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에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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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독일어: Freistaat Bayern)는 독일 남부에 위치한 주이다.[1]
개요
바이에른주의 면적은 70,541.57km²이며 인구는 13,369,393명(2022년 12월)이다. 서쪽으로는 바덴뷔르템베르크주, 북서쪽으로는 헤센주, 북쪽으로는 튀링겐주, 작센주와 접하며 남쪽으로는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동쪽으로는 체코와 국경을 접한다. 연방의 16개 주 중 최대 면적을 차지한다. 인구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다음으로 많다. 주도·최대 도시는 뮌헨이며 독일 16개 주 중 가장 면적이 넓다. 주요 도시로는 뮌헨 외에도 뉘른베르크, 아우크스부르크, 밤베르크, 레겐스부르크, 잉골슈타트, 뷔르츠부르크 등이 있다.
영어로는 바바리아(Bavaria, /bəˈveəriə/). 참고로 바이에른 사람, 바이에른 방언, '바이에른의'란 의미의 형용사는 영어로 바바리안(Bavarian)이다.
지명은 BC 500년경 서(西)게르만계 부족인 바요바리인(人)이 이곳에 침입한 것에 연유되며 그들은 동(東)알프스 계곡에 정착하였다.
독일에서 가장 소득 수준이 높은 주로 유럽 전체에서도 가장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 중 하나로 꼽힌다. BMW, 아우디, MAN, 알리안츠, 지멘스, 오스람 등 독일 유수의 기업들의 본사가 뮌헨을 비롯한 바이에른주 도시들에 소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2차 대전 이후 베를린이나 구 동독 지역에 본사가 있던 회사들이 상대적으로 피해도 적었고 승전국 중 미군 관할이었던 덕에 복구도 빨랐던 바이에른으로 대거 피난을 온 것이 주효했다.
해외 매체에서 바이에른 지역을 다른 지역으로 로컬라이징 할 때는 부유하고 발전한 남부 지역이라는 공통점으로 미국의 부유한 텍사스, 영국의 부유한 사우스이스트 잉글랜드 지역 등으로 각 나라에 맞게 로컬라이징 하는 경우가 많다.
유럽이나 미국 사람들은 "독일"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옥토버페스트의 인지도 때문인지 레더호젠(Lederhosen)을 입은 남자들과 디른들(Dirndl)을 입은 여자들이 맥주를 마시며 프레첼[5]을 먹는 스테레오타입을 주로 떠올리는데, 사실 이 이미지는 바이에른주의 이미지에서 따온 것이다. 니더작센, 브란덴부르크 등 북부지방의 전통 의상은 흔히 생각하는 독일 전통 의상과는 거리가 멀다.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도 북독일인은 마도로스 모자에 스웨터 차림으로 나왔다. 이 때문에 다른 지역 독일인들은 "저건 진정한 독일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 다른 독일 지역의 사람들도 많으며 다른 나라 사람들의 이미지를 불식시키려 하지만 이미 너무 강하게 자리잡은지라 바꾸는 건 힘들 듯. 바이에른 사람들은 자신들을 독일인이라기보다는 '바이에른인'으로 인식하고, 다른 독일인들 역시 바이에른인들을 독일인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로 인식한다. 인접한 오스트리아도 그렇듯, 이곳 사람들은 독일의 다른 지역보다 머리 색깔이 짙다.
모든 대도시에는 박물관·미술관·극장들이 여러 개 있으며, 종합대학은 뮌헨·뷔르츠부르크·에를랑겐·뉘른베르크 등지에 있다.[2][3]
자연환경
바이에른주는 북부의 프랑켄 지방, 남부 도나우강 상류와 알프스산맥 기슭의 오버바이에른·니더바이에른·슈바벤 지방, 동쪽의 오버팔츠 지방 등으로 나뉜다. 남쪽의 스위스·오스트리아 접경 지역은 알프스산맥 기슭이며, 독일에서 가장 높은 추크슈피체산 등의 산이 있으며, 북부와 동부에는 바이에른 숲(바이에리셔발트), 보헤미아 숲(뵈머발트) 등의 삼림 지대와 높지 않은 산이 이어진다. 니더바이에른의 비옥한 농업지대, 알프스 산록의 낙농지대, 마인강(江) 유역의 포도재배지대 등으로 구분되며, 독일의 중요한 농업주를 이루고 있다.
역사
기원전 바이에른 지방에 처음 정착한 주민들은 켈트족들로 그들은 기원전 마지막 10년 동안 북쪽의 튜턴족과 남쪽의 로마인들 사이에서 압박을 받았다. 로마 제국은 이 지방을 정복해 남부 지역을 라에티아와 노리쿰으로 나누었고, 북쪽 경계를 따라 요새들을 건설해 튜턴족의 남침을 막았다. 아우크스부르크, 켐프텐, 레겐스부르크, 파사우 등의 번영하는 로마 식민지들이 남부에서 생겨났다.
5세기경 훈족으로부터 압박을 받은 게르만족들이 대이동하여 로마 제국 영토를 침공하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발생했고 이는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진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의 물결 속에서 바이에른 땅에도 488~520년 동쪽과 북쪽으로부터 게르만족의 일파인 바이에른족(바바리아족)이 들어와 원거주민인 켈트족, 로마인들과 뒤섞여 정착했다. 바이에른족은 지명의 어원이 되었다.
555경~788년 프랑크족의 아길롤핑 공작 가문의 통치를 받았다. 이 시기는 바이에른 공작령(Herzogtum Bayern)이라 불린다. 그 사이인 7~8세기에 이곳은 성 보니파시오, 성 코르비니언, 성 엠머람, 성 루퍼트 등과 같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수도자들에 의해 그리스도교화되었다.
788년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는 아길롤핑 가의 공작 타실로 3세를 폐위시키고 바이에른 공작령을 프랑크 왕국(카롤링거 제국)에 합병시켰다.
카롤루스 대제 사후 817년 프랑크 왕국은 분할되었으며, 바이에른 공작령은 루도비쿠스 1세의 차지가 되어 동프랑크 왕국에 속하게 된다.
이후 동프랑크 왕국은 919년 독일 왕국으로 변모했으며, 바이에른 공국은 독일 왕국을 구성하는 5대 부족 공국(Stem duchy) 중 하나가 되었다(바이에른 부족 공국). 독일 왕국 시대에 접어들면서 각 5대 부족 공국의 독립성이 더욱 강화된다.
962년 독일 왕국의 오토 1세가 마침내 교황의 대관을 받아 신성 로마 제국이 세워졌다. 그러나 바이에른 공국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대립하는 세력의 중심에 있었다. 얼마 후 황제의 견제와 내부 분열이 겹치면서 976년 오스트리아 변경백국, 케른텐 공국이 바이에른 공국에서 분리되었다. 분리된 2개의 공국은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습령으로 통합되어 합스부르크 제국을 거쳐 오늘날 오스트리아 공화국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바이에른과 오스트리아는 문화적으로 매우 유사한 배경을 지니고 있다.
1180년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가 정적인 벨프 가문의 하인리히 사자공으로부터 바이에른 영지를 몰수한 후 바이에른 궁정백이었던 비텔스바흐 가문의 오토에게 증여하여 바이에른 공국의 오토 1세가 되었다. 이로서 유서 깊은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현재의 바이에른주 남동부 지방인 오버바이에른, 니더바이에른만을 비텔스바흐 가문이 소유했고, 나머지는 수많은 제국 도시, 수도원 보유지, 기타 가문 소유지들로 조각나 있었다. 오토 1세의 아들 루트비히 1세는 결혼을 통해 라인 궁정백령을 얻어 라인강 유역으로까지 세력을 확장하였으나 루트비히 1세의 아들 오토 2세는 라인 궁정백령과 니더바이에른은 장남 루트비히 2세에게, 오버바이에른은 차남 하인리히 13세에게 분할 상속하였다. 이 중 루트비히 2세의 막내가 루트비히 4세로서 바이에른을 통합하고 독일왕으로 즉위하였으며, 1323년에는 브란덴부르크까지 손에 넣었다. 그러나 루트비히 4세는 라인 궁정백령은 형 루돌프의 가계에게 넘겼으며, 그의 사망으로 인해 영토 역시 아들들에 의해 분할되어 14세기 말에는 비텔스바흐 가문의 여러 분가가 바이에른을 3개의 공작령으로 분할하여 통치했다. 그리고 1356년의 금인칙서로 바이에른계 비텔스바흐 가문은 팔츠계 비텔스바흐 가문에게 황제 선출권을 빼앗겼으며 브란덴부르크는 1371년, 카를 4세에게 빼앗기며 독일 내에서 급격하게 세력을 잃었다.
1506년, 바이에른-뮌헨의 현명공 알브레히트 4세는 갈라졌던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의 모든 영토를 통합했고, 뮌헨을 수도로 삼았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95조 반박문으로 종교 개혁이 발생하자 알브레히트 4세의 아들 빌헬름 4세는 가톨릭 수호의 입장을 취하고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와 함께 대항종교 개혁 세력(안할트 동맹)의 중심이 된다.
1545년, 알브레히트 4세의 아들 빌헬름 4세는 마침내 이곳을 하나의 공작령으로 재통합할 수 있었다.[7] 빌헬름 4세는 종교개혁에 동참할까 고민했으나, 카를 5세가 트리어나 쾰른의 선제후 중 하나는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하여 가톨릭으로 남았고, 후계자들인 알브레히트 5세와 빌헬름 5세를 거치며 바이에른은 매우 엄격한 로마 가톨릭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1583년부터 벌어진 쾰른 전쟁(Truchsessischer Krieg)의 결과로 바이에른계 비텔스바흐 가문은 쾰른 선제후 자리를 얻어내는 데 성공하여 향후 약 200여년 동안 숙질 계승으로 쾰른 선제후 자리를 준세습화하였다.
30년 전쟁(1618년~1648년) 때 막시밀리안 1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편에서 싸웠다. 그의 지도력으로 바이에른 공국은 영토를 확장했다. 1623년 막시밀리안 1세는 팔츠계 비텔스바흐 가문의 선제후 자리를 빼앗아 선제후가 되는 특권을 얻었고 바이에른 공국은 바이에른 선제후국이 되었다. 하지만 30년 전쟁으로 바이에른은 초토화되었으며 팔츠 선제후국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선제후 자리를 되찾았다.
18세기에는 야심만만했으나 주제를 몰랐던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과 카를 7세로 인하여 스페인과 합스부르크 제국의 왕위 계승 전쟁들(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로 끝없는 고통에 시달렸다.
1777년,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의 마지막 남계였던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가 사망하면서 팔츠 선제후 카를 4세 테오도르에 의해 팔츠와 바이에른이 재통합되었고[8] 이 과정에서 황제 요제프 2세가 바이에른 일부 지역을 병합하려 했으나 프리드리히 대왕의 반대로 바이에른 계승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기에 접어들자 바이에른은 프랑스 혁명에 맞선 제1·2차 반프랑스 연합에 가담했다. 그러나 1796년엔 프랑스 혁명군에, 1799년에는 오스트리아에, 다시 1800년에는 프랑스에 잇따라 점령당하는 고통을 겪었다. 다음해에 바이에른은 프랑스의 동맹국이 되어 오스트리아 제국을 희생시키며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고, 1805년 프레스부르크 조약에 따라 거의 현재의 경계대로 영토를 얻었다. 이 조약으로 바이에른 선제후국은 바이에른 왕국으로 격상되었고, 통치자인 선제후 막시밀리안 4세 요제프는 바이에른 국왕 막시밀리안 1세가 되었다.
나폴레옹 체제하인 1808년에는 바이에른 지방 최초의 헌법이 반포 되었으나, 이후 5년간은 프랑스 제1제국의 입맛에 맞게 수많이 개정 되었다.
그러나 바이에른은 나폴레옹이 매우 불리해지자 나폴레옹 전쟁 후기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 직전에 나폴레옹을 버렸고, 1815년에는 나폴레옹에 대항해 신성 동맹에 가담했다. 이렇게 시기적절하게 진영을 바꿈으로써 바이에른은 빈 회의(1814~15) 후에도 이미 취득한 영토의 대부분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되어, 독일 연방 내에서 오스트리아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에 이어 3번째로 큰 국가가 되었다. 다만 티롤은 오스트리아 제국에 조용히 반납했다.
나폴레옹 전쟁이 종식되고 빈 체제가 들어선 후 막시밀리안 1세의 계속된 치세하에서 1818년에는 바이에른 최초의 의회가 발족했다. 막시밀리안의 아들인 루트비히 1세 아래에서 지방자치제와 다른 개혁들이 취해졌다. 그러나 아일랜드의 여류 모험가인 롤라 몬테즈와 열애에 빠져 왕위를 지킬 수 없게 되자 루트비히는 결국 1848년 퇴위했다.
1850년 루트비히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막시밀리안 2세는 작센 왕국, 하노버 왕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등과 동맹을 맺었다. 이들의 목적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오스트리아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에 대항하는 제3 세력으로서 독일 내에 중간 크기의 나라들을 건설하는 것이었고, 바이에른은 이들 가운데 가장 큰 나라였다. 바이에른은 그 후 프로이센에 반대해 오스트리아 제국을 지지했다.
막시밀리안의 후계자인 루트비히 2세는 바이에른을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독일령으로 합치자는 프로이센의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제안을 거절하고, 1866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편에 섰다. 그러나 프로이센 측의 조속한 승리와 바이에른에 대한 프로이센의 온건한 정책으로 바이에른은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에는 프로이센 편이 되었으며, 그 후 프로이센 왕 빌헬름 1세의 주도하에 독일 제국을 수립할 때 도움을 주었다.
1871년 바이에른 왕국은 독일 제국에 가맹했으며 제정된 독일 헌법하에서 바이에른은 독일 제국의 다른 어떤 구성국보다도 큰 독자성을 얻었다. 외교 활동, 군사 행정, 우편·전신 업무, 철도 등에서 자치권을 보유했으며 제국 내에서 프로이센에 이어 제2위의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루트비히 2세는 정신 불안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했고, 특히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건설하는 것과 같은 그의 과도한 건설 사업들은 바이에른의 국고를 바닥냈다.
1886년 루트비히 2세는 정신이상자로 공포되었고, 왕위는 그의 동생인 오토에게 넘어갔지만 오토 역시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 오토의 삼촌 루이트폴트가 같은 해에 섭정이 되었고, 1912년 루이트폴트가 죽자 그의 아들 루트비히 3세가 왕이 되었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독립 사회주의자인 쿠르트 아이스너가 비텔스바흐 왕조를 무너뜨리고 바이에른을 공화국으로 선포했다. 하지만 1919년 아이스너는 암살되었고, 잇따른 혼란 속에서 혁명 위원회들이 '적색 테러'를 자행하고 단명한 소비에트 공화국을 구성했다. 이 공화국은 1919년 5월 독일의 육군 부대들과 민방위대들이 뮌헨을 탈환하고, 공산주의자들에게 마찬가지로 무자비한 '백색 테러'를 가하면서 끝장이 났다.
1919년 8월에 통과된 새로운 바이에른 헌법에 따라 바이에른은 전후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의 자유주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1920년에는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의 영토였던 코부르크를 흡수했다. 그러나 바이에른의 정국은 여전히 혼란한 상태였고, 1920, 1921년에는 우익 쿠데타가 있었으나 실패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운동이 뮌헨에서 시작되었고, 아돌프 히틀러가 뮌헨의 맥주 홀에서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실패하였다(뮌헨 폭동). 실패 이후 바이에른에서 나치 당세는 급락했다. 맥주 홀 폭동 직전 선거에서 프랑켄에서 20%, 오버/니더바이에른 10%를 넘겼던 지지율이 폭동 직후 선거에서는 10%도 못 넘길 정도로 폭락, 이후부터는 나치 지지율이 전국 평균에 턱걸이할 뿐이었다. 선거 지도 이로 인해 1933년 이전까지는 바이에른 인민당에 밀려 바이에른의 주도권을 잡지는 못한다.
1933년 나치당이 권력을 잡자 독일의 모든 주들 가운데서 가장 보수적이던 바이에른은 나치즘의 요새가 되었다. 당시 가톨릭 세력은 대체로 나치에 긍정적이지 않았으나 히틀러에게 가톨릭이 협력했다고 하면 독일 내에서는 백발백중 바이에른이다. 그런 주제에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당시 독일의 다른 주들에 비해 연합국의 폭격을 많이 받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하자 바이에른은 미국의 점령하에 놓였고, 라인강 유역의 팔츠 지역은 프랑스 점령하에 놓였다. 1946년 지리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라인 강 유역의 팔츠 지역은 바이에른에서 떨어져 나갔고, 현재의 바이에른 지역으로 1949년 성립된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을 구성하는 한 주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이후 중도 우파의 바이에른 인민당을 계승한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기사당, CSU)이 정권을 잡으며 발전을 이룩하여 독일에서 가장 번영을 이룩한 주의 하나가 되었다.
산업
독일 연방에서 경제 규모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다음이며, 가장 견실한 경제 상태를 나타내는 주 중 하나이다. 이 주를 한 나라로 볼 경우 경제 규모는 세계 17위권에 해당하게 되며, 이웃 국가인 체코·오스트리아·스위스의 경제 규모를 훨씬 초과하게 된다. BMW(B는 바이에른의 약자임), 아우디, 지멘스, 알리안츠, 인피니온, 아디다스 등 다양한 업종의 세계적인 기업들이 이 주에 본거지를 두고 있다.
지역 특성
텔레비전에서 독일 국가(國歌)보다 바이에른 주가(州歌)를 먼저 연주할 정도로 지역색이 강하다. 중앙정부과 별도로 자체 국경 경비대(Bayerische Grenzpolizei)까지 두고 있다.
바이에른의 독특한 정체성은 복잡한 역사에서 기원한다. 바이에른이 위치한 곳은 도나우강 이남으로, 원래 게르마니아가 아니라 로마 제국의 라이티아 속주와 노리쿰 속주였고 많은 도시들이 로마 제국 국경 방어선의 군단 기지에서 기원했기 때문에 문명화가 일렀으며, 많은 로마인들이 살았고 민족 대이동기에 지배자가 된 바유바리족도 당연히 이 영향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바이에른은 독일의 일원이라기보다는 그냥 신성 로마 제국의 일원이라는 성향이 강했다. 현 바이에른인들은 로망스어를 안 쓰는 게르만족 이주민 바유바리족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역사는 강 건너 북방 미개 야만인 게르만족들과 달리 고대 로마 및 라틴족부터 시작된다고 하는, 이중적인 자부심을 가지는 것이다. 바이에른인들은 빵도 Brot라고 안 하고 라틴어 simila(밀가루)에서 기원한 Semmel이라고 하는 사람들이다.
다른 독일 지방에도 각 지역 언어가 존재하듯이, 바이에른에는 바이에른어(오스트로바이에른어, '바이에리슈' 혹은 '바이리슈')라는 지역 언어가 따로 존재하는데, 다른 지역에서 오는 사람들은 바이에른어를 알아 듣지 못해 별도의 사전을 구매하기도 한다. 바이에른어는 독일의 표준 독일어보다는 오스트리아 독일어에 가깝다. 바이에른 사람들에게 오스트로바이에른어를 "사투리(Dialekt)"라고 하면 기분 나빠하며 "지역 언어(Lokale Sprache)"라고 강변한다.
독일 내에서도 그렇지만 유럽 내에서도 손꼽히게 잘 사는 지역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잘 사는 지역은 아니었고, 2차 세계 대전 후 독일이 분할되면서 동독에 있던 기업들이 주로 바이에른으로 이전했기 때문이다. 바이에른 왕국(공국) 수도인 뮌헨이나 원래 자유도시였던 대도시들을 빼면 대부분 농경지였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독일 내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 중 하나였다. 이처럼 지역 산업의 주축이 농업이었기 때문에 농민들의 생계를 위협하던 당시 집권당인 사민당의 농지 개혁을 반대한 나치당 등의 지지세가 높았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후 폴란드, 체코로 할양된 동쪽 영토에 살고 있던 많은 독일인들과 기업들이 국경 지대에 있고 땅도 넓고 지가도 싼 바이에른으로 대거 이주, 이전해왔고, 소련이 점령하게 된 동독에서도 많이 넘어왔다.
바이에른의 졸른호펜(Solnhofen) 지역은 쥐라기의 동물 화석으로 유명하며 시조새로 유명한 아르카이옵테릭스와 콤프소그나투스의 첫 화석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게다가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화석들은 보존율이 뛰어나서 웬만한 연조직(깃털이나 날개막 등)이 화석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또한 1400만 년 전에 운석이 충돌해 생긴 지금 24km짜리 크레이터, 리스(Ries) 분지도 바이에른 지역에 있으며 그 분지 한가운데에 위치한 중세도시 뇌르틀링겐에 리스 분지 박물관이 소재해 있다. 방문하면 NASA가 기증한 월석도 구경할 수 있다.
스포츠
바이에른주의 프로 축구단에는 FC 바이에른 뮌헨, TSV 1860 뮌헨, 1. FC 뉘른베르크, FC 아우크스부르크, FC 잉골슈타트 04, SpVgg 그로이터 퓌르트 등이 있다. 이 중 바이에른 뮌헨은 분데스리가에서 25번의 우승을 차지하는 등 독일에서 가장 유명하고 성공한 구단으로 꼽히며 뉘른베르크 역시 9번의 우승을 차지한 강팀이기도 하다. 그로이터 퓌르트와 TSV 뮌헨도 각각 3번과 1번의 우승을 차지하였다. 또한 바이에른 뮌헨은 2013년, 2021년 FIFA 클럽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세계 최고의 클럽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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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
서유럽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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