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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시
보이시 위치

보이시(Boise, 프랑스어: 봐즈)는 미국 아이다호주 서부에 있는 아이다호주의 주도이고, 아다군의 군청 소재지이다. 인구는 약 23만 명이며 로키산맥 북부의 근처인 보이시강에 걸쳐있다. 보이시는 프랑스어로 '삼림이 많은' 뜻인 부아(bois)에서 유래되었다. 보이시의 별명은 '나무의 도시'이다.[1]

개요[편집]

보이시는 미국 북서부 아이다호주(Idaho)의 주도이자 최대도시이며 보이시강 중류 연안의 해발고도 825m 지점에 있다. 보이시는 아이다군(郡)과 캐니언군을 합쳐 인구 43만 명의 대도시권을 이룬다. 백인 정착자들이 도착하기 전에는 쇼쇼네, 파이우테 인디언들이 현재의 보이시에 살고 있었다. 1862년에는 산 근처에서 금이 발견되었고, 광부들이 그 지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1863년에는 오리건 트레일의 교차로와 보이시 산의 황금 길에 미국 육군이 보이시 요새를 세워 도시를 배치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864년에 아이다호 영토의 수도가 되었다. 세계의 여러 나라들에서 근로자들이 곧 보이시 지역에 들어왔다. 멕시코의 노새 마부들이 보이시를 금이 풍부한 로키산맥 북부의 공급지로 만들었고, 중국 광둥성의 광부들은 중국인의 식당과 세탁소를 지었다. 물을 끌어들이는 운하와 오리건 쇼트 라인 철도 공사는 일본인, 그리스인, 아일랜드인, 스칸디나비아인들을 데려왔다. 독일인들은 맥주 양조와 화려한 건축물을 가져왔다. 스페인 북부에서 온 수백명의 바스크인들이 1800년대 후반에 아이다호에 정착하였다. 20세기 초에 보이시강 관개이용계획의 일환으로 애로록댐, 러키피크댐을 건설하여 농업지대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도시의 인구는 1900년에 6,000명에서 1910년에 17,000명 이상으로 번창하였다. 1960년까지만 해도 보이시는 약 34,000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1960년대에 도시가 외곽의 지역들을 합치면서 인구는 두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유니언퍼시픽철도의 간선철로에서 벗어나 있어 일찍부터 항공수단이 상업적으로 이용되었다. 또한 다양한 산업과 과일, 사탕무, 가축 등의 농업, 제재업, 도매업, 육상운송업이 발달하였다. 연방 대리인들이 보이시에서 지방 사무실들을 유지하고 있고, 정부 - 연방, 주, 지방 자체들은 도시의 가장 큰 고용주이다. 어떤 주식 회사들은 보이시에 본부를 가지고 있다. 이 회사들은 컴퓨터의 마이크로칩 제조, 건설, 식품 가공, 목재 제품 산업 등을 포함한다. 문화적 목적지로는 보이시 미술관, 아이다호 역사박물관, 보이시 동물원 등이 있으며 교육 기관으로 보이시주립대학교(1932)가 있다.[2]

역사[편집]

보이스 지역에는 쇼숀( Shoshone) 부족과 배녹(Bannock) 부족이 거주했다. 부족들이 독수리 바위라고 부르는 바위는 신성한 곳이었으며 지금도 남아 있다. 1818년 이후 도날드 맥켄지(Donald MacKenzie)가 스네이크 컨츄리 모피 무역을 시작했을 때, 보이시 쇼숀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페이엠(Peiem)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가 되었다.

1811년 존 제이콥 애스터 (John Jacob Astor) 밑에서 모피 무역 대리인으로 고용된 윌슨 헌트(Wilson Hunt)는 약 60명으로 구성된 그룹의 대부분을 조직하고 이끌었다. 이 탐험대는 보이시 계곡을 통과했고 그 지역에 백인 미국인이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1812년 전쟁과 태평양 북서쪽에 미국 모피 무역소가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로는 그 후 20년 동안 사용되지 않았고, 따라서 스네이크 컨트리는 정착민들의 침략으로부터 자유로웠다.

1812년 전쟁이 끝난 후 1840년대까지 오리건주는 공식적으로 공동 관리를 했지만 영국 허드슨 베이 회사(HBC)만이 단독으로 지배했으며, 이 회사는 요크를 통해 캐나다 프레리 내륙과 육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당시 로키산맥 동쪽의 일반적인 지역은 미국 동부의 언론과 문헌에서 건조한 비생산적인 지역인 '그레이트 아메리칸 사막'으로 묘사되어 거주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따라서 보이시 지역 자체는 정착민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로키 산맥의 반대편에 있는 오레곤 카운티는 그러나 정착민들에게 바람직한 목적지였다. 1840년대 초까지 오리건 트레일을 따라 보이시 밸리로 이주한 정착민들의 침입은 저조했다. 허드슨 베이 회사는 오리건 국경의 스네이크강과 합류 하는 보이시강 아래 파르마 근처에서 서쪽으로 64km 떨어진 이 지역에 올드 포트 보이시(Old Fort Boise)라는 요새를 세웠다. 그들은 1844년까지 그 요새에 있었고 그 후에 그 요새를 미군에게 넘겨줬다.

1840년대 초부터 서부, 현대 오리건주의 발전은 보이시 지역에 중대한 변화를 의미했다. 이 시기에 허드슨 베이 회사와 영국은 북쪽으로 사업을 옮기기 시작했고, 오리건주에서는 합병을 요구하는 정착민들의 수가 느리고 꾸준히 증가했다. 이러한 발전은 결국 영국이 그 지역을 미국에 내주고 "공동 점령"의 시대를 끝낸 오리건 조약으로 누적되었다.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고 토지 기부 청구법이 통과되면서 정착민의 침입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쇼숀과 배넉 지역을 통한 정착민 침입 증가 와 여행 중 계곡의 게임 및 자원 활용 증가로 인해 오리건 트레일 전체를 따라 원주민 밴드 사이에 좌절감이 증가했다. 따라서 1850년대 초부터 정착민 캐러밴이 경로를 사용하고 자신의 땅에 무단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현대 동부 아이다호에서 현대 중부 오리건까지 트레일 전체 길이를 따라 원주민은 지나가는 캐러밴에 대해 저강도 ​​공격을 시작했다. 1846년에서 1856년 사이의 기간 동안, 700명의 백인 정착민들이 원주민의 땅을 침범하는 동안 그들의 캐러밴에 대한 공격과 습격으로 죽임을 당했다. 캐러밴에 대한 공격이 강화되면서 1858년부터 시작된 미군의 호위를 제외한 정착민들의 여행은 불가능해졌다.

1860년 아이다호주 피어스 인근 네즈퍼스 지역에서 금이 발견되고 정착민들의 도착으로 긴장이 고조되었다. 1863년 보이시 계곡 주변에서 금이 발견되고 계속되는 전투가 이어지면서 미군은 오늘날 보이시가 위치한 곳에 새로운 보이시 요새를 건설하게 되었다. 보이시의 초기 성장은 1860년대 북동쪽과 남서쪽에 생겨난 인근 금 도시에 공급하는 역할에 의해 크게 촉진되었다. 광부들은 때때로 보이시에서 겨울을 나기도 했고, 초기의 유명한 사업가들은 골드러시가 사라진 후 몇 년 동안 마을에 정착한 광부들이었다. 1864년까지 강 근처의 쉽게 관개되는 땅에서 상당한 농업 생산이 진행되었고 3개의 운하 회사가 통합되었다. 초기 교통 개선은 주로 1860년대부터 영토 입법부에 의해 수여된 유료 도로 프랜차이즈의 결과였다.

1864년 특별한 열거에 의한 영토 인구조사 기록에는 보이시의 인구가 1,658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1864년 12월 12일의 법안은 아이다호 영토 입법부에 의한 최초의 도시 통합 시도였다. 1868년 1월 6일 1866년 개정된 시헌장이 유권자들에 의해 승인되기 전까지 두 번의 시도가 더 실패했다.

1890년대에는 과일 과수원이 확산되었고 아이다호에서 여전히 중요한 농업 산업인 사탕무가 널리 재배되기 시작했다. 목재 산업은 또한 1880년대와 1890년대에 보이시 시장에서 점점 더 번성했다. 많은 양의 목재가 아이다호의 다른 곳에서 수출되었지만 성장하는 보이시는 1865년에 처음 설립된 알렉산더 로시(Alexander Rossi)의 제재소 확장을 지원했다. 저명한 초기 보이시안 윌리엄 리덴보(William Ridenbaugh)는 1878년 그의 삼촌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로부터 현재 그의 이름을 딴 운하의 통제권을 물려받았다.

1925년 시카고 - 포틀랜드 철도 노선이 건설되면서 보이시 유니언 퍼시픽 창고(Boise Union Pacific Depot)가 도시에 설립되었다. 이 기차역은 1997년까지 승객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했다.[3]

경제[편집]

보이시는 아이다호의 행정,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자, 교통의 중심지로 발전해 왔다. 오리건주 포틀랜드와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를 이어주는 I-84가 이 도시를 관통한다. 세계적인 반도체 생산업체인 마이크론 테크놀로지가 본거지를 두고 있으며 세계 최대의 프린터 생산업체인 휴렛패커드의 레이저 프린터 사업본부가 위치하고 있다. 최근 새로운 정보통신산업의 요지로 떠오르고 있지만, 다른 지방 사람들에게는 아직까지는 평범한 지역중심지면서 주도 정도이다. 보이시 도시 자체는 미국의 주요도시들 중에는 상당히 드문 경우로 빈부격차가 매우 양호하다. 보이시는 2008년 이후로도 미국 전체의 평균보다 낮은 빈곤율, 그리고 두터운 중산층 비율을 자랑하고 있어 빈부격차가 상당히 낮다.

보이시주립대학교[편집]

보이시주립대학교(Boise State University)는 미국 아이다호주 보이시에 있는 주립대학교이다. 보이시 주립대학교의 전신은 1932년 미국 성공회(聖公會, Episcopal Church)가 세운 보이시주니어칼리지이다. 창립 당시 교장은 아이다호 대교구의 제7대 주교를 역임했던 미들턴 반웰(Middleton Barnwell, 1882~1957)이었다. 1934년 성공회에서 독립한 뒤 1940년 지금의 위치로 교사를 이전하였다. 1965년 4년제로 바뀌면서 학사학위를 수여하기 시작하였다. 1969년에는 아이다호주의 고등교육 시스템에 편입되었고, 보이시 주립 칼리지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74년 지금의 교명인 보이시 주립대학교로 변경하여 아이다호주에서 세 번째 주립대학교가 되었다. 오늘날에는 아이다호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대학으로 성장하였다.

생물학, 화학, 수학, 음악학, 철학, 물리학, 회계학, 경제학, 토목공학, 컴퓨터과학, 간호학, 사학, 정치학, 심리학, 사회학 등 190여 개의 학문 분야에서 100여 개의 학사학위, 73개의 석사학위, 9개의 박사학위, 7개의 준학사학위, 그리고 MBA(경영학석사)를 비롯해 100개 이상의 대학원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1만 9,000㎡ 규모의 앨버스톤(Alberston) 대학 도서관에는 55만 권의 장서와 다양한 국내외 정기간행물이 비치되어 있으며 110만여 점의 마이크로폼 자료 및 CD를 포함한 5만 8000여 점의 시청각자료가 소장되어 있으며, 4,797종의 정기간행물이 비치되어 있다. 대학부속시설로 학습자료 센터, 미술관, 라디오 방송국, 테크놀러지 센터 등이 있다.[4]

지도[편집]

미국 행정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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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보이시〉, 《위키백과》
  2. 보이시(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3. 아이다호주 보이즈〉, 《요다위키》
  4. 보이시주립대학교〉,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북아메리카 같이 보기[편집]

북아메리카 국가
북아메리카 지역
카리브제도 국가
북아메리카 도시 1
북아메리카 도시 2
북아메리카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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