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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9일 (금) 23:18 기준 최신판
옹정제(중국어:雍正帝yōng zhèng dì)는 청(淸)나라 제5대 황제(재위 1722∼1735)이다.
개요[편집]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 이름은 윤진(胤禛)이고,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헌제(憲帝)이다. 재위 때 사용한 연호에 따라 보통 옹정제라고 부른다. 강희제(康熙帝)의 넷째 아들이다. 옹정제는 군기처대신(軍機處大臣)을 두고 지방대관에게 주접(奏摺)이라는 친전장(親展狀)에 의해 정치의 실정을 보고하게 하였다. 토착민에게는 개토귀류(開土歸流)의 정책을 펴서 내지화(內地化)를 꾀하는 등 청나라의 지배체제를 확립하였다.
즉위 후 동생인 윤사(允祀) ·윤당(允禟) 등을 물리쳐 서민으로 삼고, 권신인 연갱요(年羹堯)·융과다(隆科多) 등을 숙청하여 독재권력을 확립하였다. 정부에서 파견하는 관리인 유관(流官)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는, 개토귀류(開土歸流)의 정책을 펴서 내지화(內地化)를 꾀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에 반대하던 칭하이(淸海)를 귀속시키고, 연갱요에게 23만 대군을 이끌고 티베트를 평정하게 한 뒤 주장대신(駐藏大臣)을 파견하여 보호령으로 삼았으며, 1727년 러시아와 캬흐타조약을 맺고 지금의 러시아와 몽골 간의 국경선을 정하였다.[1]
옹정제의 업적[편집]
1722년(강희 61년)에 부황 강희제가 붕어하자 창춘원에 감금하고 강희제의 고명대신인 장정옥·롱코도 등의 추대를 받아 황제에 올랐다. 13년의 짧은 치세였으나 그의 정책으로 청 제국은 강희제 말기 약간 부실하던 황권을 다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특히 황실의 안정과 강력한 황권을 수립하기 위해 과거 황위를 놓고 다툰 형제들은 죽이거나 감금하는 등 철저히 배제하고 대신들과 정사를 의논하였다.
옹정제는 아버지 강희제가 문무가 비교적 균형을 이루었던 데 반해 철저할 만큼 문치(文治)에 비중을 두었다. 선제인 강희제가 삼번(三藩)의 난 평정, 대만 정복, 러시아와의 분쟁, 외몽골 정복 등을 감행하고 준가르와 전쟁을 치르는 등 외정에 직접 관여하여 성과를 내면서 내치도 돌본 것에 비교하면 철저하게 평화주의나 부전(不戰)주의로 일관했는데, 즉위 초기에는 연갱요가 서북에서 군사 작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지만, 1731년 티베트의 갈단 체링에게 청군이 대패한 뒤로는 군사적인 정복 활동을 벌이는 작업에서 거의 손을 놓았다.
내치에서는 선제 때 마무리가 안 된 수준의 내정 체계를 크게 정비하여 강희제와 거의 동급의 찬사를 받는다. 팔기군 체제를 손보고 군기처를 설치하는 등의 개혁으로 권력을 황제에 집중시켰다. 또한, 하술되는 '본인 즉위 문제'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황태자 밀건법도 시행했다. 다만 만주족 후비에게서 난 소생이 본인뿐이던 건륭제 등의 사례로 실제 이 법의 효과가 있었던 때는 적다. 그의 정책으로 국가는 더욱 안정이 되었고 내실 역시 튼튼해졌다.
재정 개혁을 통하여 기강 단속과 재정 정비를 일거에 실행하는 정책을 추진함과 더불어 조세 제도 자체에도 개혁을 단행했다. 또한 군기처를 세우고 황권을 더욱 강화, 재상들의 정치 발언권을 규제하였고 재상들의 정치 참여를 규제한 대신 자신에겐 재상들이 본래 결재하던 문서의 양까지 합하여 어마어마하게 많은 양의 문서를 검토, 이에 일일이 답하였고 하급의 지방관이라도 자신에게 상소를 올리면 이 역시 받아주어 주필로 써서 보내주어서 명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옹정제는 재상들과 대신들을 군기대신으로 삼고 같이 정사를 의논하였으나 이미 그들의 권세는 명나라 때의 대신들인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에 비하여 크게 축소되어 있었기에 신권은 크게 위축되었다. 강희제 때 일어난 문자의 옥을 다시 대대적으로 실시하여 청 제국의 정통성에 반대하는 학자들과 한족을 엄정히 다스렸으며 지방관들에 대한 철저한 감시로 부정부패를 크게 줄였다. 강희제가 죽은 직후 군사를 동원하여 황제에 올랐기 때문에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서 황위를 찬탈한 권력지향적 독재자라는 평판도 있지만 지칠 줄 모르고 늦은 밤까지 정치에 몰두한 훌륭한 군주라는 평가도 동시에 받고 있다. [2]
옹정제의 사상[편집]
옹정제는 아버지 강희제와 더불어 학문을 매우 좋아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와 다른 점이 있었는데 강희제는 유교를 숭상하였지만 옹정제는 오히려 불교를 숭상하였다. 옹정제는 어릴 때부터 참선을 닦고 승려들과 불도(佛道)에 대해 토론하였고 불가의 학문에 모두 정통하여 못 외우는 불경이 없었다고 한다. 강희제의 탄신일 때, 다른 황자들은 언제나 고가의 진귀한 보물들을 부황에게 바친 반면, 옹정제는 자신이 손수 금가루로 쓴 불경을 강희제에게 선물하였다는 것은 옹정제의 불심과 성실함, 그리고 검소함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옹정제의 불교에 대한 믿음은 조부인 순치제와도 비슷하다. 옹정제는 정책의 기초로 언제나 불법을 생각하여 민생을 중요하게 여겼다. 또한 1712년(강희 51년)과 1713년(강희 52년) 사이에는 무려 7번이나 법회를 주관하여 자신의 깊은 불심을 증명하였다.
옹정제는 강력한 황권을 주창하여 설령 형제나 아들이라도 황제인 자신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절해야 하는 신하임을 강조하여 사적으로는 형제나 아들이나 공적으로는 엄연히 군신지간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염친왕 윤사와 혁군왕 윤당이 군신지간의 예를 허물어 다른 황족들과 모의를 꾸며 옹정제를 음해하자 옹정제는 형이 아닌 황제로서 그들에게 엄벌을 내리고 유교적 질서를 바로잡으려 하였다. 옹정제의 이러한 조치 이후 황족들은 정무에서 큰 규제를 받게 되어서 황족들의 입지가 크게 위축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옹정제는 인재를 찾는데 크게 주력하였고 지방이나 현장에서의 목소리까지 귀를 열었는데 번거로이 황제를 찾아와 일일이 고하는 대신 자신에게 표문을 올려바치고 자신은 북경에서 주필을 써서 보내게 하여 결과적으로 국부의 낭비를 일부라도 막게 되었다. 불심도 깊던 옹정제는 성실함에 있어서도 누구에게 뒤지지 않았는데 하루 4시간에서 5시간밖에 자지 않고 정무에 몰두하고 1년 내내 쉬는 날이 없이 바쁘게 지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옹정제의 사인을 과로사로 보기도 한다.
옹정제는 황제가 열심히 일해야 밑의 신하들과 백성들도 자신의 일에 근면할 것이라 생각하고 어려운 정무를 열심히 처리하였다. 후대의 학자들은 옹정제를 비난하건 칭송하건 모두 '역사상 가장 근면한 황제'로 부른다. 옹정제는 자신이 거처하던 양심전(養心殿)의 대청에 '원이일인치천하 부이천하봉일인'(愿以一人治天下 不以天下奉一人), 즉 '천하가 다스려지는데에는 한 사람의 책임에 달린 것이며 자신의 한 몸을 위해 천하를 희생시키지는 않으리라'라는 글귀를 걸어놓으며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고 묵묵히 정무를 이행하였다. 한편 옹정제는 양심전에 '중정인화'(中正仁和)라는 편액을 남겨 대청 중앙에 걸어놓았는데 황제는 중립적이고 정직하며 인자하고 화애로움을 갖춰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군기처[편집]
군기처(軍機處)는 중국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설치한 군사·정무의 최고기관이다. 황제의 독재정치를 보좌하는 기관으로, 명나라의 제도를 답습한 내각과 청나라 초기의 황족과 만주인 중심으로 구성된 의정왕대신(議政王大臣)이 정무와 군사 문제를 처리하는 기관이었다. 그러나 의정왕대신은 무능하고 내각은 청사가 황제의 거처에서 멀고 인원이 많았기 때문에 불편한 점이 많았다.
옹정제는 중가리아 토벌을 계기로 신속한 용병과 기밀보존을 목적으로 1729년 궁내에 임시로 군수방(軍需房)을 설치하였으며, 이를 1732년에 판리군기처(辦理軍機處)로 개칭하고 독립적인 상설관청으로 하였다. 처음에는 군사상의 사무만을 보았으나, 점차 황제의 자문에 응하고 조칙을 작성하고 군사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중요사항까지 처리하여 중요한 국무 전반에 걸쳐 심의 결정하는 국가 최고기관이 되었다. 구성인원은 실제로 재상의 권한을 장악한 군기대신(軍機大臣)과 군기장경(軍機章京) 등 약 30명 정도였는데, 궁성에 가까운 융종문(隆宗門) 옆의 조그만 가옥에서 집무를 하였다. 1911년 책임내각제가 실시되면서 소멸되었다.
대의각미록[편집]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은 중국 청(淸)나라 제5대 황제인 옹정제(雍正帝)가 청나라 조정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1729년에 칙령으로 간행 반포한 책이다. 청나라 초의 주자학자(朱子學者) 여유량(呂留良)이 주장한 화이사상(華夷思想:중화사상) 등의 영향을 받은 증정(曾靜)이 배만(排滿)을 위한 거병을 하도록 천섬총독(川陝總督) 악종기(岳鍾琪)를 종용하다가 붙잡힌 사건을 계기로 편찬되었다. 옹정제는 청나라 조정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논설에, 증정 등의 신문(訊問)에서 있었던 문답과, 그들이 전향하기에 이른 경과 등의 기술을 곁들여 간행했으며, 관료나 독서인들의 필독서적으로 삼게 하였다.
성유광훈[편집]
성유광훈(聖諭廣訓)은 중국 청(淸)나라의 옹정제(雍正帝)가 민중 교화를 위하여 포고한 교훈. 그 자수가 1만 자에 달했으므로 "만언론(萬言論)"이라고도 하였다. 강희제(康熙帝)가 작성한 "성론(聖論) 16조"를 1724년에 한 대목씩 차례대로 좇으면서 해석한 것이다. 내용은 국민이 향리에서 지켜야 할 도덕과 의무를 중심으로 한 것으로, 각자의 본분을 명확히 알고 준수하게 하여 통치·지배를 쉽게 하기 위한 것이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옹정제(雍正帝,1678.12.13.~1735.10.8)〉, 《두산백과》
- ↑ 〈옹정제〉,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 〈옹정제(雍正帝,1678.12.13.~1735.10.8)〉, 《두산백과》
- 〈옹정제〉, 《위키백과》
- 〈옹정제〉, 《나무위키》
- 리히튼, 〈옹정제와 효공인황후의 갈등, 그 내막〉, 《네이버블로그》, 2024-08-26
- 내일에듀, 〈(옹정제) 강희제의 전성기를 이어받다!〉, 《네이버블로그》, 2021-09-28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