꽝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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꽝찌성(베트남어: Quảng Trị)은 베트남 북중부 해안에 위치해 있는 성이다.[1][2][3]
개요[편집]
꽝찌성의 면적은 4,745.7㎢이며 인구는 659,214명(2024)이다. 성도는 동하시이다. 북쪽으로는 꽝빈성, 남쪽으로는 후에 서쪽으로는 라오스의 사반나케트주와 접경하고 있다. '꽝찌'라는 말은 한월어 광치(廣治)의 베트남어 발음에서 유래한 것이다.
꽝찌성은 1954년~1975년 사이에는 베트남 공화국(월남)의 최전방 지역이었으며, 이 성의 북쪽을 흐르는 벤하이강을 따라 월남과 월맹을 가르는 군사분계선이 설치되었다.
베트남 전쟁 시기 꽝찌성은 미군의 폭격을 가장 많이 당한 지역이었다. 오늘날 꽝찌성에는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많은 장소, 역사적 기념물의 본거지로서 많은 관광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자연환경[편집]
꽝찌성은 베트남 중부지역의 좁은 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북부와 남부 지리적 영역을 잇는 교량의 역할을 한다. 꽝찌성은 쯩선산맥의 단층 지대에 위치해 있어 지형이 다양하다. 서북에서 동남 방향으로 산, 구릉, 평야, 해안 사구, 해변이 길게 이어진다. 주요 하천으로는 타크한강, 벤하이강, 히에우강, 오러우강, 벤다강, 쎄폰강, 쎄팡히엥강 등 7개 하천 계통이 있다. 산악 지역의 하천들은 중·소규모 수력발전 개발 가능성이 있다. 전반적으로 산·구릉·평야 모두 해안선 방향과 평행하게 배열되어 있다. 이러한 방향 일치는 동쯩선과 서쯩선의 분수령(分水嶺)에서도 뚜렷하다. 꽝빈성에서는 고도가 가장 높은 산이 베트남-라오스 국경에 위치하지만, 꽝찌성에서는 고산이 베트남 내륙에 위치해 있다. 큰 강들인 쎄팡히엥강, 쎄폰강 등도 베트남에서 발원해 라오스로 흐른다. 하지만 더 작은 단위의 지형에서는 각 산줄기나 구릉이 강 계곡 방향과 평행한 구조를 보인다.
꽝찌성은 북중부 남단에 위치해 있으며, 전형적인 열대 몬순 기후에 속한다. 북쪽의 온대 몬순과 남쪽의 열대 몬순의 과도기적 지역으로, 기후가 매우 가혹하다. 건조한 서풍(라오스풍)과 태풍, 폭우의 영향으로 기후 변동이 심하고 날씨 변화도 잦아 생활과 생산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연평균 기온은 24.5~25.2°C이며 최고 기온은 평야 지역은 40°C 이상, 산간 지역은 34~35°C이며 최저 기온은 평야 지역은 8~10°C, 산간 지역은 35°C이다. 건조한 서풍(라오 바람)은 3~9월 발생하며, 4~8월이 가장 강렬하다. 연간 40~60일 정도 건조한 고온 현상 발생한다. 평균 습도는 연간 약 80-85%로, 동서 트루옹손 지역에 따라 습도가 달라진다. 특히 5월에서 8월까지는 서남풍의 영향을 받아 습도가 22%까지 떨어지기도 하며, 비가 많은 여름철에는 습도가 85-90%로 올라간다. 주요 바람은 서남풍과 동북풍이다. 서남풍은 매우 강하며, 푹푹 찌는 더위와 함께 오랜 기간 지속되며, 기온은 40-42도까지 올라간다. 연간 45일 정도 발생한다.
역사[편집]
흥왕 – 안즈엉왕 시대부터 현재의 꽝찌 지역은 반랑 – 어우락(Văn Lang - Âu Lạc) 국가의 비엣트엉(Việt Thường) 부락의 영토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나라의 지배 초기(기원전 111년부터 기원후 192년까지), 꽝찌는 일본(일본남, Nhật Nam) 군의 영토에 속했다. 2세기 말, 한 왕조의 몰락으로 중국은 혼란과 분열의 시대로 접어들었고, 일본군과 상림(Tượng Lâm, 상남)의 현지 정권이 성립되며 림압(Champa 이전의 전신 국가) 왕국이 세워졌다. 림압의 영토는 오늘날의 하이반 고개에서 응안 고개까지로 추정되며, 이는 꽝찌 지역을 포함한다.
10세기에 독립을 회복한 이후, 대월(Đại Việt) 국가는 빠르게 발전하며 북쪽의 중국과 남쪽의 참파로부터 생존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영토 확장을 추진했다. 대월의 팽창은 참파와 송나라에 위협으로 작용하였다. 이를 차단하고자, 1069년, 리 타인통(Lý Thánh Tông) 왕은 5만 대군을 이끌고, 이수(李常傑)와 함께 참파의 수도 자반(Chà Bàn)을 정벌, 참파 왕 루드라바르만 3세(Rudravarman III, 베트남 사서에서는 체꾸 Chế Củ)를 포로로 잡아 탕롱(Thăng Long)으로 데려왔다. 체꾸는 사죄의 의미로 보찐, 디아리, 마링 세 주(州)를 바치겠다고 제안했고, 리 타인통은 이를 수용하고 체꾸를 석방하였다. 이후 디아리 주는 림빈(Lâm Bình) 주로, 마링 주는 민린(Minh Linh) 주로 개명되었다. 민린주의 범위는 현재의 꽝찌 북부 지역, 즉 지오링(Gio Linh), 깜로(Cam Lộ), 닥크롱(Đakrông), 일부 동하(Dông Hà) 시, 흐엉호아(Hướng Hóa), 빈링(Vĩnh Linh) 지역으로 추정된다.
쩐 왕조(Trần) 시대, 꽝찌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였다. 1306년, 참파 왕 자야 신하바르만 3세(Jaya Sinhavarman III, 체먼 Chế Mân)는 쩐 안통(Trần Anh Tông) 왕에게 베트남의 공주인 '후옌 쩐(Huyền Trân)'과의 혼인을 요청하며, 혼례 예물로 '오(Ô) 주'와 '리(Rí) 주'를 바치겠다고 제안하였다. 이에 쩐 왕조는 혼인을 수락하였고, 1309년, 오 주는 '투언 주(Thuận Châu)', 리 주는 '화 주(Hóa Châu)'로 개명되었다. 투언 주는 오늘날의 꽝찌 남부 지역, 즉 하이랑(Hải Lăng), 찌에우퐁(Triệu Phong), 꽝찌 시, 동하 시 일부에 해당한다.
이후 베트남인의 남하(남쪽으로의 확장)가 완료될 때까지, 참파가 일시적으로 이 지역을 재점령하기도 했으나, 결국 베트남인이 이 지역을 영구적으로 장악하였다. 1558년, 응우옌 왕조의 시조인 응우옌호앙(Nguyễn Hoàng)이 레 왕조에 의해 투언화 지역 총독으로 임명되며, 아이뜨(Ái Tử)에 주둔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응우옌씨는 이 지역에 인구를 집중적으로 이주시켰으며, 중국인 이민자(화인)의 이주도 허용함으로써 경제력을 키우고 북쪽의 쩐씨와의 경쟁 기반을 마련하였다.
응우옌 왕조의 공식 지도서 '대남일통지(Đại Nam nhất thống chí)'에 실린 당시의 꽝찌 지도에 따르면, 꽝찌는 약 300년간 '끄우딘h(Cựu dinh)'이라는 이름으로 투언화 진(Thuận Hóa trấn)에 속했다. 1802년, 자롱(嘉隆) 황제가 즉위한 이후, 끄우딘은 '꽝찌 딘h(廣治營)'으로 개칭되었고, 하이랑, 당쑤엉(Đặng Xương, 옛 명칭: 부쑤엉 Vũ Xương), 민린, 깜로 등 4개 현으로 구성되었다. 1806년, 꽝찌는 후에 황실 직할 영(dinh)이 되었고, 1822년에는 흐엉호아(Hướng Hóa) 주가 깜로에 소속되었으며, 1827년에는 꽝찌가 ‘쩐(鎮, trấn)으로 승격되었고, 1832년, 쩐에서 성(省, tỉnh)으로 승격, 꽝찌 성(廣治省)이 되었다. 1853년, 꽝찌는 투아티엔(Thừa Thiên) phủ와 통합되어 '꽝찌 도(道)'가 되었고, 1876년, 꽝찌성이 다시 분리되어 독립적인 행정 단위로 복원되었다.
1890년 5월 3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 쥘 조르주 피케(Jules Georges Piquet)는 꽝찌를 꽝빈성과 합쳐 '빈찌 성(Tỉnh Bình Trị)'으로 통합하였다. 1896년 1월 23일, 총독 폴 아르망 루소(Paul Armand Rousseau)는 꽝찌를 동허이(Đồng Hới) 공사의 관할에서 분리하여 투아티엔(Thừa Thiên)과 함께 중부지역 공사의 관할로 이관하고, 꽝찌에는 부공사를 파견하여 감찰관(감사) 역할을 수행하도록 했다. 1900년, 총독 폴 두메(Paul Doumer)는 다시 꽝찌를 투아티엔으로부터 분리하여 독립 성으로 지정했으며 4개 부(府) 찌에우퐁(옛 투언쑤엉), 하이랑, 빈링(옛 치에우링), 깜로와 지오링 현을 포함시켰다. 초대 공사는 퀼레(Quillet, 1900~1902)였고, 1906년 2월 17일, 공사 발랑탱(Valentin, 1903~1907) 재임했으며 총독 폴 보(Paul Beau)는 꽝찌 시(Quảng Trị)를 성도(省都)로 지정하였다.
1954년 베트남이 남북으로 분단되자, 꽝찌성 지역은 베트남 공화국의 최북단 지방이 되었다. 1964년부터 이 지방은 점차 미군 기지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특히 제3해병사단이 비무장지대 바로 남쪽 기지로 이동한 1966년 10월 이후 더욱 그러했다. 1966년 북베트남군이 북부를 점령하고 더 깊은 곳으로 밀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지방의 수도인 꽝찌시는 1967년 4월 공산군에 의해 잠시 점령당했으며, 1968년 4월 북베트남군에 의해, 다시 남베트남군에 의해 남베트남 정부와 미군에 의해 재탈환되기 전 잠시 동안 점령되었을 때 주요 전장이었다.
케산 전투(1968년)는 북베트남이 꽝찌성 전체를 점령하기 위한 꾸준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1968년 7월 케사인에서 후퇴한 이후, 북베트남은 전 지방을 점령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1972년 북베트남 공세의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은 1972년 6월부터 9월까지 남베트남 반격 때 획득한 영토의 상당부분을 잃었지만, 꽝찌(제1차 꽝찌 전투)를 점령한 것이었다.
1999년 이후, 마인즈 자문 그룹(MAG International)은 꽝찌성과 인접한 꽝빈성에서 운영을 유지하여 베트남에서 유일한 민간 인력 감축 및 불발탄 제거 작업을 제공하고 있다. 지뢰가 제거된 지역을 천천히 재건하는 것은 지뢰제거-다시심기 모델에서 MAG와 협력하고, 지역을 개간하고, 지역 농부들과 함께 고부가가치 작물을 심기 위해 일하는 단체는 평화의 뿌리(Roots of Peace)[이다.
사회[편집]
베트남의 공식 언어는 베트남어이며 로마자로 적는다. 베트남어는 단철어(單綴語)로 성조에 6성이 있다. 중국의 영향으로 한자가 사용되고 있었으나, 19세기부터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으면서 베트남어의 로마자 표기가 추진되어 현재 한자는 별로 쓰이지 않는다. 꾸옥 응으(베트남어: quốc ngữ / 國語)로 불리는 이 로마자 표기는 16세기부터 로마 가톨릭 선교사들이 현지어를 로마자로 옮겨 적으려는 작업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예수회의 알렉상드르 드 로드는 포르투갈어 철자법을 바탕으로 최초의 안남어 사전을 만들어냈다. 베트남어는 민난어처럼 동아시아의 언어들 중에서 중국어와 유사한 문자 체계에서 로마자로 변경한 흔치 않은 언어 중 하나이다. 이 로마자 표기법은 현지인들의 교육에 널리 사용되었으며 1945년 이후 베트남이 독립한 뒤 공식 표기법이 되었다.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과 최근 베트남 행정부의 개혁으로 영어는 제2 언어로 점점 더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영어 학습은 이제 대부분의 학교에서 프랑스어와 함께 또는 프랑스어를 대신하여 의무화되었다. 일본어, 한국어, 중국어의 인기도 베트남과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의 관계가 강화됨에 따라 높아졌다.[4][5]
문화[편집]
중국 남부 지방과의 오랜 교류로 인하여, 베트남 문화를 특징짓는 한 가지 요소는 재정적 책임이다. 베트남에서 교육과 자수성가는 높은 가치를 부여받는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과거 시험을 통과하는 것만이 베트남 사람이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유일한 것이었다. 베트남이 오늘날의 영역으로 통합된 것은 근대의 일로, 그 전에는 유교 및 한(漢)문화의 영향을 받은 북부와 베트남의 주 종족인 킨 족외에 인종적으로 말레이계에 속하는 참파인의 국가였던 참파가 있었던 중부문화권, 그리고 크메르 제국의 영역에 속했던 남부 등으로 나뉘어 있으며, 이 북부, 중부, 남부의 차이는 언어 및 풍속, 문화 등 모든 영역에 걸쳐 존재한다. 중국의 유교 영향을 많이 받았음에도, 베트남에서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이라는 상하 개념은 없고, 서로 스스럼없이 대한다.
베트남의 민속 의상 중 가장 대중적인 것은 여성들이 입는 아오자이이다. 아오자이는 현재에는 명절이나 결혼 등 행사, 일상의상 등으로 입는다. 흰색 아오자이는 베트남 전역에서 여학생의 교복으로 지정된 경우가 많고 학생 이외에는 다양한 색상의 원단으로 아오 자이를 만들어 입는다. 예전에는 성별 구분 없이 아오자이를 입었으나 현재에는 여성용 의복으로 한정된다. 단, 전통 문화 행사에서는 남성이 입는 경우도 있다.
베트남은 인구가 많지만, 대중문화 자생력은 상당히 뒤떨어진다는 평이다, 대한민국, 중국, 일본, 태국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인도와 튀르키예 드라마들도 어느정도 수입된다. 특히 1990년대 말 이래로 한국 드라마가 많이 수입되는 상태이며 중국 드라마도 사극이나 통속극을 중심으로 많이 방송되고, 일본 애니메이션도 1990년대 이래로 수입되어 방송되고있다. 그래서 장노년층들도 한국 인기 드라마 줄거리와 OST 정도는 아는 경우가 많으며, 한국 대중가요도 2000년대 중반 이후로 널리 수용되어 중년층 이하는 한국 웹툰과 K POP에도 익숙하며, 베트남 대중가요도 한국 대중가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유명한 베트남 배우로는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에서 페이지 티코역을 맡은 응오타인반 등이 있다. 다만 소련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성우 1-2명이 모든 배역을 맡고 국어책 읽기식 더빙을 하는 경우가 많다. 2000년대 중반 이후로 다중배역을 맡아서 한국처럼 성우 여러 명이 나와서 더빙하는 경우가 늘어나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남아있기는 하다. 다만 이렇게 외국드라마와 외국영화, 외국 애니메이션, 외국만화, 외국 노래의 수입이 많고, 자체제작 드라마와 영화들도 외국작품 리메이크작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있으며, 예능프로그램도 미국과 유럽, 한국 등에서 TV프로그램 포맷을 수입해서 방송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지식인층에서 베트남이 외국문화에 잠식되고있다는 목소리가 높기도 하며, 이 때문에 대중문화산업의 자생력을 키워야된다는 목소리가 많기는 하다. 일단 베트남 당국에서 드라마 제작 쿼터제같은 방식으로 자생력을 높이려는 시도를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해외 작품을 현지화해서 리메이크한 형태의 작품이 상당하다.
교통[편집]
꽝찌성의 남북으로 국도 1A가 통과한다. 베트남-라오스 도로도 꽝찌성의 서남쪽을 통과하며, 국도 1A와 분기점이 있다. 베트남 남북선 철도는 꽝찌성을 경유한다.
꽝찌 공항은 동하시에서 북쪽으로 7km 떨어진 곳에 건설될 예정이다. 2015년부터 운항할 예정이었지만, 계획이 계획이 지연되어 2020년으로 미뤄졌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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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꽝찌성〉, 《위키백과》
- "Quảng Trị", Wikipedia
- "Quảng Trị province", Wikipedia
- 〈베트남〉, 《나무위키》
- 〈베트남〉, 《위키백과》
같이 보기[편집]
동남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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