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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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Santiago)는 칠레의 수도이다. 공식 명칭은 산티아고 데 칠레(스페인어: Santiago de Chile, 문화어: 싼디아고 데 칠레)이고 인구는 약 520만 명이며 중부 계곡에 위치해 있다. 1962년 월드컵 대회가 열린 4개 도시 중 하나이다. 근교를 포함한 도시 지역의 인구는 616만 명으로, 남미 유수의 세계 도시이다.[1]
목차
개요
- 행정 단위: 칠레 수도
- 면적: 641 km²
- 지역어: 스페인어
- 정부 공식 홈페이지: https://www.sandiego.gov/
산티아고는 길쭉한 칠레 영토의 중앙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산티아고는 칠레의 연방 수도이자 ‘산티아고 메트로폴리타나’ 지역의 중심지이다. 태평양 연안의 외항인 발파라이소에서 동남쪽으로 112㎞ 내륙에 있다. 산티아고는 칠레 중앙 계곡의 해발 520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칠레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칠레 인구의 1/3이 여기에서 산다. 대다수의 정부 기관과 대통령궁 라 모네다 (La Moneda)가 위치해 있다. 도시는 1541년 스페인 정복자 페드로 데 발디비아(Pedro de Valdivia)에 의해 ‘산티아고 델 누에보 엑스 트레모’라는 이름의 도시로 건설되었다. 이곳에는 원래 피쿤체 부족이 거주하였는데, 이후 이들은 스페인 정복자들의 통치 하에 놓였다. 안데스산맥과 해안 산맥으로 둘러싸인 넓고 평탄한 분지에 자리 잡아 도시 건립에 유리하였기에, 일찍이 에스파냐의 식민 도시로 세워졌으며, 식민 시대와 독립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이 나라의 수도였다. 독립 이후 도시로서의 발전은 더뎠으나 1900년대에는 소금 광산과 질산염 광산을 포함한 인근 광산에서 창출된 부가 산티아고에 유입되면서 산티아고는 급속한 발전을 경험하였다. 도시의 팽창은 다양한 문제를 일으켰다. 특히 환경문제에 관심이 집중되었는데, 비가 오지 않는 겨울철에는 대기오염이 임계점 도달하였고 겨울이 지나고도 개선되지 않는 스모그 문제는 사회문제가 되었다. 아울러 칠레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부유한 산티아고는 동시에 가장 불평등한 도시이다. 교육기관으로 국립 칠레대학교가 있는데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이다. 대학의 뿌리는 1622년 8월 19일 칠레 최초로 설립된 산토 토마스 데 아키노라는 이름의 대학이다. 산티아고에는 다양한 박물관이 많은데, 그 중에는 국가 차원에서 관리(스페인어: Dirección de Bibliotecas, Archivos y Museos)하는 국립역사박물관 , 국립순수미술관, 국립자연사박물관도 있다. 대부분의 박물관은 도시 중심의 건물에 위치하고 있으며 오래된 식민지 시절의 건물을 사용한다. 국립역사박물관은 왕립재판소 내에 있고, 산티아고 박물관은 카사 콜로라다(스페인어: Casa Colorada)에, 식민지박물관은 산 프란시스코 교회 한쪽에,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기 전의 미술을 다룬 박물관(스페인어: Museo de Arte Precolombino)은 옛 관세청에 있다. 국립순수미술관은 도시 중심에 있지만 20세기 초에 지어졌으며, 1947년에는 그 뒤쪽에 칠레 대학교 예술학부에 소속된 현대미술관이 지어졌다. 킨타 노르말 공원(스페인어: Parque Quinta Normal)에도 박물관이 있다. 공공 도서관으로는 국립도서관이 산티아고 시내에 있다. 국립도서관의 역사는 1813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도서관은 초기 공화정이 설립하였고 이후 한 세기가 지나 현재 위치로 옮겨져 국립문서보관소 본부와 함께 있다.[2]
지리 및 기후
산티아고는 칠레 중앙부 안데스산맥과 해안산맥 사이에 전개된 분지 안에 생성된 높이 450~650m의 고지대에 위치한다. 1541년 에스파냐의 페드로 데 발디비아가 건설했으며, 최초의 요새가 산타 루시아 언덕에 구축되었다. 이 도시는 산으로 둘러싸인 넓고 비옥한 평야가 이룬 거대한 산티아고 분지의 중심에 있다. 동쪽으로는 안데스산맥과 서쪽으로는 칠레 해안산맥이 있고, 북쪽으로는 안데스산맥의 횡단 산맥인 코르돈 데 차카부코가 막아서고 있으며, 남쪽 경계에는 앙고스투라 데 파이네 계곡이 있다. 산티아고 시내에는 마포초(Mapocho) 강이 흐른다. 이 강은 안데스산맥에서 발원한 산프란시스코강과 몰리나강이 합류한 것으로 산티아고 시내를 관류한 후에 태평양으로 유입한다. 마포초강 유역에 위치한 산티아로는 동쪽으로 높은 안데스 봉우리를 볼 수 있는 등 기후가 온화하고 경치가 아름다워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산티아고는 강수량이 매우 적은 반건조 기후를 띤다. 쾨펜의 기후 분류에 따르면, 지중해성 기후(Csb)와 스텝 기후(BSk)의 점이 지대에 해당하여, 이 도시를 포함한 이남 지방은 지중해성 기후, 북쪽은 더 건조한 스텝 기후를 나타낸다. 남위 33°27′에 위치한 이 도시는 아열대 고압대와 편서풍대의 영향을 주기적으로 받는다. 11월에서 이듬해 3월까지는 여름으로 온난 건조한 반면, 6월에서 8월은 겨울로 한랭 습윤하다. 연평균 기온은 14.2℃이지만 교차가 심한 편이다. 1월은 날씨가 따뜻하며 낮 최고 기온이 30℃ 가까이 치솟는다. 그러나 밤이 되면 15℃로 떨어져 선선해진다. 반면 6월과 7월의 평균 기온은 8℃ 안팎으로 내려가며 일교차는 건기인 여름만큼 심하지는 않다.
연평균 강수량은 282㎜으로 매우 적은데, 그 이유 중 하나는 해안선을 따라서 뻗어 있는 산맥이 바다의 하층운이 분지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강수의 계절적 편중 또한 심하다. 5월에서 9월까지에 걸쳐 연 강수량의 80%가 집중된다. 반면 여름에 해당하는 11월에서 3월에는 월 강수량이 10㎜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매우 건조하다. 도시의 오른쪽 안데스 산지로 더 가면 강설 현상을 볼 수 있으나, 산티아고는 1년 내내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지 않으므로 눈이 내리는 일은 드물다.[3]
역사
기원
몇몇 고고학적 조사에 따르면, 산티아고 분지에 처음으로 인간 무리가 정착한 시기는 기원전 제10천년기이다. 이 무리는 주로 수렵-채집형 유목민으로, 안데스산맥의 눈이 녹은 기간 동안 구아나코를 찾아 해안에서 내륙으로 이동하였다. 800년 경 마포초(스페인어: Mapocho) 강을 따라 농경 사회가 형성되면서 최초의 정착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주로 옥수수, 감자, 콩을 경작하고 낙타과(라마속과 비쿠냐속) 짐승을 길들였다.
설립
산티아고는 1541년 2월 12일에 스페인의 정복자 페드로 데 발디비아(Pedro de Valdivia)에 의해 산티아고 데 콤포 누에바 엑스트레마두라(Santiago de Nueva Extremadura) 도시로 건설되었다. 기공식은 옐렌 일(Huelén Hill, 현재 산타 루치아 일 Santa Lucía Hill)에서 열렸다. 발디비아가 여기에 도시를 건설한 이유는 온화한 기후와 중앙을 횡단하는 마포쵸강이 마푸체인의 방어선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건축물은 칠레 중부에 거주하고 있던 인디오의 부족 중 하나인 피쿤체족 사람들의 협력으로 만들어졌다.
발디비아는 도시 이름을 새로운 엑스트레마두라의 산티아고라는 뜻의 산티아고데누에바엑스트레마두라(Santiago de Nueva Extremadura)라고 지었다. 산티아고는 에스파냐의 수호성인으로,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성인을 가리킨다. 엑스트레마두라는 에스파냐의 지명으로, 발비디아가 태어난 곳이다.
발디비아는 산티아고의 쾌적한 기후, 풍부한 식생을 고려하여 이 지역에 도시를 설립하였다. 특히 산티아고 시내를 흐르는 마포초(Mapocho) 강이 두 개의 지류로 갈라져 흘렀다가 다시 합쳐지며 형성한 하중도라는 지형적 특성이 방어에 유리할 것으로 보았다. 산티아고는 1817년 칠레가 독립하기 전까지 약 300여 년의 긴 식민 통치되었다.
독립 후
1810년에서 1818년에 일어난 칠레 독립 전쟁의 결과, 1818년에 베르나르 오이긴스, 호세 데 산 마르틴의 활약으로 칠레가 해방되면 서방의 장점 서부였던 마이푸 전투에서 약간의 피해를 받았지만 산티아고 공식적으로 칠레 공화국의 수도로 지명되었다.
태평양 전쟁에 승리한 1880년대는 페루, 볼리비아에서 합병한 북부 칠레에서 질산염이 생성되고 나라가 번영한 것으로, 수도 산티아고도 발전했다. 1930년대에는 산티아고의 근대화가 시작, 칠레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 인구도 증가했다. 1985년에 지진이 발생, 센터의 역사적인 건물이 파괴되었다. 1990년에는 국회의사당 약 120km 떨어진 발파라이소로 이전했다.
산티아고의 성장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도 계속되었지만 1970년대에 사회 변동은 이 도시에도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73년 9월 11일 쿠데타를 일으킨 피노체트의 동조자들이 대통령궁에서 항복을 거부하며 저항하는 아옌데 대통령을 살해하기 위하여 산티아고의 상징인 대통령궁을 폭격한 사건은 당시 칠레가 경험했던 격변을 산티아고도 피해 가지 못했다는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후 1985년 지진으로 도심 지역의 역사적 건물들이 파괴되기도 하였다.
1990년 민주주의로의 전환이 시작되면서 산티아고의 인구는 300만 명을 넘어섰으며 대부분의 인구는 남부에 거주하였다. 라플로리다가 가장 인구가 많은 지역이었고 푸엔테알토와 마이푸가 그 뒤를 이었다. 이 지역의 급증하는 인구에 대처하기 위하여 중산층 가구를 위한 주택 건설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한편, 고소득층은 현재 바리오 알토 (Barrio Alto)라고 불리는 산기슭으로 이주하여 라스콘데스 인구의 증가를 가져왔으며, 비타쿠라(Vitacura)와 로 바르네체아(Lo Barnechea)와 같은 새로운 코무나(시)를 탄생시켰다.
도시의 팽창은 다양한 문제를 일으켰다. 특히 환경문제에 관심이 집중되었는데, 겨울철에 대기오염이 임계점 도달하였고 개선되지 않는 스모그 문제는 사회문제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환경문제, 특히 대기오염에 대처하기 위하여 칠레 정부는 산업 오염을 줄이기 위한 입법 조치를 실행하고 차량 사용을 제한하였다.
21세기에도 산티아고는 계속해서 빠르게 발전하였다. 도시의 부를 상징하는 고층 건물의 건설이 줄을 이었는데, 코스타네라 센터(costanera center) 내에 위치한 고층 빌딩 티타늄 라 포르타다(titanium la portada)와 그란 토레 산티아고(gran torre santiago)가 대표적이다. 산티아고의 고도성장은 동시에 도시가 안고 있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부각했으며, 이는 산티아고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인 문제로 대두되었다.[4]
경제
산티아고는 칠레 제조업과 금융업의 중심지로, 칠레 국내 총생산(GDP)의 약 45%를 점하고 있다. 제조업의 주요 생산품은 식품, 섬유, 신발, 의류 등의 경공업 제품들이며, 금속 공업과 구리 채광과 같은 광업도 발달해 있다. 산티아고에는 증권거래소, 수백 개의 지점을 가진 주요 은행들의 본사, 그리고 보험회사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금융업의 중심지로서의 면모는 도심에 자리한 라틴아메리카의 최고층 건물인 그란토레산티아고(Gran Torre Santiago)를 포함한 코스타네라 센터(Costanera Center)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라틴아메리카 및 카리브해 경제위원회와 같은 국제기구는 산티아고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에는 경제모델에서 다양한 변화가 일어났으며, 농업 및 임업 수출 붐과 함께 칠레는 경제 개방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이러한 경제의 변화는 국토의 균형 발전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상되었으나, 오히려 정부의 경제 활동과 자본은 산티아고에 집중되었다. 이후 군사 독재 시기와 콘세르타시온 정부 하에서도 지방 분권화을 추진하여 산티아고에 집중된 국가 경제를 분산시키겠다는 선언이 계속되었으나 이러한 선언이 실현되지는 않았다.
이후 칠레의 경제 구조는 변화를 경험하였다. 1969~1994년 기간 동안 산업 부문에서의 고용은 30.8%에서 21.8%로 감소했지만, 서비스 부문에서의 고용은 30.7에서 37.5 %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칠레 경제의 세계화와 관련이 있다. 1980년대 중반 강력하게 추진된 금융시장 개방과 함께 전통적으로 금융의 중심지였던 산티아고는 외국은행의 본사를 유치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허브로 거듭났다.
지난 수십 년간 산티아고의 꾸준한 경제 성장은 이 도시를 현대적인 대도시로 만들었다. 칠레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발전한 산티아고는 그러나 가장 불평등한 도시가 되었다. 산티아고의 지니계수는 0.47로 2020년 칠레의 지니 계수인 0.45보다 높은 수준이다. 이러한 불평등은 도시 내의 불균등한 발전으로 이어졌다. 산티아고의 서쪽 절반(zona poniente)은 평균적으로 높은 수준의 공공 및 민간 시설이 집중된 반면, 동쪽 지역은 서쪽의 풍요와 편의를 공유하지 못하고 있다.[5]
교통
산티아고는 칠레 국가 교통망의 주요 거점이다. 19세기 중엽 발파라이소(Valparaíso) 항구로의 철로가 개통된 후 산티아고는 칠레 북부와 남부 지역과 연결되었다. 고속도로도 산티아고에서 서쪽으로는 산안토니오(San Antonio) 주의 항구들로, 북서쪽으로는 발파라이소 항구로 뻗어 있다. 도심 서북쪽 15㎞의 푸다우엘(Pudahuel)에 위치한 산티아고 국제공항(Aeropuerto Internacional Comodoro Arturo Merino Benítez)은 칠레 최대 규모로 국내의 다른 주요 도시뿐만 아니라 세계 주요 도시들을 연결한다.
산티아고의 철도 중앙 역 (Estación Central)에서 칠레 중부 탈카(Talca) 등으로 칠레 국철이 달리고 있다. 산티아고 대도시권에는 메트로 트렌(Metrotrén)로 불리는 근교 전철이 산 페르난도(San Fernando)를 향해 달리고 있다.
산티아고는 프랑스의 협력으로 건설된 7개 노선의 지하철(메트로 = Metro)가 현재 1호선, 2호선의 확장이 계획되어 있다. 비교적 안전한 수송으로 신뢰할 수 있다.
관광
산티아고에는 다양한 문화유산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란 산티아고 지역에는 국립문화재협의회가 관리하는 174개의 유적지가 있다. 이 중 93개는 도시의 역사적인 중심지인 산티아고 코무나 내에 있다.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유적지는 아직 없지만 칠레 정부는 이미 엘 플로모의 잉카 성역, 샌프란시스코의 교회와 수녀원, 대통령궁인 라모네다 궁전을 유네스코에 등재하기 위하여 심의를 신청해 놓은 상태이다.
아르마스 광장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은 산티아고의 건설과 관계 깊은 상징적인 장소이다. 이 격자무늬의 정사각형 광장의 설계는 1541년 페데로 데 발디비아(Pedro de Valdivia)가 임명한 페드로 데 감보아(Pedro de Gamboa)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아르마스 광장은 역사적 명소인 산티아고 대성당(Catedral Metropolitana de Santiago), 산티아고 중앙우체국(Correo Central de Santiago), 산티아고 최고법원이었던 칠레 국립 역사박물관(Museo Histórico Nacional), 라모네다 궁(Palacio de La Moneda), 산티아고의 관공서, 옛 시의회 건물 등으로 에워싸여 있다.
아르마스 광장은 산티아고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광장 내부에는 유럽식 카페가 분포하고, 다양한 길거리 공연이 열려 연중 시민들과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만남의 장소이다. 광장에서 가장 이목을 끄는 건축물은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두 개의 첨탑이 인상적이며 독특한 유럽 양식으로 건축된 것이 특징이다.
산티아고 대성당은 아르마스 광장의 서쪽에 위치하며, 산티아고 대주교좌 성당이자, 산티아고 대교구의 중심이다. 성당 내부의 천장에는 아름다운 유럽식 벽화가 그려져 있어서 마치 미술관을 방불케 한다. 이 성당은 다른 나라의 대성당과 마찬가지로 가톨릭 건축물의 위엄을 자랑하지만, 1558년 건립 당시부터 지진과 화재가 빈발하여 소실과 복구가 반복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현재의 성당은 1748년에 착공하여 1800년에 완공되었다.
라모네다 궁
라모네다 궁(Palacio de La Moneda)은 칠레 대통령의 집무실 및 거주지로서 산티아고 도심의 중앙에 위치한다. 이 건물은 이탈리아 건축가인 호아킨 토에스카(Joaquín Toesca)에 의해 1784년에 착공되어 1805년에 완공되었다. 이 궁전은 본래 에스파냐어로 화폐를 뜻하는 모네다(Moneda)의 의미대로 조폐국으로 사용되다가, 1845년 6월 마누엘 불네스(Manuel Bulnes) 행정부 시기부터 대통령 관저 및 정부 부처로 사용되고 있다. 라모네다 궁은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대통령이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의 쿠데타 세력에 맞서 끝까지 저항하다가 1973년 9월 11일 공군의 폭격으로 즉사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2004년, 라모네다 궁의 남쪽에 시민 광장(Plaza de la Ciudadanía)이 설립되어 시민들과 관광객에게 만남과 여가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으며, 이곳에서 2010년 칠레의 독립 기념행사가 거행되었다. 이 광장의 지하에는 기존의 벙커를 개량하여 설립한 라모네다 문화센터(Centro Cultural Palacio de La Moneda)가 있다. 이 문화 센터에는 칠레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와 잉카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전시회가 개최되어 라모네다 궁과 함께 관광객들의 방문 명소가 되고 있다.
산크리스토발산
산크리스토발산(San Cristóbal)은 아르마스 광장에서 북동쪽으로 약 2㎞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이 산의 높이는 880m에 달하여 산티아고에서 최고로 높은 렝카 산(Cerro Renca, 905m) 다음으로 높은 곳이다. 산크리스토발 산의 명칭은 에스파냐계 칠레 인 산 크리스토발(San Cristóbal)의 가문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본래의 명칭은 신의 장소 또는 신들이라는 의미의 ‘Tupahue’이다. 이 산은 산티아고 중심부에 위치하므로 아르마스 광장을 포함한 도시의 전경을 관람하려는 시민들과 관광객이 자주 찾는다. 또한 산의 정상에는 마리아 상(Imagen de la Virgen María)이 있어서 가톨릭교 신자들이 내왕하기도 한다.[6]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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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 ↑ 〈산티아고〉, 《위키백과》
- ↑ 〈산티아고(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 〈산티아고의 위치와 자연환경〉, 《네이버 지식백과》
- ↑ 〈산티아고〉, 《요다위키》
- ↑ 〈산티아고의 경제〉, 《네이버 지식백과》
- ↑ 〈산티아고의 주요 관광 자원〉,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
- 〈산티아고〉, 《위키백과》
- 〈산티아고〉, 《요다위키》
- 〈산티아고(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산티아고의 위치와 자연환경〉, 《네이버 지식백과》
- 〈산티아고의 경제〉, 《네이버 지식백과》
- 〈산티아고의 주요 관광 자원〉,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
남아메리카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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