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물
직물(織物, fabric)은 실을 이용하여 가로 방향과 세로 방향으로 엇갈리게 촘촘히 짜서 만든 천을 말한다.
개요
직물은 직조로 만들어낸, 즉 날실과 씨실이 직각을 이루면서 짜여진 피륙이다. 실의 교차 방법에 따라 평직·능직·수자직 등으로 분류된다. 직물의 짜임새는 옷감의 강도·촉감·내추성·보온성·통기성 등과 관련이 있다. 원료에 따라 견직물, 모직물, 마직물, 면직물 등으로 나뉜다. 날실은 세로 방향으로 놓이며, 씨실은 가로 건너 짠다. 피륙을 짜는 일은 세로로 놓인 날실에 씨실을 가로로 건너 엮는 과정이다. 실로 짠, 옷이나 이불 따위의 감이 되는 물건은 천이라고 부르고, 그 조각은 헝겊이라 한다. 직물이나 천은 실이나 가닥으로 일컫는 자연적이거나 인공적인 섬유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유연한 짜임새이다. 실은 기다란 가닥을 만들기 위해 울, 리넨, 면 등을 꼬면서 만들어진다. 직물은 손으로짜기, 뜨개질하기, 코바늘꿰기, 매듭매기, 직물에 힘 가하기 등으로 이루어진다.[1]
역사
인류가 일정한 장소에 정착하여 농경 생활을 하면서 부족국가를 이룬 신석기시대부터 간단한 옷을 만들어 입기 시작하였다. 처음의 옷감으로는 조물·편물이었으며 직물은 이보다 늦게 발생하였으리라 짐작된다. 직물의 기원이 언제부터인지는 확실하지 않고, 다만 고고학적인 자료에 의하여 짐작할 따름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가장 오래된 유적으로는 고대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에서 발견된 아마포(BC 약 3000년), 고대인도의 인더스강 유역에서 발견된 면포(BC 약 3000년), 그리고 이보다 늦은 것으로서 고대 중국의 황허강[黃河] 유역에서 발굴된 견직물 등이 있다. 이 밖에 스위스의 듀엘러 호반에서 마직물(BC 약 5000년), 잉카·마야·인디언의 고대문화 유적에서 마직물과 모직물을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선사시대에 문명의 발상지에서마다 고유한 토산섬유의 종류에 따라 제각기 다른 직물이 발생했다. 이것이 오랜 기간에 걸쳐 부족 이동, 국가 간의 침략, 교역, 공물, 종교의 전파에 따라 이역에서 또 이역으로 차차 전파되었다. 역사시대에 들어서도 처음에는 왕실의 보호업, 서민의 자급 또는 왕실에의 납품을 위한 가내수공업, 지역민간의 교역품이라는 형태로 전승해 왔다. 중앙아시아에서 발생했던 모직물은 이탈리아를 거쳐 네덜란드의 플랑드르 지방에서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모직물 공업이 발전했다. 중국의 황금 같은 견직물은 실크로드를 통해 전파되어 프랑스 리옹 지방이 다시 서구 견직물 공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인도 면직물의 인도 항로와 수에즈 운하를 통한 대량 수입에만 의존했던 서구에서 뒤늦게 영국 맨체스터 지방이 면직물공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18세기에 들어 영국의 산업혁명 시 역직기(力織機)의 발명으로 인해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자, 비로소 종래 수공업적이었던 직물생산이 기계적 공업생산으로 탈바꿈하였으며, 오늘날 공업자본주의적 직물공업의 기초가 확립되었던 것이다. 즉, 중앙아시아를 지점(支點)으로 동방에서 싹텄던 각종 직물의 수공업은 산업혁명을 계기로 서방에서 근대공업으로 발전한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서는 각종 개량직기의 발명과 함께 레이온·나일론·폴리에스르터 등 인조섬유가 속출함으로써 종래 기계적인 제약이나 원사공급 면의 제약이 풀리게 되어, 오늘날 서유럽·미국·일본 등 세계 곳곳에서는 시설 근대화를 통한 대량 생산체제를 굳히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조섬유 직물의 본격적인 출현으로 직물의 종류와 용도는 다양해졌으며, 자연섬유 직물은 인조섬유 직물에 의하여 여러 가지 용도 분야에서 침식당했다. 그러나 이것은 상대적 점유비가 그렇다는 얘기일 뿐 그 절대량의 증가는 여전하다. 설상가상으로 이들 직물은 편물과의 경쟁이 치열해져서 이를 계기로 최근에는 촉감이나 드레이프 성을 개선하는 원사가공·표면가공(surface interest finishing)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2] 국내에서는 직물에 대한 가장 오래된 문헌 기록은 『한서』에 나타난다.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예의를 가르치고 농사짓고 누에치며 직물을 짰다.”라는 내용으로 보아 이미 B.C. 12세기경에도 우리 조상들은 양잠하며 견직물을 생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삼국지』, 『한서』, 『한원』에는 북쪽의 부족 국가인 부여와 동예, 남쪽의 마한·진한·변한의 직물에 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그 명칭을 언급하였다. 이미 삼한과 예 등 한반도 전역에서 종마와 양잠하는 법을 알았고, 당시에 생산된 직물의 종류는 베와 같은 마포는 물론이며 지금의 명주와 같은 면포, 경사의 밀도를 치밀하게 짠 겸포, 폭이 넓고 섬세하게 짠 광폭 세포 등의 견직물 등이었다. 부여에서는 출국 시에 증·수·금이라는 고급 견직물과 계라는 모직물로 만든 의복을 즐겨 착용했다고 기록되었다. 이는 국가의 형태를 갖추기 이전에 이미 우리 조상들은 상당한 수준의 견직물과 모직물을 생산하고 사용하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주목되는 직물은 삼한에서 재직한 겸포와 부여의 기록에 금錦이라는 직물 명칭이다. 겸은 씨실에 비하여 경사의 밀도가 두 배 정도 치밀하여 매우 섬세한 견직물이며, 금은 다양하게 염색한 실로 중조직에 의해 무늬를 짜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견직물이다. 우리나라의 고대사회에 직물 생산을 유추할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는 다음과 같다. B.C. 6000~5000년의 평안북도 온천 궁산리 신석기시대 유적지에서 가락바퀴와 마사가 끼어 있는 상태의 바늘이 출토되었고, 함경북도 웅기 서포항 유적지와 황해도 붕산 지탑리 유적지에서도 다량의 가락바퀴가 출토되었다. 신석기시대 중기의 유적지인 랴오둥반도의 곽가촌 유적에서도 다량의 가락바퀴와 짐승 뼈를 갈아 만든 북도 출토되었으므로 이미 신석기시대 때부터 직물 생산이 활발히 이루어졌음을 입증한다. 그 밖에도 고조선의 유적지에서는 몇 점의 직물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중국 길림성 영길현 성성초 유적에서는 평직으로 짠 모직물 남은 조각이 나왔고, 대동강 유역의 평양 정백동 유적에서는 평직의 겸이, 석암리 유적에서는 겸·면주·사로 보이는 직물이, 오야리 유적 등에서는 겸·사·라의 잔편이 발굴되었다. 특히 정백동 유적과 석암리 유적에서는 요령성과 한반도 지역의 특징을 보여 주는 세형동검과 ‘부조예군’이라는 고조선과 위만조선에서 사용하였던 관직명이 새겨진 은으로 만든 도장이 함께 출토되어 고고학 분야에서 이들 고분이 B.C. 2~3세기의 고조선 유적지로 밝혀진 바 있다. 오야리의 유적도 일제강점기의 보고서에 의해 한사군의 낙랑군 유적으로 보아 왔으나 고조선의 유적지로 보는 새로운 견해가 있다. 부여의 유적지인 길림성 모아산 유적에서는 중조직의 금·사·견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고고학적 자료는 고조선부터 견직물과 모직물 생산이 가능하였고, 『삼국지』의 “부여 사람들이 출국 시에 증·수·금·계로 만든 옷을 입었다.”라는 기록을 입증할 수 있는 유물이다.[3]
종류
직물의 종류는 무수히 많지만, 크게 분류하면 실의 교차 방법에 따라 평직·능직·수자직 등으로 분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