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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8일 (월) 15:48 판
유생(儒生)은 유학(儒學)을 공부하는 선비를 말한다.[1]
개요
유생은 유교를 신봉하고 이를 본업으로 하는 사람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유자(儒者)라 하고, 한국에서는 유생이라 하였다. 유자는 원래 학자를 범칭한 것이었으나, 춘추전국시대에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일어나자 공맹(孔孟)의 학도만을 가리키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처음부터 불교를 신봉하는 자를 불자(佛者), 유교를 신봉하는 자를 유생이라 하였다. [2]
종류
유생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었다. 무위무관(無位無官)의 백수(白首)를 유학(幼學)이라 하고, 백수이면서도 학덕이 뛰어나 유림의 모범이 되는 자를 처사(處士)라 하였다.
또, 향교(鄕校)에 입학한 자를 교생(校生)이라 하고, 소과(小科)에 합격한 자를 생원 또는 진사라 하였다. 대과(大科)에 급제, 관직에 있는 자도 넓은 의미에서는 유생의 하나라 할 수 있다.[2]
상세
유생은 조선시대에 상위의 신분층을 형성, 17,18세기에는 전체 인구의 약 20%를 차지하였다. 이들은 유교를 신봉하고 유교의 도덕을 실천하는 유교도이며, 한문자를 자유로이 구사하는 식자이기도 하였다.
유건(儒巾)이나 유관(儒冠)을 쓰고 유복(儒服)을 입고 있어서 다른 사람과는 손쉽게 구별할 수 있었으며 일정한 예의범절을 지켜야 하였다. 가묘(家廟)를 지어 4대조의 신주를 모셔야 하고, 길흉상제에 있어서는 ≪가례≫에 규정된 법식을 따라야 하였다.
성균관 및 사학(四學), 지방은 향교의 유적(儒籍)인 청금록(靑衿錄)에 등록되어 있어서 유림의 빈축을 살만한 행동을 했을 때는 부황(付黃)·묵삭(墨削) 등의 유벌(儒罰)을 받아 제적당하였다. 중세유럽에서 교회로부터 파문당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성균관이나 향교의 석전제(釋奠祭)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과 학교에 입학하고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7, 8세 때에 가숙(家塾)이나 마을의 서당에 들어가 ≪천자문≫ · ≪동몽선습≫ · ≪명심보감≫ · ≪소학≫ · ≪사략≫ 등의 초보적인 한문과 습자를 배우고, 14, 15세 때에 서울은 사학, 지방은 향교에 들어가 ≪소학≫ · 사서오경 등을 배웠다.
여기에서 수년 동안 공부하다가 소과에 응시, 합격해 생원 또는 진사가 되었다. 소과에 합격한 다음 이들은 성균관에 진학해 실력을 쌓은 뒤 대과에 응시, 합격하여 관계로 진출하는 것이 당시의 유생들이 밟는 정상적인 과정이었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소과는 서울의 사학 유생이나 향교의 교생에게만 응시 자격을 준 것이 아니라 일반 유학(幼學)에게도 주고, 대과 또한 생원 · 진사에게만 응시 자격을 준 것이 아니라 역시 일반 유학에게도 준 점이다.
현시(縣試) · 부시(府試)·원시(院試) 등 세 차례의 시험에 합격, 주 · 부 · 현학(州府縣學)의 생도가 된 생원에게만 과거 응시 자격을 준 중국 명 · 청시대 과거제도와는 다른 면이다.
17세기 경에 이르자 유림사회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즉, 과거를 지망해 그 준비에 전념하는 과유(科儒)와 이를 도외시하고 명경수행(明經修行)에 전념하는 처사로 나누어졌다. 그리고 과유가 사서오경의 구송(口誦)을 일삼는 명경생(明經生)과 시(詩) · 부(賦) · 표(表) 등의 사장(詞章)을 숭상하는 제술생(製述生)으로 나누어진 것이 그것이다.
조선 초기의 과거는 경학과 사장을 아울러 고시하는 식년시(式年試) · 증광시(增廣試) · 별시(別試) 등이 주로 열렸기 때문에 당시의 과유들은 양자를 겸수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후기에 이르러 시 · 부 · 표 · 전(箋) · 송(頌) · 명(銘) 등을 고시하는 알성시(謁聖試) · 정시(庭試) · 춘당대시(春塘臺試) 등의 사과(詞科)가 자주 열리게 되자, 많은 책을 얻어볼 수 있고 견문을 넓히는 데 편리한 경유(京儒)들은 사장을 공부하여 주로 사과에 응시하였다.
반면, 견문을 넓히는 데 불편하고 따라서 사장을 공부하기 힘든 향유들은 경학(經學)에 힘써 사서오경을 구송만 하면 합격할 수 있는 식년명경과(式年明經科)에 응시하는 것을 관례로 하였다. 이리하여 경학과 사장이 분리되어 과유 중에 명경생과 제술생의 구별이 생기고 다시 경유와 향유의 구별이 생기는 동시에 경학보다 사장을 존중하는 폐풍이 생겼다.
식년명경과를 지망하는 명경생들은 오직 사서오경의 구송에만 힘쓰고, 다른 책은 읽지 않았기 때문에 견문이 좁고 문리(文理)를 얻지 못하였다. 때문에 명경과에 급제해도 축문이나 편지 한 장 제대로 쓰지 못해 세상 사람들로부터 명경급제(明經及第)라는 비웃음을 샀다. 이들에게 유교의 철학적 연구를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제술생 또한 과장에서만 쓰이는 독특한 문체, 즉 과문(科文)을 익히는 데 열중하였다. 따라서 책을 읽어도 대의(大義)는 생각하지 않고 과장(科場)에서 써먹을 수 있는 미사여구만 찾는 데 급급하였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훌륭한 문학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후기에는 시나 부를 잘 짓는다 하여 급제를 주고 관직을 주었는데, 그들이 행정 사무를 알 까닭이 없었으니, 실제 사무는 아전(衙前)들에게 일임하는 형편이었다. 후기에 내려가 행정 사무가 문란해진 원인의 하나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원래 과거는 수험생의 학력은 측정할 수 있지만, 인격이나 품성을 측정할 수 없는 결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수험생 가운데에는 수험 공부에 열중한 나머지 수신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파렴치한 행위를 예사로 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요컨대, 후기의 과유는 아무 것도 바랄 것이 없는 존재일 뿐 아니라 도리어 사회에 해독을 끼치는 존재였다. 특히, 정약용(丁若鏞)은 이와 같은 과유를 다섯가지 좀의 하나로 손꼽고 있을 정도였다. 이에 뜻있는 선비들은 과거를 도외시하고 오직 경학을 연구하고 도를 닦는 데 전념하였다.
이러한 처사들의 수는 17세기에 이르러 상당수에 달해 하나의 큰 세력이 되었다. 그들은 상소를 통해 정부의 처사에 간섭했고, 정부도 이들 사림의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다.
특히, 인조반정 이후에는 서인들이 자기들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사림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사림 가운데에서 영향력이 큰 사람을 불러다가 당수로 삼기도 하고 혹은 벼슬을 주기도 하였다. 이를 세칭 산림(山林)이라 하였다.
그들은 국왕의 소명을 받으면 먼저 자기의 정치 의견을 기록한 상소문을 올렸다. 그리고 그에 대한 비답(批答)을 받아야만 입경하여 벼슬을 받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산림도 노론의 일당체제가 완성된 뒤에는 존재 가치를 잃어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게 되었다.
한편, 수기보다 치인을 더 중요시해 경세치용(經世致用) ·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학문을 연구한 실학자들과 천주교를 연구하고 신봉한 사람도 이들 처사 가운데에서 나왔다.[2]
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