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역
청량리(서울시립대입구)역(Cheongnyangni station, 淸凉里驛)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전농동에 있는 경원선, 중앙선의 철도역이자 수도권 전철 1호선,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 수도권 전철 경춘선, 수도권 전철 수인·분당선의 전철역이자 환승역이다. 수도권 전철 1호선은 이 역부터 서울역까지 지하 구간이고 서울교통공사 구간이다.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은 심야에 3편성이 주박한다.
일제강점기였던 1938년 5월 1일에 청량리(서울시립대입구)역으로 다시 환원됐다.
청량리역사
청량리역은 경원선을 처음 계획할 당시에는 구상되지 않았던 정거장이었으나 서울의 동쪽 간문에 해당하는 곳이라 하여 뒤늦게 정거장 개설지로 추가됐다.
이에 따라 청량리정거장과 왕십리정거장은 서로 2킬로미터 남짓한 거리에 불과할 정도로 다른 구간에 비해 매우 인접한 곳에 자리하게 됐다.
청량리(서울시립대입구)역은 1911년 10월 용산~의정부 구간을 우선 개통할 때부터 처음 사용됐다.
전차노선인 청량리선은 바로 연장되지 않고 이후 조선박람회를 위해 역전역을 신설하며 연장한다.
기능 확장 및 철도관사 건설
철도부설과 더불어 철도직원의 주거대책을 해결하기 위하여 철도관사 역시 건축됐다.
일제강점기 관청, 공공기관, 기업체가 각 기관의 공무원이나 회사원에게 공급한 주택을 관사·사택으로 불렀는데, 이러한 주택들은 용산일대 등 철도 및 일본의 관리나 일본군의 주둔지 등에 건립된 경우가 많았다.
청량리지역 역시 중앙선 부설에 앞서 역 주변 전농정(典農洞) 위치에 철도관사를 약 400호 건축했다.
현 동대문구 전농동, 전농2동 일대에 일부 남아있다.
관사는 관(官) 주도로 조직적으로 건축돼 관리들의 주거안정을 위해 공급하는 일종의 공공임대주택이다.
1920년대 이후 주택난이 가중될 당시 경성부청이 민간 회사에 공문을 보내 사택을 건설할 것을 요청할 정도로 관사와 사택의 건설이 정책적으로 권장됐고, 그 결과 1920년대 초반 신축된 일식주택의 절반에 달할 정도로 관사는 강점기간 내내 꾸준히 건설됐다.
관사의 공급 확대에도 불구하고 주택난이 심화되자 1930년대 후반 일제는 소규모 관사의 공급을 확대한다.
조선의 교통량이 증가해 경성역이 혼잡하게 되자, 총독부는 경성역의 화물부담을 청량리역으로 이전하고자 결정한다.
이를 청량리(서울시립대입구)역은 경성일대의 화물취급을 담당하기 위해 1935년 당시의 10배 이상으로 확장된다.
이에 따라 1937년에 청량리 철도관사가 건립된다.
두 차례의 개칭
이후 1936년에 경성부가 확장되고, 1938년에 경춘선의 기점이자 중앙선의 종점으로 지정됐고, 경성역의 화물부담을 인계받아 경성일대의 화물취급을 담당한 등 역의 지위가 향상됨에 걸맞게 5월 1일부로 동경성역(東京城驛)으로 역명을 변경한다.
이 때 영등포역도 남경성역으로 함께 역명을 변경한다.
또한 경성역의 화물취급 역시 같은 해 7월부터 정상적으로 이전됐다.
그러나 중국에 있는 역명과 혼동이 있다는 이유로 1942년에 영등포역과 함께 다시 청량리(서울시립대입구)역이란 원래의 이름을 회복한다.
개요
한국철도공사
한국철도공사 소속 청량리역은 경원선, 중앙선의 철도역으로, 중앙선의 기점으로 이 역에서 경원선으로부터 분기한다.
중앙선 무궁화호와 태백·영동선 무궁화호의 시·종착역이며, 경춘선 ITX-청춘와 강릉선 KTX,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이 정차한다.
수도권 전철 경춘선 전동차가 편도 10회 시·종착하고, 수인·분당선 열차는 상·하행을 포함해 18회 정차하며, 극히 드물게 임시 무궁화호도 다닌다.
드물게 임시 열차가 경원선, 경부선을 경유해 서울역, 영등포역으로 운행한다.
국수역, 지평역, 춘천역 방면으로 간 전철은 왕십리역 출발 후 청량리역 진입 이전 중앙선 선로로 진입하며, 반대로 문산역 방면으로 간 전철은 청량리역 출발 후 경원선에 합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