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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타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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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룰리우마 1세와 무르실리 2세 당시의 히타이트 최대 영토
하투사의 사자 문, 터키의 보아즈쿄이

히타이트(하타이트어:하투샤) 또는 헷은 고대 근동의 청동기 시대(3300~1200 BC) 중 기원전 18세기경에 아나톨리아 북중부의 하투샤를 중심으로 형성된 왕국으로, 히타이트어는 인도-유럽어족에 속한다고 추측된다. 히타이트 제국은 기원전 14세기경에 아나톨리아의 대부분, 시리아 북서부(레반트의 북부), 남쪽으로는 리타니강의 하구(지금의 레바논)까지, 동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 북부까지 장악하였다. 히타이트의 군대는 전쟁시에 전차를 잘 사용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기원전 1180년 멸망하고 이후 히타이트 제국은 분열되어 여러 독립된 도시 국가로 나뉘었으며, 기원전 8세기까지 존속하였다. 이 도시 국가들을 네오히타이트(Neo-Hittite) 도시 국가라고 한다.

"히타이트"라는 낱말은 구약성경의 "헷 사람들(sons of Heth, 헷 족속)"에서 유래하였다. 19세기에 아나톨리아에서 히타이트를 발굴한 고고학자들은 처음에 이들을 성경에 등장하는 히타이트와 동일시하였다. 현재는 성경에 등장하는 히타이트인이 하투샤를 수도로 한 히타이트 제국(기원전 18세기경 ~ 기원전 1180년경)의 히타이트인을 가리키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그 이후의 신히타이트 도시 국가들(기원전 1180년경 ~ 기원전 8세기경)의 히타이트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

기원전 18세기경, 쿠샤라 왕 아나타스가 카파도키아 고원을 정복하였다. 히타이트 고왕국(古王國)의 조상은 라발나스인데, 그 아들 하투실리스는 하투사스를 수도로 정했다. 무르실리스 1세(Mur-silis Ⅰ, 기원전 1624 ~ 기원전 1594?)는 북시리아를 정복, 바빌론을 공략했다. 신왕국의 시조는 투드하리야스 2세로서 수필룰리우마스 1세(Suppiluliumas Ⅰ, 기원전 1380 ~ 기원전 1340?) 시대에 히타이트의 판도는 가장 커졌다. 히타이트인은 소아시아의 지배를 강화하여 미탄니를 지배하고 북시리아를 세력을 통합하였으며 이집트 다음가는 대국이 되었다. 무와탈리스는 이집트의 왕 람세스 2세의 군대와 카데시에서 싸워서 격퇴했다(기원전 1286). 하투실리스 2세는 이집트와 화약(和約)을 맺어(기원전 1269) 오리엔트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동편에서는 아시리아에게 압박되고, 소아시아 서부에서는 프뤼기아가 대두하여, 그리스계 해상 민족의 침입으로 기원전 1180년 히타이트는 멸망했다.

히타이트인

히타이트인은 기원전 3000년 소아시아에서 기원하였으며 아나톨리아 고원의 지배자가 된 인도유럽어족이다. 처음 쿠샤라를 도읍으로 삼았으나, 뒤에 하투사스를 수도로 정했다. 하투사스는 20세기 초에 독일인 빙클러(H. Winckler)에 의해서 발굴되어, 대신전이나 성채(城砦)가 발견되었다. 왕실 기록문서고에서 히타이트어나 아카드어로 쓰인 점토판 문서 약 2만 매 이상이 출토되었다.

말과 전차

후르리인(Hurrians)에게 말 기르는 법을 습득한 히타이트인은, 말에 끌리게 한 6개의 바퀴살을 가진 전차를 이용하여, 미탄니군이나 이집트군과 싸웠다. 전차에는 마부와 활쏘는 병사가 탔다. 전쟁의 주된 목적은 포로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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