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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2002년''' 감작스런 구대성의 공백에 한화는 2001년 내내 마무리 투수 부재에 시달렸고, 2002년에는 장종훈이 역대 최악의 성적(타율 .248/12홈런)을 기록하며 급격한 노쇠화를 보였다. 2001년 5할이 안 되는 승률로 4위에 올랐지만 준플레이오프에서 두산 베어스에게 2연패를 당하며 탈락했다. 그 해 1차 지명으로 입단한 신인 내야수 김태균이 신인왕을 차지했다. 2002년 7위를 기록한 후 이광환 감독은 경질되었으며 후임으로는 이광환 감독이 2년 계약을 맺으면서 감독 부임할 당시 수석코치를 맡았던 사람이자 지역연고(대전) 출신인 윤동균 코치가 거론됐지만 감작스럽게 팀을 떠나 좌절됐고 이광환 감독의 LG감독 1기 시절 후임으로 발탁됐는데 유승안 감독은 이광환 감독 후임 물망에 한때 거론된 윤동균 전 코치의 OB감독 시절 후임 물망에 오른 백인천 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경동고 MBC출신, 포수, 엽기적이면서 이상한 성격, 늙은 선수들을 좋아하지 않는점, 서북식 발성과 발음 등의 공통덤을 가졌다.
 
*'''2001년~2002년''' 감작스런 구대성의 공백에 한화는 2001년 내내 마무리 투수 부재에 시달렸고, 2002년에는 장종훈이 역대 최악의 성적(타율 .248/12홈런)을 기록하며 급격한 노쇠화를 보였다. 2001년 5할이 안 되는 승률로 4위에 올랐지만 준플레이오프에서 두산 베어스에게 2연패를 당하며 탈락했다. 그 해 1차 지명으로 입단한 신인 내야수 김태균이 신인왕을 차지했다. 2002년 7위를 기록한 후 이광환 감독은 경질되었으며 후임으로는 이광환 감독이 2년 계약을 맺으면서 감독 부임할 당시 수석코치를 맡았던 사람이자 지역연고(대전) 출신인 윤동균 코치가 거론됐지만 감작스럽게 팀을 떠나 좌절됐고 이광환 감독의 LG감독 1기 시절 후임으로 발탁됐는데 유승안 감독은 이광환 감독 후임 물망에 한때 거론된 윤동균 전 코치의 OB감독 시절 후임 물망에 오른 백인천 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경동고 MBC출신, 포수, 엽기적이면서 이상한 성격, 늙은 선수들을 좋아하지 않는점, 서북식 발성과 발음 등의 공통덤을 가졌다.
 
*'''2003년~2004년''' 유승안 감독이 부임한 이후에도 2003년 5위, 2004년 7위로 부진하였으며 유승안 감독은 의욕적으롤 세대교체에 나선 것이 좋았으나 노장 선수들을 지나치게 외면하여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2003년 시즌 후 프런트와의 마찰로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였던 외야수 송지만을 잃게 되었다. 2004년 6월 24일 잠실 두산전에서 3:0으로 뒤지고 있던 8회, 1사 만루의 위기, 타자는 외야수 최경화이었다. 안타 하나에도 2점이 날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점수 차가 벌어지면 경기가 힘들어질 수 있겠다고 판단한 한화 이글스의 유승안 당시 감독은 무조건 내야 병살을 유도하기 위해 시프트를 지시하게 된다. 그에 따라 유승안 감독은 좌익수 이영우를 내야로 불러들이는 내야 5인 수비망을 펼친다. 땅볼만 나왔다면 병살로 처리할 수 있었겠지만 결과는 좌측으로 날아가는 2타점 적시타였다. 이영우가 제 수비 위치에 있었다면 충분히 잡을 수 있는 타구였지만 좌익수가 없는 바람에 1점을 막으려다가 도리어 2점을 내주고 말았다. 이는 일명 유승안 시프트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다.
 
*'''2003년~2004년''' 유승안 감독이 부임한 이후에도 2003년 5위, 2004년 7위로 부진하였으며 유승안 감독은 의욕적으롤 세대교체에 나선 것이 좋았으나 노장 선수들을 지나치게 외면하여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2003년 시즌 후 프런트와의 마찰로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였던 외야수 송지만을 잃게 되었다. 2004년 6월 24일 잠실 두산전에서 3:0으로 뒤지고 있던 8회, 1사 만루의 위기, 타자는 외야수 최경화이었다. 안타 하나에도 2점이 날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점수 차가 벌어지면 경기가 힘들어질 수 있겠다고 판단한 한화 이글스의 유승안 당시 감독은 무조건 내야 병살을 유도하기 위해 시프트를 지시하게 된다. 그에 따라 유승안 감독은 좌익수 이영우를 내야로 불러들이는 내야 5인 수비망을 펼친다. 땅볼만 나왔다면 병살로 처리할 수 있었겠지만 결과는 좌측으로 날아가는 2타점 적시타였다. 이영우가 제 수비 위치에 있었다면 충분히 잡을 수 있는 타구였지만 좌익수가 없는 바람에 1점을 막으려다가 도리어 2점을 내주고 말았다. 이는 일명 유승안 시프트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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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김인식 감독의 부임 첫 해로 정규 시즌 4위의 성적으로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여 준 플레이오프에서 SK와이번스와 맞붙어 3승 2패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였으나 플레이오프에서 두산 베이스에 3전 전패를 당해 한국 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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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ㅈ이콥 크루즈와 세드릭 바워스를 영입하면서 정규 시즌 3위의 성적으로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여 정규 시즌 4위 삼성 라이온즈와 맞붙었다. 2승 1패로 삼성 라이온즈에게 2006년 한국시리즈 패배를 되갚으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플레이오프에서 두산 베어스와 맞붙었으나 2005년에 이어 3전 전패의 성적으로 또 다시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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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외야수 덕 클락과 좌투수 브래드 토머스를 영입하고 시즌 중반까지 상위권을 유지했으나, 시즌 중반을 지나 주전 선수들의 부진과 부상, 베이징 올림픽의 후유증 등으로 인하여 정규 시즌 5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대신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로 핵심 투수 류현진이 병역을 해결한게 다행이었고, 소집 해제로 돌아온 마정길이 새로운 셋업맨으로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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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외야수 덕 클락이 시즌 후 재계약에 실패하고 넥센 히어로즈와 계약하여 이적했지만, 투수 브래드 토머스와 재계약하고 우투우타 외 야수인 빅터 디아즈를 영입하고 투타 강화를 꾀했다. 그러나 디아즈의 떨어지는 수비력과 효율성 없는 타격 능력 등을 고려하여 시즌 도중 빅터 디아즈를 방출하고 투수 에릭 연지를 영입하여 남은 시즌을 소화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또한 팀 내 최고의 타자 김태균이 4월까지 타율 4할을 넘기는 등 맹활약하였으나, 4웡ㄹ 26일 두산 베어스의 포수 최승환과 홈 승부 도중 충돌하며 뇌진탕 증세를 보였고, 이후 페이스가 급락하며 팀의 타격을 책임지는 데 실패했다. 이 시즌에는 기아 타이거증서 신종길을 상대로 한 트레이드로 영입한 외야수 강동우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전술한 여러 악재로 인하여 정규시즌 8위를 기록함으로써 2987년 팀 창단 원년 잏로 최초로 최하위를 기록하는 불명예를 당하게 된다. 한편 팀의 레전드 투수인 송진우와 정민철이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하였으며, 두선수의 배번인 21번과 23번은 영구 결번 처리되었다. 김인식 감독은 계약 기간이 만료되어 물러났다. 시즌 후 내야수 이범호와 김태균이 FA를 선언하고 일본 프로 야구에 진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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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상성 라이온즈 수석코치 한대화가 계약이 만료된 김인식의 후임 감독으로 전격 부임했다. 리빌딩을 주 목표로 했던 2010년에는 호세 카페얀과 홀리오 데폴라라는 2명의 우완 투수를 용병으로 영입했다. 시즌 전 시범 경기 중 셋업맨 마정길이 며일영을 상대로 넥센 히어로즈에 현금 트레이드되었지만, 마일영응ㄴ 부상으로 인해 이적 후에도 부진했다. 팀의 투수진을 책임지고 있던 송진우, 정민철 등의 베테랑 투수들이 2009년 시즌 중 은퇴하는 바람에 유원상, 김혁민 등의 신인급 투수들이 팀의 선발진을 급하게 맡게 되어 에이스 류현진을 제외한 투수진이 괴멸해 버리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리고 강동우와 김태완 등 팀의 주전 타자들이 부진하여성적이 암울한 전망을 나타내었으나 경찰청에서 제대한 우타 외야수 최진행이 새로운 다이너마이트 주포로 거듭남으로써 암울한 한화 구단에 유일한 희망이 되었다. 그 해 최진행은 이대호에 이어 홈런 2위를 기록했다.
  
  

2021년 7월 27일 (화) 10:43 판

㈜한화이글스(Hanwha Eagles)
㈜한화이글스(Hanwha Eagles)

㈜한화이글스(Hanwha Eagles)는 대한민국의 대전광역시를 연고지로 하는 KBO 소속 프로야구단이다. 홈 구장은 대전광역시 중구 부사동의 대전한화생명이글스파크이다. 제2구장은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사직도으이 청주야구장이며, 퓨처스 구장은 충청남도 서산시 성연면의 서산야구장이다. 현재와 같은 지역을 연고지로 1986년 3월 8일 빙그레 이글스라는 이름으로 창단되었다. 1998년 11월 1일 구단 이름을 한화 이글스로 변경하였다. 1999년 한국시리즈에서 창단 이래 유일하게 우승하였다. 그후로는 11년만에 2018 준프레이오프를 진출했다. 마스코트는 위니, 비니, 수리이다.[1]

연혁

  • 1985년 한국 프로야구 리그 참가를 희망한 한화그룹에서 1월 15일 창단 준비 위원회를 발족시킨다. 다음 날인 1월 16일 한국야구위원회로부터 제 7구단으로 승인받게 되고 3월 11일 연고지를 대전으로 삼은 ㈜빙그레 이글스 야구단이 설립되고 감독으로 배성서 감독이 취임한다. 그 해에는 2군 리그에 참가했다.
  • 1986년 3월 8일 대전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3월 9일 청주야구장에서 빙그레 이글스 창단식을 개최한다. 그 해 처음으로 1군 리그에 참가했다. 하지만 86시즌에서는 청보 핀토스에게 밀리며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 청보는 만약 빙그레가 86시즌 꼴찌를 면했다면 구단 역사를 모두 꼴찌로 장식하는 기록을 세울정도의 약팀이었으니 이 시기 빙그레가 얼마나 못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전기 리그는 7위로 마감했으나 후기 리그에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해체로 트레이드 된 장명부와 이상군의 활약으로 6위를 한다. 하지만 신생 구단의 한계와 얕은 선수 츠응로 정규 리그 7위를 기록했다.
  • 1987년 2번째 시즌에는 전기리그 6위와 후기리그 공동 5위로 후기리그 공동 5위로 간신히 정규리그 6위를 기록했을 뿐 특별한 성적을 내비치진 못했다. 그 해 처음으로 빙그레 이글스에서 외야수 이정훈 선수가 신인왕으로 올랐다.
  • 1988년 3년 계약 기간이 만료된 배성서 감독과 재계약을 포기하고 김영덕 감독을 영입하여 정규 시즌을 2위로 마감한 빙그레 이글스는 플레이오프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3전 전승으로 물리치고 창단 이래 처음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한다. 정규 시즌 1위 팀 해태 타이거즈와 일전을 벌이게 되는데, 내리 3경기를 지게된다 경기를 잡고 분위기를 타는 듯 했으나, 결국 6차전에서 져서 2승 4패로 준우승으로 시즌을 마쳤다.
  • 1989년 창단 4년 만에 빙그레 이글스는 6할의 승률을 기록하며 정규 시즌 우승을 한다. 준 플레이오프에서는 태평양 돌핀스가 삼성 라이온즈를 이기고 올라왔고, 플레이오프에서는 해태 타이거즈가 태평양을 잡았다. 88시즌에 이어 또 다시 빙그레 이글스와 해태 타이거즈가 만났다. 1차전에서는 빙그레가 에이스 이상군의 호투와 이강돈의 홈런으로 승리했다. 2차전에서도 4대 2로 앞선 상황이었지만 유격수 장종훈이 공을 뒤로 빠뜨리는 실책을 저지르면서 4대 4 동점, 이어 희생플라이까지 맞으며 역전패하고 만다. 결국 그 후 3경기를 모두 지면서 1승 4패로 두 번째 준우승을 기록하게 된다.
  • 1990년 빙그레 이글스는 정규 시즌 3위를 기록했다. 준 플레이오프에서 삼성게게 2패를 당하여, 포스트 시즌을 마감했는데 주전 유격수 장종훈이 시즌 막판 어깨부상에 시달렸으며 이 탓인지 같은 해 시즌에는 페넌트레이스 1위를 달렸다가 후반기에 페이스가 떨어져 준플레이오프 2패로 탈락했는데 장종훈은 1차전대타로만 출전했으며 장종훈 외에도 이정훈 등 타자 쪽에서 부상 선수가 많았다. 정규리그 4위였던 삼성이 빙그레(3위), 해태(2위)를 연달아 물리치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면서 빙그레는 최종 순위 4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 1991년 빙그레 이글스는 정규 시즌 2위에 올랐다. 롯데 자이언츠를 꺾고 올라온 삼성 라이온즈와 플레이오프에서 만났다. 결과는 3승 1패로 빙그레 이글스가 한국 시리즈에 오라갔다. 한국시리즈에서 정규 시즌 우승팀인 해태 타이거즈와 4번째로 만났다. 하지만 단 한 경기도 이기지 못하고 0승 4패로 또 다시 준우승에 머물러야 했는데 그 해 주전 유격수 황대연이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연습 도중 허리를 다쳐 시즌을 마감해 내야수비에서 허점을 드러낸 것이 컸다.
  • 1992년 이 해 빙그레 이글스는 역대 최강의 전력을 자랑했다. 81승 2무 43패(승률 0.651)로 2위 해태와 10.5 경기차의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팀 홈런 146개를 기록하였으며, 신인 정민철은 14승(13선발승), 송진우는 19승(8구원승이 포함되어 있어 그 해 최다 선발승은 윤학길 이강철(이상 17선발승)에게 돌아감), 이상군도 10승(5선발승)을 했고, 팀의 주축 장종훈은 무려 41개의 홈런을 날렸다. 이정훈은 타율 0.360이라는 고타율을 기록하고 25개의 홈런을 날렸으며, 이강돈도 0.320의 타율과 13개의 홈런을 날렸다. 정규 시즌을 우승한 빙그레는 삼성과 해태를 꺾고 올라온 정규 시즌3위 롯데 자이언츠와 격돌했다. 이글스 팬들은 그동안 번번이 자신들의 앞을 가로 막았던 해태가 아니었기에 이번에는 첫 우승을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결과는 또 다시 1승 4패의 준우승이었고, 이로써 빙그레의 4번째 한국시리즈 도전도 실패로 끝났는데 전년도 주전 유격수였던 황대연이 1991년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연습 도중 허리를 다쳐 시즌을 마감한 데다 같은 해 한국시리즈 종료 후에는 군 입대를 하여 내야수비가 갈수록 부실해져 정규시즌에서 132개 실책으로 최다실책 2위를 기록했고 이렇다할 대형투수(15선발승이상)(당시 한국시리즈 진출 팀이었던 롯데가 15선발승 이상 투수를 2명 배출(윤학길 17선발승, 염종석 15선발승))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 컸다. 특히, 전년도 16선발승으로 최다 선발승을 기록한 한용덕이 그 해(1992년) 6승을 올린 후 5월 20일부터 1승도 없이ㅣ 8연패하는 등 극심한 부진을 보여 결국 9승(모두 선발) 11패로 마감해야 했고 급기야 다음 해(1993년)까지 2년 연속 9선발승(전년도와 같은 11패)에 그쳤으며 한용덕과 같은 대전 출신인 정민철도 같은해(1992년)시즌 중반 부상으로 결장하자 좌완 소방수 송진우가 전천후로 등판해야 했다.
  • 1993년 이 해 빙그레 이글스는 부진에 시달렸다. 주축 외야수 이정훈 선수가 부상을 당했고, 장종훈 선수도 부상을 당해 시즌 아웃되었다. 베테랑 투수 한희민은 김영덕 감독과 갈등을 빚어 삼성 라이온즈로 박철희를 상대로 현금 트레이드되었고 다른 투수들은 부진했다. 이 시즌 동안은 프로 2년차를 맞이했던 투수 정민철이 13승을 거두며 홀로 고군분투했다. 1993년에는 좌완 투수 구대성 선수가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한 해이기도 했지만 구대성은 기대와 달리 프로 데뷔 첫 해에 부진했다. 1993년 빙그레 이글스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되었다. 시즌 후 그 해 11우러 1일 모그룹명을 팀으로 쓰기로 하고 한화 이글스로 구단명을 바꾸었다. 그리고 김영덕 감독도 계약 기간이 만료된 후 빙그레를 떠나게 되어 김영덕 감독의 퇴장과 함께 빙그레의 전성기도 막을 내렸다. 한편, 1989년부터 다이에 호크스의 가을 캠프에 유망주들을 보냈지만 김영덕 감독과 달리 소위 '미국통'이었던 강병철 감독이 부임하면서 일본과의 커넥션이 끊어지기도 했는데 역대 최고인 8연속 10선발승 이상(92~96년 13선발승 97년 14선발승 98년 10선발승 99년 17선발승)을 기록한 정민철과 포크볼의 황제 이상목, 고졸신인으로 들어와 아쉽게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했슴에도 3할을 치며 팬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은 박지상(이상 94년)을 끝으로 다이에 캠프보이들이 대가 끊겼다.
  • 1998년 강병철 감독이 성적 부진의 이유로 올스타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98년 7월 9일에 경질당했다. 강병철 감독은 한화 이글스 역대 감독 중 한대화 감독과 김성근 감독과 더불어 계약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경질된 감독이다. 북일고등학교 감독출신 수석코치 이희수가 감독 대항으로 남은 시진을 치렀고, 시즌 후 정식 감독이 되었다.
  • 1999년 1999년부터 새로이 양대 리그가 출범함에 따라, 각 리그 1·2위 팀이 상대 리그의 1·2위와 교차로 플레이 오프로 치르게 되었다. 매직 리그 2위인 한화 이글스는 드림 리그 1위인 두산 베이스를 맞이하여 4전 전승으로 1999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였다. 드림 리그 2위인 롯데 자이언츠는 매직 리그 1위인 삼성라이온즈와의 대결에서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4승 3패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였다. 그 해 외국인 타자 댄 로마이어와 제이 데이비스가 힘을 보탰으며, 로마이어는 그 해 45홈런을 기록했다. 정민철은 무려 18승을 기록했다. 모두 5차전을 벌인 결과 롯데 자이언츠를 4승 1패로 이기고 한화 이글스는 유일하게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였다. MVP는 구대성으로 선정되었다.
  • 2000년 우승 다음 해인 2000년, 3할 타자 3명-20홈런 타자가 5명이나 되는 타선을 갖고도 시즌 7위로 추락했다. 이유는 투수진 운영에 애를 먹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한화 이글스의 약점은 불펜이었다. 1999년 18승을 기록한 에이스 정민철의 요미우리 자이언츠 진출에 이어 전 해 14승을 거둔 이상목이 부상으로 이탈했다. 시즌 후 이희수 감독과 재계약을 포기했고, 다혈질의 댄 로마이어는 방출되었다. 시즌 후 구대성도 일본 프로 야구에 진출했다.
  • 2001년~2002년 감작스런 구대성의 공백에 한화는 2001년 내내 마무리 투수 부재에 시달렸고, 2002년에는 장종훈이 역대 최악의 성적(타율 .248/12홈런)을 기록하며 급격한 노쇠화를 보였다. 2001년 5할이 안 되는 승률로 4위에 올랐지만 준플레이오프에서 두산 베어스에게 2연패를 당하며 탈락했다. 그 해 1차 지명으로 입단한 신인 내야수 김태균이 신인왕을 차지했다. 2002년 7위를 기록한 후 이광환 감독은 경질되었으며 후임으로는 이광환 감독이 2년 계약을 맺으면서 감독 부임할 당시 수석코치를 맡았던 사람이자 지역연고(대전) 출신인 윤동균 코치가 거론됐지만 감작스럽게 팀을 떠나 좌절됐고 이광환 감독의 LG감독 1기 시절 후임으로 발탁됐는데 유승안 감독은 이광환 감독 후임 물망에 한때 거론된 윤동균 전 코치의 OB감독 시절 후임 물망에 오른 백인천 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경동고 MBC출신, 포수, 엽기적이면서 이상한 성격, 늙은 선수들을 좋아하지 않는점, 서북식 발성과 발음 등의 공통덤을 가졌다.
  • 2003년~2004년 유승안 감독이 부임한 이후에도 2003년 5위, 2004년 7위로 부진하였으며 유승안 감독은 의욕적으롤 세대교체에 나선 것이 좋았으나 노장 선수들을 지나치게 외면하여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2003년 시즌 후 프런트와의 마찰로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였던 외야수 송지만을 잃게 되었다. 2004년 6월 24일 잠실 두산전에서 3:0으로 뒤지고 있던 8회, 1사 만루의 위기, 타자는 외야수 최경화이었다. 안타 하나에도 2점이 날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점수 차가 벌어지면 경기가 힘들어질 수 있겠다고 판단한 한화 이글스의 유승안 당시 감독은 무조건 내야 병살을 유도하기 위해 시프트를 지시하게 된다. 그에 따라 유승안 감독은 좌익수 이영우를 내야로 불러들이는 내야 5인 수비망을 펼친다. 땅볼만 나왔다면 병살로 처리할 수 있었겠지만 결과는 좌측으로 날아가는 2타점 적시타였다. 이영우가 제 수비 위치에 있었다면 충분히 잡을 수 있는 타구였지만 좌익수가 없는 바람에 1점을 막으려다가 도리어 2점을 내주고 말았다. 이는 일명 유승안 시프트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다.
  • 2005년 김인식 감독의 부임 첫 해로 정규 시즌 4위의 성적으로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여 준 플레이오프에서 SK와이번스와 맞붙어 3승 2패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였으나 플레이오프에서 두산 베이스에 3전 전패를 당해 한국 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 2007년 ㅈ이콥 크루즈와 세드릭 바워스를 영입하면서 정규 시즌 3위의 성적으로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여 정규 시즌 4위 삼성 라이온즈와 맞붙었다. 2승 1패로 삼성 라이온즈에게 2006년 한국시리즈 패배를 되갚으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플레이오프에서 두산 베어스와 맞붙었으나 2005년에 이어 3전 전패의 성적으로 또 다시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 2008년 외야수 덕 클락과 좌투수 브래드 토머스를 영입하고 시즌 중반까지 상위권을 유지했으나, 시즌 중반을 지나 주전 선수들의 부진과 부상, 베이징 올림픽의 후유증 등으로 인하여 정규 시즌 5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대신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로 핵심 투수 류현진이 병역을 해결한게 다행이었고, 소집 해제로 돌아온 마정길이 새로운 셋업맨으로 부상했다.
  • 2009년 외야수 덕 클락이 시즌 후 재계약에 실패하고 넥센 히어로즈와 계약하여 이적했지만, 투수 브래드 토머스와 재계약하고 우투우타 외 야수인 빅터 디아즈를 영입하고 투타 강화를 꾀했다. 그러나 디아즈의 떨어지는 수비력과 효율성 없는 타격 능력 등을 고려하여 시즌 도중 빅터 디아즈를 방출하고 투수 에릭 연지를 영입하여 남은 시즌을 소화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또한 팀 내 최고의 타자 김태균이 4월까지 타율 4할을 넘기는 등 맹활약하였으나, 4웡ㄹ 26일 두산 베어스의 포수 최승환과 홈 승부 도중 충돌하며 뇌진탕 증세를 보였고, 이후 페이스가 급락하며 팀의 타격을 책임지는 데 실패했다. 이 시즌에는 기아 타이거증서 신종길을 상대로 한 트레이드로 영입한 외야수 강동우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전술한 여러 악재로 인하여 정규시즌 8위를 기록함으로써 2987년 팀 창단 원년 잏로 최초로 최하위를 기록하는 불명예를 당하게 된다. 한편 팀의 레전드 투수인 송진우와 정민철이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하였으며, 두선수의 배번인 21번과 23번은 영구 결번 처리되었다. 김인식 감독은 계약 기간이 만료되어 물러났다. 시즌 후 내야수 이범호와 김태균이 FA를 선언하고 일본 프로 야구에 진출하였다.
  • 2010년 상성 라이온즈 수석코치 한대화가 계약이 만료된 김인식의 후임 감독으로 전격 부임했다. 리빌딩을 주 목표로 했던 2010년에는 호세 카페얀과 홀리오 데폴라라는 2명의 우완 투수를 용병으로 영입했다. 시즌 전 시범 경기 중 셋업맨 마정길이 며일영을 상대로 넥센 히어로즈에 현금 트레이드되었지만, 마일영응ㄴ 부상으로 인해 이적 후에도 부진했다. 팀의 투수진을 책임지고 있던 송진우, 정민철 등의 베테랑 투수들이 2009년 시즌 중 은퇴하는 바람에 유원상, 김혁민 등의 신인급 투수들이 팀의 선발진을 급하게 맡게 되어 에이스 류현진을 제외한 투수진이 괴멸해 버리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리고 강동우와 김태완 등 팀의 주전 타자들이 부진하여성적이 암울한 전망을 나타내었으나 경찰청에서 제대한 우타 외야수 최진행이 새로운 다이너마이트 주포로 거듭남으로써 암울한 한화 구단에 유일한 희망이 되었다. 그 해 최진행은 이대호에 이어 홈런 2위를 기록했다.


각주

  1. 한화 이글스〉, 《위키백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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