부터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한다. 2024년 중국의 인구는 225,551명이 감소할 것으로 예측된다. 중국의 인구는 2063년 최대로 감소할 것으로 보이는데, 2063년 한 해 동안 12,251,859명이 감소한다. 2064년부터 감소폭이 조금 줄어들지만 2090년까지 2020년 대한민국 인구 5분의 1에 달하는 인구가 한 해 동안 감소한다. 2103년부터는 인도에게 인구감소 1위국가 타이틀을 내주게 되는데, 인도는 2119년 22,452,584명이라는 인구가 감소한다. 대한민국 인구의 거의 절반 정도이다.
언어[편집]
중국 국내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공용어인 표준 중국어(普通話)는 세계에서 가장 사용자가 많은 언어이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으며 이 중 대부분이 중국어를 구사하기 때문이다.
중국어는 여러 가지 방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북방방언(北方方言), 오어(吳語, 상하이어 등), 광둥어(廣東語), 푸젠어(福建語), 객가어(客家語)의 5개로 대별되며 방언들 간에는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 중국 전 지역에서 통용되는 표준 중국어는 베이징화(北京話)의 발음을 표준음으로 하고 북방어를 기초로 하여 현대백화(現代白話, 구어)의 문장을 문법 규범으로 하고 있다.
중국어를 표기하는 한자는 총 6만 자 가량으로, 그 중 2,500자가 상용한자로 지정되어 있다. 한자 간략화 정책 때문에 중국 대륙에서는 한국어에서 사용되는 한자인 정체자와 다른 간체자(簡體字)가 통상 사용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56개의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으나 98%는 중국인 한족(漢族)으로 소수민족의 인구는 매우 적다. 한족(漢族)의 비율이 98%가 되기 때문에 중국은 한족(漢族) 단일 민족으로 봐도 무관하나 신분증 표기에 소수민족과 한족(漢族)의 구분이 되게 표기되어 있으며 중국은 사실상 외국인의 귀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외국인들은 소수민족이 될 수 없으며 원래 살고 있던 매우 적은 인구의 소수민족들이 신분증에 표기되어 있다. 소수민족은 대부분 각 민족 언어와 표준 중국어를 병용한다. 소수 민족 언어로는 좡어, 티베트어, 위구르어 등이 널리 쓰인다. 그중에는 극 소수의 인구인 나시족(納西族)의 동파 문자(東巴文)와 같은 표의 문자도 있다.
표준 중국어와 함께 1990년대 말에 반환된 홍콩에서는 광둥어와 영어를, 마카오에서는 포르투갈어를 공용어로 사용된다.
미디어[편집]
2019년 6월 5일 미국 프리덤하우스는 중국의 언론 지수에 최고 점수 4점 중 가장 낮은 점수인 0점을 주었다. 즉 언론의 자유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 완전히 편향적이라는 것이다. 국영통신으로는 신화통신이 있다. 신화통신은 1931년에 장시성 루이진에서 '홍색중앙통신사'로 처음 발족했고, 1934년에는 대장정에 마오쩌둥과 함께 올랐으며 1937년에는 옌안에서 '신화통신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현재에 이른다. 이곳은 《인민일보》, 중국중앙방송의 기사를 보내고 있다. 또 이 통신사에서 발간하는 간행물로는 《신화매일전신》, 《참고신문》, 중국신화방송 등이 있는데, 《참고신문》은 주로 공산당원이 많이 읽는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대표적인 신문은 《인민일보》로써, 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이다. 이 신문은 1948년에 창간되었다. 이 신문은 당보인 것처럼 중국공산당의 입장, 정책설명, 당의 공보 등을 발표하고 있으며, 영어판과 한국어 서비스를 비롯해 7개의 외국어판을 발행하고 있다. 이 외에 《해방군보》, 《광명일보》, 《공인일보》를 발행하며, 《중국일보》는 외국인들을 위한 영문판 일간지이다. 외국어판 신문인 《베이징타임스》는 재미있는 기사와 강렬한 천연색 사진을 편집하여 외국인과 중국인에게 많은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다.
방송은 국영방송인 중국중앙방송(CCTV)과 베이징 텔레비전, 홍콩스타TV방송 등이 있으며, 중국중앙전시대는 원래 광고편성을 하지 않았으나, 1980년대에 광고를 시작했다. 중국정부에서는 언론을 검열하므로 BBC를 들을 수 없다.
교육[편집]
2020년 중국 제7차 인구센서스 결과, 2020년 중국의 대졸 이상 학력(전문대학 포함)은 2억 1836만 767명, 고교 이상 학력은 2억 1300만 5258명, 중학 이상 학력은 4억 8716만 3489명, 초등학교 졸업 학력은 3억 4965만 8828명이다. 지난 10년간 학력 수준뿐만 아니라, 평균 교육연한이 9.08년에서 9.91년으로 크게 상승하였다.
중국은 1905년 과거제도 폐지와 더불어 '교육은 건국의 근본'(敎育乃立國之本)이란 이념이 확산되었고, 이후 국가와 사회 모두에서 교육은 지속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아왔다. 1950년대부터 9년 의무교육을 도입하여 문맹률을 크게 낮춰왔고 개혁개방 이후 근대화의 핵심 요소로서 현대적인 교육을 도입하고 확산해왔다. 특히, 사회적으로 교육열이 상당히 높아서 개혁개방 이후 사교육도 활발해졌고 대형 사교육 업체 또한 크게 증가해왔다. 매년 6월 실시되는 대입시험인 가오카오(高考: 대학입학자격시험)는 전국적인 관심사로 치러지며, 7~8월 대학 지원 이후 주요 상위권 대학 입시 결과 또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기본적 학제는 취학 전 교육, 의무교육, 고등학교 교육, 대학 교육(구체적으로는 유치원, 초등학교: 小学, 중학교: 初中, 고등학교: 高中, 대학교: 大学)으로 구분되며, 일반적으로 현재 의무교육은 초등학교 6년과 중학교 3년을 포함하는 '9년 의무교육'을 의미한다. 일부지역과 발전된 연해지역의 경우 고등학교 3년을 포함한 '12년 의무교육'이 시행되고 있고, 2017년 3월 전국 양회에서 '12년 의무교육'의 전국 보급이 제안된 바도 있었다.
2020년 중국 전역의 각급 학교는 53.71만 개로, 재학생 수는 2.89억 명, 전임교사는 1792.97만 명이다. 취학전 교육을 담당하는 유치원 수는 29.17만 개이고, 4818.26만 명의 유아동이 다니며 그 수는 해당 연령의 85.2%에 달한다. 현재 의무교육단계의 학교는 21.08만 개로 재학생 1.56억 명, 전임교사 1029.49만 명이다. 초등학교 입학 후 9년 의무교육을 이수하는 비율은 95.2%로, 현재 초등학교 재학생은 1억 725.35만 명, 중학교 재학생은 4914.9만 명에 달한다. 고등학교 재학생은 4163.02만 명으로 고등학교 진학률은 91.2%에 달해 꾸준히 증가 중인데, 그 중 중등직업교육학교의 재학생은 1663.37만 명으로 상대적으로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고등교육 담당기관은 2738개(4년제 대학 1270개), 고등교육 재학생 수는 4183만 명으로 대학진학률은 54.4%다. 대학 재학생 수와 진학률은 2015년 각각 3647만명과 40.0%에서 2020년 4183만 명과 54.4%로 크게 증가하고 있다. 대학원 학위과정생은 110.66만 명으로 역시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데, 그 중 박사과정이 11.6만 명, 석사과정이 99.05만 명이다. 대학원 재적생은 313.96만 명으로, 박사과정 46.65만 명, 석사과정 267.30만 명이다.
중국 정부는 인력 자원 개발과 인재 양성을 위해 교육을 우선적으로 발전시켜 인력자원의 강국을 건설할 것을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점수만능주의와 주입식 교육의 폐해를 줄이고자 교육 및 가오카오 제도 개혁을 실시하는 한편, 대학(원)에도 중점적인 지원을 통해 집중 육성을 추진 중이다. 대학(원) 육성의 경우, '985' 대학과 '211' 대학이 대표적이다. '985' 대학은 1998년 장쩌민 주석이 베이징대학, 칭화대학, 인민대학, 난징대학, 상하이교통대학, 푸단대학 등 중국 일류대학 9개 대학을 선정해 세계 일류대학으로 만들겠다는 것으로, 총 39개로 확대되었다. '211' 대학은 1990년대 중국 정부의 주도 하에 21세기 일류대학 100개를 건설하겠다는 프로젝트에 선정된 대학을 가리키는데, 총 115개의 중국 내 유명 대학교가 여기에 포함된다. '985'과 '211' 대학 출신자들은 상대적으로 취업 등에서 우대를 받는 경향이 있다.
- 특징
대한민국처럼 교육열이 상당히 높은 국가다. 사교육도 활발하여 신동방같은 대형 사교육 업체도 많다. 이유는 대한민국의 초·중·고 학생들이 서울대학교에 가려고 열심히 공부하듯 중국에서도 베이징대학에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기 때문이다. 사실 과거제라는 개념을 처음 만들어 사교육 열풍이라는 걸 인류역사상 처음 만든 것도 중국이다. 이미 한나라 시절에 쪽집게 과외, 시험지 유출, 시험관 매수 등도 모자라서, 말도 안 되는 컨닝 기술들을 만들어 낸 인류역사상 최초의 정통 경쟁교육 강조 국가가 중국이다.
동양권 국가이다 보니 남녀공학만 있지않고 남중남고•여중여고도 함께 존재할것 같지만, 고등학교의 경우 중국 내의 90% 이상의 고교들이 남녀공학이다. 단성 고교가 있어도 입학이 굉장히 어렵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한국처럼 남녀공학 중고등학교에 남녀분반 문화는 없다. 사립 중고교가 아닌 이상 중국에 남녀분반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중국의 학제는 성(省)마다 조금씩 다르며 안후이성(安徽省), 후베이성(湖北省), 산둥성(山东省)은 5-4-3이며 베이징의 경우에는 6-3-3으로 한국과 같다. 명칭은 소학교, 초급 중학교, 고급 중학교이다. 초급 중학교까지의 9년이 의무교육이다. 그래서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하려면 한국의 고입선발고사와 비슷한 중카오를 봐야한다. 학년이 시작하는 시기는 한국처럼 3월이 아닌 다른 북반구 국가들처럼 9월에 시작한다. 때문에 중국에서는 크리스마스가 1학기이고, 중국에서는 1학기 기말고사를 크리스마스 근방에 보거나 아예 크리스마스를 끼고 본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중국에서 크리스마스는 그냥 평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대한민국처럼 야간자율학습 실시 국가인 만큼 보통고등학교학생모집전국통일고시(가오카오)를 준비하기 위해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기계가 되어 버렸다. 그나마 2010년대에는 지역에 따라 야간자율학습이 금지되기도 하였다.
중국은 대학 입시에 지역 할당제를 적용한다. 여긴 심지어 지역별로 지원 가능한 전공도 정해져 있다.
중학교는 '사상품덕' 고등학교는 '사상정치'로 한국의 사회 과목에 대응(지리는 따로배움)되는 과목에 도덕, 윤리 내용이 포함된다. 2021년 9월학기부터 초중고 모두 3,5,8,10학년 상반기에 <习近平新时代中国特色是思想学生读本>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를 필수로 배운다.
또한 유리식, 무리식을 중학교에서 배우고 순열과 조합은 이과만 배운다.
2021년부터 초등학교에서 영어가 필수지정과목에서 빠진다. 교육부의 검열도 강해졌는데, 앞으로 외국 교재(원본,개정본 포함)을 이용한 수업이 금지된다.
중국에서는 초등학교 3학년 정도까지만 한어병음과 간체자를 혼용하고 그 다음부터는 간체자를 직접 읽는다.
또한 대한민국과 함께 공무원 시험 열풍이 높다. 대학 졸업반 학생들은 학교 수업에 열중하지 않지만 공무원 시험 대비 수업에는 열광하고 있다.
사회보장[편집]
중국 정부는 200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사회보장제도를 개편해왔다. 개혁개방 이후 사회경제체제의 재편 속에서 새로운 사회적 위험이 증대되면서, 기존 사회주의 시기 설립되었던 도시 내 딴웨이(單位) 위주의 사회보장제도 또한 개혁할 필요가 증대되었다. 특히 1990년대 중후반 도시 개혁과 더불어 국유기업 구조조정과 노동자들의 실업 및 면직(下岗)이 크게 증가하면서 실업보험 개편 및 재취업제도, 최저생활보장제도 도입 등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사회보험제도의 재편이 시작되었다.
중국 사회보장제도는 일반적으로 사회보험, 사회구조(社會救助: 공공부조), 사회복리(社會福利: 사회복지서비스)의 주요 3대 제도와 자선 사업 및 군인보장 등 기타 보장으로 구성된다. 그 중 양로보험(養老保險: 연금), 의료보험, 실업보험, 공상보험(工傷保險: 산재보험)의 사회보험과 주택공적금이 가장 핵심적인 제도다. 생육보험(生育保险: 출산보험)은 최근 의료보험과 통합되었다. 중국 정부는 2000년대 국가, 기업, 근로자 개인이 함께 복지비용을 부담하도록 사회보장제도 개혁을 시작하였고 노동자의 낮은 사회보험참여율을 확대하고자 노력해왔다. 특히, 2020년까지 도시와 농촌, 취업 유무에 관계없이 모두가 양로보험, 의료보험에 가입할 수 있도록 정비하였다. 또한, 주민 생활의 다원화와 다차원적인 수요 증대에 따라 사회복지서비스를 크게 확충해왔는데, 사회복지기구, 사회단체를 적극 육성·활용하고 있다. 발전한 동남 연해지역의 대도시 들에서는 정부가 프로젝트 형태로 발주하고 지역 커뮤니티(社區) 단위에서 사회복지기구, 사회단체가 수행하는 형태가 크게 발전하면서 사회복지서비스 시장 또한 크게 확대되고 있다.
농촌 지역은 도시-농촌 이원구조에서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은 상대적으로 부족해왔다. 사회주의 시기 인민공사·생산대(대)로의 개조는 현 농촌 거주지를 중심으로 하는 자력갱생(自力更生) 차원의 사회보장제도를 확립하는데 이바지하였으나, 국가로부터의 직접적인 혜택은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최근 중국 정부는 농촌 탈빈곤 전략을 추진함과 동시에 사회보장제도 또한 농촌 지역까지 확대해왔다. 농촌 주민 또한 양로보험과 의료보험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사회구조 및 사회복리 또한 확대 중이다.
중국 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2020년말 도시노동자기본양로보험 참가인수는 4억 5638만 명, 도시농촌주민기본양로보험 참가인수는 5억 4244만 명이다. 기본의료보험 참가인수는 13억 6101만 명이고, 이 중 노동자기본의료보험이 3억 4423만명, 도시농촌주민기본의료보험이 10억 1678만 명이다. 또한 2020년 공상보험 참가인이 2억 6770만 명이고, 실업보험 수령자 수는 약 270만 명, 최저생활보장 대상자는 농촌 3621만 명, 도시 805만 명이었다. 농촌의 경우 특수빈곤인구 447만 명에게 특별보조금이 지급되었다. 한 해 동안 임시구조 조치가 1341만 회, 기본의료보험 자금 보조가 8990만 명, 직접 구조 실시가 7300만 회 실시되었다. 숙소를 제공하는 사회복지기구가 4.1만 개, 지역 커뮤니티 서비스센터(社区服务中心)가 2.9만 개, 지역 커뮤니티 서비스참(社区服务站)이 39.3만 개다.
하지만, 아직까지 중국 사회보장제도는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도시-농촌의 제도적 이원성, 취업·지역 등에 따른 다차원적 분절성, 여전히 낮은 사회지출비율과 조세부담률 등 많은 과제가 남겨져있다. 또한 빠르게 고령화가 진행중인 상황에서, 출생률 저하를 반등시키고 노인 인구의 생계와 돌봄에 대한 사회보장제도 완비는 주요한 과제다.
문화[편집]
기념일과 명절[편집]
중국 정부는 2013년 국무원령(國務院令)을 통해 명절과 기념일의 휴일 규정을 일부 개정하였다. 중국 정부는 공휴일 및 휴일기간을 매년 공식적으로 발표하며, 중국 명절 및 기념일은 전체 국민이 모두 쉬는 휴일과, 일부 집단만 쉬는 휴일로 나뉘어진다. 또한 소수민족의 전통 명절은 소수민족이 집단 거주하는 지구의 지방정부에서 규정한다.
- 명절
중국의 세시풍속은 음력에 따라 치르는데 종류가 다양하다. 문화대혁명 기간 전통 명절 및 풍습이 전(前) 근대적인 것으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하였지만, 개혁개방 이후 빠르게 복원되어 현재 많은 부분에서 이어지고 있다.
한국의 설날에 해당하는 춘절(春節)은 중국 최대 명절로 공식적으로는 음력 1월 1일부터 3일간의 휴일이지만, 매년 정부의 발표에 따라 일주일 내외의 긴 연휴가 만들어진다. 매년 춘절을 맞아 고향으로 귀성하는 인파로 세계 최대의 인구이동이 벌어져 교통난이 일어나기도 한다. 춘절 기간 부모 자식 간, 친척들 간 선물 및 용돈을 주고받고 각종 신년 모임 등이 벌어지는데, 세뱃돈과 유사한 '홍바오'(紅包), 새해를 맞아 행운과 복을 비는 '춘련'(春聯)과 '연화'(年畵)의 풍습이 남아 있다.
원소절(元宵節)은 중화권에서 즐기는 정월대보름으로 원소절 밤에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인다 하여 '단원절(團圓節)'이라고도 불렸고, 한 가족의 화합을 뜻하는 의미에서 원형으로 탕위안(汤圆, 元宵)을 빚어 함께 먹는 풍습이 있다. 또한 등불을 걸고 폭죽 터뜨리기, 사자놀이, 죽마놀이 등 다양한 풍습이 있다.
청명절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성묘하는 풍습이 있고 호국영령에게 경의를 표하는 추모식이 열리기도 한다.
단오절에는 전국시대 초나라 충신 굴원(屈原)이 투신한 걸 안타까워 하며 그를 구하기 위해 배를 저어가는 용선(龍船)경주를 하고 찹쌀과 대추, 팥 등 각종 재료를 대나무 잎에 싸서 쪄먹는 쫑즈(粽子)라고 부르는 별식을 먹는다.
중추절은 달에게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남아있으며 한국에서 송편을 먹듯이 가족들이 월병(月餠)을 함께 먹고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에게 선물한다. 중양절은 공식 휴일은 아니지만 중요한 전통명절로, 만개한 국화를 감상하고 국화주와 국화전을 즐긴다.
식생활[편집]
중국은 음식문화가 매우 발달한 음식문화의 대국으로, 오랜 기간 각 지역의 다양한 환경 속에서 다채로운 음식문화가 만들어져왔다. 특히 산둥 요리(魯菜), 장쑤 요리(蘇菜), 광둥 요리(粵菜), 쓰촨 요리(川菜)의 4대 요리와 푸젠 요리(閩菜), 후난 요리(湘菜), 저장 요리(浙菜), 안후이(徽菜) 요리를 포함한 8대 요리가 가장 유명하다. 하지만 근현대를 거치면서 더욱 다양한 음식문화들이 혼합되어왔고, 지금은 전통 요리부터 현대 서구 요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식문화가 널리 퍼져있다.
중국에서는 음식(飮食)이란 말처럼 마시는 '차'와 '술'도 크게 발전해왔다. 중국은 차의 고향이자 본고장이라 할만큼 전통적으로 차를 마시는 문화가 빠르고 크게 발달해왔고, 차의 생산과 소비 모두에서 세계 최대의 규모다. 차는 주로 요리와 결들이며 기름진 음식의 소화를 돕는다는 믿음이 있다. 녹차, 백차(白茶), 황차(黃茶), 청차(靑茶), 홍차(紅茶), 흑차(黑茶)로 크게 구분하지만, 생산지와 발효 정도에 따라 100여 개 이상으로 분류된다. 이 밖에도 모리화차(茉莉花茶), 국화차 등 꽃을 주재료로 한 화차(花茶) 또한 많이 마신다.
중국은 술 문화의 발상지 중 하나로, 곡물을 주원료로 하는 백주(白酒), 황주(黃酒)와 더불어 근대 이후 발전한 맥주, 포도주 등 매우 다양하다. 고량(高粱)를 주 원료로 한 증류주인 백주, 쌀 또는 조를 주 원료로 한 발효숙성주인 황주가 가장 대표적이며, 기본적으로 음식과 함께 즐기는 반주 문화이다.
관광[편집]
중국은 넓은 면적과 다양한 지역문화, 전통 문명 등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자원이 풍부하다. 개혁개방 이후 빠른 경제발전과 더불어 현대적인 도시 문화가 급성장하면서, 중국은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다채로운 관광대국으로 거듭났다. 중국관광연구원에 따르면, 2018년 중국인의 해외관광객수는 1억 4,972만 명으로 세계 여행객 수의 약 10%를 차지했고, 2011년과 2012년 이래 각각 해외여행객 수, 관광지출 1위를 기록 중이다. 중국인의 국내 관광 또한 크게 활성화되어 2019년 중국 국내관광객 수는 60.06억 명, 중국 내 관광수입은 5조 7251억 위안으로 꾸준히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외국인 관광의 경우 개혁개방 이후에야 비로소 본격화되어 늦은 편이지만, 외화 획득과 국가 이미지 제고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외국인의 중국여행 또한 크게 성장중이다. 2019년 중국에 입국한 외국인은 연인원 총 1억 4530.78만 명으로, 홍콩·마카오·대만에서 온 경우가 1억 1342.43만 명으로 전체의 약 78%를 차지했고, 이를 제외한 외국인이 3188.34만 명으로 약 22%를 차지하였다.
중국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자원이 풍부한 나라로, 다양한 유형의 세계유산이 잘 갖춰져있다. 2021년 기준, 유네스코의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된 곳은 총 56개로, 문화유산 38개, 자연유산 14개, 문화·자연 복합유산 4개다. 중국은 주요 지역별로 다채로운 관광 유산과 문화행사가 있다. 가장 잘 알려진 관광지는 베이징과 상하이지만, 훨씬 더 다양한 명승지가 존재한다. 우선, 고대 수도로서 시안, 난징, 뤄양, 쉬창, 항저우, 정저우, 안양, 카이펑이 있고 이외에도 유명한 역사적 문화도시와 구 시가지, 이국적인 풍경과 소수민족 문화관습을 즐길 수 있는 곳이 넘쳐난다. 중국 정부는 우리의 국립공원과 유사하게 중국국가급풍경명승구(國家級風景名胜區)를 지정·관리하고 있다. 1982년 이후 2017년까지 총 9차례에 걸쳐 244곳이 지정되어 있다.
한편 중국은 광대한 지역과 다양한 문화만큼이나 수시로 지역의 특색을 담은 다양한 문화축제가 열린다. 그 중 세계적으로도 저명한 축제로는 세계 최대 규모의 하얼빈빙설제, 상하이 위위안 원소절 등축제(上海豫園元宵燈會), 난징 국제 매화 페스티벌, 다이족(傣族) 물축제(潑水節), 상하이 국제 영화제, 칭다오 국제맥주축제(靑島國際啤酒節), 정저우 국제소림사무술축제(鄭州國際少林武術節), 상하이 비엔날레, 광저우 트리엔날레 등이 있다.
문학[편집]
중국 문학은 옛 주나라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고전 문학에는 여러 사상들과 달력, 병법, 천문학, 약초학, 지리학 등 여러 귀중한 문화들이 담겨 있다. 가장 유명한 책들에는 주로 역경, 서경, 사서오경 등이 있는데, 주로 춘추전국시대에 공자와 같은 사상가들이 남긴 유산들을 정리해놓은 책이다. 중국의 시가는 주로 시경에서부터 시작되어 당나라 시기에 크게 번성기를 맞았는데, 이백과 두보와 같은 당대의 명시인들이 사랑과 현실주의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중국의 역사학은 서경에서부터 시작하여, 명나라 대의 이십사서까지 내려오며 주로 중국의 신화와 민화까지도 모두 써놓았다. 고전문학은 주로 수호지, 삼국지연의, 서유기, 홍루몽과 같은 소설들이 주로 인기를 끌어 통칭 4대 소설이라고 불린다. 이 문학들은 현대까지도 재창조, 재해석되어 내려오며, 동아시아의 문화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청나라 말기의 계몽기에, 중국은 백화문이라 불리는 새로운 문학 형식이 등장하였으며 루쉰이나 후스와 같은 거장들이 나타나 현대 문학의 길을 열었다.
의상[편집]
중국 전통의상에는 여성전통의상인 치파오가 있다.
스포츠[편집]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스포츠 문화를 지닌 나라들 중 하나이다. 궁술은 서주 시대부터 전래되어왔다는 기록이 있으며, 검술과 축국 등도 고대부터 활발히 이루어졌다. 참고로 축국은 후대에 발전되어 중국식 축구와 비슷하게 변형되었다.
중국에서는 신체 단련을 중요시하는데, 이 때문에 현대까지도 기공이나 태극권이 활발히 대중들 사이에서 단련되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관련 모임들이 성업 중이다. 현재 가장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스포츠 종목은 농구로, 중국 농구 연맹과 미국 NBA는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젠롄이나 야오밍 같은 선수들이 인기가 많다. 중국의 프로 축구리그인 중국 슈퍼리그는 1994년에 시작되었으며, 아시아에서 가장 거대한 축구 시장이다. 그 외에 대중적인 스포츠는 무술, 탁구, 배드민턴, 수영 등이 있다. 보드게임의 경우 장기, 마작, 최근의 경우에는 체스 등이 유명하며, 전문적인 대회도 있다. 또한 자전거도 매우 인기가 많은데, 2012년에만 4억 7천만 개의 자전거가 보급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또한 전통적으로 전해져내려오는 용선 경주, 몽골식 레슬링, 경마도 매우 유명하다.
중국은 1932년 이래 올림픽에 계속 참가해왔으나, 다만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참가한 것은 1952년부터이다. 중국은 베이징에서 2008년 올림픽을 개최하였으며, 51개의 금메달을 따내며 참가국들 중 최다 금메달 수를 기록하는 영예를 안았다. 중국은 2012년 패럴림픽에서도 95개의 금메달을 포함한 231개의 메달을 따내며 가장 많은 메달을 따냈고, 2011년에는 선전에서 2011년 여름 유니버시아드를 개최하였다. 중국은 2013년 동아시아 게임을 텐진에서 개최하였으며 난징에서는 2014년 하계 청소년 올림픽을 열었다. 베이징과 인접 도시는 2022년 동계 올림픽을 개최했으며, 이로서 베이징은 처음으로 하계 올림픽과 동계 올림픽을 모두 개최한 도시가 됐다.
종교[편집]
중국 문명은 역사적으로 매우 다양하고 풍부한 종교·철학과 민간신앙을 가져왔고 일반적으로 유교(儒敎), 불교(佛敎), 도교(道敎)는 중국 문화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된다. 중국 유교, 도교 등 전통적인 철학·신앙 및 종교뿐만 아니라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이 외래 전파되어왔고, 중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불교, 도교, 천주교, 개신교, 이슬람교의 다섯 종교를 인정하고 있다. 사회주의 정권 수립 이후 중국 정부의 종교관은 종교 비판이라는 무신론적 관점에 기반하였지만, 소수민족과 관련된 종교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고 또 믿지 않을 자유도 보호하고 존중하였다. 중국 헌법 제36조는 정상적인 종교활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지만 종교와 정치, 종교와 교육 분리원칙을 천명하며 그 자유에는 한계가 있다. 특히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사원·교회 등이 홍위병(紅衛兵)에 의해 공격받아, 모든 종교활동이 이루어지지 못하기도 하였다.
개혁개방 이후 각종 종교와 민간신앙 활동이 활성화되면서 전통적 조상숭배 의례 등 민간의례 또한 활성화되었고, 최근에는 법에 따른 정부와 공산당의 종교활동 관리 및 지도가 강화되는 추세다. 공식적인 정부 통계는 없지만, 정부에서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1997년 전체 종교 신도가 1억여명, 2018년 2억여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공식적인 종교 분포 또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2014년 중국가족패널조사 결과에 따르면 무종교 및 민간신앙이 73.56%, 불교 15.87%, 도교 7.59%, 기독교 2.53%, 이슬람교 0.45%의 분포를 보인다.
불완전한 집계에 의하면 중국에는 약 360,000명의 성직자가 있으며 법에 의해 등록되고 개방한 종교 활동장소가 140,000곳에 달하며 종교 신자들의 수요를 기본적으로 만족시키고 있다. 종교단체가 5,500개에 달하고 각 종교 교무활동이 질서 있게 전개되고 있다. 비준을 거쳐 회복되거나 설립된 각 유형의 종교 학교가 97개에 달하여 비교적 완벽한 종교 학교 교육체계를 형성했다. 종교 경전, 종교 간행물 등 종교 출판물이 법에 의해 인쇄, 유통되고 있다. 2012년까지 중국 《성경》인쇄 수량이 1억 여 부에 달하여 중국은 세계에서 《성경》을 가장 많이 인쇄하는 나라의 하나로 되었다.
중국에서 전국적인 종교단체로는 중국불교협회, 중국도교협회, 중국이슬람교협회, 중국천주교애국회, 중국천주교 주교단, 중국기독교 "3자"애국운동위원회, 중국기독교협회 등이 있다. 각 종교 단체는 각자의 규약에 따라 지도자와 지도기구를 선거, 산생하며 자주적으로 종교 사무를 처리한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종교학교를 개설하고 종교 경전을 인쇄, 발행하며 종교 간행물을 출판하고 사회공헌 봉사활동을 진행한다.
과학기술[편집]
중국 과학기술 분야의 역량은 빠르게 성장 중이며 그 성과 또한 빠르게 축적되고 있다. 특히, 최근 미중 갈등 및 경쟁 속에서 과학기술 분야에서 중구의 빠른 추격과 부상은 전세계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중국은 종이, 인쇄술, 나침반, 화약 등 이른바 '4대 발명품'에 견주어 공유자전거, 고속철도, 모바일결제, e-비즈니스를 '신(新) 4대 발명품'으로 추켜 세우면서 과학기술 강국임을 내세웠고, 최근 인공지능, 빅데이터, 클라우드 등 뿐만 아니라 첨단과학기술의 종합체인 항공우주분야에서까지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라섰다.
메이드 인 차이나의 악명 때문에 중국의 과학기술이 낮다고 아는 사람도 많지만 항공우주기술이나 국방과학기술, 기초과학기술 등의 기술 분야들에서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국 중 하나이다. 또한 최근에는 중국의 첨단과학기술은 매우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과학기술 논문의 양적 지표인 네이처 인덱스만 보더라도 중국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이다.
중국은 구소련 및 현 러시아처럼 항공우주 분야에서 매우 뛰어나다. 항공우주 분야에서 중국은 명실상부한 세계 3위의 강대국이다.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가 쏘아올려진 다음해인 1958년부터 마오쩌둥이 위성발사를 제창했고, 1960년 최초의 발사체 둥펑(東風) 미사일[50]을 쏘았고, 1970년 둥팡홍(東方紅) 1호로 드디어 빛을 발했다. 문화대혁명이라는 거대한 반달리즘을 저지르고도 항공우주 기술을 이 정도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유인우주선 우주 도킹을 자력으로 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 러시아, 중국 밖에 없다.
사실 200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의 우주기술은 미국, 러시아는 물론 일본이나 유럽에도 뒤진다고 평가되었다. 사실 인공위성 발사로 스페이스클럽에 들어간 건 세계 5번째라서 아무리 못해도 세계 5위는 되었다. 장쩌민 시절인 1990년대에는 921공정이라는 계획을 세운 이후, 30년 안에 독자 우주정거장을 건설한다는 야심찬 목표를 세우고 밀어붙였다. 결국 20년 동안 실험용 우주정거장까지 건설하는 위엄을 보여주었다. 구소련 및 현 러시아에 이어 미국에 대항하는 우주 기술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2003년 10월 선저우 계획으로, 첫 유인우주선 선저우 5호 발사 성공 이후 중국의 항공우주 기술력은 세계 3위 정도로 평가받게 된다.
당시 중국과학기술부장 쉬관화(徐冠华,서관화)은 "양탄일성"급의 사건이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을 성공시킨 기쁨에 둥팡홍을 쏘아올린 기쁨을 더한 정도라는 것이다. 원자폭탄과 수소폭탄 개발과정은 고작 2년 8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2007년에는 중거리 탄도미사일로 스스로 노후 기상위성을 파괴하기도 했다. 물론 아직 미국의 기술이 넘사벽이기는 하지만 이 위성 파괴건은 마냥 자랑만 할 거리는 아닌 게,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서 우려를 표시했으나 중국은 그냥 무시하고 파괴시켰다. 그 결과 대량의 우주쓰레기가 양산되었다. 발사체를 이용한 위성 파괴는 우주쓰레기를 심각하게 발생시켰는데, 미국과 소련이 이런 종류의 무기를 1980년대에 여러번 실험했다가 우주쓰레기를 발생시켰는데, 중국도 여기에 나쁜 쪽으로 한몫한 것이다.
참고로 영화 그래비티는 중국의 위성파괴 때문에 문제가 빚어졌다는 식으로 전개하려고 했으나 중국 시장을 고려해서 러시아가 파괴하는 것으로 시나리오를 바꾸었다고 한다. 그리고 오히려 주인공의 생환을 도와주는 역할이 중국이 되었다. 중국 정부도 이에 화답하여 그래비티의 개봉날짜를 당겨줘 미국과 중국은 거의 동시개봉하게 되었다.
중국은 이제 우주 정거장도 쏘아 올리는 나라다. 무인 우주선 선저우 8호로 이미 도킹은 성공했고, 9개월 뒤에 아예 2012년 6월 18일에는 첫 여성우주인 류양을 태운 유인우주선 선저우 9호가 지난 18일 지구궤도에서 우주 정거장인 톈궁 1호와 도킹에 성공하였다. 2013년 12월에는 세계 3번째로 최초의 무인 달 탐사 차량인 옥토끼(玉兎·위투)를 탑재한 창어3호를 달에 착륙시켰다. 2015년 7월 25일에는 쓰촨성 시창 위성발사센터에서 제18 · 19호 차세대 베이더우 항법위성을 탑재한 창청(長征)3호을(乙)과 위안정(遠征) 1호 로켓 발사에 성공했다. 2015년 9월 20일에는 20기의 소형위성을 장착한 로켓인 창정 6호 발사에 성공하였다. 또한 2004년부터 11년째 이어지고 있는 중국의 달 탐사 공정을 통해 중국은 이미 달 궤도 선회 및 달 표면 착륙과 같은 임무를 성공한 상태다. 2016년 8월 16일에는 세계 최초로 양자통신 상용화를 위한 실험위성 발사에 성공하였다.
중국의 항공우주기술이 대단하다는 것은 수치로도 증명되는데, 중국은 모든 종류의 인공위성을 독자제조할 수 있으며, 위성 발사기지는 5곳, 우주개발에 종사하는 인원수는 40만여 명에 달한다. 뿐만 아니라 현재 궤도상의 인공위성 수와 지금껏 발사한 위성의 수도 중국은 러시아-미국에 이어 세계 3위다. 중국의 공식 우주예산은 1년에 50억 달러 정도지만, 중국의 국방비와 마찬가지로 누구도 진짜 중국이 이 정도밖에 안 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단 돈을 퍼부으면 기술력은 성장하기 마련이고, 기술력이 성장하면 성과는 당연히 나오기 마련인데, 유인우주선 성공과 우주유영 성공, 그리고 실험적 우주정거장인 톈궁을 건설하는 것으로 이미 중국은 자신의 기술력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모든 과학기술 측면에서 그런 것은 아니고 한국이 앞서 있는 분야도 있으니 경우에 따라 다르다. 사실 조선업만 보더라도 벌크선이나 중소형 화물선같은 저부가가치 선박은 중국 점유율이 높다지만 대형 화물선이나 유조선 탱커, LNG선같은 선박은 중국 조선업체보다 아직은 우위에 있다. 중국 조선업의 저가경쟁 요소였던 낮은 임금도 중국의 임금 인상으로 인해 2022년 현재로서는 옛날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빠른 기술 발전으로 대한민국보다 기술력이 떨어졌다고 판단되었던 중국이 기술 발전을 하자 일본보다도 뒤쳐져 있는 한국에 중국이 급격히 쫒아온다는 '샌드위치론'이 등장하였다. 한·중·일 기술수준을 어느 정도 비교하면 이에 대한 우려가 매우 크다.
한국의 첨단기술은 기업들의 적극적이고 과감했던 투자와 공대 붐이 일었던 80년대에 배출한 인재풀로 만들어낸 것인데, 그것이 현대에 와서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위의 서술도 그렇고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처럼 신뢰성이 높은 통계 자료를 기준으로 보면 한국인들이 멍청이가 아닌 이상 디스플레이, 반도체, IT(정보기술) 같은 주류 분야는 추격 속도가 매우 빠르면 5년 적당히 빨라도 10년은 걸릴 격차다. 2022년을 기준으로 봐도 아직 차이가 나는 편이라지만 수치상으로 중국이 10년 안에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밖에도 식물분류학같은 학문은 한국은 물론 현대식물학을 먼저 시작한 일본보다도 뛰어나, 그 드넓은 땅과 다양한 기후대의 자국 식물을 대부분 분류해놓은 상태이다.
R&D[편집]
2020년 중국의 연구개발(R&D) 총 지출은 2조 4393.1억 위안으로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를 기록했는데, 미국과의 격차 또한 빠르게 축소되고 있다. R&D 총 지출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2.40%를 기록하여 전년도에 비해 0.16%p 증가했고 OECD 평균 2.38%에 육박한다. 자금 출처로 보면, 기업이 18673.8억 위안(전체의 76.6%), 정부직속기구가 3408.8억 위안(14.0%), 대학이 1882.5억 위안(7.7%)로 부담하였다. 또한, 중국 R&D 인력(FTE기준)은 2017년 403만 명으로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연구개발의 양적·질적 성과 또한 빠르게 축적되고 있다. 2018년 10월 기준, SCI에 수록된 중국 논문은 36만 편에 달하여 9년 연속 세계 2위를 차지하여 미국에 여전히 뒤쳐져있지만, 과학기술 논문의 양적·질적 수준은 빠르게 향상 중이다. 2018년 9월 기준 중국의 피인용 횟수 상위 1% 논문 수는 2만 4,825편에 달하며 세계 3위를 차지했고, 1985년 《특허법》 시행 이후 특허 출원 및 등록 수가 크게 증가하여 2017년 각각 370만 건, 186만 건을 기록하였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핀테크, 차세대자동차, 에너지, 나노과학, 그래핀 소재, 위성항법 등 많은 분야에서 연구개발의 성과가 뚜렷이 드러나면서 선진국의 기술수준을 빠르게 추격·추월하고 있다.
연구기관[편집]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문화대혁명 기간 작동이 정지되었던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중국과학원, 중국과학기술협회 등을 재결성했고, 특히 중국과학원(CAS)은 중국 자연과학분야 최고 학술기구이자 과학기술분야 최고 자문기구로서, 자체에 많은 연구기관, 연구프로그램, 대학(원) 과정을 갖고 있으며 각 분야에 영향력있는 조언을 수행한다. 중국과학원의 원사(元士) 제도는 최고 권위의 종신 직책으로, 2년에 한 번 엄격한 선발과정을 거쳐 선정되며, 중국의 '과학굴기'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토대로서 평가된다.
국제학술지 《네이처》가 발표한 '네이처 인덱스 2021 아시아퍼시픽'에 따르면 2019년 9월부터 2020년 8월까지 1년간 가장 연구성과가 뛰어난 200개 기관 중, 59%인 118개가 중국 기관이었다. 특히, 상위 5위 내에 중국과학원(1위), 중국과학기술대학교(2위), 베이징대학교(4위), 중국과학원대학교(5위)를 휩쓸었는데, 순위는 논문 수가 아닌 톱 저널 논문의 인용건 수라는 점에서 질적 수준이 상당히 높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경제기술개발구를 통해 과학단지를 개발해왔고, 특히 1988년 발표한 하이테크놀러지산업의 개발을 상품화, 산업화하려는 '횃불계획(火炬計畵)'을 기점으로 전국적으로 하이테크산업개발구를 조성하고 본격 발전시켜왔다. 국가급부터 지방 각 급에 이르는 각종 과학기술산업단지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베이징, 상하이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 외에도, 광둥성과 최근 홍콩, 마카오를 아우르는 대만구 또한 주목을 받고 있다.
한중관계[편집]
수교 및 교민[편집]
1992년 8월 한국과 중국 간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한 이후 대륙에 있던 정권을 지칭하던 명칭이 '중공'에서 '중국'으로 바뀌었다. 한중 수교 이후 경제, 사회, 문화 각 방면의 교류 확대로 인해 중국에 거주하는 기업인, 유학생 등이 급증해왔다. 2019년 중국에 체류하는 재외국민은 총 307,914명으로, 2017년에 비해 11.9% 감소했다. 외국국적동포(시민권자) 2,153,472명을 포함할 경우 2,461,386명으로 늘어난다. 많은 교민들이 베이징, 상하이, 칭다오, 광저우 등지에서 거주하고 있지만,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이후 교민 100만 명 시대를 열었던 데 반해서 많이 감소해왔다.
교역·투자[편집]
한중 양국은 1992년 수교 이래 경제통상 분야에서 지리적 인접성, 경제적 상호보완성, 문화적 유사성에 기초하여 비약적인 관계 발전을 이룩하였다. 수교 이후 양국간 교역액은 급속히 증가하여 2019년 교역액 2,434억 달러로 수교 당시 63.7억 달러의 38배를 달성하였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 교역대상국이고, 한국은 중국의 제3위 교역대상국(홍콩 제외 시)이다. 1992년을 제외하고 한국이 계속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해왔으나, 그 수치는 다소 감소세에 있다. 한중 양국간 수출입 제품은 주로 중간재와 원자재로 상당한 정도의 국제 분업이 이뤄져왔으나, 중국의 수출 구조가 고도화되면서 양국간 경쟁이 심화되고 있다. 한국의 주요 수출품은 집적회로, 반도체 보울, 석유와 역청유, 액정디바이스, 환식탄화수소, 부품과 부분품 등이고, 주요 수입품은 집적회로, 전화기, 자동처리기계, 통신·디스플레이 부품, 절연전선, 부품과 부분품 등이다.
2019년 한국의 대 중국 실제투자는 58억 달러로 중국의 제2위 투자국(홍콩 제외)이며, 한국의 대 중국 투자 누적액(한국 통계 기준)은 708억 달러로 한국 해외투자의 약 13.7%에 달한다. 2009년 이래 중국은 한국의 제2위 투자대상국이다. 한국의 대 중국 투자는 과거 중소기업, 제조업 위주에서, 최근 대기업, 서비스업 투자 비중이 증가하고 있고, 투자 목적도 기존의 비용절감(저임금 활용)에서 내수시장 진출로 변화하고 있다. 기업별로 보면, 2019년까지 누계기준 대기업이 건수기준 15.1%, 금액기준 72.8%를 차지하고, 산업별로는 1차 산업 0.77%, 2차 산업 79.6%, 3차 산업 19.7%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의 대 한국 투자는 2019년 9.8억 달러(신고액)으로 상대적으로 미약한 수준이지만, 서비스업, 특히 부동산, 문화콘텐츠, 패션 및 IT 산업 부문을 중심으로 증가하고 있다.
2015년 12월 한-중 FTA가 발효됨에 따라, 양국은 상품 교역과 투자 중심에서 유통, 환경, 서비스 등을 포함한 전방위적 산업협력을 추진하고 있고, 한국의 대 중국 투자 및 산업협력 분얀느 점차 동부연안에서 중서부로, 노동집약적 제조업에서 첨단제조업 및 서비스업 등으로 확대 중이다. 양국 정부는 인공지능, 빅데이터, 바이오, 신에너지 등 첨단 산업 분야를 적극 육성 중이기에, 신산업 분야에서 경쟁과 동시에 협력할 공간도 확대될 것으로 예상되며, 한-중 FTA 서비스투자 후속협상이 타결될 경우 시장 개방을 바탕으로 양국 경협의 제도화 수준이 향상될 것으로 기대된다.
중국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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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행정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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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형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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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주변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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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 〈중화인민공화국〉, 《위키백과》
- 〈中华人民共和国〉, 《百度百科》
- 〈中华人民共和国〉, 《维基百科》
- 〈중국〉, 《나무위키》
- 〈중국〉, 《두산백과》
- 〈중국/국호〉, 《나무위키》
- 〈오성홍기〉, 《나무위키》
- 〈의용군 진행곡〉, 《나무위키》
- 김흥규, 〈특집: 아시아의 미래와 전략 (4)시진핑 시대 중국의 주변외교 전략〉,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2021-09-27
중국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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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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