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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21일 (일) 14:0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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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자스시티(Kansas City)는 미국 미주리주의 서부, 캔자스주와의 경계에 위치하는 도시이다. 시내 인구는 약 51만 명으로 미주리주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 미국에서 36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캔자스시티는 2,392,035명의 인구를 가진 캔자스시티 대도시권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이자 중심 도시이다.[1]
개요
캔자스시티는 미주리주 서부, 미주리강과 캔자스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다. 서쪽으로 캔자스주의 캔자스시티와 인접해 있으며 캔자스주의 캔자스시티, 미주리주의 인디펜던스 등을 비롯한 주변의 여러 도시를 포함한 도시권의 중심지이며 미국 중앙부의 대표적인 도시이다. 미주리주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는 세인트루이스가 아니라 이 도시이다. 다만 광역권 인구로는 세인트루이스가 더 많고 예전부터 세인트루이스가 더 컸기 때문에, 미주리주의 최대 도시는 여전히 세인트루이스가 꼽힌다. 캔자스강의 합류점에 위치한다고 하여 1838년 캔자스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에는 서쪽에 캔자스주는 없었고, 캔자스라는강 이름만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남북 전쟁 이후 서부로 통하는 철도 교통의 요지로 크게 발전하였다. 그 후 서쪽의 캔자스가 미국 정식 준주가 된 후 미주리주의 이 도시는 이름에 시티를 덧붙여 캔자스시티가 시의 이름이 되었다. 19세기 중반, 철도의 중심지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미국 중앙부의 농업지대 교통이 편리한 지역에 위치하여 각종 농축산물의 집산지로 번창하게 되었다. 특히 밀과 소의 세계적인 거래지이며, 육류와 식료품 가공업이 발달하였다. 중서부 지역 중심지의 하나가 되어 시내 중심가는 꽤 번화하고 고층건물도 여러 개 있다. 1980년대에 미국 서부의 급속한 성장에 의한 도시 쇠퇴로 인구가 가파르게 감소하긴 했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 다운타운 중심가에 종합 아레나인 스프린트 센터 건설을 시작으로, 종합 예술 공연장인 카우프만 센터 오브 더 퍼포밍 아츠가 개관하고 그 옆에 하얏트 호텔 건설이 예정되어 있는 등, 재개발 사업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인구가 다시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교육 및 연구 기관으로 미주리대학교캔자스시티캠퍼스(1963), 록허스트대학(1910), 아빌라대학(1916), 캔자스시티정골(整骨)의과대학교, 캔자스시티미술학교(1895), 미드웨스트연구소 등이 있다. 또한 내저릿교회와 그리스도교 형제학교, 피플투피플 교류사업 등 세계적인 기구의 본부가 이곳에 있다. 시내에는 로마를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분수가 설치되어있어, 분수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다운타운 남쪽에는 1923년에 문을 연 세계 최초의 현대식 쇼핑센터인 컨츄리클럽 플라자가 있다. 추수감사절 밤에는 플라자 전체에 불을 밝히는 점등식을 하며, 밝혀진 전등은 크리스마스 시즌까지 이어진다. 아메리카 로열 가축전시회, 로데오 경기 등이 매년 이곳에서 개최되며, 근처에 윌리엄 록힐 넬슨 화랑과 앳킨스 예술박물관, 론 잭 남북전쟁박물관, 캔자스시티 재즈박물관, 니그로리그 야구박물관 등이 있다. 스포츠팀으로는 현재 야구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 캔자스시티 로열스, 미식축구 내셔널 풋볼 리그(NFL) 캔자스시티 치프스의 연고지로 유명하다.[2]
역사
캔자스시티의 최종적인 장소를 방문한 최초의 유럽인은 에티엔 드 베니어드, 시에르 드 부르몽(Étienne de Veniard, Sieur de Bourgmont)으로, 미주리강 하류를 탐험한 최초의 유럽인이다. 데트로이트 요새에 대한 원주민들의 공격에 대한 대응으로 비난을 받은 그는 요새 사령관직을 버리고 프랑스 당국을 피하고 있었다. 부르몽은 미주리주 브런즈윅(Brunswick) 근처 동쪽으로 약 140km 떨어진 마을에서 아메리카 원주민 부인과 함께 살았고 그곳에서 모피를 불법으로 거래했다.
그의 누명을 벗기 위해, 그는 루이지애나주의 정확한 묘사, 항구, 토지, 강, 그리고 그곳을 점령한 인디언 부족의 이름 그리고 1713년 식민지 설립을 위한 상업과 거기에서 파생된 이점, 그리고 1714년 미주리강으로 향하는 항로를 썼다. 문서에서 그는 칸세즈강(Grane Riv[ierre] des Cansez)과 미주리강의 합류 지점을 묘사하고 있으며 이 이름을 최초로 사용했다. 프랑스 지도 제작자 기욤 들리슬(Guillaume Delisle)은 이 설명을 사용하여 해당 지역 최초의 상당히 정확한 지도를 만들었다.
스페인은 1763년 파리조약으로 이 지역을 차지했지만 미주리강 선박 운송에 세금을 부과하고 허가하는 것 외에는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프랑스는 스페인의 허가 아래 모피 무역을 계속했다. 추토우(Chouteau) 가족은 1765년 초에 미주리 계곡 하류의 세인트루이스에서 스페인 허가 하에 운영되었으며 1821년 추토아 가족이 캔자스시티에 도착하여 프랑수아 처테오가 처테오 랜딩을 설립했다.
1804년 루이지애나 매입 이후 루이스와 클라크는 캔자스강과 미주리강의 합류 지점을 방문했고, 이곳이 요새를 건설하기에 좋은 장소라고 언급했다. 1831년 조셉 스미스 가 이끄는 뉴욕에서 온 모르몬교도들이 나중에 도시가 될 곳에 정착했다. 그들은 캔자스시티의 현재 경계 내에 최초의 학교를 세웠지만 1833년 폭도들의 폭력에 의해 쫓겨났고 그들의 정착지는 비어있었다.
1831년 캐나다 사냥꾼 가브리엘 프루돔 시니어(Gabriel Prudhomme Sr.)는 미주리강 앞에 있는 257에이커의 땅을 구입했다. 그는 아내 조세핀과 6명의 여섯 자녀를 위한 집을 마련하고 강에서 페리를 운영했다.
1833년 침례교 선교사 아이작 맥코이 (Isaac McCoy) 의 아들인 존 맥코이(John McCoy )는 강에서 4.8km 떨어진 산타페 트레일(Santa Fe Trail)을 따라 웨스트 포트(West Port)를 설립했다. 1834년 맥코이(McCoy)는 미주리강의 커브에 웨스트포트 랜딩을 설립하여 웨스트포트의 착륙 지점 역할을 했다. 그는 인디펜던스보다 프루돔 착륙장에서 짐을 내리는 것이 더 편리하다고 생각했다. 가브리엘 프루돔이 죽은 지 몇 년이 지난 1838년 11월 14일 14명의 투자자가 경매에서 그의 땅을 구입했다. 1839년까지 투자자들은 부동산을 분할했고 법적 문제가 해결된 후 1846년에 첫 번째 부지가 매각되었다. 나머지 부지는 1850년 2월에 팔렸다.
1850년에 상륙 지역은 캔자스 타운 오브 캔자스로 통합되었다. 그 무렵 캔자스, 웨스트포트, 그리고 인근 인디펜던스는 미국의 서쪽 확장에 중요한 지점이 되었다. 산타페, 캘리포니아, 오리건 등 세 개의 주요 트레일은 모두 잭슨 카운티를 통과했다. 1853년 2월 22일, 캔자스시는 새로 선출된 시장과 함께 만들어졌다. 면적은 1.8km²이고 인구는 2,500명이었다.
남북 전쟁 동안 도시와 그 주변 지역은 강렬한 군사 활동의 중심지였다. 1862년 8월 제1차 독립 전투에서 남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남부 연합군은 캔자스시티가 북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공격하기에는 너무 견고한 것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승리를 중요한 방식으로 활용할 수 없었다. 1864년 스털링 프라이스의 미주리 탐험대의 일부로 1864년 10월 21일부터 22일까지 일어난 제2차 독립 전투도 남부 연합군의 승리로 이어졌다. 프라이스가 다음날 웨스트포트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면서 미주리주를 되찾으려는 남부연합의 노력이 사실상 종식되었다.
토마스 유잉(Thomas Ewing) 장군은 윌리엄 퀀트릴(William Quantrill)이 이끄는 인근 캔자스주 로렌스(Lawrence) 에 대한 성공적인 습격에 대응하여 일반 명령 11호를 내려 잭슨을 포함한 미주리 서부 4개 카운티의 주민들을 강제로 퇴거시켰다.
남북전쟁 이후 캔자스시티는 빠르게 성장했다. 미주리 강을 가로지르는 한니발 및 세인트 조셉 철도 교량을 위해 캔자스주 리번워스 위에 도시를 선택함으로써 상당한 성장을 가져왔다. 1869년 옥타브 샤누트(Octave Chanute) 가 설계한 한니발 다리(Hannibal Bridge)가 개통된 이후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러한 붐으로 인해 1889년에 캔자스시티로 이름이 바뀌었고 도시 경계가 남쪽과 동쪽으로 확장되었다. 웨스트포트는 1897년 12월 2일에 캔자스시티의 일부가 되었다. 1900년에 캔자스시티는 인구 163,752명으로 미국에서 22번째로 큰 도시였다.
조경가 조지 케슬러( George Kessler) 가 이끄는 캔자스시티는 가로수길과 공원 네트워크를 제공하는 아름다운 도시 운동 의 선도적인 사례가 되었다. 사우스모어랜드와 록힐 구역과 같은 새로운 지역들은 도시의 가장 큰 규모의 주거지를 수용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1914년 유니언역이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고 1923년 리버티 기념관이 문을 열면서 이 도시의 가장 눈에 띄는 두 개의 랜드마크를 제공하게 되었다.
캔자스시티 전차 시스템은 한때 도시를 관통하는 수백 마일의 전차를 보유했으며 미국에서 가장 큰 시스템 중 하나였다. 1903년에 8번가 터널이 도시를 통과하는 지하 전차 시스템으로 건설되었다. 전차의 마지막 운행은 1957년 6월 23일이었지만 터널은 여전히 존재한다. 20세기 초 캔자스시청과 잭슨 카운티 법원 등 여러 개의 중요한 건물과 구조물이 지어졌다.
캔자스시티의 교외 개발은 20세기 초에 노면 전차 시스템과 함께 시작되었다. 도시의 최초의 교외는 펜들턴 하이츠와 퀄리티 힐 근처에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비교적 부유한 많은 주민들이 캔자스주 존슨 카운티와 미주리주 잭슨 카운티 동부 교외로 이주했다. 많은 사람들이 또한 1940년대와 1970년대 사이에 캔자스시티가 지역을 통합했던 미주리강 북쪽으로 이동했다.
1940년에는 약 40만 명의 주민이 살았고, 2000년에는 약 44만 명의 거주민만이 살고 있었다. 1940년부터 1960년까지 도시의 크기를 두 배 이상 늘렸고 인구는 약 75,000명 정도만 증가했다. 1970년까지, 도시는 약 820km²에 달했는데 이는 1940년의 5배가 넘는 크기이다.
2007년부터 2017년까지 캔자스시티의 도심 주거 인구는 4배로 증가했고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이 지역은 2000년대 초 약 4,000명의 거주자에서 2017년 현재 약 30,000명으로 증가했다. 캔자스시티의 다운타운은 미국에서 6번째로 빠르게 성장하는 다운타운이다.[3]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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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 ↑ 〈캔자스시티 (미주리주)〉, 《위키백과》
- ↑ 〈캔자스시티(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 〈캔자스시티, 미주리 주〉, 《요다위키》
참고자료
- 〈캔자스시티 (미주리주)〉, 《위키백과》
- 〈캔자스시티, 미주리 주〉, 《요다위키》
- 〈캔자스시티(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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