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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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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농

자작농은 자기가 소유한 농지를 주로 자가 노동력으로 경작하는 농업이다.[1]

개요

자작농은 삼국시대 이후 토지 공유제 또는 국유제는 고려 중기 이후 토지제 문란과 더불어 지주제·소작제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농민들은 소작인이 되어 토지의 소유권은 물론 경작권마저 보장받지 못하였다. 1910년 일제가 실시한 토지조사업으로 일본인과 한국인 지주가 증가하였다. 1930년 자작농은 전체농가의 19% 정도에 불과했다. 광복 후 농지개혁으로 지주적인 토지소유제는 자작농적 소유제도로 바뀌게 되었다. 토지개혁을 통한 자작농의 육성은 우리나라 농촌사회의 안정과 질서를 마련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2]

상세

자작농은 자기 소유의 농지에 자신이 직접 경작하는 농민을 말한다.

타인의 농지를 빌려 경작하는 소작농에 비하면 소작료를 부담하지 않고, 농지를 빼앗길 염려도 없으며, 생산력 증가를 위한 시설장비를 자주적으로 할 수 있는 등, 안정적 요인을 지니고 있으므로 생산력이 높으나, 정치적으로는 보수적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자작농이 경제적으로 안정되었다고 하여도 그것은 상대적이며,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변동에 대하여는 결코 안정적이 아니다.

상품경제의 농촌침투가 진전됨에 따라 자작농이 몰락하여 자소작농이나 소작농이 격증하게 되었고, 광복 전에는 농촌에서 소작쟁의가 빈발하였다. 그러므로 8·15광복 후 제헌헌법 113조의 규정에 따라 경자유기전(耕者有其田)의 원칙에 입각하여 소작제도를 금지하고 자작농을 확립하기 위한 농지개혁이 단행되었다. 그러나 자작농의 경영규모는 영세화하고, 경제의 고도성장에 비하여 농업수입만에 의존한 자작농의 경영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따라서 자작농의 경영자는 겸업수입원을 찾게 되고, 겸업노동자화되어 갔다.[1]

내용

토지제도는 고구려 · 백제 · 신라 등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생활의 수단이며 사회질서의 기반이 되어왔다. 대체로 삼국시대의 토지제도는 부족제의 조직에 의한 공유제가 그 특징이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국가조직을 마련하고 공유제(公有制), 즉 공전제도를 도입하였다.

직전(職田) · 사전(賜田) · 구분전(口分田) · 녹전(綠田) 등 당제(唐制)를 모방한 것이었다. 문무백관에게는 직전 · 사전을 주었고, 백성에게는 정전(丁田)을 주어 경작시켜 조(租) · 용(庸) · 조(調)를 납부하게 하였다.

백성은 토지의 경작권과 수조권만 갖고, 소유권은 없었다. 문무백관들의 사전 · 녹전의 일부가 농민에게 대경(代耕)하고 그 수확의 일부를 나누었다. 그것이 한국 토지소작의 기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의 토지제도도 신라의 그것을 따라 국유제를 원칙으로 하였다. 반전제(班田制)로 과전 · 구분전 · 공음전 · 녹과전 · 둔전 등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백관공신 등은 그 토지의 일부 또는 전부를 타인에게 경작하게 하고 그것을 세습화하였다. 왕가의 세력이 쇠퇴하고 권문세가들의 횡포가 심해지자 공전이 사유화되고 그 매매양도가 자유로워지게 되었다.

토지사유와 토지겸병이 이루어졌고 농민들을 사역하여 소작제도를 실현시키게 되었다. 물론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사전(賜田)의 경작자는 소작인이라기보다 농업노동자(농노)라 함이 옳을 것이며 특히 반전제도가 문란하게 된 고려 중기부터 사전경작(私田耕作)의 농민은 이중적인 소작료를 내게 되었다.

즉, 정부에 대해서는 조세를 납부하였고, 토지소유자에 대하여서도 소작료를 내야만 하였다. 삼국시대 이후의 공유제 · 국유제는 고려 중기 이후의 토지제 문란과 더불어 지주제 · 소작제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당시의 문란하였던 공전제도를 바로잡기 위하여 공사의 전적을 정리하려 하였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사전의 향유를 묵인하는 결과가 되기도 하였다. 고려는 주로 무세지(無稅地)를 사전으로 한 데 반하여 조선은 과세지를 사전이라 하고 무세지를 공전이라 하였다.

사전은 오늘날의 민유지이며 거기에 과세가 되었다. 정부는 일반관리에게 봉록과 공양을 지급하는 번잡을 덜기 위하여 관청과 관공리로 하여금 전세의 징수권을 주었다. 특히 조선 중기에 이르러 왕조관가의 토지겸병이 심해졌고 거기에다 훈련도감과 각 영 아문에 둔전을 주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인접농토가 사전으로 양정(量定) 편입되었고, 그 나머지 공전과 사전이 혼동되어 토지제도의 문란을 가속화시켰다.

그러던 중에 권문귀족과 양반들은 토지를 빼앗기도 하였고, 그렇게 해서 그들은 실질적인 지주가 되었고 많은 농민들은 소작인이 되었다. 토지의 소유권은 물론 경작권마저 보장받지 못한 소작인들은 한편으로는 정부의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시달리게 되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지주들의 횡포에 시달렸다.

1910년부터 약 10년 간 일제는 농토의 소유권이 불명확하고 양전이 문란하다는 이유로 그것을 법적으로 확실히 정립하기 위한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였다. 이와 같은 사업의 목적은 표면적으로는 토지점유의 법적 확립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일본인들의 토지병합의 법적 근거를 얻자는 데 있었다고 하겠다.

일제는 토지조사의 과정에서 불명확한 농토를 밝혀 그것을 일본인 또는 지주에게 귀속시켰다. 그리고 토지조사사업 후의 농토매매를 법적으로 보장하여 일본인들의 토지매입을 위한 법적 보호를 마련하였다. 그 결과 많은 일본인 지주와 함께 거기에 동조하는 한국인 지주가 등장하게 되었다.

1930년대만 하더라도 그 당시 80%를 넘는 우리 농민 중 77%가 소작이었으며, 토지겸병은 날로 늘어가게 되었다. 그 결과 농촌의 중견이었던 자작농은 해마다 소작농으로 전락하여 그 수가 줄어들게 되었다.

자작농의 육성문제는 경제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사회적 · 문화적인 뜻도 큰 것이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소작쟁의가 빈번히 일어났으며 그것은 곧 농촌의 평화를 교란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곧 농업개량을 가로막았으며 농촌의 진흥과 농촌문화의 계발을 크게 저해하였다.

세계의 많은 국가 중 가장 이상적인 농업국이라고 하는 덴마크는 가장 아름다운 농촌, 진보된 농업, 평화스러운 농민생활을 누리고 있다. 평화의 낙원, 공동사업의 추진, 정신적 문명 등 농촌의 이상을 실현시키고 있지만, 그와 같은 농업국가를 형성하는 기본적 요인은 곧 자작농의 육성에 있는 것이다. 즉, 전체농가의 92%가 바로 자작농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1930년 당시 자작농이 전체농가의 19% 정도에 불과하였으며, 그 수치도 해마다 줄어가는 형편이었다. 반면에 지주의 수는 약간 늘어가고 있었는데, 이는 농토는 한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지주가 토지를 겸병하여 농업생산형태가 차차 지주소작제의 유형으로 바뀌어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물론 그와같은 토지소유의 추세를 막기 위해서는 근본대책으로 토지제도의 합리적 소유를 위한 농지개혁을 추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토지를 배타적으로 소유함으로써 지주제 · 소작제를 확립해갔다. 이를 위하여 그들은 수리시설 · 농지개량 등에 주력하였으며, 그에 따른 각종 법령과 조세제도를 만드는 데 정책을 집중시켰다.

즉, 「소농자토지세습재산법(小農者土地世襲財産法)」의 제정, 소작인의 이익을 보호한다는 「소작법(小作法)」의 제정 및 토지수용, 소작료제한 등에 의한 강제적인 대규모의 자작농 육성 등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모두가 궁극적으로는 일본인지주의 육성과 그들의 식량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한 증산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지 우리의 농촌 · 농민 · 농업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아니었다. 그들의 농업정책의 기본은 토지소유의 개혁보다는 오히려 간접적인 농촌진흥책과 농업경영의 합리화, 그리고 시설 등의 개선에 주력하는 것이었다.

농민이 자작농이 되는 길은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 하나는 토지를 매입하여 그것을 자경하는 방법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국유지를 개간하여 그것을 합법적인 방법으로 소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인 개간지 또는 간척지에 이주하여 자작하는 방법은 일종의 내국식민(內國植民)이며 그것을 자작농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원칙적으로 자작농의 창설은 개간 또는 간척을 할 수 있는 미개간지가 많이 남아 있고, 거기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농민의 수가 적을 경우 가능하다. 소작인의 경영지를 변경하지 않고 토지소유권의 귀속을 경자에게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곧 자작농의 육성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토지는 한정되어 있고 농민이 많은 조건에서는 자작농을 육성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것을 강제적으로 추진하려 하면 지주가 소유하고 있는 토지를 소작인에 매도하도록 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또한, 그 경우 소작인이 자기가 소작하고 있는 토지를 매수한다면 큰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않고 지주가 가지고 있는 다른 소작인의 소작지까지 매수하게 된다면 그 소작인도 스스로의 농토를 잃고 떠돌이가 될 수밖에 없다.

적지않은 소작인이 자작농이 되기보다 오히려 영세자작농의 농토가 대지주에 의한 겸병으로 자작농의 소작농화가 늘어났고, 그 나머지 일부 자작농 및 소작농들은 토지를 잃고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일본 또는 만주 북간도로 유랑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소작농지였던 토지를 소작농이 토지를 매입하여 자작농이 되는 경우와 또 하나는 대자작경영의 지주들이 소유지를 분할매각하는 두 방법이 자작농의 육성방법이었지만, 끝내 실현을 보지 못한 채 일제는 1945년 8월 15일 패전과 함께 식민지통치의 막을 내렸다.

사실 자작농을 육성하는 것은 비단 농촌의 건전한 육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 경제적 안정을 낳게 하는 거의 절대적인 명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많은 국가에서 토지소유의 민주화, 즉 민주주의적 농지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일반적인 농업 · 농민 · 농촌문제 해결의 관건이 되고 있다.

일제가 물러간 뒤 토지제도는 자생적인 개혁이 되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연합국의 승리로 얻어진 광복이고 독립이었기 때문에 토지개혁 자체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 제약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종전까지의 지주제 · 소작제에 의한 토지제도를 청산하고 새로운 토지제도를 수립해야 할 요청과 필요성에 직면하였다.

경자유전이라는 시대적 조류와 당시의 객관적 정세 등으로 말미암아 일부 지주측에서는 자진하여 자기소유의 농토를 농민에게 분양하려는 사람도 생겼다. 그런가 하면 일부 일본인 소유의 농토는 귀속재산으로 소작인들이 선취특권(先取特權)을 갖는 성향도 나타났다.

광복 후 농지개혁이 이루어지기까지 주로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의 광범한 토지는 일시 신한공사(新韓公社)에서 그 관리를 이어받기도 하였다. 토지개혁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찬성하고 있었지만 그 방법에서는 의견이 백출하였다.

결국 유상매상(有償賣上) · 유상분배(有償分配)의 원칙에 따라 각호의 가족노동력의 평가와 농업시설의 대소 등을 기준으로 토지를 분배하기에 이르렀다. 매수된 토지의 상환을 해당농지의 평년작 생산고의 15%로 하였으며, 5개 년 동안 현금 또는 현물로 연부상환(年賦償還)하게 하였다.

이로써 2,000여 년 동안 내려온 토지소유, 즉 공유제 · 국유제 · 지주제 · 소작제를 거쳐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라 토지의 자작농 사유제가 법적으로 확립되었다. 농지개혁 이전의 지주적인 토지소유제는 이로써 소농적인 자작농적 소유제도로 바뀌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한국의 농업은 타력에 의한 근대적 토지소유제도를 확립시켜왔지만 아직 전근대적인 토지소유제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토지소유제도도 1960년 이래의 급속한 공업화와 도시화의 추세에 힘입어 많은 이농(離農)이 생기게 되었고, 그 나머지 농촌에서의 토지제도에도 적지않은 변모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농촌에서는 농업노동력의 부족이 두드러졌고, 특히 청장년노동력의 부족이 현저하게 나타났다. 농촌에서의 여성 및 노령노동력 성향은 농촌에서의 노동력에 새로운 문제를 야기시켰다.

지금 농촌에서는 농경지정리사업이 진전되고 있으며 거기에 많은 농기구가 투입되었다. 말하자면 농업기계화시대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영세한 토지의 소유가 농업기계화를 촉진시키는 데 있어 결정적인 저해요인이 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지개혁을 통한 자작농의 육성은 분명히 한국 농촌사회의 안정과 질서를 마련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2]

동영상

각주

  1. 1.0 1.1 자작농〉, 《두산백과》
  2. 2.0 2.1 김대환,〈자작농〉,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

  • 자작농〉, 《두산백과》
  • 자작농〉,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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