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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헌'''(崔忠獻)은 [[고려]] 무신정권의 제5대 집권자이자 최씨 정권 초대 수장이다. 본관은 우봉 최씨이고, 초명은 최난(崔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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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발해 고왕.jpg|썸네일|300픽셀|'''발해 고왕(대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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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고왕'''<!--대조영-->(高王)은 발해의 시조(재위 698~719)로 본명은 대조영이다.  
  
 
== 개요 ==
 
== 개요 ==
* '''최충헌'''은 고려 시대 중기 ~ 후기의 무신이자 군인, 정치인이다. 최씨 정권의 첫 번째 지도자이다. 본관은 우봉(牛峰)이며 초명은 최난(崔鸞)이고 시호는 경성(景成)이다. 1196년부터 1219년까지 23년 동안 고려 왕조의 실권을 맡았다. 최씨 정권을 연 첫 권력자이자 장군이다. 강종의 서녀사위이자 고종의 서매부이고, 원종에게는 고모부이자 처외증조부가 된다. 정순왕후의 외증조부이자 충렬왕의 외외고조부였다. 또한 수성택주 임씨와 사위 임효명(이칭 임효순)을 통해 의종, 명종, 신종의 모후 공예왕후와도 사돈이 된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C%B5%9C%EC%B6%A9%ED%97%8C 최충헌]〉, 《위키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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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 고왕'''은 698년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규합하여 동모산을 도읍으로 한 진국(震國)을 세웠으며, 713년 국호를 발해로 바꾸었다. 본명은 대조영(大祚榮)이며, 고구려의 유민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나라의 고구려 유민 분산정책에 따라 가족과 함께 요하(遼河) 서쪽의 영주(營州)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696년 이진충(李盡忠) 등이 이끈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영주 지역에 억류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동쪽으로 탈출하여 자립을 꾀하였다.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가 거란족의 반란을 평정한 뒤 군대를 파견하여 그의 집단을 추격하도록 하였으나 장령자(長嶺子) 부근의 천문령(天文嶺)에서 대조영에게 대패하였다. 이후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규합하는데 더욱 힘써 국가건설의 기반을 굳히고, 계속 동부로 이동하였다. 698년 지금의 지린성(吉林省) 옌볜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 둔화시(敦化市) 지역인 동모산(東牟山)에 도읍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어 국호를 진(震 또는 振)이라 하였다. 발해의 건국 지역은 계루부(桂婁部)의 옛 땅이었으며, 대조영의 큰아들 대무예(大武藝, 훗날의 무왕)도 계루군왕으로 불렀다. 한편, 당나라는 유화정책을 펼쳐 705년 중종(中宗)이 진에 사신을 보내왔고, 고왕도 둘째 아들 대문예(大門藝)를 당나라에 보냄으로써 우의를 표하였다. 713년 당나라 현종(玄宗)은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左驍衛大將軍渤海郡王忽汗州都督)의 별직을 주고 우의를 나타냈다. 그해에 국호를 진국에서 발해로 바꾸었고, 양국은 건국 초기의 갈등을 극복하고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ref>〈[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06065  고왕(高王)]〉, 《두산백과》</ref>
  
* '''최충헌'''은 고려 최고위 무관직인 상장군을 역임한 최원호의 아들로 그의 외조부인 유정선도 상장군을 지낸 전형적인 무인 가문 출신이다. 하지만 문신이 득세하던 시절이라 당시 부친의 뜻에 따라 글을 배워 처음에는 음서로 문관 벼슬에 진출했다. 문관이 된 후 양온령에 임명되었으며 성릉직, 위위주부 등을 거쳤다가 스스로 도필리가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흥위위, 보승, 산원으로 옮겼다. 1170년 8월 무신정변이 일어나자 문관에서 무관으로 빠르게 탈바꿈했으며, 제19대 [[명종]] 4년인 1174년 서경유수 조위총의 난이 일어났을 때부터 출세 코스를 타게 되는데 당시 무신정변에 동참한 공로로 권력을 얻었던 부원수 기탁성에게 발탁되어 별초 도령이 되었고,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흥위위 별장으로 승진했다. 1176년 지안동부사부사(知安東府事副使)에 임명되면서 서리들에게 엄하면서도 백성들에게 관대하여 찰방사가 그 공이 으뜸이라 보고했으며 임기가 끝나자 1180년 응양부 섭[낭장, 1181년 응양부 낭장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승진가도를 달리던 그의 관직 승진 속도는 이의민 집권기부터 쭈욱 줄어든다. 1187년 경상진주도 안찰사에 임명되었다가 이의민의 뜻에 거슬려 탄핵을 받아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용호군 섭중낭장에 임명되었다가 1188년 용호군 중낭장이 되었다. 1193년 감문위 중랑장, 감문위 차장군이 되었다가 1194년 감문위 섭장군이 되었다. 10년도 채 안 되어서 낭장까지 오르다가 중랑장으로 가는 속도가 꽤나 오래 걸렸고, 이후에는 섭장군에 머무르는 것만 보더라도 이의민 집권기 때 그가 철저하게 승진 인사에서 배제되었음을 알 수 있다. <ref>〈[https://namu.wiki/w/%EC%B5%9C%EC%B6%A9%ED%97%8C  최충헌]〉, 《나무위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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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 고왕'''은 발해를 건국한 초대 왕이다. 고왕에 관해 중국 측 기록인 《구당서》에서는 대조영(大祚榮)을 고구려의 별종 출신으로 서술했고, 반면 《신당서》에서는 본래 고구려에 부속되었던 속말말갈(粟末靺鞨) 출신이라고 서술되어 있다. 당나라의 영주(營州)에 그 고구려 유민과 함께 이주되어 살았으며, 걸걸중상, 걸사비우 등을 따라 고구려 유민 및 말갈족을 이끌었다. 696년 이진충(李盡忠), 손만영(孫萬榮)이 이끄는 거란족의 반란을 틈타 걸걸중상, 걸사비우 등과 동쪽으로 이동, 무주(武周)는 사신을 보내 회유했으나 거절했다. 무주에 항복한 거란족 출신 장군 이해고(李楷固)의 습격을 받고 대패했으나 동쪽으로 이동했다. 698년 천문령 전투에서 무주 군대를 격파하고 동모산에 성을 쌓고 진()을 건국, 연호를 천통(天統)으로 했다. 705년에 당나라와 화친하였고, 713년 당나라 예종으로부터 좌효위원외대장군 발해군왕(左驍衛員外大將軍 渤海君王) 홀한주도독부도독(忽汗州都督府都督)으로 책봉되고 형식적인 조공관계를 유지했다. 한국 측 기록인 《삼국유사》에 인용된 《신라고기》와 《제왕운기》에서는 대조영을 고구려 구장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신라고기에서 고구려 구장 조영은 성이 대씨라고 기록되어 있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C%99%95 고왕]〉, 《위키백과》</ref>
  
* '''최충헌'''은 고려 후기, 무신 집정 이의민을 제거하고 무신 정권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 교정별감(敎定別監)을 역임한 무신이다. 본관은 우봉(牛峰). 초명은 최란(崔鸞). 아버지는 상장군(上將軍) 최원호(崔元浩)이다. 상장군 송청(宋淸)의 딸 송씨(宋氏) 부인에게서 장남 최이(崔怡: 초명은 최우(崔瑀))와 차남 최향(崔珦)을 낳았고, 강종(康宗)의 서녀(庶女) 정화택주(靜和宅主) 왕씨(王氏) 부인에게서 아들 최구(崔球)를 낳았으며, 첩으로는 수성택주(綏成宅主) 임씨(任氏)와 자운선(紫雲仙)이 있었다. 처음에 음보(蔭補)로 양온령(良醞令)이 되었다가, 1174년(명종 4) 조위총(趙位寵)의 저항 때 원수(元帥) 기탁성(奇卓誠)의 휘하에서 용감히 싸워 별초도령(別抄都令)에 발탁되었으며, 뒤이어 섭장군(攝將軍)에 올랐다. 권력을 장악한 최충헌은 왕의 측근 50명을 추방한 뒤 좌승선(左承宣)을 거쳐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가 되었다. 1197년(명종 27)에는 충성좌리공신(忠誠佐理功臣)에 봉해졌고, 아버지 최원호에게는 봉의찬덕공신수태위문하시랑(奉議贊德功臣守太尉門下侍郞)을 내렸다. 그해 9월에 명종이 '봉사십조'를 이행하지 않고 국고를 낭비한다는 핑계로 왕을 창락궁(昌樂宮)에 유폐한 뒤 그의 아우 평량공(平凉公) 왕민(王旼)을 새로운 왕[神宗]으로 추대하였다. 1212년(강종 1)에는 흥녕부를 고쳐 진강부(晉康府)라 하였고, 자신은 문경무위향리조안공신(文經武緯嚮里措安功臣)에 봉해졌다. 1214년(고종 1)에 최충헌의 처 임씨(任氏)는 수성택주(綬成宅主), 왕씨(王氏)는 정화택주(靜和宅主)가 되었다. 1218년(고종 5)에 나이 70세가 되어 궤장(几杖)이 하사되었고, 1219년(고종 6)에는 고종이 왕씨(王氏) 성을 내려 주기도 하였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7707 최충헌(崔忠獻)]〉,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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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 고왕'''은 발해를 건국한 발해 왕조의 창업군주이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나라에서 고구려의 유민들을 국외로 강제 이주시켰으나, 영주(營州) 지역에는 여전히 적지 않은 수의 고구려 유민들이 있었다. 당나라의 가혹한 통치로 거란인들이 봉기하여 영주 일대를 점거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때 대조영은 말갈 추장 걸사비우와 함께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향했다. 대조영은 걸사비우가 전사한 후 말갈과 고구려의 무리들을 규합하여 계속 동쪽으로 진군해 천문령 전투에서 이해고가 이끄는 무주군을 무너뜨렸으며, 다시 동쪽으로 향해 지금의 길림성(吉林省) 돈화현(敦化縣)에 위치한 동모산(東牟山)을 기반으로 나라를 세웠다. 중국의 기록 외에는 신라의 [[최치원]]이 당나라에 보내는 국서 등에 대조영이 언급되는데, 이에 따르면 대조영이 처음 나라를 세우고 신라에 사신을 보내 이를 알렸는데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했을 당시 신라는 효소왕의 재위기였다. 신라에서는 대조영에게 5품 관등 대아찬을 주었다. 대아찬은 신라 골품제에서 진골만 받을 수 있는 관등인데 신라가 외부인에게 진골 대우를 한 것이 기록상 남아있는 건 금관가야 왕족 구형왕, 고구려 왕족 안승 둘뿐이었다. 이걸 준 건 발해가 신라보다 아래라는 정치적 제스처긴 하지만, 어쨌든 신라 측에서 신생국가 발해와 대조영을 새로운 한 나라의 군주로 인정한 것이다.<ref>〈[https://namu.wiki/w/%EA%B3%A0%EC%99%95 고왕]〉, 《나무위키》</ref>
  
* '''최충헌'''은 1149년(의종 3)부터 1219년(고종 6)까지 생존했던 무신으로서 정권을 장악하여 이후 4대 60년 동안 이어진 최씨 무신집권기를 열었던 인물이다. 그는 20여 년 동안 집권하면서 네 명의 국왕을 갈아치웠다. 스스로 중서령(中書令)이라는 고려 최고위의 관직과 진강공(晉康公)이라는 최고위 작위까지 취하였고, 자신의 거처인 흥덕궁(興德宮)을 왕궁에 못지않은 규모로 꾸미고서 거기에 진강부(晉康府)라는 관부를 개설하여 정사를 오로지하였으며, 진주(晋州)를 식읍으로 차지하는 등 정치적, 경제적으로 국왕을 능가하는 권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그의 사후에는 지위가 최우(崔瑀), 최항[중기](崔沆), 최의(崔竩) 등 그의 가문으로 이어졌다. 1209년 학자 이규보를 발탁, 무신정권으로 피폐해진 문운(文運)을 재흥시키려고 힘썼는데, 청교역(靑郊驛)의 관리들의 자기네 부자살해 미수사건이 생기자 영은관에 교정도감(敎定都監)을 설치, 실질적인 무인정권의 중앙기관으로서 국정 전반을 감독케 했다. 본부인이 있는 상태에서 강종의 서녀인 왕씨와 결혼하여 부마의 직책까지 겸했다. 사후 조선에서 쓴 고려사, 고려사절요에 의해 반역자로 격하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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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 고왕'''은 발해의 제1대(재위: 698년~719년) 왕이다. 본명은 대조영(大祚榮)이다. 고구려 유민으로서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의 영주(營州) 지방에 그 일족과 함께 옮겨 와 거주하였다. 『구당서(舊唐書)』에 의하면 696년이진충(李盡忠) · 손만영(孫萬榮) 등이 이끄는 거란족의 반란으로 영주 지방이 혼란에 빠지자, 대조영은 말갈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그 지역에 억류되어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각각 이끌고 당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동으로 이동하였다. 이에 당나라는 대조영에게 진국공(震國公)을, 걸사비우에게는 허국공(許國公)을 봉하고 회유해 당나라의 세력 아래 다시 복속시키고자 했으나 그들은 거부하였다. 당나라는 거란군을 격파한 뒤, 성력연간(聖曆年間, 698∼699)에 추격군을 파견하였다. 당나라에 항복한 거란족 출신의 장군 이해고(李楷固)가 이끄는 당나라 군사가 공격해 오자, 걸사비우의 말갈족 집단이 먼저 교전했으나 대패하였다. 그러자 대조영은 휘하의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당나라 군사의 예봉을 피해 동으로 달아나면서, 한편으로 흩어진 걸사비우 예하의 말갈족 등을 규합하였다. 당나라 군사가 계속 추격해 오자, 대조영은 지금의 혼하(渾河)와 휘발하(輝發河)의 분수령인 장령자(長嶺子) 부근에 있는 천문령(天門嶺)에서 그들을 맞아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그 뒤 계속 동부 만주 쪽으로 이동해 지금의 길림성(吉林省) 돈화현(敦化縣)인 동모산(東牟山)에 성을 쌓고 도읍을 정하였다. 698년에 국호를 진(),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였다. 건국 후 곧이어 당나라와 대결하고 있던 몽고고원의 돌궐(突厥)과 국교를 맺고 신라와도 통교했으며, 당나라와는 중종 때 정식으로 통교하였다. 당나라는 713년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했는데, 그때부터 발해라는 국호가 사용되었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841 고왕 (高王)]〉,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 쿠테타와 이의민 제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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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문령전투 ==
* 최충헌은 1196년(명종 26) 음력 4월 8일, 아우 최충수와 이지영(李至榮)과의 사감(私憾)이 동기가 되어, 최충수의 권유로 먼저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이의민을 미타산에 있는 그의 별장(別莊)을 습격하여 죽인 뒤에 그 머리를 저자에 효수케 하는 한편 군사를 모아, 이의민의 아들 지순(至純)·지광(至光)이 거느린 가병을 물리치고는 명종을 움직여 이의민의 삼족과 그 일당을 모조리 잡아 죽였다. 그의 숙청 공작은 자못 철저하여 그를 제거하려던 승려들의 반란이 있자 평장사 권절평(權節平)·손석(孫碩)·대장군 이경유(李景儒) 등과 참지정사 이인성(李仁成)·상장군 강제(康濟)·승선 문적 등 36명이 딴 뜻을 품고 있다 하여 3월을 전후해서 모두 잡아 인은관에 유폐한 뒤 죽였고, 또 이의민 시기의 무인 실력자였던 두경승을 숙청한 뒤 판위위사(判衛尉使) 최광원(崔光遠)·소경(小卿) 권신(權信)·장군 권식(權湜)·두응룡(杜應龍) 등을 귀양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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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문령전투(天門嶺 戰鬪)는 698년 대조영이 이끈 고구려 유민들이 천문령에서 당나라 군대와 싸운 전투이다. 698년 대조영(大祚榮, 고왕)이 이끈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인(靺鞨人) 집단이 거란(契丹) 출신의 장수 이해고(李楷固)가 이끈 당나라 군대와 천문령(天門嶺)에서 싸운 전투이다. 대조영의 세력이 승리하면서 발해(渤海)가 건국되는 계기가 되었다.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 《오대회요(五代會要)》, 《신오대사(新五代史)》 등에 관련된 기록들이 전해진다. 고구려 출신인 걸걸중상(乞乞仲象)과 대조영은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 요서(遼西) 지방의 영주(營州)로 끌려가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696년 거란의 부족장인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영주도독(營州都督) 조문홰(趙文翽)를 죽이고 당나라에 반란을 일으키자, 걸걸중상과 대조영은 백산말갈(白山靺鞨)의 수장인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요하(遼河)를 건너 동쪽으로 탈출했다. 그리고 백두산의 동북 지역을 차지하고, 지금의 무단 강[牡丹江]인 오루하(奧婁河)에 의지해 성벽을 쌓고 방어를 튼튼히 하였다. 이들의 세력이 커지자 당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는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으로,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으로 봉했다. 하지만 이들이 복속을 거부하자 측천무후는 거란족 출신의 옥검위대장군(玉鈐衛大將軍) 이해고(李楷固)와 중랑장(中郎將) 색구(索仇)가 이끄는 토벌군을 보냈다.
 
   
 
   
* 최충헌은 두경승의 사위인 장군 류삼백을 매수하여 두경승을 유인한 뒤 체포하여 자연도로 유배를 보낸다. 1197년 9월 최충헌은 왕을 폐하려 저잣거리에 병사를 다스려 정돈하며 의논할 일을 맡긴다며 류삼백을 시켜 두경승을 유인하여 체포, 두경승은 자연도(紫燕島)에 유배했고, 두경승의 사위 장군 류삼백(柳森栢)을 반역을 한다고 의심하여 스스로 목찔러 죽게 했으며, 류삼백의 부친 류득의(柳得義)는 남쪽 변방에 류배했다. 고려사에 의하면 두경승은 섬에 있으며 근심하고 분해 피 토하고 졸했는데 혹 이르길 두경승은 금이 있어 그 종이 훔치려 몰래 독살했다 했다. 최충헌은 정적을 제거한 뒤에 명종에게 10조목의 봉사(奉事)를 올려(봉사십조), 그릇된 정치의 시정과 함께 임금의 반성을 촉구하였다. 이 봉사는 당시의 폐단을 적절히 나타낸 것으로서 그의 이런 정치적인 식견은 정중부·이의방·이의민 등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군웅을 물리치고 오랫동안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음도 이런 장점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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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8년 걸사비우 등은 이해고가 이끄는 당나라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으나 패하고 걸사비우마저 전사했다. 당시에는 걸걸중상도 이미 병으로 죽은 뒤였으므로 그의 아들인 대조영이 남은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당나라 군대가 추격해오자 대조영은 세력을 규합해 천문령에서 당나라 군대와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결국 이해고가 이끈 당나라 군대는 토벌에 실패하고 퇴각하였다. 천문령 전투에서 승리한 대조영은 걸사비우가 이끌던 무리를 흡수해 세력을 더욱 키웠다. 그리고 동모산(東牟山)에서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를 진국왕(震國王)이라고 칭했다. 또한 당나라에 맞서기 위해 돌궐(突厥)로 사신을 보내 그들과 통교하였다. 당시 대조영의 세력은 십여만 호의 인구에 수만 명의 군사를 거느릴 정도로 커졌으며, 지배하는 영역은 사방 오천 리에 이르렀다. 713년 당나라 예종(睿宗)은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봉했고, 그 뒤로 대조영은 진국(震國) 대신 발해(渤海)라는 국호를 사용했다.
  
== 최충헌의 집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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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 고왕의 생애 ==
* 최충헌은 명종의 측근을 몰아내고 좌승선(左承宣)과 어사대지사(御史臺知事)를 겸하였으며, 1197년(명종 27) 충성좌리공신(忠誠佐理功臣)에 봉해졌다. 그러나 왕이 봉사십조를 이행하지 않고 최충헌의 신변을 위협하게 되자 창락궁에 유폐시키고, 평량공(平凉公) 민(旼)을 옹립하니, 그가 신종이다. 이에 최충헌은 임금에게 말하여 다시 명종 때의 근신을 모두 내쫓아 정권은 완전히 최씨 일가에서 독차지하게 되었고, 정국공신 삼한대광대중대부 상장군주국에 책봉되었다. 최충수가 그의 딸을 태자(뒷날의 희종)의 비로 삼으려 임금에게 강요하고 태자의 본비를 내보내므로 그는 이에 반대하여, 드디어 무력 충돌에까지 이르러 최충수를 살해하였다. 이는 신종이 옹립된 다음 달의 일인데, 이로써 본래는 그의 아우 충수와 나누어 가졌던 군국(軍國)의 대권을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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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 고왕 대조영의 아버지는 걸걸중상이고, 어머니의 이름은 사서에 전하지 않는다. 대씨와 태씨 족보에 의하면 대조영의 어머니는 시씨(時氏)라고 한다.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는 대조영에 관한 많은 견해가 표명되어 왔지만, 일반적으로 구당서에 나온 고려 별종(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으로 보아 고구려 장군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왜냐면 신당서의 기록은 전반부는 발해국기, 후반부는 구당서에 의거해 서술된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그 외의 주장으로는 말갈족으로서, 고구려에 복속된 뒤, 고구려화 과정을 거친 말갈계 고구려인 또는 쑹화강(송화강) 유역에 거주하던 고구려 종족이라고 본다. 대조영이 수나라 개황 연간 돌지계가 이끌고 수나라로 귀부하여 유성에 정착하게 된 속말말갈의 후손으로 보아, 그의 출자에서 고구려를 배제하는 학설도 존재한다. 결국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연남생은 당나라에 망명했다. 당나라는 667년 연남생을 앞세워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최고 권력자였던 연남생의 합류로 고구려는 크게 무너져 당나라는 파죽지세로 평양성으로 진격했다. 결국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 1204년 신종에게 강제로 양위를 강요하여 태자(희종)에게 왕위를 양위케 하였고, 최충헌은 문하시랑동중서, 문하평장사, 상장군상주국, 병부어대판사, 태자태사 등에 책봉되었다. 희종은 그를 신하의 예로서 대하지 않고, 은문상국(恩門相國)이라 하였다. 얼마 뒤에 문하시중 진강후(晋康候)가 되었으며, 진강군(晋康郡)을 식읍으로 받았다. 1209년 학자 이규보를 발탁하여 무신정권으로 피폐해진 문화를 중흥시키려고 힘썼다. 1209년 4월 청교역(靑郊驛)의 관리들의 최씨 부자 살해 미수 사건이 생기자 영은관에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혐의자를 색출하기도 하였는데, 실질적인 무인정권의 중앙기관으로서 국정 전반을 감독케 했다. 이 도감은 뒤에 최씨 일문이 무단정치를 함에 한동안 일본의 막부와 같은 구실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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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에 관한 기록은 중국사서의 열전에 적혀 있는 몇 장이 전부이고, 대조영에 관한 기록은 한 줄에 불과하다. 그나마 적혀 있는 대조영의 출신에 관한 내용도 사서마다 달라서 혼란스럽다. 『구당서(舊唐書)』에서는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원래 고구려의 별종이다'라고 하였고, 『신당서(新唐書)』에서도 '발해는 원래 속말말갈로서 고구려에 붙은 자로 성은 대씨이다'라고 하였다. 『구당서』와 『신당서』에서는 대조영의 출신에 대하여 원래는 속말말갈이고, 고구려의 별종이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말갈적 요소와 고구려적 요소를 동시에 언급하고 있다. 반면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한국 측 사서인 『삼국사(三國史)』와 『신라고기(新羅古記)』를 인용하여 고구려의 옛 장군 조영의 성은 대씨(大氏)인데 고구려의 유민을 모아 나라를 세워 발해라고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대조영의 종족적 출신에 대해서는 정확히 언급하지 않은 채 고구려의 장군 출신이라고 하고, 발해를 세운 주체가 고구려의 유민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즉 현재 전하지는 않지만 『삼국사』와 『신라고기』는 발해에 대하여 고구려적 요소만을 서술하고 있다.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도 대조영을 고구려의 옛 장수라고만 언급하였고,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도 발해는 속말말갈인데 “고구려인 대조영(高句麗人 大祚榮)”이 발해를 세웠다고 하여 대조영을 고구려인으로 규정하고 고구려적 요소를 강조하고 있다. 말갈적 요소만을 언급한 기록도 확인되는데 최치원은 대조영이 원래 속말말갈 출신이라고 하였고, 『삼국유사』에서 중국의 『통전(通典)』을 인용한 내용에서는 “발해가 원래 속말말갈로 그 추장인 대조영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고 하여 속말말갈이라고 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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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1년 희종이 그의 권세에 눌려 항상 불안한 생활을 하자 내시 왕준명이 중심이 되어 참지정사 우승경(于承慶)·장군 왕익(王翊) 등과 함께 그를 꾀어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희종과 태자를 폐하고, 명종의 아들인 한남공 정()을 옹립하여 즉위시켰다. 1212년 그의 식읍이 진강부로 변경됨과 동시에 공신[8]에 책봉되고, 1213년 강종이 왕위에 즉위한 지 3년 만에 죽자, 태자 진()을 세우니 이가 곧 고종이다. 1217년 다시 자신을 암살하려는 흥왕사 승려들의 음모를 적발·처형하였다. 최충헌은 일생 중에 신종·희종·강종·고종의 네 임금을 자기 마음대로 행함으로써 최씨 집권의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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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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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渤海)는 한반도 북부·중국 둥베이[東北] 지방 동부·연해주에 있던 나라(698∼926년)이다. 발해는 고구려 출신 대조영(고왕 高王)이 국가를 세웠으나, 만주지방에 혼거하던 말갈족도 함께 포용하여, 일반적으로 고구려 유족이 주로 상류 지배층을 형성하였고, 말갈족이 하류층을 형성하였다. 대조영은 북서쪽의 거란이나 돌궐족의 성장으로 요서지방이 막혀 당나라의 방해를 받지 않고 발해를 안전하게 운영할 수 있었다. 당도 결국 발해의 자립을 인정하고 외교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대조영을 이어 그의 아들 대무예(大武藝)가 제2대 무왕(武王)으로 즉위하여 연호를 인안(仁安)으로 하고, 부왕이 건국한 발해를 무력을 통한 강력한 대외정책으로 국토를 넓히는 데 주력하였다. 무왕은 당시 흑룡강(黑龍江)과 송화강(松花江) 접경 지역에서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여 발해와 대립하고 있던 흑수말갈(黑水靺鞨)을 압박하였다. 또한 그 과정에서 동생 대문예(大門藝)가 말갈을 공격하라는 왕명을 어기고 당나라로 망명하자, 장문휴(張文休)로 하여금 당나라의 등주(지금의 산둥반도)를 공격하게 하여 성주를 살해하고 당나라에 위압적으로 대항하는 면모를 보였다. 이 공격에 성공함으로써 당나라로 하여금 발해를 더 이상 멸시하지 못하게 하고, 발해 북쪽의 흑수말갈과 유대관계도 약화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 최충헌에 대한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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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 제3대 문왕(文王)은 즉위 후 연호를 대흥(大興)이라 하고, 부왕이 군사력을 이용한 대외적 팽창에 주력한 데 비하여 주로 내치와 외교에 주력하였다. 우선 문왕은 좁은 지역인 동모산(東牟山)에서 벗어나 약간 남쪽에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를 건설하고 도읍을 옮겼다. 농경지가 넓어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위치였다. 그리고 또 다시 얼마 후 북쪽에 위치한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천도하였다(742~755년 사이). 이곳은 발해 북쪽에 세력을 펴고 있던 흑수말갈의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한 적극적인 전략에 기인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즉, 발해의 국세는 말갈 세력을 충분히 압도할 수 있는 수준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또 다시 두만강 하류 지역에 위치한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로 옮겼다(785~794년 사이). 이곳은 동해로 쉽게 이동할 있는 지리적 이점이 있다. 발해는 일본과의 외교관계와 교역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는 물론 관무역의 경제적 발전을 꾀하였다. 발해는 당과도 사신을 수시 파견하여 친당외교를 폈고, 공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신라와는 경계하는 입장으로 활발한 교류를 하지 않았다. 그뒤 여러 왕들이 단명하다가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大野勃)의 4세손인 대인수(大仁秀)가 제10대 선왕(宣王)으로 15년간 재위하였는데, 이 시기는 영토를 넓히고 내치를 충실히 한 발해 중흥기라 할 수 있다. 우선 영토를 크게 넓혀 흑룡강 하류 지역까지 개척하고 흑수말갈을 압박하여 말갈과 당나라의 교류가 중단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문왕 때의 3경 외에 2경을 더 개척하여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와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를 둠으로써 전국이 5경 15부 62주의 행정구역을 갖추었다. 그리하여 과거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고 오히려 북쪽 연해주 지역으로 더 진출한 형세를 갖게 되었다. 발해는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호칭할 정도의 국세를 가지게 되었다.
* 최충헌이 이의민과 그 여당(與黨)을 제거하여 집권할 있었던 것은 명종 대의 정치적 불안과 지방 사회의 계속된 저항에 따른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었다. 최충헌은 사회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하여 '봉사십조'를 제시하였다. 안으로는 명종 대의 잦은 정변에 따른 무신 세력들의 이합집산을 불식시켜 정권을 안정시키고, 밖으로는 지방 사회의 동요를 무마하려는 목적에서였다. 그러나 최충헌 정권 역시 이전 시기 무신 정권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그 자체가 새로운 수탈자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 경주를 중심으로 한 저항은 왕조 자체를 부정한 '신라부흥운동(新羅復興運動)'이라는 점에서 집권 무신 세력과 일반 지배층에게는 큰 충격이었고 최충헌의 정권 유지에도 중요한 걸림돌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경주 지역에 대한 강경 진압 이후 이전의 무신 정권보다 더욱 강력한 지배 구조를 구축하였다. 그 결과 지방 사회의 저항은 희종 대 이후 점차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최충헌 정권은 정권 유지를 확고하게 하려고 지배 기구를 재편하였는데, 그 일환이 교정도감 · 서방(書房) · 정방(政房) · 도방 · 가병(家兵) 등과 같은 사적 지배 기구의 확대였다. 이러한 기구들은 국가 권력의 유지보다는 최충헌 정권 자신의 영달이 우선적인 목적이었다. 최충헌은 기존의 관료 체제를 무력화시켜 1인 독재의 틀을 구축함에 따라 많은 인적 · 물적 토대가 필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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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 고왕에 대한 상훈과 추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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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9년 발해 고왕이 죽자, 그의 아들 대무예(大武藝, 무왕)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고왕이 어느 민족 출신인지에 대해서는 『구당서』와 『신당서』의 기록이 서로 달라 견해가 분분했으나, 『구당서』에는 걸사비우를 말갈인으로 기록한 데 반해 대조영은 말갈인이라는 기록이 없다. 또한 『오대회요』나 『신당서』에서는 고려 별종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말갈과는 구분되며 고구려와 일정 부분 연관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미 발굴된 발해의 무덤들이 고구려식 천정 양식 및 장법을 채택하고 있다는 것이나, 걸걸중상이 영주를 벗어나 처음 정착한 곳이 고구려의 고지라는 것에서 이들이 말갈계 고구려인일지라도 고구려 귀속의식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당 역시 대조영의 아들인 대무예를 계루군왕(桂婁郡王)으로 봉한 사실에서 당시에는 이들을 고구려계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 동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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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
 
== 참고자료 ==
* 〈[https://ko.wikipedia.org/wiki/%EC%B5%9C%EC%B6%A9%ED%97%8C 최충헌]〉,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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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C%99%95 고왕]〉, 《위키백과》
* 〈[https://namu.wiki/w/%EC%B5%9C%EC%B6%A9%ED%97%8C  최충헌]〉,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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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namu.wiki/w/%EA%B3%A0%EC%99%95 고왕]〉, 《나무위키》
* 〈[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97390 최충헌(崔忠獻,1149~1219)]〉,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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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06065  고왕(高王)]〉, 《두산백과》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7707 최충헌(崔忠獻)]〉,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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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841 고왕 (高王)]〉,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달뫼, 〈[https://blog.naver.com/oneplusone21/223590836010 9월 21일 / 최충헌, 명종 폐위 신종 옹립]〉, 《네이버블로그》, 2024-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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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지현 기자, 〈[http://www.dailydgnews.com/news/article.html?no=180523 경산시, 대조영 후손 집성촌 발해마을에서 전통문화 계승]〉, 《데일리대구경북뉴스》, 2024-03-21
* 분양 도깨비, 〈[https://blog.naver.com/danikim/223343870696  무신정권 최충헌 업적]〉, 《네이버블로그》, 2024-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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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진규 기자, 〈[https://www.nkeconomy.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34  북한 "대조영이 고구려 계승해 발해 건국했다"]〉, 《NK경제》, 2023-05-11
* 최은주 기자, 〈[https://www.gukj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914244#rs  '역사저널 그날' 무신 정권 ② 최충헌, 권력의 기술]〉, 《역사저널》, 2024-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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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희 기자, 〈[https://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161127 대씨·태씨중앙종친회 발해고왕 대조영 표준영정 제작]〉, 《천지일보》, 2012-12-03
 +
* 박미현 기자, 〈[https://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588713  발해 건국 대조영 어떤 모습일까]〉, 《강원도민일보》, 2012-09-26
  
 
== 같이 보기 ==
 
== 같이 보기 ==
* [[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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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
* [[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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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라]]
* [[명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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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
* [[고종]]
+
* [[백제]]
* [[강종]]
+
* [[성왕]]
* [[고려]]
+
* [[강왕]]
* [[충렬왕]]
+
* [[대건황]]
* [[병부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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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 [[무신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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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걸중상]]
* [[정순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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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조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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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문령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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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8일 (화) 09:58 기준 최신판

발해 고왕(대조영)

발해 고왕(高王)은 발해의 시조(재위 698~719)로 본명은 대조영이다.

개요[편집]

  • 발해 고왕은 698년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규합하여 동모산을 도읍으로 한 진국(震國)을 세웠으며, 713년 국호를 발해로 바꾸었다. 본명은 대조영(大祚榮)이며, 고구려의 유민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나라의 고구려 유민 분산정책에 따라 가족과 함께 요하(遼河) 서쪽의 영주(營州)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696년 이진충(李盡忠) 등이 이끈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영주 지역에 억류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동쪽으로 탈출하여 자립을 꾀하였다.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가 거란족의 반란을 평정한 뒤 군대를 파견하여 그의 집단을 추격하도록 하였으나 장령자(長嶺子) 부근의 천문령(天文嶺)에서 대조영에게 대패하였다. 이후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규합하는데 더욱 힘써 국가건설의 기반을 굳히고, 계속 동부로 이동하였다. 698년 지금의 지린성(吉林省) 옌볜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 둔화시(敦化市) 지역인 동모산(東牟山)에 도읍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어 국호를 진(震 또는 振)이라 하였다. 발해의 건국 지역은 계루부(桂婁部)의 옛 땅이었으며, 대조영의 큰아들 대무예(大武藝, 훗날의 무왕)도 계루군왕으로 불렀다. 한편, 당나라는 유화정책을 펼쳐 705년 중종(中宗)이 진에 사신을 보내왔고, 고왕도 둘째 아들 대문예(大門藝)를 당나라에 보냄으로써 우의를 표하였다. 713년 당나라 현종(玄宗)은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左驍衛大將軍渤海郡王忽汗州都督)의 별직을 주고 우의를 나타냈다. 그해에 국호를 진국에서 발해로 바꾸었고, 양국은 건국 초기의 갈등을 극복하고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1]
  • 발해 고왕은 발해를 건국한 초대 왕이다. 고왕에 관해 중국 측 기록인 《구당서》에서는 대조영(大祚榮)을 고구려의 별종 출신으로 서술했고, 반면 《신당서》에서는 본래 고구려에 부속되었던 속말말갈(粟末靺鞨) 출신이라고 서술되어 있다. 당나라의 영주(營州)에 그 고구려 유민과 함께 이주되어 살았으며, 걸걸중상, 걸사비우 등을 따라 고구려 유민 및 말갈족을 이끌었다. 696년 이진충(李盡忠), 손만영(孫萬榮)이 이끄는 거란족의 반란을 틈타 걸걸중상, 걸사비우 등과 동쪽으로 이동, 무주(武周)는 사신을 보내 회유했으나 거절했다. 무주에 항복한 거란족 출신 장군 이해고(李楷固)의 습격을 받고 대패했으나 동쪽으로 이동했다. 698년 천문령 전투에서 무주 군대를 격파하고 동모산에 성을 쌓고 진(震)을 건국, 연호를 천통(天統)으로 했다. 705년에 당나라와 화친하였고, 713년 당나라 예종으로부터 좌효위원외대장군 발해군왕(左驍衛員外大將軍 渤海君王) 홀한주도독부도독(忽汗州都督府都督)으로 책봉되고 형식적인 조공관계를 유지했다. 한국 측 기록인 《삼국유사》에 인용된 《신라고기》와 《제왕운기》에서는 대조영을 고구려 구장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신라고기에서 고구려 구장 조영은 성이 대씨라고 기록되어 있다.[2]
  • 발해 고왕은 발해를 건국한 발해 왕조의 창업군주이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나라에서 고구려의 유민들을 국외로 강제 이주시켰으나, 영주(營州) 지역에는 여전히 적지 않은 수의 고구려 유민들이 있었다. 당나라의 가혹한 통치로 거란인들이 봉기하여 영주 일대를 점거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때 대조영은 말갈 추장 걸사비우와 함께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향했다. 대조영은 걸사비우가 전사한 후 말갈과 고구려의 무리들을 규합하여 계속 동쪽으로 진군해 천문령 전투에서 이해고가 이끄는 무주군을 무너뜨렸으며, 다시 동쪽으로 향해 지금의 길림성(吉林省) 돈화현(敦化縣)에 위치한 동모산(東牟山)을 기반으로 나라를 세웠다. 중국의 기록 외에는 신라의 최치원이 당나라에 보내는 국서 등에 대조영이 언급되는데, 이에 따르면 대조영이 처음 나라를 세우고 신라에 사신을 보내 이를 알렸는데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했을 당시 신라는 효소왕의 재위기였다. 신라에서는 대조영에게 5품 관등 대아찬을 주었다. 대아찬은 신라 골품제에서 진골만 받을 수 있는 관등인데 신라가 외부인에게 진골 대우를 한 것이 기록상 남아있는 건 금관가야 왕족 구형왕, 고구려 왕족 안승 둘뿐이었다. 이걸 준 건 발해가 신라보다 아래라는 정치적 제스처긴 하지만, 어쨌든 신라 측에서 신생국가 발해와 대조영을 새로운 한 나라의 군주로 인정한 것이다.[3]
  • 발해 고왕은 발해의 제1대(재위: 698년~719년) 왕이다. 본명은 대조영(大祚榮)이다. 고구려 유민으로서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의 영주(營州) 지방에 그 일족과 함께 옮겨 와 거주하였다. 『구당서(舊唐書)』에 의하면 696년이진충(李盡忠) · 손만영(孫萬榮) 등이 이끄는 거란족의 반란으로 영주 지방이 혼란에 빠지자, 대조영은 말갈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그 지역에 억류되어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각각 이끌고 당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동으로 이동하였다. 이에 당나라는 대조영에게 진국공(震國公)을, 걸사비우에게는 허국공(許國公)을 봉하고 회유해 당나라의 세력 아래 다시 복속시키고자 했으나 그들은 거부하였다. 당나라는 거란군을 격파한 뒤, 성력연간(聖曆年間, 698∼699)에 추격군을 파견하였다. 당나라에 항복한 거란족 출신의 장군 이해고(李楷固)가 이끄는 당나라 군사가 공격해 오자, 걸사비우의 말갈족 집단이 먼저 교전했으나 대패하였다. 그러자 대조영은 휘하의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당나라 군사의 예봉을 피해 동으로 달아나면서, 한편으로 흩어진 걸사비우 예하의 말갈족 등을 규합하였다. 당나라 군사가 계속 추격해 오자, 대조영은 지금의 혼하(渾河)와 휘발하(輝發河)의 분수령인 장령자(長嶺子) 부근에 있는 천문령(天門嶺)에서 그들을 맞아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그 뒤 계속 동부 만주 쪽으로 이동해 지금의 길림성(吉林省) 돈화현(敦化縣)인 동모산(東牟山)에 성을 쌓고 도읍을 정하였다. 698년에 국호를 진(震),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였다. 건국 후 곧이어 당나라와 대결하고 있던 몽고고원의 돌궐(突厥)과 국교를 맺고 신라와도 통교했으며, 당나라와는 중종 때 정식으로 통교하였다. 당나라는 713년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했는데, 그때부터 발해라는 국호가 사용되었다.[4]

천문령전투[편집]

  • 천문령전투(天門嶺 戰鬪)는 698년 대조영이 이끈 고구려 유민들이 천문령에서 당나라 군대와 싸운 전투이다. 698년 대조영(大祚榮, 고왕)이 이끈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인(靺鞨人) 집단이 거란(契丹) 출신의 장수 이해고(李楷固)가 이끈 당나라 군대와 천문령(天門嶺)에서 싸운 전투이다. 대조영의 세력이 승리하면서 발해(渤海)가 건국되는 계기가 되었다.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 《오대회요(五代會要)》, 《신오대사(新五代史)》 등에 관련된 기록들이 전해진다. 고구려 출신인 걸걸중상(乞乞仲象)과 대조영은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 요서(遼西) 지방의 영주(營州)로 끌려가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696년 거란의 부족장인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영주도독(營州都督) 조문홰(趙文翽)를 죽이고 당나라에 반란을 일으키자, 걸걸중상과 대조영은 백산말갈(白山靺鞨)의 수장인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요하(遼河)를 건너 동쪽으로 탈출했다. 그리고 백두산의 동북 지역을 차지하고, 지금의 무단 강[牡丹江]인 오루하(奧婁河)에 의지해 성벽을 쌓고 방어를 튼튼히 하였다. 이들의 세력이 커지자 당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는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으로,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으로 봉했다. 하지만 이들이 복속을 거부하자 측천무후는 거란족 출신의 옥검위대장군(玉鈐衛大將軍) 이해고(李楷固)와 중랑장(中郎將) 색구(索仇)가 이끄는 토벌군을 보냈다.
  • 698년 걸사비우 등은 이해고가 이끄는 당나라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으나 패하고 걸사비우마저 전사했다. 당시에는 걸걸중상도 이미 병으로 죽은 뒤였으므로 그의 아들인 대조영이 남은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당나라 군대가 추격해오자 대조영은 세력을 규합해 천문령에서 당나라 군대와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결국 이해고가 이끈 당나라 군대는 토벌에 실패하고 퇴각하였다. 천문령 전투에서 승리한 대조영은 걸사비우가 이끌던 무리를 흡수해 세력을 더욱 키웠다. 그리고 동모산(東牟山)에서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를 진국왕(震國王)이라고 칭했다. 또한 당나라에 맞서기 위해 돌궐(突厥)로 사신을 보내 그들과 통교하였다. 당시 대조영의 세력은 십여만 호의 인구에 수만 명의 군사를 거느릴 정도로 커졌으며, 지배하는 영역은 사방 오천 리에 이르렀다. 713년 당나라 예종(睿宗)은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봉했고, 그 뒤로 대조영은 진국(震國) 대신 발해(渤海)라는 국호를 사용했다.

발해 고왕의 생애[편집]

  • 발해 고왕 대조영의 아버지는 걸걸중상이고, 어머니의 이름은 사서에 전하지 않는다. 대씨와 태씨 족보에 의하면 대조영의 어머니는 시씨(時氏)라고 한다.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는 대조영에 관한 많은 견해가 표명되어 왔지만, 일반적으로 구당서에 나온 고려 별종(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으로 보아 고구려 장군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왜냐면 신당서의 기록은 전반부는 발해국기, 후반부는 구당서에 의거해 서술된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그 외의 주장으로는 말갈족으로서, 고구려에 복속된 뒤, 고구려화 과정을 거친 말갈계 고구려인 또는 쑹화강(송화강) 유역에 거주하던 고구려 종족이라고 본다. 대조영이 수나라 개황 연간 돌지계가 이끌고 수나라로 귀부하여 유성에 정착하게 된 속말말갈의 후손으로 보아, 그의 출자에서 고구려를 배제하는 학설도 존재한다. 결국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연남생은 당나라에 망명했다. 당나라는 667년 연남생을 앞세워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최고 권력자였던 연남생의 합류로 고구려는 크게 무너져 당나라는 파죽지세로 평양성으로 진격했다. 결국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 발해에 관한 기록은 중국사서의 열전에 적혀 있는 몇 장이 전부이고, 대조영에 관한 기록은 한 줄에 불과하다. 그나마 적혀 있는 대조영의 출신에 관한 내용도 사서마다 달라서 혼란스럽다. 『구당서(舊唐書)』에서는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원래 고구려의 별종이다'라고 하였고, 『신당서(新唐書)』에서도 '발해는 원래 속말말갈로서 고구려에 붙은 자로 성은 대씨이다'라고 하였다. 『구당서』와 『신당서』에서는 대조영의 출신에 대하여 원래는 속말말갈이고, 고구려의 별종이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말갈적 요소와 고구려적 요소를 동시에 언급하고 있다. 반면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한국 측 사서인 『삼국사(三國史)』와 『신라고기(新羅古記)』를 인용하여 고구려의 옛 장군 조영의 성은 대씨(大氏)인데 고구려의 유민을 모아 나라를 세워 발해라고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대조영의 종족적 출신에 대해서는 정확히 언급하지 않은 채 고구려의 장군 출신이라고 하고, 발해를 세운 주체가 고구려의 유민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즉 현재 전하지는 않지만 『삼국사』와 『신라고기』는 발해에 대하여 고구려적 요소만을 서술하고 있다.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도 대조영을 고구려의 옛 장수라고만 언급하였고,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도 발해는 속말말갈인데 “고구려인 대조영(高句麗人 大祚榮)”이 발해를 세웠다고 하여 대조영을 고구려인으로 규정하고 고구려적 요소를 강조하고 있다. 말갈적 요소만을 언급한 기록도 확인되는데 최치원은 대조영이 원래 속말말갈 출신이라고 하였고, 『삼국유사』에서 중국의 『통전(通典)』을 인용한 내용에서는 “발해가 원래 속말말갈로 그 추장인 대조영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고 하여 속말말갈이라고 칭하고 있다.

발해[편집]

  • 발해(渤海)는 한반도 북부·중국 둥베이[東北] 지방 동부·연해주에 있던 나라(698∼926년)이다. 발해는 고구려 출신 대조영(고왕 高王)이 국가를 세웠으나, 만주지방에 혼거하던 말갈족도 함께 포용하여, 일반적으로 고구려 유족이 주로 상류 지배층을 형성하였고, 말갈족이 하류층을 형성하였다. 대조영은 북서쪽의 거란이나 돌궐족의 성장으로 요서지방이 막혀 당나라의 방해를 받지 않고 발해를 안전하게 운영할 수 있었다. 당도 결국 발해의 자립을 인정하고 외교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대조영을 이어 그의 아들 대무예(大武藝)가 제2대 무왕(武王)으로 즉위하여 연호를 인안(仁安)으로 하고, 부왕이 건국한 발해를 무력을 통한 강력한 대외정책으로 국토를 넓히는 데 주력하였다. 무왕은 당시 흑룡강(黑龍江)과 송화강(松花江) 접경 지역에서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여 발해와 대립하고 있던 흑수말갈(黑水靺鞨)을 압박하였다. 또한 그 과정에서 동생 대문예(大門藝)가 말갈을 공격하라는 왕명을 어기고 당나라로 망명하자, 장문휴(張文休)로 하여금 당나라의 등주(지금의 산둥반도)를 공격하게 하여 성주를 살해하고 당나라에 위압적으로 대항하는 면모를 보였다. 이 공격에 성공함으로써 당나라로 하여금 발해를 더 이상 멸시하지 못하게 하고, 발해 북쪽의 흑수말갈과 유대관계도 약화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 발해 제3대 문왕(文王)은 즉위 후 연호를 대흥(大興)이라 하고, 부왕이 군사력을 이용한 대외적 팽창에 주력한 데 비하여 주로 내치와 외교에 주력하였다. 우선 문왕은 좁은 지역인 동모산(東牟山)에서 벗어나 약간 남쪽에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를 건설하고 도읍을 옮겼다. 농경지가 넓어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위치였다. 그리고 또 다시 얼마 후 북쪽에 위치한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천도하였다(742~755년 사이). 이곳은 발해 북쪽에 세력을 펴고 있던 흑수말갈의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한 적극적인 전략에 기인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즉, 발해의 국세는 말갈 세력을 충분히 압도할 수 있는 수준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또 다시 두만강 하류 지역에 위치한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로 옮겼다(785~794년 사이). 이곳은 동해로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이 있다. 발해는 일본과의 외교관계와 교역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는 물론 관무역의 경제적 발전을 꾀하였다. 발해는 당과도 사신을 수시 파견하여 친당외교를 폈고, 공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신라와는 경계하는 입장으로 활발한 교류를 하지 않았다. 그뒤 여러 왕들이 단명하다가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大野勃)의 4세손인 대인수(大仁秀)가 제10대 선왕(宣王)으로 15년간 재위하였는데, 이 시기는 영토를 넓히고 내치를 충실히 한 발해 중흥기라 할 수 있다. 우선 영토를 크게 넓혀 흑룡강 하류 지역까지 개척하고 흑수말갈을 압박하여 말갈과 당나라의 교류가 중단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문왕 때의 3경 외에 2경을 더 개척하여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와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를 둠으로써 전국이 5경 15부 62주의 행정구역을 갖추었다. 그리하여 과거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고 오히려 북쪽 연해주 지역으로 더 진출한 형세를 갖게 되었다. 발해는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호칭할 정도의 국세를 가지게 되었다.

발해 고왕에 대한 상훈과 추모[편집]

  • 719년 발해 고왕이 죽자, 그의 아들 대무예(大武藝, 무왕)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고왕이 어느 민족 출신인지에 대해서는 『구당서』와 『신당서』의 기록이 서로 달라 견해가 분분했으나, 『구당서』에는 걸사비우를 말갈인으로 기록한 데 반해 대조영은 말갈인이라는 기록이 없다. 또한 『오대회요』나 『신당서』에서는 고려 별종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말갈과는 구분되며 고구려와 일정 부분 연관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미 발굴된 발해의 무덤들이 고구려식 천정 양식 및 장법을 채택하고 있다는 것이나, 걸걸중상이 영주를 벗어나 처음 정착한 곳이 고구려의 고지라는 것에서 이들이 말갈계 고구려인일지라도 고구려 귀속의식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당 역시 대조영의 아들인 대무예를 계루군왕(桂婁郡王)으로 봉한 사실에서 당시에는 이들을 고구려계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고왕(高王)〉, 《두산백과》
  2. 고왕〉, 《위키백과》
  3. 고왕〉, 《나무위키》
  4. 고왕 (高王)〉,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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