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일본(日本, Japan)은 동아시아 끝에 있는 섬나라이다. 수도는 도쿄(東京, Tokyo)이다. 태평양에 있는 일본 열도의 네 개의 큰 섬(혼슈, 규슈, 시코쿠, 홋카이도)과 이들 주변에 산재한 작은 섬들로 구성되어 있다. 일본의 전체 면적은 37만 7973 km²이며, 한반도의 약 1.7배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1889년에 대일본제국헌법을 제정하여 입헌국가가 되었고, 태평양전쟁 후 1947년 현재의 일본국헌법이 제정되었다.
개요
일본국(일본어: 日本国 니혼코쿠, にっぽんこく 닛폰코쿠), 약칭 일본(日本, 일본어: 日本 니혼, にっぽん 닛폰)은 동아시아의 일본 열도와 오세아니아의 북부 일대에 위치한 국가이다. 국호인 일본국은 1945년 포츠담 선언에 서명한 이후 1947년에 시행된 일본국 헌법에 의해 성립되었다.
6,852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군도 국가인 일본은 혼슈, 규슈, 시코쿠, 홋카이도 등 4개의 섬이 일본 전체 면적의 97%를 차지하며, 대부분의 섬들이 화산 활동을 통해 생겨났다. 일본의 인구는 약 1억 2,600만 명으로, 세계에서 11번째로 많다. 도쿄도를 중심으로 한 수도권인 간토 지방은 세계에서 가장 큰 메트로폴리탄이며, 이 지역에만 4,350만 명(일본 전체 인구의 34.5%)이 거주하고 있다.
현재의 일본은 1945년 포츠담 선언에 서명한 이후 1947년에 제정·시행된 일본국 헌법에 의해 법적으로 성립된 국가이다. 일본국 헌법이 제정되고 일본은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상징적인 국가원수 역할을 하는 천황과 국민의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참의원(상원)·중의원(하원)으로 구성되는 국회가 공존하고 있다. 현재의 천황은 나루히토, 국회의 집권당은 자유민주당이며 내각총리대신은 기시다 후미오이다.
일본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선진국으로 알려져 있고 또한 강대국이다. 일본 엔은 세계 무역결제통화 비중의 15~20%를 차지하 대표적인 안전자산으로 평가받아 많은 사람들이 자산 피난처로써 선택하기도 하는 신뢰성이 높은 통화이다. 이 때문에 엔화는 미국 달러, 유로와 함께 세계 3대 통화로 꼽힌다. 일본의 GDP는 미국과 중국에 이은 세계 3위이며, PPP는 세계 4위, 금 보유고 세계 8위, 주식시장 규모 세계 3위, 대외순자산 규모 세계 1위 및 국제통화기금(IMF) 투표권은 세계 2위이다. 비서양권 국가 중 유일한 G7 회원국이자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주도국, 아시아개발은행(ADB) 설립국이며, 유네스코 예산 분담률 1위, UN 분담률 3위로서 전세계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는 국가이다.
상징
국호
일본의 국호는 일본어 명칭으로 닛폰(일본어: にっぽん) 또는 니혼(일본어: にほん)이 사용되고 있다. 이는 일본어에서 한자를 읽는 방식이 여러 가지이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으로, 한자로는 동일하게 일본(日本)이라 표기한다. 보통 닛폰이 공식적인 표기로 많이 쓰이며 주로 엔화와 우표, 그 외에 많은 공공 기관의 명칭이나 체육 행사 등에서 사용되고 있다. 한편 니혼은 현대에 이르러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일본인들은 자신을 니혼진(日本人, にほんじん)이라고 호칭하며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인 일본어는 니혼고(日本語, にほんご)라고 부른다.
닛폰과 니혼 양쪽 모두 '태양이 떠오르는 땅'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러한 명칭은 중국 수나라 시대 이후부터 사용되었는데 이처럼 니혼과 닛폰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전까지 일본은 주변국으로부터 멸시적인 의미에서 왜(倭) 또는 왜국(倭國, 왜나라)이라 불려왔고 히미코 여왕이 통치하던 때에는 '동해희씨국'(東海姬氏國), '동해여국'(東海女國), '여자국'(女子國)이라고 호칭하기도 하였으며 '부상'(扶桑, 일본어: 扶桑 후소)이라고도 하였다. 주로 서양권에서 부르는 명칭인 '저팬', '재팬'(영어: Japan)은 중국 원나라 시대에 동아시아를 순례했던 이탈리아의 탐험가 마르코 폴로가 고대 중국어의 한 갈래인 우어(吳語, 오어)로 일본을 뜻하는 단어인 '지팡구'(Gipangu)라는 단어로 일본을 소개하였고 이것이 수세기 동안 여러 변형을 거친 데서 나온 것이다. 이 때문에 자퐁(Japon)이라는 표기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일본에 우편물을 보내기 위해 쓰는 국가기호는 JP이다.
일본 내부에서는 일본국(日本国)을 공식 명칭으로 쓰지만, 국제적으로는 약칭인 일본(Japan)을 공식 명칭으로 쓴다. 특별히 대일본제국(Empire of Japan) 시대의 정체와 구별하여 일본'국(国)'이라 표기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State of Japan'으로 쓰는 용례도 찾아볼 수 있다.
일본국의 국호는 별도의 법령으로 이 나라를 '일본국'이라고 칭하도록 지정한 것이 아니며, 일본국 헌법에서 일본을 지칭할 때 쓰는 용어가 모두 일본국이라는 것을 통해 간접적으로 규정하였다.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 미국(United States of America), 중국(People's Republic of China) 등에 비하면 일본의 공식 국호는 매우 간략하다(Japan). 이는 일본이 국가로서 갖는 정체성의 모호함과 무관하지 않은데, 정식 국호에 군주제라는 정치 체제를 나타내는 단어가 없다. 이는 군주의 정체성(신, 황제 등)을 명백히 정의하지 않는 것이 일본의 정책이므로 굳이 공식 국호에 정치 체제를 나타내는 단어를 포함시키지 않는 것으로 추측된다.
국기
일본의 국기는 일장기(日章旗, にっしょうき, 닛쇼키)이다. 백색 바탕에 태양을 상징하는 붉은 원인 '일장(日章)'을 그려 넣은 깃발이다. 공식적으로는 1870년에 국기로 제정됐지만 깃발 자체의 역사는 훨씬 오래됐다.
일장기의 홍색은 존애(尊愛)와 활력, 백색은 신성(神聖)과 순결을 의미한다.
법적으로는 '일장기'가 공식 명칭이나, 전통적으로 이를 부르던 이름인 히노마루(日の丸, ひのまる)가 더 널리 쓰인다. 다만, 일장기는 '기(旗, 깃발)'를 의미하며 '히노마루'라고 칭할 때에는 일장 도안 자체를 이른다. 일본어 '히노마루'는 일본의 상징이라는 의미에서 파생되어 '일본', '일본국', 또는 '일본에서 유래한 무언가'를 은유하는 뜻으로도 쓰인다.
국가
일본의 국가는 기미가요(君が代, きみがよ)이다. 본래의 가사는 고대 일본에서 기원한 단가로, 1880년 독일의 작곡가인 프란츠 에케르트에 의해 기존의 단가 가사를 기반으로 작곡이 이루어져 1888년부터 일본 제국 시기 국가로 쓰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일본의 공식적인 국가가 아니었으나, 사실상의 국가 역할을 해왔으며, 1999년에 제정된 「국기 및 국가에 관한 법률」에 의해 법적인 국가로 재지정되었다.
노래가 총 11마디로 굉장히 짧다. 또 국가치곤 분위기가 상당히 어두운 것도 특징이다. 이러한 이유로 대한민국, 중국 등 반일 감정이 강한 국가에서는 장송곡 같다며 비하하기도 한다.
아무래도 아악의 형태를 기본으로 만들다 보니 일본적인 느낌이 강하다. 실제로 나가노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는 궁내청 아악부가 아악으로 기미가요를 연주했다. 일본 민족주의자들은 일본의 전통 선율을 국가에 담았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국장
국화문장(菊花紋章, 기쿠카몬쇼) 또는 십육변팔중표국문(十六弁八重表菊紋)은 일본 황실의 가몬으로, '국화문(菊花紋 기쿠카몬' 이나 '국문(菊紋 기쿠몬)'이라 줄여 부르기도 한다.
가마쿠라 시대의 고토바 천황이 국화를 좋아해 자신을 나타내는 징표로 사용했다. 이후 고후카쿠사 천황, 가메야마 천황, 고우다 천황이 이를 자신들의 징표로 계속 사용해 황실의 문장으로 정착되었다.
공식적으로 일본 황실의 문장이 된 것은 1869년(메이지 2년)의 태정관포령에 의해서이다. 이때, 천황의 문장으로서 "십육변팔중표국문"이, 천황 이외의 황족의 문장으로서 십사변일중이국문(十四弁一重裏菊紋)이 각각 정해졌다. 1871년(메이지 4년)에는 황족인 아닌 자가 국화문장을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기도 했으나, 그 후 완화되었다.
야마토 전함(戰艦大和) 등 일본 제국 해군 군함의 뱃머리에 붙여져 있었으며, 현재도 일본 여권의 표지에 이 문장이 그려져 있다.
지리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일본의 영토는 동아시아 동쪽에 길이 3,000여km에 활 모양으로 걸쳐져 있는 일본 열도와 오키나와를 포함한다. 일본의 최동단은 도쿄도 미나미토리섬, 서단은 오키나와현 요나구니섬, 남단은 도쿄도 오키노토리섬, 북단은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홋카이도의 벤텐섬이다.
일본은 아시아 대륙 연변(沿邊)에 있으며 전체 국토 면적은 37만 7,975㎢로 이는 지구 표면적의 0.07%, 세계 육지 면적의 0.3%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는 대한민국보다 3.7배나 크고 한반도보다도 1.7배나 더 넓으며 영국(24만 3,981㎢)이나 이탈리아(30만 1,340㎢), 독일(35만 7,022㎢)보다도 국토 면적이 더 넓다. 일본을 그대로 미국 동부 연안에 가져다 놓으면 플로리다를 제외한 동부의 모든 주들을 다 덮으며, 유럽에 있는 나라였다면 유럽 국가들 중에서 면적 순으로 7위이다.
4개 섬 가운데 혼슈만 해도 대한민국과 북한을 합친 면적보다 크며, 동시에 세계에서 7번째로 큰 섬이다. 세부적으로 보면 제3의 섬인 규슈 섬은 경상도 지역보다 약간 크고, 제4의 섬인 시코쿠 섬은 경상북도보다 조금 작은 정도이고, 강원도보다 약간 크다. 또 홋카이도는 섬 하나가 대한민국 실효지배 면적의 80% 정도 크기이다.
다만 일본 열도의 대부분은 한반도와 비슷하게 산지라 가용면적은 작은 편으로, 경작 가능한 평야지대의 면적을 따지면 위에 열거한 나라들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좁다. 이 때문에 일본도 한국처럼 가용면적 대비 인구밀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라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체감 인구밀도가 꽤나 높은 편이다.
일본 열도는 남북으로 길이가 아주 긴 편으로, 본토로만 따지면 직선 거리 기준 서남단 규슈섬 가고시마현 이부스키(指宿)에서 북동단 홋카이도섬 네무로(根室)까지 1,900km인데, 이는 베이징에서 광저우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다. 일본령 전체로 보면, 류큐 열도 최서단이자 일본 최서단인 요나구니(与那国)에서 일본 최동단인 미나미토리 섬(南鳥島)까지의 직선거리는 더 길어 3,140km로 인천국제공항에서 사이판까지의 직선 거리와 맞먹는다.
넓은 국토만큼이나 일본의 자연환경은 아주 다양하고 그 스펙트럼이 넓다. 국토가 한국의 우하부를 길게 감싸는 형태로 되어 있어 일본의 최동단, 최서단, 최남단, 최북단은 모두 남북한의 최 동서남북단보다도 더 극점에 위치해 있다. 일본의 최북단인 벤텐 섬(북위 45도)과 최서단인 요나구니 섬(동경 122도)은 각각 남북한의 최북단인 함경북도 온성군(북위 43도)과 최서단인 비단 섬(신도, 동경 124도)보다도 더 먼 곳에 있다. 이렇게나 다양한 지리적 요건을 갖춘 덕분에 일본에서는 지중해성 기후가 나타난다던지 정글이 존재한다던지 등등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다채로운 자연 환경들이 조성되어 있으며, 여행과 관광에서 꽤나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게 하는 요인으로 자리잡고 있다. 일본은 한대 기후에서의 스키나 유빙 관광, 그리고 아열대 기후에서의 산호초 스쿠버다이빙이 모두 가능한 나라이다.
지형
유라시아판, 태평양판, 그리고 필리핀판의 판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어 지진과 화산활동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일본에는 60여 개의 활화산이 분포하는데, 이는 전 세계 활화산의 10% 정도다. 활발한 화산활동으로 인해 오이타현 벳푸 시의 온천이나 가나가와현 하코네 정의 온천과 같은 대규모 온천이 전국 곳곳에 분포한다.
일본에서 가장 높은 후지산은 해발고도 3,776m의 돔 모양 화산이다. 18세기에 마지막으로 분화하였으며 정상에는 칼데라호가 발달해 있다. 일본 최북단의 홋카이도에는 데시오(天塩), 키타미(北見), 히다카(日高) 등 해발고도 1,000m급의 높은 산들이 위치한다. 일본에서 가장 큰 섬인 혼슈에는 일본알프스(日本アルプス)라고 불리는 높은 산지가 많다. 히다(飛騨) 산맥, 기소(木曽) 산맥, 아카이시(赤石) 산맥을 따라 해발고도 3,000m급의 산들이 즐비하다. 시코쿠에는 시코쿠(四国) 산지가 위치하며, 가장 높은 봉은 해발고도 1,982m의 이시즈치산(石鎚山)이다. 규슈에는 일본의 대표적인 활화산인 운젠산이 위치한다.
일본은 다양한 해안 지형을 가지고 있다. 지바현의 쿠주쿠리(九十九里) 해안에는 대규모 사빈이 위치하고, 홋카이도 최북단에는 면적 15.2km²의 사로마(サロマ) 석호가 있다. 만 형태의 지형으로는 도쿄도 인근의 도쿄만, 혼슈와 홋카이도 인근의 무쓰만(陸奥湾), 나고야의 이세만(伊勢湾), 오사카부 인근의 오사카만 등이 있다.
산지가 많은 지형적 특성상 깊은 계곡을 따라 빠르게 흐르는 짧은 하천이 다수 존재한다. 다만 호쿠리쿠 지방 니가타현, 나가노현을 지나 군마에 이르는 시나노강(信濃川)이나 간토 지방의 군마, 사이타마, 지바, 도쿄도 등을 흐르는 도네강(利根川)은 유로가 300km 이상이다. 유로 길이 200km 이상의 이시카리강(石狩川), 데시오강(天塩川), 키타카미강(北上川) 등도 있다.
토지이용
일본열도는 태평양 북서부의 융기대(隆起帶)의 정상부가 해면 위에 드러난 것으로, 산림 지대의 비율이 약 76%로 높다. 이로 인해 역사적으로 일본에서는 치수 사업, 토지 개선 사업, 간척 사업 등으로 농지를 확보해왔다. 특히 홋카이도 지역에서는 농업과 목축업이 국내 최대 규모로 진행되고 있다. 일본의 도시 지역 면적은 국토의 5.4%로, 5.5%의 비중인 한국과 유사한 수준이다.
기후
일본은 산지가 많아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은데,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가장 깊은 내륙은 군마현으로 도쿄 만으로부터 약 120km 떨어져 있다. 길쭉한 나라인만큼 기후분포는 다양하다. 다만 온도의 스펙트럼은 위도에 비해 고도가 높아서 추운 개마고원이 있는 관계로 한국과 비슷비슷한 편.
일본 겨울의 최대의 적은 바람과 난방으로, 안그래도 간척지라 주위에 산이 얼마 없는 도쿄의 경우 바람은 미친듯이 부는데 그걸 막아줄 산이 없다보니 칼바람이 직격으로 들어온다. 또한 난방의 경우 대한민국처럼 바닥을 덥힌다기 보다는 그냥 히터나 라디에이터로 퉁치기 때문에 정말 춥다.
일본에서는 자국, 특히 혼슈의 기후를 3가지로 세분하고 있다.
- 동해측 기후 - 니가타 등 호쿠리쿠 지방에서 볼 수 있는 기후. 여름에는 푄현상의 영향으로 매우 덥다. 반면 겨울에는 쿠로시오 해류의 지류인 쓰시마 난류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아 폭설이 잦다. 연 강수량이 2000mm~3000mm 수준으로 많은 것도 특징이다.
- 중앙 고지 기후 - 나가노, 야마나시 등에서 볼 수 있는 기후, 고원지대 한복판이라 여름이 비교적 서늘하다. 겨울 강수량이 낮지만, 태평양 쪽보다는 눈이 많이 온다.
- 태평양측 기후 - 도쿄 수도권과 오사카에서 볼 수 있는 기후. 여름에는 북태평양 기단의 영향으로 매우 덥고, 겨울에는 온난건조하다. 이 기후대 중 일부 지역은 온대하우기후를 띤다. 예외로 도호쿠 지역은 오호츠크해 기단의 영향으로 여름이 서늘하다.
한국, 중국과 달리 가뭄이나 황사, 미세먼지 문제는 드물다. 오키나와와 홋카이도를 포함한 전 국토에 난류의 영향이 지대하여 1년 내내 강수량과 습도가 고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국처럼 우산을 항상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물을 끓이거나 정수기로 거르지 않고 수도꼭지에서 나온 그대로 마시는 가정집이 많다.
하지만 중위도 대륙 동안에 위치하여 유럽과 달리 연교차는 큰 편인데다 습도까지 합쳐져서 대도시의 여름 폭염 문제는 한국, 중국과 별 차이 없거나 더 심하다.
일반적으로 온대기후가 많지만 홋카이도와 도호쿠 일부 지역은 냉대기후에 속하며, 반대로 오키나와현과 오가사와라 제도는 아열대기후와 열대기후에 걸쳐져 있다.
2018년 7월 23일 기준 일본 사이타마현 쿠마가야시의 기온이 112년 만에 41.1˚C로 치솟았으며, 2020년 8월 17일 시즈오카현 하마마츠시에서도 같은 기온을 기록했다.
재해 및 환경문제
20세기 일본의 급격한 산업화에 따라 오염 물질들이 무분별하게 배출되었고, 이 때문에 이른바 '일본 4대 공해병'이 등장하게 되었다. 석유 콤비나트에서 배출되는 이산화황가스와 이산화질소의 영향으로 유행한 '욧카이치 천식', 도야마 현 미쯔이 금속광업소가 방류한 카드뮴으로 인한 '이타이이타이병', 구마모토현 미나마타지역 신일본질소회사의 수은 방류로 인한 수은 중독의 '미나마타병', 나가타현에서 '미나마타병'과 유사한 원인에 의해 발생하여 제2의 미나마타병으로 꼽히는 '니이가타 미나마타병'이 대표적이다.
이들 병의 발생으로 인해 산업체에 의한 환경오염이 일본의 사회적 화두로 떠올랐다. 1970년대부터 대중적 인식 증가, 환경 관련 정부 기관 설립, 기업의 개선 노력 등으로 문제가 점차 해결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4대 공해병의 영향은 존재한다.
유류 파동도 일본 정부가 부족한 천연 자원 상황에 걸맞은 에너지 절약을 장려하도록 하는 데 큰 요인이 되었다. 최근 일본에서 크게 부상하는 환경 문제로는 도시에서 발생하는 대기 오염, 쓰레기와 화학 물질의 관리, 물의 부영양화, 기후 변화, 그리고 국제적인 환경 보존 움직임에 대한 협력 등이 손꼽히고 있다.
오늘날, 일본은 환경 친화적인 기술 발달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다. 혼다와 토요타의 하이브리드 및 전기자동차는 높은 연비와 적은 환경오염 물질의 유출로 유명하다. 또한, 일본은 친환경적인 생체 연료, 하이브리드 체계, 효율적인 경량 소재 등의 빠른 발전을 이루었다. 또한, 일본은 기후 변화와 지구 온난화를 둘러싼 중대한 성과를 창출하였는데, 탄소 배출을 세계적으로 줄이기 위해 이루어진 1997년의 교토 환경 회의의 의장국으로서 활약하였으며 교토 의정서의 서명에 앞장서 조약 하에 기후 변화의 억제를 위한 이산화탄소 배출량 감소에 대해 책임져왔다. 대표적인 예로 고이즈미 내각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쿨 워크 캠페인에 따라, 관공서 내에서 에어컨 사용을 자제하도록 하여 에너지 사용량 감소를 도모한 바가 있다. 또, 산업체들은 강제적인 법령 하에 온실 가스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갖은 노력의 결과로, 일본은 2005년 측정된 환경 지속 가능성 지수에서 30위를 차지하였으며, 2012년에는 환경성과지수(EPI)에서 23위를 기록했다.
- 지진
2011년에 발생한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동일본 대지진)은 15,897명이 사망하고 2,534명이 실종된 대규모 자연재해로 리히터 규모 진도 7에 달하였다. 진원은 후쿠시마현 앞바다였지만, 일본 남부 지역을 제외한 전 국토에 영향을 미쳤다. 해당 지진으로 인해 미야기현, 이와테현, 후쿠시마현 등지에서 최대 0.84m에 달하는 지반 침하가 발생하였고, 최고 40m 높이의 쓰나미가 육지를 덮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불어 진원과 가까운 해안에 위치한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가 쓰나미의 영향으로 피해를 입어 결국 노심이 용융되었다. 이 때문에 세슘(137Cs, 134Cs), 스트론튬(90Sr), 코발트(60Co), 트리튬(3H)을 포함한 방사선 오염물질이 주변 토양과 해양 환경에 악영향을 주었다.
역사
일본의 역사는 보통 일본 열도의 역사와 동일시되지만 엄밀히 '일본'이라는 국호는 8세기 전반에 성립한 것이기 때문에 일본의 역사와 일본 열도의 역사를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는 논란이 있다.
일본의 역사의 시대 구분은 고고학과 역사학 구분으로 나뉜다. 고고학에서 시대 구분은 구석기 시대(선토기 시대), 조몬 시대, 야요이 시대, 고훈 시대, 그리고 역사 시대로 일반적으로 나누는 한편, 역사학 상에서 시대 구분은 일반적으로 고대(아스카 시대 및 그 이전 ~ 헤이안 시대), 중세(가마쿠라 시대, 무로마치 시대, 센고쿠 시대), 근세(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에도 시대), 근현대(메이지 시대·다이쇼 시대·쇼와 시대, 헤이세이 시대)이다.
선사시대
혼슈, 시코쿠, 큐슈에서 문자의 기록이라는 의미의 '역사'에 앞선 시대, 즉 선사시대는 이와주쿠 시대(岩宿, 구석기), 조몬(繩文), 야요이(彌生), 고훈 문화의 순으로 변천하였다. 각각의 시대를 이와주쿠 시대, 조몬 시대, 야요이 시대, 고훈 시대라고 부른다. 일본 역사에서 약 1만 년 전에 시작되는 일본의 신석기시대를 조몬 토기의 보급에서 연유하여 조몬(繩文) 시대라고 부른다. 수렵과 채집을 기초로 하며 움막을 지었으며, 큰 마을을 조성할 때 중앙광장을 중심으로 주변의 둥근 범위에 집을 세웠다. 조몬인은 나무 열매 등을 채집하고 사슴이나 멧돼지, 토끼 등을 사냥하는 한편 물고기를 잡는 등 식료 채집으로 살았다. 전 세계적으로 식료 채집에서 식료 생산으로의 전환은 6천~1만년 전에 실현되어 본격적인 농경사회로 돌입한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식료채집을 기본으로 하는 조몬 문화가 계속되다가 2천여 년 전에 농경문화가 성립하였다.
기원전 3세기경부터 기원후 3세기 중반까지의 야요이 시대는 금속기를 사용하며 도검(刀劍) 등의 무기와 제기(祭器)를 제작하였다. 이 때는 채집에서 식량생산으로 전환되어 용수로나 둑 두렁을 완비한 논농사와 조 등을 경작하는 밭농사가 시작되었다. 야요이 문화에는 벼농사 외에도 청동·철·유리·베·명주 등 중국과 한반도에서 많은 제품과 기술 지식 사상이 전해졌다. 농경의 신을 위한 제사가 수행되었으며, 청동과 철이 동시에 출현하여 칼 종류가 석기에서 철기도 바뀌었다. 돼지와 닭을 사육하였으며, 생산력이 급증함에 따라 집단의 대형화가 진행되었고, 농경사회가 성숙하여 마을에서 국으로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정치적 싸움도 벌어졌다.
본토가 야요이 문화에 들어선 뒤에 홋카이도에서는 조몬 문화와 마찬가지의 석기를 이용하는 식료채집 문화가 계속되었고, 본토의 야요이 문화와 비교해 이를 속(續)조몬문화라고 한다. 이때 어로나 수렵 채집 뿐 아니라 수수·피·메밀을 재배하였다. 오키나와의 속조몬문화에서는 8~10세기에 벼·보리·조·콩을 재배하였고, 13~14세기 본격적인 농경사회에 들어갔다.
야요이 마을에서는 유력자들도 고향마을의 집단묘지에 묻혔지만, 이러한 마을을 몇 개 합친 '국'의 '왕'이나 그게 가까운 사람들은, 집단묘지와는 다른 묘역이나 흙을 쌓아올린 분구묘에 묻혔다. 4세기부터 6세기 말까지 지배자의 권위의 상징으로 고분이 등장하는 시대를 야요이 시대에서 이어지는 고훈시대(古墳時代)라고 부른다.
고대
일본의 고대사회는 4~5세기경 야마토조정(大和朝廷)이 지배하는 통일 정권이 수립되었다. 야마토 정권은 율령제도에 입각한 국가체제를 갖추었고, 대륙으로부터 율령제와 불교뿐 아니라 철제무기와 같은 선진문물을 수입하며 중앙집권적인 권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소국의 수장들은 조정 내부에서 귀족계급을 형성하여 성(姓:가문의 세습적인 칭호)을 수여받고, 광대한 토지와 백성을 소유하였다. 야마토 정권은 한반도의 삼국과 인적 물적 교류를 하며 중국에 견수사와 견당사를 파견해 적극적으로 선진문물을 수입하였다. 4세기 말엽에 백제에서 한자와 유교가 전래되고, 6세기 중엽 백제로부터 불교가 전래되었다. 7세기 쇼토쿠태자(聖德太子)는 한국과 중국의 제도, 문물 등을 수입하여 국내의 제반 체제를 혁신하고 아스카 문화를 꽃피었다. 쇼토쿠태자의 통치 시기에 불교가 융성하고 호류지 5층 목탑 등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다. 아스카 시대는 일본 역사의 시대구분 중 넓게는 아스카(飛鳥)에 궁궐과 도시가 세워진 592년부터 710년까지의 118년을 가리키며, 이전에는 고훈시대와 합쳐 야마토시대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현재는 고훈시대와 아스카 시대를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7세기 말에서 9세기 말에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는 중앙집권적 율령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었다. 645년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을 단행하고, 덴무(天武)천왕은 중앙집권적 율령체제를 확립한다. 공지공민제(公地公民制)의 원칙으로 농민은 일정한 토지를 배당받아 조(租)·용(庸)·조(調)의 세(稅)를 부담하였다. 당(唐)의 문화를 흡수한 조정은 710년 나라(奈良)에 도읍 헤이조경(平城京)을 세웠다. 8세기에는 두 권의 역사서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가 편찬되었다. 794년 헤이안경(平安京 지금의 쿄토)으로 천도하기까지의 약 80년간을 나라시대라고 부른다. 나라시대에 일본은 백제와 활발히 교류했고, 백제 멸망 후 그 유민이 다수 일본으로 건너가 한학, 유학, 불교 및 회화, 불상조각, 사찰건축 등의 문화예술, 관개, 축조기술 등을 전하였다.
794년 간무왕(桓武王)이 헤이안쿄(平安京, 지금의 도쿄)로 천도한 때부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가 가마쿠라 막부(幕府)를 개설한 1185년까지를 헤이안 시대라고 한다. 781년에 즉위한 간무왕은 도읍을 헤이안으로 옮기고 새 궁궐을 창건하고 도시를 조성하였다. 그러나 중앙권력 세력이 점차 약화되며, 후지와라 가문이 9세기에서 10세기에 걸쳐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면서 절대적인 외척으로 군림한다. 천황이 미성년자일때는 섭정(攝政), 성년이 된 후에는 관백(關白)이라는 이름의 후견인으로 정치를 좌우하였다. 귀족과 사원이 세력을 강화하면서 대규모 사유지 장원(莊園)을 확대하였다. 궁정을 중심으로 문화가 융성하여 귀족들 사이에 국풍문화(國風文化)가 일어났고, 한자를 응용한 일본식 문자인 가나(假名)가 유행하였다. 무라사키 시키부의 장편소설 《겐지모노가타리, 源氏物語》가 이 시기에 탄생하였다.
10세기부터 12세기에는 중앙집권적 율령국가의 지배력이 더욱 약화되었다. 지방관이 관리하는 영지들이 중앙귀족이나 지방의 호족, 사원 등의 지배를 받는 장원으로 포섭되었다. 농민이나 호족들이 재산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무장하였고 '재지(在地)무사'들은 서로 연계하면서 세력을 키워나갔다. 미나모토(源)일족과 다이라(平)일족의 두 무가(武家)가 각축하였으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헤이시(平氏) 일족을 멸망시키고 가마쿠라 막부를 개설함으로써 헤이안 시대는 막을 내렸다.
중세시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는 1192년 가마쿠라 막부를 세우고, 스스로 최고통치자이 쇼군(將軍)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자신에 충성을 맹세한 부하들을 군사와 경찰권을 가진 슈고(守護)와 치안 및 세금을 담당하는 지토(地頭)로 삼아 각지에 파견하였다. 1221년 천황 측과 막부 측이 정면충돌한 조큐의 난(承久の乱)에서 막부가 승리하자, 막부의 통치권이 일본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13세기 말 유라시아 대륙을 휩쓴 몽골족의 원(元)나라가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정벌을 감행하였다. '신풍(가미카제)'이라고 불린 태풍의 도움으로 원의 군대가 물러갔으나 전쟁으로 민심이 흉흉해지면서 가마쿠라 막부의 통치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였고, 막부 반대 세력을 규합한 고다이고(後醍醐) 천황에 의해 1333년 막부는 붕괴되었다. 가마쿠라 막부의 붕괴 이후 고다이고 왕은 관료국가의 수립을 기도하였으나, 무사 출신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는 막부 타도의 성과를 독점하려는 천황에 실망하고 무사를 규합하였다. 그는 새로운 천황을 세우고 무로마치 막부를 세우고 쇼군의 자리에 올랐다. 고다이고 천황은 교토 남쪽 요시노로 탈출해 또 하나의 조정을 세웠고, 남과 북에 각각 조정이 존재한 '난보쿠초 시대(남북조시대)'는 14세기 말까지 약 60년에 걸쳐 이어졌다.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난보쿠초(남북조)를 통일시켰으며 로쿠온지를 창건하였다. 그러나 무로마치 막부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막부가 파견한 지방관이 현지에서 이른바 슈고다이묘(守護大名)라는 독자적인 영주로 변신하고, 8대 쇼군 요시마사(義政)의 후계자를 둘러싸고 벌어진 오닌의 난이 10년 이상 계속되면서 전국은 혼란에 빠졌다. 중앙권력에서 독립해 독자적으로 지역을 지배하던 당시의 실력자를 센고쿠다이묘(戦国大名)라고 부르며, 이들이 활약한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말의 약 150년간의 혼란기를 센고쿠 시대(戰國時代)라고 한다.
근세
센고쿠 시대 말기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역사 속 영웅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등장하였다. 오다 노부나가가 통일을 위해 기존의 악습과 적폐를 파괴하고 새로운 도전을 거듭하였다. 히데요시는 통일을 완성하고 새로운 지배 시스템을 도입하였으며, 이에야스는 이를 계승해 새로운 통일정권의 정치와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고 안정화하다.
오다 노부나가는 효율적으로 화승총 부대를 운용하고, 성 아랫마을인 조카마치에 무사를 상주시키는 상비군 체제를 마련하는 등 탁월한 군사전략을 발휘하고, 1573년 무로마치 막부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1582년 교토 혼노지에서 부하의 배신으로 암살당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통일을 완수하는 과정에서 상인과 직인, 그리고 무사를 조카마치에 거주하게 하고, 농민소유의 무기를 회수하는 도수령(刀狩)을 내려 무사와 농민을 분리하는 등 봉건적 토지소유제 확립과 신분제의 확립을 도모하였다. 1590년에 통일을 완수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93년, 1597∼98년의 두 차례의 조선침공에 실패하고 끝내 자신의 이름을 내건 정권을 수립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江戶:현재의 도쿄도)에서 묵묵히 세력을 키운 끝에, 히데요시가 사망한 이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고 패권을 장악하였다. 1603년 초대 쇼군으로 에도에 도쿠가와 막부, 일명 에도 막부를 개창하였다. 이로부터 1867년 11월 조정에 대한 정권을 반환한 대정봉환 까지의 약 260년 동안을 에도 시대(江戶時代)라고 한다.
도쿠가와는 막부의 쇼군으로 권력의 정점에 위치하며,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여타 다이묘들을 압도하였다. 도쿠가와 막부는 봉건제도의 강화를 도모하여 쇼군(將軍)을 정점으로 하는 막번 체제(幕藩體制)를 확립하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질서를 확립하였다. 전국에는 다이묘가 자치적으로 다스리는 지방 영지인 250여 개의 번이 존재하였다. 막부는 그리스도교를 엄금하고 쇄국을 단행하였다. 250개 번 사이에 세력균형을 유지하고 막부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무가제법도, 즉 다이묘를 포함한 무사들이 지켜야 할 내용을 규정한 법을 만들었다. 또한 각 번들의 다이묘들이 1년 단위로 자신의 번과 에도를 번갈아 거주하도록 하는 참근교대제를 통해 각 번의 권력 자체를 감시한다. 천황과 조정의 정치 참여를 금지하는 규정을 만들기도 하였다.
서양 각국의 해외 진출이 활발하게 전개된 19세기, 미국은 1853년 매슈 페리 제독을 일본으로 파견하여 개국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흑선을 몰고 온 페리 제독의 무력시위에 굴하여, 일미화친조약과 일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이어 다른 열강과도 유사한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 이에 여러 번에서 막부의 개항에 반발하였고, 개항 과정에서 천황의 재가를 받지 않은 것을 공격의 빌미로 삼았다. 격렬한 내분 항쟁이 지속되는 와중에 사쓰마번과 조슈번 등의 하급무사들을 중심으로 외세 배격 운동인 존왕양이운동이 발발하였다. 정권 유지가 불가능함을 깨달은 막부는 1867년 11월 조정(朝廷)에 대한 정권 반환하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하고, 이로써 에도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근대
1867년 11월 조정(朝廷)에 대한 정권을 반환하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이후, 조정은 왕정복고를 선언하고, 신정부는 전국을 진압한 후 에도를 도쿄로 개칭하여 수도로 삼고, 원호(元號)를 메이지(明治)라고 정하였다. 과거의 신분제 대신 호적법을 제정하는 등 봉건제를 폐지하고, 이를 기반으로 교육과 징병, 세금제도를 정비하며 부국강병 및 문명개화를 추진하였다. 단발령, 우편과 화폐제도 정비, 철도 부설, 태양력 채용 등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이토 히로부미 주도로 1889년 제국헌법이 제정된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이 정치·경제·문화 전 분야에 걸쳐 근대화를 성공시킨 일련의 과정을 말하며, 메이지(明治) 원년인 1868년으로 간주한다.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1910년 조선 강제병합하였으며, 서양과의 불평등조약을 철폐하고, 아시아 유일의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한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근대 천황제국가를 확립하고 탈아입구, 즉 뒤처진 아시아에서 탈피해 구미열강의 일원이 되자는 노선에 따라 부국강병을 꾀하였다. 영일동맹으로 동아시아 지배의 발판을 굳히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경제는 전례없는 호황을 누리며 세계 열강과 어깨를 겨루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일본의 경제 지표는 곤두박질하였고, 물가가 폭등해 민중봉기가 일어났으며, 1923년에는 관동대진재의 발생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1927년 일본 금융공황, 1929 세계 대공황의 경제적 혼란 속에서, 대륙침략을 꾀하는 군국주의 경향이 강해졌다. 한편 그런 동안 1925년 보통선거법 제정이나 라디오 방송의 시작, 정당 정치의 진전, 신문과 잡지 등의 대중매체의 확산, 중산층의 소비가 증가하였다. 당시 정치ㆍ사회ㆍ문화 등 각 방면에 나타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경향의 움직임은 다이쇼 데모크라시(다이쇼大正(1912~1926)라고 불기기도 한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켜서 동북 중국에 만주국을 세웠고, 1933년 국제연맹을 탈퇴하였으며, 침략 행위는 1937년 중일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중일전쟁 발발 후 1938년 국가총동원령을 제정하여 정당과 의회가 해산되고 사상과 언론뿐 아니라 생활에 대한 통제도 한층 강화되었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해외 침략의 전선을 확대하고,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라는 명목으로 동남아시아로 침략을 확장하였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였고,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로 일본군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오키나와 전투와 미군의 일본 본토 폭격에 이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쇼와 천황은 NHK라디오 방송 《대동아 전쟁 종결의 조서》로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을 수락함을 국민들에게 알렸다.
현대
일본을 점령한 연합국은 일본의 비무장화와 민주화를 추진했고, 1947년 상징천황제와 전쟁포기, 봉건제 폐지의 내용을 담은 신헌법이 제정되었다. 한국의 6·25전쟁에 의한 특수 경기로 경제부흥의 발판을 마련하였고 1952년의 대일강화조약을 통해 주권을 회복하였다. 1964년 도쿄에서 개최된 제18회 올림픽경기대회는 아시아에서 열린 최초의 올림픽이었으며, 일본이 전후사회에서 부흥하였음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950년대부터 70년대 초까지의 고도경제성장 기간 동안 세탁기·냉장고·흑백TV가 '현대판 3종 신기'라고 불리며 소비사회를 이끌었다. 1972년까지 아마미 제도, 오키나와현의 영토권을 미국으로부터 반환받았다. 1985년 플라자합의 이후 1986년부터 1991년까지 부동산과 주가가 크게 부풀려지는 버블경제를 경험하였다.
1989년 히로이토(裕仁) 천황의 사망으로 아키히토 천황이 즉위하였고, 연호는 쇼와(昭和)에서 헤이세이(平成)로 바뀌었다. 한편 거품경제 붕괴와 함께 1992년부터 부동산과 주식 가격의 폭락하고 기업과 은행이 도산하면서 10년 이상 0%의 성장률을 기록하는 불황에 빠졌다. 한편 1988년 리크루트스캔들이나 1992년 도쿄사가와규빈(佐川急便) 사건 등으로 정치 불신이 극에 달해, 일본자유민주당은 1993년 중의원선거에서 과반수 획득에 실패하고, 야당연립정부인 호소카와(細川)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로써 1955년 11월부터 1993년 8월까지 38년 가까이 지속된 자민당 단독정권, 이른바 '55년 체제'는 막을 내리고 새로운 연립정권시대가 개막되었다. 정치개혁의 중심과제는 정치부패 방지와 정권교체를 위한 선거제도의 개혁이었으나, 정치개혁 관련 4개 법안 성립 후 호소카와 내각은 급속히 구심점을 잃었다. 1994년 6월에는 자민당, 사회당, 신당사키가케 등의 연립정부가 수립되었고,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사회당 위원장이 새로운 총리로 선출되었다. 종전 50년이었던 1995년 8월 15일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해 사죄하는 이른바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하였다.
1995년 1월 17일 진도 7.2의 한신·아와지대지진이 발생하였다. 한신대지진은 사망자 6437명, 부상 4만 3792명, 피난소 생활 30만명 이상, 주택피해 약 64만동, 이재민 30만명 이상, 피해총액 약10조엔으로 관동대진재 이래 사상 최대의 지진 피해를 기록하였다. 지진 직후 도로·철도·전기·수도·가스·전화 등 라이프라인이 단절돼 광범위한 지역에서 전혀 기능하지 못하였다. 한신고속도로는 10여 곳이 붕괴되었고, 산요신칸센도 끊겼다. 인공섬인 포트아일랜드와 롯코아일랜드(고베시 히가시나다구에 있는 580ha규모의 인공섬)는 지반 액상화로 크게 침하하였다. 고베시 나가타 구 등 목조주택이 밀집한 지역에서는 화재로 인한 피해가 집중되었다.
일본 사회는 한신대지진에 이어 옴진리교 사건으로 큰 혼란을 겪었고, 다시 자민당이 집권하며 1996년 1월 하시모토 류타로가 총리에 취임하였다. 2001년 4월 총리에 취임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 純一郞)는 '구조개혁없이 경기회복 없다'는 슬로건으로 도로관련 4개 공단, 석유공단, 주택금융공고, 우정(郵政) 분야 3개 사업 둥 민영화를 포함해 '성역없는 구조개혁'을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내세웠다. 구조개혁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고이즈미 내각은 약 80%의 경이적인 지지율을 기록하였다. 고이즈미 총리는 제88대, 제89대 총리를 연임하며 규제 개혁을 이끌었으나, 복지부문 축소와 양극화 심화의 문제를 초래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2008년 '리먼 쇼크' 이후 2009년에는 민주당이 단독 과반수를 차지하면서 하토야마 유키오가 93대 총리대신으로 임명되었다. 하토야마는 '메이지 유신 이래 관저주도의 폐해를 제거하기 위해 정치주도로 바꾼다.'라고 선언하며 시민주도 정치로의 전환을 정권의 축으로 내걸었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도호쿠(東北) 지방에서 발생한 일본 관측 사상 최대인 리히터 규모 9.0의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하였다. 사망자는 1만9689명이며, 행방불명자는 2563명이다. 피난소 생활자수는 46만 8699명, 가설주택수는 5만 3316동이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미야기현, 후쿠시마현, 이바라키현에서 지진 후 2년 동안 11만명의 인구가 줄었다. 후쿠시마원자력발전소 사고는 2011년 3월 11일 일본 후쿠시마현 오쿠마마치의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에서 지진과 지진해일로 인해 발생한 원자력 발전소 사고이며, 인류 역사상 2번째 7등급 원자력 사고이다.
동일본대지진 이후 2012년12월 26일 자유민주당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취임하며 관저주도 정치 속에 아베노믹스를 이끌었다. 아베 총리는 모리모토학원, 가케학원 등의 의혹 속에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도쿄올림픽 연기라는 초유의 사태 속에서, 7년 8개월 일본 최장수 총리로 사임하였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에 이어 2021년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가 100대 총리로 선출되었다.
정치
일본은 입헌군주제로, 천황은 국가의 상징일 뿐 아무런 권한이 없다. 2019년 나루히토 천황이 즉위했다. 일본의 정치 체제는 1946년에 제정된 일본국 헌법에 기초하여 구성되어 있다. 일본은 입헌군주제와 의원내각제(의회제)를 채택하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이다. 통치체제는 의원내각제로 2012년 이후 아베 신조 내각총리대신이 이끄는 자유민주당과 공명당 연립정부가 집권하다가 아베의 지병이었던 위염이 악화되어 사퇴했고 2020년 9월에 스가 요시히데가 제99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집권하게 되었고, 그 후 지지율이 하락하자 1년만에 사임, 2021년 10월에 기시다 후미오가 제100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했다.
천황제
12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일본은 천황을 신앙적 존재로 두면서 막부의 수장인 쇼군이 이 실질적으로 국가를 다스렸다. 그러나 1867년 에도막부가 메이지 천황에게 통치권을 반납하면서 막부 시대는 막을 내리고, 메이지 유신이 선포된다. 메이지 유신 이후 발표된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大日本帝国憲法)', 이른바 메이지헌법은 천황을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규정하고, 막강한 통치권을 부여하였다. 문무관 임면 및 육해군 통수, 외국과의 조약 체결과 전쟁, 강화 등의 거의 모든 권한이 천황에 집중되었고, 해산권도 주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의 일본국헌법(日本國憲法), 평화헌법은 국민통합의 상징으로서의 천황, 상징천황제를 공표하였다. 전후 일본헌법 1장은 천황에 대한 규정이며, 제1조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국민통합의 상징으로서, 이 지위는 주권을 가지는 일본국민의 총의에 기초한다." 그리고 제4조에는 "(천황이) 국사에 관한 행위를 행하지만, 국정에 관한 권능을 가지지 않는다."라고 천황이 정치적 실권을 가지지 않는다는 내용이 명기되어 있다.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태양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는 일본 천황의 조상신으로 여겨지며, 역사적·문화적으로 일본 천황이 한 핏줄이라는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은 일본 국민통합의 상징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천황의 재임에 따르는 원호는 일본에서 서력만큼 일반적으로 널리 쓰인다. 메이지 유신 이후의 연호는 메이지(明治)기 1868~1912년, 다이쇼(大正)기 1912~1926년, 쇼와(昭和)기 1926~1989년, 헤이세이(平成)기 1989~2019년이다. 현재 일본의 천황은 2019년 5월 1일에 126대 천황으로 즉위한 나루히토 천황이며, 연호는 '레이와(令和)'이다.
입법부
국회는 '국권의 최고기관'으로 규정되어 입법기관이다. 국회는 양원제로 중의원(衆議院)과 참의원(參議院)으로 구성된다. 중의원은 하원, 참의원은 상원에 해당하며, 주권자인 국민의 선거로 선출된 국회의원으로 구성된다. 양원을 보좌하는 기관으로 각각 사무국과 법제국이 있다.
국회는 총리지명권, 중의원의 내각 신임 또는 불신임의 의결권 등을 가진다. 그리고 국가의 유일한 입법기관으로서 모든 법률안을 심의·의결하는 권한을 가진다. 의안의 제출권은 내각(총리)·의원 양자가 가지나 예산안 제출권은 내각만이 가진다. 또 조약의 승인도 국회의 권한에 속한다. 3권분립의 이념에 입각하여 국회는 국정조사권, 재판관의 탄핵재판권을 가지나, 반대로 내각의 중의원 해산권, 최고재판소의 법령 위헌심사권에 의해 견제되고 있다. 예산안 심의·총리지명·조약비준, 총리대신의 지명, 내각불신임 등에 있어 중의원의 의결이 참의원보다 우선한다. 중의원은 해산이 있으며, 중의원은 의원수 480명에 임기 4년이며, 참의원은 의원수 247명에 임기 6년이다.
1955년에 일본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이 합쳐져 일본자유민주당(自由民主党)이 창당되었고, 이후 자민당은 지속적으로 여당 자리를 지켜오면서 야당인 일본사회당과 함께 이른바 '55년 체제'를 구축하였다. 1993년에 자민당과 공산당을 제외한 정당들이 연립 정권을 수립하면서 일당 우위 정당제가 처음으로 붕괴하였다.
2021년 10월 31일에 치루어진 중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전체 456석 중 261석을 차지하고 공명당이 32석을 차지하여 자민당 공명당 연립여당의 의석수는 총 293석으로 집계되었다.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은 96석을 얻었고, 극우 성향인 일본유신회가 41석을 확보해 공명당을 제치고 제3당으로 약진하였다.
행정부
행정권은 내각·지방 공공 단체·행정기관이 담당한다. 내각은 내각총리대신과 이하 국무대신으로 조직되어 행정권의 행사에 대하여 공동 책임을 진다. 내각은 행정 사무 이외에 법률 집행, 외교 관계의 처리, 조약 체결, 예산 작성, 정령(政令) 지정 등의 업무를 부담한다. 내각총리대신은 국회가 국회의원 중에서 지명하고, 일본 천황이 임명한다.
한국은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대통령 직선제인 반면 일본은 국회의원들 중에서 선출된 제1여당의 대표가 '내각총리대신'이 된다. 한국 대통령은 5년간 1번의 임기를 갖는 단임제지만, 일본은 의원내각제로서 총리의 임기가 헌법상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 현재 1955년부터 집권 여당인 자민당의 ‘당칙’에는 총재의 임기는 3년이고 3회에 걸쳐 재임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즉, 최대 9년이 총재의 임기가 된다. 아베 신조 전 총리는 약 7년 8개월(2012.12.~2020.9.)의 일본에서 가장 오랜 기간 총리직을 맡았다. 현재의 내각총리대신은 100대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이다.
사법부
헌법 제76조에 따라 모든 사법권은 최고재판소 및 법률에 의거한 하급재판소가 보유한다. 모든 재판관은 양심에 따라 독립적으로 직권을 행사하며, 헌법과 법률에만 구속된다. 일본의 최고재판소는 최고재판소 장관과 14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된다. 장관은 내각의 지명에 따라 천황이 임명하고, 임명 후 최초로 실시되는 중의원 총선거에서 국민심사에 부쳐지며, 그로부터 매 10년 경과시 최초 중의원 총선거 때 다시 국민심사에 회부된다. 14명의 재판관은 내각이 임명한다. 일본의 하급재판소는 제2심인 고등재판소와 제1심인 지방·가정·간이 재판소로 구성된다. 하급재판소의 재판관은 최고재판소가 지명하고 내각이 임명하며, 임기는 10년으로 연임이 가능하다.
정당과 선거
국회의원, 도도부현 및 시정촌의 각 수장과 의회의원은 직접 선거로 선출되며 만 20세 이상의 남녀 전원에게 선거권을 주는 보통 선거제를 채택하고 있다. 피선거권은 참의원 의원 및 도도부현 지사는 만 30세, 그 외에는 만 25세 이상인 사람에게 주어진다. 보통 양원 의원과 도도부현 지사 및 의회 의원들은 특정한 정당의 당원 또는 그 정당의 추천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시정촌의 수장과 의회의원들은 무소속이거나 지역 소규모 정당 소속인 경우가 많다.
한편 일본의 주요 정당은 오랫동안 보수와 진보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다. 보수 진영의 대표적인 정당은 55년 체제 이후 2009년까지, 2012년부터 총리대신을 배출한 자유민주당과 현재 연립내각을 함께 구성 중인 공명당이고, 진보 진영의 대표적인 정당은 입헌민주당, 국민민주당, 사회민주당, 일본공산당이다.
외교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근거하여 1952년 4월 28일에 주권이 회복되었고, 이 때 미일안전보장조약이 체결되어 이후 일본의 외교는 대미의존과 경제 중심주의의 길을 걸었다. 미일안전보장조약은 일본은 미국이 주둔하는 권리를 허하며, 미국은 일본의 안전을 위해 주일미군을 사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평화 헌법으로 인한 안보의 공백을 미일 동맹이 보완해온 것이 전후의 역사이며, 군사비 지출을 줄이면서 경제 입국의 길을 추구하려는 일본의 의도에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1955년에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에 가맹한 것을 시작으로 자유주의경제정책을 취하는 선진공업국가 중에서도 점차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1956년의 일·소 국교회복과 국제연합(United Nations: UN) 가입으로 국제사회에 복귀하고, 기시 노부스케 총리는 UN 중심주의, 자유주의 국가와의 협조, 아시아의 일원으로서의 입장 견지라는 외교 3원칙을 발표하였다. 기시 정부는 대국민적인 안보투쟁에도 불구하고 1960년의 미일안보조약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1965년 6월 22일 도쿄에서 '한-일 양국의 국교관계에 관한 조약(기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한국과 일본은 수교하였다. 1971년 중국의 UN 가입을 계기로 국제정치는 다극화 시대로 이행하였고, 1972년의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중국 방문 이후 아시아에는 새로운 외교정세가 진전되었다. 일본은 역시 같은 해 9월에 총리의 중국방문으로 중일간 국교를 정상화하였다. 1974년에는 일본·중국간 항공협정이 체결되어 정기항공로가 개설되고, 1978년 10월에는 중공의 부총리 덩샤오핑(鄧小平), 1980년 5월에 총리 화궈펑(華國鋒)이 방일(訪日)하는 등 양국관계의 급속한 강화를 시도하였다.
일본에서는 1990년대 초 걸프전쟁을 계기로 경제적 원조뿐만 아니라 국제분쟁 해결에 참여함으로써 국제평화와 안정에 공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90년대 냉전 종식 이후 급속히 재편되는 국제질서 속에서 1992년 6월 UN평화유지활동(PKO)법을 제정하여 패전 후 처음으로 자위대 해외파병의 길을 터놓았다. 이 법안에 입각하여 캄보디아, 모잠비크, 자이레 등에 자위대가 파견되었다. 또한 2001년 10월에는 테러대책 특별조치법을 마련하여 미군에 대한 후방지원 형태로 자위대를 인도양에 파견하였다.
일본은 G8, G20,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세계무역기구(WTO) 가맹국이며, 서방7개국 정상회담 G7에 참여하고 있는 아시아 유일의 국가이다. 현재 전 세계 195개국에 일본대사관이 있으며, 157개국이 일본에 대사관을 두고 있으며, 41개 국제기구가 일본에 사무소를 두고 있다.
2012년 취임한 아베 내각은 '적극적 평화주의'를 바탕으로 헌법 개정을 통한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를 추구하는 한편, 외교안보정책의 포괄적 기본 지침인 국가안보전략의 채택과 그 제도적 기반으로서 '국가안전보장회의'를 발족시켰다. 일본은 중국의 부상과 국내정치 변동이라는 국내외적 상황 속에서 미일동맹을 재편하고, 국내적으로는 외교안보 역량을 강화하며, 중국의 부상에 대해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며, 보편적 가치에 입각한 지구적 차원의 협력을 추구하는 다차원적인 외교를 추구하고 있다.
한일관계
한반도와 일본 열도는 고대부터 각종 문화의 전파와 무역을 비롯한 많은 교류를 이어왔다. 특히 백제는 고대 일본에 중국 문물을 많이 전파하였다. 고려 시대 후반과 조선 시대 전반에 걸쳐서는 쓰시마섬과 규슈를 근거지로 하는 왜구(倭寇)가 각종 약탈을 일삼았으며 이로 인해 조선 시대 중반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등 중세와 근세기 한일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기도 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통신사 파견으로 다시 한일 교류가 재개되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에 등장한 일본 제국이 1910년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병합한 뒤 1945년까지 35년 동안 폭악한 식민 통치를 행하고 현대에도 일본의 여러 우익 인사들이 한국에 대한 정치적 도발을 주창하면서 양국의 국민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일본에서도 반한감정을 가진 일부 일본인들이 반한시위를 하고 있으며, 현재 대한민국은 일본에 의해 제기되는 독도 분쟁과 동해의 이름에 대한 분쟁 등의 이슈를 안고 있다. 2009년에 일본 민주당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이 성립한 이후 이루어진 양국민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다수가 더 악화된 한일 관계에 변화가 없을 것이라 응답한 결과가 나오기도 하였다. 위안부에 대한 역사왜곡으로 일본정부는 유엔으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국방
일본은 패전 이후 연합군 점령 아래에 놓였고, 연합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GHQ)의 주도하의 전후 개혁 속에서 일본국헌법이 제정되었다. 이 일본국헌법의 9조에는 전쟁을 포기하고, 교전권을 부인하며, 군사력을 보유하거나 유지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천명하였다. 이에 일본의 전후 헌법을 '평화헌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에서 6·25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7월 8일 맥아더 서한에 따라 7만 5천 명의 경찰예비대가 만들어졌다. 이는 한국 전선으로 주일미국이 급파된 데 따른 일본의 안보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였다. 이 조직은 일본이 주권을 회복하면서 '보안대'로 변경하였고, '자위대'로 다시 변경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육상자위대, 해상자위대, 항공자위대의 모든 운용비용은 방위성에서 나온다. 자위대는 "일본의 평화와 독립을 지키고 국가의 안전을 유지하기 위하여 일본을 방위하는 것을 주된 임무로 하며, 필요에 따라 공공질서 유지에 임한다."고 되어 있다. 방위성(防衛省, Ministry of Defense)은 일본의 행정기관으로, 대한민국 국방부 격이다.
1951년 9월에 샌프란시스코에서의 강화조약 조인과 동시에 체결한 미일안전보장조약의 제1조에는 "일본은 미군이 주둔하는 권리를 허여(허락)하며, 미국은 일본의 안전을 위해 주일미군을 사용할 수 있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일본은 평화헌법으로 인한 안보 공백을 미일동맹으로 보완해왔다.
2019년 일본의 국방비는 486억달러로, 미국 6,846억달러, 중국 1,811억달러, 사우디아라비아 784억달러, 인구 605억달러, 영구 548억달러, 프랑스 523억달러에 이어 세계 7위 수준으로, 이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0.94%의 비중을 차지한다. 일본은 전쟁포기를 규정한 평화헌법에 따라 GDP의 1%범위에서 방위비를 억제해 왔으나, 최근 일본자유민주당 내에서 헌법개정의 움직임과 함께 '방위력 대폭 강화'의 움직임과 함께 방위비 증액 또한 거론되고 있다.
행정구역
현재 일본의 행정구역은 1도(都, 도쿄도), 1도(道, 홋카이도), 2부(府, 오사카부와 교토부), 43현(일본어: 県)으로 이루어져 있다. 행정상으로 별도의 정령지정도시, 중핵시, 특별구로 정해진 경우를 뺀 모든 도시는 모두 도도부현에 속하며 더 작은 행정 단위인 시정촌(市町村 시초손)과 도시와 시골을 몇 개씩 묶어 정리한 군이 있다.
최근에는 이러한 시정촌의 대대적인 통합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도도부현을 도주(道州) 형태로 바꾸는 것도 계속 논의되고 있다.
도쿄도
도쿄는 일본 혼슈 섬의 중앙, 간토 지방의 남서부에 있는 일본의 수도이다. 17세기 당시 에도라고 불리던 이 지역에 막부가 들어선 이후 일본의 정치,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로서 발전해 왔고, 산업과 인구도 집중되어 있다. 전국에서 세 번째로 면적이 작은 지자체로서 2000m급 산에서 오가사와라 제도와 같은 아열대 섬들까지 다양한 지형 분포를 지니고 있으며 실제 면적은 작지만 범위는 상당히 넓어 일본의 최동단과 최남단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인구는 약 1,300만 명으로 일본 총 인구의 10%에 해당한다. 이러한 인구 과밀을 막기 위해 정부는 부도심의 개발과 더불어 도쿄 23구 이외 지역에 침상 도시를 건설하고 있다. 간다, 신주쿠, 아키하바라, 시부야, 긴자 등의 여러 거리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명소이며 도쿄역 인근의 니혼바시는 도쿄를 기준으로 한 거리 측정의 기점으로 활용되고 있다. 도쿄는 한 때 지나친 개발로 인해 규슈와 더불어 각종 환경 오염의 온상이었으나, 1960년대 이후 스미다 강의 정화 등을 비롯한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홋카이도
혼슈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섬인 홋카이도는 일본의 최북단에 있으며 홋카이도라는 본 섬과 주변의 작은 섬들을 관할하고 있다. 도도부현 중에서 가장 넓으며 일본 전 면적의 20%를 차지하고 있다. 홋카이도는 냉대 기후에 속해 겨울에는 날씨가 아주 춥고 여름에는 예외적으로 장마 기간이 없다. 북쪽으로는 러시아와 국경을 접해 있다. 혼슈의 아오모리 현과는 쓰가루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세계 최장 해저 터널인 세이칸 해저 터널을 통해 해저 철도로 이어져 있다.
원래 홋카이도는 아이누 모시르(Ainu mosir)라고 불리며 고대 이후 수렵을 주로 하는 아이누 족이 사는 땅이었으며, 15세기 무렵부터 혼슈의 일본인들이 진출하기 시작해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 정부에 의한 개척사의 창설로 대규모 개발이 이루어져 다수의 일본인이 들어와 거주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1869년에 오늘날의 홋카이도라는 명칭을 가지게 되었다. 눈 축제로 유명한 삿포로와 라벤더로 알려진 무로란이 잘 알려져 있고, 시레토코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도후쿠 지방
혼슈의 동북부에 있다. 남북으로 뻗어 있는 오우 산맥을 중심으로 태평양 쪽과 동해 쪽으로 세부 지역을 구분한다. 오우 산맥을 중심으로 한 여러 산맥들이 중앙부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에 주요 도시들이 태평양과 동해, 그리고 몇몇 분지 지역을 따라 편중되어 있는데, 동해 쪽은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고 태평양 쪽은 자주 냉해나 지진 해일의 피해를 입는다. 사계절이 뚜렷하지만 겨울이 길고 여름은 서늘하고 짧다. 고대 이후 정치의 중심지였던 긴키 지방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개발이 지체되었다가, 에도 시대 이후에 벼농사 지역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현재도 공업보다는 농업이 활발한 지역으로, 개발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자연이 잘 보존되어 온천과 지역 축제 등 관광 자원이 풍부하다. 아오모리 현과 아키타 현에 걸쳐 있는 시라카미 산지는 세계자연유산으로 선정되어 있으며 아오모리 현 지역산 사과가 특산품으로 유명하다.
간토 지방
혼슈 중앙에 있다. 이바라키 현, 도치기 현, 군마 현, 사이타마 현, 가나가와 현, 지바 현이 도쿄 도를 에워싼 형태로 수도인 도쿄가 그 중심에 있기 때문에 일본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 역할1을 도맡고 있으며 도쿄와 접하고 있는 사이타마 현, 지바 현, 가나가와 현의 세 현은 출퇴근이 가능한 이른바 수도권으로서 다양한 철도와 도로로 연결되어 있고, 베드타운들이 많다. 이 때문에 도쿄 도를 포함한 사이타마, 지바, 가나가와 세 현은 일본 전체 인구의 거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중심부에는 일본에서 가장 넓은 평야 지대인 간토 평야가 있고, 유역 면적이 가장 넓은 도네 강이 흐르고 있다. 주변부에는 산악이나 온천 등 자연 관광지가 많이 있는데 특히 도치기 현 닛코시의 동조궁 등을 비롯한 명승지와 신사, 사찰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주부 지방
혼슈의 중부에 있으며 그 때문에 주부 지방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주부 지방은 동해 쪽의 호쿠리쿠 지방과 태평양에 접한 도카이 지방, 중앙 고지를 중심으로 하는 고신에쓰 지방으로 나뉘는데, 고신에쓰 지방과 중앙 고지에는 히다 산맥, 기소 산맥, 아카이시 산맥 등 해발 3000m급 산맥들이 존재한다. 주부 지방 남북에 걸쳐 있는 이토이가와-시즈오카 구조선이 일본 열도를 동서로 양분하고 있다. 일본 알프스 등 산악 관광지가 많고, 기후 현과 도야마 현의 시라카와고와 고카야마의 갓쇼즈쿠리 마을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긴키 지방
혼슈의 중서부에 있는 지방으로 간사이 지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효고 현 및 교토 부의 북부는 동해와 접해 있고, 오사카 부와 효고 현 남부는 세토 내해, 미에 현과 와카야마 현은 태평양과 접해 있다. 고대 시대부터 일본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던 지역으로 교토 부를 중심으로 비와호, 요도가와 강, 세토 내해 등을 이용한 수운이나 육운을 통해 전국으로의 교통망이 발달하였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문화재가 많으며 특히 나라 현과 교토 부 등에서 메이지 시대 전까지 천황이 천년 이상 기거해 왔다. 1868년 천황이 도쿄에 옮겨 살게 되면서 정치적인 영향력은 상실하였으나, 대신 오사카에서 고베에 이르는 지역이 대규모 공업 벨트로 발달하게 되었다. 나라 현에 소재한 아스카 촌 및 요시노 정 일대, 나라 시내의 문화재들과 호류지 주변의 불교 건축물들, 교토 부와 시가 현 일대의 고도(古都) 시대 사찰과 문화재, 나라 현과 와카야마 현, 미에 현 일대에 자리잡은 기이 산지의 나치 폭포, 영지와 참배길, 효고 현의 히메지 성이 모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다녀간다.
주고쿠 지방
혼슈 서쪽 끝에 있는 지방이다. 중앙의 주고쿠 산지를 경계로 동해와 접한 지역은 산인 지방, 세토 내해에 접한 지역은 산요 지방으로 구분하며 두 지역은 기후와 풍토에 큰 차이가 있다. 산인 지방은 평야가 적고 해안선이 단순하며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리는데에 비해 산요 지방은 평야가 많고 복잡한 해안선과 많은 섬들이 있으며 연간을 통해 비가 많이 내린다. 세토 내해 쪽에는 석유 콤비나트 등 공업 지대가 형성되어 있고, 산인 지방의 돗토리 현 해안에는 일본에서는 극히 드문 모래 언덕인 돗토리 사구가 있다. 히로시마 현의 원폭 돔과 이쓰쿠시마 신사, 시마네 현의 이와미 은광은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시코쿠 지방
혼슈의 서남쪽에 있는 시코쿠섬을 중심으로 한 여러 섬 지대에 해당하는 지방이다. 동쪽은 기이 수도를 사이에 두고 긴키 지방, 북쪽은 세토 내해를 사이를 두고 주고쿠 지방 서쪽은 분고 수도를 사이에 두고 규슈와 맞닿아 있다. 험준한 산지가 중앙부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에 기후는 북쪽과 남쪽이 크게 차이 나는데, 북쪽 지역은 비가 적어 여름에는 물 부족 현상이 나타나며 남쪽 지역은 기온이 높고 비가 많이 내리고 자주 태풍이 상륙한다. 오랫동안 혼슈섬과 세토 내해를 사이에 두고 서로 교통이 불편하였으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세토 대교를 비롯한 세 코스의 다리가 건설되어 도로와 철도로 혼슈와 연결되어 있다.
규슈와 오키나와 지방
일본의 최서남단에 있는 규슈와 오키나와를 포함하는 지방이다. 중국이나 한반도, 동남아시아와 가까워 고대부터 외래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지역이다. 에도 시대 이후 쓰시마섬은 조선과 일본 간의 외교를 담당하였고, 나가사키에는 네덜란드와 중국의 무역선이 많이 입항하였고, 히로시마와 더불어 원자 폭탄의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기타큐슈시에서 후쿠오카시에 걸쳐있는 기타큐슈 공업 지대에 중공업, 화학공업이 집중되어 있다. 한편 오키나와는 원래 류큐국의 중심지로 중국과 교역 활동이 이루어지던 곳으로, 에도 시대에 사쓰마 번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메이지 시대의 류큐 처분과 더불어 사실상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오키나와는 미국의 영토가 되었다가 1972년 반환되었지만 현재까지 오키나와의 대부분은 주일 미군의 기지로 활용되고 있어 산업을 위한 용지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관광을 주요 수입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에서 주일 미군 기지가 차지하는 용지를 다시 환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이 때문에 입장이 서로 다른 미국 및 현지 주민과 계속 마찰을 빚고 있다.
경제
현재 일본은 명목 국내총생산(GDP) 세계 3위에 자리하고 있는 명실상부한 경제대국이다. 또한 구매력 평가 세계 4위, 외환보유고 세계 2위, 대외순자산 규모 세계 1위, 무역 규모 세계 4위, 주식시장 규모 세계 3위, IMF 투표권 세계 2위 국가이며, 대한민국과 함께 비서양권에서 둘 뿐인 대형 선진국이다. 비서양권 국가로서는 최초의 OECD 가입국이자 유일한 G7 회원국이기도 하다. 일본 엔은 미국 달러, 유로와 함께 세계 3대 통화로서 신뢰도 높은 안전 자산으로 취급받고 있다.
일본은 지진 등 지각활동이 활발한 탓에 한때 전 세계 은 생산량의 3분의 1을 차지할 만큼 상당한 규모의 은 보유국이었고, 덕분에 15세기 센고쿠 시대 때부터 포르투갈 등 일부 서양 국가들과 교류를 시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동전의 재료로 쓰이는 구리도 풍부하게 생산되었기 때문에 17세기 이후 에도 막부 시기에는 화폐 경제를 통한 상업의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쇄국을 유지하면서도 데지마를 통해 네덜란드와 부분적으로나마 교류하면서 꾸준히 서양 세계와 접촉해왔다.
19세기 쿠로후네 사건을 계기로 서구 열강들에게 개항을 하게 된 일본은 처음엔 물가가 폭등하는 등 혼란을 겪었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가 진척되면서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이후 1914년 유럽에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전쟁 특수를 톡톡히 누려 개항 이후 처음으로 무역흑자국이 되는 데에 성공했으며, 질적으로도 중진국 수준에 도달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일본은 다시 무역적자국으로 되돌아갔고, 설상가상으로 1929년 미국발 대공황이 터지면서 일본 경제도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에 군부를 중심으로 전쟁을 통해 식민지를 확장하여 경제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고, 1931년 만주를 점령하면서 본격적인 침략 전쟁의 길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군국주의의 광기에 휩싸인 일본은 1937년엔 중국 본토를 겨냥하여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1941년엔 미국을 상대로 진주만 공습을 단행하며 태평양 전쟁으로까지 전선을 확대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광기는 1945년 일본이 미국에게 핵 두 방을 얻어맞고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결국 끝이 났다.
전후 일본 열도는 미국에게 점령되었다. 미국은 일본군과 재벌을 해체하며 일본을 전쟁하지 않는 농업국가, 즉 아시아의 스위스로 만들려 했으나... 1950년 이웃 한반도에서 북한이 남한을 기습 남침하며 6.25 전쟁이 터졌고 이는 일본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된다.
미국이 드넓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병참기지로는 일본이 낙점되었고, 덕분에 일본은 한국에 군수물자를 신나게 수출하며 경제 재건에 성공하였다.
6.25 전쟁을 계기로 고도 성장을 시작한 일본은 무역 장벽, 기술·경영 혁신, 정부의 아낌없는 지원을 등에 업고 1950년대 후반엔 아시아 제1의 경제대국 자리에 올랐고, 1969년엔 서독을 제치고 제1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1970년대에는 두 차례의 오일 쇼크에도 불구하고 산업 구조를 성공적으로 개편하며 구미 선진국들을 상회하는 수준의 경제성장률을 보였다.
이러한 일본의 가파른 상승세에 긴장한 미국 등 구미 선진국들은 일본을 지속적으로 압박했는데, 1985년엔 일본의 수출경쟁력을 낮추기 위해 일본 엔의 가치를 절상하는 플라자 합의를 일본에 요구하였고 결국 일본이 이를 받아들였다.
일본 정부는 플라자 합의로 인한 수출경쟁력 약화를 상쇄하기 위해 저금리 정책을 시행하였고, 이로 인해 일본의 주식 및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면서 거품경제가 시작되었다.
1987년 일본의 국민소득은 처음으로 2만 달러를 돌파했다. 그리고 이듬해 1988년엔 무려 미국을 따라잡으며 국민소득 세계 4위에 올랐고, 소련을 추월하며 국내총생산 세계 2위에 오르는 등 그야말로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1991년 일본의 주가와 부동산 가격이 급락하며 거품경제 붕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엔 미국, 유럽도 불황이긴 마찬가지였고, 소련은 아예 체제가 무너져 버렸기에 큰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와중에도 일본은 1995년까진 안정적인 경제성장률을 보였기 때문이다. 1995년 기준 일본 국내총생산은 미국의 71.1% 수준으로 미국을 바짝 추격하고 있는 상태였다.
일본 경제에 진짜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 건 1990년대 후반부터였다. 1997년 외환위기 등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이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일본 또한 어느 정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고, 이 시기에 소비세 인상까지 겹치며 일본 국민들의 소비 심리가 위축되어 내수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결국 1990년대부터 일본 경제는 길었던 고도 성장 시대를 마감하고 잃어버린 n년, 즉 저성장 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 그나마 2001년 집권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신자유주의 개혁을 통해 어느 정도 불황에서 벗어나나 싶었지만, 2008년 미국발 대침체의 영향이 일본에도 불어닥치자 또다시 주저앉으며 이듬해 중국에게 세계 2위 경제대국 자리를 내어주고 말았다. 여기에 2011년엔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라는 최악의 재앙이 연달아 터지면서 일본 경제는 점점 더 수렁에 빠져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2012년 아베 신조 총리가 집권했다. 아베 내각이 디플레이션 극복을 위해 무제한 양적완화를 필두로 한 아베노믹스를 시행하면서 일본 경제는 점차 활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실제로 일본의 주가 지수인 닛케이 225는 아베 집권 전과 비교했을 때 2.1배 이상 상승하였고, 잃어버린 n년 돌입 이후 최고치인 24,000선을 돌파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국내총생산, 실업률 등 대부분 경제 지표들이 아베 내각 기간에 줄줄이 신기록을 경신했다.
아베 내각은 2020 도쿄 올림픽을 통해 올림픽 특수를 노림과 동시에 일본이 기나긴 불황에서 벗어났음을 세계에 과시하려 했으나, 코로나19 펜데믹으로 인해 올림픽이 1년 연기, 무관중으로 개최되며 사실상 실패하고 말았다.
현직 일본 총리인 기시다 후미오는 일본의 임금 수준이 거의 30년째 정체되어 있다는 문제점에 주목하여 새로운 자본주의를 내세우고 있는데, 향후 일본 경제의 귀추가 주목된다.
2021년 기준 일본 기업 시가총액 1위 기업은 도요타자동차이며, 2위 기업은 소니그룹이다. 일본의 명목GDP의 산업별구성비의 추이를 살펴보면 2013년 서비스업이 19.9%, 제조업이 18.5%, 그 외 산업이 18.9%로 서비스업과 제조업이 주요하다. 제조업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식료품이다. 또한 국내생산액의 산업별 비율을 보면 제조업이 30.8%를 차지한다.
제조업
일본 시가총액 1위이자 폭스바겐 그룹과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다투는 기업이 토요타인 것에서 짐작가능하지만 자동차 산업이 독일과 경합하는 초강세이고, 이에 걸맞게 관계 후방산업들도 독일과 나란히 세계 최고를 달린다. 중국 업체들의 물량공세에 밀려 세계 최고 자리에서 내려온 것으로 여겨지고는 하는 철강산업도 실제로는 생산량 기준 세계 2~5위, 매출 기준으로는 세계 1~3위의 일본제철을 비롯해 실속있는 회사들이 여럿 존재하여 여전히 건재하다. 다만 국가별 생산량은 중국에 밀려서 2위가 되었고, 기업 별 생산량에서도 중국 업체들이 1~2위로 올라온 상황이다. 그러나 조선업은 1990년대 이래로 한국 기업들에게 시장을 잠식당하며 1위를 내준 이후, 2010년대에는 중국 기업들의 점유율 증가에 크게 규모가 줄었다.
일본의 전자산업은 1990년대까지 세계 일류였지만 그 후로 일반 소비자 대상 제품은 긴 침체기를 겪었고, 이후 일본 기업들은 산업의 중심을 B2B로 바꿔나갔다.[7] 아이디어 상품을 중심으로 하는 신생 벤처 기업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기성 업체들의 가전이나 스마트폰 같은 경우 내수중심으로 시장 타겟이 축소됐고 생산라인은 대부분 해외 공장으로 오프쇼어링이 됐다. 카메라는 이 와중에도 선전하고 있는 대표적인 일본의 컨슈머 제품이다. 캐논, 니콘, 소니, 올림푸스, 파나소닉, 시그마같은 기업들이 유명하다. 스마트폰이 발전하면서 갈수록 카메라 시장이 축소되고 있지만 워낙 시장 지배력이 높은 데다가, 스마트폰의 카메라 기능도 결국은 일본 회사들의 디지털 카메라 기술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당장의 수익 자체에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고 있다. 또한 이런 카메라 회사들이 기존의 광학, 필름, 센서 기술력을 살려서 영상 촬영 장비, 렌즈, 반도체 제조장비 및 재료, 화장품, 의료기기, 자율주행 자동차, 항공/우주 산업에도 진출하여 성과를 내고 있어서 지속적으로 유지 혹은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이외에도 일본 기업들은 필기구, 복사기, 스캐너, 프린터, 복합기, 그래픽 태블릿, 음향 관련 장비 등 학습용품과 사무용품 그리고 생산성 도구 시장에서도 높은 점유율을 자랑하고 있다.
일본의 B2B 중에서 가장 유명한 건 공장자동화(FA)인데, 이는 일본이 오랜기간 정밀 제품들을 생산해온 제조강국이었기 때문에 이쪽 노하우를 한국, 중국은 잘 못따라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분야는 미국, 독일과 경쟁한다. 미쓰비시전기나 오므론같은 곳이 유명하고 당연히 공장에 들어가는 산업용 로봇도 화낙이 업계 1위를 달리는 것을 비롯하여 일본 업체들이 전세계 점유율 70~80%를 차지하고 있으며, 산업용 센서 쪽도 키엔스 같은 곳을 중심으로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1980년대에는 세계의 10대 반도체기업 중 6개가 일본 기업이었을 정도로 반도체 강국이었지만 2019년에는 이 6개 중에 도시바 하나만 남았다. 도시바도 분식회계 사건 이후로는 사정이 좋지 않다. 반면에 시스템 LSI나 센서시장 상황은 아까말한 산업용 수요도 있고, 일본이 강한 자동차에도 들어가기 때문에 사정이 훨씬 나아서, 차량용 반도체와 같은 시스템LSI 쪽은 르네사스가 순위권 제조사로 이름을 올리고 있고, 센서시장에서는 카메라 센서의 호황에 힘입어 소니가 1위를 달린다.
일본은 산업 포트폴리오의 다양화/고도화의 척도로 쓰이는 ECI(Economic Complexity Index, 경제 복잡성 지수)에서 1995년부터 줄곧 1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그 핵심은 제조업에 있다. 전술하였듯 다양한 분야의 제조업에서 뚜렷한 강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원동력이다. 더불어 유난히 일본이 1위를 독주할 수 있었던 것은 ECI의 계산 과정에서 척도로 쓰이는 산업별 복잡성 지수인 PCI(Product Complexity Index)에서 최상위권을 구성하는 광화학 필름, 공작기계 핵심 소재, 우주-항공장비 부품, 자율주행차, 로봇, 반도체 등 다양한 분야에 쓰이는 광화학 소재를 일본이 거의 독점[8]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PCI는 단순히 제조기술의 복잡함만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며, 독점성이 높을수록 진입 장벽(생산 노하우 필요)이 높은 것으로 판단하여 몇몇 품목의 경우 실제 제조기술의 난이도보다 개별 PCI가 높게 잡힐 수 있다는 한계점에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
금융업
- 은행: 미쓰비시UFJ은행이 국내 1위, 세계 5위 규모 은행이고 중국 은행들을 빼면 세계 1위다. 미쓰비시는 대침체 때 휘청거린 미국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를 인수했다. 과거 일본 최대 은행이었던 유초은행과 미쓰비시UFJ에는 뒤지지만 서로 피튀기는 2위싸움을 펼치는 미즈호 은행과 미쓰이스미토모은행도 세계 20위권 안에 들어가는 메가뱅크다.
- 증권사, 투자은행: 노무라 증권이 독보적인 1위를 달리고 있다. 노무라 증권은 2008년 파산한 리먼 브라더스의 사업 대부분을 인수했다.
- 보험회사: 생명보험에서는 간포생명이 강세를 띠고 손해보험에서는 도쿄해상홀딩스가 강세를 띤다 그러나 재보험에서는 일본이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미국 AIG나 영국 로이드와 계약을 하는게 대부분이다. 일본은 천재지변이 많아 보험사들 손해율이 높은 편이라 생명보험, 손해보험사는 큰데 재보험 업체들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
1980년대부터 발전하기 시작해 90년대 이후 메가뱅크의 탄생으로 본격적으로 일본의 주요 산업 중 하나가 된것이 금융업이다.
버블붕괴로 큰 타격을 입었던 산업이지만 은행 합병을 통해 위기를 잘 극복했다. 또한 일본의 막대한 경상수지에 이바지 하고 있다. 다만 사모펀드 쪽은 전반적으로 약한 편이다. 그러나 소프트뱅크라는 벤처 캐피털계의 세계적인 큰 손이 존재하고 있기는 하다.
일본은 세계 최대 규모의 연기금인 GPIF를 운영하고 있다. 총 자산은 2019년 3월 말 기준으로 162조 엔으로 우리나라 국민 연금 규모의 2배 이상이다. GPIF는 운용 자산의 1/4을 주식에 투자하는데 투자를 시작한 2001년부터 2018년까지 무려 660조원의 흑자를 내고 있다. 운용 금액이 원체 많다보니 분기 당 이익이나 손실이 조 단위를 우습게 넘긴다.
IT
IT 기반 기술이나 투자 금액에 비해 초고속 인터넷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다만 그럼에도 대체로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서유럽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2010년대부터 이뤄진 대규모 투자를 통해 개선이 이뤄지고 있으나, 한국이나 대만, 홍콩, 싱가포르 같은 여타 동아시아권 선진국들에 비해서는 다소 떨어진다. PC 보급률의 경우 전체적으로 보면 수치상 한국, 미국과 큰 차이가 없다. OECD 통계에 따르면 2013년 기준 가구 PC 보급률은 일본 81.7%, 한국 80.6%, 미국 72%이다. OECD 통계에서 가장 최근 비교 가능한 년도인 2018년을 기준으로 하면 가구 PC 보급률은 일본 74%, 한국 72.4%이다. 다만 PC 보급률 자체는 낮지 않지만 그중 데스크톱 PC이 차지하는 비중은 낮은 편이고, 평균적인 사양도 한국이나 대만보다는 다소 낮은 편이다. 일본의 PC시장은 노트북 컴퓨터와 태블릿 PC가 주류를 잡고 있다. 또한 현금 없는 사회를 위한 인프라 보급률 및 사용률 또한 2010년대 후반 이후 크게 증가하고 있지만 여전히 다른 동아시아권 선진국들에 비해 낮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이런 민간 영역에서 상대적으로 뒤쳐지는 IT 접근성 및 사용률 그리고 인식 면에서는 마찬가지로 크게 문제를 겪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독일과 강한 유사점을 보인다.
한국은 1989년 교육용컴퓨터, 1998년 국민PC 등 정부에 의한 PC 보급정책이 가동되면서 보급률을 크게 끌어올린 반면, 일본은 별다른 정책적 배려가 없는 상황에서 언어적 장벽으로 인해 MS-DOS, Windows 등 국제 플랫폼의 보급이 지연되었다. 여기에 i-mode로 피처폰이 전 국민 IT를 책임지는 상황이 되어 PC는 더욱 불필요한 존재가 된 것이었다. 의료체계를 전자화 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의료계가 고연령대인 것이 문제가 돼서 무산된 적이 있다.
그래서 일본은 인터넷 인프라 커버리지가 한국보다 다소 떨어진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보다 앞서 ISDN을 보급하는 등 앞선 면을 보여줬으나[12] 몇년 후 한국이 ADSL 방식으로 고속 인터넷을 보급하면서 역전당했고, 한동안 한국보다 인터넷 속도가 느리다는 평가를 얻었다. 인프라를 너무 일찍 갖춘 것이 오히려 독이 된 것이다. 이후 단독주택 위주의 주거 환경을 활용한 FTTH 보급에 박차를 가했고,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인프라 여건이 크게 개선됐지만, 아직도 한국에 비하면 전국에 골고루 초고속급 유선 인터넷 망이 갖춰졌다 보긴 힘들다.
일본의 콘솔 기기 시장은 상당히 거대한 편이고, 일본 게임 업계가 콘솔 게임 시장을 주도하고 있으나, 반대급부로 온라인 게임의 점유율이 전체적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다른 동아시아권 선진국들에 비해 평균 컴퓨터 사양이 높지 않은 편이다. 싱글플레이를 선호하는 일본인의 정서적 특징도 한몫했다. 다만 이런 콘솔 게임 선호 현상은 일본만의 특징은 아니라서, 미국, 유럽 연합, 영연방 선진국들에서도 콘솔 게임이 PC 온라인 게임에 비해 점유율이 높은 편이다. 주요 게이밍 시장 중 PC 게임이 콘솔 게임에 우위를 점한 지역은 한국, 중국, ASEAN 정도가 꼽힌다.
HTML5로 대표되는 신세대 국제 표준 규격이 일본에도 웹표준으로 자리잡기 이전까지, 비교적 최근까지도 일본 웹사이트들은 순수 텍스트를 중심으로 하는 간결한 UI가 많았다. 미려하고 최신 트렌드를 따라가는 기술을 적용하다가는 사양이 낮은 PC와 브라우저를 쓰는 다수의 이용자들을 놓치게 되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IT업계는 주로 기업이나 관공서를 상대로 사업을 해왔고 일반 소비자를 상대로 하는 서비스에 소홀했기 때문에 많이 보수적이었고 타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변화에 둔감했다. 컴퓨터 부품 대다수가 한국보다 비싸게 책정되어 수입된다.
세계 휴대전화 시장이 스마트폰으로 개편되었던 시기에도 얼마간 독자규격의 피처폰 등이 팔리던 곳이 일본이다. 스마트폰 체제로 변환된 이후 상당히 많은 일본 기업이 자국 시장에서 스마트폰을 판매하기 시작했지만, 초기 애플 아이폰이 2년 가까이 날개 달린 것처럼 팔릴 때 대응을 못하여 스마트폰=아이폰이라는 일본 국민의 인식이 생겨 자국 시장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일본 내에서는 아이폰 점유율이 상당히 높다. 해외 시장에서는 중국 스마트폰 브랜드들의 범람 이후 전체 판매량의 50% 정도를 중국 업체들이 나눠 가지고, 25% 정도를 Apple이, 나머지 25% 정도를 삼성전자가 차지하는 시장 구도가 형성되면서 일본 기업 상당수가 스마트폰 제조에서 철수했거나 큰 비중을 두지 않고 있다.
가전 분야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 고급~중급 가전 시장은 삼성과 LG 두 한국 기업들에게 내주었는데, 이후 저가 시장에서부터 하이얼 등 중국 기업들이 치고올라오면서 가전 산업 전반이 레드오션으로 바뀌며 생산 단가가 높고 두드러진 강점이 없던 일본 가전 기업들의 설 자리가 좁아졌다. 2010년대부터는 내수 시장 및 아이디어 시장을 제외하면 세계 시장에서 일본 기업들이 가전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사실상 없다고 볼 수 있다. 비슷한 시기 아예 가전 사업에서 철수했던 지멘스, GE 등의 독일, 미국 기업들처럼 일본 가전 기업들도 소비자 가전에서 철수하거나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규모 최소화 과정을 거쳤다. 즉, IT 시장에서 내수 시장 및 벤처 시장을 제외하면 B2C 시장 점유율이 크게 줄어든 것이다. 그 대신 일본 기업들의 전통적 강점을 살려 필수 부품 설계, 제품 설계, 정밀 부품 제조, 소재, 제조설비, 품질관리 등 B2B 시장에 더 집중하는 편이다.
일본의 국민 메신저는 소프트뱅크 그룹의 자회사로 편입되기 이전까지 네이버(기업)의 자회사로 한국계 기업이었던 LINE이며 기존의 이메일 기반 메시지를 대체했고 금융, 통신 등의 분야에도 진출 중이다. 또한 구글, 아마존닷컴 등 미국 거대 인터넷 기업들의 영향력도 강하고 일본 제1의 포털인 야후 재팬의 검색결과도 얼마전부터 구글이 제공하고 있을 정도로 해외 서비스들이 많이 자리잡고 있다. 일본이 금액 기준 세계 3~4위의 IT 시장이기에 자생적인 서비스들도 제법 존재하기는 하지만, 국제화 흐름을 잘 탔거나 특수 시장 공략으로 일본 내수 시장과 세계 곳곳에 충성 유저층을 확보해놓은 경우는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경우는 시장에서 도태되는 중이다. 2000년대까지는 일본판 싸이월드로 불리던 mixi와 동영상 사이트인 니코니코가 유명했으나, 각각 트위터/인스타그램과 유튜브에 밀려 도태됐다. 현재에도 대표적으로 소프트뱅크 그룹이 소유한 야후재팬 및 여타 IT 서비스들 그리고 라쿠텐과 그 산하의 메신저 앱인 Viber, 리크루트 홀딩스 산하의 IT 서비스, 사이버에이전트, pixiv 등이 일본 내에서는 큰 규모를 이루고 있다. 또한 트렌드마이크로를 비롯해 IT 보안 서비스들도 존재한다. 특히 트렌드마이크로와 pixiv 등의 IT 서비스들은 국제화 흐름에 잘 올라타서 동아시아에서 혹은 국제적으로 제법 인지도와 사용자를 확보해놨다. 이 때문에 최근 일본의 산업과 사회 흐름을 보면 IT 분야에서만은 잘라파고스라는 말이 무색하다. 한국이 네이버나 카카오 등 내수 특화 자국 기업들이 중심을 차지하면서 갈라파고스화에 대한 우려가 나오는 것과는 다른 분위기라고 보면 될 듯하다.
다만 이쪽은 제1세계 국가들 중에서 한국이 상당히 예외적인 국가로 취급 받는다. 영국,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싱가포르 등 영연방 선진국들은 물론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같은 유럽 선진국들에서도 Google, Apple, Microsoft, 페이스북 산하 기업들을 중심으로 한 미국계 IT 기업들이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자생적인 인터넷 서비스가 강한 지역은 러시아, 중국 같은 구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많다. 그나마도 폴란드, 체코 등 유럽연합에 들어간 국가들은 구사회주의권이어도 미국 기업 의존도가 높다. 물론 한국도 야후 코리아나 라이코스가 ADSL이 주류였던 시절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이나,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의 성공 사례처럼 무조건 일반화를 할 수는 없고, 2010년대 후반부터 유튜브, 넷플릭스 열풍을 중심으로 점점 더 개방에 대한 압박이 심해지고 있어서 딱잘라 평가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나, 대체적인 경향은 일본과 한국의 IT 업계 동향에 확실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추정 시가 총액이 1조 원을 넘는 비상장 기업을 가리키는 유니콘 기업이 적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이는 일본 국내 사업으로도 충분히 회사 유지가 가능하고, 굳이 해외에 진출한다면 주변국이자 일본과 문화적으로 공유하는 것이 많은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베트남, 태국에 진출하는 것만으로도 일정 규모의 시장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미국, 유럽 연합, 영국, 중국 등 다른 거대 시장에 진출하려는 의지가 적어서 유니콘 기업으로 발돋움하는 경우가 적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신흥 기업들이 증권시장에 상장하기 쉬운 일본 금융 시장의 구조적 특징과 상장 기업이 되는 것을 선호하는 일본 IT 업계의 문화적 특징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신흥기업을 위한 도쿄증권거래소 마더스(Mothers, Market of the high-growth and emerging stocks)시장 진입이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에 많은 수의 일본 내 신흥 IT 기업들이 상장을 통해 자본을 확보하고 있다. 즉, 회사 설립 이후 상대적으로 이른 기간 안에 상장을 하기 때문에 비상장 거대 기업인 유니콘 기업의 수가 적은 것이다.
반대로 일본을 대표하는 초대형 IT 대기업 소프트뱅크 그룹 등은 전 세계의 유니콘 기업에 투자하고 IPO에서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으며,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덕분에 2020년 순이익이 50조 원을 기록하면서 애플과 아람코에 이어 세계 3위를 달성했다.
무역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면직물·생사(生絲)를 중심으로 한 섬유제품이 수출총액의 과반을 차지하고, 목화를 중심으로 한 섬유원료가 수입총액의 절반을 차지했다. 당시의 주요 무역상대국은 아시아 제국, 특히 중국이었고, 생사수출과 목화수입이 많은 미국이 그 뒤를 이었다.
전후에는 중화학공업의 현저한 발달로 해서 무역의 규모가 확대되었다. 중화학공업의 현저한 발달로 해서 무역의 규모가 확대되었다. 품목별로 보면 수출에서는 자동차, 반도체 및 전자장비, 기계류, 광학장비, 철강 순으로 주종을 이루었다. 수입은 원유, 섬유류 기계류, 수산물, 반도체와 전자부품, LNG 순이다.
무역수지는 오랫동안 순조로이 흑자가 지속되어왔으나, 세계적인 스태그플레이션이나 원유가격의 급등 등으로 해서 1980년에는 약 113억 달러의 입초(入超)를 기록하였으나 1992년에는 수출 3396억 달러, 수입 2330억 달러로 1070억 달러의 사상최고의 무역흑자를 기록하였다. 1999년 이후 미국 및 아시아 경제 침체에 따른 수출부진과 엔 약세에 따른 수입의 수요 증가로 인해 무역수지 흑자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2005년 기준으로 주요수출국의 수출비중은 미국 22.9%, 중국 13.4%, 대한민국 7.8%, 타이완 7.3%, 홍콩 6.1% 순이다. 주요수입국의 수입비중은 중국 21%, 미국 12.7%, 사우디아라비아 5.5%, 아랍에미리트 4.9%, 대한민국 4.7%, 오스트레일리아 4.4%, 인도네시아 4% 순이다. 품목별로 보면 수출에서는 자동차, 반도체 및 전자장비, 기계류, 광학장비, 철강 순으로 주종을 이루고, 섬유제품은 그 비중이 적어졌다. 2016년 기준 일본의 주요 수출국은 미국, 중국, 한국, 대만, 홍콩, 태국의 순이며, 주요 수입국은 중국, 미국, 호주, 한국, 대만, 독일 순이다.
일본의 무역액은 수출은 2007년에, 수입은 2008년에 최고액을 기록했다. 2009년에는 세계금융위기의 영향으로 무역이 크게 감소했고, 2011년 이래 동일본대지진, 유럽연합의 정부채무 문제로 인한 경기악화, 센가쿠열도 영유권문제로 인한 중일관계악화 등으로 수출이 다시 감소한다. 한편, 대지진후에 일시정지한 원자력발전을 대체하기 위한 화력발전용LNG(액화천연가스)를 중심으로 수입이 큰폭으로 증가해(2014년에는 최고액을 기록), 무역수지는 적자 기조로 돌아섰다.
무역액은 국내외의 경제동향이나 산업구조의 변화의 영향 속에 끊임없이 변화한다. 1980년대 이후 일본 무역동향은 다음과 같다.
① 1980~1985년: 자동차나 일렉트로닉스 등 부가가치가 높은 하이테크 제품의 수출이 증가하고, 국내 호경기로 수입도 증가한 시기다.
② 1986~1987년: 플라자합의 이후 세계적인 엔고로 수출품의 외국통화 판매가격이 올라 수출산업이 부진해지고, 그에 따라 공업원료 사용량이 줄어 수출과 수입이 함께 위축되었다.
③ 1988년~1990년: 토지·부동산 등의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상승하고 거품경제의 호경기 속에서 수출과 수입도 증가하였다.
④ 1991년~1992년: 토지·부동산 등 가격 급락하고, 거품경제붕괴에 따른 불경기로 수출과 수입이 모두 감소하였다.
⑤ 1997~1999년: 아시아 외환위기 속에서 동아시아 수출이 감소하고, 국내 불황으로 수입도 줄어든 시기다.
⑥ 2002년~2007년: 엔화 약세로 수출이 대폭 증가하고, 국내 경기가 대폭 상승하고 수입도 대폭 증가한 시기. 73개월간 지속된 경기 회복 시기로 ‘이자나미 경기’라고 불린다.
⑦ 2009년: 2009년은 미국발 금융위기의 여파로 인한 글로벌 경제대불황으로 수출도, 수입도 부진하였다.
⑧ 2011년~2012년: 동일본대지진과 유럽연합의 정부채무 문제에 의한 경기악화, 태국의 대홍수에 의한 생산활동 침체, 센카쿠 열도 영유권문제로 인한 일중관계 악화 등으로 수출이 감소하였다. 대지진 후에 일시정지한 원자력 발전을 대체하는 화력발전용 LNG(액화천연가스)나 원유의 수입이 큰 폭으로 증가하였다.
⑨ 2017년~2018년: 중국 경제의 성장 배경으로 수출이 증가하고 자원가격 상승으로 수입도 증가한 시기로, 2018년 무역 총액은 사상 최대인 164조엔을 기록하였다.
⑩ 2020년: 코로나19 펜데믹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무역이 감소하면서 수출과 수입 모두 감소하였다. 2020년 수출은 전년대비 11% 감소한 68.4조엔, 수입은 전년대비 14%감소한 67.8조엔을 기록하였다.
교통
일본은 철도의 발달이 현저하여 철도망의 밀도는 한국의 2배 가량이다. 신칸센(新幹線)은 일본의 고속철도체계이다. 일본 《전국 신칸센 철도 정비법》 제2조는 신칸센을 "주된 구간을 열차가 시속 200 km 이상의 고속도로 주행할 수 있는 간선 철도"로 정의하고 있다. 철도의 분할 민영화 전까지는 일본국유철도가 운영하였고, 현재는 JR 그룹 5개사가 운영하고 있다. 최초의 신칸센은 1964년 10월에 개통한 도카이도 신칸센[東海道新幹線:도쿄~신오사카, 552.6㎞이다. 고속열차 신칸센은 도쿄와 오사카 사이의 520㎞를 3시간 정도에 달린다. 산요(山陽)신칸센은 도쿄와 하카다를 잇는 노선이며, 열차 종류로는 노조미, 히카리, 코다마가 운행된다. 그 밖에도 규슈신칸센, 홋가이도 신칸센, 도호쿠 신칸센, 조에쓰 신칸센, 후쿠리쿠 신칸센, 야마가타 신칸센, 아키타 신칸센이 운행된다.
1960년대 이후 활발하게 도로 건설이 전국에 고속도로망이 정비되어 있다. 일본의 도로는 사도(私道)를 제외하면 지역주민과의 협의 하에 도로법에 따라 국가나 지방공공단체가 직접 관리한다. 일본의 도로망은 도시 및 거점을 연결하는 네트워크로 기능하는데, 2000년대 들어 도로망 건설에 따른 부채와 관리가 지자체의 문제가 되고 있다. 과소지역의 지역활성화를 위해 '관계인구(関係人口)'를 늘린다는 취지에서 최근 도로역이 활성화되고 있다. 일본 도시는 근대화 과정에서 철도역을 중심으로 근대적 상업지구가 형성되고 철도역 주변 지역은 가장 번화한 상점가이자 도시의 중추관리기능이 집중되는 곳이었다. 도로역은 철도에 역이 있는 것처럼 도로에도 역을 만들자는 발상에서 시작되었고, 지방 도로역을 지역활성화의 거점으로 운영하고 있다. 일본 전역에 1160개소의 도로역이 분포하며, 도로역을 지방창생과 관광을 더욱 촉진하는 거점으로 육성하고 도로역을 중심으로 지역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활력있는 지역을 디자인는 도로역 발전 방안도 공표되었다.
일본항공(주)(日本航空:JAL)을 주축으로 하는 항공교통은 도쿄의 국제공항으로는 하네다 공항(羽田空港)이 사용되어 왔으나, 국제·국내선 항공기의 폭주로 1978년에 지바현 나리타 시 신도쿄국제공항을 만들었다. 일본 전국 각지에 국제공항이 있으며 한국 여러 도시와 직항이 운행된다. 2019년도 공항별 여객수로 가장 많은 공항은 하네다(羽田)공항, 나리타국제공항, 오사카 시의 간사이국제공항, 후쿠오카시의 후쿠오카공항, 홋카이도 치토세시의 신치토세(新千歳)공항, 오키나와섬 나하시의 나하 공항의 순이다.
세토 대교(瀬戸大橋)는 일본 세토나이카이(瀬戸内海)에 설치된 혼슈(本州) 지방과 시코쿠(四国) 지방을 이어주는 다리이다. 1978년에 착공하여 1988년에 개통되었이는 철도와 도로로 동시에 쓰이는 다리로서 세계에서 가장 긴 교량이다.
동영상
참고자료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