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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19일 (목) 16:55 기준 최신판

2세기 그리스의 고지도

고지도(古地圖, old map)란 근대적 측량술과 지도제작술이 발달하기 이전에 만들어진 회화적인 지도를 말한다.

고지도는 근대적인 투영법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의 회화적인 지도를 말한다. 지도는 주로 행정적·군사적 목적에서 제작되었으나 실학(實學)이 일어나면서 산업·경제·문화에 대한 관심이 반영되어 산맥하천·항만·도로망 등의 표시가 정밀해졌다. 고지도는 지도에 수록되는 지역의 규모에 따라 세계지도, 천하지도, 전국지도, 지방지도, 군현지도, 관방지도로 분류할 수 있다.

현재 전해지는 고지도의 대부분은 조선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책이나 첩의 각 면을 1장으로 간주하면 전국적으로 최소 2만 장 이상 남아 있다. 대부분 국가와 각 대학 도서관 ·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과 국립중앙도서관 등에서 인터넷으로 서비스하고 있다.

개요[편집]

고지도는 작성연대가 오래되고, 특히 지도제작의 기술사적(技術史的)인 면에서 현대지도와 구별되는 지도이다.

서양의 고지도는 그 역사가 문학시대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선사시대의 것이 발견되고 있으며, 이집트의 파피루스 지도나 바빌로니아의 토판(土板)지도 등이 전래되고 있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지도제작이 활발하여 에라토스테네스 ·스트라본 등이 지도를 만들었으나, 후세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K.프토레마이오스가 그의 저서 《지리학》의 부록으로 게재한 세계지도였다.

중세에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세계관을 지도화한 TO지도가 생겨났고, 13세기에는 이탈리아에서 지중해의 항해자에 의해 지중해 ·흑해를 중심으로 한 정밀한 해도인 《포르토라노 해도(Portolano:Portolanchart)》가 제작되었다.

그 뒤 해상교통의 중심이 대서양으로 옮겨지자 네덜란드가 지도제작의 중심지가 되어, 폴란드 출신의 지도학자 G.메르카토르(1512∼94)가 ‘메르카토르 도법’을 창안함으로써 서양의 고지도는 현대지도로 변모하게 되었다. 한편, 동양에서도 중국을 중심으로 많은 지도가 제작되었으리라고 여겨지나, 현존하는 최고의 지도는 11세기에 제작된 《우적도(禹跡圖)》와 《화이도(華夷圖)》이다.

그 뒤 송(宋) ·원(元) ·명(明)나라로 내려오면서 독자적인 지도제작방법의 발전을 이루었으나, 명 말기에 전래된 유럽의 근대적 지도지식으로 큰 변혁을 맞았다. 한국에서도 이미 삼국시대부터 지도를 사용한 사실이 여러 문헌을 통해 확인되고 있으나, 본격적인 지도제작이 시작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부터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1402년(태종 2) 이희(李薈)가 제작한 《팔도도(八道圖)》, 16세기에 제작된 《역대제왕혼일강리도(歷代帝王混一疆里圖)》, 세종연대에 정척(鄭陟) ·양성지(梁誠之) 등이 왕명을 받아 작성한 《동국지도(東國地圖)》, 1678년(숙종 4) 정상기(鄭尙驥)가 처음으로 축척법을 써서 작성한 《동국지도》 및 1834년(순조 34) 김정호(金正浩)가 제작한 《청구도(靑丘圖)》, 1861년(철종 12)에 역시 김정호에 의해 완성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등을 들 수 있다.

위의 고지도 중 《팔도도》는 현재 전해지지 않고, 《역대제왕혼일강리도》는 그 사본이 일본에 소장되어 있다. 이 밖에 관념적인 세계지도인 《천하도(天下圖)》가 있고, 읍지(邑誌)의 편찬과 함께 출판된 각 읍지도(邑地圖) 등도 고지도로 중요시된다.

한국 고지도[편집]

반구대암각화
일본 용곡대학교 소장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모사본.
『신증동국여지승람』중 <팔도총도>. 오른쪽 아래에 대마도가 그려져 있다.
원형 천하도는 상상의 세계 지도이며 내대륙, 내해, 외대륙, 외해의 구조를 띄었다. 내대륙에 중국, 조선, 일본국, 서역 제국의 이름이 있다. 외대륙은 존재하지 않는 나라이며 중국 최고(最古)의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에 나오는 나라들이다. 세상의 중심인 중국은 황색으로, 동은 청색, 서는 백색, 남은 적색, 북은 흑색이다.
'T-O' 지도
《천하지도》에 수록된 <태극도> 영남대학교박물관 소장
《회입곤여만국전도》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마테오 리치(Ricci,M., 利瑪竇)가 북경(北京)에서 제작한 것으로 1708년(숙종 34) 조선에서 모사한 서양식 세계지도 보물 제849호. 최초로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였다.
《여지도》중 <천하도지도>
정상기의 《동국대전도》
《여지도》중 <아국총도>
방안지도:《영남지도》중 <대구지도>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보물 제850-3호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조선방역지도(朝鮮方域之圖).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지도에는 조선 8도의 주현(州縣)과 수영(水營) 및 병영(兵營)이 표시되었는데 특히 각 군과 현마다 색을 다르게 하여 알아보기 쉽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산과 강의 경계도 자세하고 정확하게 표시하고 있다.

조선 전기의 지도[편집]

한국 지도의 역사는 암각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3,000년 전의 선사인들이 새긴 것으로 추정하는 울산시 언양읍 대곡리의 반구대암각화(국보 제285호)는 선사시대의 언양 지역의 환경과 당시의 생활 모습을 알려 주는 훌륭한 지도이다.

현존하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뚜렷한 지도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평안남도 순안군의 '요동성총'의 성곽도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단독으로 독립된 지도는 조선시대 이후에 제작된 것만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남아 있는 우리나라의 단독 고지도는 모두 조선시대 이후의 지도이다.

현전하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단독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1402)도 조선 건국 10년 후 국가적인 관심 아래 만든 지도였다. 이 지도는 일본으로부터 유럽, 아프리카까지 당시의 전 세계를 종합적으로 나타낸, 당대 최고 수준의 세계지도이다. 이 지도를 통해 고려 및 조선 초의 지도 제작 수준과 지도 제작에 대한 국가의 관심의 지대함, 동서문화 교류의 궤적, 당시 세계에 대한 인식 등을 가늠할 수 있다.

조선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 그린 조선전도(朝鮮全圖)는 우리 국토를 표현하고 상징하는 지도이다. 조선 전기에는 두 가지 유형의 전도가 제작되어 조선 후기까지 영향을 미쳤다.

첫째는 국가에서 정확한 지도 제작을 목적으로 하여 만든 사실적이고 정확한 조선전도이다. 이는 새로운 왕조의 개창에 따른 행정적, 군사적 측면에서 절실히 필요한 지도였다. 태종대에 이회(李薈)는 이미 ≪팔도지도(八道地圖)≫를 제작하였다. 특히 세종·세조대의 과학기술의 발전과 지도 제작에 대한 적극적인 노력은 세조대에 정척(鄭陟)과 양성지(梁誠之)의 ≪동국지도(東國地圖)≫의 제작으로 결실을 맺었으나 이 두 지도는 전하지 않는다. 이 지도의 유형으로 현전하는 지도는 16세기 중엽에 제작된 ≪조선방역지도(朝鮮方域之圖)≫(국보제248호)이다.

둘째는 민간에서 지도를 만들 때 원형이 되었던 '동람도(東覽圖)'식 지도이다. 조선 전기에 여러 차례 시행되었던 지리지 편찬 사업을 집대성한 전국지리지(全國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1)에는 전국지도인 <팔도총도(八道總圖)>와 팔도(八道)의 도별지도가 포함되어 있어 지도와 지지(地志)의 결합을 보여 주는데, 이를 '동람도'로 약칭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지도는 매우 간략한 형태였으나 목판으로 인쇄하여 널리 보급된 책에 수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를 모사한 지도들이 필사본 또는 목판본으로 수많이 제작되었다.

고지도가 포함하고 있는 대상 지역을 기준으로 나누었을 때 지구상에서 가장 넓은 지역 즉 세계를 그린 지도가 세계지도이다. 세계지도를 통해 우리는 우리 조상들이 지니고 있던 세계관과 우주관 즉 세계에 대한 인식을 살필 수 있다. 이 지도들은 종교적 세계, 실재 세계 및 외국에 대한 인식 범위와 그 변화, 서양 및 외국의 영향, 서양 각국 지명의 표기와 변모, 세계의 측정 및 지도 제작의 기술 수준 등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한국에는 현재 조선시대 이전에 제작된 단독 지도는 전하는 것이 없다. 고려 말 원나라의 침입은 한국의 문화재에 많은 손실을 입혔지만, 특히 지도의 경우 치명적 훼손이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전하는 조선시대의 세계지도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동양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그린 세계지도이다. 동양적 방식의 세계지도는 다시 사실적 세계지도, 동아시아 중심의 세계지도, 한국에서 독특하게 발달한 상상적 세계지도인 원형 천하도(天下圖)의 세 가지 하위 유형이 있다.

둘째는, 서구에서 도입된 서구식 세계지도를 바탕으로 한 서양식 세계지도로서, 투영법과 경위선을 바탕으로 하여 만든 근대적 세계지도이다. 서양의 중세의 세계지도(mappaemundi)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교본이었다. 중세 유럽의 지도는 주로 수도사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그들은 지도에 성경을 적용했고 지도를 신학의 은유로 사용했다. 그들의 동쪽 방향 선호는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셨다"라고 기록한 창세기 2장 8절에서 유래되었다. 8~15세기에는 소위 'T-O'지도가 일반화되어 있었다. 'T'는 '타우'라고 알려진 십자가 형태였는데,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했다. 지도 중앙에는 예루살렘이 있었고, 세 대륙은 삼위일체를 의미했다. 또한 'T-O'지도는 동쪽을 향했으며 T선은 물길을 표시했다. 한편 T의 수직축은 지중해였고 나일강과 돈강(혹은 다뉴브강)이 합쳐져 가로축을 이루었다. 이 같은 성경과 '신성한' 지리학의 통합은 지도 제작자의 심리적 투영과 비교적 덜 객관적인 '현실'을 해석함에 있어서 문화의 중요성을 잘 설명해 준다(클링호퍼, 2007). 서양의 'T-O'지도에 비견할만한 우리나라 중세 지도를 대표하는 지도는 천하도이다. 20세기 초부터 주목을 받아왔으며, 천하도의 기원은 물론, 지도에 담긴 상징이나 사상 읽기에 대해 비교적 연구가 풍부하다.

천하도는 상상의 세계를 표현한 상상적 세계지도이다. 둥근 원 안에 세계를 그렸기 때문에 '원형 천하도'라고 부르며,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동양의 전통적인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잘 보여 주는 지도이다. 내해를 감싸는 외대륙에는 일목국(一目國), 삼수국(三首國), 삼신국(三身國), 불사국(不死國),우민국(羽民國) 등 대부분 가상의 국가들이 그려져 있는데, 대부분 중국 고대의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에 수록된 지명들이다. 이들 지명은 고대 수목 신앙, 도가사상 등 당시인들이 지녔던 다양한 정신세계를 반영하는 점에서 주목받아 왔다.

조선 후기의 지도 발달[편집]

17세기 후반 이후 조선의 지도에는 현저한 발전이 있었다.

첫째, 대축척지도의 발달이다. 축척이 큰 지도가 만들어짐에 따라 지도의 크기도 대형화되었으며, 이에 따라 지도에 표시되는 내용이 정확, 상세하고 풍부해졌다.

둘째, 다양한 종류의 지도가 활발하게 편찬되었다. 일반적인 목적의 지역지도 외에 특수한 목적의 지도나 주제도가 활성화되었다. 중국의 만주 지역과 조선의 서북쪽을 함께 그린 이이명(李頤命)의 ≪요계관방지도(遼薊關防地圖)≫(1706)·≪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西北彼我兩界萬里一覽之圖)≫ 유형의 지도, 성곽지도, 해안을 그린 지도, 봉수도(烽燧圖), 궁궐도, 관청을 그린 관아도, 목장지도 등 여러 유형의 지도들이 제작되었다. 이 지도들은 통치와 행정의 수단으로 지도의 효용성이 일반화되고 있음과, 변경 지방의 지역 성장,중요성의 인식 증대 등을 보여 준다.

셋째, 지방 각 군현을 그린 군현 지도의 제작이 급증하였다.

넷째, 지도의 보급이 확대되어 민간에서 지도의 소장과 제작이 일반화되었으며, 지도의 양적 증가가 두드러졌다. 이는 지도책, 목판본 지도, 한글․한문 병용 지도, 지지에 삽입된 지도, 휴대용으로 지참할 수 있도록 만든 소형 수진본(袖珍本) 지도의 증가로 나타났다.

다섯째, 서양 지도와 서양의 지리지식이 유입, 수용되면서, 지구와 지도 제작에 관한 새로운 인식이 확대되었다. 명나라 말기에 중국에 들어온 예수회 선교사들이 간행한 한역(漢譯) 세계지도가 도입되면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인식과 세계관의 형성에 자극을 주었다. 한역 세계지도 가운데 영향을 주었던 지도는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이마두利瑪竇)의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1602년), 얼레니(Giulio Aleni ; 艾儒略)의 「만국전도(萬國全圖)」,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南懷仁)의 ≪곤여전도(坤輿全圖)≫(1674년;북경, 1856년;廣東)와 『곤여도설(坤輿圖說)』등이다. 1834년(순조 34)에는 최한기가 ≪지구전후도 地球前後圖≫를, 1857년에는 『지구전요 地球典要』를 제작·저술하는 등 서양 세계에 대하여 당대 지식인들의 관심이 컸음을 보여 준다.

조선 후기의 대축척지도의 발달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지도학자는 정상기(鄭尙驥, 1678~1752)와 그 후손들이었다. 김정호보다 한 세기 앞선 시기에 활동했던 실학자인 정상기는 당시의 지도 제작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제작하였다. 이 지도를 그의 아들인 정항령(鄭恒齡, 1710~1770), 손자 정원림(鄭元霖, 1731~1800)과 종손 정수영(鄭遂榮, 1743~1831)이 한층 정교하고 훌륭한 지도로 발전시켜 갔다. 4대에 걸쳐 지도 제작이 계속되었고, 그 지도를 여러 사람들이 모사를 하였기 때문에 ≪동국지도≫는 사본이 수십여 종 남아 있다.

정상기의 지도는 일정한 축척을 사용하여 도별 지도를 합하면 전도가 되도록 고안되었으며, 축척인 백리척(百里尺)을 지도에 명확하게 표시하여 거리를 계산할 수 있도록 한 점, 축척 약 1:420.000의 대축척지도로 커짐에 따라 도로봉수·지명 등을 상세하게 나타낸 점, 조선의 윤곽 특히 북부 지방의 윤곽이 정확해진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1757년(영조 33)에는 국왕 영조가 이 지도를 보고 감탄하면서 모사하여 비치하도록 명함은 물론,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가 나올 때까지 조선 지도들은 대부분 이 지도의 영향을 오랫동안 받았다.

이러한 대축척지도의 발달로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전국 지도는 ≪대동여지도≫와 거의 유사한 윤곽을 가진 지도들이 많이 제작되었다. 18세기 말에 제작된 규장각 소장의 ≪여지도(輿地圖)≫첩이나 호암미술관 소장 ≪해동도(海東圖)≫도 그러한 예이다.

군현지도의 활발한 제작과 지역 정보의 축적[편집]

조선 후기 지도 발달에서 주목할 또 다른 측면은 지방 각 군현의 지도 즉 군현지도(郡縣地圖)의 제작이다. 분도(군현 지도)는 당시 사람들의 지역에 대한 인식과 그 변화를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자료이다.

16세기 이후 꾸준하게 편찬된 각 지방 지리지인 읍지(邑誌)에 첨부된 군현지도와 함께 조선 후기에는 개별 군현지도의 제작이 급증하였다. 18세기 이후에 전개된 군현지도의 활성화는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발달과 어우러져 예술성이 뛰어난 회화식 지도를 발달시켰다. 회화식 지도는 지역의 정보와 지역의 감성을 예술로 승화시켜 예술적 지도 유형을 형성하였다. 1872년(고종 9)에 전국적으로 제작된 회화식 지도들은 개항으로 전 국토가 급격한 변화를 겪기 이전, 조선의 전국 각 군현의 모습을 초상화처럼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전국 각 지방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도록 전국 모든 군현의 지도를 수록한 전국 군현지도집(郡縣地圖集)의 제작이 활발하였다. 여러 곳에 전하는 6책~8책의 ≪여지도(輿地圖)≫, ≪광여도(廣輿圖)≫, ≪해동지도(海東地圖)≫, ≪여지편람(輿地便覽)≫ 등의 지도책이 그것이다. 이들 전국 읍지와 군현지도집은 전국의 모든 군현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므로 전 국토에 대한 균등한 관심, 지역에 대한 종합적이고 균형적인 이해와 파악, 지도의 행정적 이용과 대중화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에 따라 당시까지 상대적으로 관심에서 소외되었던 북방지역과 도서지역에 대한 관심의 증대, 이들 지역과의 접촉이나 연계의 증가와 더불어 이들 지역에 대한 지도의 제작이 증가한 것이다.

군현지도 중에서 또 주목할만한 것은 방안지도(方眼地圖)의 발달이다. 방안지도는 좌표지도, 경위선표식지도로도 불리는데, 일정한 거리의 방안 좌표 즉 눈금을 만들고 지도의 모든 부분이 같은 비율이 되도록 한 지도이다. 방안은 일정한 간격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그 자체가 축척의 역할을 한다. 고산자 김정호가 만든 전국지도인 ≪청구도(靑邱圖)≫(1834)는 전국을 남북 29층 동서 22판으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1861)는 남북 22층 동서 19판으로 구획하고, 10리를 기본으로 한 방안지도이다. 방안지도는 전도, 도별도, 군현지도 등 모든 유형의 지도에 다 활용되었으나, 대표적인 방안지도는 규장각에 소장된 ≪영남지도(嶺南地圖)≫ ≪호남지도(湖南地圖)≫ 등 1740년대에 제작된, 1리(里) 방안지도이다. 이들은 약 1:53,000~1:64,000의 대축척지도이다.

18세기 중엽에 1리 방안의 대축척지도를 전국적으로 제작하였던 것은 지도 발달사에서 매우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 밖에 10리, 20리, 30리, 100리 방안지도 등의 지도도 있다. 이들 방안 군현지도집은 한 도폭 안에서, 그리고 한 지도 안의 모든 군현에 비교적 일정한 축척을 적용함으로써 정확한 지도를 제작하려 했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지도 안에 1리, 혹은 10리, 20리 방안을 그리고 그 위에 지도를 그리게 되면, 지역과 지역 간의 거리 파악이나 방위, 위치 등이 더욱 정확하고 정교하게 된다.

지도의 대중화와 지리 인식의 확대[편집]

한국 지도의 백미로 꼽히는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는 내용상으로는 지지(地志)와 조선 후기에 발달하였던 실학적 지리학의 성과를 집대성하여 풍부하고 상세한 정보를 수록함은 물론, 지도학적으로는 조선 후기에 꾸준히 이루어졌던 지도 발달의 성과를 종합한 지도이다. 그것은 지도의 윤곽, 형태, 내용, 체재 등 모든 면에서 앞선 시기의 여러 지도의 장점을 취한 것이었다.

≪대동여지도≫의 가장 뛰어난 점은 전국지도·도별지도와, 상세한 군현지도의 장점을 합하여 군현지도 수준의 풍부한 내용을 지니면서도 전국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일목요연한 대축척 전국 지도를 만들었던 데에 있다. 전국지도를 휴대·열람하기에 간편한 분첩절첩식(分帖折疊式) 형태로 고안하고, 목판본으로 인쇄하여 간행을 함으로써 지도의 대중화와 보급에 기여하였다. 그동안 관청에 소장되었던 각 지역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그린 간편한 지도를 일반 민간에서도 볼 수 있고, 지닐 수 있게 된 것이다.

김정호는 1830~1840년대에 ≪청구도(靑邱圖)≫(1834)와 『동여도지(東輿圖志)』(20책, 1834-1844), ≪수선전도(首善全圖)≫(1840년대)를, 1850년대에 ≪동여도(東輿圖)≫와 『여도비지(輿圖備志)』(20책, 1853~1856)를, 1860년대에 ≪대동여지도≫(1861, 1864)와 『대동지지』(15책, 1861~1866)를 편찬하였다. ≪동여도≫에 대해서는 김정호의 작 인가에 대하여 이견이 있으며, 제작 연대도 1857년 설과 1872년 설이 있다. 이처럼 김정호는 지도 외에도 전국 각 지역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지리지를 3종이나 남겼다. 이 지리지들은 조선 후기에 제작된 가장 훌륭한 사찬(私撰) 전국지리지(全國地理志)이다. 이러한 방대한 지리지 편찬은 김정호가 단순한 지도 제작자가 아니라, 많은 자료를 섭렵한 지리 전문가이자 실학자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나아가 고산자 김정호는 지지(地誌)와 지도(地圖)가 국토와 지역의 모습, 그리고 지역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구조를 이해하는 자료이며, 이들이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인지하고, 그러한 이해를 지도와 지리지 제작으로 실천한 진정한 지리학자였다. ≪청구도≫와 ≪대동여지도≫ 등 김정호가 만든 지도들은 전도(全圖)이다. 전도는 우리나라 전체를 그린 지도이므로, 다른 어느 유형의 지도보다도 한국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지도로서 의의를 지닌다. 김정호가 만든 전국지도들은 현존하는 전국지도 중 가장 크다. 책자나 절첩식 형태로 고안되었기 때문에 접힌 지도책의 크기는 세로 30㎝ 가로 20㎝이지만, 지도 전체를 펼쳐 이으면 세로 6.6m 가로 4.2m의 대형지도가 된다. 이 지도들은 지도에 축척을 명시한 축척지도(縮尺地圖)이며, 경위선표식(經緯線表式) 지도이다. 경위선표식 지도란 비교적 일정한 크기의 눈금(方眼)을 바탕에 그려 축척을 나타낸 지도로서 선표도(線表圖), 방안좌표지도(方眼座標地圖) 등으로 불린다.

≪대동여지도≫는 세로 30㎝ 가로 20㎝의 지도 한 면이 남북 120리 동서 80리가 되도록 구획되어, 이로써 축척을 나타내고 지도 위에서 쉽게 거리를 짐작할 수 있게 고안되었다. 축척은 지도 내용 속에도 표시되었다. 즉 도로에 10리마다 점을 찍어 거리를 나타냈다. 특히 도로상의 10리 점은 그 간격이 일정하지 않아 도로의 지형적인 조건을 부분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세계의 지도 발달사를 집대성한 '지도학사 The History of Cartography' 시리즈의 한국편을 집필한 레드야드(Gari Ledyard)는 ≪대동여지도≫를 한국의 지도 중에서 지도학적으로 가장 우수한 지도라고 평했다. 그것은 ≪대동여지도≫가 글씨를 가능한 한 줄이고, 표현 내용과 정보를 기호화하는 방식을 확립하여 현대 지도와 같은 세련된 형식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받은 찬사였다.

≪대동여지도≫의 내용과 표현상 가장 큰 특징은 산과 물의 특징적인 표현과 분별성이다. ≪대동여지도≫를 보면 산이 가장 강하게 눈에 들어 온다. 그 이유는 산을 독립된 하나의 봉우리로 표현하지 않고, 이어진 산줄기(산맥)로 나타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산줄기의 굵기를 달리하여 산의 크기와 높이를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람의 삶의 터전으로서의 지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인 분수계(分水界)와 산줄기가 이를 통해 명료하게 드러난다. 빗방울은 산 능선 위에서 갈라져 서로 다른 방향의 산 사면으로 떨어져 모여 강줄기를 이룬다. 산이 물을 나누는 분수계라는 점은 산이 인간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측면인 것이다. 김정호가 만든 지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또 다른 측면은 도로, 군현의 경계 표시, 봉수, 역원, 1,100여 개에 달하는 섬(島嶼), 목장, 그리고 역사지리적으로 중요한 옛 지명들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도로 표현이 독특해 많은 관심을 받아 왔다. ≪대동여지도≫에 도로는 직선으로 표시되었는데, 이는 이전의 지도에서는 보기 드문 방식이었다. 이는 ≪대동여지도≫가 목판본이기 때문에 흑백으로 인쇄될 수밖에 없었고 곡선으로 표현되는 하천과의 중복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하천과 도로를 더욱 명확히 구별하기 위해 10리마다 도로에 점을 찍었는데, 이 점은 축척과 함께 이용자에게 길의 거리를 알려 주는 매우 편리한 거리 표현 방식이다.

≪대동여지도≫의 가장 큰 장점이자 김정호가 앞서 만든 전도에 비해 개선된 점이 목판본 지도 즉 인쇄본 지도라는 점이다. ≪대동여지도≫가 유명해진 것은 목판본 지도이므로 여러 본을 찍을 수 있고 많은 사람에게 보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지도가 소수의 정치가, 관리, 학자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김정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국민들도 국토의 각 지역에 대한 정보를 가져야 하며, 국토의 모습을 담은 지도가 많은 사람들에게 보급되고 전달되어 국민의 교양으로 뿌리내려야 함은 물론, 국가가 어지러울 때일수록 지도와 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중앙이나 지방 관청에는 상세하고 정확한 지도들이 소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지도는 일반인들은 볼 수도, 이용할 수도 없었다. 김정호는 정밀한 지도의 보급이라는 사회적 욕구와 변화를 인식하고 그것을 실현하였던 측면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서울 목판지도의 백미로 꼽히는 ≪수선전도≫를 목판본으로 만든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대동여지도≫는 목판본 지도 중에서도 가장 정교하면서도 품격을 갖춘 지도이다. ≪대동여지도≫는 형태와 윤곽의 정확함, 내용상의 풍부함 위에 목판으로서의 아름다움과 선명함을 지니고 있다. 정밀한 도로와 하천, 정돈된 글씨와 기호들, 살아 움직이는 듯한 힘있는 산줄기의 조화와 명료함은 다른 어느 지도도 따를 수 없는 판화로서의 뛰어남을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 고산자 김정호는 위대한 지도학자이면서 훌륭한 전각가였으며, 지도의 예술적 가치를 실현한 예술가이기도 하다.

≪대동여지도≫는 현전하는 조선 지도 중 가장 큰 전국지도(全圖)이면서도 보기 쉽고 가지고 다니기 쉽게 만든 지도이다. 김정호는 이를 위해 ≪대동여지도≫를 분첩절첩식(分帖折疊式) 형태로 만들었다. 분첩절첩식 지도는 책자 형태의 지도에 비해 간략하고, 간직하거나 보거나 가지고 다니기에 매우 편리하다. 또한 절첩식 지도의 장점은 부분으로 자세히 볼 수 있고, 서로 이어 볼 수 있어 분합(分合)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를 남북으로 120리 간격, 22층으로 구분하여 하나의 층을 1첩으로 만들고 총 22첩의 지도를 상하로 연결하여 전국지도가 되도록 고안하였다. 1층(첩)의 지도는 동서로 80리 간격으로 구분하여 1절(折 또는 1版)로 하고 1절을 병풍 또는 아코디언처럼 접고 펼 수 있는 절첩식 지도를 만들었다. 22첩(帖)을 연결하면 전체가 되며, 하나의 첩은 다시 접혀져 병풍처럼 접고 펼 수 있는 형태이다. 그러므로 부분만 필요할 경우 일부분만 뽑아서 휴대하며 참고할 수 있다.

김정호는 지지와 지도를 상호보완적인 존재로 인식하였으며, 지도의 미진한 곳을 지지로 밝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의 실천을 위하여 개인의 힘으로 지도와 지지를 집대성하고, 지도와 지지의 결합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결국 그가 이룩한 지도와 지지의 제작, 편찬은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토 정보를 집대성하여 구축하고, 체계화한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국토 정보화의 중요성을 제시하고, 실천한 선각자라 할 수 있다. 그가 만든 지도와 지지들은 전통적인 동양식 지도와 지지의 마지막 금자탑이다. 그의 작품들은 조선시대 사람들의 국토관과 지역에 대한 인식을 분명하게 투영하고 있는 점에서 시대성을 발휘하며, 이는 지도와 지지가 성취해야 할 본질에 성공적으로 도달하였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고산자 김정호는 지도와 지지를 제작, 편찬한 데서 나아가 이들 자료를 간행하였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지도 간행을 달성한 것은 국토에 대한 정보를 국가와 지배층이 독점하는 것에 대한 비판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며, 국토 정보를 일반에게 보급하여 국민들이 공유할 대상으로 인식 했음을 보여 준 것이다. 국토 정보의 구축과 체계화는 물론, 정보를 보급하고 대중화하려 하였던 그의 사상이 급변하고 있던 당시의 정치․사회적인 현실 속에서 더 돋보인다.

또한 ≪대동여지도≫에서 볼 수 있는 휴대용 형태의 지도 제작은 상세하고 풍부한 국토 정보를 이동하면서 이용할 수 있도록 기획하였다는 점에서 선진적이다. 이용자와 수요자를 고려한 것이며, 역시 지역 정보의 실제적인 활용을 추구한 것이다. 한미한 계급 출신이었던 김정호가 광범위한 국토 정보를 구축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학문을 주도하였던 사회계층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으로서도 의미가 크다. 즉 조선 전기에는 국가 주도의 지도․지리지 편찬이 이루어졌고, 조선 후기에는 국가와 양반층이 중심이 되어 지도와 지리지를 만들었다.

19세기에 이르러 일반 평민층에서도 고급 국토 정보에 접근하여 그것을 한층 발전시켜 새로운 국토 정보 체계로 구축할 수 있었다는 것은 김정호 사상의 진보성을 보여 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개인을 탄생시켰던 조선 사회와 국토의 변모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에는 이처럼 민간에서 지도 제작에 큰 공헌을 하였다. 정상기, 정항령, 정후조, 그리고 이 글에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윤영, 황엽, 신경준, 최한기 등 많은 사람의 노력과, 관청의 화원과 지도 제작자들의 계속된 노력 위에 김정호는 서 있다. 사실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대동여지도≫에 비견할 만한 정확한 윤곽을 가진 전국지도,≪대동여지도≫보다 큰 축척을 가진 1리 방안지도가 만들어질 정도로 상세한 지도들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그 지도를 볼 수도, 이용할 수도 없었다. 김정호는 정밀한 지도의 보급이라는 사회적 욕구와 변화를 인식하고 그것을 실현하였던 것이다.

특수도와 주제도[편집]

대부분의 지도들은 한 지역을 대상으로 지역의 여러 현상을 종합적으로 표현하며, 이들을 일반지도라 부른다. 이와 달리 지역 내의 특정 현상이나 주제를 중심으로 그린 지도를 특수도 또는 특수지도, 주제도라 부른다.

오늘날 관광지도, 교통지도, 기상도, 임야도, 역사지도, 항공도, 지질도, 인구분포도 등 다양한 유형의 지도들이 이러한 유형에 속한다.

조선시대에는 특수지도로 궁궐도, 관청도, 명승도, 천문도, 산도(山圖), 도로지도, 휴대용 수진본지도, 역사지도, 사찰도, 가옥도 등이 이의 대표적인 지도들이었으며, 조선 후기에 양적, 질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다.

궁궐도, 관청도, 천문도 등 중앙정부나 관청에서 제작하거나, 관직을 지낸 사대부 계층에서 주로 만들고 이용했던 특수도들은 크기가 큰 대형본이 많으며, 화원들의 솜씨가 돋보이는 명품들이 많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면 다양한 종류의 특수도들이 유행하게 된다. 대표적인 지도 유형으로 명승도, 수진본지도, 도로지도, 산도, 사찰도, 역사지도, 목장지도, 촌락지도, 마을지도 등을 꼽을 수 있다.

특히 18세기에는 지역 간의 왕래와 유통이 증가했을 뿐 아니라 여행이나 유람, 관광이 늘어나 각종 여행기나 명승지나 경승지 등 지역의 아름다운 경관을 사실적으로 그린 진경산수화가 지도와 함께 발달하였다.

고지도의 이해[편집]

지도와 마주하게 되면 세 단계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첫째 단계는 지도 '보기'이다. 지도의 채색, 형태의 옳고 그름, 방향, 거리 등을 눈으로 보고, 지도가 정확한지, 내가 원하는 내용이 있는지 등을 확인하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지도 '읽기'이다. 지도의 초점이 무엇인가, 어떤 내용은 왜 그렇게 크게 그려져 있는가, 왜 잘못 그려져 있는가 등을 머리로, 지식으로 파악하는 일이다. 다음, 지도 이해하기의 마지막 단계는 지도에 침잠하기 즉 감상하기이다. 지도와 하나가 되어 지도를 즐기면서 지도에 몰입하는 경지로서, 가슴으로 지도를 이해하는 단계다. 이 세 과정의 이해하기는 옛 지도일수록 요청된다. 어느 단계까지 지도와 마주하였느냐에 따라 같은 지도에 대해서도 평가가 달라진다. 특히 회화식 지도의 경우 그러하다. 한국 고지도의 특징은 회화식지도 즉 그림지도가 많은 점이다.

우리 선조들은 지역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지도를 제작하면서도, 예술품으로 승화 시키고자 하였다. 족자나 병풍으로 만들어 감상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였다. 회화식지도의 가치가 발휘된 지도는 군현지도나 궁궐도․관아도 같은 특수도였다.

철옹성이라 불렸던 평안도 영변의 ≪철옹성전도 鐵瓮城全圖≫, 복숭아꽃이 만발한 ≪전주부지도 全州府地圖≫, 원산의 개항기 모습을 시원스레 그린 ≪원산지도 元山地圖≫, 삼도수군통제영 즉 통영의 모습을 그린 ≪통영지도 統營地圖≫, 10폭 병풍으로 짜놓은 ≪함흥지도 咸興地圖≫ 등은 분명히 한 폭의 풍경화이다.

그림지도의 장점은 이해가 쉽고 그 지역의 특성을 잘 반영해 주는 점에 있다. 현대의 5만 분의 1 지형도를 보려면 지도에 대한 기본 상식이 필요하다. 등고선의 개념도 알아야 하고, 기호가 무엇을 표현하는 것인지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림지도는 눈으로 보는 순간 그 지역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며, 지역의 산천과 마을, 도로 등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지도를 만드는 사람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은 생략하고, 강조하고 싶은 내용, 알려 주고 싶은 내용을 자세하게 알려줄 수 있는 장점도 있다.

회화식 지도 즉 그림지도는 원시적인 형태의 지도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지도가 일반에 가장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는 지도 양식이다. 기호에 대한 지식, 설명이 필요 없이 지역에 곧바로 도달할 수 있으며, 예술적 감동까지 줄 수 있어 감상을 위한 예술품으로 지도가 가까이 곁에 있을 수 있다. 옛 지도는 보편적인 가치와 특수한 가치의 양 측면에서 파악해야 지도의 본래의 면모에 접근할 수 있다. 보편성이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누구에게도 인정받을 수 있는 지도로서의 특성과 내용을 얼마나 정확하게 담고 있는가 하는 내용과 형식의 문제이다.

지도의 일차적인 목적은 특정 지역의 자연환경 및 인문환경의 모습과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지도의 내용이 얼마나 정확하고 풍부한가가 지도의 가치를 평가하는 보편적인 기준이 된다. 우리의 옛 지도 중 정상기의 지도, 김정호의 지도를 훌륭하고 과학적인 지도로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지도의 특수한 가치란 지도를 심리학적, 사회학적, 인류학적 측면에서 관찰하고, 지도에 반영된 지리적 인식을 파악하는 일이다. 정신사로서의 미술사나 도상학(iconography)적인 연구와도 관련된다. 우리가 흔히 부정확한 지도로 치부해 버리는 지도 중에는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세계관, 공간관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많다. 옛 지도는 일차적으로는 그 지도를 그린 사람의 정신세계가 반영된 것이지만, 나아가서는 그러한 지도를 그릴 수 있도록 허용한 이용자나 사회 분위기 속에서 탄생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대인들이 옛 지도를 보면서 느끼는 이질감이 있다. 제주지도인 ≪탐라도 耽羅圖≫와 서울지도인 ≪도성도 都城圖≫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지도의 위쪽을 남쪽으로 표시한 방위의 문제, 읍 중심부의 상세한 표현과 주변과의 비대칭, 읍 중심부의 위치를 지도의 중앙에 그리는 것, 글씨들이 여러 방향으로 누워 있는 등의 표현은 당시의 지역을 바라보는 사고 즉 서울․임금․읍치(邑治) 중심의 사고를 반영하는 것이다.

비사실적이고 상상적인 세계관을 보여 주는 원형 "천하도"는 분명히 비과학적이고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지도는 현실의 땅만을 그려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미지의 땅, 마음속의 땅, 상상의 나라들을 조선인은 지도로 형상화한 것이다. 상상의 세계는 인간의 정신세계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역사적으로도 큰 의의가 있다.

흔히 우리는 정확한 지도만을 훌륭한 지도로 평가한다. 그것을 서양의 일부 학자들은 '과학적 쇼비니즘'이라 부른다. 옛 지도는 오늘날의 지도처럼 과학성 또는 사실성이라는 기준만으로 평가될 수 없다. 지도의 우수성을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과학성인가, 정확성과 사실성인가, 예술성과 아름다움인가, 편의성인가, 권위성인가, 이해의 용이성 즉 읽기 쉬움인가, 독창성인가? 또 정확성은 무엇에 대한 정확성인가? 지역의 내용인가, 지역의 형상인가, 사람의 인식인가, 거리인가, 방향인가? 하는 물음에 오늘날의 지도보다도 옛 지도는 훨씬 다양한 폭과 깊이, 세계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잘못 그려진 것처럼 보이는 옛 지도는 쓸모없는 못난 지도가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전해 주는 다른 가치를 지닌 것이다.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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