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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7일 (화) 15:04 기준 최신판
수변도시(水邊都市)는 바다, 강, 못 따위와 같이 물이라는 자연환경과 도시 환경이 공존하는 도시이다. 제조업 중심이었던 과거에는 물류 운송 역할을 하는 수변도시가 급격하게 성장했다.[1]
개요[편집]
도시를 관통하여 흐르는 자연하천은 상대적으로 폭이 넓고 수변에 숲과 구릉지가 위치하는 등 개방적이고 전원적 경관이 형성된다. 독일 남부의 중세도시인 드레스덴에는 엘베강이 남동에서 북서 방향으로 흐르는데 엘베강 남쪽에는 구시가지, 북쪽에는 신시가지가 위치하고 있다. 엘베강이 원래는 드레스덴 도시 북단을 흐르고 있었으나 강북으로 도시가 확장되면서 이제는 도시 한가운데를 흐르게 되었다. 한강은 우리 민족과 한반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오래된 강이다. 한강은 원래 조선시대 한양의 남단을 흐르고 있었으나 강남 개발로 인해 이제는 서울의 한가운데를 동서로 흐르게 되었다. 또한 서울이 천만 명을 수용하는 거대 도시가 되면서 서울의 경계도 확대되어 강동에 위치한 백제시대의 도읍지, 그리고 신석기 시대의 암사동 주거유적까지 포함하여 70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도시가 되었다.[2]
해안은 바다와 땅이 맞닿은 곳에 있는 퇴적지대이다,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 지역에서 해안 지역이 대도시로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근현대부터 일어난 일로 한국과 중국 모두 산업화를 거치면서 전근대까지는 찬밥 신세였던 해안도시들의 중요성이 커진 것이다. 미국이 세계 최강으로 발전한 이유 중의 하나로도 대서양과 태평양 양쪽에 영향력을 할 수 있는 게 컸다. 한국과 중국도 수운이 중요했으나 수심이 얕고 조수간만의 차가 큰 갯뻘과 염분이 깃든 습지가 많은 서해안 일대는 농사도 불가능하고 사람이 생활하기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그래서 바다와 연결된 큰 강을 낀 내륙 지역들이 발달한다. 강을 통해 배가 바다로 나갈 수 있으니까. 근대로 들어오면서 흘수가 깊은 큰 배가 정박할 수심 깊은 항구가 필요해지자 강에 접한 도시 대신 해안 도시가 발달한 것이다. 근대 이전부터 발달했던 해안 도시들은 고려 대의 개성을 제외하면 모두 동해안에 몰려 있는데, 상기한 서해안과 특징이 정반대라 항구 형성이 수월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가야시대의 김해와 거제, 신라시대의 울산과 당항성, 조선시대의 창원이 있다.[3]
역사[편집]
인류 최초의 도시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에 수메르인이 세운 도시이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 불리던 이 지역은 농업에 유리한 조건을 갖춘 지역이었다. 수메르 문명이 토대가 된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 인더스 문명, 황하 문명과 같은 세계 4대 문명 발상지는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중위도의 온화한 기후대에 속해 있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물을 구하기 쉽고 비옥한 토양이 발달한 하천 주변이었다는 것이다. 인류가 여전히 채집과 수렵 생활을 하던 시기에 4대 문명의 발상지에서는 농업활동을 기반으로 정착생활을 시작했고 이를 바탕으로 도시가 형성되었다. 고대 도시들은 모두 초기 농업의 생산 지역에 위치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1200년경에 시작된 주요 금속이 청동에서 철로 변화한 것일 것이다. 초기 농업은 가볍고 쉽게 작업이 가능한 충적(하천 퇴적) 토양이 있었던 하천의 계곡에 한정되었다. 철로 인해 사람들은 더 많은 땅을 개간할 수 있는 더 나은 도끼와 더 단단하고 더 비옥한 땅을 팔 수 있는 더 강한 쟁기 날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로 인해서 경작지가 증가하였다. 대부분의 도시는 강과 같은 자연 교통망에 접근하기 쉬운 곳에서 나타났지만 교통 발달에 의해서 더 넓은 지역에서 도시 기능이 수행될 수 있게 되었다.[4]
물은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인 만큼, 과거의 도시들은 대부분 강가에 존재했다. 도시의 규모가 커져 그 사용량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면 로마의 경우 물을 끌어오는 수도를 이용하여 해결했으며 운하(내지 강)를 뚫어서 물길을 트기도 했다. 도시는 전략적으로 외부의 적에 대응하기 위해 산을 등지거나 언덕 위, 강이나 호수 등의 섬 등지에 세웠다. 파리, 모스크바, 알렉산드리아 등이 이에 해당하다. 물론 강이나 호수 근처에 세우면 교류를 통한 국력 증진을 위해 교통이 원활한 강가, 해안가는 물론, 평야 지대에 자리잡기도 한다. 동양에 한정된 풍수지리로 볼 때 땅의 기운이 그 위에 생기는 도읍지(수도), 무덤 등에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여 자연과 어우러지는 지역을 선택했다. 사실 뒤에 산, 앞에 물(강)을 필요로 한다는 점은 비단 무덤뿐만이 아니라 도시의 요건을 설명하는 것과 똑같다. 현대식 상하수도와 전기 등 새로운 인프라가 보급됨과 동시에 건축 기술의 발달로 고층 건물의 건설, 지하철과 같은 대중교통의 발달 등이 이루어지며 한정된 공간 안에 대량의 인구가 거주 가능해졌고, 따라서 도시의 규모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이 거대해졌다. 또한 육로 교통 수단이 마차와 수레로부터 자동차와 기차로 발전하였고, 철도가 놓이고 도로가 발달되며 멀리 있던 도시들이 서로 연결됨에 따라 도시 간의 발전이 가속화되었다. 미국의 경우 '대륙 횡단 철도' 등이 생기면서 철길을 따라 마을, 도시가 생기기도 하였다.[5]
서울[편집]
서울은 현 대한민국의 수도이고 이전에는 백제, 조선의 수도였으며 250여년 정도 고려의 부수도(오늘날의 광역시 역할)였다. 또한 고구려의 3경이었을 가능성도 존재하고 신라시대에도 한산주의 중심지라 지금으로 치면 도청 소재지쯤 위상은 가졌었다. 또한 삼국시대 내내 서울을 포함한 한강 유역은 격전지이자 최고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따라서 서울은 다섯 왕조의 유산이 모두 남아있는 한국사의 대표적인 고도(古都)다. 고대부터 한강의 잦은 범람으로 땅이 비옥했었다. 한강 유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로 강남구 삼성동 50번지 일대에서 흑요석으로 만든 석기 등 구석기 시대 유물이 출토되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며 살았던 것은 신석기 시대이며, 신석기 시대 유적은 서울 곳곳에서 발굴되었는데 이중 대표적인 것이 강동구 암사동 유적이다. 청동기 시대는 본격적인 농경기 문화가 시작되는 때로 강남구·강동구·송파구 등에서 청동기시대 집터가 발굴되고 한강 유역에서는 청동기 시대에 널리 사용되던 민무늬 토기인 가락동식 토기가 발굴되기도 하였다. 특히 한강유역에는 청동기시대 무덤인 고인돌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계급사회가 성립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이러한 정치적 집단이 이후 백제 건국에 기반이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6]
기원전 18년, 백제는 위례성을 수도로 하여 나라를 세웠다. 송파구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일대가 위례성이 위치했던 곳으로 위례성은 후에 큰 성이란 뜻인 한성 혹은 대성이라고 불렸고, 왕이 거주하던 곳이란 뜻으로 왕성이라고도 불렸다. 현재까지의 발굴 조사에 따르면 한강 유역에 백제 건국 세력 중 하나가 유력한 고구려계 유이민이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최대로 올려잡아도 3세기 중반이 한계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고구려계 유이민 세력은 그 전에는 2세기 중반에 임진강에 문득 갑자기 나타나서 약 백 년 동안 그곳에서 세력을 유지하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3세기 중반에 갑자기 임진강 일대를 완전히 떠난 다음 한강 유역에 기존 있던 해상 세력과 연합하여 고대 국가를 세운 것으로 드러난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에 의해 한성이 무너지면서 백제가 공주로 수도를 옮기게 되지만 493년간 백제의 수도였던 탓에 서울 곳곳에서 백제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데 송파구 풍납토성이 대표적인 예이다. 송파구 석촌동, 가락동, 방이동에 가면 실제 백제 고분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 근방을 중심으로 백제인들이 사용 한 토기, 기와, 농기구, 유리 제작에 쓰인 거푸집 등 다양한 백제의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475년 백제에게 한성을 뺏은 고구려는 사령부를 몽촌토성에 두고 한강 건너편 아차산에 보루를 설치해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몽촌토성에는 백제의 유물 뿐 아니라 고구려 사람들이 사용한 토기와 와당 등도 발견되었고 고구려 사람들이 설치한 보루를 아차산, 망우산, 수락산 등지에서 찾을 수 있다. 이후 고구려는 왕위계승을 둘러싼 다툼과 돌궐의 침략으로 힘이 약해졌고, 551년 신라, 가야, 백제의 연합군에 밀려 76년간 차지했던 한성에서 쫓겨나 북쪽으로 물러나게 된다. 한성을 차지해 중국과 직접 교류하고 싶었던 신라는 다시 고구려와 협약을 맺고 백제를 무너뜨려 554년에 신라가 한강 유역을 완전히 확보하게 된다. 신라의 진흥왕은 한성 지역이 신라의 영토임을 공고히 하기 위해 북한산 비봉에 순수비를 세웠는데 이것이 북한산진흥왕순수비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고려에 의해 멸망하기 전까지 서울을 지배했던 탓에 서울에는 신라의 유물이 많이 발견된다.[7]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바닷가〉, 《나무위키》
- 〈도시〉, 《나무위키》
- 〈서울특별시/역사〉, 《나무위키》
- 〈수변〉, 《국어 사전》
- 유용한 교육정보, 〈도시의 역사〉, 《네이버 블로그》, 2015-06-17
- 이승빈 교수, 〈강변따라 도시역사와 자연을 보고싶다〉, 《조경뉴스》, 2013-11-05
- 〈서울의 역사〉, 《서울특별시》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