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일순
틀:여러 문제 틀:성직자 정보 강일순(姜一淳, 1871년 11월 1일(음력 9월 19일) ~ 1909년 8월 9일(음력 6월 24일))은 증산교의 교조이다. 본관은 진주(晉州)로 흔히 알려진 증산(甑山)은 그의 호이며, 자는 사옥(士玉)이다. 증산계열 종단에서는 그를 상제(上帝, 증산상제, 옥황상제, 구천상제 등), (증산)천사(天師), 선생님 등으로 부른다. 증산도에서는 강증산 상제라고 부르고 대순진리회에서는 모든 만물을 전기와 파동, 음과 양의 이기로 생장 양육 지배자양하시는 가장높은 차원의 절대자란 의미의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 줄여서 구천상제님으로 부르고 있으며, 강증산을 직접 추종했던 제자들은 모두 강증산을 천상 도솔천에서 강세한 옥황상제라고 한다. 증산교에서는 천사(天師)라고 호칭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압력에 의해 자유로운 기술을 할 수 없었던 배경때문에 이상호가 대순전경에 천사(天師)로 기록했다는 설도 있다.
목차
생애
출생
그의 아버지는 강문회, 양조부(양할아버지)는 강두중(아버지 강문회 백부이자 양부), 친조부(친할아버지)는 강한중(아버지 강문회 생부)이다. 아버지 강문회는 1846년생으로, 원래 강한중(姜漢重)의 큰 아들이었으나 그 백부이자 집안의 장남이었던 강두중(姜斗重)이 자식이 없었으므로 양자로 들어갔다. 어머니 권양덕은 1850년생으로, 안동이 본관이다. 천성이 선하고 남의 흉을 보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전한다.
기록에 따르면 1870년에 권양덕이 그 본가에 근친할 때에 강문회가 큰 불덩이가 떨어지는 꿈을 꾸었으므로, 이를 태몽으로 알고 처가로 가 잉태하였다고 한다. 이후 권양덕 또한 같은 태몽을 꾸었고, 열석 달 뒤인 1871년 11월 1일에 전라북도 고부군(현재 정읍시)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증산이 강(姜)씨 성으로 내려온 이유에 대해서 "이 세상에 성으로는 풍(風)성이 먼저 있었으나 전하여 오지 못하고 다만 풍채(風采)ㆍ풍신(風身)ㆍ풍골(風骨)등으로 몸의 생김새의 칭호만으로 남아올 뿐이오. 그 다음은 강(姜)성이 나왔으니 곧 성의 원시가 되느니라. 그러므로 개벽시대를 당하여 원시반본이 되므로 강(姜)성이 일을 맡게 되었나니라"고 직접 말하였다.
어린 시절
어려서부터 비범한 일화가 많은데, 안성수가 수백냥의 빚이 있어 홀로 찾아가 비범한 시 한편을 지어 채무자가 빚을 탐강하게 하거나 어머니가 짜신 도둑맞은 모시베를 30킬로미터 길을 걸어가 찾아오거나 술주정꾼이 범하려 하면 별안간 돌절구가 날아왔다거나 혼자 용마루를 던져 지붕 위로 올렸다거나 다른 아이에게 장원을 주려는 훈장의 마음을 꿰뚫고 문체와 서체를 분간하지 못하게 하였다는 등의 비범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중에서도 부친이 처음으로 어린 증산에게 천자문을 가르치고자 옆 마을의 훈장을 들이자 하늘 천(天)과 땅 지(地)만을 한 번 읽고는 공부를 하지 않았는데 훈장이 이유를 묻자 “하늘 천 자에 하늘 이치를 알았고, 땅 지 자에 땅 이치를 알았으면 되었지 더 배울 것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답했다고 한다거나 일곱 살 때에는 “멀리 한 발 내딛으려 하니 땅이 꺼질까 두렵고, 크게 소리치려 하니 하늘이 놀랄까 두렵구나.”(遠步恐地坼 大呼恐天驚)라는 시를 지었다고 한 이야기는 생이지지(生而知之)한 비범한 신인(神人)임을 알 수있는 일화이다.
이후 열다섯살 무렵부터 안으로는 조선말의 부정부패와 동학운동, 밖으로는 외세의 침입으로 혼란했던 민심과 속정을 살피고 어루만지고자 유랑을 하였다고 한다.
혼인과 유랑
3년량의 유랑을 마치고 돌아와 스스로의 호를 시루 증 뫼산 증산(甑山)이라 하고 스물한 살이 되는 1891년에 하동 정씨였던 정치순과 여느 사람들과 다름없이 혼인하게 된다. 그러나 정치순은 집안을 돌보지 않았던 그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후에도 딸 하나 이외에는 깊은 교류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대원사에서의 공부때 정치순으로 하여금 의복을 올리라했을때 정치순의 불만을 미리 아시고 깨닫게 하니 그 후로는 불평없이 아내의 도리를 잘하였다고 한다.
전봉준(전명숙) 이 일찍부터 그와 교분이 있었으므로, 1894년에 찾아와 거사를 하는데 도움을 청하였으나 강증산은 “때가 아니니 나서지 말라.”며 “성사도 안 되고 애매한 백성만 많이 죽을 것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전라도 일대를 유랑하며 관군에 쫓기던 동학군 몇 명을 구하기도 하고, 동학군에 가담한 사람에게 들지 말라고 권유하기도 하였다. 스물일곱 살 되는 1897년에 다시 전국 유랑을 시작하여 3년간의 유랑을 끝낸 1900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기행과 이적
김제 동곡에 있을때 주막집 주인 김사명이 아들 김성옥이 급한 병으로 죽어서 강증산을 찾아오니 허공을 향해 두어마디를 말한 후 웃으며 침을 죽은 아이의 입으로 넣으니 살아나 집으로 돌아갔다. 1901년 모악산 대원사의 방 한간에 창문을 봉하고 49일을 불음불식 공부한 후 그 당시 대원사 주지 금곡(錦谷)이 자기의 일을 얘기해달라하니 "그대의 전생은 월광대사인바 그 후신으로서 대원사에 오게 되었도다. 그대가 할 일은 이 절을 중수하는 것이고 내가 그대의 수명을 연장시켜 주리니 90세가 넘어 입적하리라." 하였는데 실제 그렇게 되었다. "공부하는 자들이 방위가 바뀐다고 말하나 내가 천지를 돌려놓았음을 어찌 알리요"라 하였다. 김제 반월리 김준희의 집에 있을때 그동네 호구를 정확히 말하였고 사흘안에 한 사람이 죽을것을 말하였는데 그대로 되었다. 어디를 갈때 겨울에 땅이 질면 얼어붙게하고 눈이 쌓이면 녹게 하였는데 일정한 방법이 없이 수시로 행하였다. 동곡에 약방을 차리고 아침에 올라오는 해를 보면서 "이제 난국에 제하여 태양을 멈추는 권능을 갖지 못하고 어찌 세태를 안정시킬 뜻을 품으랴" 하고 담배를 피우니 산머리에 해가 걸리어 담배 세대를 피운 후에야 해가 솟아올라오는 것을 제자들이 목격하였다. 풍운우로상설뇌전(風雲雨露霜雪雷電)을 수시수의로 행하였는데 일정한 방법이 없음을 많은 제자들이 자주 목격하였다. 원평에서 우박이 올것이니 장독을 새끼줄로 잘 얽어놓아라 하였는데 최명옥이라는 사람만 따랐더니 두어 시간 후 우박이 내려 여러집의 장독이 모두 깨지고 최명옥의 장독만 멀쩡하였다. 박공우란 제자가 잠자리에 빛나는 사람 수십명이 증산이 머무는 집앞에 배례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아침에 말하지 않아도 아시고 "그들이 천상벽악사자시다"라 말하였다. "나는 하늘도 뜯어고치고 땅도 뜯어고치고 사람에게도 신명으로 하여금 가슴 속에 드나들게하여 다 고쳐 쓰리라."고 말하였다. 전봉준 장군이 거사할때에 천인을 귀하게 만들어주고 상놈을 양반으로 만들어주려는 마음을 두고 일을 했기때문에 죽어서 조선명부가 되었다고 말하였다. 1907년 겨울 고부경무청에 의병의 혐의로 옥고를 치르기전에 미리 백의군왕 백의장군의 도수를 본다하여서 그런 일이 있음을 미리 말하였고 앞으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같은 일을 당하더라도 감옥에 가지않도록 미리 대속한다고 말하였다. 옥에 있을때 고문을 당하여 다 죽어가는 제자를 살려내었다. 박공우란 제자는 증산을 따르기전 동학을 믿었는데 밥먹을 때하는 동학도들의 식고(食告)와는 달리 "하느님 뵈어지소서"라는 발원을 하였는데 증산은 "너의 때마다하는 식고를 나에게 돌리라"고 하여 박공우가 크게 놀랐고 또 번개를 꾸짖기도 하고 부르기도 하는 모습을 보며 증산을 따르기 시작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천지공사
천지공사의 시작
1901년(道紀 31년, 辛丑年)에는 대원사에 들어가서 49일간 불음불식의 공부 끝에 "나의 공사는 옛날에도 지금도 없으며 남의 것을 계승함도 아니요. 운수에 있는 일도 아니요. 오직 내가 지어 만드는 것이니라. 나는 삼계의 대권을 주재하여 선천의 도수를 뜯어고치고 후천의 무궁한 선운을 열어 낙원을 세우리라. 나를 믿고 힘을 다하라."고 천지공사를 맡아보신다고 선언하였다. 이후 김형렬의 집에 거처를 정하고 천지공사를 시작한다. 천지공사(天地公事)란 천지인 삼계(三界)를 다뜯어 고친다는 말로 지금까지의 세상이 상극(相剋)으로 인해 원과 한이 쌓이고 그것이 또 인과(因果)로 인해 돌아오므로 삼계가 진멸지경에 빠졌기에 신의 세계, 신명계, 인간계를 상생(相生)의 도수로 바로 잡는다는 뜻이며 그러한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의미이므로 세상은 이러하니 이렇게 살아라라고 하신 성인(聖人)의 차원을 넘어서는 이야기이다. 이후 김형렬의 안동 김씨 친족중 김자현, 김경학, 김갑칠이 따르게 된후 9년동안의 천지공사를 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많은 기행이적들이 있었으며, 천지공사의 내용에는 우리나라의 국운(國運)에서 부터 음양공사, 매화(埋火)공사, 해원(解寃)공사, 신명공사 등등 세상이 어떻게 변화해갈지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데 일제의 통치나 6.25전쟁, 남녀, 적서, 신분의 차별이 사라짐, 88서울올림픽 등등 기타 포괄적인 내용이 대다수 현실화 되었다.
천지공사 배경
천지공사의 배경에 대해 강증산은 직접 다수에 걸쳐 밝힌 바 있다. 그를 따른 김형렬에게 "서양인 이마두가 동양에 와서 지상 천국을 세우려 하였으되 오랫동안 뿌리를 박은 유교의 폐습으로 쉽사리 개혁할 수 없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도다. 다만 천상과 지하의 경계를 개방하여 제각기의 지역을 굳게 지켜 서로 넘나들지 못하던 신명을 서로 왕래케 하고 그가 사후에 동양의 문명신(文明神)을 거느리고 서양에 가서 문운(文運)을 열었느니라. 이로부터 지하신은 천상의 모든 묘법을 본받아 인세에 그것을 베풀었노라. 서양의 모든 문물은 천국의 모형을 본뜬 것이라. 그 문명은 물질에 치우쳐서 도리어 인류의 교만을 조장하고 마침내 천리를 흔들고 자연을 정복하려는 데서 모든 죄악을 끊임없이 저질러 신도의 권위를 떨어뜨렸으므로 천도와 인사의 상도가 어겨지고 삼계가 혼란하여 도의 근원이 끊어지게 되니 원시의 모든 신성과 불과 보살이 회집하여 인류와 신명계의 이 겁액을 구천에 하소연하므로 내가 서양(西洋)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 천하를 대순(大巡)하다가 이 동토(東土)에 그쳐 모악산 금산사(母岳山金山寺) 삼층전(三層殿) 미륵금불(彌勒金佛)에 이르러 三十년을 지내다가 최 제우(崔濟愚)에게 제세대도(濟世大道)를 계시하였으되 제우가 능히 유교의 전헌을 넘어 대도의 참뜻을 밝히지 못하므로 갑자(甲子)년에 드디어 천명과 신교(神敎)를 거두고 신미(辛未)년에 강세하였노라."고 직접 이야기 하였다. 쉬운 말로 지금까지의 세상이 경쟁, 시기, 질투, 투쟁 등 상극의 속성에 지배되어서 원과 한이 세상에 쌓이다보니 신과 인간이 서로 통하지 못하여 세상에 전쟁, 기근, 괴질을 비롯하여 살인, 사고, 강도, 질병 등 끊임없는 재난과 화난이 그치질않아 그 속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고 선천의 종교와 법이 있었지만은 세상을 구하지 못하고 도리어 생명을 죽이고 일부의 이익만을 대변하다보니 세상을 살펴주고 있는 천지신명의 입장에서 어찌할 수 없이 간청을 하여 세상에 인간의 몸으로 직접 내려왔다고 이야기하였다. 또 판 안에 있는 법을 써서 일하면 세상 사람의 이목의 저해가 있을 것이라 판 밖에서 일한다고 하여서 선천의 유도나 불도 선도의 법이 아닌 해원상생의 법으로 일을 한다고 하였다.
1907년 12월, 증산께서는 “전북(全北) 칠읍(七邑)에 흉년을 없애리라.” 하시며 백지에 저수지와 물도랑의 도면을 그려 불사르시면서 “이곳이 운산(雲山)이라. 운암강(雲岩江) 물은 김제 만경(金堤萬頃) 들판으로 돌려도 하류에서는 원망이 없을 것이니 이 물줄기는 대한불갈(大旱不渴)이라. 능히 하늘을 겨루리라. 강 태공(姜太公)은 제(齊)나라 한 고을에 흉년을 없앴다고 하나 나는 전북(全北) 칠읍(七邑)에 흉년을 없애리라.” 하시면서 섬진강 상류지역의 운암강 물길을 동진강 쪽으로 흐르도록 공사를 행하셨다. 그리고 이 공사는 그 후 땅 위에 서서히 실현되었다. 1925년에서 1927년 사이 운암강에는 거대한 콘크리트 댐인 운암제가 만들어졌다. 이 댐에 담겨 있던 물이 터널을 통해 동진강으로 흘러 주변의 농경지를 옥토로 변모시켰다. 그 후 1965년에는 운암제보다 7배 더 많은 물을 담을 수 있는 섬진강댐이 운암제를 대신하면서, 동진강 일대뿐만 아니라 이 물의 일부가 부안 일대를 관통하여 계화도간척지까지 이어져서 그 주변을 물이 마르지 않는 땅으로 만들어 놓았다. 또한 1990년대 이후 동북아시아의 경제 허브로 개발되고 있는 군산에서 부안을 연결하는 새만금간척지 역시 운암강의 물이 동진강으로 연결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1909년 화천(化天)하시는 해의 봄에 대흥리에 계셨는데 안 내성으로 하여금 곤봉으로 마룻장을 치라 하시며 가라사대 「이제 병고에 빠진 인류를 건지려면 일등박문이 필요하고 이등박문이 불필요하게 되었느니라」 하셨는데 그 당시는 그말의 의미를 모르다가 그 뒤 이등박문(伊藤博文)이 할빈 역에서 안 중근(安重根) 의사(義士)에게 암살되고 나서 종도들이 그 이유를 깨달았다.
실현될 천지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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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증산의 제자들
강증산이 천지공사를 봄으로부터 김형렬의 집, 김제 구릿골에 주요 성도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강증산의 조화권능을 체험했다고 전한다. 강증산의 주요 제자로는 수석제자인 미륵불교 김형렬을 위시하여, 일제시대 최대의 교단으로 조선총독부 기록 650만의 신도를 거느린 [[차경석]]의 보천교와 박공우, 문공신, 안내성, 이치복, 백복남, 김호연, 신경원, 신경수, 이도삼, 안필성, 백남신, 신원일, 김광찬 등이 있다.
사망
1909년 음력 6월 24일(양력 8월 9일) 사망했다.
교단
강증산의 교단
사후 강증산을 직접 수종들었던 제자들이 보천교, 미륵불교, 증산대도교, 제화교, 태을교, 고부파, 도리원파, 김병선교단으로 9개 교파로 갈라졌다. 보천교에서 만주 독립군에게 군자금 조달사건이 발생하자 일본의 민족종교 탄압정책으로 인해 강증산의 교단과 제자들은 지속적인 탄압을 받게 되었다. 1935년 고수부가 선화한 후 1936년 보천교 교주 차경석이 이어서 사망하였다. 차경석교주가 사망하자 일본은 본격적으로 보천교를 탄압하여 십일전 건물을 해체하여 일부는 지금의 조계사 건물을 짓는데 사용하였고, 일부는 전주역사를 짓는데 사용하였다. 그후 남은 잔해는 방치되었다. 보천교 십일전 건물의 터를 비롯한 강증산의 교단 유적들은 전라북도 정읍의 향토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는 것이 많이 있다.
강증산과 고수부의 교단
강증산은 고수부에게 종통대권을 넘겨주는 공사를 보았다고 한다. 고수부는 1911년 강증산의 성령을 받은 이후 도통을 하였다고 한다. 강증산의 어천이후 흩어졌던 강증산의 제자들이 고수부를 중심으로 다시 모여 최초의 교단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후 고수부와 강증산을 직접 모셨던 제자들이 만든 교단은 1920년대까지 급격히 성장하였고 이후 이 교단에서 차경석과 다른 일본의 탄압으로 인해 명맥이 끊어지고 제자들이 고문을 받기도 했다. 1945년 일본 패망이후 강증산을 옥황상제이자 미륵불로 믿는 신도들 일부가 모여 다시 교단이 보천교 부흥운동이 형성되었으나 약 1만명이 모이는 것으로 그쳤고 다시 교단이 형성되지는 못하였다고 한다. 1945년 안운산 태상종도사는 강제해산된 보천교에서 60방주중 중심 인물을 역임한 몇명과 같이 강증산과 고수부를 믿는 대법사 증산교를 설립하였다. 대법사 증산교에서는 강증산을 미륵불이자 옥황상제로 고수부를 강증산과 같이 이 땅에 도솔천에서 강세한 성인이자 최초의 여성 부처님으로 믿고 있다. 강증산의 친족들중 진주 강씨 문중의 상당수의 사람들도 교단이 형성되자 강증산과 동일한 기행이적을 행하는 고수부의 교단에 모였다고 한다.
강증산의 친인척이 세운 교단
강증산의 친인척중 정씨부인, 여동생인 선돌부인, 딸인 강이순을 중심으로 형성된 교단이다. 강증산은 당시 1907년 동아일보 신문에도 게제된 바 있어 당시 조선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고 한다. 강증산의 성령을 받은 고수부와 제자들이 교단을 형성되자, 이에 자극받아 강증산의 직전 제자는 아니었으나, 강증산의 가르침을 받드는 교단이 형성되었다. 정통성으로는 강증산의 첫째부인인 정씨부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교단, 여동생인 선돌부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교단, 딸인 강순임을 중심으로 형성된 교단들이다. 대표적으로 순천교, 무극도, 태극도, 삼덕교, 보화교, 용화사, 미륵불교, 증산법종교, 청도대향원, 미륵종, 증산진법회가 있다. 현재 가장 큰 교단은 무극도에서 나온 대순진리회가 대표적 교단이다.
강증산에 대한 경전
초기경전
일본 강점기시기에 발간된 경전들이다. 식민지 지배하에 민족종교 탄압정책으로 언론과 종교활동에 자유가 제한되어 있었기에 경전간행이 비교적 자유롭지가 못했다고 한다. 성격상 한민족이 인류를 구원하는 민족이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지배와 정면으로 배치되었다. 동시에 민족종교는 만주 무장 독립투쟁의 군자금의 조달처이기도 하였다. 이런 이유로 일제 강점기 민족종교 탄압과 집회의 자유가 박탈되었고, 분열을 조장하기도 하였다. 이런 배경속에서 발간된 최초의 경전이 증산천사공사이이다. 1922년 수석성도인 김형렬의 증언을 받아서 미륵불교에서는 최초의 경전을 간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미륵불교의 경전으로 간행되기 전에 김형렬의 증언을 받아 자료를 수집한 이상호가 미륵불교를 탈교하였다고 한다. 그후 이상호는 증산천사공사기를 개인의 이름으로 발간하였다. 이상호는 이후 대순전경을 간행하였고 이를 토대로 동화교를 창립한 후 보천교 차경석교주에게 있던 고수부를 동화교로 모셔오게 된다.
1945년 일제강점기 이후 간행된 서적들이다. 경전간행이 자유롭지 못한 부분이 어느정도 해결되었으나 정작 교단이 해체된 상태여서 강증산의 직전제자들이 만든 교단들을 중심으로 강증산의 행적이 전수 되었다고 한다. 각 교단이 서로 경쟁관계 였기 때문에 이러한 중요한 내용들이 타 교단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알려주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 었다고 한다.
통합경전
강증산의 제자들이 거의 대부분 사망한 이후인 1970년대에 증언과 기록을 수집하고 대조하기 시작한 경전이다. 1970년대 이전에 간행된 초기경전들은 같은 구절에 대해 교단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거나, 시기와 참여자에 대한 내용이 일치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특정인 한명의 시각에서 보고들은 내용을 기술하였기 때문에 빠진 내용이 많고 전체 내용을 이해하기 불가능한 점이 많았다고 한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서로 다른 증언자끼리 수차례에 걸친 교차검증과 현장 답사를 거친 경전간행에 착수하게 되었다고 한다. 통합경전은 강증산의 제자들 중 강증산을 가장 오랫동안 따라다녔던 김호연의 증언이 수집되어 추가되었다. 초기경전 전체를 합친 분량보다 더 많은 내용이라고 한다. 수석제자인 김형렬의 증언에만 의존하던 내용에서 벗어나 전체적이고 종합적인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고수부에 대한 경전은 고수부의 직전제자인 고찬홍과 고민환등에 의해 자필로 제작되어 영인된 일부 경전이 있었으나 역시 답사를 거치지 않은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이에 증산도의 안경전종도사가 통합경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30년 동안 현장답사와 확인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강증산을 직접 따르던 제자중 마지막 제자에 속하는 김호연을 만나 9년동안의 전반적인 천지공사과정을 증언을 받아 현재의 증산도 도전 개정판에 추가하였다고 한다.
각 교단에서 초기경전을 사용하는 곳은 있으나 통합적인 답사와 확인작업을 거친 경전은 최초로 발간된 경전이 증산도 도전이다.
참고 자료
- 증산도 도전편찬위원회, 《증산도 도전》, 2003년.
- 전경
- 선도진경
- 이상호, 《대순전경》, 1997년.
- 보천교 연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