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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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론(Vinylon)은 무연탄과 석회석을 변형 없이 그대로 이용하여 폴리비닐 알코올에서 얻어낸 합성섬유이다. 비날론(Vinalon)이라고도 한다.

비날론은 1939년 일본의 과학자 사쿠라다 이치로, 리승기, 카와카미 히로시가 처음 개발하였다. 하지만 이 섬유의 본격적인 생산은 리승기가 1950년 한국 전쟁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월북하고 나서야 이루어졌다. 시험 생산이 1954년에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1961년에 함흥에 대형 비날론 단지가 설립되었다. 널리 쓰이기 시작하면서 성공을 거두자 이를 주체 철학의 성공의 한 본보기로 선전하였다.

개요

1939년 북한의 리승기 박사가 당시 일본 제국 교토제국대학 다카쓰키(高槻) 화학연구소에서 사쿠라다 이치로, 카와카미 히로시 등과 함께 만든 세계 두 번째 합성섬유다.

1935년에 개발되어서 1938년 발표한 나일론에 자극을 받아 나일론 발표 1년 만에 폴리비닐 알코올(polyvinyl alcohol; PVA)에서 개발했으며 가볍고 질기고 화학약품에 강하면서 천연섬유에 가까운 특성을 지녔다.

본래 비닐론이라고 했지만, 리승기가 북한으로 넘어가서 비날론을 보급하자 김일성이 비날론으로 개명했다. 김일성이 "옛날 우리 조상들이 무명낳이(무명을 짜는일) 할 때 날실, 들실이라고 말했다"고 하여 '우리 맛이 나게' 비날론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비날론'이란 이름은 북한과 한국에서 겨우 쓰이고 다른 나라에서는 비닐론이라고 한다.

특성

북한의 풍부한 석탄석회석을 원료로 하고, 부산물로 각종 화학 원자재가 나오기 때문에 공업과 연계되고, 자체발명 & 자체생산이라는 점이 체제 선전에도 좋아서 김일성의 구미를 당겼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북한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는 옷을 국가에서 직접 배급했으니 김일성 시기에는 편의성과는 별개로 쓸모가 있는 섬유이기는 했다. 이른바 주체사상의 상징인 "주체섬유"이다.

비날론 공업은 완전한 우리의 주체적 공업입니다. 그것은 첫째로 비날론을 발명한 것도 조선 사람이고 그것을 생산하는 공장을 설계하고 건설한 것도 조선 사람이기 때문이며, 둘째로 우리나라의 풍부한 원료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김일성

하지만 단점도 당연히 만만치 않았다. 일단 대규모 생산 시설을 지어야 하고, 제조단가도 너무 비싸고 제조 과정에서 원자재 못지 않게 많은 폐기물이 나왔다. 특히 생산 과정에서 전기를 막대하게 소모했는데, 수력발전만으로도 전기가 남던 1950년대 ~ 60년대에는 그야말로 전기를 물 쓰듯이 써도 괜찮았으니 별 문제가 아니었지만 발전소 건설이 늦춰지면서 1970년대부터는 과부하가 걸리기 시작했고, 전력 부족이 문제가 되기 시작하는 1980년대부터는 보통 부담이 아니었다.

그리고 화학 약품에 강한 특성 때문에 염색이 잘 되지 않았다. 따라서 단순한 색으로밖에 만들 수 없었고 그나마 젖은 상태에서 다리미로 다리면 탈색되었다. 게다가 비날론 옷은 뻣뻣하여 착용감이 좋지 않으며 너무 번들거리고 쉽게 줄어든다.

좀 더 화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어디가 문제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비날론은 폴리비닐 알콜(PVA)을 베이스로 만든 섬유다. 여기서 문제는 PVA가 수용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의류용 비날론은 포르말화 과정을 통해 수산기를 어느정도 없애 친수성을 줄인다.

게다가 PVA는 수용성이라서 지용성의 화학 약품이나 유기용매에 반응하지 않는다. 이 특성을 이용해서 다른 용매에 저항성을 가지는 용도의 코팅이나 각종 공정에는 유용하게 사용되겠지만 이걸 범용수지로 쓴다는 건... 근데 이걸 섬유로 만들었으니 실용성이 없다시피 하는 건 당연하다. 사실 북한의 경제가 멀쩡했을 적에는 국가가 직접 옷을 배급해주었고 비날론 옷을 공짜나 선물로 얻은 옷으로 보면 나쁘지는 않기 때문에 수요는 있었지만 1990년대에 북한의 섬유산업이 배급제가 마비된 이후로는 옷을 자기가 알아서 사 입는 시대가 오며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한창때에는 줄구장창 입었던 것이 비날론 옷인지라 아직도 작업복으로 쓰이거나 중년층 이상에서는 비날론 옷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많다.

역사

리승기의 개발

1939년, 당시 리승기 박사는 '합성1호'라는 시제품의 개발에 성공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엄청난 자랑거리였다. 과학잡지 '과학조선'은 조선인 과학자의 대표적인 인물로 리승기를 지목했고, 종합잡지 '조광'(朝光)도 '세계의 학계에 파문을 던진 합성1호의 기염-리승기 박사의 고심 연구달성'(1939년 12월호)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해방 때까지 조선인 출신으로 이학, 공학, 농학 등 이공계열에서 박사를 받은 인물은 우장춘, 리승기를 포함해 12명에 불과했으며, 일본에서 제국대학 박사를 딴 인물은 2명 뿐이었으니 정말 드문 일이긴 했다.

그러나 비날론은 상용화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그 당시가 이미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의 전쟁통이었기 때문이었다.

리승기 박사

리승기 박사는 광복 이후 귀국하여 경성대학 이공학부 교수로 부임했으나, 1947년 국립서울대학교설립안(국대안) 파동으로 인해 교수직을 던지고 고향 담양군으로 내려와 있다가, 6.25 전쟁 직후인 1950년 7월 31일, 북한 산업성 부상 리종옥의 설득으로 서울대학교 응용화학과 출신 제자들까지 전원 같이 데리고 월북을 해 버렸다. 이때 월북한 박사 출신으로는 동경제국대학 공업박사 최삼열, 동경제대 농예화학 학사, 화학과 박사였던 김량하 등 111명이었다. 당시 북한의 주요 과학자들 대부분이 월북 과학자였다.

염화비닐/비날론 논쟁과 양산화

리승기는 흥남시 비료공장에서 근무한 적도 있으며, 이후 1960년 북한 과학원(평양)의 첫 번째 분원인 함흥분원을 설립해 함경남도를 산학협동, 비날론 산업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활동했다.

1950년대부터 공업화가 시작되었다. 1951년 첫 공업화, 1958년 공장 건설이 결정되었으며, 1961년 5월 드디어 양산화(연간 2만톤)에 성공한다. 이 당시에 북한이 급속한 전후복구로 연 10%가 훌쩍 뛰어넘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었지만 면생산을 늘리는데에 한계가 있었기때문에 비날론에 많은 주목을 하였다.

당시 흥남 비날론 공장은 4월 1일에서 5월 6일까지 36일만에 건설되었다. 또 이 건설을 독려하기 위해 돌격대를 조직했는데 이른바 '8·28돌격대', '4·1돌격대'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때 벌어진 "비날론 속도", 속도전 운동은 하루 계획 목표의 3,500%를 달성해야만 비로소 '비날론 속도'라고 불렀다. 거꾸로 대입하면 35*36 = 1260일, 3년 반 동안 지어야 했을 공장을 36일만에 날림으로 지었다는 뜻이다.

비날론 공업화의 반대는 1950년대부터 꾸준했다. 니트론(아크리라)이나 나일론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폴리염화비닐(PVC)을 지지하며 비날론은 경제성이 없다며 반대한 려경구 박사가 '귀족적인 섬유'를 지지했다며 사상검토를 받고 1977년 사망함으로써 결국 비날론의 승리로 끝났다. "비날론은 면(棉)에 가까워 아이들의 옷으로부터 어른들의 의복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한 옷을 만들 수 있는 대중성 있는 섬유"라는 김일성의 논리였다.

황당한 점은, 비날론이 처음 개발되었을 때의 목표는 주로 나일론과 나일론이 대체하고자 했던 실크(비단)나 양모를 대체하는 것이었지 면을 대체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결국 비날론이 원료를 수입하지 않아도 되는 이른바 주체적인 섬유였기 때문에 선택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비슷한 예로 비스코스(인견, 레이온의 일종)가 있다. 목재나 갈대 같은 셀룰로오스로 만드는 섬유이기에 역시 북한에서 큰 지지를 받았다.

역시 비스코스도 수분의 침투가 쉬워 자체 무게의 무려 13%나 흡수한다고 한다. 실제로 한국에서 사상 최악의 산업재해 사건 중 하나인 원진레이온 사태를 일으킨 바로 그 비스코스 생산 설비가 원진레이온 및 기타 레이온 업체들의 줄폐업 후 헐값에 중국에 넘어갔고, 거기서도 수많은 인명사고를 낸 끝에 결국 북한으로 흘러들어가 사용 중이라는 증언이 있다.

순천비날론련합기업소

1970년대 들어서는 북한의 베이비붐 세대들이 한창 사회에 진입하고 있을 때라 옷의 수요가 매년 크게 늘어나고 있었고, 기존의 공장만으로는 옷 수요를 총족시키기에 빠듯했던지라 북한 수뇌부의 지시에 따라 기존 함흥에 있던 2·8비날론련합기업소의 2배 규모에 해당되는 평안남도 순천시의 순천비날론련합기업소를 1983년 4월부터 건설했다. 북한 정부는 이 공장이 완공되면 400여 가지 화학제품 생산이 가능하고 빠득한 옷 공급도 크게 늘리는 등 경공업 발전의 토대가 되어 이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상적으로 만들었어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을 실험실 단계에서나 성공시킨 산소열병 기법을 무리하게 적용하려다가 건설비만 크게 불려 놓았고, 결국 1989년 1단계 공사를 끝낸 뒤 건설이 중단되었으며 오래 지나지 않아 고철덩어리가 되어버렸다. 김일성이 승인했다는 이유로 겨우 실험실 규모에서만 성공시킨 산소열법 공법을 수많은 과학자의 반대를 묵살하고 무리하게 대형 공업화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 하지만 이미 매몰비용만으로도 100억 달러를 날려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경제성보다 사상을 앞세우는 북한이라고 할지라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타격이었다.

또한 이 시기에 노동집약적 증산을 위해 산을 무리하게 개간했고, 거기에다가 소련이 붕괴되면서 석유와 비료를 헐값에 수입해올 길이 끊기자 발생한 전력난과 연료난으로 더더욱 농경지 마련을 위해 다락밭을 만들었고 90년대 들어서는 민둥산에 대홍수가 끊이지 않게 되자, 그나마 돌아가던 기존 비날론 생산도 연이은 대홍수로 석탄 가격을 감당하지 못해 1994년에 이르면 모두 중지되었을 정도였다. 건설이 중단된 순천공장 안의 설비들은 1990년대 '고난의 행군' 기간에는 할일 없는 직원들이 돈벌이를 위해 몰래몰래 뜯어내 중국에 팔았다.

정작 리승기 본인은 비날론 공장의 대규모 건설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는 탈북 과학자의 증언도 있다. 또한 리승기는 석탄화학뿐만 아니라 석유화학의 중요성도 제기했지만 주체과학 때문에 묻혔다. 리승기 박사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흐른 1996년 2월 8일에 사망했다. 향년 90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