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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19일 (화) 16:41 판
녹둔도(鹿屯島)는 함경북도 선봉군(先鋒郡) 조산리(造山里)에서 약 4㎞ 거리에 있는 섬이다.
개요
- 녹둔도는 둘레가 약 8㎞이다. 1800년대 이후 두만강 상류의 모래가 유속(流速)에 밀려 내려와 녹둔도와 그 대안(對岸) 사이에 퇴적하여 육지와 연결되었다. 현재의 상황은 알 수 없으나 1990년 무렵에는 100호의 인가가 있어 벼·조·옥수수·보리 등이 재배되었고, 주변에서는 연어·붕어·황어·숭어 등이 주로 잡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세종 때 6진(鎭)을 개척한 이래 여진족의 약탈을 막기 위하여 섬 안에 길이 1,246척의 토성을 쌓고 높이 6척의 목책을 둘러 병사들이 방비하는 가운데 농민들이 배를 타고 섬을 오가며 농사를 지었다. 농민들은 상주가 금지되었고, 춘경추수기에 한해서만 출입이 허가되었다. 그러던 중 1587년(선조 20) 여진족의 습격을 받고 큰 피해를 당해, 당시 녹둔도를 관할하던 함경도 경흥부 부사(府使) 이경록(李慶祿)과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이 책임을 지고 백의종군하여 여진족을 정벌하기도 하였다. 그 뒤 1860년(철종 11) 청(淸)나라와 러시아의 베이징조약(北京條約) 체결로 러시아 영토가 되어버린 것을 1889년(고종 26)에야 비로소 알고 청나라 측에 항의, 이의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1984년 11월 북한과 소련 당국자 간에 평양에서 국경문제에 관한 회담을 열어 관심을 끌었으나 미해결인 채로 끝났으며, 1990년에는 직접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에게 섬의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역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1]
- 녹둔도는 두만강 하류 조산(造山) 부근에 있었던 하천도서이다. 역사상 고유 영토로서 문헌에 처음 기록된 것은 『세종실록』지리지이다. 처음에는 여진말의 음을 따서 사차마(沙次亇) 또는 사차(沙次)·사혈(沙泬)·사혈마(沙泬麻, 沙泬磨) 등으로 불리다가 세종 때의 육진개척 이후에 북변의 지명을 점차 새로 지을 때 녹둔도라고 하였다. 섬 둘레는 2리(里) 정도이고 높이는 수면에서 10자(尺) 되는 작은 섬이다. 산물은 보리·밀·수수와 각종 어류 및 청백염(靑白鹽)이다. 육진개척 이후 국경 하천이 된 두만강의 하천도서였으므로, 그 건너편 지역에 살던 여진족들이 물자가 궁핍하면 그때마다 녹둔도에 잠입해 자주 약탈하였다. 그리하여 이 섬 안에 길이 1,246척의 토성을 쌓고 높이 6척의 목책을 둘러 병사가 방비하는 가운데 농민들이 배를 타고 섬에 오가며 농사를 지었다. 원래 사토로 이루어진 이 섬이 농경지가 되기까지에는 많은 고난과 시일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농민들이 녹둔도에 상주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고, 춘경추수기(春耕秋收期)에 한해 주로 군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그곳에 출입하였다. 선조 때에는 출입의 번거로움을 덜고, 방수(防戍)를 강화하기 위해서 녹둔도에 둔전(屯田)을 실시하자는 의견이 자주 나오기도 하였다. 이 섬에서 농작물이 생산된 뒤에는 여러 여진부족들이 생활 물자를 구하기 위해 자주 이 섬을 침입, 약탈하였다. 녹둔도는 유서 깊은 관계를 갖고 있으나 1860년 북경조약(北京條約)으로 러시아로 넘어갔으며 오늘날까지 귀속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미수복 영토이다.[2]
- 녹둔도는 조선 시대에 두만강 하구에 있던 섬으로, 17세기 말 ~ 19세기 초 사이에 두만강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동쪽 하류의 연해주(러시아 프리모르스키 변경주)에 붙어 육지가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영유권을 포기했으며 사실상 러시아 연방의 영토이다. 조산(造山)동에서 남쪽으로 약 4 km 떨어져 있었던 녹둔도는 둘레가 8 km 남짓 되고 면적은 약 3~4 km2(여의도 면적의 1.1~1.3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섬에서 조선인들은 벼, 조, 옥수수, 보리 등을 재배하였고, 섬 주변에서는 연어, 붕어, 황어, 숭어 등이 주로 잡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녹둔도는 1430년대에 세종대왕이 6진을 개척한 이후 토성과 목책을 쌓았고, 이전에 '사차마도'라 하던 것을 세조 때 '녹둔도(鹿屯島)'라 부르게 되었다. 1583년(선조 16) 경흥부 현지 군사들의 군량(軍糧)이 부족하자 녹둔도에 군사용 둔전(屯田)을 조성하였고, 농민들은 배를 타고 이 섬에 들어와 농사를 지었는데, 병사 약간을 두어 방비하도록 하였다. 1587년(선조 20년) 이순신이 조산보 만호(造山堡 萬戶)를 겸해 녹도 둔전사(鹿島屯田事)로서 녹둔도의 둔전을 관리하였다.[3]
- 녹둔도는 조선시대 당시 함경도 경흥부 소속으로 두만강 하구에 존재했던 하중도로서, 본래 이름은 사차마도(沙次亇島)였다. 여진어의 음차로 사차(沙次)·사혈(沙泬)·사혈마(沙泬麻, 沙泬磨)등의 다른 이름도 있었다. 퇴적토로 이루어진 섬이었으나, 두만강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강이 육지가 되어 연해주와 연결(연륙)되어 지금은 섬이 아니다. 따라서 '녹둔도'라는 명칭은 관습적으로 '구 녹둔도 지역 부근'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으며, 정확히 어디까지가 옛 섬에 해당하는지조차 현재는 추정만 할 뿐이다. 한국 내 학계 일부와 언론에서는 해당 지역에 동서로 흐르는 큰 물길 가운데 하나를 섬의 흔적이라 보고 '녹둔강'이라 칭하고 있다. 세종 시대부터 200여 년간 조선의 영토였지만, 제2차 아편전쟁이 청나라의 패전으로 끝나자, 1860년에 청나라와 러시아 제국이 체결한 베이징 조약에 의거하여 러시아 제국의 강역으로 편입했다. 북한은 1990년의 북소국경조약에 따라 녹둔도를 소비에트 연방의 강역으로 인정했다. 소련 붕괴 이후로도 이러한 기조는 유지되어 소비에트 연방의 지위를 계승한 러시아 연방이 녹둔도를 다스리고, 러시아 국경수비대가 녹둔도를 지키고 있다. 북한식 문화어로는 두음법칙을 인정하지 않아 "록둔도"라고 표기한다. 녹둔도가 처음 기록된 문헌은 세종실록지리지이다. 여진족을 연해주 너머로 완전히 밀어낸 4군 6진 개척 때 한국 영토가 된 땅으로, 개척 후 1432년 세종은 녹둔도에 길이 1천246척, 높이 6척의 녹둔토성을 쌓아 녹둔도를 방비했다. 이후 세조 원년에 녹둔도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됐고 조선 선조 때 이곳에 둔전을 설치하였다.[4]
섬의 분류
- 섬은 바다로 완전히 둘러싸인 땅이다. 섬은 대륙보다 작고 암초보다는 큰 것을 말한다. 특히 사람이 살 수 없거나 살지 않는 섬은 무인도라고 한다. 적당히 큰 섬은 도(島, island)라 하고 작은 섬은 서(嶼, islet)라 하여 이 둘을 통칭 도서(島嶼)라 한다.
- 섬은 지각운동에 의하여 해저의 일부가 융기하거나, 해안산맥의 일부가 침수되어 높은 땅의 일부가 해면 위에 남아 있거나, 또는 육지의 일부가 침강하여 그곳에 해수가 들어와서 형성된다. 해저화산이 분출하여 만들어진 화산도(火山島)나 해안 지역의 일부가 파도와 빙하의 침식을 받아 육지와 분리되어 만들어진 섬도 있다.
- 바다에 있는 섬은 육도(陸島)와 양도(洋島)로 나누어진다. 육도는 지질적으로 대륙과 같은 구성 물질로 되었으며, 육지의 일부가 대륙이나 또는 대륙에 가까운 큰 섬에서 분리되어 형성된 섬이다. 양도는 육지와 관계없이 생성된 것으로서 화산섬과 산호섬이 여기에 속한다.
녹둔도사건
- 녹둔도사건(鹿屯島事件)은 1587년(선조 20) 여진족(女眞族)이 녹둔도를 공격한 사건이다. 녹둔도는 조선과 청(淸)나라의 국경지대인 함경도 경흥부(慶興府)에 속한 섬이다. 세종 때 6진 개척 이후 조선의 영토가 되었으며, 북쪽으로 여진족들이 있어 섬 안에 토성과 6척 높이의 목책을 치고 인근의 농민들이 배를 타고 오가며 농사를 짓던 곳이다. 1583년(선조 16) 12월 현지 군사들의 군량(軍糧)이 부족하자 녹둔도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군량을 해결하자는 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의 건의를 받아들여 부사(府使) 원호(元豪)의 주관하에 둔전을 실시하고 병사 약간을 두어 방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여진족의 침략 가능성이 높아 약간의 군사만으로 방비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음이 지적되었다.
- 1587년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에게 녹둔도의 둔전을 관리하도록 하여 가을 풍년이 들었다. 이순신이 경흥부사(慶興府使) 이경록(李慶祿)과 함께 군대를 인솔하고 녹둔도로 가서 추수를 하는 사이에 추도(楸島)에 살고 있던 여진족이 갑자기 침입하여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책루(柵壘)를 지키고 있던 수장(戍將) 오향(吳享)과 임경번(林景藩) 등 조선군 11명이 죽고 160여 명이 잡혀갔으며 15필의 말도 약탈당했고, 호추(胡酋) 마니응개(亇尼應介)는 참루(塹壘)를 뛰어넘어 들어오다가 수장(戍將) 이몽서(李夢瑞)에게 사살되었다. 이에 이순신과 이경록이 반격을 가하여 적 3인의 머리를 베고 포로 된 사람 50여 인을 빼앗아 돌아왔다. 이 사건으로 인해 책임을 지게 된 북병사(北兵使) 이일(李鎰)은 이순신에게 그 책임을 덮어 씌우고 사형에 처하려 하였으나 이순신은 죽음을 면하고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1588년 1월 북병사 이일은 4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의 본거지인 추도를 기습공격하여 200여 호를 불태우고 적 380여 명을 죽였으며, 말 30필, 소 20두를 획득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때 이순신이 여진족의 우을기내(于乙其乃)를 꾀어내어 잡은 공으로 사면을 받아 복직되었다.
녹둔도의 역사
- 두만강 하구에서 하중도의 형태로 존재하던 것으로 알려진 녹둔도는 연해주의 남단에 자리한다. 연해주는 발해국이 멸망한 이후 일시적으로 다른 민족의 점령지가 되기도 하였지만 오랜 기간 동안에 걸쳐 한민족의 주요한 활동무대로 자리매김하였다. 두만강을 경계로 한반도와 마주하는 연해주는 현재 러시아와 국경을 형성하는 두만강에 의해 영유권이 분리되어 있다. 청나라는 1858년에 러시아와 아이훈조약(愛琿條約)을 체결하여 헤이룽 강의 이북지역을 러시아에 넘겨주고 우수리 강 동쪽에 해당하는 연해주를 두 나라가 공동으로 관리하는 내용에 합의하였다. 이후 청나라는 1860년에 베이징조약을 체결하여 아이훈조약의 내용을 재확인 한 동시에, 우수리 강 동쪽의 연해주마저 러시아 영토로 내주게 되었다.
- 녹둔도는 두만강과 연해주 사이에서 한반도의 북부지방과 연해주를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던 곳이었고,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토질이 비옥하고 경작할 만한 농경지가 풍부하여 일찍부터 농민들이 농경활동을 실시한 것은 물론 둔전(屯田)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역사적으로 녹둔도는 조선 전기부터 동해를 따라 한반도로 침입하는 왜구를 방어하고 북방에 거주하던 여진족의 내륙침입을 막는데 있어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두만강 본류와 그로부터 분기한 여러 지류에 의해 하중도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던 녹둔도 일대는 조선 후기로 들어오면서 두만강의 범람과 유로 변경에 의해 러시아의 영토와 연륙 되기 시작하였다.
녹둔도의 지리
- 녹둔도 주변에는 두만강 본류와 더불어 여러 지류들에 의해 많은 하중도가 형성되어 있으며, 일부 유로는 현재 구하도로 남아 있다. 두만강 본류는 수심이 깊고 유속이 빠르지만, 과거의 지류는 수심이 깊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유속이 상대적으로 느렸다. 조선시대부터 농경활동을 하던 사람들은 두만강 건너편의 여러 하중도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느린 유속과 깊지 않은 수심은 사람들의 통행에 큰 장애물은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두만강 동쪽에 형성된 여러 개의 하중도를 오가며 농경활동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녹둔도 일대는 대륙에서 해양으로 진출하려는 세력과 해양에서 대륙으로 진입하려는 세력이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즉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을 연결시키거나 분리시킬 수 있는 지리적 위치를 지니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에 제작된 여러 지리지 및 지도류에서 한반도의 부속도서 가운데 규모가 크지 않은 섬을 부정확하게 묘사한데 반해 녹둔도만큼은 다른 부속도서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확하게 묘사하고 기술하였다는 점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도
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섬〉, 《위키백과》
- 〈섬〉, 《나무위키》
- 〈녹둔도〉, 《위키백과》
- 〈녹둔도〉, 《나무위키》
- 〈녹둔도(鹿屯島)〉, 《두산백과》
- 〈녹둔도(鹿屯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강인욱 교수, 〈이순신 장군의 신화가 시작된 환상의 섬 녹둔도(강인욱 세상만사의 기원)〉, 《동아일보》, 2021-04-16
- 홍제표 기자, 〈충무공 활약했던 녹둔도 실측 근대지도 공개〉, 《노컷뉴스》, 2020-04-26
- 김현태 기자, 〈이순신장군이 지키려한 우리땅, 녹둔도를 아십니까?〉, 《뉴스프리존》, 2018-12-01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