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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선도

창선도(昌善島)는 한반도 남해의 남해도의 동북쪽에 있는 이다. 경상남도 남해군에 속한다. 면적은 54.13㎢이다.[1]

개요[편집]

  • 창선도는 경상남도 남해군 창선면에 있는 섬이다. 동경 128°02′, 북위 34°51′에 위치하며, 남해도의 삼동면 해안에서 지족해협을 사이에 두고 약 1㎞ 떨어져 있으며, 창선도와 삼동면은 창선교를 통해 연결된다. 한국에서 아홉 번째로 큰 섬이며, 모양은 남해도와 비슷하다. 면적은 54.18㎢이고, 해안선 길이는 107.34㎞이다. 동서 간 길이는 11.5㎞이고, 남북 간 길이는 10.5㎞이다. 1980년 6월에 창선교를 통해 남해도와 연결되었으며, 2003년에는 창선-삼천포대교를 통해 사천시와 연결되었다. 취락은 당저리·부윤리·진동리 등 대체로 섬 중앙부와 동쪽의 평지 및 해안가에 집중 분포한다. 주민들은 어업보다 농업에 치중한다. 주민들은 어업보다 농업에 치중한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보리·고구마·마늘·콩 등이 생산되며, 마늘은 생산량이 많아 농업협동조합을 통해 출하된다. 연근해에서는 낙지·문어·볼락·게 등이 어획되며, 새조개·굴 등의 채취와 피조개 양식이 활발하다. 교통은 남해도를 비롯하여 사천시로 연결되어 국도와 지방도가 섬을 통과한다. 연도교 및 연육교의 개통으로 육지와의 교통이 아주 수월해졌으며 관광객의 수도 크게 증가하였다. 창선도와 남해도 사이의 지족해협에서는 죽방렴을 이용한 멸치잡이가 발달하였다. 섬 북쪽의 대벽리의 왕후박나무는 198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교육기관으로는 창선초등학교, 창선중학교, 창선고등학교가 있다.[2]
  • 창선도는 남해군에 속하는데 남해군에는 남해도와 창선도라는 2개의 큰 섬이 있다. 그중 창선도는 하나의 면을 이루고 있다. 동으로는 고성군, 통용시가 있고 서와 남은 남해도, 북으로는 사천시와 접해 있는 아름다운 섬이다. 해안선을 따라 낚시포인트가 골고루 분포되어 있고, 풍부한 수산자원은 주민의 주소득원이다. 특산물로는 피조개, 새조개, 개조개, 바지락, 미역, 홍합, 개불, 백어, 고사리, 취나물, 완두콩 등이 있다. 장포(長浦)마을은 창선면에 있는 32개의 마을 중의 하나로, 부락이 긴(長) 포구(개)를 이루고 있어서 장포라는 지명이 붙여졌다. 창선도 동부해안의 자연경관이 수려한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볼락, 노래미, 도다리 등이 많이 잡히는 바다 낚시터이기도 하다.

창선도의 자연환경[편집]

  • 북쪽에서 남쪽으로 만입한 동대만(東大灣)이 섬을 동서로 거의 이등분하며, 서쪽이 동쪽보다 약간 길고 크다. 서부는 동부보다 험준하며, 구릉성 산지가 북동에서 남서로 뻗어 있다. 서남부 중앙에 대방산(臺芳山, 468m)이 있는 반면 동부는 망치산(望峙山, 268m)이 제일 높고, 대체로 100m 이하의 구릉과 저지가 분포한다. 해안은 암석해안이 대부분이고, 해안선이 복잡하나 수심은 얕다. 섬의 남동쪽은 드나듦이 복잡하고, 서쪽은 비교적 완만하다. 연평균기온 14.5℃, 1월 평균기온 2.6℃, 8월 평균기온 25.6℃, 연 강수량 1,0812㎜이다. 온난한 기후로 아열대성 식물이 자라며, 한약재로 쓰이는 비자나무를 비롯하여 유자·치자꽃 등이 자생한다.
  • 삼국시대에는 유질부곡(有疾部曲)이었다. 고려 현종 때 창선현으로 진주에 속하였고 1269년(고려 원종 10)에는 일본이 이곳 변경을 침탈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해 5월 이곳에 간직하였던 국사를 진도로 옮겼으며, 고려 충선왕 때 흥선(興善)이라 고쳐졌다. 1470년(성종 2)에 창선도리가 되었으며, 1604년(선조 37)에는 삼천포 말문리에 병합되었다. 1906년에 남해군에 이속되어 남해군 창선면 소속이 되었다.

창선면[편집]

  • 창선면(昌善面)은 경상남도 남해군 동부에 있는 면이다. 창선도(昌善島) 전체를 차지하는 면으로 16개리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은 통영시·사천시, 서쪽은 설천면(雪川面) 등과 바다 건너 마주하고, 북쪽은 사천시와 창선-삼천포대교로, 남쪽은 삼동면(三東面)과 창선교로 연결되어 있다. 원래 가야국에 속하였으나 신라가 가야를 정복한 뒤 일선현이라 하였다. 이후 상선현(尙善縣)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018년(고려 현종 9) 영선현(永善縣)이라 하였고 이후 다시 창선현(彰善縣)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충선왕 때의 흥선현(興善縣)을 거쳐 조선시대인 1413년(태종 13) 창선현(昌善縣)으로 개칭하였고 1906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남해군에 편입되었다.
  • 창선면은 해안선 길이 19㎞로 한국의 섬 가운데 12번째이다. 대방산(태방산:468m)·속금산(束錦山:358m) 등의 작은 산과 창선천과 부윤천(富潤川) 등이 있다. 면적의 24%가 농경지이고 벼·보리 등 주곡작물을 생산하며 농업인구가 전체의 80%에 이른다. 수산물로는 굴의 생산이 많으며 특산물로는 피조개·새조개·개조개·바지락·미역·홍합·개불·고사리·취나물·완두콩 등이 있다. 창선·삼천포대교로 삼천포항과 연결되며, 해안선 전역에 낚시터가 고루 분포되어 있다. 문화재로는 남해 창선면의 왕후박나무(천연기념물 299), 금산봉수대(錦山烽燧臺), 당항리 지석묘(堂項里支石墓), 금오산성(金鰲山城), 대방산 봉수대(臺方山烽燧臺), 창선성(昌善城), 구암사지(龜岩寺址), 국사봉사당(國祀峰祠堂) 등이 있다.

남해 창선도 왕후박나무[편집]

  • 경상남도 남해군 창선면 대벽리에 있는 왕후박나무는 1982년 11월 9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314㎡이고, 수량은 1그루, 추정수령은 500년이다. 지정 사유는 노거수이며, 남해군에서 소유 및 관리한다. 나무 높이 9.5m, 줄기가 밑에서부터 11개로 갈라져 있는데, 각각의 가슴높이 줄기 둘레는 1.1∼2.8m이다. 가지 퍼짐은 동쪽 10.4m, 서쪽 7.0m, 남쪽 7.7m, 북쪽 12.0m이다. 대벽리 단항(丹項) 마을 앞의 넓은 밭 가운데 서 있고 줄기가 11개로 갈라져 비스듬히 올라가면서 반달 모양의 웅장한 수관을 만들고 있다. 왕후박나무는 후박나무보다 잎이 더 넓은 변종이다. 약 500년 전 이 마을에 살던 노부부가 어느 날 큰 고기를 잡았는데, 그 고기 뱃속에 씨앗이 있어 그것을 뿌렸더니 이 왕후박나무로 자라났다고 전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에 당산제를 올리는 습속(習俗)이 있다. 동네 사람들은 해마다 이 나무에 당제(堂祭)를 올리고 평안과 풍어를 빌고 있다. 또 마을에는 임진왜란 때 장군 이순신(李舜臣)이 이 나무 밑에서 식사를 하고 쉬어갔다는 말도 전하고 있다.

창선도의 유역환경[편집]

  • 해안에서 지족해협을 사이에 두고 약 1㎞ 떨어져 있으며, 창선도와 삼동면은 창선교를 통해 연결된다. 한국에서 아홉 번째로 큰 섬이며, 모양은 남해도와 비슷하다. 면적은 54.18㎢이고, 해안선 길이는 107.34㎞이다. 동서간 길이는 11.5㎞이고, 남북 간 길이는 10.5㎞이다. 1980년 6월에 창선교를 통해 남해도와 연결되었으며, 2003년에는 창선-삼천포대교를 통해 사천시와 연결되었다. 동부는 망치산(望峙山, 268m)이 제일 높고, 대체로 100m 이하의 구릉과 저지가 분포한다.
  • 해안은 암석해안이 대부분이고, 해안선이 복잡하나 수심은 얕다. 섬의 남동쪽은 드나듦이 복잡하고, 서쪽은 비교적 완만하다. 삼국시대에는 유질부곡(有疾部曲)이었다. 고려 현종 때 창선현으로 진주에 속하였고 1269년(고려 원종 10)에는 일본이 이곳 변경을 침탈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해 5월 이곳에 간직하였던 국사를 진도로 옮겼으며, 고려 충선왕 때 흥선(興善)이라 고쳐졌다. 1470년(성종 2)에 창선도리가 되었으며, 1604년(선조 37)에는 삼천포 말문리에 병합되었다. 1906년에 남해군에 이속되어 남해군 창선면 소속이 되었다.

남해 대방산 봉수대[편집]

  • 남해 대방산 봉수대(南海 臺方山 烽燧臺)는 경상남도 남해군 창선면 옥천리, 대방산에 있는 조선시대의 봉수대이다. 2003년 6월 12일 경상남도의 기념물 제248호로 지정되었다. 창선면 대방산 정상부에 있다. 봉수대로 오르는 길은 옥천에서 오르는 동쪽로, 사포에서 오르는 서쪽로와 상신리에서 오르는 북쪽로가 있다. 금산 봉수대에서 받아 사천의 각산 봉수대로 이어주는 중계지이다. 이 봉수대의 조응관계를 진주목장 창선도 지도에는 남해 금산봉수와 진주 각산봉수에 두고 있다.
  • 높이는 8.6m, 둘레 13.6m이다. 문헌기록으로 보면 1455년에서 1468년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1895년 5월 9일 각 처의 봉수대와 봉수군을 군부의 주청에 따라 없애라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없어진 것이 확실하다. 봉수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燧)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시대의 통신제도이다. 이 제도는 처음에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군사적 목적에서 실시되었다. 한국에서는 기록상 고려 중기(12,3세기)에 이 제도가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실시된 것으로 추정된다. 봉수제가 체계적으로 정비된 때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했던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 이후였다. 고려 명종(1171~1197)때 설치되어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다섯 곳의 봉수로 가운데서 동래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제2봉수로에 속한 것으로, 남해 금산봉수대로부터 연결 받은 봉수를 북쪽의 사천 각산 봉수대로 연결하고 있다. 현재 봉수대의 원형은 찾을 수 없지만, 이곳이 봉수대 자리였음을 알려주는 지름 13m, 높이 3m의 석축과 연대로 추정되는 유지, 그리고 건물터가 남아 있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창선도〉, 《위키백과》
  2. 창선도(昌善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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