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
삼성그룹은 대한민국에 기반을 둔 다국적 기업이자 최대 재벌 집단이다. 창업주는 호암 이병철 회장이며 1938년 창업한 삼성상회가 모태다. 대구광역시 중구 인교동에 삼성상회가 위치해 있었는데, 1997년 건물이 노후화가 진행되어 철거되고, 그 자리에 높이 5.95m, 너비 8.7m의 삼성상회 재현 벽과 삼성상회 실물을 250분의 1로 축소한 청동 모형으로 구성된 작은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북구 침산동 옛 제일모직(현 삼성물산㈜) 자리에 들어선 대구삼성창조경제단지에 삼성상회 건물을 복원해 놓았다. 이병철 회장이 당시에 살았던 집은 현재 북성로 오토바이 골목 내부에 보존되어 있다.
개요
삼성그룹은 지주회사로 전환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순환출자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삼성물산㈜이 지주회사 역할을 하고 있다. 삼성물산㈜이 삼성생명보험㈜을 지배하고 삼성생명보험㈜이 삼성전자㈜를 지배하고, 삼성전자㈜가 삼성카드㈜를 지배하고 삼성카드㈜가 다시 삼성물산㈜을 지배하는 순환출자 구조이다. 사실상 너무 덩치가 커져버린 삼선전자㈜를 오너 일가가 직접 지분으로 지배하기 힘들기 때문에 삼성생명보험㈜의의 자금을 이용해 지배하는 구조로 한국의 전형적인 재벌 구조다. 단, 2011년 금융 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에 의거 순환출자 구조 탈피 선언을 한 바 있으며, 2014년 이건희의 심장마비 입원으로 인해 이건희 유고상황을 대비 경영권 방어가 필요해지면서 급속도로 지배구조가 변동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2010년대에 인터넷 주소 정책이 바뀌면서 기업들도 자체적인 최상의 도메인을 등록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삼성도 현재 .삼성을 인터넷 주소 관리 기구인 아이칸(ICANN)에 신청해서 승인을 받았고, .samsung은 신청 완료된 상태다. 아마 .samsung까지 승인이 나면 본격적으로 두 도메인을 쓰기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
2017년 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여파로, 삼성그룹은 그룹의 경영을 총괄하던 미래전략실의 해체 계획을 발표했다. 미래전략실은 삼성의 계열사(관계사)들을 수직적 지배하는 조직으로써, 미래전략실의 해체는 삼성그룹의 해체를 의미한다. 한편 삼성그룹은 미래전략실 해체 후엔 계열사들이 각자 자율적으로 경영하는 체제로 전환하게 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그룹공채도 2017년을 끝으로 없어지고, 계열사별로 독자적으로 채용하는 체제로 바뀐다고 했다. 이에 따라 '삼성그룹'이라는 용어는 더 이상 쓸 수 없게 됐다. 그래서 '삼성그룹 홈페이지'나 '삼성그룹 블로그'도 당연히 존재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2017년 4월 3일에는 삼성그룹 공식 홈페이지와 블로그가 폐쇄됐다. 2017년 3월 2일에는 그룹 사내 방송이 종료되었고, 3월 3일에는 그룹 기자실이 폐쇄됐다.
다만 삼성 계열사간의 지분관계는 여전하기 때문에 그룹이 완전히 해체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세대를 거듭하면서 삼성 계열사간의 관계가 점점 멀어질 가능성도 있으므로 삼성의 미래를 밝다고만 보기는 어렵다.
역사
1938년 3월, 협동정미소 주인이던 이병철이 현재의 대구광역시 인교동에 삼성상회를 개업한 게 삼성그룹의 시초이다. 당시 29세였던 이병철은 경상남도 김해에서 농지 투기에 실패한 후 심기일전을 굳히며 자본금 3만 원으로 삼성상회를 세우게 됐다. 처음에는 농산물 판매와 별표국수 판매 등 가볍고 기본적인 것으로 훗날의 삼성그룹 형태와 비교하면 차이가 현격히 나는 편이었다. 요즘에는 삼성이 일류 재벌 집단이라고 하지만, 초창기까지는 서민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던 곳이다. 전 씨제이그룹(CJ그룹) 명예회장이자 이병철의 장남인 이맹희가 히고한 바에 따르면 당시 삼성상회는 지금의 삼성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으며 국수공장이 매출은 늘었지만 정작 이병철 본인은 그 돈을 모두 공장 설비 투자에 쏟았고 이병철 일가 역시 공장 귀퉁이에서 새우잠을 잤을 정도로 공장 상태가 열악했다고 말했다. 오늘날 삼성과 비교하면 좋지 않은 환경이었다. 당시 별표국수가 많이 팔려 매출액도 올라갔지만 대구(1981년 6월 30일까지 대구는 경상북도였다.)에는 경상북도에서 1위를 차지하는 소표국수가 있었고, 2위의 풍국면도 있었다. 풍국면은 지금도 대구광역시 북구 만평네거리 북쪽 근처에 공장이 있으며 현재는 범 삼성가에 속해 있는 신세계그룹의 국수 오이엠(OEM)회사다. 결국 별표국수는 이들의 아성과 도전을 이기지 못해 폐업했다.
1942년 '조선양조'를 인수해 사업 확장의 발판을 마련한 후 1948년에 서울 종로2가에서 조홍제와 함께 '삼성물산공사'로 재출범했다. 1959년, 6.25 전쟁으로 임시수도 부산으로 피난가서 '삼성물산'으로 사명을 변경했으며, 전쟁 이후 국가를 지불보증인으로 세워 차관을 받아오면서 정경유착을 통해 점차 대기업으로 성장하게 됐다. 1953년 제일제당(현 CJ제일제㈜)을 세워 처음으로 제조업을 시작해 국산 설탕을 개발했고, 1954년 제일모직을 세워 국산 양복지 '골덴텍스'를 개발해냈다. 1957년에 한국 재계사상 최초로 신입사원 공개채용을 개시한 후 1958년 '안국화재'를 인수해 금융업에도 처음 진출하고 이듬해에 한국재벌 중 최초로 비서실을 설치해 기업집단으로서의 모양새를 갖추었다. 1963년에 동방생명 및 동화백화점을 인수하고, 1965년 중앙일보를 창간해 언론사업에도 진출하고 신문용지 자체 수급을 위해 새한제지도 인수했다. 그러나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이병철 회장은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고 경영 일선에서 잠시 물러났으나, 1968년 경영 일선에서 복귀한 후 전자산업 진출을 선언하며 수원 공단부지를 매입하며 이듬해 삼성전자㈜ 및 삼성산요(SANYO)전기를 세웠다. 이후 1970년 삼성엔이씨(NEC)㈜를 세워 전자사업 확장을 개시하며 1973년 제일합섬, 1974년 삼성석유화학㈜ 등을 세우며 화학이나 서비스분야 등에도 영역을 확장했고, 같은 해 한국반도체를 인수해 반도체 산업에 처음 손을 뻗었다. 1976년 본사를 태평로 신사옥으로 이전하고 1977년 삼성종합건설㈜을 세워 건설업에도 도전하였으며, 1979년에 삼남 이건희가 부회장이 되면서 2세 경영체제를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1980년 한국전자통신을 인수한 후 1982년 프로야구단 삼성라이온즈를 창단하며 종합연수원을 열었고, 1983년 한국 최초로 64K D램 개발에도 주도했다. 1985년 삼성데이타시스템(현 삼성에스디에스㈜)을 세워 정보통신 사업에도 진출했다. 1987년에 삼성종합기술원도 세웠다. 그해 11월 이병철이 숨지자 이건희 부회장이 가업을 이어받아 12월부터 회장이 됐다. 1990년대부터 친족분리를 진행해 1991년 신세계 백화점과 전주제지(현 한솔제지㈜), 1993년 제일제당을 각각 분리했다. 1993년 '신경영 선언'에 따라 로고와 기업이념 등을 바꾸고 1995년 한국 대기업으로서 최초로 소그룹 제도를 도입하였으며, 1995년 삼성자동차를 세워 자동차 진출을 시작했다. 1997년 외환위기로 구조조정을 거듭 단행해 2000년에 삼성자동차를 프랑스 '르노-닛산 얼라이언스'에 팔았고, 2008년 서초 삼성타운으로 본사를 이전했다. 2014년 삼성종합화학 등 4개 석유화학계열사를 한화그룹에 매각하고 2015년 (신)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역합병해 '통합 삼성물산'을 출범시켰다. 2016년 삼성정밀화학과 삼성에스디아이㈜(삼성SDI) 케미컬사업부문을 롯데그룹에 팔고 2017년 2월에 미래전략실 해체를 선언한다. 이에 따라 계열사별 독립과 자율경영체제 전환 수순을 밟게 되었으며, 삼성그룹 공식 홈페이지도 문을 닫게 된다.
로고
본사의 워드마크는 타원형과 색상, 'SAMSUNG'이란 글자가 유기적으로 작용해서 전체적으로 삼성을 표현하는 아이덴티티가 반영되어 있다. 또 마크 안의 문자를 영어로 표현하여 세계 어디서나 같은 발음으로 읽혀지고 쉽게 기억할 수 있도록 했다. 타원형의 디자인은 유연성과 단순함을 강조하며, 우주와 세계무대를 산징하는 타원을 비스듬히 처리하여 동적이고 혁신적인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다. 또 S와 G의 터진 부분을 통해 내부와 외부의 기운이 통하게 하여 세계와 호흡하고 인류사회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았으며, A자의 가로 지름을 제거하여 개방성을 나타냈다. 영문 로고의 디자인은 세련되고 정교하게 처리해 기술주의의 고객지향 의지, 첨단기업의 이미지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표현했다. 기본 색상의 경우, 기존에 써 온 청색을 그대로 유지해서 영속성을 지니도록 했다. 그룹 공통색상인 청색은 안정감과 신뢰감을 주는 색으로 고객과 보다 친숙해지려는 세계 제일주의와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상징하고 있다.
1993년 6월, 이건희는 그룹 사내방송 에스비씨(SBC)의 한 고발 프로그램ㅁ에서 삼성 세탁기의 라인 작업자가 칼로 불량인 부품을 대충 깎아내서 조립하는 모습으로 삼성 세탁기의 불량률이 높아지는 현상과, 후쿠다 다미오가 "삼성그룹은 2류나 다름없다"라면서 삼성그룹의 문제점과 경영 방식의 모든 것을 바꿔야한다는 개선책을 바탕으로 한 이른바 후쿠다 보고서를 읽고 큰 충격을 받은 뒤, '마누라랑 자식 빼고 다 바꾼다'라는 신경영을 시작하게 된다. 이후 삼성의 첫 번째 쇄신은 바로 로고 교체였다. 이전까지 파란 바탕에 사립학교 로고 비스무리했던 그룹 로고가 기본이었으나, 반면 삼성전자, 제일모직, 제일기획, 제일합섬, 전주제지, 동방생명, 안국화재, 코리아엔지니어링, 한국안전시스템, 중앙일보, 제일제당 등 일부 계열사는 각기 다른 로고를 쓰는 등 제대로 통일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1989년 이후 삼성생명, 안국화재, 한국안전시스템 등 일부 계열사가 그룹 로고를 사용했다. 글씨 로고는 서예가 일중 김충현이 만든 '일중체'를 썼다.
연혁
로고
특징
*㈜우리은행과의 관계
- 삼성그룹 사업체는 무조건 ㈜우리은행만을 유일한 거래처 은행으로 취급한다. 그룹 전체가 하나의 은행만을 취급하는 건 굉장히 특이한 경우이다. ㈜우리은행의 실력을 쌓는데 결정적인 공로를 하는 중이다. ㈜우리은행의 외국 지사 역시 삼성그룹 현지법인의 주거래은행이다. 원래 삼성그룹은 한일은행이 1958년 불하과정을 통해 초기 민영화될 때 한일은행을 소유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 한일은행에 모든 거래처를 몰아주고 유지한 관계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우리은행의 한국 제외하고 외국 파견지점을 보면 다 삼성그룹의 외국지사가 있는 도시에 같이 파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