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존스 (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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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존스(영어: St. John's)는 캐나다 동부 뉴펀들랜드 래브라도주의 주도이자 최대 도시이다. 뉴펀들랜드섬 아발론반도 동쪽 끝 부분에 있는 위치하며, 인구는 약 11만 명이고 면적은 446.04km²이다. 그린란드를 제외한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동쪽에 있는 도시이다.[1]
목차
개요
세인트존스는 신대륙에서 오래 된 도시로 뉴펀들랜드 어장의 중심기지이며, 주요 해항이다. 1497년 6월 24일 존 캐벗이 항해하며 어촌 마을에 도착한 날이 세례자 요한(John the Baptist)의 축일인 데서 기인하여 세인트존스라는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그 후 여러 나라의 어민들이 어장을 차지하기 위해 방문했고, 1583년 험프리 길버트 경이 영국이 뉴펀들랜드를 차지했음을 알리는 표시판을 해안에 세웠지만, 본격적인 정착의 시작은 17세기 초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18세기에 프랑스와의 영유권 다툼이 있었으나 결국 영국이 차지하였다. 이후 아일랜드에서 이민자들이 많이 건너왔다. 세계적인 어장의 중심지인 이 곳은 수산물 가공업이 발달되어 있다. 뉴펀들랜드섬의 중심지로 주변 지역을 포함하면 뉴펀들랜드 래브라도주 전체 인구의 절반 가량이 거주한다. 대구, 청어의 어획 및 바다표범의 포획량이 많고 그 가공업이 활발하다. 섬유, 가구, 페인트 등 제조업도 이루어지고 부근에서는 여우, 젖소, 닭 등도 사육한다.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옛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19세기에 건설된 가톨릭과 성공회의 대성당, 박물관 등이 있다. 바닷가의 언덕에는 조반니 카보토가 이곳을 발견한 기념비와 18세기에 이곳을 두고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졌던 전투 유적이 있다. 한편 이곳에서 1901년 굴리엘모 마르코니가 최초로 유럽발 대서양횡단 무선통신을 수신한 기록도 남아있다. 도시의 가장 유명한 특징으로는 굉장히 색감이 화려하고 알록달록한 집들이 많다는 것이다.[2][3]
역사
초기 역사(1500~1799)
세인트존스는 1500년대 초에 어부들이 계절별 캠프를 세우는 데 사용되었다. 세바스티안 카봇(Sebastian Cabot)은 1545년 원본 지도에 손으로 쓴 라틴어 본문에서 세인트 존스라는 이름을 그와 그의 아버지인 베네치아 탐험가 존 카봇(John Cabot)이 영국을 위해 봉사하던 중 최초로 항해한 유럽인이 되었을 때 명명했다. 1494년 6월 24일 아침 세례 요한의 축일에 항구로 입성했다. 1540년에는 프랑스, 스폐인, 포르투갈 선박이 매년 대서양을 건너 아발론반도 앞바다에서 조업했다.
위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519년 페드로 라이넬(Pedro Reinel)의 포르투갈 지도에 상 주앙(São João)으로 나타났다. 영국 선원 존 루트(John Rut가) 1527년 세인트를 방문했을 때 그는 항구에서 포르투갈 선박을 발견했다. 1527년 8월 3일 루트는 북미 항해 결과에 대해 헨리 왕에게 편지를 썼다. 이것은 북미에서 보낸 최초의 알려진 편지이다. 세인트존스은 니콜라스 데슬리엔스(Nicolas Desliens)의 1541년 세계 지도에 표시되어 있으며 세인트존스은 주앙 프레이어(João Freire)의 1546년 지도책에서 발견되었다.
1583년 8월 5일, 영국인 험프리 길버트 경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왕실 헌장에 따라 이 지역이 영국 최초의 해외 식민지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영구 인구는 없었고 길버트는 돌아오는 항해 중에 바다에서 실종되어 즉각적인 정착 계획이 중단되었다. 1620년까지 영국 서부 지역의 어부들은 뉴펀들랜드 동부 해안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1627년에 윌리엄 페인(William Payne)은 세인트존스를 "전국의 주요 주요 부지"라고 불렀다.
1630년 이후 세인트존스 마을이 영구적인 공동체로 설립되었다. 그전에는 영국 어부들이 영국 통제 해안을 따라 영구 정착지를 설립하는 것을 서부 국가 수산업의 촉구로 영국 정부에 의해 명시적으로 금지되었다. 인구는 17세기에 천천히 증가했다. 세인트존스는 1675년경 영국 해군 장교가 인구조사를 시작했을 때 뉴펀들랜드에서 가장 큰 정착지였다. 여름에는 이주 어부들이 도착하면서 인구가 증가했다. 1680년에 어선이 세인트존스에 어장을 설치하고 수백 명의 아일랜드인을 항구로 데려와 해안 어선을 운영했다. 1665년 6월 네덜란드 제독 미치엘 드 루이터(Michiel de Ruyter)가 세인트 존스를 일시적으로 점령한 이후 이 도시의 첫 번째 중요한 방어 시설은 상업적인 이익으로 인해 세워졌다.
주민들은 1673년 영국 상인 선장인 크리스토퍼 마틴(Christopher Martin)에 의해 방어되었을 때 네덜란드의 두 번째 공격을 막아냈다. 마틴은 자신의 배인 엘리아스 앤드루스(Elias Andrews)에서 6문의 대포를 착륙시키고 항구로 이어지는 근처에 흙으로 된 흉벽과 포대를 건설했다 마틴은 단 23명만으로 네덜란드 전함 3척의 공격을 물리쳤다. 영국 정부는 1689년경에 이러한 요새를 확장할 계획을 세웠으나, 프랑스 제독 피에르 르 모인 디베르빌( Pierre Le Moyne d'Iberville)이 아발론반도 작전에서 마을을 점령하고 파괴하기 전까지 시작되지 않았다. 1697년 말 1500명의 영국 지원군이 도착했을 때 그들은 마을과 요새의 잔해를 발견했다.
프랑스군은 1705년에 세인트존스를 다시 공격했고 1708년에 세인트존스를 점령하여 불을 지르며 민간 구조물을 파괴했다. 항구는 18세기와 19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요새화되었다. 북미 7년 전쟁의 마지막 전투가 1762년 세인트존스에서 벌어졌다. 1762년 초 프랑스군이 마을을 기습 점령한 후 영국군은 대응했고 시그널 힐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세인트존스를 윌리엄 애머스트 대령이 지휘하는 영국군에 항복했다. 1700년대 후반에 항구 입구를 방어하기 위해 애머스트 요새(Fort Amherst)와 월데그레이브 요새(Fort Waldegrave)가 건설되었다.
근대
1800년 4월 24일 뉴펀들랜드에 주둔한 영국 수비대 소속 아일랜드 군인 19명이 반란을 일으켜 "아일랜드 연합 봉기"가 일어났다. 아일랜드인 연합회 회원으로 의심되는 반란범들은 반란이 실패하자 시골로 도망쳤고 몇 주 만에 체포되어 법정에 섰다. 체포된 반란자 17명 중 8명은 처형되었고 4명은 석방되었으며 5명은 형벌 수송형을 선고받았다.
18세기에는 뉴펀들랜드에서 인구 증가, 정부 출범, 교회 설립, 북미와의 상업적 관계 강화, 물개, 연어 및 그랜드 뱅크스 어업 개발 등 주요 변화가 있었다. 세인트존스의 인구는 천천히 증가했다. 원래는 어업 기지였으나 수비대, 정부 중심지, 상업 중심지이기도 했다. 세인트존스는 미국 독립 전쟁과 1812년 전쟁 동안 해군 기지로 사용되었다.
굴리엘모 마르코니(Guglielmo Marconi)는 1901년 12월 12일 콘월 주 폴두(Poldhu)에 있는 무선국으로부터 세인트존스에서 최초의 대서양 횡단 무선 신호를 수신했다. 세인트존스는 1919년 6월 앨콕과 브라운이 개조된 비커스 비미 IV(Vickers Vimy IV) 폭격기를 타고 세인트 존스의 레스터 필드(Lester's Field)에서 출발하여 근처 늪지에서 끝나는 최초의 논스톱 대서양횡단 항공기 비행의 출발점이었다. 2005년 7월, 미국 비행가이자 모험가인 스티브 포셋(Steve Fossett)이 복제 항공기를 타고 이 비행을 복제했으며, 세인트존스 국제공항은 레스터 필드를 대체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항구는 대잠전을 수행하는 영국 왕립 해군과 캐나다 왕립 해군 선박을 지원했다. 이곳은 영국과 미국 사이의 기지 임대 계약 구축함의 일부로 설립된 미국 육군 공군 기지인 포트 페퍼렐(Fort Pepperrell)이 있던 자리였다. 기지에는 여러 개의 미국 유인 해안 방어 포가 포함되어 있었고 두 개의 렌드리스 10인치 M1888 포대가 있었다. 기지는 1960년에 캐나다 통제권으로 이전되었으며 현재는 CFS 세인트 존스(CFS St. John's)로 알려져 있다. 1942년 12월 화재가 발생하여 99명의 군인 및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세인트존스와 주 전체는 수백 년 동안 주 경제의 원동력이었던 북부 대구 어업의 붕괴로 1990년대에 심각한 영향을 받았다. 10년 동안 높은 실업률과 인구 감소가 있은 후, 도시는 하이버니아, 테라 노바, 화이트 로즈 유전에 근접한 도시는 인구 증가와 상업적 발전에 박차를 가한 경제적 호황을 이끌었다. 그 결과, 세인트존스 지역은 현재 이 지역 경제 생산량의 약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2012년 현재 세인트존스에는 21개의 캐나다 국립사적지(National Historic Sites of Canada)가 포함되어 있다.[4]
경제
역사적으로는 대서양에 분포하는 대구의 어항으로 번성했다. 하지만 무분별한 남획으로 인해 대구 어장의 씨가 마르면서 어업은 멸망하고 이후 근근히 먹고 살았다. 2012년에 해상 유전의 탐사 성공으로 인해 한동안은 소득 증가와 경제 안정화를 누리며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2015년 이후로 펼쳐진 유가 폭락 사태로 인해 해상 유전에서 석유를 뽑아내서 팔아봐야 적자가 난다는 재정 막장 사태가 벌어져 최근 4년간 최악의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2020년에 접어들며 코로나 바이러스의 세계적 대유행과 사우디-러시아간 증산 치킨게임이 벌어지며 국제 원유 가격이 배럴당 23달러대까지 폭락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뉴펀들랜드 주의 석유 경제와 재정책이 배럴당 60달러대는 돼야 안정적으로 경영이 가능하다는 벤치마크 보고서가 나와 있는데 배럴당 20달러대는 벤치마크 된 배럴당 60~65 달러의 분기점에 한참 못미치는 1/3수준이라 주정부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지역 해상 유전들은 급기야 석유 생산 자체를 중단했다.
현재 뉴펀들랜드 래브라도주의 평균 실업률은 13.1%에 달한다. 이는 캐나다의 전국 평균치를 2배 이상 초과하는 막장 수치이며 주의 최대도시이자 주도인 세인트 존스 또한 괴멸적인 피해를 입고 경제난에 신음하고 있다. 오래 지속된 저유가 기조로 재정이 붕괴하고 수도, 전기 요금 등의 공과금마저 인상되면서 최동단에 위치한 이 도시에서는 대공황이 벌어지고있다. 지역 경제의 마지막 비빌 언덕이라고 불리던 에너지 산업이 파탄에 이르면서 성장 동력을 상실한 세인트 존스는 향후 경제난으로 인한 저성장과 인구 유출 등 악재를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뉴펀들랜드섬
[[뉴펀들랜드섬[[(영어: Newfoundland, 프랑스어: Terre-Neuve, 아일랜드어: Talamh an Éisc)은 캐나다의 섬으로 섬의 면적은 108,860km²이고 뉴펀들랜드 래브라도주 인구의 대부분이 살고 있다. 뉴펀들랜드섬은 캐나다 뉴펀들랜드 래브라도주의 남동부를 차지하는 섬이다. 1000년 무렵, 바이킹 탐험가들은 북대서양을 넘어서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이 섬에 도착했다. 이로써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북아메리카가 처음으로 연결되었고 미미한 형태로나마 진정한 의미의 세계화가 시작되었다. 1583년 영국령으로 선언되었으나 이후 오랫동안 프랑스와 영유권을 둘러싼 쟁탈전이 있었으며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영국령이 됐으나 어업권은 프랑스가 소유하였다. 1934년 영국 식민지가 되고 1948년 주민 투표에 의해 정식으로 캐나다의 일부가 되었다. 뉴펀들랜드섬은 캐나다 끝자락 동네에 유명한 볼거리도 없다보니 캐나다 사람들에게 이곳의 인식은 시골이다. 섬의 전체 면적은 108,860km²으로 남한의 면적(100,363㎢)보다 조금 더 넓은 수준이나 인구는 불과 47만 명으로 의정부시와 비슷한 수준이다. 인구밀도는 불과 4.39/㎢명으로 인구밀도 낮은 캐나다에서도 최하위 수준이다. 이마저도 세인트 존스, 갠더와 같은 도시에 몰려 살고 있다. 뉴펀들랜드에 가까운 래브라도의 일부 지역과 함께 UTC-3 1/2라는 독립된 시간대를 사용한다. 이 섬은 넓은 면적에 비해 인구가 많지 않아서 딱히 도시라고 할만한 곳은 별로 없지만, 섬 동부 끝자락에 있는 세인트존스시 광역권에 약 20만 명이 살고 있어서 나름의 중심 도시 역할을 하고 있다. 캐나다 최초의 일출은 이 섬에서 시작된다. 캐나다에서 이 섬은 한국의 제주도나 일본의 홋카이도 포지션이 된다.[5][6]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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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 ↑ 〈세인트존스 (뉴펀들랜드 래브라도주)〉, 《위키백과》
- ↑ 〈세인트존스(캐나다)〉, 《나무위키》
- ↑ 〈세인트존스(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 〈세인트존스 뉴펀들랜드 래브라도〉, 《요다위키》
- ↑ 〈뉴펀들랜드 섬〉, 《나무위키》
- ↑ 〈뉴펀들랜드섬〉, 《위키백과》
참고자료
- 〈세인트존스 (뉴펀들랜드 래브라도주)〉, 《위키백과》
- 〈뉴펀들랜드섬〉, 《위키백과》
- 〈세인트존스(캐나다)〉, 《나무위키》
- 〈뉴펀들랜드 섬〉, 《나무위키》
- 〈세인트존스 뉴펀들랜드 래브라도〉, 《요다위키》
- 〈세인트존스(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
북아메리카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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