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김정호

위키원
Jinshi2068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1월 19일 (화) 10:05 판 (새 문서: 썸네일|300픽셀|'''김정호''' '''김정호'''<!-- -->(金正浩)는 조선 후기의 지리학자이다. == 개요 == 김정호는 조선 후기에,...)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김정호

김정호(金正浩)는 조선 후기의 지리학자이다.

개요[편집]

김정호는 조선 후기에, 『청구도』, 『동여도』, 『대동여지도』란 3대 지도를 제작한 지리학자이다. 일제강점기부터 '김정호'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1861년(철종 12)에 제작한 목판본의 『대동여지도』 22첩이다. 김정호는 평생 국토정보의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이해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지도의 제작과 지리지의 편찬에 매진한 진정한 학자이자 출판인이다.

김정호의 가계[편집]

김정호(1804년?~1866년)는 조선 후기 대표적 지리학자이며 지도 제작자이다. 자는 백원(伯元)·백원(百源)·백온(伯溫)·백지(伯之)이며, 호는 고산자(古山子)이다. 황해도 토산군(兎山) 출생으로 본관은 청도(淸道)이다.

김정호는 조선 시대 가장 많은 지도를 제작하였고, 가장 많은 지리지를 편찬한 지리학자이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족보가 발달한 조선에서 가계 기록조차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그의 신분이 양반은 아니며 중인일 가능성도 거의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한 신분이 높지 않은 사람들 중 출중한 업적을 남긴 사람을 기록한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에 김정호의 전기가 실렸다는 점, 『지구전후도』, 『수전전도』, 목판본의 『대동여지도』 22첩, 『대동여지전도』에서 확인되듯이 판각에 뛰어난 각수(刻手)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평민의 장인 출신이라 볼 수 있다.

김정호의 업적[편집]

김정호는 국토정보를 효율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지도와 지리지를 동시에 이용해야 한다는 점을 「청구도 범례(靑邱圖凡例)」등 여러 곳에서 언급하였다. 또한 그는 지도의 제작과 지리지의 편찬에서 정확성에도 초점을 맞추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은 이용의 편리에 대한 고민이다. 1834년(순조 34) 이전부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시문(詩文) · 인물 등을 제외한 내용을 큰 글씨로 적고 다른 자료를 참고하여 여백이나 첨지에 깨알 같은 글씨로 교정 · 첨가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동여편고(東輿便攷)』 2책(1책 결본)을 편찬하였다. 1834년(순조 34)에는 『청구도』 2책을 편찬하였고, 이어 1840년(헌종 6)대 후반까지 3차에 걸쳐 개정판 『청구도』를 제작하였다. 기본 정보의 차원에서 『청구도』는 『해동여지도』의 내용을 그대로 따랐지만 이용의 편리라는 측면에서 혁신적인 변화를 가했다.

김정호는 1834년(순조 34) 경부터 영남대학교 도서관 소장 『동여도지』의 편찬을 시작하여 1844년(헌종 10)경에 완성하며, 이후 지속적인 교정과 첨가를 하다가 1861년(철종 12)에 서문을 작성하여 수록한다. 이어 1850년(철종 1) 전후로 대축척 고을지도와 지지가 결합된 지리지인 대영도서관 소장 『동여도지』 3책(경기 · 강원 · 황해)을 편찬하기 시작하였지만 완성을 보지 못하고 포기한다. 이때부터 김정호는 지도와 지지가 결합된 『청구도』의 형식을 포기하고 순수하게 지도적 속성이 강한 지도첩의 제작을 시작하였다. 표지에는 『동여(東輿)』라고 기록되어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필사본의 『대동여지도』 14첩이 그러한 노력의 첫 번째 결실이다. 이 지도첩에서 김정호는 『청구도』에 첨가된 통계와 지지 정보를 대폭 삭제하고 기호의 사용을 정교화 하였다.

김정호는 보급용의 중형 낱장본 지도로 1834년(순조 34)에 최한기의 부탁을 받고 판각한 서양식 세계지도인 『지구전후도(地球前後圖)』, 1840년(헌종 6)대에는 한양 지도인 목판본의 『수선전도(首善全圖)』, 전통식과 서양식이 결합된 세계지도인 『여지전도(輿地全圖)』, 1860년(철종 11)대에는 목판본의 『대동여지도』 22첩이 너무 커서 한눈에 조선 전체를 보기 어려운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제작한 목판본의 『대동여지전도(大東輿地全圖)』를 제작하였다.

1853년(철종 4)에서 1856년(철종 7) 사이에 대축척 고을지도를 생략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여도비지(輿圖備志)』 20책을 최성환(崔瑆煥)과 함께 편찬하였고, 비슷한 시기에 기본 정보가 『청구도』와 상당히 달라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필사본의 『대동여지도』 18첩을 제작하였다. 이어 1856년(철종 7)에서 1859년(철종 10) 사이에는 기본 내용을 완전히 개정한 필사본의 『동여도』 23첩을, 1861년(철종 12)에 목판본의 『대동여지도』 22첩을 제작하였다. 또한 1864년(고종 1)에 목판본의 『대동여지도』 22첩을 교정하여 재간하였으며, 1861년(철종 12)부터 1866년(고종 3)경까지 『대동지지』 32권 15책을 편찬하다 미완으로 남기고 사망하였다.

김정호에 대한 추모[편집]

일제강점기인 1925년 10월 8일과 9일 2번에 걸친 『동아일보』의 「고산자를 회(懷)함」이란 글에서 김정호와 『대동여지도』를 통해 민족적 우수성을 되짚어보려고 하였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전국답사설 · 백두산등정설 · 판목몰수설이 나타났다.

김정호가 국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신이 직접 측량하여 『대동여지도』를 제작했다는 점을 부각시켜 1800년(순조 즉위) 초반에 에도막부[江戶幕府]의 도움을 받아 전국을 답사하면서 일본을 측량하여 지도를 제작한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내세우려 하였다. 근대식 측량지도 못지않은 정확한 지도가 조선에도 『대동여지도』란 이름으로 제작되었음을 부각시켜 민족적 우수함을 설명함으로써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 백성에게 자긍심을 불어넣어 주려고 하였다. 셋째, 관에 의한 판목몰수설을 통해 조선의 멸망을 백성 전체의 문제가 아니라 집권층의 무능력 탓으로 돌리려 하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에 김정호의 전기가 처음으로 수록되었는데, 전국답사설 · 백두산등정설 · 판목몰수설은 『동아일보』의 「고산자를 회함」에서 그대로 따왔다.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의 우수함을 부각시키려 비교의 대상으로 삼았던 이노 다다타카와 그가 제작한 지도에 대한 이야기를 생략하였다. 김정호가 어린 시절에 보았던 조선의 지도가 정확성에서 엉터리라는 이야기를 삽입시킴으로써 김정호 이전 조선의 지도 제작 능력을 폄하시켰다. 흥선대원군이란 구체적인 인물을 등장시켜 개항기 조선 정부의 무능력을 부각시킴으로써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편입된 것을 정당화시키려 하였다. 조선 정부의 무능력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김정호 부녀의 옥사설을 추가하였다.

판목소각설은 『동아일보』의 기사나 『조선어독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로, 후대의 다른 자료에서 첨가된 것이다. 이와 같은 김정호의 전기는 1980년대까지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1990년대부터 전국답사설 · 백두산등정설 · 옥사설 · 판목소각설이 모두 잘못된 이야기라는 새로운 연구가 나타나 점점 교정되기 시작했다.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에 관한 네 가지 설은 첫째, 전통시대에 필요한 거리 정보의 종류와 그것에 기초를 둔 지도의 제작 과정을 모르는 비전문가가 만들었기 때문에, 둘째, 김정호 이전에도 상당한 수준에 있었던 조선의 지도와 지리지 제작의 변천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셋째, 김정호가 국토정보의 체계적 이해를 위해 평생에 걸쳐 지속적으로 지도와 지리지를 제작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넷째, 김정호가 지도의 정확성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맞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이 이용의 편리였다는 점을 몰랐기 때문에 만들어진 잘못된 주장이다.[1]

김정호의 사상[편집]

김정호는 자신에 대한 글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글은 《지도유설》과 《동여도지》 서문인데, 둘 다 김정호가 쓴 글이다. 다만 《지도유설》은 김정호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생각을 듣고 정리하여 쓴 글이며, 《동여도지》만 김정호의 사상을 나타낸 글이다.

김정호는 지도(地圖)와 지지(地誌)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라고 인식하였다. 지도로써 천하의 형세를 살필 수 있고 지지로써 역대의 제도와 문물을 헤아려 볼 수 있으므로 지도와 지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위국(爲國) 곧 치국(治國)의 대경(大經)이라고 지도와 지지의 관계를 강조하였다. 지도와 지지가 위와 같이 중요함에도 단기(檀箕; 단군과 기자) 이래로 지도가 없고 지지는 《삼국사기》에 이르러 비로소 만들어졌기 때문에 지지의 첫머리에 신라 이전의 사항을 두어 알게 하였다.

조선에 들어서는 초기에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어 비로소 도적(圖籍)이 환연해졌지만, 김정호가 사는 때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편찬된 지 3백여 년이 지나 지리 정보에 차이가 많아졌으므로 이를 바로잡으려고 《동여도지》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편목이나 구성이 《동국여지승람》의 구성과 비슷하다. 김정호는 또한 지도와 지지의 제작이 치국의 대경이라는 자신의 주장대로 치국경제에 유용하도록 《동여도지》 등을 제작할 때 문교무비(文敎武備)에 해당하는 관방과 역참, 학교와 서원 등 42개 편목을 자세히 설명하거나 표기하였다.

수선전도 목판[편집]

수선전도 목판은 조선 후기에 김정호(金正浩)가 그려서 목각(木刻)한 서울의 지도 목판. 1986년 3월 14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1986년 3월 14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크기는 가로 67.5cm, 세로 82.5cm이고, 재료는 나무이다. 제작연대 1824∼1834년이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서울 북쪽의 도봉산에서 남쪽의 한강에 이르는 지역을 종로거리가 동·서로 가로지르는 것으로 그렸으며, 20년대 초의 주요도로와 시설, 궁전·종묘(宗廟)·사직(社稷)·문묘(文廟)·학교·교량·산천성곽·누정(樓亭)·봉수(烽燧)·역원(驛院)·명승(名勝) 등에서 부(部)·방(坊)·동(洞)에 이르기까지 중요 지명 460여 개의 지명을 표기하였다. 조선 시대에 제작된 많은 목판 지도 중에서도 이 목판 지도는 정확성과 정밀함 및 규모의 크기에서 뛰어날 뿐만 아니라, 제작 솜씨가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대동지지[편집]

대동지지는 조선 후기 학자 김정호(金正浩)가 쓴 한국 지리서. 필사본. 30권 15책. 고려대학도서관·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고려대학 소장본은 저자의 친필로 추정된다. 1861년(철종 12) 편찬에 착수하여 1866년까지 보완된 것으로 추정된다. 저자의 지도 제작은 지리서 저술과 짝을 이루고 있었으며, 이 책은 《청구도(靑邱圖)》, 《동여도(東輿圖)》, 《대동여지도》로 진전시켜 온 지도 제작과 《동여도지(東輿圖志)》, 《여도비지(輿圖備志)》라는 지리서 제작의 성과를 바탕으로 저술되었다. 또한 조선 지지 편찬의 전통과 실학적 지리학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하고 한국 지리학의 새로운 발전 방향을 제시한 책이라고 평가된다.

청구도[편집]

청구도는 김정호(金正浩)가 만든 조선 시대의 전국 지도책. 2008년 12월 22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2008년 12월 22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조선 후기의 지리학자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1834년(순조 34)에 만든 조선시대의 한반도 지도로, <청구선표도(靑邱線表圖)>라고도 한다. 채색 필사본, 2책. 남북 100리, 동서 70리의 방안(方眼)을 사용하여 만든 대축척의 방안지도이다.

최한기의 서문과 김정호가 작성한 범례에 이어 <본조팔도주현도총목(本朝八道州縣圖總目)>, <도성전도(都城全圖)>, <제주현도(諸州縣圖)>, <동방제국도(東方諸國圖)>, <사군삼한도>(四郡三韓圖>, <삼국전도(三國前圖)>, <신라주현총도(新羅州縣總圖)>, <고려오도양계주현총도(高麗五道兩界州縣總圖)>, <본조팔도성경합도(本朝八道盛京合圖)>, <군국총목표(軍國總目表)> 등이 실려 있다. 각 지도에는 읍치·산천·군현경계·도로·창고·서원·향교·누정·역·고개·교량·봉수·진 등이 그려져 있고, 여백에 군현의 호구, 전결, 한성까지의 거리, 고적, 전투기록 등 중요 역사적 사건을 기록했다. 이로써 청구도는 김정호가 기존 지도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제작한 독창적인 지도로, 기존 전국지도에 중요 역사지리 정보를 상세하게 수록하여 지리지 역할을 가미한 독특한 지도가 되었다.

동여도[편집]

동여도는 철종 때 조선 후기의 지리학자 김정호(金正浩)가 제작한 한국 색채 지도. 2002년 12월 7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필사본의 전국 채색지도로 23첩이다. 김정호의 호는 고산자(古山子)이며, 주요 작품으로는 《청구도(靑邱圖)》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대동지지(大東地志)》 등이 있다.

이 지도는 필사본의 전국 채색지도로 분첩절첩식으로 되어 있는데, 목차 1첩과 지도 22첩 등 모두 23첩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판각하기 위해 먼저 만든 지도이다. 동여도는 22폭으로 나누어 그린 높이 7m 정도의 대형지도로 우리나라 고지도 가운데서 가장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정밀한 전국지도이다. 지도에는 주현(州縣) 간의 도로와 산천 표시를 하고 주현, 파수(把守), 진보(鎭堡), 역도(驛道), 영진(營鎭), 목소(牧所), 방면(坊面), 봉수(烽燧), 능침(陵寢), 성(城), 창고, 도로를 표시하였다. 동여도에는 12개의 지도표(地圖標)가 사용되었으며 육로와 해로 등이 그려져 있고 육로에는 10리 간격으로 점을 찍어 거리를 쉽게 측정할 수 있게 하였다. 《대동여지도》의 필사본 가운데 가장 정확하게 그려진 지도첩으로 주현, 도로, 우역, 봉수, 산성, 하천, 산맥 등의 지리 정보가 실려 있는 세밀한 지도이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김정호 (金正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이 김정호 문서는 역사인물에 관한 글로서 검토가 필요합니다. 위키 문서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편집할 수 있습니다. [편집]을 눌러 문서 내용을 검토·수정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