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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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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는 중남미 속의 유럽(유럽 문화 중심)이라 불린다. 주로 유럽문화를 계승했으나, 원주민과 아프리카계의 음악, 문학, 생활양식도 섞여 있다.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의 영향이 독특하게 결합된 문화적 용광로, 흔히 다문화·다민족 국가로 정의한다. 이민국이라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는 아르헨티나는 문화적 다양성을 보호하고 보존하기 위해 매년 10월 12일을 다문화의 날로 정해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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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오페라 하우스 중의 하나인 떼아뜨로 꼴론(Teatro Colon)을 비롯, 오페라, 발레, 연극, 영화, 클래식 음악, 미술 전시 등 200여 개가 넘는 중남미 최대의 문화 공연 시설을 가지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민속춤은 '까르나발리또(carnavalito)' '삼바(zamba)' '가또(gato)' 등이 있는데 특히 '탱고(tango)'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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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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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의 본격적인 문학은 독립 후의 혼란기에 낭만주의가 대두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탄압 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묘사한 소설 <아말리아>로 유명한 호세 마르몰(1817-1871), 문화사의 고전 <파쿤도, 문명이냐 야만이냐>의 저자인 도밍고 파스티노 사르미엔토(1811-1888)도 있으나, 이 시기의 문학을 대표하는 것은 누가 무어라 해도 가우초(gaucho)의 시(詩)로 초원에 사는 소치기(飼牛)의 생활을 낭만적으로 노래한 것이다. 에스타니슬라오 캄포(1834-1880)는 소박한 소치기의 상징<파우스토>를, 호세 에르난데스(1834-1886)는 국민적 서사시 <마르틴 피에로>를 남겼다. 현대시는 근대파의 레오폴도 루고네스(1874-1938)에서 비롯되는데 보다 대담한 전위시, 특히 초현실주의로 이행되어갔다. 산문으로는 가우초에 대한 향수(鄕愁)를 선명한 이미지로 묘사한 소설 <돈 세군도 솜브라>의 저자 리카르도 구이랄데스(1886-1927), 자연주의적 소설로 이름이 난 마누엘갈베스(1882-1962), 현대 세계에 있어서 인간의 고립을 테마로 하는 에세이스트 에두아르도 마예아(1903-1982), 환상적 단편소설의 명수(名手)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 1976년 발표한 <거미여인의 키스>가 대표작인 마누엘 푸익(1932-1990), 역사소설 <돈 마리오의 영광>의 작자 엔리케 라레타(1875-1961) 등이 대표적 작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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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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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리오넬 메시.jpg|썸네일|300픽셀|리오넬 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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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는 세계적인 [[축구]] 강국이다. 아르헨티나는 FIFA 월드컵이 처음 생길때부터 이미 세계적인 축구강국이였으며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은 첫 FIFA 월드컵인 1930년 월드컵에서는 이미 당대 최강인 우루과이에 이어 준우승을 차지할 정도의 강호였다. 하지만 극심한 선수유출 속에서 193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계속적인 쇠락의 길을 걸어왔으나 FIFA에서 두 개 이상의 국가대표팀에서 뛸 수 없도록 규정을 변경한 이후가 되어서야 1978년 FIFA 월드컵에서 제 기량을 다 발휘할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로부터 선수를 빼돌려서 자국 팀으로 주로 사용한 나라로는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이 있다. 특히 이탈리아는 아르헨티나로부터 루이스 몬티, 엔리케 과이타, 라이문도 오르시 등의 스타플레이어급 선수들을 뭉텅이로 빼가서 1934년 FIFA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바가 있다. 그래서 아르헨티나는 '''1978년, 1986년, 2022년 월드컵에서 우승'''하였고, 1978년엔 자국에서 월드컵을 개최하기도 했다. 아르헨티나는 FIFA 월드컵 결승전에 6번 진출해 3번 우승했는데 FIFA 월드컵에서 3번 이상 우승한 팀으로는 브라질(7전 5승 2패), 독일(8전 4승 4패), 이탈리아(6전 4승 2패), 아르헨티나(6전 3승 3패) 등 4개국밖에 없다. 하계올림픽에서 역시 발군의 성적을 보여줬는데 특히 2004년 하계 올림픽과 2008년 하계 올림픽에 연속으로 우승한 점은 주목할 만 하다. 거기에 그냥 잘하는 수준이 아니라 축구 선수의 인적자원 수준이 세계최고이며 [[디에고 마라도나]], [[리오넬 메시]] 등 인류 역사상 더 이상 찾기 힘들 불세출의 축구영웅들을 많이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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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정부는 FIFA월드컵 개최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2030년 FIFA 월드컵을 초대 월드컵 개최국인 우루과이와 같이 공동개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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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탱고와 음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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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는 탱고의 발상지로, 탱고는 19세기 말에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의 변두리 동네인 보카(Boca) 지역에서 힘든 삶을 살았던 유럽과 농촌 이주민들의 정체성과 꿈과 자유에 대한 갈망이 담긴 문화이다. 탱고는 쿠바에서 건너온 아바네라와 칸돔베의 흑인 리듬과 음악 및 아프리카 춤인 탕가노(Tangano), 유럽의 왈츠, 그리고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빈민가에서 유행했던 2박자의 춤과 음악인 밀롱가가 결합된 문화이다. 초기에는 빈층민의 저속하고 상스러운 문화로 멸시 받았으나, 상류층에게 전달되고 유럽 사교계에서 소비되면서 다시 아르헨티나로 들어오며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대중문화의 상징이 됐으며 또 다시 미국과 유럽으로 재진출하는 과정에서 에로틱한 요소들이 완화되고 고상하고 고급스럽게 발전했다. 한때 하층민의 문화로 천대받고 금기시 됐던 탱고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는 척도가 되었다. 점차 고급 살롱과 무도회장에서 추는 살롱탱고(Tango Salon)가 발전하였고, 현대적인 아르헨티나 탱고의 바탕이 되었다. 1910년대 이전까지 정열적인 춤과 연주곡이 전부였던 탱고에 가사를 붙여 노래로 만들었던 카를로스 가르텔(Varlos Gartel)과 기존의 탱고에 클래식과 재즈를 결합하여 '누에보 탱고'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아스트로 피아졸라(Astro Piazzolla)로 인해 탱고의 대중화와 세계화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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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탱고는 춤과 노래로서의 문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탱고는 여성의 인권 신장을 반영하기도 하고, 단순히 성적인 의미가 아니라 문화와 노동의 발생근원으로서의 에로티즘을 드러내기도 한다. 또한 탱고는 중장년층에게 훌륭한 여가생활이라 는 의미를 가진다. 현재 탱고는 유네스코에 의해 인류무형문화유산(PCI)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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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으로는 탱고 외에도 삼바·차카레라 등 인디오의 전승과 에스파냐풍의 혼합인 아르헨티나 특유의 아름다운 리듬이 있다. 또한 세계 3대 오페라 하우스 중의 하나인 떼아뜨로 꼴론(Teatro Colon)을 비롯하여, 오페라, 발레, 연극, 영화, 클래식 음악, 미술 전시 등 200여 개가 넘는 중남미 최대의 문화 공연 시설을 갖추고 있다. 페스티벌 시즌에는 유럽 일류 예술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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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우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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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초는 지리적으로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브라질의 히우그란지두술주, 볼리비아의 남동부, 칠레의 로스라고스 지역을 포함하는 남미 지역의 목동 또는 소작농을 가리킨다. 가우초는 농촌의 목축업이 발달하기 시작한 17세기에 등장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가우초 문학이 인기를 얻었는데, 호세 에르난데스의 《엘 가우초 마르틴 피에로(El Gaucho Martin Fierro)》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가우초 문화는 문학뿐 아니라 음악, 춤, 예술, 연극 등에서 매우 독특한 표현 양식을 낳았다. 평원, 말, 기타, 마테, 쇠고기뿐 아니라 농촌생활과 관련이 있는 연대, 충성, 환대 및 용기의 가치가 중요한 소재가 됐다. 한편, 가우초의 요리법인 숯불에 구운 소갈비 요리인 '아사도(Asado)'는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요리로, 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다. 가우초는 팜파스 지역에서 더 큰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
  
 
== 동영상 ==
 
== 동영상 ==

2023년 3월 9일 (목) 14:57 판

아르헨티나 영토는 짙은 녹색으로 표시되며, 영유권은 주장되지만 통제되지 않는 영토는 연한 녹색으로 표시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코르도바
로사리오
멘도사

아르헨티나(Argentina)는 남아메리카 대륙의 남쪽 끝에 있는 국가이다. 정식 명칭은 아르헨티나 공화국(스페인어: República Argentina 레푸블리카 아르헨티나, 과라니어: Tetã Argentina)이다. 수도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이다. 주요 도시로는 코르도바, 바이아블랑카, 마르델플라타, 라플라타 등이 있다.

16세기 중엽부터 스페인의 식민이 시작되었으며, 1810년 5월 독립을 선언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이후 내란을 거쳐 1816년 7월 9일 투쿠만 회의에서 중앙집권적 공화국(라플라타 합주국)의 성립을 선언했다.

개요

아르헨티나는 남아메리카에 위치한 연방 공화국이다. 서쪽에는 안데스 산맥을 경계로 칠레와 붙어있고 북쪽에는 볼리비아파라과이, 동쪽에는 브라질우루과이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특히 북쪽으로 볼리비아와 접하는 안데스 산맥 일대는 과거에는 잉카 제국의 영향에 속해 있었다. '아르헨티나'는 라틴어로 '은(銀)'이란 뜻이며, 탱고목축으로 유명하다.

인구 밀도가 15.6명/㎢ 으로 호주, 캐나다, 몽골, 칠레, 나미비아 등과 유사하게 매우 낮다. 땅은 넓은데 인구가 상대적으로 매우 적어서 대부분의 땅이 나대지이며 고층빌딩은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나 볼 수 있다.

인구의 대부분이 백인계로 구성되어 남미의 백인 국가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아르헨티나인의 97% 이상이 스스로 백인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유전자 분석을 보면 아르헨티나인 유전자의 60~80%은 유럽중동의 백인으로부터 오긴 했지만 나머지 20~40% 정도는 토착 원주민과 흑인의 유전자로부터 왔다. 도시 지역에는 특히 유럽 이주민 후손 비율이 높고 이들이 완전히 혼혈되면서 겉으로 보기에는 대부분이 백인이나 백인 비슷하게 보이게 된 것. 백인 이외에는 지방을 중심으로 남미 원주민이 소수 존재하지만 과거 아르헨티나 정부에 의해 학살되었고, 또한 백인과의 통혼으로 혼혈, 동화되었다. 흑인들은 아프리카로부터 건너와 도시 지역에 거주했으나 백인과 혼혈되면서 현재 아르헨티나에 흑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아르헨티나 이민자 출신 국가를 보면 이탈리아, 스페인이 70% 이상을 차지하며 특히 이탈리아가 절반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으로 많다. 그밖에 프랑스계, 독일계, 러시아계, 영국계 순인데 이탈리아계와 스페인계에 비하면 매우 소수이다. 영국과 전쟁을 해서 영국인이 많이 없을것 이란 추측들을 하지만 사회 각계각층에 영국인, 영연방국의 후예들이 분포한다. 국가(아르헨티나)의 운명이 위태로울때 아르헨티나의 편이 되어 싸우기도 했다. 퍼거슨 왕세자비의 어머니도 아르헨티나에서 농장을 운영하였고 영국과 전쟁전에는 영국왕실의 왕족,귀족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수도 외곽 '올리보스'나 '산이시드로' 지역엔 영국인이 사는 부촌이 형성되어 있고 카페나 인적이 있는 길거리에서 간간히 영어로 대화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아르헨티나는 또한 영국의 해외 영토로 인정되고 있는 포클랜드 제도사우스조지아 사우스샌드위치 제도, 남극의 일부인 아르헨티나령 남극에 대한 영유권도 주장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구매력 대비 1인당 GDP 3위, 인간개발지수 2위의 국가로 조사되었고, 명목 GDP는 세계 30위, 구매력을 고려한 GDP는 세계에서 23위이다. 세계은행에서는 이 나라를 국민총소득 중상 수준의 국가 혹은 신흥 시장으로 분류했다. 아르헨티나는 메르코수르, 남미 국가 연합, 세계은행 그룹, G-15, G-20에 속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2022년 1월부터 아르헨티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다.

국가 상징

국호

아르헨티나(Argentina)라는 나라 이름은 라틴어로 '은(銀)'을 의미하는 '아르겐툼(Argentum)'에서 유래한 것이다.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는 스페인어로 '은'을 뜻하는 '라 플라타(La Plata) 식민지'로 불렸는데 이는 스페인 사람들이 이 땅에 처음 이르렀을 때 라 플라타 강 상류에 은으로 된 산맥이 있다고 믿었던 것에서 유래하여 강의 이름을 붙이고 이를 지역명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독립 이후 스페인어 지명 대신 이를 라틴어로 의역한 아르헨티나를 국명으로 채택해 지금에 이른다.

크라잉 넛의 룩셈부르크에서는 애석하게도 '아리헨티나'로 나온다.

한자문화권에서 음차표기로는 '아연정'(亞然丁)', '아이연정(亞爾然丁)', '아근정(亞根廷)' 등으로 표기하였다. 다만 이 표기를 두문자로 줄일 경우 亞로 줄여야 하는데, 이렇게 쓰면 아시아의 두문자와 겹치기 때문에 현대에는 쓰이지 않고 사장되었다. 현재 중국에서는 '아근정(阿根廷)'이라고 표기한다.

국기

아르헨티나 국기
아르헨티나 국장

아르헨티나의 국기는 1812년 2월 27일에 제정되었다. 하늘색, 하얀색, 하늘색으로 구성된 가로 줄무늬 바탕 가운데에 32줄기의 햇살을 가진 5월의 태양이 그려져 있다. 5월의 태양 디자인은 1818년에 국기에 추가되었다. 민간기와 상선기는 5월의 태양 디자인이 생략된 형태의 기를 사용한다.

하늘색과 하얀색은 아르헨티나 독립 전쟁이 일어나던 1810년 마누엘 벨그라노 장군이 이끌던 아르헨티나 민병대들이 로사리오 근처에서 스페인 식민지군을 무찌르고 승리한 것을 기념해 국기의 색으로 사용한 색으로 당시 병사들의 군복 색상이었던 하늘색과 하얀색에서 유래되었다. 5월의 태양은 아르헨티나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는 계기가 된 1810년에 일어난 5월 혁명을 의미한다.

국장

아르헨티나의 국장은 1813년에 공식 제정되었으며 현재의 국장은 1944년에 제정되었다. 국장 위에는 황금색 5월의 태양이 그려져 있는데 5월의 태양은 아르헨티나의 여명을 의미한다.

국장 가운데에는 아르헨티나의 국기를 구성하는 색인 하늘색과 하얀색 두 가지 색의 타원이 그려져 있다. 타원 안에는 나무로 만든 창을 두 개의 손이 잡고 있는 형상의 디자인이 그려져 있으며 창 위에는 빨간색 프뤼기아 모자가 올려져 있다. 하늘색은 하늘을, 하얀색은 라플라타강을 의미한다.

악수를 하고 있는 두 개의 손은 아르헨티나를 구성하는 여러 지역의 단결을 의미한다. 손과 프뤼기아 모자가 가까이 놓여 있는 것은 아르헨티나의 나라 표어인 "통일과 자유"(스페인어: En Unión y Libertad)를 의미한다. 손은 통일을, 창은 힘을, 프뤼기아 모자는 자유를 의미한다. 국장 양쪽을 월계수 가지로 만든 화환이 감싸고 있으며 아르헨티나의 국기 문양의 리본이 이를 묶고 있다. 월계수 가지는 승리와 영광을 의미한다.

국가

국가는 1813년 제정된 아르헨티나 국가인데 상당히 방대한 규모라서 국제 스포츠 경기 때 종종 생략되고 있다.

앞의 전주가 우루과이보다 길다.

지리

아르헨티나 지형도
아콩카과 산
폭 5km, 높이 60m의 거대한 크기인 페리토 모레노 빙하

아르헨티나는 남아메리카 대륙의 원뿔꼴 지역(Southern Cone)에 위치해 있으며, 국토 면적은 276만 km²로 세계 8위이다. 유럽은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아르헨티나보다 면적이 넓은 나라가 없으며 아프리카는 아예 없다. 그린란드(2,166,086km²)도 아르헨티나보다 작은 편이다. 다만 남아메리카 내에서는 브라질이 가장 넓기 때문에 면적으로는 콩라인이다. 아시아에서도 더 넓은 나라가 중국(959만km²)과 인도(328만km²) 뿐이며 카자흐스탄(271만km²)이 약간 작다. 한반도(22.2만 ㎢) 면적의 약 12.5배, 그리고 남한(9.9만㎢) 면적의 약 28배에 이른다. 국경은 11,968km로 서쪽으로 칠레, 북쪽으로 볼리비아, 북동쪽으로 우루과이·브라질·파라과이 그리고 남동쪽은 대서양에 면해 있다. 특히 안데스산맥을 경계로 한 아르헨티나-칠레 국경은 5.308km로 남미에서는 가장 길며, 세계에서도 세 번째로 긴 국경이다. 4,989km의 긴 해안선을 가지고 있다. 최대 남북길이 3,700km, 최대 동서길이 1,700km이다. 아르헨티나는 고원 지대와 사막을 포함하여 열대우림에서부터 한랭 지대까지 전 지구상에 있는 모든 기후 지역을 갖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남극에서 아르헨티나령 남극이라는 969,464 제곱킬로미터의 지역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는데, 일부는 칠레(칠레령 남극)와 영국(영국령 남극)의 영유권 주장 지역과 겹친다. 그러나 이 주장은 1961년 체결된 남극 조약에 의해 공식적으로 유예되어 현재까지 실효 지배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팜파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서쪽과 남쪽에 펼쳐진 중앙의 대평원이다. 습한 팜파라고도 하는데, 부에노스아이레스주코르도바주의 대부분과 산타페주, 라팜파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라팜파 주의 서쪽 부분과 산루이스주도 대체로 평야(건조한 팜파)인데, 건조해서 주로 초지로 쓰인다. 이름이 같은 코르도바주 지역의 시에라데코르도바 산맥은 팜파스에서 가장 지리적으로 두드러지는 지형이다.

이 지역과 우루과이 사이에는 길이 약 4,700km의 라플라타강이 흐른다. '은(銀)의 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어귀의 강폭은 약 220km 가량이다.

팜파스는 농업에 적절한 비옥한 땅으로 쇠고기·양모··옥수수 등을 많이 산출하며, 이 나라의 중요 경제 지역이다. 제조 공업도 여기에 집중하고 있다.

북부의 아열대 평원 그란차코 지역은 계절에 따라 건조하거나 습해진다. 주로 목화를 재배하고 가축을 방목한다. 이 지역에는 차코주, 포르모사주가 있다. 간간히 아열대 우림, 관목림, 습지가 자리잡고 있으며 수많은 식물과 동물의 서식지이다. 산티아고델에스테로주는 그란차코에서도 건조한 지역이다.

메소포타미아파라나강우루과이강 사이에 위치한 곳이다. 이 지역에는 코리엔테스주엔트레리오스주가 있다. 목축과 식물 재배에 적합한 평야 지역으로, 코리엔테스 중부에는 이베라 습지가 있다. 미시오네스주는 더 더운 지역으로, 브라질 고원의 지형적 영향을 받는다. 아열대 우림과 이과수 폭포가 있다.

아르헨티나 남부의 네그로강에서 마젤란 해협에 이르는 파타고니아의 스텝 초원에는 네우켄주, 리오네그로주, 추부트주, 산타크루스주가 있다. 이 지역 대부분은 북쪽으로는 반건조 기후에 추우며, 남쪽으로는 건조하다. 그러나 서쪽 경계에는 숲이 자라며 여러 호수가 있다. 그리고 대륙의 돌출부 끝에는 칠레와 절반씩 영유하는 티에라델푸에고 제도가 있으며, 바다의 영향으로 서늘하고 습하며, 온화하다. 파타고니아 북부(네그로 강 남쪽, 네우켄)은 코마우에 지역이라고도 한다.

파타고니아는 목양지로서 유명하며, 석유 자원 지대로서도 중요하다.

쿠요(Cuyo) 아르헨티나 중서부는 안데스산맥의 영향권이다. 산맥 동쪽의 건조한 지역을 쿠요라고 한다. 고산 지대에서 녹은 물은 저지대에 있는 오아시스에 물을 공급한다. 이 지역은 멘도사주산후안주의 과실과 포도주 생산의 중심을 이룬다. 여기서 더 북쪽으로 가면 라리오하주의 더 덥고 건조한 기후를 만난다. 산루이스주 북쪽의 시에라팜페아나스산맥이라는 세 곳의 낮은 산맥이 북에서 남으로 뻗어 이곳 최동단 경계를 이룬다.

칠레 국경 지역에는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높은 산인 아콩카과산이 있다. 안데스산맥 중에서 가장 높은 산일 뿐 아니라 남반구서반구에서도 최고봉이다. 높이는 약 7,000m이다.

아르헨티나 북서부(NOA) 이 지역은 아르헨티나에서 평균 고도가 가장 높은 곳이다. 산맥이 뻗어 있으며, 어떤 봉우리는 6,000m에 이르기도 한다. 이 산지는 북쪽으로 갈수록 더 넓어진다. 산맥은 비옥한 강가 계곡에서 끊기는데, 가장 중요한 곳은 카타마르카주, 투쿠만주, 살타주의 칼차키 계곡이다. 더 북쪽으로 볼리비아와 가까운 후후이주는 주로 중부 안데스의 고원에 있다. 남회귀선이 이 곳 북부를 지난다.

일본, 대만, 도네시아, 뉴질랜드 등 환태평양만큼은 아니지만 지진이 꽤 많이 일어나며 특히 서부 멘도사주 지역에서 지진이 많다. 특히 지진의 나라로 악명을 떨치는 칠레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안데스 지역의 지진이 꽤나 심각하다. 아르헨티나 전체가 아닌 멘도사 주에서만도 대한민국에서 기록된 어느 지진보다 규모가 큰 지진이 10여 년에 한 번 꼴로는 일어난다. 멘도사주의 면적은 남한 면적의 1.48배인 148,827 ㎢로 그렇게 크지는 않다. 다만 1978년에야 규모까지 관측하는 지진 기록이 시작된 남한에 비해 아르헨티나는 19세기에도 규모까지 있는 지진 기록이 있음은 감안해야 할 듯. 남미에서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편이라고 알려진 칠레 옆에 붙어 있고, 칠레와 아르헨티나가 만나는 안데스 산맥 근처가 태평양판과 남아메리카 판이 만나는 곳에서 가까워서 지진이 꽤 일어나는 편이다.다만 대다수의 인구가 밀집한 동부 지역은 지진이 없다.

세계에서 가장 UFO가 많이 출몰하는 나라 중 하나다. 역대 UFO중에서 가장 선명한 UFO가 발견되기도 했다. 검색어 자동완성에 아예 아르헨티나 UFO가 있을 정도다.

기후

라리오하주의 타람파야 자연공원의 사막지대(북동쪽)

기후는 옆 나라 칠레보다 평균적으로 온화한 편이며, 인구의 97%가 남위 40도 이북의 아열대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만 하더라도 연 평균기온이 서귀포보다 높다. 상하이, 도쿄보다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연 평균기온이 높으며 연교차는 더 작아서 겨울에는 위 지역들보다 더 따뜻하다.

북부 파라과이 접경지역은 1월 평균기온 28℃, 7월 평균기온 17℃, 연평균기온 23℃ 로 베트남북부내륙과 비슷한 기온이 나타나며, 남쪽 끝 우수아이아는 1월 평균기온 10℃, 6월 평균기온 2℃, 연평균기온 6℃ 로 북해의 페로 제도와 비슷한 기온이 나타나, 연평균기온으로만 보았을 때는 이북의 자강도와 비슷한 편. 이렇게 남북으로 뻗는 넓은 국토임에도 불구하고 기후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 이유는 사막과 초원으로 뒤덮여 있기 때문에 바람의 기압차로 차가운 공기가 따뜻해지기 때문이다.

국토 전체의 연평균기온은 15.4℃ 이며 최한월 8.5℃, 최난월 22.2℃ 이다. 그러나 남위 40도에서 50도 사이에는 사막이 존재하더라도 전형적인 온대기후의 기온을 보이기 때문에 사막치고는 덥거나 춥지 않은 편에 속한다.

강수량은 동부지역에서는 비교적 고르고 풍족한(1000mm)편이며 , 파타고니아 사막과 서부 건조지역에서는 사막성 기후로 비가 드물게 내린다.

역대 최고 기온은 북부지역에서 기록한 48.9℃ 이며, 역대 최저기온은 추부트에서 기록한 -32.8℃이나, 신뢰성에 큰 의문이 있어 실제 역대최저기온은 파타고니아 산악 또는 북서부 안데스 산맥에서 기록되는 -25℃~-30℃ 정도일 것이다.

남반구에 있으므로 4계(四季)의 시기는 북반부와 정반대여서 1년의 시작인 1월 1일은 여름이 된다.

생태계

아르헨티나 북서쪽에 서식하는 퓨마

북쪽의 그란차코 지역은 Dalbergia속의 브라질리안 로즈우드나 퀘브라쵸, 카로브 나무 등의 아열대식물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안데스 근처의 더 메마른 곳에는 사바나와 비슷한 지역이 존재한다. 수생식물들은 아르헨티나의 습지에 잘 자란다. 아르헨티나의 중부에 있는 습윤팜파스는 톨그래스 초원이다. 원래의 팜파스에는 사실상 나무가 없으나 양버즘나무와 유칼립투스 등과 같은 수입종들이 길이나 마을, 시골의 사유지(에스탄시아) 등에 자란다. 유일한 팜파스 원산지의 나무는 피토라카이다. 팜파스 토양의 표면은 진한 검은색으로 주로 흔히 부엽토로 알려진 몰리솔로 되어있다. 이것은 이 지역을 세계에서 가장 생산적인 농업지로 만들었지만 또한 상업적 농업으로 인해 이 지역의 본래 생태계를 심하게 훼손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비가 적게 오는 서쪽의 팜파스는 건조팜파스로서 짧은 풀이 자라는 평원이거나 스텝지역이다. 29개의 국립공원이 있다.

대부분의 파타고니아는 안데스 산맥에 의한 비그늘이 형성되어 건조한 지역에 맞는 식물군들이 존재한다. 이 지역의 토양은 딱딱하고 바위가 많아 강이나 계곡 근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땅에서 농사를 짓는 것이 불가능하다. 파타고니아의 서쪽과 티에라델푸에고섬에는 침엽수림과 활엽수림 등이 있다.

쿠요에는 가시가 있는 식물이나 다른 건조지역에 사는 식물들이 풍부하다. 강을 따라서는 몇몇 종의 나무와 풀들이 자란다. 이 지역의 조건은 포도가 자라기 적합한 조건이다. 아르헨티나의 북서쪽은 다양한 종의 선인장이 존재한다. 약 4000m의 고도의 지역에는 초목이 자라지 않는다.

북쪽의 아열대 지역에는 많은 종의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재규어, 퓨마, 오셀롯 등의 고양이과 동물들, 고함원숭이와 같은 영장류, 악어와 같은 거대한 파충류 등이 서식한다. 맥, 페커리, 카피바라, 들개 등과 다양한 종의 거북 등도 서식하고 있다. 다양한 종의 조류 역시 서식하고 있는데, 특히 벌새, 홍학, 큰부리새, 제비 등을 꼽을 수 있다.

아르헨티나 중부의 초원에는 큰개미핥기, 아르마딜로, 팜파스 고양이, 갈기늑대, 마라, 기니피그 등의 포유류와 레아가 서식한다. 매와 왜가리과의 새, 그리고 티나무 역시 이 지역에 서식하고 있다. 팜파스 사슴, 팜파스 여우 등도 서식한다. 이들 중 몇몇 종들은 파타고니아에도 서식하고 있다.

서쪽의 산지에는 다른 동물들이 산다. 라마나 구아나코, 비쿠냐 등의 남미의 특징적인 종들이 서식한다. 또한 여우나 비스카차, 안데스 고양이, 그리고 아메리카의 날 수 있는 새중에서 가장 큰 안데스콘도르 등 역시 서식한다.

아르헨티나 남부는 퓨마, 안데스 사슴, 푸두(세계에서 가장 작은 사슴), 그리고 도입종인 멧돼지 등의 서식지이다. 파타고니아의 해안가에는 코끼리물범, 물개, 바다사자, 그리고 다양한 종의 펭귄 등이 서식한다. 조금 더 남쪽은 가마우지가 있다.

아르헨티나의 영해에는 돌고래, 범고래, 그리고 남방참고래와 같은 고래 등 다양한 바다생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정어리, 만새기, 연어, 그리고 상어 등의 바다물고기가 서식하고 또한 티에라델푸에고섬에는 오징어와 같은 것도 서식한다. 아르헨티나의 강과 개울에는 다양한 종의 송어 역시 서식한다. 보아나 매우 독성이 강한 살모사 등도 서식한다. 1928년 조사 이후 호르네로가 아르헨티나의 국조로 선정되었다.

역사

아메리카 지역의 원주민들이 살았던 가장 오래된 증거중 하나인 리오 핀투라스 암각화

아르헨티나의 역사는 크게 콜럼버스 이전의 시대 또는 초기 역사(16세기까지), 식민지 시대(1530년~1810년), 국가 건설 시기(1810년~1880년), 현대 아르헨티나의 역사(1880년경)로 나눌 수 있다.

아르헨티나의 선사 시대는 약 13,000년 전 파타고니아 남단에 최초의 인류 정착지로 시작되었다.

1516년 후안 디아스 데 솔리스의 스페인 연대기 작가들이 라플라타강 원정에 도착하면서 역사가 시작되었다.

1776년에 스페인 국왕은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을 세웠는데, 1810년 5월 혁명과 함께,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라고 불리는 것을 포함한 몇몇 독립 국가들의 점진적인 형성 과정을 시작했다. 1816년 7월 9일 독립 선언과 1824년 스페인 제국의 군사적 패배로, 오늘날 아르헨티나 공화국으로 알려진 연방 국가가 1853~1861년에 형성되었다.

콜럼버스 이전 시대

호세 데 산 마르틴 장군. 아르헨티나와 칠레, 페루의 해방자

아르헨티나에 최초로 인간이 정주한 증거는 파타고니아에서 발견되며 기원전 11000여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지역에는 국가 없이 인디오들이 부족을 이루며 살고 있었는데, 15세기 초반부터 파차쿠텍 왕이 통치하던 잉카 제국은 1480년에 공격을 시작하여 오늘날의 아르헨티나 북서부를 정복해서 코야수유 지역에 포함시켰다. 과라니족들은 유카, 고구마, 예르바 마테 농업을 발전시켰다. 중부와 남부 지역(팜파스와 파타고니아)는 유목민들이 지배했으며 17세기에 마푸체인들이 통일시켰다.

식민 시대

1516년 이 땅에 유럽인들이 들어왔다. 스페인은 1542년, 남아메리카 대부분을 아우르는 페루 부왕령을 설립했다. 그들이 현재 아르헨티나 지역에 처음 정착한 것은 1527년 파라나강 근처의 지역이었다. 그들은 1536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처음 영구 식민지를 건설했으나, 원주민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스페인은 158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영구 식민지를 다시 건설하였다.

이 지역은 주로 스페인 이민자들과 크리오요라는 그들의 후손과 메스티소, 토착민과 아프리카 노예의 후예들의 나라였다. 식민 시대 정착민 중 1/3은 부에노스 아이레스나 다른 도시에 모여 살았으며, 나머지는 가우초라 하여 팜파스에서 살았다. 나머지 지방에는 원주민들이 살았고, 파타고니아와 그란차코의 대부분 지역은 원주민 지배하에 남았다.

1776년, 전의 페루 부왕령의 영토였던 지역에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수도로 하여 리오 데 라 플라타 부왕령이 설치되었다. (이 영향으로 스페인어가 아르헨티나의 공용어로 쓰이고 있고 기독교(로마 가톨릭교회)가 주요한 종교이다.) 영국이 1806년~1807년에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두 번 침공했으나 후에 대중적 지지를 얻어 총독이 되는 프랑스 장교 산티아고 리니에르에 의해 두번 다 저지당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카빌도. 독립 선언으로 이어지는 1810년의 결의 장면

독립과 통일

19세기 초 영국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침공을 시민들의 힘으로 물리친 사건을 계기로 독립의지가 촉발되었고 이후 호세 데 산 마르틴5월 혁명이 일어나면서 1810년 5월 독립을 선포하고 임시정부를 수립, 1816년 7월 9일에 투쿠만 회의에서 중앙 집권적 공화국으로 성립되었음을 선언했다. 처음에는 라플라타 부왕령 자체가 그대로 라플라타 합주국으로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합주국의 내부 다툼이 격해져 상이한 문화를 가지고 있던 볼리비아, 우루과이 그리고 파라과이가 이탈하게 된다. 이후 하나의 강력한 중앙정부를 원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앙집권주의자들과 자치권을 지키려는 지역들의 연방주의자들 사이에 마찰이 심해 독립 직후부터 투닥투닥거리게 된다.

베르나르디노 리바다비아(Bernardino Rivadavia)가 중앙집권주의자로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와 동시에 최초의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라플라타 강 하구에 위치해 아르헨티나의 무역을 독점하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국유화하고 그 수입을 통합된 국가 전체를 위해 사용하고자 하였으나, 지방의 연방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위협하는 중앙정부가 나타나는 것을 반대했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지주들 역시 자신들이 독점한 무역 특권을 내놓을 생각이 없었다. 결국 1827년 리바다비아는 대통령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후 아르헨티나는 제대로 된 지도자 없이 산발적 내전에 휩싸이게 되며, 각 주의 주지사들이 권력을 나누어 가졌다. 아르헨티나 연합국(Argentine Confederation)이라는 큰 틀의 국가는 존재하였으나 사실상 유명무실하였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가 상당히 큰 권력을 행사하는 매우 느슨한 연방체제가 성립되었다.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 1829년~1852년 집권.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가 쿠데타와 반목으로 마구 교체되는 사이, 1829년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가 기존 중앙집권주의자 주지사를 제거하고 연방주의자의 리더로서 주지사에 오른다. 이후 그는 강력한 독재정책과 중앙 집권 체제를 구축함으로서,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아르헨티나 연합국의 확립과 안정을 가져오게 된다. 이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중앙집권주의자들에 대한 철저한 숙청이 이루어져 이들은 전부 지방으로 도망가고, 힘을 모아 로사스에게 대항하기도 했지만 철저하게 박살나버렸다. 이렇게 로사스는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안정적 독재 체제를 구축하게 되며, 자신의 가문이 아예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를 독점하게 하려 했다. 물론 그의 잔혹한 통치와 권력 독점 야욕은 그의 인기를 계속 떨어뜨려 말년에 그는 암살의 위험을 고려해 자신의 집무실과 관저에서 나가지 않았다.

로사스가 장기 집권하는 도중 우루과이에서 내전이 일어나자, 이에 개입하는 과정에서 페드루 2세의 브라질 제국과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결국 브라질과 전쟁을 하게 되고, 이에 남아있던 중앙집권주의자 잔당들이 합세하여 대 로사스 연합을 형성하게 된다. 로사스는 여기에서 대패하여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로부터 쫓겨나고, 영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이에 1853년 아르헨티나의 각 주지사들이 모여 새로운 헌법 제정에 찬성하고 아르헨티나를 연방국가로 만드는 데 동의하게 되어 엔트레리오스 주의 호세 우르키사가 새로운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신헌법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세관의 수입을 모든 주가 공유하도록 된 것에 반대한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이를 거부하고 1852년 9월 11일 혼자 아르헨티나 연합국을 탈퇴, 부에노스아이레스국(Estado de Buenos Aires)을 선포한다. 아르헨티나 연합국은 수도를 파라나에 두었다.

그로부터 무려 7~8년 간 아웅다웅 계속해서 다투다가, 결국 여러 분쟁을 거쳐 1861년 파본 전투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바르톨로메 미트레(Bartolomé Mitre)가 최종적으로 내륙의 아르헨티나 연합국을 제압하게 된다. 이후 모든 주가 참가한 의회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세관을 국유화하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수도 지위와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의 수입을 보장하는 방법으로 합의가 이루어졌고, 1862년 미트레가 통합된 아르헨티나의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이렇듯 1814년부터 1880년까지 66년간 일어난 일련의 분쟁들을 묶어 '아르헨티나 내전'으로 분류한다.

전성기

아르헨티나 독립 100주년 기념행사. 1916년의 아르헨티나의 화려한 모습을 보여준다.

아르헨티나는 넓은 토지와 초원이 있었으나 농사를 짓기에는 강수량이 모자라 많은 생산량을 보장하지 못했고, 때문에 목축업이 가장 크게 발달한 국가였다. 그러나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던 것이 당시에는 냉동기술이 없어 소와 양을 수출하려면 살아 있는 채로 실어야 했기에 비용이 크게 증가했고 이는 유럽 시장에서 경쟁력이 떨어졌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냉장 기술이 개발되어 소고기 등을 도축해도 적도를 통과할 수 있게 되자, 아르헨티나 경제는 크게 부흥하게 되었다.

거기다가 오랜 내전이 끝나게 되면서, 그동안 미루어 두어 통제하지 못하고 있던 원주민 영토를 향한 정복 및 식민에 착수한다. 1800년대 후반에 이루어진 대규모 정복사업은 아르헨티나의 영토를 2배 이상 뻥튀기 해놓았으며, 남부 파타고니아 지방을 제외하고는 전부 농업과 목축업에 쓸만한 땅들이었기에 아르헨티나의 1차산업은 크게 부흥하였다. 이에 지주들의 자본 축적이 이루어져 1880년 이후부터는 초기적인 산업화가 시작되었고, 해외 자본, 특히나 영국과 프랑스의 자본이 유입되어 최초로 근대적 공장이 세워지는 등 아르헨티나는 빠른 경제성장을 이룩하게 되었다.

1900년 이후부터는 그렇게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문화와 사회가 크게 발전하여, 본격적으로 '남미의 프랑스'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은의 여왕', '남미의 파리' 등 화려한 명칭을 갖게 되었다. 철도와 기간사업이 건설되었고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지하철을 건설하였다. 급진주의당이 정권을 잡고 운영한 10여 년 동안은 사회정치적 문제에도 크게 관심이 대두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투표권을 보장하였고 사회안전망에 대한 기초적 작업이 이루어졌다. 목축업과 농업은 물론 타 산업도 발달하기 시작해 1910년 무렵부터 1970년대까지는 세계 15대 경제 대국으로 늘 빠지지 않았고, 1910년대 아르헨티나의 1인당 GDP는 프랑스, 이탈리아보다 높은 세계 8위권으로 벨기에와 비슷했다. 이때의 아르헨티나는 명실상부한 선진국이었으며,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구입하고 독립 초기 주변국인 브라질과 파라과이와의 전쟁에서 승전할 정도로 중남미에서는 강대국이기도 했던 나라였다. '아르헨티나인처럼 부자이다.'라는 관용구가 프랑스에 생길 정도였다.

익히 알려진 동화 '엄마찾아 삼만리'에서 이탈리아인 주인공 소년이 엄마 찾아 가던 곳이 바로 아르헨티나였다. 즉 유럽에서 아르헨티나 드림을 찾아 이민을 왔다.

대공황, 아르헨티나 몰락의 시작

그러나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을 시작으로 세계 경제가 큰 타격을 받으면서 목축업과 농업에 쇠고기, 곡물 수출에만 의존하며 부를 쌓던 아르헨티나는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고 이때 국내 위기의 혼란을 틈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치에 개입하게 되면서 아르헨티나는 여타 중남미 국가들처럼 잦은 군부 쿠데타와 군부 독재 등 군부의 정치 개입이 반복되는 등 경제적, 정치적으로 끝 없는 혼란에 빠져들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시기

아르헨티나에는 나치 독일의 전횡을 피해 도망친 유럽 이주민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일례로 볼펜을 발명한 신문기자 비로 라슬로(Bíró László) 역시 원래는 헝가리 사람이었으나 나치를 피해 아르헨티나로 도망쳤다.

이렇게 아르헨티나는 나치를 피해 도망친 사람들이 몰린 나라인 데다가 세계적인 농업국인 덕에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아르헨티나'라는 나라 자체가 연합국의 군량고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나치의 주동자들도 종전 직전 아르헨티나로 도망쳐오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아돌프 아이히만. 이 때문에 히틀러가 사실 도망가서 아르헨티나의 시골 구석에서 잘먹고 잘살고 있다는 음모론의 주역이 되기도 했다.

페론 집권기: 논란의 시대

후안 페론과 그의 아내 에바 페론, 1947년
후안 페론과 그의 아내 이사벨 페론, 1973년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인 1946년 육군 대령 출신 노동부 장관 후안 페론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되면서 정세는 어느 정도 안정화되기 시작했고 대통령이 된 페론은 노동자와 빈민층을 위한 사회 복지 정책을 펼쳤다. 흔히 말하는 포퓰리즘의 대명사인 '페론주의'는 이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에비타'로 잘 알려진 영부인 에바 페론은 빈민의 어머니로 추앙받으며 어찌 보면 페론보다 국민들의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47년 그녀는 에바 페론 재단을 설립하여 사회 복지를 실시했다. 이것은 아르헨티나 최초로 정부가 사회복지에 관심을 두게 된 사건이었으며, 기존의 과두정치와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에비타는 무뚝뚝한 페론과 그의 지지자 사이의 "사랑의 다리"로 여겨졌다. 그녀는 여성 참정권을 얻어냈으며, 페론주의 여성당을 창립하기도 했다.

1900년대 초반의 아르헨티나는 분명히 잘 사는 부국이었으나 사회문제는 심각했다. 산업화는 부분적으로 이루어져 제대로 된 중산층이 형성되지 못했고, 극단적으로 부자여서 해외 진출을 통해 돈을 쓸어 모으는 지주층과, 그 밑에 소속된 노동자들로 사회가 극단적으로 이원화 된 것이다. 중산층이라고 해 봐야 공무원, 사무직 정도였으나 농업 위주 아르헨티나 경제 및 사회상에서 주류가 되지 못했다. 결국 수많은 빈민들이 거리를 맴돌며 일자리와 월급을 요구했고, 이는 단순노무직에 사람들이 집중되어 비참한 삶의 질을 낳게 되었다. 후안 페론의 정책들은 이런 빈민들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고, 빈민가 출신인 에바 페론의 사회 활동까지 합쳐저 엄청난 인기로 이어진 것이다.

후안 페론이 실행했던 경제정책이 특별히 이상했던 것은 아니고 당대의 트렌드를 충실히 따른 것이었다. 미국에서도 케인즈주의 경제학을 반영해서 경제정책을 짰고 소련의 계획경제 체제가 성공적으로 잘 돌아가고 있었기에 서구 선진국이든 갓 독립한 제3세계 국가에서도 계획경제 제도를 반영하거나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후안 페론도 그런 경우이다.

페론이 포퓰리즘으로 나라 말아 먹었다고 욕 먹는 것에 비해 의외로 80년대까지 페론주의 정당은 집권기간이 짧았다. 195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는 급진시민연합과 반 페론파 성향의 군부가 집권했고, 그나마도 1955년 쿠데타 이후로 페론주의자들의 선거출마가 금지되어있던 상황이었으며, 이후 선거출마금지조치가 풀려서 페론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은 것도 1973년부터 1976년까지 단 3년 정도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민주화 직후에는 급진시민연합(라디칼당) 소속의 라울 알폰신이 집권했고, 페론당 소속으로 집권한 카를로스 메넴도 대통령 당선 당시에는 페론주의적 공약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대통령에 당선되고나서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도입했고 민영화도 대대적으로 단행하여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아르헨티나가 경제위기에 빠졌을 때 더 이상 팔아치울 공기업이 남아있지 않다고 표현될 정도로 철저하게 감행했다.

페론의 업적을 재평가하는 쪽에선 1949년부터 1976년까지 그가 통치하던 시대에 아르헨티나의 국민총생산은 127%의 성장을 기록했고, 개인소득은 230%의 성장을 기록하였으며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의 발전을 도모했다는 측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1945년 4,000달러 정도이던 아르헨티나의 1인당 GDP는 1975년에는 8,000달러를 넘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다른 나라들의 GDP는 아르헨티나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상승했다. 페론이 집권한 1946년에 아르헨티나의 1인당 GDP는 브라질과 일본(2차 대전 직후라서)의 세 배가 넘었다. 그러나 1975년에는 브라질의 두 배로 격차가 줄어들고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이 벌어졌다. 1946년까지만 해도 아르헨티나의 1인당 GDP는 OECD 평균에 근접했으나 1975년 무렵엔 OECD 평균의 70%정도까지 떨어졌다.

물론 빈민구제가 경제개발보다도 우선시했기 때문에 겉으로 보이는 경제성장은 좀 더뎠어도 후안 페론 치세기간의 아르헨티나는 적어도 빈민율만은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후안 페론은 우선 빈부격차부터 줄이고 차후에 경제를 발전시킬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후안 페론이 죽은 지 2년 후 호르헤 비델라가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직후부터 국채를 남발하고 자국의 기업들을 헐값에 처분하는 등 아예 경제를 망치려고 작정한 행보로 인해 아르헨티나는 완전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그렇기 때문에 페론의 업적을 긍정적으로 보든 부정적으로 보든 아르헨티나의 경제부진이나 파탄의 책임을 페론에게만 전가하기는 어렵다. 아르헨티나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경제력이 절정에 달해 프랑스, 독일과도 비슷한 수준이었으나 1929년 미국발 경제 대공황의 직격탄을 맞게된 이후에는 쭉 내리막길이었다. 페론의 영향이 남아있던 1950년대라면 몰라도 1960년대와 1970년대까지의 아르헨티나의 성장부진을 온전히 페론의 영향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오히려 아르헨티나의 경제부진이나 파탄의 책임은 군부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하다 못해 페론의 정책을 뒤집어보려 했던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에게도 있다. 완전한 자유시장경제를 도입하려 했지만 오히려 부작용만 키워버리면서 차라리 안 건드린 것만 못한 수준으로 경제가 무너져 버렸다.

페론주의에 긍정적이거나 또는 중립적으로 생각하는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페론보다는 오히려 페론 실권/사후에 집권한 아르투로 프론디시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레오폴도 갈티에리, 라울 알폰신, 카를로스 메넴, 페르난도 델라루아 같은 후임 아르헨티나 전 대통령들의 경제 정책이 오히려 아르헨티나의 경제 악화에 더 악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도입하고 실행했던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천문학적인 외채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파탄이라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또한 1966년부터 1973년까지 7년밖에 안되는 기간에 쿠데타가 무려 세 번이나 일어날 정도로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황이었으니 국가적인 차원에서 경제성장에 에너지를 쏟아붓기가 어려웠고, 1976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비델라 정권부터 외자 도입을 위해 공기업에 외채를 떠안게 하는 조치를 취하면서 현재의 외채 위기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오히려 페론 정권은 외채에 의존하는 경제발전을 경계했으며, 외채 제로를 선언하며 집권하자마자 바로 영국 은행에 지고 있던 10억 달러의 외채를 갚는 등 자신의 임기동안 외채를 꾸준히 줄이려고 노력했다. 적어도 페론의 기조가 유지됐다면 막대한 외채로 인한 외환위기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아르헨티나의 공업이 농업에 비해 낙후되었고 과거 라틴아메리카의 부국이었던 아르헨티나가 그의 통치를 거친 이후 몰락했다는 주장도 학자들 사이에서 나름 설득력을 얻고 있는지라 그의 평가에 대한 논란은 계속될 것이다.

결국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를 중심으로 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아르헨티나 군부가 다시 집권하게 되었다.

20세기 후반 군사독재

포클랜드 전쟁 당시 아르헨티나 군인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레오폴도 갈티에리

이사벨 페론(페론 1974년 7월에 죽고 남편의 뒤를 승계한 그의 셋째 부인이자 부통령)은 1976년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를 합참의장격인 전군총사령관에 임명했는데 군대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비델라는 쿠데타를 통해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 되었다. 좌우익 극단주의자 사이의 폭력 사태와 재정위기가 일어나자 1976년 3월 24일 군사 쿠데타로 이사벨도 축출됐다.

군부는 스스로의 정권을 국가재건과정(Proceso de Reorganización Nacional)이라 칭하고 좌파와 페론주의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벌이며(일명 "더러운 전쟁") 국민들의 대대적인 반감을 사게 되었다. 군사정권은 수천명의 반정부 인사들과 시위 참여자들을 쥐도새도 모르게 잡아들인 후 재판 없이 고문 사형하였다. 뿐만아니라 수만 명의 시민이 실종되거나 국가보안군에 의해 살해, 대서양에 수장 되었다.

자국 기업들을 헐값에 매각해 얻은 비자금을 이용해 FIFA로부터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의 개최권을 사실상 돈주고 사왔다. 그렇게 1978년 6월에 월드컵을 개최했는데 이건 완전히 제2의 베니토 무솔리니라 불릴만했다. 말 그대로 무솔리니가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에서 했던 짓을 그대로 따라했고 결국 아르헨티나를 억지로 우승시켰다. 이로 인해 프로파간다에 성공한 비델라는 5년동안 집권했으나 월드컵의 열기가 식자 국민들의 불만을 견디다 못해 1981년 퇴임하고 같은 군장성 출신인 로베르토 에두아르도 비올라(Roberto Eduardo Viola)로 돌려막기를 했다. 로베르토 에두아르도 비올라 역시 몇 개월 못하고 결국 레오폴도 갈티에리로 돌려막기를 시전하고 퇴임했다.

그리고 레오폴도 갈티에리도 호르헤 비델라처럼 프로파간다를 위해 뭔가 일을 만들고자 했다. 영국과의 영토분쟁 지역인 포클랜드 제도를 무력 '수복'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결국 포클랜드 전쟁에서 영국에게 참패를 당했다.

1970년대 후반에 들어와 있던 외국자본도 포클랜드 전쟁 직후에 대거 빠져나갔으며, 이자율 상승까지 겹쳐서 외채를 도저히 갚지 못하게 되어 경제가 파탄위기에 직면하자 명분을 잃은 군부는 민주 정부에 정권을 이양했다.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킨 레오폴도 갈티에리가 대통령직에서 사퇴하고 아르헨티나 군사정부는 1년 정도 레이날도 비뇨네가 이어 받았다가 결국 이듬해인 1983년에 군사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을 불러 일으켜 사퇴했다. 군부는 결국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여 급진시민연합 소속의 라울 알폰신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다.

민주화 이후

라울 알폰신

라울 알폰신은 민주화를 위해 정치개혁을 단행했고, 아우스트랄 프로젝트를 통해 화폐부터 개혁하고 여러가지 경제정책을 내세워서 집권 초기에 어느 정도 성과가 나오는가 싶었다. 그러나 임기 말년에 초인플레이션 현상을 막지 못한 채 임기를 6개월 남겨놓고 결국 사퇴하고 말았다. 이어서 선거를 통해 페론주의 정당인 정의당이 집권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카를로스 메넴]은 기존의 페론주의와는 반대되는, 이전 군부정권이 했던 신자유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초기엔 이러한 약빨이 먹어서 물가가 안정화되었고, 외자유치에 적극적이었다. 또한 돈이 되는 기업들이 대거 민영화되었다. 그래서 당장은 돈이 들어왔다. 빈부격차는 커졌지만 저환율 정책으로 초인플레이션이 진정되었기 때문에 일단 경제적으로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덕분에 1995년 대선에서도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2기 집권시에 1기 집권시 정책의 부작용으로 빈부격차가 급속히 확대되었다. 저환율로 수출경쟁력이 떨어져 무역적자가 급속히 커지는 등의 부작용을 겪었다. 1997년 IMF 외환위기로 쐐기타를 맞고 부정부패마저 횡행하면서 3선까지 노렸던 카를로스 메넴은 지지율 추락으로 3선을 포기하고, 1999년에 임기를 마치며 퇴진했다. 그 이후 선거를 통해 정권이 교체되었다.

1999년 12월 라디깔당(UCR)과 Frepaso당의 야당연합(Alianza) 후보인 페르난도 데 라 루아(Fernando de la Rua)가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나, 막대한 외채, 대규모 적자, 계속되는 경제침체 속에서 2000년 12월 19일 국제통화기금(IMF) 으로부터 397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지원받고 엄격한 구조조정을 추진했다. 그러나 개혁정책의 실패와 긴축 정책에 대한 국민의 반발로 사회가 불안해지고, 2001년 12월 3일 자본유출을 막기 위해 예금인출 제한조치(Corralito)를 발표하자, 전국에서 슈퍼마켓과 상점에서 약탈이 발생하였고 예금인출 제한조치에 분노한 실업자 운동(piquetero)과 중산층의 냄비시위대(cacelolazo)의 거리 시위가 일어났다. 2001년 12월 20일 대통령궁(Casa Rosada) 앞에서 경찰과 시위대의 유혈 충돌로 38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다친 대참사가 발생했고 데 라 루아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결국 12월 24일에 아르헨티나는 1,320억 달러에 달하는 외채상환유예(moratorium) 선언으로 국가 부도 사태를 맞이했다. 데 라 루아 대통령이 사임하고 2001년 12월 31일 의회에서 새로운 대통령이 임명되기까지 11일 동안 3명의 대통령이 바뀌었다. 2002년 1월 1일 의회에서 에두아르도 두알데(Eduardo Duhalde)가 찬성 262표, 반대 21표, 기권 18표로 대통령에 임명됐다.

경제 상황 악화에 따른 사회불안과 IMF와의 교섭 부진 등 총체적 위기가 극에 달하자, 민심 수습책의 일환으로 2003년 4월 27에 대통령 선거를 하였으며, 페론당 내 개혁 분파인 승리를 위한 전선(Frente de la Victoria)의 네스토르 키르츠네르(Nestor Kirchner)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21세기

네스토르 키르츠네르와 그의 아내이자 정치 후계자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츠네르

키르츠네르주의

네스토르 키르츠네르 대통령은 중국발 경제 호황에 편승한 수출 증가로 2006년 1월 3일 95억 3천만 달러의 IMF 부채를 조기 상환하고 높은 수준의 고용과 내수 소비 증가로 집권 기간 동안 연 9%의 경제 성장을 달성하며 키르츠네르주의(Kirchnerismo)라는 페론주의를 계승한 새로운 정치운동을 탄생시켰다.

2007년 대선에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Cristina Fernández)가 남편인 네스토르 키르츠네르에 이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아르헨티나 최초의 선출직 여성 대통령이자 세계 최초의 부부 대통령이 됐다. 그녀는 재임 기간 연기금, 석유회사(YPF: Yacimientos Petrolíferos Fiscales), 아르헨티나 항공(Aerolineas Argentinas), 아르헨티나 상하수도회사(AySA: Agua y Saneamientos Argentinos)등을 재국유화 하였고, 저소득층에 각종 보조금을 지원하는 포퓰리즘 정책에 정부지출을 늘려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농산물에 대한 수출세 부과 및 각종 규제강화로 농업 및 기업 부문과 갈등을 겪었고, 2010년에는 중남미 최초로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면서 교회와 크게 충돌했다. 빈곤률 감소와 중산층 확대로 2011년 대선에서 54.11%의 역대 최대 득표율을 획득하여 재선에 성공했으나, 2014년 헤지펀드 채권단과의 협상 실패로 디폴트 상태에 빠지고 부패, 물가상승, 치안 악화, 언론통제, 대통령 연임제한 폐지 개헌에 반대하고 알베르토 니스만(Alberto Nisman) 검사의 죽음에 대한 사법 정의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하면서 집권당의 지지율이 크게 하락했다.

신자유주의로의 복귀

2015년 대통령 결선 투표에서 변화연합(Cambiemos)의 마우리시오 마크리 전(前)부에노스아이레스 시장이 집권 여당의 다니엘 시올리(Daniel Scioli) 후보를 2.8% 차이로 누르고 근소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여당의 패배는 키르츠네르 부부 대통령의 12년 장기집권에 따른 피로감과 만성적 경제침체로 유권자들의 새로운 변화에 대한 욕구 분출에 있었다. 마크리 대통령은 다수의 기업가 출신 장관을 임명하고 기업친화적 정책, 외환시장 자유화, 보호무역 정책 완화 등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높은 물가상승과 외환위기에 직면하여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57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았고, 그 조건으로 엄격한 긴축재정을 실행하면서 지지기반인 중산층마저 마크리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국가주의로의 복귀

결국 경제문제 해결에 실패하면서 마크리 대통령은 2019년 재선에 실패했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전 대통령을 부통령 후보로 내세운 키르츠네르주의 정치운동의 연합인 모두의 전선(Frente de Todos)의 알베르토 페르난데스(Alberto Fernández)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아르헨티나는 4년만에 다시 좌파가 정권을 회복했다. 페르난데스 대통령이 결선투표 없이 1차 투표에서 당선된 데에는 빈곤률 증가와 물가인상, 그리고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IMF 구제금융 신청이 있었다.

정치

대통령 집무실 까사 로사다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된 국회

현재 아르헨티나는 강력한 대통령 집권제를 중심으로 지방의 자치권을 대폭 인정하는 연방공화국이다. 1816년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오랜 정쟁 끝에 1853년 연방헌법을 제정하였다. 1853년 헌법은 미국헌법을 모델로 하여 제정되었으며 연방을 구성하는 개별 주에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하였다. 1853년 헌법은 이후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쳤으며 1994년 개정을 통해 대통령 간선제를 직선제로 변경함으로써 미국식 대의 민주주의적 요소를 약화시키고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를 강화했다. 현재 아르헨티나 연방은 23개 주와 1개 자치도시(부에노스아이레스)로 구성되어 있는데, 헌법 제5조에 따라 자체 헌법을 제정하여 지방 자치를 보장하고 제도, 정치, 행정, 경제 및 재정적 질서에서 그 범위와 내용을 규제한다.

행정부

아르헨티나의 헌법은 3권분립을 기반으로 국민투표에서 선출된 대통령이 나라를 통치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대통령은 아르헨티나 태생이어야 한다. 대통령의 임기는 4년이며 1회에 한해 연임이 가능하다. 1994년 개헌으로 대통령 선거에 결선투표제가 적용된다. 1차 투표에서 유효표의 45% 이상을 획득하거나, 40% 이상 득표하고 2위와의 표차가 10% 이상일 경우 당선이 확정되며, 그밖의 경우는 2차 투표에서 1, 2위 간 투표자의 단순 과반수 득표로 당선이 확정된다. 대통령과 부통령은 국민에 의해 동시 선출되며, 선거는 현직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기 6개월에서 2개월 전에 실시된다.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은 강력한 권한을 지니고 있다. 법안을 발의하거나 의회의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법률의 시행령을 공포할 수 있다. 또한 의회의 승인을 거칠 시간적 여유가 없다고 판단될 때는 긴급명령을 발동할 수 있으며, 사면권을 행사할 수 있고, 대법관, 연방법원 판사, 대사 및 고위 군 간부의 임명권을 지닌다.

대통령의 권한을 제한하기 위해 1994년 개헌 시 수석장관(Jefe de Gabinete de Ministros) 제도가 도입됐다. 수석장관은 헌법 제 101조에 의해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고 대통령 또는 의회의 불신임 투표에 의해 해임될 수 있다. 수석장관은 대통령을 보좌하여 행정업무를 총괄하며 각료회의를 개최하고 대통령 부재 시에는 각료회의를 주재할 수 있다. 공무원 임명권을 지니며 의회에 정부 예산안을 제출하고 국정운영 현황을 정기적으로 보고한다.

행정각부의 장관은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고 해임되며 대통령을 보좌하며 대통령으로부터 위임받아 위임받은 권한 내에서 해당 부의 행정업무를 수행한다. 탄핵소추가 아니면 의회의 불신임 결의로 해임될 수 없다.

대통령의 부재, 사망, 사임 또는 해임 시 부통령이 대통령을 승계한다. 부통령은 상원의장을 겸직하기 때문에 의회의 모든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 대통령과 부통령의 유고 시 의회가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될 때까지 상원의원, 하원의원 또는 주지사 중에서 임시대통령을 선출한다.

입법부와 정당

아르헨티나는 상·하원 양원제를 운영하고 있으며 하원은 아르헨티나 국민을 대표하고 상원은 지역을 대표한다. 의회는 입법업무와 행정부를 감독하는 업무를 지닌다. 상원은 각주와 수도에서 3명씩 모두 72명의 의원으로 구성되고 부통령이 의장이 된다. 임기는 6년이며 재선 가능하고, 매 2년마다 1/3씩 교체된다. 하원은 연방구(聯邦區)와 각 주(州)에서 인구비례의 정원(257명)을 정하고, 임기 4년의 의원을 매 2년마다 1/2씩 교체하며 역시 재선 가능하다. 하원의원은 각 주당 최소 5명을 선출한다. 상·하원이 되기 위한 요건은 최소 25세, 아르헨티나 시민권 4년, 출마하는 주에서 태어났거나 2년 이상 거주해야 한다. 보통선거제는 1912년 부터 실시되었으며, 1947년에 여성참정권이 실현되었다. 아르헨티나는 현재 23개주와 1개 연방구로 이루어져 있는데, 주마다 주의회가 있으며 강력한 자치제에 입각하여 독자적으로 지사를 선출한다.

아르헨티나는 정당 파편화 현상이 매우 심한 나라이다. 2009년 정치개혁 이후 정당수가 일시 감소했으나, 다시 증가하여 2022년 현재 전국정당이 45개 그리고 지방정당이 705개에 달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주에 가장 많은 81개가 있고 그 다음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자치시에 54개가 등록돼 있다. 1990년대 이후 지방의 정당 및 정당연합의 영향력이 증가하면서 전국정당의 분권화 경향이 강하다. 1946년부터 2001년 금융위기까지 가장 강력한 정당은 후안 도밍고 페론(Juan Domingo Perón)의 지도력을 중심으로 등장한 ‘Partido Justicialista’과 급진시민연합(UCR: Unión Cívica Radical)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정당체제의 파편화로 기존 정당의 계파 세력들이 새로운 정당 또는 정치운동을 만들었다.

현재 아르헨티나의 주요 정치연합 또는 정당으로 모두의 전선(Frente de Todos), 변화연합(Camniemos), 정의당(Partido Justicialista) 급진주의 시민연합(Unión Cívica Radical), 시민연합-ARI(Coalición Cívica-ARI), 공화주의 제안(Propuesta Republicana), 혁신전선( Frente Renovador)등이 있다.

사법부

아르헨티나의 사법제도는 3심제로 연방최고법원, 연방고등법원, 주 법원으로 이루어진다. 연방 사법기관과 지방 사법기관이 서로 독립되어 있으며 대법원은 지방정부 간의 분쟁, 외교기관 및 외교관 유관 사항에 대해 배타적인 관할권을 가진다. 아르헨티나에는 별도의 헌법재판소가 없으며 연방최고법원이 헌법재판권을 행사한다. 아르헨티나는 이탈리아, 에스파냐,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을 모방하여 1994년 재판관이사회(Council of Magistrates)를 설치하였다. 재판관이사회는 현재 대법원장, 동료들이 선출하는 4명의 연방 재판관, 상·하원 6명, 변호사 4명, 행정부 대표 1명, 학계대표 2명 등 17명으로 구성되며 ,대법관을 제외한 여타 법관들의 임명, 법관들에 대한 해임절차 개시, 사법부 예산의 관리·집행 등의 임무를 수행한다.

1990년대 중반 재판관이사회 및 징계위원회 구성을 통해 재판관 임명 및 해임 절차를 투명하게 함으로써, 사법부의 독립과 신뢰성을 회복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헌법에서 사법부의 독립성을 규정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행정부의 권한이 강해서 사법부의 독립성이 지속적으로 침해받았다.

국방

아르헨티나 구축함 ARA Sarandí (D-13)

아르헨티나의 군부는 국가건설 이후 전통적으로 아르헨티나 국가정책 및 전략 수립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육군과 해군은 아르헨티나의 독립 전쟁 기간인 1810년에 창설되었으며 공군은 1945년에 창설되었다. 군부는 1930년, 1943년, 1955년, 1962년, 1966년, 1976년에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치에 개입했다. 특히 "국가 재편 과정"으로 알려진 1976년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 정부는 수만 명의 사망을 초래했으며 실종된 "더러운 전쟁"을 벌였다.

아르헨티나의 병역은 병역의무에 관한 법률 24,429에 의해 지원병제이다. 육군과 공군이 1년, 해군이 11개월이다. 2004년을 기준으로 총병력은(2017년 기준) 7만 8,133명으로 육군 4만 193명, 해군 1만 6,506명, 공군 1만 3,434명이며, 여성병력은 전체의 14%이다. 국방비 지출은 2020년 기준으로 25억 달러로 공공지출의 1.7%를 차지했으며, 이 수치는 전체 국내총생산(GDP)의 0.76%에 해당한다. 남아메리카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근대화한 군대를 가지고 있다. 1978년~1982년 국방비 예산이 역대 최고 수준인 GDP의 3%를 차지할 정도였으나, 1982년 포클랜드전쟁(말비나스전쟁) 패배를 계기로 1983년 군부독재가 종식되고 민간정부가 출현하면서 군부의 위상이 급격히 추락했다. 아르헨티나 정계는 군부를 여전히 위협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군부가 위기를 이용하여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군부의 위상 약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현재 아이티, 사이프러스 등 총 5개 지역에 UN평화유지군 830명을 파견하고 있으며, 미국과 함께 주요 비나토 동맹국(MNNA)이다.

외교

외교정책은 외교통상경배부(Ministry, International y Culto, MRECIC)가 담당하며 대통령의 지시를 따른다. 아르헨티나는 G-15와 G-20의 주요 경제국 중 하나이며, UN, WBG, WTO, OAS의 창립 회원국이다. 2012년 아르헨티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2년 임기의 비상임이사국으로 다시 선출되었으며 아이티, 키프로스, 서사하라, 중동 지역의 주요 평화유지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중견국이다.

라틴 아메리카와 서던 콘(Southern Cone) 지역 강국인 아르헨티나는 OEI와 CELAC를 공동 설립했다. 브라질, 파라과이, 우루과이, 베네수엘라를 파트너로 두고 있는 메르코수르 블록의 창립 멤버이기도 하다. 2002년 이래로 아르헨티나는 라틴 아메리카 통합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강조해 왔다.

아르헨티나는 1904년 이래로 남극에서 아르헨티나령 남극이라는 969,464 제곱킬로미터의 지역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는데, 일부는 칠레(칠레령 남극)와 영국(영국령 남극)의 영유권 주장 지역과 겹친다. 그러나 이 주장은 1961년 체결된 남극 조약에 의해 공식적으로 유예되어 현재까지 실효 지배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남극 조약 사무국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본부를 두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 제도(스페인어: Islas Malvinas)와 영국이 해외 영토로 관리하는 사우스조지아 사우스샌드위치 제도에 대한 영유권을 놓고 분쟁을 벌이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국제형사재판소의 로마법 당사국이다. 아르헨티나는 1998년부터 주요 비 NATO 동맹국이며 2022년 1월부터 OECD 후보국이다.

대한관계

아르헨티나는 한국과 1962년 2월 15일에 국교를 수립하여 현재 상호 대사관을 개설하고 있다. 북한과는 1973년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나 북한공관 방화사건 후 1977년 북한 공관원 전원이 무단 철수하였으며 같은 해 6월 아르헨티나 정부가 북한에 대하여 단교 조치를 내렸다. 아르헨티나는 6.25 한국전쟁 당시 한국에 50만 달러의 물자를 지원해준 국가로 UN 등 각종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는 전통적인 우방국이다. 남북 당사자 간 직접 대화를 통한 한반도 문제해결을 지지하며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한 한국정부의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한국의 경제발전 및 경제위기 극복을 높이 평가하고, 양국 간 통상, 경제협력, 투자, 기술이전 등 실질협력관계 심화에 관심이 높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의 국빈 방문 시 체결한 "21세기 공동 번영을 위한 포괄적 협력 관계"가 양국관계의 기본 틀이다.

한국과는 1968년 문화협정, 1972년 발명특허권 보호협정, 1980년 경제·과학 및 기술협력협정, 1981년 무역협정, 1992년 복수상용비자협정, 1994년 투자보장협정, 1995년 범죄인 인도협정, 1996년 원자력 협정 및 항공업무협력 협정, 2003년 과학기술협력협정, 2003년 수산기술협력 약정체결, 2003년 일반여권 비자 면제 시행, 2004년 외교관/관용 여권 비자면제 협정(교환각서), 2004년 경제무역협력협정 및 문화교육협정 서명(기타, 9개 경제관련 약정 서명), 2013년 한-아 형사사법공조조약 등을 체결하였다.

2006년 4월에는 주 아르헨티나 대사관 내에 남미지역 전체를 관할하는 남미자원협력센터가 설립되었다. 이는 2004년 11월 노무현 대통령의 남미순방 이후 남미국가들과의 자원협력 추진을 위한 후속조치 차원에서 창설된 것이다. 2005년 현재 대한(對韓) 수입은 3억 9000만 달러, 대한 수출은 3억 7154만 달러이다. 주요 대한 수입품은 전자, 전기제품 등이고, 주요 대한 수출품은 사료, 피혁 등이다. 2004년 기준으로 아르헨티나는 중남미 33개국 중 한국의 11위 수출 대상국(멕시코, 브라질, 파나마, 바하마, 칠레, 버뮤다, 과테말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다음)이고, 4위 수입대상국(브라질, 칠레, 에콰도르 다음)이다. 아르헨티나의 영토, 인구 규모, 자연자원 규모 등에 비추어 볼 때 교역량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한국의 대 아르헨티나 수출은 1997년도에 6억3천만 달러를 정점으로, 아르헨티나의 경제 침체로 하락추세를 보이다가, 2003년부터 다시 증가하여 2013년 역대 최고수준인 11억 달러를 기록한 이후 아르헨티나 경기불황 등으로 인해 다시 감소세로 돌아서서 2020년에는 8.3억 달러를 기록했다. 한국의 대 아르헨티나 주요 수출품목은 무선통신기기부품, 승용차, 자동차부품, 합성수지, 평판 디스플레이 등이다. 한국의 대 아르헨티나 수입액은 2012년 14.2억 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이후 감소 추세로 2020년 8.9억 달러를 기록하였다. 주요 수입 품목은 사료, 식물성 유지, 은, 기타 어류, 곡류, 아연광 등 농산물 및 원자재 중심이며, 특히 한국 대두유 전체 수입량의 70~80%를 아르헨티나로부터 수입하고 있다.

한국의 대아르헨티나 투자는 2002년 아르헨티나 경제위기 심화로 한국기업들이 현지 조직을 대폭 축소하거나 철수하였고, 2012년 이후 외환통제 등 보호주의 무역 정책으로 크게 감소했으나, 2018년 포스코의 리튬 광산 인수 이후 5.9억 달러로 증가하였다. 2018년 9월 기준으로 아르헨티나 현지에 진출해 있는 한국기업은 총 9개 회사로 전자분야에 삼성전자와 LG전자, 종합상사로 포스코대우, 조선/수산 분야에 한성기업, 한국선급, 의료업체로 세라젬, 자원개발에 포스코, 건설에 현대건설, 유통에 판토스이다. 2015년 12월 비즈니스 친화적인 마우리시오 마크리 행정부 출범과 2016년 9월 삼성전자의 냉장고 생산공장 건설투자(투자액 5천만 불) 등을 계기로 한국기업 진출 가능성이 증대될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2018년 6월 IMF 금융지원 등 아르헨티나 경기가 악화되면서 추가 진출은 없는 상황이다. 다만, 2018년 8월 포스코가 아르헨티나 리튬 광권을 2.8억 달러에 인수함에 따라 향후 리튬 공장 건설 및 운영에 필요한 추가 투자가 있을 전망이다.

아르헨티나에는 2021년 현재 22,847명의 교민이 있다. 약 80%의 한국 교포들은 주로 부에노스아이레스시 온세(Once), 아베쟈네다(Avellaneda), 플로레스(Flores, 일명 109촌)등 3개 지역에 밀집해 있다. 한국 교민 대부분이 원단생산, 의류 봉제, 도.소매업, 수입업 등 섬유 및 의류에 관련된 산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아르헨티나 의류시장의 40% 가량을 점유하고 있다. 대체로 중산층 이상의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과 남미 공동 시장(Mercosur) 사이에 무역협정(Trade Agreement) 협상은 2018년에 시작해 현재 7차까지 진행되었다. 한-메르코수르 무역협정(TA)는 남미 최대의 시장을 선점하고, 중남미 지역 내 한국의 자유무역협정(FTA) 네트워크를 완성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KITA). 그러나 아르헨티나가 어려운 경제 상황, 공공 채무 문제 및 코로나19 사태 등을 이유로 2020년 4월 협상 불참을 선언하였다가 입장을 바꾸어 현재 협상에는 참여하고 있으나, 무역 협정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시장 접근 분야와 원산지 규정 분야에는 참가하지 않고 있다.

행정구역

아르헨티나의 행정구역 지도

아르헨티나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 및 총 23개의 주(Provincia)를 포함해 총 24개의 행정구역으로 구성되며 이와 별개로 다시 총 4개의 통합지역 구분이 존재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 및 그 주변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로 이루어져 있다.

노르테그란데 (Norte Grande)

북부 지역을 구성하고 있다.

  • 투쿠만 (Tucumán)
  • 살타 (Salta)
  • 미시오네스 (Misiones)
이과수 폭포가 위치한 곳이다.
  • 차코 (Chaco)
  • 코리엔테스 (Corrientes)
  •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 (Santiago del Estero)
  • 후후이 (Jujuy)
최북단에 위치해 있다. 볼리비아와 국경을 맞대는 곳이다.
  • 포르모사 (Formosa)
  • 카타마르카 (Catamarca)

누에보 쿠요 (Nuevo Cuyo)

중서부에 위치해 있고, 안데스 산맥을 경계로 칠레와 맞닿아 있다.

  • 라리오하 (La Rioja)
  • 멘도사 (Mendoza)
아르헨티나 와인의 산지로 잘 알려져 있다.
  • 산후안 (San Juan)
  • 산루이스 (San Luis)

센트로 (Centro)

말 그대로 중심부. 지도상에서 보면 좀 더 중동부에 가깝다.

  • 코르도바 (Córdoba)
  • 산타페 (Santa Fe)
  • 로사리오 - 체 게바라, 리오넬 메시의 출신지
  • 엔트레리오스 (Entre Ríos)

파타고니아 (Patagonia)

남부에 위치한 주들로 구성되어 있고, 남쪽으로 가면 갈수록 남극과 가까워진다. 거리나 기후적 요인 등으로 가장 늦게 개척, 개발되었고 인구밀도도 상대적으로 낮아 각 주 인구는 주도나 관광도시에 집중 분포한다.

  • 리오네그로 (Río Negro)
  • 네우켄 (Neuquén)
  • 추부트 (Chubut)
  • 라팜파 (La Pampa)
  • 산타크루스 (Santa Cruz)
  • 티에라델푸에고 (Tierra del Fuego, Antártida e Islas del Atlántico Sur)
최남단에 위치해 있다. 전세계 최남단 도시 우수아이아가 이 지역에 있다. 말비나스 제도와 남극 일부도 행정구역으로 포함되는 경우가 있다.

경제

아르헨티나 수출 구조(2019)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앙 업무 지구에 있는 Catalinas Norte는 많은 아르헨티나 기업이 입주한 비즈니스 단지디다.

2022년 기준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세계 23위이고 구매력 평가(PPP) 기준 GDP는 세계 29위(2020년)이며 1인당 구매력 평가 기준 GDP는 2022년 기준 24,312 달러이다. 2020년 총 수출액은 549억 달러이고, 총 수입액은 424억 달러로, 125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달성하면서 세계 수출국 46위, 그리고 수입국 52위를 기록했다. 2019년 기준 아르헨티나 공공부채는 3,231.9억 달러(GDP의 89.4%)이며, 외채는 1,425억 달러(GDP의 69.6%), 외환보유고는 432억 달러를 기록했다. 2020년 5월 5억 달러의 이자를 갚지 못해 역사상 9번째 디폴트 상태에 빠졌고 2000년 이후로 2001년, 2014년에 이어 세 번째이다. 2020년 민간 채권단과 650억 달러 그리고 2022년 국제통화기금(IMF)과 445억 달러의 채무 재조정 협상에 최종 합의함으로써 추가적인 디폴트 위기를 해소하고 장기적인 거시경제 불균형을 점진적으로 줄일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 및 미국의 금리 인상 등 대외여건의 악화로 경제 반등의 기회는 제한적이다.

아르헨티나는 원래 매우 수준 높은 삶의 질을 보장하던 선진국이었으나, 여러가지 원인으로 인해 지속적인 쇠퇴를 겪었고, 오늘날에는 여러모로 경제가 불안한 나라로 분류되고 있다. 1900년대 무렵에는 미국보다 1인당 GDP가 높은 세계 5대 경제 부국이었고 유럽에서 선진부국 아르헨티나로 대거 이민을 왔을 정도였다.[8] 특히 농업대국으로 엄청난 양의 쇠고기와 밀 등을 수출하였다. 1차, 2차 세계대전기에도 중립을 지키며 안정적인 번영을 구가하며 교육이나 복지수준도 높은 선진부유국이었다. 하지만 목축업 등 농업에 치중하다보니 1960년대 이후 점차 선진공업국의 발전을 따라갈 수 없게 되었고 정치적 혼란들이 몰락을 거들어 결국 오늘날의 중진국으로 전락한 것이다.

물론 아르헨티나가 주변 남아메리카 국가들 중에선 삶의 질이 높은 편이긴 하나 실제로는 내부 사정이 좋지 않으며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요소들이 많다. 1970년대 이후 경제위기 조짐이 보일 때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개입을 했는데, IMF가 손을 대면 댈 때마다 오히려 경제가 망하거나, 단기적으로 괜찮아지더라도 시간이 조금이 지나면 더 크게 폭망해버렸다. 지난 40년간 8차례 이상 국가부도를 경험했고, 2020년 들어서 9번째 국가부도 위기에 직면했다.

흔히 한국 언론에서는 복지 포퓰리즘으로 망해버린 나라로 인용되지만, 경제 위기의 실제 가장 큰 요인은 1차 산업 위주의 산업/수출 구조와 20세기 중반의 정치 혼란이라고 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의 경우 2016년에도 가장 큰 수출 품목이 대두 부산물(16.75%)과 옥수수(7.11%), 콩기름(7.07%), 대두(5.73%) 순으로 농산물에 편중되어 있는 상황이다.

2000년대 중후반 경제 회복 과정에서 쌓아올린 게 꽤 되기 때문에 2012년부터 이어진 장기 경기침체에도 실질 임금 수준은 남미에서 가장 높은 축에 든다. 최저임금 뿐만 아니라 실질임금도 남미에서 높은 축에 들기 때문에, 임금수준이 낮은 볼리비아나 파라과이, 페루 등지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일하러 온다. 남미 경제 모범국이라고 칭송받는 칠레나 남미에서 정치적으로 부정부패가 덜하고 가장 깨끗하기로 명성이 높은 우루과이 등 다른 남미의 주변국들보다도 최저임금이 높으며 OECD에 가입한 멕시코보다 최저임금이 약 5배에 달하는 수준이다.

그러나 빈부격차가 매우 크고 부패문제도 심각하다는 문제점도 있으며 인플레이션율이 상당한데다가 2015년 정권 교체 이후로 심각한 재정 적자를 해결하겠다고 공공요금이 폭등하고 있기 때문에 무리한 재정 확장으로 겨우 유지되다시피 한 구매력이 급속히 위축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 대신 달러화가 싸지기는 싸져서 외국으로 물건을 사려고 많이들 오가는 상태. 아닌게 아니라 칠레와 파라과이, 브라질에서 물건사는 것이 훨씬 싸게 먹혀서 쇼핑하려 많이 다니고 있으며, 더군다나 정권 교체 이후로 각종 공공요금과 보험료, 약값 등이 엄청나게 폭증한 탓에 아르헨티나 물가는 선진국 수준으로 비싸졌다는 말이 나오는 판이다.

2018년 6월 들어서 IMF 구제금융을 다시 신청하게 되었다. 상술하다시피 2015년 정권교체 이후로 경기침체를 극복하겠다고 외국자본에 우호적인 정책을 많이 내놓았는데 주로 금융업쪽에 집중투자되고, 제조업이나 IT분야로 별로 흘러들어오지 않아서 중소기업들은 울상이 된데다가 경상수지 적자폭이 대폭 확대되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외채를 남발하고, 그러면서 내수시장은 별로 살아나지 않아서 불안불안하다라는 평이 많았는데 미국이 금리인상을 단행하면서 외국자본들이 대탈출하게 되었고, 결국 버틸 수 없게 된 아르헨티나 당국에서 결국 백기를 들었던 것. 아무튼 아르헨티나 경제는 격랑으로 접어들듯 하다.

결국 8월 터키발 경제위기의 불똥이 튀어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은 45%의 초고금리를 책정하여 화폐 가치를 방어하고 있다. 2018년 8월 기준 아르헨티나 페소-달러의 가치는 연초 대비 38% 하락했으며 2018년 8월 말에 환율불안으로 화폐가치가 이틀에 걸쳐 대폭락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2019년 물가 상승률이 54%에 육박한 것으로 집계됐다. 1991년 이후 최고치이다. 그래도 2020년에 36.1%로 낮춰졌다.

IMF는 아르헨티나 부채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밝혔다. 2020년 8월에 650억달러(약 78조원) 규모 채무 재조정 협상에서 채권단과 합의점을 찾았다. 2021년 6월 22일에 파리클럽과 채무조정에 합의했다.

2022년 1월 13일에 아르헨티나 통계청은 2021년 12월 소비자 물가가 11월보다 3.8% 올랐으며, 2021년 연간 물가 상승률은 50.9%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2022년 3월 25일. 국제통화기금(IMF)이 440억달러(약 53조7천억원) 규모 부채에 대한 아르헨티나 정부와의 합의안을 최종 승인했다.

2022년 후반기를 기준으로 아르헨티나 중앙은행 기준금리는 75%로 올랐다. 미겔 페쉐 아르헨티나 중앙은행 총재는 국회에서 2023년 예산안을 설명하면서 "올해(2022년) 물가상승률은 95%를 기록할 것이며 2023년도에는 60%를 전망한다"고 밝혔다. 아르헨티나 국립통계청(INDEC)은 9월 공식 물가상승률을 14일께 발표할 예정인데 전문가들은 6.7%로 예상하고 있다. 10월 물가상승률은 7% 미만은 어려울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수도세(10%), 전화·인터넷·유선방송(19.8%), 유류비(6%), 의료보험(11.53%) 등 각종 물가 인상이 예고되었고, 9월에 추진하려던 전기세와 가스세의 보조금 삭감이 10월로 미뤄졌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JP모건의 디에고 페레이라는 "2022년도 아르헨티나 물가상승률은 100%를 기록하고 2023년도에는 112%에 달할 것"이라고 현지 경제매체 암비토에 말했다.

산업

멘도사 지방의 포도원. 아르헨티나는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큰 와인 생산국이다.

아르헨티나는 세계 8위, 남미 2위의 국토 면적을 가진 국가로 기후조건이 온화하고 연중 풍부한 강수량 및 일조량을 갖춘 천혜의 농목축업 요지이다. 전 국토의 60%(1억 7,000만 ha)가 농업에 적합한 조건을 갖춘 대평원으로 농목축업이 산업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농목축업 생산의 중추 지역은 팜파스 대평원으로 2020년 기준 농축산업 관련 산업이 국내총생산(GDP)의 약 7.87%를 차지했으며, 아르헨티나의 수출 중 약 60%가 농산물 및 가공 제품으로 농축산업은 아르헨티나 경기의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연간 1억 톤 이상의 곡물을 생산하며, 옥수수는 세계 수출 2위, 대두는 세계 3위, 밀은 세계 4위를 기록하고, 대두 및 대두유를 합치면 세계 1위 수출국이다. 주요 생산품목 중 대두, 옥수수, 대두유, 수수, 해바라기씨, 쇠고기, 포도, 닭고기, 와인, 레몬과 라임 등 다수 품목이 세계 생산량 10위권이다. 아르헨티나는 수출액 기준 세계 11위의 농축산물 수출국이다.

아르헨티나는 19세기 후반에 세계시장에서 활약하여 부유한 나라가 되었는데, 그러한 발전을 가능하게 한 요인은 산업혁명 후 유럽 국가들의 식료품 수요가 급증하였을 때 자국의 진로를 이 거대한 시장의 식료품 공급국으로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제1차 산업국으로서 존립할 수 있는 광대하고 비옥한 국토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인구 대국인 중국과 인도의 급속한 경제성장 및 중산층의 확대로 아르헨티나산 콩 및 콩기름의 수요가 증대함에 따라 전통적인 농사패턴에 변화가 일고 있다. 많은 목축 농장주들이 축산농장을 갈아엎고 콩을 재배하는 등 목장 개조 붐이 불고 있고, 다른 곡물도 콩 재배로 대체되고 있는 추세이다. 콩은 식량원으로서뿐만 아니라 대체에너지원으로서, 특히 바이오디젤 원료로서도 주목받고 있다.

수산업은 고기가 풍부하나 생선 수요가 적어 부진한 편이다. 임업에서는 차코 지방의 케브라초가 타닌의 원료로서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광업은 21세기 들어서면서 아르헨티나 경제에서 중요성이 커졌다. 2019년 광산업 관련 수출은 아르헨티나 총 수출의 7.8%를 차지했으며, 금과 은이 전체 수출의 55.6%, 철강 22%, 알루미늄 16%, 리튬 3.6%, 납이 1.9%를 차지했다. 아르헨티나는 전 세계 리튬 매장량의 85%가 매장돼 있는 리튬 삼각지대에 위치해 있어 세계에서 리튬 매장량이 많은 국가 3위, 그리고 생산국 세계 4위를 기록하고 있다. 파타고니아 지방의 석유, 리오네그로주(州)의 철광석, 파타고니아 지방 남단의 석탄, 파타고니아 북부의 셰일 오일과 셰일가스 개발이 행해진다. 아르헨티나는 세계 6대 광물자원 보유국으로 매장 가능지역의 75%가 아직 미탐사 상태라 개발 잠재력이 매우 크다. 에너지 분야에서도 아르헨티나는 남미 지역 원유생산 3위로 자급자족이 가능하며 천연가스 생산은 남미 1위다.

운송교통

철도

아르헨티나는 1857년에 처음 철도를 건설했으며, 1947년 최대 확장 시기에는 세계에서 열번째로 긴 4만 7000㎞에 달할 정도로 중남미에서 가장 잘 정비되고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규모를 자랑했다. 모든 철도망은 농산물 수출에 부응하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중심으로 팜파스의 방사상(放射狀)망으로 구축됐다. 그러나 페론 대통령 집권기에 국유화된 후부터는 경영의 불합리로 시설개선을 위한 충분한 자재를 확보하지 못하여 노후화하였고 이동량 감소와 유지비용 증가로 1960년대부터 여러 구간이 폐쇄되며 본격적으로 쇠퇴하여 현재 연장선은 18,000㎞(2017년)로 줄었다. 철도 차량의 노후화 및 철도 인프라에 대한 낮은 투자로 인해 최근 몇 년간 화물 이동량은 지속적인 감소추세에 있다.

도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도로(Av. General Paz)

아르헨티나의 도로 시스템은 1930년대부터 철도망을 대체하기 위해 발전하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 도로망의 초기 설계는 부에노스아이레스항을 정점으로하는 방사형의 중앙 집중식 형태를 가졌다. 1960년대에 와서 동서남북 전국을 통합하는 도로망이 구축됐다. 전국 도로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데스산맥을 따라 국가의 중추를 형성하는 40번 국도로 북쪽의 후후이(Jujuy)에서 남쪽 산타 크루즈(Santa Cruz)까지 이어져 있다. 아르헨티나의 도로망의 총 길이는 50,000㎞로 관할권에 따라 국도, 지방도 그리고 지자체도로로 구분된다. 이중 국도는 38,000km이고 도로 포장율은 86.4%이다. 국도는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 산타페(Santa Fe), 코르도바(Córdoba), 라 팜파(La Pampa), 멘도사(Mendoza), 산 루이스(San Luis),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Santiago del Estero), 투쿠만(Tucumán), 살타(Salta), 후후이(Jujuy), 코리엔테스(Corrientes), 차코(Chaco), 미시오네스(Misiones) 등의 13개 주를 가로지르며, 육상교통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고, 9개의 도로 건설 관련 회사가 그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전체 차량의 지방도는 총 길이가 191,673㎞로, 부에노스아이레스주에 31개의 노선이 있으며, 그 길이는 36,582㎞에 달한다. 아르헨티나의 도로 사정은 양호한 편이나, 포장연령이 25년을 초과한 도로가 많아 지방의 경우 보수공사를 필요로 하는 구간이 많다. 현재 정부는 도로망 확충 계획을 지속적으로 시행하고 있지만, 예산 제한으로 인해 도로 보수 및 확장은 수도권인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중심으로 시행되고 있어 북부지방과 남부지방의 도로사정은 상대적으로 좋지 않다. 아르헨티나 공공사업부(2021년)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전체 도로망의 60%는 통과 가능한 상태이고, 40%는 도로에 문제가 있거나 표지판이 없는 열악한 상태에 있다.

해상

해상 운송은 상품 운송에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수로망 길이는 11,000㎞이다. 수로망은 라플라타(La Plata), 파라나(Paraná), 파라과이(Paraguay), 그리고 우루과이(Uruguay) 강으로 구성된다. 주요 강 항구는 사라테(Zárate), 캄파나(Campana) 그리고 로사리오(Rosario)항구이다. 아르헨티나에서 수입되는 대부분의 제품은 바다를 통해 들어오며, 주요 항구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라 플라타-엔세나다(La Plata-Ensenada), 바이아 블랑카(Bahía Blanca), 마르델플라타(Mar del Plata), 케켄 네코 체아(Quequén-Necochea), 코모도로 리바다비아(Comodoro Rivadavia), 푸에르토 데세아도(Puerto Deseado,) 푸에르토 마드린(Puerto Madryn) 그리고 우수아이아(Ushuaia) 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는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항구로연간 150만 TEU를 처리할 수 있으며 연간 약 1,200척의 선박을 수용한다. 그밖에도 파라나(Paraná)강의 산타페(Santa Fé)지역의 67km를 따라 뻗어 있는 업리버(Up-River) 지역에 전체 국가 수출의 50%를 차지하는 17개의 항구가 모여 있다.

항공

영토가 광대하기 때문에 항공은 매우 중요한 교통수단이며, 전국적으로 공항 694개(2022년)가 있다. 상위 10위권 공항은 에세이사(Ezeiza) 국제공항, 부에노스 아이레스 도심에 위치한 호르헤 뉴베리(Aeroparque Jorge Newbery)공항 그리고 지방에 위치한 코르도바(Cordoba), 멘도사(Mendoza), 바릴로체(Bariloche), 엘 팔로마(El Paloma), 푸레르토 이구아수(Puerto Iguazú), 살타(Salta), 네우켄 페론 대통령(Neuquen Presidente Perón) 그리고 투쿠만(Tucumán)공항이 있다. 949년에 건설된 에세이사 공항은 아르헨티나 최대 공항으로 도심에서 35km떨어져 있고 최근 AirHelp Score 2019 평가 에서 10점 만점에 8점 이상을 받아 20위를 차지했다. 에세이사 공항은 2009~2015년 현대화 작업이 수행됐다. 2019년 공항 이용객 수는 1,270만 명을 기록했다.

대중교통

인구의 상당수가 이동을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국가가 운송회사에 교통 보조금을 지급한다. 기차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와 그레이터 부에노스 아이레스(수도권) 지역을 연결하며 매일 백만명 이상이 이용한다. 기차는 오전 5시부터 다음 날 새벽 1시까지 운행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에는 지하철과 프레메트로스(Premétros)로 불리는 트램을 운영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지하철은 A,B,C,D,E,H 총 6개 노선이 운행중에 있으며, 현재 3개 라인(F, G, I)이 추가로 개설될 예정이다. 특히 1913년에 개통된 A 노선은 남미 최초이자 세계에서 13번째로 건선된 지하철 노선이다. 지하철망은 20세기 초반 급속도로 확장됐으나, 2차 세계대전 이후 속도가 둔화되었다. 2021년 한해 지하철 이용객은 91,662,254명에 달했다.

버스는 철도시스템이 몰락하면서 급속도로 성장한 교통수단이다. 장거리 버스 또는 미크로(Micro)는 비행기보다 저렴하고, 근처에 공항이 없거나 정기 여객기가 운항하지 않는 마을이나 도시를 여행할 수 있기 때문에 장거리 여행자들이 선호한다. 버스는 우루과이, 브라질, 파라과이, 볼리비아, 칠레 및 페루의 다른 많은 목적지 외에도 전국 1,000개 이상의 목적지에 도달하는 유일한 교통 시스템이기 때문에 비행기보다 더 연방적인 시스템으로 간주된다. 현재 국가교통규제위원회(CNRT)가 승인한 버스 서비스는 일반 버스(가장 경제적인 클래스), 하프침대(Semi-Cama) 버스, 고급침대(Executive Cama) 버스, 최고급 침대(Suite Cama) 버스 및 승무원이 승차한 버스 서비스로 유형화 된다. 기내 서비스에는 일반적으로 따뜻한 식사와 차가운 식사, 영화 프로젝션, 음료, 에어컨 및 기타 편의 시설이 포함된다. 일반적으로 하프침대 버스 중 가장 저렴한 서비스는 시내의 모든 버스 터미널에 정차하며, 상위 카테고리의 서비스는 지정된 정류장에서만 정차한다. 최상위 카테고리 서비스는 높은 수준의 편안함과 기술로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최근에는 와이파이 인터넷, 개별 LED 스크린과 같은 온보드 서비스 등의 편의 시설이 제공된다.

무역

아르헨티나는 국내총생산(GDP)에서 대외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30.5%(2020년)이며, 국제무역에 상대적으로 폐쇄적이다. 주된 아르헨티나의 수출품은 전통적으로 농산물이다. 그러나 정부는 보호무역주의를 축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미-중 무역 전쟁에서 실리주의를 추구하고 있다. 주요 수출품은 석유 잔류물 및 기타 고체 잔류물(13.7%), 옥수수(11%), 대두유 및 대두(10.8%), 육류(3.8%), 밀 및 호밀(3.7%)이다. 아르헨티나의 주요 수입품은 대두(4.7%), 자동차 부품 및 액세서리(3.9%), 자동차 및 기타 자동차(3.8%), 유선 전기 제품(3.4%), 석유 가스 및 기타 가스 탄화수소(2.8%)이다.

2021년 기준, 아르헨티나의 주요 수출 대상국으로 1위는 브라질(15.1%) 2위 중국(7.9%), 3위 미국(6.4%), 4위 인도(5.5%), 5위 칠레(5.4%)이며 한국(2.2%)은 11위를 기록하였다. 주요 수입대상국은 1위 중국(21.4%), 2위 브라질(19.7%), 3위 미국(9.4%), 4위 파라과이(4.6%), 그리고 한국(1%)은 19위로 나타났다. 브라질은 수년간 아르헨티나의 최대 교역 상대국이었지만,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과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의 이념적 차이로 양국 관계가 악화됐다. 더욱이 메르코수르는 취약한 제도적 구조와 구성원 간의 이념적 차이로 인해 약화되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에 따르면 아르헨티나는 2020년에 548억 달러를 수출했고 423억 달러를 수입했다. 서비스 부문에서 116억 달러를 수입하고 920만 달러를 수출했다. 전체적으로 수입은 전년 대비 18.1%, 수출은 17.7% 감소하여 세계 무역수지는 144억 달러를 기록했다. 아르헨티나는 유엔 중남미·카리브경제위원회(ECLAC/CEPAL), 세계무역기구(WTO), 남미 공동 시장(Mercosur), 국제통화기금(IMF), G15, G20, G24, G77, CPI 등 국제 경제 기구의 회원국이다.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좌파 정부 들어 보호무역주의 성향이 뚜렷해지면서 현지 생산이 가능한 품목에 대해서는 수입 규제를 심화하는 추세이다. 특히 자동차, 가전제품 등 현지에서 조립 생산되고 있는 제품에 대해서는 완제품 규제를 강하게 적용하고 있다.

인문사회

인구와 민족

아르헨티나의 인구는 2022년 기준 47,327,407명으로, 남아메리카에서 브라질, 콜롬비아에 이어 세 번째로 많다. 인구밀도가 1㎢당 16명에 불과해 전체 인구밀도의 1/3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며, 인구 1,000만 명이 넘는 중남미 국가 중 인구밀도가 가장 낮다. 인구 대부분은 팜파스(Pampas)라고 불리는 동북부 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특히 부에노스아이레스 수도권(Área Metropolitana de Buenos Aires)에 전체 인구의 38%에 달하는 약 1,800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전체 인구의 약 92%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어 라틴아메리카에서 도시화율이 가장 높은 국가에 속한다.

2022년 5월에 실시한 인구조사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인구는 2010년에 비해 18% 증가했으며, 2001년보다 30% 증가하였다. 남성은 전체 인구의 47.05%, 여성은 52.83%, 제3의 성은 0.12%이다. 2020년 기준으로 평균수명은 77세(남자 73.41세, 여자 80.12세)이고, 60세 이상 인구의 비중이 15.5%로 중남미 국가 중에서는 인구노령화가 진전되고 있는 국가에 속한다. 인구 추계에 따르면 2030년 경 아르헨티나의 전체 인구는 4,932만 명, 2050년쯤에는 5,523만 명에 도달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2020년 기준으로 인구 1천 명당 출생률은 11.8%이고 여성 1인당 자녀 수는 1.55%로 감소 추세에 있다.

1906년에 건설되어 수많은 새 이민자를 맞아주던 "이민자 호텔"은 이제 국립 박물관이 되었다.

아르헨티나의 민족구성은 아르헨티나를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국가들과 구별짓는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이다. 아르헨티나는 1850년~1955년 사이 국토개발과 노동력 확보를 목적으로 대량의 유럽 이민자를 받아들였고, 그 영향으로 아르헨티나 주민의 97%는 유럽계 백인인데, 주로 이탈리아계, 스페인계(系), 등의 남유럽인이 많고 그밖에 독일계, 네덜란드계 등 북서 유럽계도 있다. 나머지 3%를 메스티소와 원주민인 인디오가 차지하고 있으며, 흑인은 거의 없다. 21세기에 들어와 가장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이민자 집단은 중국계로 현재 120만 명이 아르헨티나에 거주하며, 이는 볼리비아, 파라과이, 페루에 이어 네 번째로 큰 이민자 집단이다.

언어와 종교

아르헨티나에는 법적으로 규정된 공식 언어가 없으며, 과거 스페인의 식민 지배의 유산으로 스페인어가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스페인어는 로망스어 군 언어의 하나로 북 스페인에서 기원하여 카스티야 왕국에서 확산했으며, 현재 스페인과 다수의 라틴아메리카, 그리고 적도 기니의 공용어로 20개국이 제 1언어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스페인어는 유엔의 여섯 개의 공식언어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약 4억 5천만 명의 인구가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는 중국어 다음으로 많고 로망스어 군에 속하는 언어 중에서는 가장 많은 숫자이다. 아르헨티나의 스페인어는 '보세오(voseo)' 즉 'vos'를 2인칭 대명사로 사용하는 방언으로 리오플라텐스 스페인어(rioplatense spanish)로도 알려져 있다.

스페인어 다음으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언어는 영어(280만), 이탈리아어(150만), 아랍어(100만), 독일어(40만), 이디시어(20만), 카탈루냐어(17.4만)가 있다. 유럽 언어 외 36개 토착 원주민 부족의 약 70만 명이 약 16개의 원주민 언어를 사용한다. 가장 널리 사용되는 6개의 토착 언어로 마푸체(Mapuche), 케추아(Quechua), 과라니(Guaraní), 콤/토바(Qom/Toba), 위치(Wichí) 그리고 아이마라(Aymara)가 있다.

아르헨티나는 헌법에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헌법에서 로마가톨릭교회의 특권을 보호하며, 법률에 따라 국가는 가톨릭교회에 정부 예산을 지원한다. 국가 과학기술연구위원회(National Scientific and Technical Research Council: CONICET)가 2019년에 실시한 종교적 신념 및 태도에 관한 전국 조사에서 가톨릭 62.9%, 복음주의 개신교 15.3%, 무교 18.9%로 나타났다. 최근 아르헨티나 종교에서 가톨릭 신자는 감소하는 반면 개신교는 증가하는 추세이다.

2021년을 기준으로 유엔개발계획(UNDP)의 인간개발지수(HDI)는 0.842로 조사대상국 191개국 중 47위를 차지하여 남미국가 중 2위를 기록하였다.

교육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 법학부

아르헨티나의 교육 체제는 유아교육(2~5세), 일반 기초교육(9년), 중등교육(3년), 대학(5년)으로 나누어진다. 의무교육은 예비초등과정(Preescolar) 1년, 초등과정 6~7년, 중·고등과정 6~5년으로 총 13년이다. 중등교육은 본인의 진로에 따라 진학과 기술, 상업 등의 과정을 선택하여 진학한다. 대학은 약 4백여 개가 있으며 철저한 졸업 정원제로 입학 학생의 20% 정도만 졸업한다. 2004년 기준으로 성인의 문맹률은 2.8%로 남미 전체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초등교육은 의무적이며 무상이다. 중등 및 고등 교육은 무료 공립학교와 국가에서 지원하는 사립학교에서 제공된다. 아르헨티나의 고등교육은 1976~1983년 군사 정부 의 검열 및 기타 제한으로 인해 심각한 방해를 받았지만 민간 정부가 집권한 후 시스템 복원 노력이 이루어졌다. 1613년에 설립된 국립 코르도바 대학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이며, 1821년에 설립된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교가 가장 규모가 크다. 다른 주요 국립 대학은 멘도사대학교(Universidad de Mendoza), 라플라타대학교(Universidad de La Plata), 로사리오대학교(Universidad de Rosario, 산 미겔 데 투쿠만 대학교(Universodad de San Miguel de Tucumán), 부에노스아이레스 공대(Universidad Tecnológica Naciona) 등이 있다.

1990년대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이 추진한 규제완화 및 민영화 정책의 영향으로 1992년부터 아르헨티나 중학교의 행정과 재정은 지방정부의 책임이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연방정부의 분담금이 증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시기 연방교육법을 통해 기본일반교육 그리고 다중형태의 교육 등 다양한 교육 모델이 실행됐다. 1993년 교과과정 개혁 ​​이후 교육부는 국가 헌법에 따라 국가 교육 시스템의 통합과 관할권의 다양성을 제안했다. 그로 인해 각 지방마다 고유한 스타일과 내용의 교육과정을 갖게 됐다. 최소 수업 일수는 180일이다.

인권

아르헨티나는 중남미 최초로 2010년 동성결혼을 합법화하였고 2021년에는 신분증에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 3의 성별 "X" 표기를 허용했다. 그리고 동성결혼과 성전환자의 성별전환이 합법이다. 공공부문 일자리의 1%는 성전환자에게 할당해야 한다. 아르헨티나 사회는 젊은층을 중심으로 특정 성별을 지칭하지 않는 성중립 언어의 사용이 확산되고 있다. 성별 구분이 있는 스페인어는 남성형 명사에 주로 'o'를 쓰고 여성형 명사에는 'a'를 쓰는데, 이를 성별을 표시하지 않는 'e'나 'x'로 바꾼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지난 군사독재(1976~1983) 기간 자행된 범죄와 관련하여 2018년 11월 기준으로 3,007명을 기소하여 867명이 유죄 판결을 내렸고, 유괴된 아동 128명을 찾아 이중 상당수를 가족과 재회시킴으로써 국가폭력에 의한 인권침해 문제 해결에 있어서 모범적인 국가로 평가된다. 아르헨티나는 1991년 중남미 최초로 국회의원 선거에서 30%의 여성할당제를 법으로 정하여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고 의회에서 여성의 정치적 대표성을 크게 확대하였으며, 중남미 다른 국가들의 할당제 도입 확산에도 영향을 미쳤다.

2020년에는 '자발적 낙태의 허용에 관한 법안'이 의회를 통과함으로써 그동안 종교계의 반발로 금지됐던 낙태가 합법화 됐다.

노동법

아르헨티나는 페론주의의 영향으로 노동 복지를 중시하며 노동법이 매우 까다로워 노동자 해고가 어려운 나라이다. 임금 관련 한 달 월급을 보너스 명목으로 1년에 두 번으로 나눠서 지급해야 하며 근로자는 유급병가를 최대 12개월까지 사용 가능하다. 근무시간은 주당 48시간이며 1일 최대 9시간이다. 초과근무 수당은 주중에는 50% 추가되며 주말이나 공휴일 근무에 대해서는 100% 초과수당을 지급해야 한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달 급여에 해당하는 보너스를 13번째 급여로 지급한다. 월 급여 이외 연 2회(6월, 12월)에 월급의 50%를 보너스로 지급해야 한다.

정당한 해고사유는 근로자의 횡령, 폭력 또는 심각한 오류행위 등이다. 이외 다른 사유로 해고하게 되면 부상해고에 해당하여 법으로 정한 보상금을 지급해야 한다. 보상금을 지급할 경우 근로자와 노동부청사를 방문하여 합의서에 서명을 한다. 정당한 해고라 해도 위에서 언급한 해고 사전통지 기간을 준수하지 않을 경우, 법으로 정한 보상금을 지급한다. 소송이 발생하면 대부분의 경우 근로자에게 유리한 판결이 내려지는 경향이 있다.

아르헨티나의 연금제도는 아르헨티나 사회보험의 당연적용대상으로는 근로자 및 자영업자가 있으며, 임의적용대상자로는 성직자, 가사근로자 및 전문적 주정부제도에 가입한 사람입니다. 적용제외대상자는 군인 및 보안경찰, 경찰, 외국에서 고용되어 2년 이내 근로하고 외국제도에 가입한 기술직 근로자, 18세 미만자 등이다. 특별제도 대상자는 군인, 보안인력, 경찰, 일부 주 및 지방 자치제 공무원, 대학교수, 교사, 외교관, 과학분야 연구원, 사법기관, 가사노동자, 농촌근로자가 포함된다.

아르헨티나는 사회복지제도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현재 사회보호는 보편적이지 않지만 인구 대부분의 다양한 사회적 위험을 포괄하는 제도와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도시화

아르헨티나는 2020년 인구의 92%가 전국의 약 1,000개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인구밀도는 낮지만 도시화율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중 하나이다. 국가 전체 인구의 절반이 부에노스아이레스 수도권(AMBA), 코르도바, 로사리오, 멘도사, 산 미구엘 데 투쿠만 5개 도시에 거주한다. 국가 통계에 따르면 아르헨티나에서 인구가 150,000명을 넘는 도시는 24개이며, 2,000~10,000명의 도시는 675개 있다(2017년). 대도시는 공통적으로 이웃 간의 사회 경제적 불평등, 대중교통 관리, 환경 균형 및 기본 인프라 서비스 접근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문화

아르헨티나는 중남미 속의 유럽(유럽 문화 중심)이라 불린다. 주로 유럽문화를 계승했으나, 원주민과 아프리카계의 음악, 문학, 생활양식도 섞여 있다.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의 영향이 독특하게 결합된 문화적 용광로, 흔히 다문화·다민족 국가로 정의한다. 이민국이라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는 아르헨티나는 문화적 다양성을 보호하고 보존하기 위해 매년 10월 12일을 다문화의 날로 정해 기념한다.

세계 3대 오페라 하우스 중의 하나인 떼아뜨로 꼴론(Teatro Colon)을 비롯, 오페라, 발레, 연극, 영화, 클래식 음악, 미술 전시 등 200여 개가 넘는 중남미 최대의 문화 공연 시설을 가지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민속춤은 '까르나발리또(carnavalito)' '삼바(zamba)' '가또(gato)' 등이 있는데 특히 '탱고(tango)'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문학

아르헨티나의 본격적인 문학은 독립 후의 혼란기에 낭만주의가 대두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탄압 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묘사한 소설 <아말리아>로 유명한 호세 마르몰(1817-1871), 문화사의 고전 <파쿤도, 문명이냐 야만이냐>의 저자인 도밍고 파스티노 사르미엔토(1811-1888)도 있으나, 이 시기의 문학을 대표하는 것은 누가 무어라 해도 가우초(gaucho)의 시(詩)로 초원에 사는 소치기(飼牛)의 생활을 낭만적으로 노래한 것이다. 에스타니슬라오 캄포(1834-1880)는 소박한 소치기의 상징<파우스토>를, 호세 에르난데스(1834-1886)는 국민적 서사시 <마르틴 피에로>를 남겼다. 현대시는 근대파의 레오폴도 루고네스(1874-1938)에서 비롯되는데 보다 대담한 전위시, 특히 초현실주의로 이행되어갔다. 산문으로는 가우초에 대한 향수(鄕愁)를 선명한 이미지로 묘사한 소설 <돈 세군도 솜브라>의 저자 리카르도 구이랄데스(1886-1927), 자연주의적 소설로 이름이 난 마누엘갈베스(1882-1962), 현대 세계에 있어서 인간의 고립을 테마로 하는 에세이스트 에두아르도 마예아(1903-1982), 환상적 단편소설의 명수(名手)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 1976년 발표한 <거미여인의 키스>가 대표작인 마누엘 푸익(1932-1990), 역사소설 <돈 마리오의 영광>의 작자 엔리케 라레타(1875-1961) 등이 대표적 작가들이다.

스포츠

리오넬 메시

아르헨티나는 세계적인 축구 강국이다. 아르헨티나는 FIFA 월드컵이 처음 생길때부터 이미 세계적인 축구강국이였으며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은 첫 FIFA 월드컵인 1930년 월드컵에서는 이미 당대 최강인 우루과이에 이어 준우승을 차지할 정도의 강호였다. 하지만 극심한 선수유출 속에서 193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계속적인 쇠락의 길을 걸어왔으나 FIFA에서 두 개 이상의 국가대표팀에서 뛸 수 없도록 규정을 변경한 이후가 되어서야 1978년 FIFA 월드컵에서 제 기량을 다 발휘할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로부터 선수를 빼돌려서 자국 팀으로 주로 사용한 나라로는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이 있다. 특히 이탈리아는 아르헨티나로부터 루이스 몬티, 엔리케 과이타, 라이문도 오르시 등의 스타플레이어급 선수들을 뭉텅이로 빼가서 1934년 FIFA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바가 있다. 그래서 아르헨티나는 1978년, 1986년, 2022년 월드컵에서 우승하였고, 1978년엔 자국에서 월드컵을 개최하기도 했다. 아르헨티나는 FIFA 월드컵 결승전에 6번 진출해 3번 우승했는데 FIFA 월드컵에서 3번 이상 우승한 팀으로는 브라질(7전 5승 2패), 독일(8전 4승 4패), 이탈리아(6전 4승 2패), 아르헨티나(6전 3승 3패) 등 4개국밖에 없다. 하계올림픽에서 역시 발군의 성적을 보여줬는데 특히 2004년 하계 올림픽과 2008년 하계 올림픽에 연속으로 우승한 점은 주목할 만 하다. 거기에 그냥 잘하는 수준이 아니라 축구 선수의 인적자원 수준이 세계최고이며 디에고 마라도나, 리오넬 메시 등 인류 역사상 더 이상 찾기 힘들 불세출의 축구영웅들을 많이 배출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FIFA월드컵 개최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2030년 FIFA 월드컵을 초대 월드컵 개최국인 우루과이와 같이 공동개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탱고와 음악

아르헨티나는 탱고의 발상지로, 탱고는 19세기 말에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의 변두리 동네인 보카(Boca) 지역에서 힘든 삶을 살았던 유럽과 농촌 이주민들의 정체성과 꿈과 자유에 대한 갈망이 담긴 문화이다. 탱고는 쿠바에서 건너온 아바네라와 칸돔베의 흑인 리듬과 음악 및 아프리카 춤인 탕가노(Tangano), 유럽의 왈츠, 그리고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빈민가에서 유행했던 2박자의 춤과 음악인 밀롱가가 결합된 문화이다. 초기에는 빈층민의 저속하고 상스러운 문화로 멸시 받았으나, 상류층에게 전달되고 유럽 사교계에서 소비되면서 다시 아르헨티나로 들어오며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대중문화의 상징이 됐으며 또 다시 미국과 유럽으로 재진출하는 과정에서 에로틱한 요소들이 완화되고 고상하고 고급스럽게 발전했다. 한때 하층민의 문화로 천대받고 금기시 됐던 탱고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는 척도가 되었다. 점차 고급 살롱과 무도회장에서 추는 살롱탱고(Tango Salon)가 발전하였고, 현대적인 아르헨티나 탱고의 바탕이 되었다. 1910년대 이전까지 정열적인 춤과 연주곡이 전부였던 탱고에 가사를 붙여 노래로 만들었던 카를로스 가르텔(Varlos Gartel)과 기존의 탱고에 클래식과 재즈를 결합하여 '누에보 탱고'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아스트로 피아졸라(Astro Piazzolla)로 인해 탱고의 대중화와 세계화가 이루어졌다.

아르헨티나 탱고는 춤과 노래로서의 문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탱고는 여성의 인권 신장을 반영하기도 하고, 단순히 성적인 의미가 아니라 문화와 노동의 발생근원으로서의 에로티즘을 드러내기도 한다. 또한 탱고는 중장년층에게 훌륭한 여가생활이라 는 의미를 가진다. 현재 탱고는 유네스코에 의해 인류무형문화유산(PCI)으로 지정되었다.

음악으로는 탱고 외에도 삼바·차카레라 등 인디오의 전승과 에스파냐풍의 혼합인 아르헨티나 특유의 아름다운 리듬이 있다. 또한 세계 3대 오페라 하우스 중의 하나인 떼아뜨로 꼴론(Teatro Colon)을 비롯하여, 오페라, 발레, 연극, 영화, 클래식 음악, 미술 전시 등 200여 개가 넘는 중남미 최대의 문화 공연 시설을 갖추고 있다. 페스티벌 시즌에는 유럽 일류 예술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가우초

가우초는 지리적으로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브라질의 히우그란지두술주, 볼리비아의 남동부, 칠레의 로스라고스 지역을 포함하는 남미 지역의 목동 또는 소작농을 가리킨다. 가우초는 농촌의 목축업이 발달하기 시작한 17세기에 등장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가우초 문학이 인기를 얻었는데, 호세 에르난데스의 《엘 가우초 마르틴 피에로(El Gaucho Martin Fierro)》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가우초 문화는 문학뿐 아니라 음악, 춤, 예술, 연극 등에서 매우 독특한 표현 양식을 낳았다. 평원, 말, 기타, 마테, 쇠고기뿐 아니라 농촌생활과 관련이 있는 연대, 충성, 환대 및 용기의 가치가 중요한 소재가 됐다. 한편, 가우초의 요리법인 숯불에 구운 소갈비 요리인 '아사도(Asado)'는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요리로, 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다. 가우초는 팜파스 지역에서 더 큰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

동영상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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