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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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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

이이(李珥)는 조선 중기의 학자‧정치가이다.

개요

  • 이이는 조선의 유학자, 관료이다. 조선의 천재로 손꼽히는 인물 중 하나이다. 장원 급제를 9번이나 하고, 이기일원론을 겨우 23세일 때 정립하였다.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이자, 이론에만 몰두하지 않고 현실 개혁에도 적극적으로 노력한 정치인. 한국 오천 원권 지폐의 모델이며, 신사임당이 오만 원권 지폐의 모델이 되며 모자(母子)가 지폐 인물이 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본인은 평생 붕당의 대립 해소에 진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후 서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오랫동안 유학자의 면모만 부각되어 왔지만 정치인으로서도 영향력이 컸다. 생전에 이이의 서얼 차별 완화 등의 개혁 정책은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사후 조선에서 거론된 수많은 정책과 개혁론은 이이의 사상과 정책에 뿌리를 두고 있다.[1]
  • 이이는 (李珥, 1536년 12월 26일~ 1584년 2월 27일)는 조선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관직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다. 서인(西人)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이언적, 이황, 송시열, 박세채, 김집과 함께 문묘 종사와 종묘 배향을 동시에 이룬 6현 중 하나다. 아홉 차례의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의 업적은 성리학에서의 이기일원론의 학문을 밝힌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15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죽자 3년간 여묘살이를 한 후, 아버지가 계모 권씨와 재혼하자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이 때문에 훗날 그가 죽은 후에까지도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려다가 환속한 사람'이라고 동인과 남인이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다. 이준경이 죽기 직전 붕당의 폐에 관한 유차를 올리자 '죽음에 이르러 말이 악하다'고 공격하였으며 이후 이준경의 처벌까지 상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일 당쟁이 현실화하자 스스로 크게 뉘우치고 동인, 서인 사이의 당쟁 조정을 평생 정치 이념으로 삼았다. 그는 붕당을 조정하지 못한 한을 남긴 채 죽었으며,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성혼, 송익필, 김장생 등과 함께 기호 지역이 기반인 서인의 종주로 추앙된다. 그를 문묘에 종사하는 문제를 놓고 인조반정 이후 50년간 논쟁의 대상이 되다가 숙종 때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집권한 후 문묘에 종사되었다.[2]
  • 이이는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자 정치가로 <동호문답>, <성학집요> 등의 저술을 남겼다. 현실ㆍ원리의 조화와 실공(實功)ㆍ실효(實效)를 강조하는 철학사상을 제시했으며, <동호문답>ㆍ<만언봉사>ㆍ<시무육조> 등을 통해 조선 사회의 제도 개혁을 주장했다. 한국의 18대 명현(名賢) 가운데 한 명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되어 있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이다. 1536년(중종 31) 음력 12월 26일에 사헌부 감찰을 지낸 이원수(李元秀)와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의 셋째 아들로 외가가 있던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22세(1557년)에 성주목사(星州牧使)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였고, 이듬해 예안(禮安)에 낙향해 있던 이황(李滉)을 찾아가 성리학에 관한 논변을 나누었다. 1558년(명종 13) 별시(別試)에서 천문·기상의 순행과 이변 등에 대해 논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으로 급제했으며, 1564년(명종 19년)에 실시된 대과(大科)에서 문과(文科)의 초시(初試)·복시(覆試)·전시(殿試)에 모두 장원으로 합격하여 삼장장원(三場壯元)으로 불렸다. 생원시(生員試)·진사시(進士試)를 포함해 응시한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으로 합격하여 사람들에게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저술로는 <성학집요(聖學輯要)>, <동호문답(東湖問答)>, <경연일기(經筵日記)>, <천도책(天道策)>, <역수책(易數策)>, <문식책(文式策)>, <격몽요결(擊蒙要訣)>, <만언봉사(萬言封事)>, <학교모범(學校模範)>, <육조계(六條啓)>, <시폐칠조책(時弊七條策)>, <답성호원서(答成浩原書)> 등이 있으며,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등의 문학 작품도 전해진다. 그의 저술들은 1611년(광해군 3) 박여룡(朴汝龍)과 성혼(成渾) 등이 간행한 <율곡문집(栗谷文集)>과 1742년(영조 18)에 이재(李縡)와 이진오(李鎭五) 등이 편찬한 <율곡전서(栗谷全書)>에 실려 전해진다.[3]
  • 이이는 조선시대 전기 유명한 유학자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평화'라는 제목의 글을 따로 쓴 일은 없지만 그의 사상 가운데에는 '평화적인 사상'이 들어 있다. 유년 시절의 그의 행실을 살펴보면 그는 언행이 일치하는 평화주의자였 음을 알 수 있다. 율곡은 사생활에서나 공적인 생활에서나 일관되게 갈등을 해소하고 사람들을 포용함으로써 평화를 가져오는데 평생토록 힘을 기울였다. 이이는 성리학의 통합적 우주관을 이론화 한 이기론(理氣論)을 제창하였다. 율곡은 인간의 네 도덕정신인 사단과 일곱 가지 감정인 칠정을 대립적으로 보는 인성론을 거부하였다. 오히려 상대적인 시각에서 선과 악을 해석해 화합과 평화를 추구하였다. 영정조 시대가 조선왕조의 중흥기로 불리는 이유 중 하나인 탕평책도 이이의 이런 화합, 통합의 정신에서 연유한다.

출생과 가계

  • 이이는 1536년 강원도 강릉부 죽헌동에 있는 외가인 오죽헌(烏竹軒)에서, 덕수 이씨 통덕랑 사헌부감찰 이원수와 평산 신씨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오죽헌 별채에서 태어났는데, 신사임당이 태기를 느끼게 된 계기가 흑룡이 바다에서 하늘로 오르는 꿈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그가 태어난 방은 몽룡실(夢龍室)이라 일렀고, 아이 때의 이름은 '현룡'(見龍)이라 지었다가 뒤에 이(珥)로 바꾸었다. 이후 경기도 파주에 자리한 본가로 와서 생활하였다.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는 사헌부 감찰, 수운 판관과 통덕랑을 지냈으며, 중종 때의 형제 정승인 경재 이기, 용재 이행의 5촌 조카였는데, 이기는 의정부영의정을, 이행은 의정부좌의정을 각각 지냈다. 또한 종숙(당숙) 이기와 이행은 당대의 실권자들이었고, 그들은 외가쪽으로는 생육신 성담수, 성담년의 조카이고, 사육신 성삼문의 외종조카들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이원수는 통덕랑 자현부감찰에 이르렀다.
  • 벼슬이 낮았던 이이의 아버지인 이원수는 승진하고자, 일부러 당숙이자 김종직의 문인이며 글을 잘 썼던 이기의 문하에 출입했으나, 부인 신사임당의 권고로 그만두었다. 야사에 의하면, 신사임당이 남편 이원수에게 이기의 집에 출입하다가 화를 당할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과연 이기는 청렴했고 글도 잘 지었으며 벼슬이 의정부영의정까지 이르렀지만, 을사사화에 가담한데다 권력을 남용한 탓에 명종 말엽 관작을 삭탈 당했다. 어머니 신사임당은 학문적 소양이 깊었고, 시문과 서화에 능했다. 또한 어머니 신사임당은 높은 덕을 지닌 인격자였을 뿐만 아니라, 절개가 굳고 시부모를 잘 섬긴다고 칭송을 받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어머니를 두었던 이이는 어려서 어머니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이런 교육환경 덕에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였다. 그의 외할아버지 진사 신명화(申命和)는 조광조 등과 가까이 지냈으며, 기묘사화 때의 의리를 지켜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외할아버지 신명화는 아들이 없이 딸만 여럿 두었는데, 딸들에게도 유교, 성리학을 가르치고, 공자, 맹자, 주자의 도리를 가르쳤다.
  • 묘막에서 독서에 열중하던 이이는 불교 서적을 읽고 유교와 색다른 학문에 흥미를 느껴 3년 상이 끝난 1554년(명종 9) 금강산 마가연(摩訶衍)에 들어가 자신의 아호이기도 한 석담(石潭)이라는 법명으로 승려가 되어 불교를 연구하였다. 불도를 닦았는데, 그가 수행하는 중 승려들 간에 생불이 출현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그러나 승려 생활 내내 인간이 왜 태어나고 왜 죽는가에 대한 그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 결국 불교가 유교에 미치지 못한다고 확신하고 입산 1년 만에 마가연을 떠나 금강산에서 내려와 환속한다. 하지만 율곡 이이가 주기론을 말하고 아래의 연비어약 (鳶飛魚躍) 시를 남긴 것은 이미 불교에 대한 공부를 마쳤음을 말한다. 산에서 하산하며 그는 승려에게 이와 같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 불교의 무념 무욕이 그의 기질과는 맞지 않다고 판단, 1555년 20세에 금강산에서 내려와 다시 성리학에 탐독하며 유교의 진리를 통해 현실 문제를 타개하겠다는 다짐을 설파하며 《자경문》(自警文)을 집필하였다. 그러나 그가 한때 승려로 있었다는 점은 후일 동인과 남인에 의해 인신공격의 대상이 된다. 이이가 죽고 2백 년이 지난 뒤에도, 근기남인의 지도자 허목, 윤휴, 윤선도는 이율곡을 학자의 탈을 쓴 스님이라고 공격했다.
  • 1581년에 이이는 십만 양병설을 주장하였고 이와 더불어 군사훈련 등을 주창했으나, 선조와 대신들의 반대와 거부로 인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탄핵으로 인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후학양성에 전념하였다. 그 후 그는 다시 조정의 호출을 받아 이조판서와 판돈령부사를 지냈다. 그는 1584년에 47세를 일기로 서울 대사동 사저(舍邸)에서 세상을 떠났다. 무덤은 경기도 파주에 있는 자운산에 있는데, 아주 가까운 위치에 그를 배향한 서원인 자운서원이 있어서 지금은 율곡 유적지-라는 형태로 한 동선에서 관람할 수 있다. 참고로 이 묘역은 이이과 부인 노씨의 묘 이외에도 아버지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합장묘, 이이의 형 이선의 묘, 이이의 장남 이경림의 묘, 장손 이제의 묘 등이 함께 자리하고 있는 가족묘이다.

십만 양병설

  • 이이는 선조에게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여 동인의 반감을 사기도 하였다. 그는 일본의 전국시대는 종결될 것이며, 일본을 통일할 무사는 일본 내 세력 내 갈등 완화와 국내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목적으로 미구에 명나라나 조선을 침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의 도발에 대한 대응으로 그는 10만 명의 정병을 양성하여 일본의 침략에 대비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견해는 동인에 의해 왕을 현혹하기 위한 발언으로 치부되었고, 서인조차 그의 생각이 지나친 상상력과 허언이라며 호응해주지 않았다.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던 당시, 조선의 총 병력 수는 장부상으로는 30만 명이 넘었으나, 실제 전투 가능한 병력 숫자는 1,000명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이이는 1582년 이조판서와 형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여진족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대제학을 역임하고 우찬성에 올랐다.

이이의 영향과 계승

  • 이이의 문인으로는 조선 예학의 종장으로 불리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장으로 순절한 중봉(重峯) 조헌(趙憲)이 있다. 김장생의 문인으로는 그의 아들인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을 비롯해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 포저(浦渚) 조익(趙翼), 계곡(谿谷) 장유(張維), 상촌(象村) 신흠(申欽) 등이 있다. 또한 친우인 우계 성혼의 문인들도 율곡의 문인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는데 성혼의 학맥은 사위인 팔송(八松) 윤황(尹煌)으로 이어져, 그의 아들인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와 손자 명재(明齋) 윤증(尹拯)으로 계승되었다. 이들은 이후 송시열과 윤증이 반목하여 노론과 소론으로 분기되기 전까지 학문적 기풍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 했다. 이처럼 율곡의 문인들은 퇴계 문인들로 이루어진 영남학파와 쌍벽을 이루는 기호학파를 이루었다. 그들은 학문적으로는 율곡의 성리학을 계승하였고, 정치적으로도 서인 세력의 주축으로서 이후 조선 후기 정치를 주도하였다. 율곡전서의 문인록에는 김장생, 조헌 등 여든네 명의 이름이 올라 있다. 이들은 동문계를 만들어 봄가을로 서원에 모였는데, 그 규정은 한결같이 이이가 지은 향약 절목을 따랐다고 한다.
  • 이이의 추숭 사업은 문인들의 정치적 부침에 따라 이루어진 경향이 있는데, 이이는 인조반정 이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다음 해에 문성(文成)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또한 숙종 7년에는 문묘에 종사되었다. 하지만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이 축출될 때 문묘에서 출향되었다가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복향되었다. 파주의 자운서원 등 전국의 20여 개 서원에 종향되었다. 이이는 조선 후기의 정치적 굴곡에 따라 추숭의 부침이 잦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이의 문인들과 그의 학통을 이은 학자들은 이이에게 가해진 비난과 공격에 반발하여 그를 변호하면서 억울함을 호소한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렸는데, 『율곡전서』에는 그러한 내용의 상소들이 따로 모여 있다. 『율곡전서』의 원향록(院享錄)에는 율곡 이이를 모신 전국 스물두 개 서원이 나열되어 있다. 그 가운데 소현서원(紹賢書院)은 이이가 황해도 석담(石潭)에 정착하면서 세운 은병정사(銀甁精舍)가 모태가 되어 설립된 서원으로 광해군 2년(1610)에 소현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자운서원은 이이의 묘가 있는 경기 파주에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효종(孝宗) 때 사액을 받았다.

동영상

각주

  1. 이이(조선)〉, 《나무위키》
  2. 이이〉, 《위키백과》
  3. 이이(李珥,1536~1584)〉, 《두산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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