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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27일 (수) 19:39 판

스페인 위치
아스투리아스주 위치

아스투리아스주(스페인어: Comunidad Autónoma del Principado de Asturias, 아스투리아스어: Principau d'Asturies)는 스페인의 광역자치주이다. 350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1]

개요

아스투리아스주의 면적은 10,604㎢이며 스페인 전체 면적의 2.1%를 차지한다. 인구는 1,018,784명(2020년)이다. 주도는 오비에도(Oviedo)이다.

아스투리아스 지방의 주기. 십자가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건립한 펠라요가 코바동가 전투에서 가지고 있다가 승리했다는 전승에 따른 것이다. 이 십자가는 이후 알폰소 3세가 오비에도로 수도를 옮기면서 원래 나무로 되어 있던 십자가를 황금과 보석으로 치장하여 오비에도 대성당에 두었다. 십자가 아래쪽의 두 글자는 알파와 오메가. 그 유명한 요한의 묵시록 1장 8절의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라는 구절을 형상화한 것이다.

가장 큰 도시는 히혼으로 주도와 히혼에 지방 인구의 거의 절반이 살고 있다. 철광석과 석탄이 많이 생산되어서 철강업이 과거에는 매우 번성했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세계 시장에서의 경쟁력에서 밀리게 되었고 카스티야와는 거리가 꽤 멀어서 지역 경기가 매우 쇠락하게 되었다. 최근에는 건축업, 관광업 등의 서비스업이나 소수의 어업낙농업으로 지역을 꾸려나가는 듯. 이 지역의 대표적인 축구 팀으로는 스포르팅 히혼과 레알 오비에도가 있고 양 팀이 이루는 더비를 아스투리아스 더비 매치라고 부른다. 현재는 스포르팅 히혼이 강팀으로 사실 90년대까지만 해도 레알 오비에도가 우세했지만 현재는 역전되어 히혼이 라리가에, 오비에도는 세군다와 세군다 B를 넘나드는 신세가 되었다. 다만 오비에도가 유스 시스템이 좋은 편이라 미래를 기대해 볼만한 상태다.

스페인 내에서는 역사가 제일 오래된 지방이면서도 비교적 한적하고 개발이 안 된 산골 지방이라는 이유로 신비로움을 간직한 동네로 통한다. 아스투리아스 지방 사람들도 카탈루냐나 바스크 지방 같은 본격적인 분리주의는 없지만 나름 레콩키스타가 시작한 스페인 최고의 고도고 반골문화를 좋아하는 스페인인들 취향 상 옛날부터 반란군들이 들끓었다는 이유로 상당히 자기 지방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물론 이건 지역적 정체성이 강한 스페인 전역에 해당되는 소리지만 아스투리아스 사람들은 거친 산악인들의 순수한 강인함을 아직도 지니고 있다고 자부한다. 전반적으로 근대적 의미에서 일단 통용되는 카스티야 중심주의적 관점에서 스페인의 역사적 중심은 아스투리아스->레온->카스티야->단일 스페인 왕국으로 발전했으니 유서 깊은 지방으로서 많은 스페인인들이 막연하게 동경하고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백두산-개마고원의 포지션에 해당한다. 스페인이 철도나 버스로 섬 지역을 제외한 전국이 다 연결되어 있고 땅덩어리도 그렇게 크지는 않은 국가지만 기후나 지형이 스페인인들의 생활패턴과 안 맞는, 날씨가 우중충하고 쌀쌀한 산지여서 레콩키스타가 시작한 후 조금이라도 이베리아 반도를 가톨릭 측에서 탈환하자마자 바로 그나마 덜 우중충한 레온으로 역사의 중심지가 바로 이동해서 막상 아스투리아스 자체가 상징적 의미 외로 번영한 적은 거의 없고 역사 대부분 인구나 개발 정도도 스페인에서 가장 오지인 편이었기 때문이다. 2020년대 21세기 관점에서 보면 스페인 국내 관광지로 어마어마한 호응을 받으며 인구도 많이 유입되고, 적어도 안달루시아, 양 카스티야 같이 진짜 제대로 폭망한 지방들에 비해선 확실히 인구나 지역경제나 전혀 전국 평균에서 후달리지 않게 되었다.

지금까지 기록된 레콩키스타의 역사 자체가 11세기 톨레도 수복과 카스티야, 아라곤 등의 강력한 봉건 국가들이 성립하기 전에는 거의 신화나 전설 수준의 단편적인 기록밖에 없기 때문에 저런 역사적 의미도 상징성이 강하지 아스투리아스가 확실하게 실체가 확인 가능한 역사 속에서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가 된 적은 없다. 스페인인들이 좋아할만한 자연환경이 아니라서 지방에 살려고 하는 사람은 적어도 여름 휴가 때 피서휴양하러 올라오는 내국인 관광객만큼은 많다. 스페인인들이 지중해 기후 특유의 맑고 상쾌한 하늘을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카스티야와 안달루시아의 여름은 시에스타 시행이 당연할 정도로 햇살이 살인적으로 내려쬐는데다 물도 부족해지기 때문에 오히려 우충충한 북대서양 연안이 더 낫다는 모양이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오늘의 스페인 왕세자의 명칭이 프린시페 데 아스투리아스, 즉 아스투리아스 공이며 아스투리아스 공은 비주권군주로서 아스투리아스 주의 군주로 군림하고 있다.[2][3]

자연환경

해안선은 단조롭고 평야는 좁으며 남쪽은 메세타(스페인 중앙고원)의 북쪽 한계인 칸타브리아 산맥을 등지고, 서쪽은 산지를 사이에 두고 이베리아반도의 북서쪽을 차지하는 가르시아주와 접해 있다.

동쪽만이 좁은 해안 지대를 통하여 칸타브리아지방의 산탄데르와 연결된다. 비스케이만에 면해 있기 때문에 기후는 편서풍의 영향을 받아 온난 다습한 해양성 기후를 나타내며, 연강수량도 1,000mm 이상이다. 칸타브리아산맥에서 흘러내리는 하천은 모두 짧고 깊은 협곡을 형성하고, 하류에 작은 선상지를 발달시킨 곳도 있다.

역사

아스투리아스 왕국

711년 과달레테 전투에서 무슬림군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서고트 왕국이 무너진 뒤, 이베리아 반도 전역은 10년도 채 안 되어 무슬림군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이때 아스투리아스 지역 역시 별다른 저항없이 무슬림 세력에 귀순했다. 그러나 아랍 지배자들이 기독교도들에게 지즈야를 가차없이 거둬들이고 개종하더라도 여전히 지즈야를 거두는 등 차별 대우를 일삼자, 주민들은 아랍의 지배에 점차 반감을 품었다. 이때 펠라요라는 인물이 무슬림의 억압으로부터 기독교를 수호하자며 들고 일어났다.

펠라요의 생애와 경력에 대한 주요 기록은 9세기 후반에 아스투리아스 왕국에서 쓰여진 2편의 라틴어 연대기이다. 첫번째는 880년대에 집필된 알베덴세(Albeldense) 연대기로, 고대부터 9세기까지 히스파니아의 역사를 다뤘다. 또 하나는 10세기 초에 집필된 알폰소 3세 연대기로, 2개의 사본이 전해지는데 몇 개의 주요 구절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9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코디체 드 로다(Códice de Roda)는 나바라 왕국과 인근 국가들에 대한 고대 사본이 들어있는데, 여기에도 펠라요에 대한 정보가 간략하게나마 들어있다.

알베덴세 연대기에 따르면, 펠라요는 서고트 왕국 갈리시아 공작이었던 파빌라의 아들로, 파빌라가 에기카 왕의 궁정에서 고관으로 일하다가 새 국왕 위티자에게 살해되었고, 펠라요는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에 위치한 아스투리아스로 피신한 뒤 그곳에서 세력을 구축했다고 한다. 알폰소 3세 연대기에 따르면, 펠라요는 친다수윈트의 손자이며, 아버지 파빌라는 위티자에 의해 코르도바에서 눈이 멀었고 펠라요 본인은 톨레도에서 추방되어 아스투리아스로 망명했다고 한다.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기록의 신빙성에 의문을 표하며, 펠라요가 아스투리아스 토착민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우선, 그들은 펠라요(Pelayo)가 게르만어가 아니라 라틴어 팔라기우스(Pelagius: 해양)에서 파생되었는데, 이는 그의 기원이 로마화된 히스파니아인이라는 것을 암시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알폰소 3세 연대기에는 펠라요의 모계 증손자인 알폰소 2세가 증조부로부터 산타 마리아 데 텐시아나 교회를 물려받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펠라요가 중앙 정계에 있다가 숙청을 피해 아스투리아스로 망명했다면 이런 재산을 가지고 있을 수 없다며, 펠라요의 집안은 옛날부터 아스투리아스에 정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리고 일부 아랍 연대기에서는 펠라요를 'Belay al-Rumi', 즉 '로마인 펠라요'라고 지칭하는데, 이 역시 그가 고트인이 아니라 로마인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라고 본다.

그러나 다수의 학자들은 이러한 주장은 억측이라고 간주한다. 기독교와 무슬림을 포함한 많은 출처에서 펠라요의 기원을 고트인으로 밝혔으며, 고트인과 로마-히스파니아인이 섞여 산 지 수백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이름의 기원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고, 아랍 문헌에서 언급되는 'Rumi'라는 단어는 기독교를 신봉하는 서방인들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펠라요가 중앙 정계에서 활동했더라도 아스투리아스에 재산을 별도로 가지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니 단순히 이것만 가지고 펠라요가 원주민 출신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본다. 다만 학자들은 펠라요가 서고트 왕족일 가능성은 기록상 모순된 점이 많아서 높게 볼 수 없고, 레콩키스타의 발판을 마련한 그를 후대에서 미화하기 위해 지어진 이야기라고 간주한다.

9세기경 익명의 모사라베(Mozarabs: 무슬림이 통치하는 이베리아 반도에 거주하는 그리스도교인)의 기록에 따르면, 서고트인들은 아스투리아스 산맥으로 피신한 뒤 718년경에 펠라요를 지도자로 선출했다고 한다. 펠라요는 아스투리아스 칸가스 데 오니스에 본부를 세우고, 우마이야 왕조에 대한 봉기를 선동했다.

720년, 대규모의 이슬람군이 투입되어 아스투리아스 산맥을 장악하였고, 펠라요는 여러 차례 패배한 뒤 산 속 깊숙이 숨었다. 이때 그를 따르는 병력은 아마도 300명 미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침략군이 세운 숙영지를 종종 습격하고, 보급물자를 싣고 가던 마차를 탈취하고, 고급 장교를 암살하는 등 저항을 꿋꿋이 이어갔다. 때마침 이슬람 지배자들이 지즈야를 2배 인상하는 조치를 취한 것에 반감을 품은 기독교 신자들이 호응하였고, 아스투리아스 일대를 다스리던 무슬림 관리는 안전을 위해 피신해야 했다.

이슬람 세력은 처음엔 산악 지대에서 일어난 소규모 저항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721년 7월 9일 피레네 강을 건너 프랑크 왕국을 침공한 이슬람군이 툴루즈에서 아키텐 영주 오도에게 패배한 사건이 벌어졌다. 원정군을 파견한 왈리(wali: 아랍인 주(州) 장관) 움바사 이븐 수하임 알 카르비는 패배로 인해 떨어진 군대의 사기를 올리는 차원에서 아스투리아스의 반란을 진압하기로 했다.

722년 여름, 우마야드 왕조군 지휘관 알 카마와 무누자가 진압군을 이끌고 아스투리아스 산맥으로 출동했다. 병력 규모가 얼마나 되는 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천 명 이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펠라요와 그의 소규모 부대는 깊은 산속으로 후퇴하다가 코바동가 마을 인근의 좁은 계곡에 숨었다. 그곳은 길이 무척 좁고 지형이 험준해서, 수적 우위를 활용하여 공격하는 게 불가능했다. 펠라요는 이곳에 병사들을 매복시키고 적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이슬람군이 협곡에 들어서자, 협곡 양쪽에 숨어 있던 펠라요의 전사들이 화살을 퍼부어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슬람군은 급히 퇴각했지만, 곧이어 들이닥친 고트족 군대에 의해 거진반 궤멸되었다. 지휘관 알-카마 본인은 퇴각하던 중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코바동가 전투 소식을 접한 아스투리아스 산맥 거주민들은 펠라요의 군대에 즉시 가담했다. 펠라요는 여세를 이어가 고원을 행진하던 무누자의 군대를 습격했고, 무누자는 올라리스에서 전사했다. 이후 펠라요가 히혼 시에 무혈 입성하자, 인근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펠라요의 군대에 합류했다. 하지만 그는 아랍군의 예상되는 보복에 대처하기 위해 히혼 대신 기존에 본부로 삼았던 칸가스 데 오니스에 궁정을 세우고 산악 지대에 은신한 채 아랍군과의 교전을 회피했다.

그 후 펠라요는 19년간 통치하다가 737년에 사망했다. 뒤이어 아들 파빌라가 아스투리아스 왕위에 올랐다. 아내 프롤루바와 함께 수도 칸가스 데 오니스에 산타 크루즈 성당을 봉헌했다.

세바스찬 연대기에 따르면, 파빌라는 사냥을 무척 좋아했고 국정을 소홀히 했다. 그러던 739년 곰을 사냥하려 했다가 곰에게 찢겨 죽었다고 한다. 이후 파빌라의 누이 에르메신다의 남편이자 칸타브리아 공작 페드로의 아들인 알폰수가 알폰수 1세로서 왕위에 올랐다.

740~743년 베르베르 대항거로 알안달루스 전역이 혼란해지자, 알폰수 1세는 이때를 틈타 갈리시아와 포르투갈 북부에 대한 공세를 감행했다. 알폰소 3세 연대기에 따르면, 알폰수 1세는 사모라, 아빌라, 아스토르가, 레온, 시만카스, 살다냐, 아마야, 레벤다, 카르보라리카, 아베카, 세니케로, 그리고 알레산코를 공략하고 그곳에 있는 아랍인들을 주살하고 기독교인들을 아스투리아스 왕국으로 데려갔다고 한다. 이후 무슬림들의 예상되는 반격을 저지하기 위해 두에로 강과 칸타브리아 산맥 사이의 지역을 완전히 황폐화했다. 이후 이 지역은 인간이 거의 살지 않는, 이른바 '두에로의 사막(Desierto del Duero)'으로 일컬어졌다. 그 대신, 정복지에서 끌고 온 이들을 칸타브리아와 아스투리아스 일대에 정착시키면서 이 일대의 인구는 크게 늘어났다.

757년 알폰수 1세가 사망한 뒤 장남 프루엘라 1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아버지가 전개한 무슬림과의 전쟁을 이어갔다. 757년 5월에서 768년 5월 사이에 후우마이야 왕조 초대 에미르 아브드 알 라흐만 1세의 사촌 오마르와 전쟁을 벌인 끝에 그를 사로잡았고 두 명의 무슬림 장군을 주살했다. 이후 갈리시아에서의 영역을 확장해 왕국의 남서쪽 경계인 무뇨 강까지 이르렀다.

프루엘라 1세는 칸타브리아에 대한 알라바의 바스크인들의 침략에 몇 차례 승리했지만 결정적으로 격파하지 못했다. 이후 그들과 화해하기로 하고 가스코뉴의 바스크 영주 로페의 딸 무니아와 결혼했다. 두 부부는 외아들 알폰수 2세를 낳았다. 766년 갈리시아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성공적으로 진압했으며, 성직자들의 결혼을 금지하고 이미 결혼한 성직자들은 아내와 헤어지도록 강요했다. 그러면서 산 비센테 데 오비에도를 포함한 여러 수도원을 세웠다.

프루엘라 1세는 재위 말년에 형제 비모라노가 귀족들의 지지를 받는 것을 보고 자신을 폐위하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의심해 비모라노를 죽였다. 이후 비모라노의 아들 베르무두를 양자로 삼아 형제 살해에 대한 세간의 비난을 희석시키려 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비모라노를 죽인 그에게 적개심을 품은 끝에 768년 프루엘라 1세를 암살했다.

이후 칸타브리아 공작이며 프루엘라 1세의 사촌인 프루엘라의 아들 아우렐리우가 귀족들에 의해 아스투리아스 국왕에 옹립되었다. 그의 치세에 대한 정보는 거의 전해지지 않으며, 단지 수도를 산 마르틴 델 레이 아우렐리우로 이전했고 농노들이 영주들을 상대로 봉기했다가 아우렐리우에 의해 진압되었다는 것만 전해진다.

774년 아우렐리우가 사망한 뒤 알폰수 1세의 딸인 아도신다의 남편인 실루가 왕으로 추대되었다. 알비센데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어머니를 위해" 무슬림과 평화를 유지했다고 한다. 학자들은 이에 대해 그의 어머니가 후우마이야 왕조 초대 에미르 아브드 알 라흐만 1세와 관련이 있는 무슬림이라는 설, 코르도바에서 인질 생활을 하고 있다는 설 등 다양한 추측을 제기하지만, 기록이 부족해서 어느 쪽이 옳은지는 불분명하다.

실루의 통치 시기에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수도가 산 마르틴 델 레이 아우렐리우에서 파도비아로 이전되었으며, 성 사도 요한 교회가 파도비아에 세워졌다. 또한 갈리시아인들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루고 인근의 몬테 쿠베이로 전투에서 실루에게 진압되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아스투리아스 왕국 문서가 그의 치세 때 집필되었는데, 그 내용은 티볼라타(현재 트라바다)의 수입 일부를 루도 수도원에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783년 실루 왕이 자식을 낳지 못한 채 사망했다. 아도신다 왕비는 프루엘라 1세의 아들 알폰수를 새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 그러나 알폰수 왕자가 프루엘라 1세를 살해했던 자신들을 가만둘 리 없다고 여긴 귀족들은 마우레가투를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알폰수는 알라바로 망명했고, 아도신다 왕비는 성 사도 요한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전승에 따르면, 마우레가투는 후우마이야 왕조의 침략을 피하기 위해 100명의 처녀를 코르도바에 보냈다고 한다. 학자들은 이 전승의 신빙성은 거의 없다고 간주하지만, 그의 시대에 무슬림과의 전쟁이 없었던 것만은 분명하다고 본다. 한편, 그의 치세에 툴레도 대주교 엘리판두스(Elipandus)와 우르헬 주교 펠릭스가 "예수는 인간의 본성을 가졌고, 하느님이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예수를 아들로 입양했다"라는 내용의 양자설(Adoptionism)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칸타브리아 출신의 수도자인 리에바나의 성 베아투스는 이를 이단이라고 규탄했고, 카롤루스 대제 역시 양자설을 규탄하는 성명을 반포했다.

789년 마우레가투 왕이 사망한 후, 귀족들은 그의 아들 헤르메네길두 대신 전왕 아우렐리우의 형제이자 칸타브리아 공작 프루엘라의 아들인 베르무두 1세를 새 국왕으로 옹립했다. 그는 통치 기간 내내 알라바와 갈리사에서 무슬림군의 공세에 직면했다. 그러던 791년, 후우마이야 왕조의 에미르 히샴 1세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정벌하기 위해 2개의 군대를 조직했다. 한 군대는 왕국의 서쪽을 급습했고, 다른 한 부대는 동쪽을 공격했다.

베르무두 1세는 병력을 소집한 뒤 왕국의 서쪽인 갈리시아에 쳐들어온 무슬림군을 격파하기 위해 출진해 부르비아에서 격돌했다. 알비센데 연대기에서는 전투가 발생했다고만 언급했지만, 무슬림 측 기록은 무슬림 장군 유수프 이븐 부흐트(Yusuf ibn Bujt) 장군이 적의 매복 공격에 잘 대처하여 성공적으로 격파했다고 설명한다.

부르비아 전투에서 패배해 왕국이 무슬림군에게 막심한 피해를 입는 것을 막지 못한 베르무두 1세는 책임을 지고 퇴위하고 성직자가 되었고, 프루엘라 1세의 외아들이었던 알폰수 2세가 새 국왕이 되었다. 알폰수 2세는 왕위에 오른 후 수도를 파도비아에서 오비에도로 옮겼다.

794년, 후우마이야 왕조 아미르 히샴 1세의 지시를 받든 아브드 알 말리크 빈 아브드 알 와히딘 무가이스(Abd al-Málik ibn Abd al-Wáhid ibn Mugaith)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수도 오비에도로 진격했다. 무슬림군은 오비에도에 순조롭게 입성한 뒤 오비에도 대성당을 포함한 여러 건물을 파괴했다. 알폰수 2세는 장병들을 이끌고 발란다스 교구에 있는 로스 로도스 계곡에 매복했다가 귀환하던 무슬림군을 습격했다. 그 결과 아브드 알 말리크 빈 아브드 알 와히든 무가이스를 비롯한 다수의 무슬림이 전사했다.

795년, 히샴 1세는 형제 아브드 알 카림 이븐 아브드 알 와히드 이븐 무가이스(Abd al-Karim ibn Abd al-Wáhid ibn Mugaith)에게 1만 기병을 맡겨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재차 공격하게 했다. 여기에 갈리시아 방면 적군이 아스투리아스에 몰려오는 것을 막기 위해 또다른 분견대를 갈리시아로 파견했다. 알폰수 2세는 아스토르가 인근에 진을 치고 주민들을 피신시킨 뒤 라스 바비아스에서 무슬림 파라흐 이븐 키나나가 이끄는 무슬림 선봉대 4,000명과 격돌했으나 패배를 면치 못했다. 그 후 무슬림군은 오비에도에 또다시 입성했지만, 겨울이 찾아오면서 많은 병사가 동상에 걸리자 산 속에 숨은 알폰수 2세를 추격하는 것을 단념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한편 갈리시아로 파견된 또다른 무슬림 부대는 그 일대를 황폐화하고 귀환하다가 갈리시아인들의 습격을 받고 패퇴했다.

무슬림들의 일련의 침략으로 큰 피해를 입은 알폰수 2세는 카롤루스 대제에게 구원을 요청하기로 했다. 795년, 아스투리아스 왕국 사절단이 툴루즈로 가서 카롤루스 대제의 장남이자 아키텐 국왕인 루도비쿠스 1세와 접견하여 그동안의 사정을 설명하고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그 후 796년 봄에 다른 사절이 프랑크 궁정에 방문했고, 겨울에도 한 차례 찾아왔다. 카롤루스 대제는 아스투리아스 사절단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이단으로 규정된 양자설(예수는 인간의 본성을 가졌고, 하느님이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예수를 아들로 입양했다라는 내용의 신학론)을 함께 배격하기로 했다.

796년 히샴 1세가 사망한 뒤 후우마이야 왕조에서 심각한 내전이 발발했다. 알폰수 2세는 이 때를 틈타 레콩키스타를 단행해 갈리시아, 레온, 카스티야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다. 특히 798년 리스본을 공략하는 데 성공했으며, 황폐화된 포르투를 재건했고, 무슬림의 치하에서 노예로 지내던 기독교인들을 대거 구출해 갈리시아, 아스투리아스, 칸타브리아로 이송했다. 또한 오비에도에 궁정을 세우고 여러 교회와 건물들을 재건했다.

중세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801년에서 808년 사이에 모종의 이유로 귀족 집단의 압력을 받아 아브라냐 수도원에 은거해야 했다. 그러다 테우다노(Teudano)라는 이름의 귀족 덕분에 복위할 수 있었고, 이때부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의 가문을 서고트 왕국과 연계시켰다고 한다. 엘비신데 연대기의 익명의 저자는 그가 교회와 궁전 모두에서 서고트 왕국의 질서를 복원했다고 밝혔다.

816년 무슬림들이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침략하자 오론 강에서 저지했으며, 825년 안세오 전투에서 무슬림군을 격멸했다. 또한 830년대에 콤포스텔라의 한 은둔자가 대 야고보의 무덤을 발견했다. 이 무덤은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라고 불리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순례지 중 하나가 되었으며, 유럽 각지에서 이 무덤을 순례하기 위해 몰려온 순례자들은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가 되었다.

알폰수 2세는 모종의 이유로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고 알려졌으며, 이 때문에 '순결한 자(el Casto)'라는 별칭이 붙었다. 그는 차기 후계자로 전왕 베르무두 1세의 외아들인 라미루 왕자를 지명했다. 842년 3월 20일 알폰수 2세가 오비에도에서 사망했을 때, 라미루는 모종의 이유로 밖에 나가 있었다. 궁정관리이자 알폰수 2세의 혈족이었던 네포시아누는 이를 틈타 아스투리아스와 바스크인들로 구성된 군대를 모아 왕을 자칭했다. 이에 라미루는 갈리시아인들을 모집해 오비에도로 진군했다.

양군은 오비에도 서쪽의 코르넬리아나 마을에서 격돌했다. 그 결과 참패한 네포시아누는 칸카스 데 오니스 인근의 프리모리아스에서 체포되었고, 실명형에 처해진 뒤 알려지지 않은 수도원에 감금되었다. 이리하여 네포시아누를 물리치고 라미루 1세로서 왕위에 오른 그는 로그로뇨에 산티아고 교회를 세우고 최초의 이베리아 반도 기사단인 로그로뇨 기사단을 설립했다.

844년 바이킹 함대가 히혼 해안에 나타났다. 그들은 라 코루냐까지 침투하며 약탈을 자행했다. 이 소식을 접한 라미루 1세는 군대를 소집한 뒤 역공을 가해 많은 바이킹인ㄷ을을 죽이고 70척의 배를 불태웠다. 여기서 살아남은 바이킹들은 좀더 남하해 리스본을 공략하고 세비야까지 침투해 세비야를 폐허로 만들 정도로 심각한 약탈을 자행하다가 후우마이야 왕조의 아미르 아브드 알 라흐만 2세에게 궤멸되었다.

전승에 따르면, 무슬림군이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침공하여 클라비조에 이르러 라미루 1세의 군대와 격돌했을 때 대 야고보가 눈부신 흰 말을 타고 나타나 무슬림들을 긴 창으로 쓸어버렸다고 한다. 라미루 1세는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콤포스텔라 대성당을 짓고 이베리아 반도 북부의 농부들에게 매년 곡물을 성당에 공물로 바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 전승은 300여 년이 지난 뒤에 집필된 카스티야 문헌에서 처음 등장해 현대까지 살이 붙여졌는데, 초기의 문헌 자료에는 834년에 벌어졌다고 서술했지만 후대의 사료에서는 라미루 1세의 집권 기간을 고려해 844년으로 수정했다. 학계에서는 클라비조 전투 이야기를 후대에 지어진 이야기로 간주하면서도, 이 이야기가 레콩키스타 운동을 촉진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고 본다.

845년, 무슬림들은 레온 시를 공략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846년, 라미루 1세는 이에 보복하고자 카스티야로 진격해 알베타 평원에서 무슬림군과 격돌해 악전고투 끝에 승리했지만 레온 시 탈환엔 실패했다. 그 후 라미루 1세는 왕권 강화를 위해 잔혹한 형벌을 행사했다. 강도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실명형에 처했으며, 마법사로 규탄받은 자들을 잡아들여 화형에 처했다. 또한 자신을 암살하고 왕위를 찬탈하려 했다는 고발을 받은 알드로이투를 체포해 실명형에 처했으며, 역시 역모 혐의로 체포된 피놀로를 7명의 자녀들과 함께 사형에 처했다. 알비센데 연대기는 그런 그에게 '정의의 지팡이(Uirga iustitiae)'라는 별명을 붙였다.

850년 라미루 1세가 사망한 뒤 장남 오르도뉴 1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 무렵, 라 리오하와 사라고사 사이에 있는 에브로 계곡을 지배하던 비누 카시 족장 무사 이븐 무사 알 카사위(موسى بن موسى القسوي)는 이복형제인 팜플로냐의 국왕 에네코 아리차와 동맹을 맺고 후우마이야 왕조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이 후우마이야 왕조와 대적할 때 이웃 국가인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빈틈을 노릴 것을 우려해 그들을 약화시키로 했다.

850년, 아스투리아스 왕국에 살고 있던 바스크인들이 무사 이븐 무사의 사주를 받고 반란을 일으켰다. 오르도뉴 1세는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뒤 오비에도로 귀환하다가 무사 이븐 무사의 군대가 바르둘리아를 공격하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하자 즉시 군대를 돌려 에브로 강둑에서 그들을 물리쳤다. 그러나 852년 무사 이븐 무사의 또다른 공세를 막으려 했다가 알베다 전투에서 패배했고, 무사 이븐 무사가 라 리오하의 거의 모든 영토를 통제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859년 무사 이븐 무사 알 카사위가 알 벨다를 빼앗은 뒤 요새화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오르도뉴 1세는 팜플로나 국왕 가르체아 에네코이츠와 동맹을 맺고 알벨다로 진군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제2차 알벨다 전투는 아스투리아스-팜플로나 연합군의 대승으로 종결되었고, 아브로 강 계곡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아랍 군주였던 알 카사위는 이 패전의 여파로 쇠락했다. 이후 오르도뉴 1세는 한 세기 동안 버려졌던 두에로 강과 칸타브리아 산맥 사이의 '두에로 사막'에 주민들을 이주시켜서 재개발을 단행했고, 레온, 아스토르가, 아미야, 및 투이 등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들을 재건하고 주민들을 그곳에 이주시켰다.

860년, 후우마이야 왕조 아미르 무함마드 1세는 무사 이븐 무사 알 카사위가 약해진 틈을 타 그를 왈리에서 해임하고 친히 군대를 이끌고 북상해 바누 카시를 재복속시켰다. 뒤이어 팜플로나 왕국으로 쳐들어가 팜플로나를 약탈하고 왕자 오르티 가르세이츠를 사로잡아 코르도바로 개선했다. 이리하여 팜플로나 왕국을 복속시킨 무함마드 1세는 865년 장남 알 문디르를 사령관으로 세워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공격하게 했다. 알 문디르는 두에로 협곡으로 진격했지만 오르도뉴 1세가 전투를 회피하며 별 소득을 보지 못하였다. 다만 코르도바로 귀환하던 중 부르고스에서 카스티야 백작 로드리고를 모르쿠에라 무찌르고 후우마이야 왕조의 봉신으로 삼았다.

866년, 오르도뉴 1세는 일전의 침략에 보복하기 위해 리스본 쪽으로 군대를 보냈다. 그들은 신트라를 불태우고 타구스 일대를 약탈한 뒤 귀환했다. 또한 100척의 전선이 리스본, 세비야, 카디즈 일대를 해상에서 습격해 약탈했다. 무함마드 1세는 이에 맞서 베르베르 기병대를 파견해 갈리시아 국경 지대를 황폐화시켰다.

866년 5월 27일, 오르도뉴 1세는 통풍에 시달리다가 사망했다. 뒤이어 왕위에 오른 알폰수 3세는 루고 백작 프루엘라 베르무데즈의 반란으로 인해 알라바로 피신했다가 1년 후 카스티야 백작 로드리고의 도움으로 프루엘라 백작을 처단하고 오비에도에 돌아왔다. 867년 에일로 백작이 알라바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즉시 군대를 이끌고 알라바로 진군해 그곳 주민들을 복속시키고 에일로를 유폐시켰다.

이리하여 왕권을 안정시킨 알폰수 3세는 후우마이야 왕조가 내란에 시달리는 틈을 타 868년부터 레콩키스타에 착수했다. 그가 파견한 비마라 페레스 백작 휘하의 아스투리아스군은 도우로 강 하구의 포르투를 공략하고 그곳에 인구를 이주시켰다. 871년에는 몬데구 강변의 코임브라를 공략했다. 약 5천의 인구를 지녔던 코임브라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재정복'한 첫 대도시였다. 877년, 그는 승리를 기념하여 'Adefonsus Hispaniae imperator(아돌포수스 히스파니에 임페라토르)'라는 문구가 새겨진 화폐를 주조했다.

878년, 후우마이야 에미르 무함마드 1세의 아들 알 문디르가 이끄는 무슬림군이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침공했다. 알 문디르 본인은 레온으로 진군했고, 살리드 이븐 기남은 오르비고로 진격했다. 한편 또다른 무슬림 별동대는 코임브라와 포르투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다. 알폰수 3세는 이에 맞서 살리드의 부대를 폴보라리아 전투에서 격파했고, 알 문디르의 군대를 발데모라 협곡에서 기습해 격파했다. 여기에 헤르메길두 구티에레스 백작이 지휘하는 아스투리아군 역시 포르투와 코임브라를 침공한 무슬림군을 대파했다. 무함마드 1세는 연이은 참패에 깊은 충격을 받고 배상금을 지불할 테니 3년간 휴전하자고 제안했고, 알폰수 3세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 후 알폰수 3세와 구티에레스는 코임브라 일대의 아랍 정주민인 바누 다니스를 축출하고 갈리시아인들을 그곳에 이주시켰다. 여기에 브라가, 비세우, 라메고 일대에도 아스투리아스, 바스크, 레온 출신의 기독교인들이 이주했다. 한편 무함마드 1세는 함대를 최대한 끌어모은 뒤 육상과 해상에서 갈리시아를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후우마이야 함대는 항해 도중에 폭풍으로 파괴되었고, 육군은 과다아나 강가의 옥시퍼 산에서 알폰수 3세의 기습 공격으로 참패했다.

883년, 후우마이야 왕조군은 알폰수 3세와 동맹을 맺은 바누 카시의 영역인 사라고사를 침공했다. 알폰수 3세는 아들 오르도뉴를 파견해 바누 카시를 돕게 했다. 양자는 서로의 군세가 만만치 않은 것을 보고 대규모 전투를 회피하다가 인질을 교환하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884년 무함마드 1세와 알폰수 3세 모두 내부의 반란에 시달리자 평화 협약을 맺기로 합의했다. 당시 아스투리아스 왕국에서는 형제 베르무두, 오도아리오, 프루엘라, 누뇨 오도녜즈가 아스토르가에서 여러 백작의 지원을 받으며 반란을 일으켰다. 알폰수 3세는 이 반란을 어렵게 진압한 후 형제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901년, 후우마이야 왕조에서 반란을 일으킨 아흐메드 이븐 알 키트(Ibn al-Qitt)는 스스로 마흐디를 칭하면서 지하드를 선포하고 아흐메드 벤 모아비아(Ahmed-ben-Moavia) 휘하 무슬림군에게 사모라 침공을 맡겼다. 알폰수 3세는 즉시 사모라 구원에 착수했고, 양군은 그해 7월 사모라 성벽 앞 평원에서 나흘 동안 격전을 치렀다. 양측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너무 많아서 아랍 문헌에는 '사모라의 날'이라고 특별히 지칭할 정도였다. 이흐메드 벤 모아비아는 이 전투에서 패사했고, 그의 수급은 베어진 뒤 성벽에 내걸렸다. 906년, 알폰수 3세는 정식으로 자신을 히스파니아의 렉스(Hispaniae rex)라고 선포했다.

그러나 알폰수 3세의 말년은 매우 암울했다. 장남 가르시아 1세는 카스티야인 무니오 누녜즈 백작의 딸 누냐와 결혼한 뒤 무니오의 선동에 따라 909년 아버지를 상대로 반역을 도모했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고손 성에 구금되었다. 하지만 카스티야 백작이자 장인인 무니오 누녜스에 의해 구출된 뒤 두 동생 오르도뉴 2세, 프루엘라 2세와 함께 정변을 일으켜 아버지를 체포했다. 비록 아버지를 폐위시키지는 않았지만 실권을 완전히 빼앗고 산 살바도르 데 발데디오스 인근의 볼리데스 마을에 유폐시켰다. 세 아들은 왕국의 수도를 아스투리아스에서 레온으로 이전하기로 합의했으며, 나라의 이름 역시 아스투리아스 왕국에서 레온 왕국으로 변경하기로 했다. 910년 12월, 알폰수 3세는 가르시아 1세의 허락을 받고 사모라에 대한 원정을 떠났다. 군사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귀환하던 그는 곧 중병에 걸려 12월 20일에 사망했다.

알폰수 3세 사후,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세 개로 분할되었다. 장남 가르시아 1세는 레온 왕국의 국왕이 되었고, 차남 오르도뉴 2세는 갈리시아의 국왕이 되었으며, 3남 프루엘라 2세는 아스투리아스 국왕이 되었다. 프루엘라 2세가 아스투리아스 국왕으로서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912년 10월 24일 오비에도에 이쓴 산살바도르 대성당에 토지를 기증하는 등 여러 교회와 수도원에 제물이나 토지를 기증한 사실이 여러 문서에서 확인되었을 뿐이다. 914년 큰형 가르시아 1세가 자식을 낳지 못한 채 사망한 뒤 오르도뉴 2세가 레온 국왕을 겸임했을 때 그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924년 1월 18일 오르도뉴 2세가 사망했다. 오르도뉴 2세는 가르시아 1세와는 달리 여러 자식을 두었지만, 프루엘라 2세는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레온과 갈리시아 전역을 장악해 세 왕국을 일시적으로 통합하고 국호를 레온 왕국으로 정했다. 924년 후우마이야 왕조의 아브드 알 라흐만 3세가 군대를 일으켜 팜플로나 왕국으로 쳐들어오자, 그는 카스티야 백작들을 파견해 팜플로나 국왕 안초 1세를 돕게 했다. 그러나 레온-팜플로나 연합군은 무슬림군에게 격파되었고, 팜플로나가 함락되었다. 그러나 후방에서 반란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접한 아브드 알 라흐만 3세가 점령지에 수비대를 배치하지 않은 채 철수했기 때문에, 안초 1세는 곧 돌아와서 잃어버렸던 영토를 도로 확보했다.

프루엘라 2세는 서고트 왕국 위티자 왕의 후손임을 자처하던 올문도(Olmundo)의 아들 게불도(Gebuldo)와 아레신도(Aresindo)를 살해하고, 그들과 가깝게 지내던 레온의 주교 프루니미오(Frunimio)를 추방해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그러다 925년 8월 나병에 시달린 끝에 사망했다. 이리하여 최후의 아스투리아스 국왕은 사라졌고,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레온 왕국으로 계승되었다.[4]

현대

18세기 계몽주의 운동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였으며 산업혁명 당시, 아스투리아스의 석탄 및 철광 자원이 개발되었다. 1982년 1월 11일에 정식으로 에스파냐의 자치주가 되었다.

산업

목초지가 발달하여 소·말의 목축이 활발하다. 농작물은 옥수수 외에는 미약하다. 지하자원은 석탄 매장량이 에스파냐에서 가장 많고 철광·동광·아연광도 풍부하여, 오비에도와 히혼 부근에 제철을 비롯한 중공업이 발달하였으나 지형상 교통이 불편하여 수송비가 많이 드는 어려움이 있다.

지도

동영상

각주

  1. 아스투리아스주〉, 《위키백과》
  2. 아스투리아스〉, 《네이버 지식백과》
  3. 아스투리아스〉, 《나무위키》
  4. 아스투리아스 왕국 〉, 《나무위키》

참고자료

같이 보기

서유럽 같이 보기

서유럽 국가
서유럽 도시
서유럽 지리
지중해
서유럽 문화
서유럽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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