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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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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덕

서경덕(徐敬德)은 조선 중기 유학자이며 기일원론(氣一元論)의 선구자이자 황진이·박연폭포와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유명한 화담이다.

개요

  • 서경덕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로 학문 연구에서 격물(格物)을 통해 스스로 터득하는 것을 중시했으며, 독창적인 기일원론(氣一元論)의 철학을 제창하였다. 본관은 당성(唐城), 자(字)는 가구(可久), 호(號)는 복재(復齋)이다. 송도(松都, 개성의 옛 이름) 화담(花潭) 부근에 서재를 짓고 학문에 전념하여 화담이라는 별호로 더 알려져 있다. 시호(諡號)는 문강(文康)이다.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송도에 머무르며 학문 연구와 교육에만 전념하여 황진이(黃眞伊), 박연폭포(朴淵瀑布)와 함께 '송도 3절(松都三絶)'로 불리기도 한다. 제자로는 <토정비결(土亭秘訣)>을 지은 이지함(李之菡), 허균(許筠)의 아버지인 허엽(許曄),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박순(朴淳)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박주(朴洲)·남언경(南彦經)·민순(閔純)·이구(李球)·박민헌(朴民獻)·홍인우(洪仁祐)·장가순(張可順)·이중호(李仲虎) 등 수많은 문인이 있었다. 그러나 서경덕의 주기(主氣) 철학은 후대의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지만, 경세론이나 윤리설보다는 형이상학적인 본체론을 중심으로 하였기 때문에 하나의 학파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그의 제자인 허엽은 동인(東人)이 되고, 박순은 서인(西人)이 되는 등 정치적으로도 나뉘었다.[1]
  • 서경덕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서, 주기파(主氣派)의 거유(巨儒)이다. 본관은 당성(唐城), 자는 가구(可久), 호는 복재(復齋)·화담(花潭)이다. 부친은 부위(副尉) 서호번(徐好蕃)이다. 스승 없이 독학으로 사서육경을 연마했으며 정치에 관심을 끊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일생을 바쳤다. 그의 특이한 독학 방법은 벽에 한자를 붙이고 그 한자와 세상과의 관계를 궁리하였다고 한다. 평생 여색을 멀리했는데, 개성 최고의 유명한 기생 황진이는 그를 시험하고자 일부러 비가 오는 싸늘한 날에는 자신을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교태를 부리며 유혹하였으나 서경덕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의 인품에 감격한 황진이는 그를 스승 겸 서신과 시문을 주고받는 사이로 남았다는 설이 있다. 스승 없이 독학을 한 학자로도 유명하며, 박연폭포, 황진이와 함께 개성의 송도삼절의 하나로 꼽힌다. 그는 평생을 은둔생활을 하며 학문을 즐기다가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붕당의 출현 이후 그의 제자들은 동인과 북인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사후 명종 때 이준경 등의 추증 건의로 증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추증되었다가 거듭 추증되어 선조 때 의정부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2]
  • 서경덕은 조선 중기의 주기론 유학자이다. 본관은 당성(唐城). 자는 가구(可久), 호는 화담(花潭), 복재(復齋). 시호는 문강(文康). 1489년 경기도 개성부에서 아버지 수의부위(修義副尉) 서호번(徐好蕃)과 어머니 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집안의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13세에 처음으로 글을 읽었고 스승 없이 독학으로 공부했다고 한다. 18세에 <대학>을 읽고 격물치지에 뜻을 두었다고 하며 종달새 울음소리를 듣고 하루 종일 이를 탐구했다는 일화도 있다. 1519년 현량과에 추천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개성 화담에 서재를 세우고 연구와 교육에 힘썼다. 이후 어머니의 요청으로 1531년(중종 26) 식년 생원시에 응시하여 2등 7위로 입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했다. 그의 호 화담은 그가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한 곳의 지명에서 따왔다고 한다. 사후 1575년(선조 8) 우의정에 추증(追贈) 되었다. 그의 철학은 정작 성리학의 중심이 되는 이를 가볍게 여기고 때문에 성리학에서 제시한 방대한 이에 대한 설명을 그의 철학 체계 안에 넣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기의 순환을 통해 우주론을 설명했다 하더라도 이를 인륜에 적용시켜야 하는 유학의 기본 입장상 이가 단순히 자연 이치로 머문다면 이는 바람직한 철학이라고 볼 수 없었다. 때문에 생전의 서경덕은 이황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고 이와 기를 포괄적으로 설명한 주기론자 이이의 철학이 등장하면서 조선 주기론은 이이 철학 중심으로 흐르게 된다. 저서로는 『화담집(花潭集)』이 있으며, 그의 사상적인 면모를 밝혀 주는 「원이기(原理氣)」 · 「이기설(理氣說)」 · 「태허설」 ·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 등의 대표적인 글을 수록하고 있다.[3]
  • 서경덕은 조선 전기에, 독자적인 기일원론을 완성하였으며, 『화담집』 등을 저술한 학자. 개성 출신. 본관은 당성(唐城). 자는 가구(可久), 호는 복재(復齋) · 화담(花潭). 아버지는 부위(副尉) 서호번(徐好蕃)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이(理)보다 기(氣)를 중시하는 독자적인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완성하여 주기론(主氣論)의 선구자가 되었다. 1502년(연산군 8) 『서경』을 배우다가 태음력의 수학적 계산인 일(日) · 월(月) 운행의 도수(度數)에 의문이 생기자 보름 동안 궁리하여 스스로 해득하였다. 1506년 『대학』의 치지재격물(致知在格物)조를 읽다가 '학문을 하면서 먼저 격물을 하지 않으면 글을 읽어서 어디에 쓰리오!'라고 탄식하고, 천지만물의 이름을 벽에다 써 붙여 두고는 날마다 힘써 궁구(窮究)하였다. 1507년(중종 2) 선교랑(宣敎郎) 이계종(李繼從)의 딸과 결혼하였다. 1519년 조광조(趙光祖)에 의해 채택된 현량과(賢良科)에 수석으로 추천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개성 화담(花潭)에 서재를 세우고 연구와 교육에 힘썼다. 1531년 어머니의 요청으로 생원시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성리학 연구에 힘썼다. 1544년 김안국(金安國) 등이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추천하여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계속 화담에 머물러 연구와 교육에 몰두하였다. 특히 예학에 밝았으며, 중종과 인종이 죽자 '임금의 상(喪)에 어찌 복(服)이 없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자최삼월(齊衰三月)의 상복을 입었다. 황진이(黃眞伊)의 유혹을 물리친 일화가 전해지며, 박연폭포(朴淵瀑布) · 황진이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린다.[4]

서경덕의 생애

  • 서경덕은 1489년(성종 20년) 황해도 개성 화정리(和井里)에서 종8품 수의부위(修義副尉)를 지낸 서호번(徐好蕃)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급 무관의 집안에서 태어나 거의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어려서부터 탐구심이 많아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들에 나물을 캐러 갔다가 종달새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이치를 생각하느라 밤늦도록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14세 때에는 <서경(書經)>을 공부하다가 태음력(太陰曆)의 수학적 계산에 의문이 생기자 보름 동안 궁리하여 스스로 터득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8세 때에는 <대학(大學)>에서 '그 뜻을 성실히 하려는 사람은 먼저 그 아는 것을 극진히 해야 하고, 아는 것을 극진히 하는 것은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데 있다'는 구절을 읽고 '학문을 하면서 먼저 격물(格物)을 하지 않는다면 글을 읽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하고 탄식하고는 만물의 이름을 벽에 써서 붙여 두고 날마다 그 사물의 이치를 깊이 탐구했다고 한다.
  • 19세 때에 종6품 선교랑(宣敎郎) 이계종(李繼從)의 딸인 태안 이씨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21세 때인 1509년(중종 4년)에는 경기·영남·호남 지방을 돌아보았다. 당시 조정에서는 1498년(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시작으로 잇따른 사화로 수많은 선비들이 참화를 당했다. 게다가 서경덕은 우주의 근원과 자연의 질서를 탐구하는 데 학문의 뜻을 두고 있었기에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는 개성 화담 부근에 서재를 짓고 은거하여 연구와 교육에 전념했으며, 신분에 관계없이 제자를 받아들여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31세 때인 1519년(중종 14년)에는 조광조(趙光祖)에 의해 실시된 현량과(賢良科)에 천거되었으나 이를 사양하였다. 1522년에는 조식(曺植)·성운(成運) 등과 지리산·속리산 등을 유람하면서 교유하였고, 여러 편의 기행시를 남기기도 했다. 43세 때인 1531년(중종 26년)에는 어머니의 요청에 따라 식년시(式年試) 생원과(生員科)에 응시해 합격하기도 했으나 대과(大科)에 응시하거나 벼슬길에 나가지는 않았다.
  • 1540년에 다시 김안국(金安國) 등에 의해 조정에 추천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고, 1544년 조정에서 후릉참봉(厚陵參奉)의 벼슬을 내렸으나 이를 사양하였다. 그리고 그 해 원리기(原理氣), 이기설(理氣說), 태허설(太虛說),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 등을 저술하여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하였다. 1546년(명종 1) 58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개성의 숭양서원과 화곡서원에서 제향(祭享)되었다. 1567년(명종 22년)에 호조좌랑(戶曹佐郞)으로, 1575년(선조 8년)에 우의정(右議政)으로 추증되었으며, 1585년에 신도비가 세워졌다. 문집으로는 <화담집(花潭集)>이 전해진다.

서경덕의 철학

  • 서경덕은 성리학뿐 아니라 도가 사상이나 역학(易學)·수학 등에 대한 이해도 깊었다. 그는 학문을 하면서 격물치지(格物致知)의 태도를 중시하였고, 성현의 말이라고 해서 그대로 따르지 않고 스스로 회의하고 사색하여 깨닫는 자득지학(自得之學)을 강조하였다. 그는 스스로 사물의 이치를 따지지 않고 독서에만 의존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라고 비판하며, 직접 자연과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려 했다. 이러한 태도는 성현을 본받고 따르는 의양(依樣)을 강조했던 이황(李滉) 등 다른 성리학자들과는 많이 다르다. 이황은 '사물을 직접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자부하지 않았고 또 설사 안다고 해도 그 타당성이 의심스러우니 오직 성현을 따르는 것이 배움의 가장 온당한 방법'이라며 의양을 강조했으며, 서경덕에 대해서는 '그의 학설에는 한 편도 병통(病痛)이 없는 게 없다'며 매섭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이(李珥)는 '화담(花潭)은 자득(自得)이 강한데, 퇴계는 의양의 맛이 많다'고 하면서, 서경덕의 깨달음이 이황과 같이 독서에 의존하는 학자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 서경덕은 격물을 중시하며, 독서에만 의지하기보다는 자연을 탐구하고 스스로의 합리적 사유를 통해 진리를 인식하려 했으며, 주돈이(周敦頤)·소옹(邵雍)·장재(張載) 등 북송(北宋) 성리학자의 사상을 재해석하여 기(氣)를 중심으로 하는 독창적인 사상을 제창했다. 당시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주희의 사상을 표준으로 삼아 이(理)와 기(氣)를 서로 독립된 실재로 구별해서 보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관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理)가 기(氣)에 앞서며, 이(理)가 기(氣)를 주재(主宰)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서경덕은 '기(氣) 바깥에 이(理)가 없다'며 기일원론(氣一元論)의 관점에서 만물의 운동과 변화를 설명하였다. 그는 장재(張載)와 마찬가지로 우주의 본체를 태허(太虛)라 하였는데, 태허를 '하나의 기(一氣)'로 보았다. 태허의 기가 아직 발하지 않아 말끔하여 형체를 갖추지 않은 상태를 선천(先天)이라 하고, 이미 발하여 만물로 형상화된 상태를 후천(後天)이라 한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의 생멸과 변화는 선천에서 후천으로 옮겨가는 이러한 기(氣)의 운동으로 이루어진다. 선천의 기는 본래 하나이지만, 그것이 모이고 흩어짐에 따라 천지만물의 변화가 나타난다. 선천의 일기(一氣)는 형체를 갖추지 않아 감각할 수 없지만, 후천의 기는 형체를 갖추어 감각할 수 있다. 그러나 기(氣)가 새롭게 생겨나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또한 기(氣)는 소멸되지도 않는다. 이것을 '일기장존설(一氣長存說)'이라고 하는데, 서경덕은 이를 촛불에 비유해서 설명한다. 촛불을 켜면 초가 점차 없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氣)가 흩어져 형체가 바뀔 뿐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삶과 죽음도 마찬가지로 사람이 생겨나는 것은 기가 모이는 것이고, 죽는 것은 기가 흩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 서경덕은 기(氣)의 운동은 다른 무언가에 주재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처럼 서경덕은 이(理)가 기(氣)를 주재한다고 본 주자학과는 달리 기(氣)가 스스로의 작용으로 만물로 형상화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어떠한 것도 기(氣)보다 앞서 존재할 수 없으며, 이(理)는 단지 기(氣)의 작용으로 형상을 갖춘 후천(後天)의 질서를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이(理)와 기(氣)는 서로 구별되는 실재가 아니라, 이(理)는 단지 기(氣)의 운동을 법칙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기일원론(氣一元論)의 관점이 제시된다.
  • 서경덕의 사상은 이황을 비롯해 주리론(主理論) 계열의 성리학자들에게 비판을 받았지만, 이이 등 주기론(主氣論) 계열의 학자들에게는 큰 영향을 끼쳤다. 이이는 서경덕의 사상이 이(理)와 기(氣)는 서로 떠날 수 없다는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의 요체를 분명하게 터득했다며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서경덕의 일기장존설 등은 비판하며 이(理)를 궁극적 실체로 인정하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관점에서 주기(主氣) 철학을 발전시켰다. 이이의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학맥을 이은 임성주(任聖周)는 성즉기설(性卽氣說)을 주장하며 서경덕과 마찬가지로 기일원론의 관점에서 기의 활동만으로 우주 만물이 표현되며 이(理)는 기(氣)의 작용을 설명해 주는 원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화담집

  • 화담집(花潭集)은 조선 학자 서경덕(徐敬德:1489~1546)의 시문집(詩文集). 목판본. 4권 1책. 규장각도서. 초간본은 저자의 제자인 박이정(朴頤正) ·허태휘(許太輝) 등이 엮고, 1605년(선조 38) 은산현감 홍방(洪霶)이 간행하였다. 내용은 권1에 부(賦) ·시(詩), 권2에 소(疏) ·서(書) ·잡저(雜著) ·서(序) ·명(銘), 권3은 부록으로서 연보(年譜) ·비명(碑銘) ·유사(遺事), 권4도 부록으로서 제문(祭文) ·향축(享祝) ·찬가(讚歌) 등 여러 편과 문인명(門人銘)을 실었다. 이 중에서 학술적 가치가 있는 글은 잡저 가운데 실려 있는 <원리기설(原理氣說)> <이기설(理氣說)> <태허설(太虛說)>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 등이다. 이것은 그의 이기의 설과 역(易)의 사생론 및 음양에 대한 논술이다.

서경덕에 대한 평가

  •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은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송도에 머무르며 학문 연구와 교육에만 전념하여 황진이(黃眞伊), 박연폭포(朴淵瀑布)와 함께 '송도 3절(松都三絶)'로 일컬어진다. 하급 무관의 집안에서 태어난 서경덕은 우주의 근원과 자연의 질서를 탐구하는 데 뜻을 두고 있었기에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여러 번 천거되었으나 한 번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또 서경덕은 성리학뿐 아니라 도가사상이나 역학(易學)과 수학에 대한 이해도 깊었으며, 학문을 하면서 격물치지(格物致知)의 태도를 중시하였다. 성현의 말이라고 해서 그대로 따르지 않고 스스로 회의하고 사색하여 깨닫는 자득지학(自得之學)을 강조하면서 독창적 기(氣) 철학을 개척하였다. 이러한 삶의 방식과 철학적 자세 때문인지 설화 속 서경덕은 상상을 초월하는 도술을 부리는 경우가 많다. 서경덕의 학문적 독창성이 구비문학의 도술로 전환되어 전승되는 것으로 보인다.
  • 서경덕은 만물의 이치를 이해하고자 하는 철학자로서의 업적을 남겼다. 유교 성리학에 얽매이지 않고 도교적인 사상도 일부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그를 이단이라며 공격하기도 했다. 시인으로도 활동하여 그는 '조용하고 온화한 것을 즐기므로 많은 사람들이 사모했었고, 지은 시도 자유롭고 안서(安舒)하여 강절(康節)의 기풍이 있다'는 평이 있다.

동영상

각주

  1. 서경덕(徐敬德,1489~1546)〉, 《두산백과》
  2. 서경덕〉, 《위키백과》
  3. 서경덕〉, 《나무위키》
  4. 서경덕(徐敬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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