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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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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현종

당 현종(唐玄宗, táng xuán zōng)는 중국 당나라의 제9대 황제(재위 712∼756년)이다.

개요

당 현종은 안으로는 민생안정을 꾀하고 경제를 충실히 하였으며, 신병제를 정비하였다. 밖으로는 국경지대 방비를 튼튼히 하여, 수십 년의 태평천하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노후에 도교에 빠졌으며 양귀비로 인해 정사를 포기하다시피 하였다.

755년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쓰촨(四川)으로 난을 피해 가던 도중에 양귀비는 호위 병사에게 살해되고, 756년 아들 숙종(肅宗)에게 양위하고 상황(上皇)으로 은거하였으며, 장안으로 돌아온 뒤 죽었다. 그는 다재다능하였으며, 특히 음악에 뛰어나 스스로 작곡까지 하고, 이원(梨園)의 자제 남녀를 양성하였다. 서도에도 능하여 명필이라는 칭호를 들었다.[1]

당 현종의 생애

당 현종(685년 9월 8일 ~ 762년 5월 3일)는 중국 당나라의 제6대 황제이다. 본명 이융기(李隆基). 예종(睿宗)의 제3자. 명황(明皇)이라고도 한다. 조모 측천무후(則天武后) 시대에 낙양에서 태어났으며, 9세에 임치왕(臨淄王)으로 봉해졌다. 이융기는 처음에 초왕(楚王)으로 책봉되었으나, 후에 임치왕(臨淄王)으로 책봉되었다. 일찍이 별가 등 요직을 맡았으나, 당시 황후인 큰어머니 황후 위씨에게 모함을 받아 수도 장안으로 소환되었다. 710년, 위씨가 딸 안락공주와 결탁하여 황제인 중종 이현을 죽이자, 이것을 알아챈 이융기는 우림군 병사를 소집, 궁중으로 들어가 위씨와 안락공주를 죽이고, 이어 위씨 가문 모두를 몰살시켰다. 또한 자신의 할머니인 성신황제 무씨의 집안 무씨 일가까지 몰살시켰다. 이어, 고모 태평공주에게 아버지 예종 이단의 복위 주도 운동을 맡아달라 하였고, 그로 인해 이단은 다시 황제의 자리에 앉았고, 이융기는 평왕(平王)에 책봉되었다가 큰형인 이헌의 양보로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712년 9월 8일, 이때는 이융기의 27번째 생일이었다. 예종 이단은 황태자 이융기에게 황제의 위를 물려주고 연호를 선천(先天)이라 하니, 이가 당나라 제6대 황제인 현종이다. 현종 이융기가 즉위했으나, 그의 고모 태평공주는 황위를 노리고 있었다. 태평공주는 은밀히 여러 번 이융기를 독살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며, 713년에 이융기는 태평공주와 그 일당을 모두 죽여버렸다.

당 현종은 당시 그와 대등한 권세를 가졌던 태평공주(太平公主) 일파를 타도하여, 측천무후 이래 반세기에 걸친 부인의 정권 개입을 근절시킨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당 현종의 치세는 요숭(姚崇) ·송경(宋璟) ·장열(張說) ·장구령(張九齡) 등 명상의 도움을 얻어, 안으로는 민생안정을 꾀하고 조운(漕運) 개량과 둔전(屯田) 개발 등으로 경제를 충실히 하였으며, 부병제(府兵制)의 붕괴에 대처하여 신병제를 정비하였다. 밖으로는 동돌궐(東突厥) ·토번(吐蕃) ·거란(契丹) 등의 국경지대 방비를 튼튼히 하여, 개원(開元) ·천보(天寶) 시대 수십 년의 태평천하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노년에 접어들자 정치를 등한히 하고, 도교(道敎)에 빠져 막대한 국비를 소비하였다. 특히 자신의 며느리이자 35세나 연하인 양귀비(楊貴妃)를 궁내로 끌어들인 뒤 정사를 포기하다시피 하였고 국정은 권신 이임보(李林甫)가 대신 맡아보게 하였다.

천보(天寶) 14년인 755년, 안록산은 변방으로 돌아가, 부하 사사명과 함께 양국충 타도를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이 반란이 바로 안사의 난이다. 반란이 일어나자 당 현종과 양귀비, 양국충과 그 일가 친척들은 모두 장안에서 피신하였고, 반란군은 계속 장안을 향해 진격했다. 하지만 당 현종을 호위하던 관군이 일행이 머무르고 있는 마외파(馬嵬坡)에서 양국충과 그 일가를 모두 죽일 것을 강요하였고, 양국충이 놀라 허둥거리자, 군인들은 그를 끌어내어 목을 베어버리고, 시체를 여러 조각으로 찢어갈겼다. 이들은 당 현종이 쉬고 있던 역관에서 계속 시위를 하자, 신하 위견소, 위방진을 보냈으나 소용이 없자 당 현종 자신이 그들을 설득을 하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양귀비를 죽일 것을 강요하였고, 고력사 역시 선택이 없다고 하자, 당 현종은 어쩔 수 없이 양귀비에게 자결 명령을 내렸다. 양귀비는 울면서 역관 옆 나무에 목을 매어 죽었다. 이때, 그녀의 나이 38세, 때는 756년이었다. 양귀비가 죽었다는 소리를 들은 군인들은 환성을 내지르며 다시 당 현종을 호위해 서쪽으로 행군했다. 그러나 같이 따라온 황태자 이형은 마외파에 남아 조정 일을 주관하였고, 북쪽으로 올라가 영무에서 황제에 오르고, 당 현종을 태상황으로 삼았다.

757년 12월, 태상황 이융기는 장안으로 돌아왔고, 감로전에 거처하며 쓸쓸한 나날을 보냈다. 5년 뒤인, 762년 5월 2일에 양귀비에 대한 그리움과 지난날의 영화에 대한 허무함 때문에 병이 들었다. 그는 옥피리를 처량하게 불고, 궁녀를 불러 자신을 목욕시키라 하였다. 그리고 그다음 날인 5월 3일 새벽붕어하니 그때 나이 78세였다.

양귀비

737년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무혜비마저 죽자, 방황하던 당 현종은 어느 날, 한 여자를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만사가 손에 잡히지 않았고, 결국 당대 최고의 권력가인 환관 고력사(高力士)를 시켜 그녀를 데려오게 한다. 그녀가 바로 수왕비 양옥환(楊玉環)이었다. 양옥환은 당 현종의 며느리였는데, 그녀의 미모에 반한 이융기가 그녀를 자신의 13남인 수왕 이모에게서 가로챘던 것이다. 이리하여 745년, 당 현종의 나이 61세 때에 27세인 양옥환은 귀비에 책봉된다. 귀비는 황후 다음가는 자리였던 지라, 당시 황후가 죽고 없던 차에 그녀는 황후의 역할을 대신하다시피 했다. 이 여인이 바로 양귀비이다.

개원의 치

당 현종은 재위 초기에 민생 위주의 정치에 전력을 쏟았다. 당 현종은 중앙의 유능한 관리를 지방에 도독이나 자사로 파견하였고, 적성에 맞지 않는 관리는 모두 교체하였다고 전해진다. 심지어는 나라에 가뭄이 돌자, 황궁의 쌀을 배고픈 민중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어진 정치를 행하였고, 환관인척을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여 정치가 문란해질 위험을 미리 막았다. 또한 당 현종은 사찰과 승려의 수를 줄이고, 권력가들을 제압하는 한편, 조정을 정비하여 상벌을 엄정히 나누어 주어서 중종 이후 혼란스러웠던 정치 상황을 안정시켰다. 당 현종의 훌륭한 정치 덕분에 당나라의 국력은 당연히 강성해졌으며, 태종 이세민이 이룩한 태평성세에 버금가는 치세를 하여 후세 사람들은 이를 당시의 연호인 개원(開元)을 따 '개원의 치(治)'로 불렀다.

개원

개원(開元)은 중국 당나라 현종 때의 연호(713~741년). 중국 당나라의 제9대 황제인 현종(玄宗) 이융기(李隆基, 재위 712~756) 때의 두 번째 연호이다. 713년 음력 12월부터 741년 음력 12월까지 29년 동안 사용되었다. 713년(선천 2) 이른바 '선천의 변(先天之變)'으로 태평공주(太平公主)의 세력을 모두 제거한 현종은 음력 12월에 그 해를 원년으로 연호를 '선천(先天)'에서 '개원(開元)'으로 바꾸었다. 개원 연간에 당나라는 영토를 가장 넓히며 전성기를 맞이하였는데, 이를 '개원성세(開元盛世)'라고 한다. 이 시기에 당나라는 토번(吐番)과 전쟁을 오래 계속하였다. 두 나라의 전쟁은 733년(개원 21) 적령(赤岭)에서 화의를 맺으면서 잠시 중단되었으나, 738년(개원 26) 토번이 하서(河西) 지역을 침공해오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733년에 현종은 기존에 10도(道)로 나뉘어 있던 지방의 행정구역을 15도로 재편했다. 관내도(關內道), 하남도(河南道), 하동도(河東道), 하북도(河北道), 농우도(隴右道), 회남도(淮南道), 검남도(劍南道), 영남도(岭南道)는 그대로 두었으나, 산남도(山南道)와 강남도(江南道)를 산남동도(山南東道), 산남서도(山南西道), 강남동도(江南東道), 강남서도(江南西道)로 분리했다. 그리고 기존의 관내도, 하남도, 강남도 지역에서 수도인 장안(長安)과 동도(東都)인 뤄양[洛陽] 일대와 검중(黔中) 지역을 따로 떼어내 경기도(京畿道), 도기도(都畿道), 검중도(黔中道)를 새로 설치했다. 현종은 742년 음력 1월에 연호를 '천보(天寶)'로 바꾸고, 그 해를 원년으로 하였다.

개원천보시대

개원천보시대(開元天寶時代)는 당(唐)나라 현종(玄宗)이 다스린 개원연간 29년과 천보연간 14년을 합한 43년간의 치세(713∼756)이다. 그 연호를 따서 붙인 명칭이다. 그의 조모였던 측천무후(則天武后) 이후의 여인(女人) 정치를 배격하고 내란을 평정한 현종은 요숭(姚崇) ·송경(宋璟) ·장설(張說) 등 현명한 재상의 보필을 받아 괄호(括戶)를 실시하여 담세호구(擔稅戶口)를 조사하고, 부병제(府兵制)의 붕괴에 대처하여 중앙군제를 재건하였다. 또한 절도사(節度使)에 의한 변방방어체제를 공고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림원(翰林院) ·집현원(集賢院) 등과 같은 학술연구기관을 정비하여 문운(文運)의 발전을 도모하였다. 또 이 시기에 왕유(王維) ·이백(李白) ·백거이(白居易) 등 유명한 시인을 배출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가 당나라의 번성기인 동시에 중국 고대문화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현종이 만년에 정치를 게을리한 결과, 사회적 모순이 드러나 마침내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났다.

동영상

각주

  1. 현종(玄宗,685~762)〉, 《두산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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