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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스캐처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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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위치
서스캐처원주 위치

서스캐처원주(Saskatchewan)는 캐나다의 주이다.[1]

개요

서스캐처원주의 면적은 651,900km²이며 인구는 1,194,800명 (2022)이다. 서쪽은 앨버타주, 동쪽은 매니토바주, 북쪽은 노스웨스트준주와 접해 있다. 남쪽은 미국 몬태나주, 노스다코타주에 접해 있다. 주도는 리자이나, 새스캐추언 주 최대의 도시는 새스커툰이다.

주의 이름이 독특한데 아메리카 원주민의 언어들 중 하나인 크리어로 된 강 이름이다. 서스캐처원 강에서 따왔다. 이 이름은 크리어의 kisiskāciwani-sīpiy/ᑭᓯᐢᑳᒋᐘᓂ ᓯᐱᐩ에서 유래되었다. 의미는 '빨리 흐르는 강'이라는 뜻이다.

서스캐처원주에는 프랑스계 캐나다인, 독일인, 우크라이나인, 인도인 등 다양한 인종이 거주하고 있는데, 각 민족의 특성을 살려 만든 취락이 많이 있다. 다양한 인종만큼 종파도 다양하여 주민의 33%만이 캐나다 연합교회 신자이며, 그 밖에 로마 가톨릭, 루터교, 성공회, 우크라이나 가톨릭, 메노나이트교회 등이 있다.

캐나다 전체에서 독일계 캐나다인의 비중이 가장 높은 주이다. 이곳의 독일계 캐나다인은 주로 독일계 러시아인 출신이며, 서스캐처원에 정착해 농사를 지으며 살아갔다. 이러한 연유로 서스캐처원은 캐나다에서 루터교인 비중이 5% 정도로 가장 높은 지역이다. 그 외에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갈리치아에서 온 우크라이나계 캐나다인들이 주로 여기에 정착해서 매니토바와 함께 우크라이나계의 비중이 비교적 높은 편에 속한다.

1907년에 설립된 서스캐처원대학교는 리자이나와 새스커툰에 넓은 캠퍼스를 두고 있다. 1959년에 설립된 서스캐처원 예술원은 연극·미술·음악·문학·공예 프로그램을 지원한다. 리자이나에는 서스캐처원 자연사박물관과 캐나다 왕립 기마경찰대박물관이, 새스커툰에는 서구발달사박물관이 있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우크라이나인·폴란드인·독일인·러시아인 및 스칸디나비아 이주민들의 후손이 살고 있는 도시와 촌락에서 민족고유의 의상·음악·춤·음식을 자랑하는 축제가 열린다.[2][3]

자연환경

서스캐처원주는 북미 대륙 중부의 대평원에 위치하고 북아메리카 대륙의 프레리 북쪽 가장자리에 위치하며, 식생은 남부의 프레리 초원, 북부의 침엽 수림, 중간부의 이행대인 혼합림으로 대략 구분된다. 남쪽은 초원 지대로서 북아메리카 중앙에 있는 대평원과 연결되어 있으며, 로렌시아순상지(楯狀地)에 위치한 북부는 호수가 많은 관목 지대와 툰드라 지대로서 수천 개의 호수가 있는데, 가장 큰 것은 앨버타주와 공유하고 있는 애서배스카호이다.

기후는 서시베리아나 개마고원과 비슷한 기후를 띄고 있으며, 북부 지방에선 영하 60도 가까이 떨어지기도 한다. 연강수량도 300~400mm 정도에 불과해서 제법 건조하다. 강우량은 5~9월에 가장 많아 하술할 곡물 및 유채 재배에 적합한 조건이 형성된다.

역사

초기 역사

지금의 새스캐처원 주에 나타난 첫 인류는 대략 12,000년 이전에 그 지방에 도착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이다. 새스캐추언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오랜 기간 번성하면서 다양한 문화를 개발하고 환경에 적응하였다.

1600년대 후반과 1700년대 초반에 유럽인들이 새스캐추언에 도착하였을 때 치페와이언 족들이 북부 삼림지대 일대에 살았다. 그들의 주요 식량은 순록이었다. 때때로 봄과 가을에 부족은 순록을 사냥하는 더 큰 무리들에 합류하였다. 치페와이언 족들도 또한 말코손바닥사슴과 작은 짐승들을 사냥하였으며 낚시를 하였다.

크리 족들은 새스캐추언 중부에 가장 넓게 퍼진 부족이었다. 그들은 산림과 평원 양쪽을 오고가며 살았는데 여름에는 생선, 물새와 식물을 채취하고, 겨울에는 고라니와 사슴을 사냥하였다. 북부의 크리 족들은 순록을 사냥하고, 남부에서는 들소를 사냥하며 때때로 애시니보인 족, 그로스벤트르 족과 평야를 돌며 큰 들소 떼를 사냥하였다.

모피 교역인들의 도래

원주민들의 적응은 그들이 서부 캐나다에서 유럽인의 모피 교역의 장점을 택할 수 있게 하였다. 크리 족과 애시니보인 족은 특히 그들을 덫에 걸리게 한 다른 원주민들로부터 모피를 사고, 털가죽을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교역인들에게 팔면서 이득을 얻었다.

1670년 잉글랜드의 찰스 2세는 허드슨 베이 회사에게 새스캐추언의 대부분을 포함한 서부 캐나다의 막대한 지방의 통치를 승인하였다. 새스캐추언을 방문하는 데 알려진 첫 유럽인은 허스슨 베이 회사의 고용주 헨리 켈시였다. 1690년부터 1692년까지 켈시는 서부를 여행하며 새로운 지역 고유의 단체들에게 접촉하려고 시도를 하여 회사와 교역을 하는 데 그들을 설득하였다.

1700년대 중반에 경쟁자인 프랑스 모피 교역인들은 새스캐추언 중부로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1779년 몬트리올에 기지를 둔 상인과 모피 교역인들은 허드슨 베이 회사와 경쟁하는 데 노스 웨스트 회사를 형성하였다. 1700년대 후반 동안에 노스 웨스트 회사는 새스캐추언을 가로질러 그들의 영역을 넓혔다.

심화된 경쟁은 노스 웨스트 회사와 허드슨 베이 회사를 새스캐추언에서 교역지와 요새들을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1774년 허드슨 베이 회사의 새뮤얼 헌은 새스캐추언에서 캐나다의 첫 내륙 기지인 컵벌랜드 호에서 교역지를 설립하였다. 컴벌랜드 하우스로 불린 교역지는 새스캐추언에서 처음으로 지속적으로 영유된 정착지였다.

2개의 모피 교역 회사들은 모피를 사냥한 원주민들과 함께 곧장 교역을 하기로 결정하여, 사냥꾼들로부터 털가죽의 공급을 크리 족과 애시니보인 족들에게 더 이상 의지하지 않았다. 그 두 종족은 대신 들소 고기와 모피 교역인들을 위한 다른 식량들을 공급하게 되었다. 유럽인들로부터 획득된 총과 말들의 사용으로 몇몇 크리 족들은 들소를 사냥하는 데 더 넓은 평야로 이주해 나아갔다.

1821년 2개의 경쟁하는 교역 회사들은 허드슨 베이 회사의 이름 아래 합쳐 자신들의 경쟁을 끝냈다. 새스캐추언에서 합병된 회사는 많은 교역지들을 폐문하였다.

선교사들의 도래

1800년대 중반에 새스캐추언은 많은 기독교 선교 활동의 장이 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 선교는 1846년에 일라라크로스에 설립되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영향은 곧 새스캐추언 북서부를 통하여 퍼졌다. 또한 영국 성공회의 선교사들은 라크라롱주의 서부 끝의 근처에 있는 스탠리 선교소에 홀리 트리니티 교회를 세웠다. 1860년 경에 완공된 그 교회는 새스캐추언 주에서 가장 오래 존재하는 건물이 되었다.

노스 웨스트 영토

4개의 주들의 연합인 캐나다 자치령은 1867년에 창조되었다. 1869년 새롭게 형성된 자치령으로 허드슨 베이 회사는 자신들이 통치하고, 현재의 북부 퀘벡주, 북부 온타리오주와 서부로 브리티시컬럼비아주의 모든 대지들을 포함한 다양한 영토를 팔기로 동의하였다. 자치령은 1870년에 지방의 통치를 얻었으며, 작은 매니토바주를 창조하고, 노스 웨스트 영토들로서 새스캐추언을 포함한 나머지를 결성하였다.

1850년대 후반에 영국 정부를 위하여 일을 한 아일랜드의 탐험가 존 폴리저와 캐나다의 지질학자 헨리 Y. 힌드는 새스캐추언의 중부와 남부로 갈리진 원정들을 지도하였다. 둘다 새스캐추언 중부를 통하여 경영된 농사를 위한 좋은 대지의 폭이 넓은 지대를 보고하였다. 결과로서 1870년대에 첫 유럽계 캐나다인 정착자들이 새스캐추언 중부에 있는 북부와 남부의 새스캐추언 강의 유역들로 향하였다. 배틀퍼드는 1876년 영토의 수도가 되었다.

1882년과 1883년 캐나다 퍼시픽 철도는 리자이나와 무스조를 통하여 새스캐추언 남부를 가로지르는 대륙횡단철도를 건설하였다. 1883년 리자이나가 공식적으로 노스 웨스트 영토의 새로운 수도가 되었다.

메티스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위기

이 시기에 새스캐추언 중부의 메티스들은 정착지에 철도가 연결되는 것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한편 메티스는 캐나다의 새로운 농업 경제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기도 하였다. 메티스는 1885년 3월 오타와의 연방 정부가 자신들의 청원을 받아들이지 않자 새스캐추언의 배토시에 임시 정부를 세웠다. 내란이 일어나자, 연방 정부는 메티스를 해산시키려고 배토시에 큰 군대를 보냈다. 정부군은 3달 안에 노스 웨스트 반란이라 불리는 폭동을 해산시켰다.

새스캐추언의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또한 위기를 겪었다. 한 번은 거대 들소 떼의 재빠른 쇠퇴가 원주민들에게 식량 위기를 불러왔다. 연방 정부는 그들에게 사냥꾼 대신 농부가 되기를 주장하였으나 약간의 경제적 도움을 주었을 뿐이었다. 약간의 원주민들은 메티스의 노스 웨스트 반란에도 관련되었다. 크리 족의 지도자들인 빅 비어와 파운드메이커는 오타와 족과 함께 연방과의 평화적인 교섭을 추구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연방 정부는 반란 진압의 상황을 크리 족을 핍박하는 것의 정당화로 활용하였다. 1885년 11월 6명의 크리 족과 2명의 애시니보인 족들이 내란을 진압하는 도중에 배틀퍼드에서 사형을 당하기도 하였다.

영토적 향상

189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반에 정착이 빨랐다. 농업 개발은 농부들이 짧은 재배 시즌에 번영한 밀의 타입을 경작하기 시작하면서 힘을 얻었다. 새로운 정착자들은 기록적 수들에 농가들을 설립하였다. 1901년부터 1911년까지 인구는 91,279명에서 492,432명으로 증가하였다. 좋은 자유스러운 대지와 상승하는 밀의 가격들은 스칸디나비아와 중유럽과 동유럽에서 온 많은 이민들을 끌어들였다. 빠른 인구의 번창을 철도, 타운과 도시들의 건설을 몰아냈다. 전통으로 백인 정착자들은 새스캐추언의 지역 고유의 주민들이 주의 미래에서 소수의 역할을 할 것 같다고 믿었다.

새스캐추언은 1905년 캐나다의 주가 되었다. 하지만, 연방 정부는 새스캐추언 주의 공공 대지와 그 산림과 미네랄의 매장량들을 포함한 자연 자원들을 1930년까지 계속 통치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동안에 새스캐추언 주의 농부들은 거대하게 자라는 밀에 바쳐진 대지의 양을 늘였다. 1915년에 홀로, 새스캐추언 주는 밀의 2억 천만 부셸 이상을 수확하였다. 1924년 농부들의 단체는 국제 시장들로 직접 팔면서 그들의 곡식을 위한 더 높은 가격들을 얻으려고 새스캐추언 밀 공동 관리를 형성하였다. 오늘날 밀의 공동 관리는 세계에서 가장 큰 곡식 시장 회사들 중의 하나인 비테라의 일부이다.

국제적 요구에 책임에서 대지의 양은 1920년대에 더욱 멀리 오른 밀을 경작하여, 1929년에 1천 4백만 에이커를 높이 서게 만들었다. 그러나 주의 경제가 단 한개의 수확물에 의지하자, 번영이 세계의 밀 가격들과 함께 오르고 떨어졌다. 1920년 새스캐추언 주와 다른 주들에서 온 농부들은 국내 정세에 더욱 거대한 발원권을 위한 희망을 가지는 데 진보당을 형성하였다.

대공황

1930년대의 대공황이 새스캐추언 주에 타격을 주었다. 새스캐추언 주의 역사상 밀의 가격들이 자신들의 가장 낮은 수준으로 가라앉혀졌다. 늘여진 가뭄과 부족한 경작의 실습들에의하여 악화된 흙의 부식은 위기를 혼합하였다. 수만명의 농장 가족들은 구제에 들어가거나 자신들의 농가들을 버렸다. 많은 주민들은 새스캐추언 주의 북부 첨단으로 이주하거나, 모두 함께 주를 떠났다. 단 하나의 노숙자 남성들은 일을 찾으려고 철도에 의하여 캐나다를 돌아다녔다.

1935년 수백명의 실업자들이 더 많은 도움을 위하여 연방 정부에게 애원하려고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에서 국가의 수도로 원정인 온 투 오타와 트렉을 결성하였다. 정부는 리자이나에서 멈추려고 데모인들에게 명령을 내렷다. 그해 7월 경찰이 지도자들을 체포하는 데 연방 명령들에 활동을 벌이자 폭동이 일어났다. 많은 주민들이 부상을 당하고 1명의 경찰관이 사망하였다.

정치적 변화

정치적 변화들은 대공황으로부터 결과를 가져왔다. 1944년 새스캐추언 주의 투표인들은 북아메리카에서 첫 사회주의 정부를 형성한 협동 연방 연합을 선출하였다. 그 지도자 토머스 C. 더글러스 아래 협동 연방 연합은 부족한 수확량과 수확물 가격들에서 급강하의 충격을 적게 하는 데 결심시킨 권력을 휩쓸었다. 협동 연방 연합은 제조업의 번창과 자연 자원들의 개발을 후원하였다.

협동 연방 연합은 또한 세금으로 성원된 보건에서 개선을 하였다. 1962년 주 정부는 주의 모든 시민들을 위한 보건 계획을 소개하였다. 새스캐추언 주의 의사들은 즉시 비상 사태의 경우들에서 제외한 자신들의 서비스들을 취소하였다. 의사들은 자신들이 주와 함께 청작지들에 도달할 때까지 3주 이상이나 파업에 남아있었다. 새스캐추언 주의 프로그램은 1966년에 채택된 캐나다의 국가적 의학 보호 계획을 위한 모델이 되었다.

1961년 협동 연방 연합은 신민주당으로 불린 국가적 당을형성하는 데 몇몇의 노동 연합들과 합병하였다. 새스캐추언 주는 1967년 협동 연방 연합이 신민주당으로 될 때까지 그 이름을 간직하였다. 1944년부터 1964년 자유당에게 패할 때까지 신민주당은 주 정부를 통치하였다.

경제적 변화

1900년대 중반과 후반 동안에 큰 농장들이 새스캐추언 주의 작은 농장들에 대신하고 , 농장의 수가 착실하게 쇠퇴하였다. 1940년대에 새스캐추언 주의 인구의 대략 4분의 3은 시골 지역들에 살았다. 1970년대 초반으로 봐서 인구의 절반 만이 시골에 있었다.

다른 자원들이 약속을 제공하였다. 큰 칼륨의 토대와 석유의 주요 매장량들이 1940년대와 1950년대 초반에 발견되었다. 1971년 신민주당은 주 정부의 통치를 다시 얻었다. 당은 1975년 새스캐추언 주 칼륨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진행되는 데 몇몇의 큰 칼륨 광산들을 가져왔다.

1982년부터 1991년까지 진보보수당이 새스캐추언 주의 정부를 통치하였다. 진보보수당은 정부 소유권에서 신민주당의 정책을 거절하였다. 하지만, 아무 당이나 농산물과 재생 가능한 자원들을 위한 세계 가격들을 오르내림에 큰 의지를 남긴 새스캐추언주의 경제의 기초적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주의 인구는 주민들이 더 낳은 경제적 기회들의 추구에서 주를 떠나면서 주의 인구는 쇠퇴하였다.

새스캐추언 주의 위기적 경제는 결국 주의 북부에서 풍부한 우라늄의 매장량의 체굴과 칼륨의 큰 판매들로부터 이득을 얻었다. 또 다른 선명한 현장은 붐이 일어난 새스캐추언 주의 높은 기술 산업이었으며, 특히 농업의 생물 공학의 범위에서였다. 1991년 신민주당이 주 정부의 통치를 다시 얻었다. 하지만, 2007년 중도 우파의 새스캐추언 당에게 패하였다.

2000년대에 많은 도전들이 새스캐추언 주를 향하였다. 주는 농업과 미네랄 상품들에 기초를 둔 경제에 더욱 거대한 안정을 가져오는 방향을 찾아야 한다. 또한 번창하는 도시 인구와 노화의 시골 인구들의 서로 다른 필요함을 만나야한다. 주는 원주민과 비원주민 사이에 협동을 육성하고 그들 사이에 장벽을 무너뜨리는 데 일을 하여야 한다.

산업

전통적으로 서스캐처원의 주요 산업농업이었다. 서스캐처원은 캐나다 최대의 곡창지대이다. 밀의 생산이 많은 주이며, 그 생산량이 캐나다 전체의 절반을 차지한다. 보리, 옥수수, 호밀, 콩, 유채, 겨자씨, 감자, 해바라기씨 등을 생산하기도 한다. 주의 남부는 목축이 이루어지며, 육우를 사육한다.

현재 서스캐처원 GDP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6%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프레리 일대의 농업이 쇠퇴해서가 아니라 농업 이외의 부문이 새로 출현하거나 비중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석유와 광물채굴 등으로 발생하는 광업 부문이 비중이 급격히 상승했고, 캐나다 경제의 전반적인 특징이 서비스 산업 위주로 재편된 것 또한 영향을 받아 똑같이 반영되어 있다.

광업도 흥성하여, 세계 최대의 우라늄 생산 지역이기도 하다. 주 남부에는 석유, 천연가스가 매장되어 있어서 트랜스 캐나다 하이웨이를 타고 운전하다 보면 대평원 너머로 석유, 천연가스를 추출하고 있는 시추기들을 많이 볼수 있다. 이렇게 뽑아낸 석유, 천연가스들을 정제하는 시설도 당연히 있어서 CO-OP 사의 정유시설이 리자이나에서 가동 중에 있다. 그래서인지 앨버타와 함께 가장 경제 성장률이 높은 주 중 하나였다.

지역 1인당 GDP 역시 높은 편이다. 주 인구는 노바스코샤, 뉴펀들랜드 래브라도,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뉴브런즈윅 등 대서양 연해 지역들을 제외하면 전국 최하위 수준의 규모와 밀도를 지닌 지역에 석유, 천연가스와 같은 천연자원이 있다보니 평균을 내면 소득이 높게 나온다.

실제로는 서스캐처원의 최저시급은 캐나다 대서양 지역의 뉴브런즈윅보다도 낮은 전국 최하위인 $13.00로 책정되어 있는데다 구직시장 규모와 업종 분야도 워낙 제한적이라 현실적으론 고소득 주로 간주되지 않는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구 증가가 너무 더딘 편이라서 인접한 매니토바와 마찬가지로 이민을 매우 적극적으로 받고있는 주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민 정책으로도 간신히 현상 유지 밖에 못하고 있는데, 생활권이 저렴하고 이민 조건이 쉬워도 새스커툰, 리자이나 등은 인구 20만 내외로 작아서, 이 지역에서 영주권을 발급을 받은 뒤에도 남아 정주하려는 실제 정착 동기부여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영주권을 받자마자 타 주로 이사간다는 말이 많아서 이민법을 개정하기 직전까지 마음을 먹었던 이웃 주 매니토바의 위니펙은 그래도 유출되는 노동력에 못지않게 정주 인구도 동시에 늘어서 어느덧 인구 80만 명대를 목전에 두고있는 것을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최근 들어서는 신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행정부가 출범하자마자 대통령의 직권으로 키스톤 XL 파이프라인 프로젝트가 취소되면서 큰 손해를 보게 되었다. 키스톤 XL 파이프라인 프로젝트에 서스캐처원이 투자를 많이 한 상황인데 갑자기 날아간 셈이다. 그나마 앨버타는 브리티시컬럼비아와 앨버타를 연결하는 트랜스 마운틴 파이프라인 프로잭트도 실시하고 있기 때문에 원유를 브리티시컬럼비아 밴쿠버나 프린스 루퍼트로 수송해서 유조선에 환적할 수 있지만 서스캐처원산 원유의 경우에는 철도에 탱커로 환적해서 비싼 돈 주고 느리게 수송해야하기 때문이다.

지도

동영상

각주

  1. 서스캐처원주〉, 《위키백과》
  2. 서스캐처원주〉, 《네이버 지식백과》
  3. 서스캐처원〉, 《나무위키》

참고자료

같이 보기

북아메리카 같이 보기

북아메리카 국가
북아메리카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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