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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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tinyj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5월 17일 (월) 16:14 판 (인물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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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자동차㈜(Daewoo Motors)

박노정(일본이름 야스다 에이지 安田英二)은 재일교포로 한국 첫 번째 현대식 승용차 제조공장 새나라자동차㈜를 설립했던 인물이다.

인물정보

1961년경에 박노정은 야스다 상사의 사장이었으며 토쿄의 번화가에 몇 개의 빌딩과 맨션, 호텔을 갖고 있고 일본 유수의 온천장인 아다미에도 핫조엔(八丁園)이란 요정을 갖고 있는 교포사회의 거물이었다. 재일 거류민단 부단장까지 지낸 바 있었다.

1961년 12월에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의 대리인으로 출마한 한국주일대사관 참사관 최영택씨와 한국에 자동차공장을 설립하는 사업에 관련하여 상담을 추진하였으며 기본 구상은 재일교포의 투자를 유치하여 자동차제조회사를 설립하고 일본제 소형자동차의 부품을 수입하여 한국에서 조립제조하는 사업방식으로 추진하자는 취지였다. 물론 이 과정에 한국정부는 세금방면에서 기업에 특별혜택을 주는 조건이었다. 협의를 거쳐 한국에 1억원 자본금의 자동차회사를 설립하기로 하였으며 자본금의 조달은 박노정이 3,000만원을 출자하고 나머지는 한일은행에서 대출을 받기로 하였다.

그 뒤 야스다 상사는 한국에 직원을 보내 중앙정보부의 지원을 받아가며 1962년 1월 29일에 새나라자동차㈜의 사업자등록을 완성하였으며 공장 부지는 옛 국산자동차 공장으로 하였다. 국산자동차 공장은 1937년에 이스즈자동차가 국산자동차라는 상호로 경기도 부평(현 인천광역시 부평구)에 설립했던 공장이며 일본군 군용차 생산에 주력했던 공장이다. 한국전쟁시기까지도 존재하였으며 1954년에 해체되었다. 1962년 8월에 연간 생산능력 6,000대의 공장을 세우고 그 해 11월부터 닛산 블루버드 P301 1961버전을 SKD방식으로 수입하여 생산조립을 시작하였다.

부평공장 설립전에 정부에서 관광용으로 면세수입하는 닛산 블루버드 P310 400대(외국인 관광용 150대, 일반 관광용 250대)의 구입업무를 대행하였으며 대당 13만원인 수입차를 국내업자들에 25만원씩 판매하였다.

조립을 시작한 새나라 자동차는 1963년 5월까지 2,700대를 조립판매하였다. 하지만 설립 첫해 이익금 1200만원의 분배에서 모순이 생겼으며 박노정은 제대로 이익금을 받지 못했다고 각 계에 진정서(陳情書)를 돌려 억울함을 주장하였다. 이것이 연유가 되어 중앙정보국의 체포령이 떨어졌으며 박노정은 사전에 눈치채고 부산을 경유하여 밀항선으로 일본에 돌아갔다. 모국의 실권자와 손을 잡고 돈을 벌려다가 원금까지 깨끗이 날리고 밀입혐의로 일본에서 체포되어 곤욕까지 치렀다.

1970년에 박노정은 미국에서 부동산 사업을 추진코자 미국의 로스엔젤레스로 이주하였으며 후에 미국으로 이주한 박경윤을 만나 두 번째 결혼을 하였다. 박경윤이는 금강산무역의 사장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으며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을 움직여 남북한의 무역창구 역할로 남한의 재벌인 J씨와 K씨의 평양방문을 주선했다고 소문이 나 있는 인물이다.

박노정은 1987년에 로스엔젤레스에서 별세하였으며 죽을 때까지 한 번도 한국에 들어가지 않았다.

새나라자동차 관련

  • 설립배경 - 5.16 사변으로 등장한 군정부는 한국 자동차공업의 육성을 목적으로 그 당시 미숙한 한국 자동차업계의 상황을 감안하여 외국제 완성차를 수입하고 이로서 자동차의 부족을 메꾸고 군용폐차부속품을 이용해 제작한 택시 승용차를 외제순정품 자동차로 대체하면 제조기술 개발에 혁신을 일으킬수 있다는 판단하에 가장 가깝고 자동차 제조기술면에서 동아에서 가장 앞서 있는 일본차의 도입을 목표로 설정하였다. 한일간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에서 공식 교섭은 어려웠으며 중간에서 가교 역할을 해 줄수 있는 인물이 필요로 나섰다.
  • 박노정 - 일곱개 기업을 가지고 있는 재일교포이고 닛산 자동차 사장과 친숙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배경으로 한국에 자동차 공장을 설립하는데 가장 적합한 인물로 선정되었다.
  • 새나라자동차 사건 - 중앙정보부가 일본제 승용차를 불법 반입한 뒤 이를 시가의 2배 이상으로 국내시장에 판매하여 거액의 폭리를 취했고 공권력이 남용되어 횡령 등 부정행위가 행해졌다는 언론의 주장과 1964년초 국회 국정감사를 받기로 하였으나 진상이 명백히 규명되지 않은 채 부정적인 정치유산으로 남은 사건이다.

각주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