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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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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맹자(중국어:孟子 mèng zǐ)는 중국 전국시대의 유교 사상가이며 전국시대에 배출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한 사람이다.

개요[편집]

맹자는 공자의 유교사상을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생에게서 배웠다. 도덕정치인 왕도(王道)를 주장하였으나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적인 주장이라고 생각되어 제후에게 채택되지 않았다. 그래서 고향에 은거하여 제자교육에 전념하였다.

맹자의 사상을 담고 있는 《맹자》 7편은 맹자의 말을 후세의 제자들이 모아 만든 편찬물이며, 내용은 맹자의 사상뿐만 아니라 당시 제후와 재상을 만나 문답을 나눈 맹자의 행적을 그대로 담은 것이다. 한때 《맹자》는 주목받지 못하는 서(書)였고 금서(禁書)로 취급되기도 하였다. 주자학(朱子學) 이후로 《맹자》는 《논어》, 《대학》, 《중용》과 더불어 '사서(四書)'의 하나로서 유교의 주요한 경전이 되었다. 맹자의 사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책이며, 또 전국시대의 양상을 전하는 흥미 있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문장은 변론조이며, 예부터 유가의 명문으로 여겨지며 조선시대 사유체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1]

맹자의 생애[편집]

맹자는 기원전 372년 지금의 산둥성(山東省) 쩌우청시(鄒城市)에 있었던 추현(鄒縣)에서 출생하였다.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이어 발전시킨 유학자이다. 전국 시대 추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가(軻)이고, 자는 자여(子輿) 또는 자거(子車), 자거(子居), 자전(子展) 등이다. 어릴 때부터 공자를 숭상하고, 공자의 사상을 발전시켜 유학을 후세에 전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맹자가 태어난 나라는 춘추전국시대에 존립했던 추(鄒)라는 작은 소국(小國)이었다. 추나라는 이후 노(魯)나라에 합병되었는 설도 있고 초(楚)나라에 합병되었다는 설 두 가지가 존재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맹자의 어린 시절과 성장기에 관해서는 신빙성 있는 자료가 전해지는 바가 없으나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맹자가 학문을 익힌 것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후대 문하생에게서 유가사상을 배웠다고 전해지며 시(詩)와 서(書)에 능했다고 전한다. 맹자의 어머니 장(仉)씨는 현모(賢母)로 알려져 있으며 맹자의 교육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했다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는 유명한 고사이다.

맹자가 살았던 시기는 7개의 제후국이 패권을 두고 치열한 싸움을 벌이던 전국시대였다. 전국시대는 합종(合從)과 연횡(連衡)으로 대표되는 외교적 책략으로 천하통일의 꿈을 이루려는 인재들이 대거 배출되었다. 제후는 유능한 인재들을 찾아 패도의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으며 맹자도 전국시대에는 배출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한 사람으로서 BC 320년경부터 약 15년 동안 각국을 유세객으로 돌아다니며 제후들을 만났다. 당시 제후가 찾은 이상적인 인물은 나라의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위한 정책이나 뛰어난 외교적 책모(策謀)를 갖춘 인물이었으나, 맹자가 내세우는 것은 도덕정치인 왕도(王道)였으며, 따라서 이는 전국시대 현실과 동떨어진 지나치게 이상적인 주장이라고 생각되었다.

《맹자》에는 맹자의 주유천하 한편이 소개되고 있는데 53세에 위(魏)나라 양혜왕(梁惠王)을 만나 문답을 통해 자신의 왕도정치 소신을 펼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양혜왕이 죽고 아들 양양왕의 군주로써 인물됨이 부족하자 위나라를 떠나 제(齊)나라로 갔으며 제선왕(齊宣王)을 만나 인정으로 왕도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인물인지 살피는 장면이 묘사된다. 맹자는 결국 왕도정치라는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고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맹자의 사상[편집]

맹자의 사상은 인의설(仁義說)과 그 기초가 되는 성선설(性善說), 그리고 이에 입각한 왕도정치론(王道政治論)으로 나누어진다. 공자의 인(仁)의 사상은 육친 사이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친애(親愛)의 정을 널리 사회에 미치게 하려는 것이며, 이 경우, 소원한 쪽보다 친근한 쪽으로 정이 더 간다는 것은 당연시되었다. 가족제에 입각한 차별애(差別愛)인 것이다. 맹자는 이를 받아들여, 한편으로는 보편적인 인애(仁愛)의 덕(德)을 주장하고, 한편으로는 그 인애의 실천에 있어서 현실적 차별상(差別相)에 따라 그에 적합한 태도를 결정하는 의(義)의 덕을 주창하였다. '인은 사람의 마음이요, 의는 사람의 길'로서, 의는 인의 실천에서 준거할 덕이며, 유교사상은 이로부터 도덕사상으로서의 준엄성을 가지게 되었다. 성선설은 그러한 인심(仁心)이 누구에게나 갖추어져 있음을 강조한 설이다.

인간의 본성으로서는 악(惡)에 이르는 욕망도 사실은 존재하지만, 맹자는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도덕적 요청으로서 본성이 선(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사람의 도덕에 대한 의욕을 조장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사람으로서의 수양은 '욕심을 적게' 하여 본래의 그 선성(善性)을 길러내는 일이었다. 왕도정치는 그러한 인심에 입각한 정치이다. 군주는 민중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한 다음 도덕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불인(不仁)한 군주는 쫓아내어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당시의 제후가 맹자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유교는 맹자에 의하여 비로소 도덕학(道德學)으로서 확립되고, 정치론으로서 정비되었다. 그 후 유교의 정통사상으로서 계승되어 유교를 '공맹지교(孔孟之敎)'라고 부를 정도로 중시되었다.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계승하고 공자가 수립한 인간의 실천적 주체성이나 덕에 의한 정치라는 사고방식을 전통적인 하늘의 신앙과 결부시킴으로써 이를 발전시켰다. 성선설이나 왕도론에서 그 경위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맹자는 또한 5백 년마다 성인이 출현한다고 하는 일종의 순환론적 역사관에 의거하여 공자의 정당성을 증명하려고 한다. 성인의 전형이라는 전설상의 제왕인 요·순부터 5백 년쯤 지나 은의 탕왕이 나오고, 탕왕에서 5백 년쯤 지나 주나라의 문왕, 문왕에서 5백 년쯤 지나 공자가 나와서 선왕(先王)의 도(道)를 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맹자 자신은 공자부터 당시까지 1백 년쯤, 공자가 세상을 떠난 뒤부터는 아직 얼마 되지 않아서 자기는 공자의 길을 유지 확보하는 자로 위치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맹가의 저술[편집]

《맹자(孟子)》는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 맹가(孟軻)의 저술이다. 그의 문인들이 스승이 죽은 후에 정리한 것이라는 견해들도 있으나, 수미 일관된 체제 등을 들어 일반적으로 맹자의 직접 저술로 인정하고 있다. 송대의 유학자인 주자(朱子) 등에 의해 유학의 기본 경전인 사서(四書)의 하나로서 흔들리지 않는 권위를 지니게 되었다. 후한(後漢) 말기의 조기(趙岐)와 주자가 붙인 주석이 가장 수준 높은 해설서로 통용된다. 양혜왕(梁惠王)·공손추(公孫丑)·등문공(滕文公)·이루(離婁)·만장(萬章)·고자(告子)·진심(盡心)의 7편으로 구성되었다.

양(梁)의 혜왕에게 '이(利)'를 구하는 잘못을 지적하고 '왕께서는 오직 인의(仁義)를 말씀함에 그칠 것이지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라는 어구로 쐐기를 박은 첫머리의 기사가 전체 저술의 개요를 이루는데, 공자의 인(仁)에 대해 의(義)를 더하여 왕도정치의 바탕으로 삼은 것이다. 그것은 다시 본성이 선하다고 전제하여 인간을 적극적으로 신뢰하는 성선설(性善說)과 민의(民意)에 의한 폭군의 교체를 합리화한 혁명론(革命論)을 중심 기둥으로 삼고 있다. 정의에 따른 사회생활을 강조하고 그 물질적 기반을 매우 중시하였으나, 대인(大人)의 일과 소인(小人)의 일을 구분하여 육체 노동자에 대한 정신 노동자의 지배를 합리화하였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현대사회에서는 그 전체적인 사회·정치 이론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지만, 크게는 '성선설'로부터 구체적으로 '호연지기론(浩然之氣論)'에 이르는 견해들은 시대를 뛰어넘어 인간 생활의 한 지침이 되고 있다. 빈틈없는 구성과 논리, 박력 있는 논변으로 인해 《장자(莊子)》 및 《좌씨전(左氏傳)》과 더불어 중국 진(秦) 이전의 3대 문장으로 꼽히는 등 문장 교범으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아왔으며 한문 수련의 필수적인 교재이다. 또 '오십보백보' '알묘조장(揠苗助長)' 등의 절묘한 비유를 통해 독자의 흥미를 돋우고 논지를 철저히 이해시켜 준다.

맹자천설[편집]

맹자천설은 《맹자(孟子)》를 주석한 책이다. 필사본. 14권 2책. 규장각도서. 1615년(광해군 7)에 조익(趙翼)이 편찬하였다. 성(性) ·위학(爲學) ·심술(心術) ·인륜인도(人倫人道) ·처세지술(處世之術) ·처세삼도(處世三道) ·치도(治道) ·출패존왕(黜覇尊王) ·벽이명도(闢異明道) ·도통(道統)의 10항으로 나누어 주석하였다. 원래는 저자 자신의 견해에 따라 《맹자》를 분류하고 사견(私見)을 붙여 천설(淺說)이라 한 것인데, 《맹자집주(孟子集註)》와는 편장(篇章)의 순서가 달라 보기에 불편했으므로 20년 후 《맹자집주》의 순서에 따라 다시 개편하고, 다만 장(章) 끝에 자설(自說)을 기록하고 책 끝에 분류 목록을 실었다. 책머리에 저자 자신이 쓴 자서(自序)가 있다.

맹자질서[편집]

맹자질서는 조선 후기 학자 이익(李瀷)이 《맹자》에 관하여 정리한 책이다. 3권 3책, 필사본이다. 간행여부는 알 수 없다. 《사서삼경》을 해설한 《칠서질서(七書疾書)》 가운데 가장 먼저 씌어진 것으로서 1713년(영조 39) 무렵에 완성되었다. 《맹자》에 관한 자신의 연구를 비판적·실증적 태도로 서술하였다.

책머리에는 《맹자》의 중요성을 강조한 자서(自序)를 실었고 권1에는 양혜왕(梁惠王)·공손추(公孫丑) 등 4편, 권2에는 등문공·이루(離婁) 등 4편, 권3에는 만장(萬章)·고자(告子)·진심(盡心) 등 6편을 수록하였다. 국립중앙도서관과 규장각도서에서 소장하고 있다.

맹자요의[편집]

맹자요의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이 《맹자(孟子)》를 주석한 책. 필사본. 9권 3책. 규장각도서. 책머리에 서설(序說) 5절을 싣고, 다음에 《맹자》 7편의 제호(題號)를 들어 이를 설명하였다.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도 수록되어 있다.

맹자언해[편집]

맹자언해는 사서(四書) 가운데 하나인 《맹자》에 한글로 토를 달고 풀이한 책. 14권 7책으로 된 활자본으로 도산서원에 소장되어 있다. 1590년(선조 23) 왕명으로 교정청에서 간행하였다. 먼저 원문을 싣고 한글로 풀어 썼으며, 방점을 사용하고 ㅿ·ㆁ도 나타난다. 원문과 언해문의 한자에는 현실 한자음에 따라 음을 표기하였다. 다른 사서언해 원간본과 함께 방점을 쓴 마지막 판본으로서 중세국어와 근대국어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1974년 한양대학교 국학연구원과 1976년 대제각(大提閣)에서 각각 영인본을 간행하였다.

이본(異本)으로는 1612년본(광해군 4), 1693년본(숙종 19) 외에 1820년(순조 20)에 나온 "경진신간내각장판(庚辰新刊內閣藏板)", 1824년에 간행한 "갑신신간영영장판(甲申新刊嶺營藏板)", 1862년(철종 13)에 펴낸 "임술계춘영영중간(壬戌季春嶺營重刊)", 정조 때 간행한 정유활자본(丁酉活字本)이 전한다.

맹림[편집]

맹림은 중국 산둥성(山東省) 쩌우청(邹城)에 위치한 맹자와 그의 후손들이 묻혀있는 묘지이다. 명청(明淸) 양 대를 거쳐 오면서 지속적으로 확장되었고 청(淸)나라 강희(康熙) 시기에는 묘지의 면적이 약 666㏊에 이르게 되었다. 이 지역에는 측백나무, 회나무 등 만여 그루의 나무가 심어져 있고, 성대한 멍린구후이[孟林古会]가 지금도 치러지고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맹자(Mencius,孟子,BC 372?~BC 289?)〉, 《두산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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