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이탈리아 도시국가

위키원
이동: 둘러보기, 검색

이탈리아 도시국가란 중세 및 근세에 이탈리아 지역에 있었던 여러 도시국가들을 통칭하여 부르는 말이다. 중세, 근세에 이탈리아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 아말피 공화국, 피사 공화국, 밀라노 공국, 산마리노 등 도시 공화국이 있었다.

베네치아 공화국[편집]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 베네치아에 있던 도시국가이다. 8세기부터 1797년까지 약 1,000년 동안 독자적인 공화정 정부 형태를 갖추고 독립 도시국가로 존재했고 한때 지중해의 해양 강국으로 지중해 무역을 독점하였다. 영어식으로 읽게 되면 베니스 공화국으로도 불린다.

역사[편집]

베네치아는 5세기경 게르만족의 일파가 북이탈리아를 침입하면서부터 시작한다. 당시 고트족과 롬바르드족 등 야만족의 침입을 피해 몇몇 주민들이 아드리아해의 해안가 척박한 석호에 집을 짓고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세월이 흐르면서 이것이 점차 도시를 이루게 되었다. 약 7세기에 이르자 주민들은 자체적으로 그들의 지도자를 뽑았고 비잔티움 황제로부터 인정을 받아 자치를 시작했다. 이를 도제라고 하는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697년 최초의 도제 파올로 루치오 아나페스토가 선출되었다고 한다.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은 성 마르코로 상징동물은 사자이다. 이는 828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루스티코와 트리부노라는 베네치아 상인 두 명이 성 마르코의 유해를 몰래 베네치아로 밀반입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중세기 동안 베네치아는 프랑크 왕국과 비잔티움 제국의 사이에서 조금씩 그 세력을 넓혔다. 산물이라고는 소금과 생선뿐인 척박한 석호의 섬에서 베네치아는 무역 중계와 상업으로 존재했다. 당시 가장 큰 교역물품은 목재와 노예였다. 뛰어난 상술과 항해술로 베네치아는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특혜를 얻었고 제4차 십자군 원정을 통해 점차 그 세력이 강대해졌다.

서기 1000년경부터 베네치아가 아드리아해 연안을 통제하자, 이에 저항하기 위해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달마티아는 함께 1102년 헝가리 왕을 군주로 받아들였다. 베네치아는 비잔티움제국의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으로 발전했으며 결국 1204년 제4차 십자군 때에는 당대 최대의 도시이자 비잔티움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공하여 함락시키기도 하였다. 이것을 결정적인 계기로 중세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에 설립되었던 라틴 제국의 황제로 당시 베네치아의 도제가 고려되었을 정도로 (하지만 공화국에 해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본인이 거부) 라틴 제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얻었다. 아드리아해는 물론 동지중해에 무역거점도시를 줄줄이 건설하여 무역강국으로 발전했으며 로마 교황청의 권위에도 굴복하지 않았고 신성로마제국의 세력권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또한 강력한 무역과 해상의 경쟁국인 제노바공화국과 120여 년에 걸쳐 네 번의 전쟁을 벌여 결국 승리했다.

15세기에 베네치아 공화국은 전성기를 맞이한다. 키프로스와 에게해의 여러 섬들을 복속하고 이탈리아 본토에 속주를 차지했으며 달마티아와 알바니아 연안에 베네치아 귀족이 통치하는 속국을 만들었다. 숙적 제노바와의 네 번의 전쟁 끝에 승리한 베네치아는 아드리아해의 여왕이라 불리며 동지중해 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하여 엄청난 부를 거둬들였다. 1453년 동로마제국이 멸망하자 베네치아는 르네상스의 주역으로 떠오른 한편,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제국과 경쟁하며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16세기에 이르러 베네치아에 대항하는 교황령 주도의 이탈리아 동맹인 캉브레 동맹이 결성되었고 1508년 캉브레 동맹 전쟁에서 승리하지만 이후로는 더 이상 베네치아공화국의 영토를 넓힐 수 없었다. 4차 십자군 전쟁 이후로 동지중해는 사실상 베네치아의 바다라 보아도 무리없을 정도로 경쟁자가 없었지만 1499~1503년에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패하면서 동지중해에 대한 독점적인 지배권을 상실한다.

캉브레 동맹을 주도한 교황 율리우스 2 세는 여러 강국(서유럽의 대부분)들을 끌어들여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공화국이었던 베네치아의 지위에 철퇴를 내리고 교황령 주도의 이탈리아 통일을 꿈꾸었다. 하지만 캉브레 동맹의 전쟁중에 개신교의 세가 강해졌던 신성 로마 제국의 군대는 로마를 '부패의 상징'이라 생각해 약탈했고 사실상 이 전쟁을 기점으로 대부분의 도시 국가들은 스페인이나 프랑스와 같은 강국의 허수아비로 전락한다. 베네치아는 그나마 이 전쟁에서 승리한 덕분에 당분간 자신들의 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 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여 부와 무역의 주도권은 대서양으로 넘어가자 지중해 무역의 중요성은 점차 떨어졌다. 동방과의 교역은 지중해가 아니라 대서양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무역에 의존하는 베네치아는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1571년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레판토 해전에서 승리하지만 베네치아는 오히려 키프로스를 상실했다. 이 때문에 공화국의 날개가 꺽임과 동시에 같은 시기에 흑사병으로 인하여 도시 인구가 반으로 줄었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이를 공화국의 전성기의 끝이라고 본다. (다른 의견은 1669년 크레타의 상실을 기준으로 삼지만 아무래도 전자가 좀 더 다수인 듯 하다.) 1606년 교황 바오로 5세는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간의 분쟁을 중재하면서 개신교에 유리하게 중재한 베네치아에게 선전 포고를 하고 베네치아를 파문해 버렸다.

이후 무역에서 주도권을 상실한 베네치아는 이후 18세기에는 무라노 섬의 유리 공예와 뛰어났던 가공 기술들,관광업 그리고 포 강 유역의 비옥한 토지와 공화국치고는 상당히 컸던 영토를 이용한 농업을 통해 그럭저럭 먹고 살 수 있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엄청난 돈을 들여가며 25년간 홀로 버틴 끝에 1669년 크레타를 오스만제국에 빼앗기고 아드리아해에 틀어박히는 형국이 된다. (당시 베네치아가 전쟁에 사용한 비용은 전성기가 지났다긴 하지만 부유한 베네치아의 1년 세입을 훌쩍 넘기는 것이었다) 이는 역사에 기록된 가장 긴 공성전이다. 1714년 오스만제국은 모레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선포했다. 이에 맞선 오스트리아와 베네치아는 결국 오스만제국을 굴복시키긴 했지만 오스트리아가 많은 영토를 얻은 데 비해 베네치아는 모레아를 잃었다. 이후 베네치아는 자신들의 앞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아드리아해에 오스만 세력을 들이지 않는데 주력했다. 실제로 1716년 코르푸 섬을 성공적으로 방어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코르푸 섬은 현재 그리스라고 하는 지역에서 유일하게 이슬람의 지배를 안 받은 곳이 되었다.) 18세기말, 베네치아 공화국은 달마티아 내부까지 영역을 확대하였다. 이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고 팽창하는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1792년 베네치아 공화국은 비무장의 중립을 선언하지만 1797년 나폴레옹의 군대가 오스트리아군을 쫓아 베네치아를 침공했고 결국 약 1200년의 역사를 가진 베네치아 공화국은 나폴레옹에게 멸망하고 만다.

정부형태[편집]

정부의 수반은 도제(원수)이다. 도제는 선출직이며 종신직으로 베네치아 공화국의 상징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그 권력은 미약해서, 법안 하나를 발의할 때도 6인의 원수 보좌관 중 절반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만 했다. 그 외 베네치아의 외교 및 첩보 활동, 전쟁, 기타 정책을 비밀리에 결정하는 10인 위원회가 존재하고 있으며 10인이란 명칭과는 달리 정원은 도제와 6인의 도제 보좌관, 10명의 원로회 대표 등 17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도제와 도제 보좌관을 제외한 인원의 임기는 1년이였다. 본래 공식 업무는 공화국의 치안 유지 및 정부 전복 방지, 부패 방지였으나 조직이 작아 빠른 결정이 가능했기 때문에 업무는 점점 확대되어 1457년 경에는 정부의 전반적인 업무를 취급하게 된다. 그 외 도제를 선출하는 40인 위원회가 있으며 1229년 20:20으로 도제를 선출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이후 41명으로 인원을 늘렸다. 최고 의사 결정 기관으로 12세기 말에 생긴 대회의가 있으며 13세기부터 300~500명, 후에는 900~1200명의 의원이 있었으나 1297년 처음 폐쇄된 뒤에는 특정한 귀족 가문 출신으로 제한되었으며 도제의 권한을 제한하는 기구로 그 밑의 소의회와 더불어 곧 입법과 행정 사법상의 권한을 쥐었으나 비대한 조직으로 인해 차츰 권력을 잃어갔으며 입법기관인 원로원이 존재하는 과두체제의 공화정부였다.

제노바 공화국[편집]

 1005년부터 1797년까지 이탈리아 북서쪽 해안의 리구리아에 있었던 독립국이다.

1100년 이전에, 제노바는 그 당시의 수 많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 중 하나였던 자치 독립 국가로서 생겨났다. 명목상으로는 신성로마제국황제가 지배자이고 제노바 주교가 도시의 대표자였으나, 실제적인 권력은 주민총회에서 1년마다 선출한 몇명의 "콘술"들이 행사하였다. 제노바는 베네치아, 피사, 아말피들과 함께 "해양 공화국"(Repubbliche Marinare)이라고 불리던 한 곳이며 무역업, 조선업, 은행업들이 지중해에서 가장 거대하고 강력한 해군력을 지닌 나라중 한 곳으로 만들게 도왔다. 아도르노, 캄포프레고소 그리고 다른 작은 상인 가문들은 콘술의 권력이 콘술이 된 가문에게 도시에 부와 권력을 가져다 줬기에 공화국에 권력을 얻기 위해 투쟁하였다. 제노바 공화국은 오늘날의 리구리아피에몬테사르데냐코르시카니스까지 진출했었고 사실상 티레니아해의 통제권을 완전히 갖고 있었다. 이러한 제노바인들의 십자군 참여로, 중동에게해시칠리아북아프리카에 제노바 식민지들을 건설하였다.

제노바는 비잔티움제국과의 동맹으로 십자군 국가들의 붕괴를 만회하였다. 비잔티움 제국과 베네치아의 관계는 제4차 십자군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얼어붙었고 그 여파로 제노바는 동맹으로서의 지위를 개선시킬수 있었다. 제노바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북해와 크림반도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내부적으로 그리말디 가문피에스키 가문도리아 가문스피놀라 가문과 그외의 강력한 가문들 사이에 불화는 많은 분열을 일으켰지만, 전반적인 공화국은 잘 운영되었다. 제노바에 오크어 문학을 소개한 친교황파(구엘프) 람베르티노 부발렐리가 포데스타로 재직한 1218년–1220년에, 제노바는 자코모 그릴라, 란프랑크 시갈라, 보니파치 칼보 같은 트루바두르들을 배출시키기도 하였다. 제노바는 1284년에 피사 공화국을 상대로 1284년 멜로리아 전투에서 승리와 1298년 최대의 경쟁 상대인 베네치아를 상대로 쿠르촐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정치적 절정에 올랐다.

하지만 이 번영은 얼마가지 못하였다. 흑사병이 1347년 흑해의 크리미아 반도에 있는 카파(테오도시아)의 제노바 교역소를 통해 유럽으로 유입되었다. 경제와 인구가 붕괴되면서, 제노바는 베네치아식 모델을 따른 정부를 도입하였고, 도제(제노바의 도제)가 이끌게 되었다. 베네치아와의 전쟁이 계속되었고, 키오자 전쟁은 결국 베네치아의 아드리아해 제해권의 회복으로 끝났다. 1390년, 제노바는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바르바리 해적을 상대로 이른바 바르바리 십자군을 일으켰고 마디아를 포위 공격하기도 하였다. 잘 연구가 되지 못했음에도, 15세기는 제노바에 있어서 격동의 시대였을 것으로 보인다. 1394년에서–1409년까지 프랑스의 지배를 거친 후, 제노바는 밀라노의 비스콘티 가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제노바는 아라곤에게 사르데냐를 잃었고, 코르시카는 내부 반란으로 상실했으며, 중동, 동유럽, 소아시아의 식민지들은 오스만튀르크제국에게 넘어갔다.

제노바는 16세기가 되어서야 안정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는데 이는 안드레아 도리아의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그는 1528년에 제노아를 에스파니아 제국의 위성국으로 만드는 새 헌법을 제정하였다. 뒤이은 경제 회복하에서 발비(Balbi), 도리아, 그리말디, 팔라비치니(Pallavicini), 세라(Serra) 같은 다수의 제노바 귀족 가문들은 엄청난 재산을 축적했다. 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 등에 따르면, 노예소유제도와 같이 지중해에서 발달한 제노아식 관행은 신대륙의 개발과 착취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제노바 태생이었으며, 에스파니아를 위해 신대륙을 발견한 데 따른 수입의 10퍼센트를 식료품에 대한 과세를 경감시키기 위하여 산 조르조 은행에 기부하였다.

16세기 제노바의 절정기에 루벤스, 카라바조, 반 다이크 등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건축가 갈레아초 알레씨(1590-1657)는 제노바 시의 장려한 팔라초들을 많이 설계하였고, 수십년 뒤에 바르톨로메오 비안코(1590-1657)도 마찬가지였다. 비안코는 제노바 대학교 중심 건물의 설계자이기도 하다. 수 많은 제노바의 바로크 및 로코코 예술가들이 타지역에 진출하는가 하면 수 많은 지역 예술가들이 탁월한 명성을 얻었다.

피렌체 공화국[편집]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의 피렌체를 거점으로 삼았던 도시국가이다.

피렌체 공화국은 피렌체 시민들이 미망인 토스카나의 마틸데의 죽음 이후 토스카나 변경백에게 대항하여 1115년에 건립되었다. 피렌체인들은 마틸데가 사라진 도시에 코뮌을 형성하였다.  공화국은 시뇨리아라고 알려진 의회가 통치하였다. 시뇨리아는 매 두 달마다 피렌체의 길드 일원들에 의해 선출된 정의의 곤팔로니에레(명목상의 도시 통치자)가 선정하였다.

공화국의 역사는 쿠데타와 다양한 가문들을 상대로 벌인 쿠데타와 반쿠데타등으로 기복이 심한 역사를 지녔다. 1434년에 코시모 데 메디치가 그를 과거에 추방시켰던 가문을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켜, 메디치 가문이 정부를 손에 넣었다. 메디치 가문은 1494년까지 피렌체를 통치하였다. 조반니 데 메디치(이후 교황 레오 10세)가 1512년에 공화국을 재정복하였다.

메디치 가문의 통치권이 코냐크 동맹 전쟁 기간인 1527년에 두 번째로 상실되었다. 메디치 가문은 11개월의 공성전 끝에 1531년에 통치권을 다시 회복하였다. 공화국 정부는 1532년에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를 ‘피렌체 공화국의 공작’으로 임명함에 따라 세습군주제가 도입되면서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아말피 공국[편집]

아말피 공화국(이탈리아어: Repubblica di Amalfi)은 10 ~ 11세기동안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도시 아말피를 중심으로 존속했던 사실상의 독립 국가였다. 원래 아말피시와 그 인근 지역은 귀족들이 관리했던 대 두카투스 네아폴리타누스의 일부였으나, 스스로 비잔티움제국의 가신에서 벗어났고, 958년에 첫 공작을 선출하였다. 아말피 공국은 경제적으로 강력한 나라이자, 피사, 베네치아, 제노바같은 이탈리아 북부의 해양 공화국들이 이들을 뛰어넘고 대등해지기 전까지 지중해와 이탈리아 무역을 독점했던 상업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1073년에 아말피는 자치권을 상실하고 노르만인들에게 넘어갔다.

피사 공화국[편집]

피사 공화국(이탈리아어: Repubblica di Pisa)은 10, 11세기 동안 토스카나 지역의 피사를 중심으로 하였던 사실상 독립 국가이다. 제노바에게 추월과 대체되기 전까지, 한 세기 간 지중해와 이탈리아 무역을 독점하던 상인들의 상업 중심지로서, 경제적 유력 집단으로 성장하였다. 피사 공화국의 재력은 해양 국가로서 성장을 하게 하였고 11세기에는 이탈리아의 핵심 4개 해양 공화국의 하나가 되면서 정점에 올랐다.

성장[편집]

중세 성기 동안에 피사는 매우 중요한 무역과 선박업의 중심지로 성장하였고 주요한 지중해의 거상들의 상단들과 선박들을 통제했다. 1005년 남부 이탈리아의 레조디칼라브리아 약탈을 통해 영향력을 더욱 넓혔다. 피사는 지중해의 통제권을 두고 사라센인들과 지속적인 분쟁을 겪었다. 제노바와 동맹을 맺고, 피사는 사라센의 지도자 무자히드 알 아미리를 패배시키며, 1016년에 사르데냐를 점령했다. 이 승리는 피사에게 티레니아해의 패권을 가져다주었다. 피사인들이 그후에 사르데냐에서 제노바인들을 내쫓으며, 두 해양 공화국 사이에 새로운 분쟁과 적대 관계가 생겨났다. 1030년과 1035년 사이에 피사는 시칠리아 토후국의 일부 도시들을 공격하는데 성공했고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정복해냈다. 1051년–1052년에 제독 야코포 치우리니는 코르시카를 정복하며, 제노바인들의 더 많은 분노를 일으켰다. 1063년에 피사는 시칠리아를 정복하기 위해 지난 30년간 전쟁을 하고 있는 시칠리아의 루지에로 1세에게 팔레르모에 대한 공동의 공격 가능성을 갖고 접근하였다. 루지에로는 다른 약속들 때문에 이 제안을 거절했다. 지상의 지원없이 피사의 팔레르모 공격은 실패하고 말았다.

1060년에 피사는 제노바를 상대로 첫 전투에 돌입하였고 피사의 승리는 제노바가 지중해에 갖고 있던 위치를 합병하는데 도움을 줬다. 1077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피사인들이 제정한 새로운 “바다에서의 법률과 관세들”을 인정하였고,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원로원에서 권고한 그들만의 대표를 선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주었다. 이것은 토스카나 변경백국 (명목상 피사의 봉건 군주)이 이미 그들의 권력에서 피사가 배제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상황을 단순히 확인해주는 것이였다. 피사는 1088년에 지리다 왕조의 도시 마디아를 약탈을 했다. 4년 뒤 피사와 제노바 함대는 카스티야의 국왕 알폰소 6세가 발렌시아에서 엘 시드를 내쫓는데 도움을 줬다. 1092년에 교황 우르바노 2세는 피사에게 코르시카와 사르데냐에 대한 지배권을 주었고 같은 시기에 피사 주교구는 큰 도시의 대주교구로 승격했다.

120척의 피사 함대가 제1차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고 피사인들은 1099년 예루살렘 공성전에 도움이 되었다. 성지로 향하던 중에 피사의 선박들은 몇몇 비잔티움의 영토를 약탈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피사의 십자군들은 미래의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가 되는 그들의 대주교 다고베르트가 이끌었다.

피사와 다른 해양 공화국들은 시리아레바논팔레스타인의 동부 해안 지역에 무역 거점과 식민지들을 세우는데 십자군 전쟁의 이득을 보았다. 특히 피사인들은 안티오키아, 아크레, 야파, 트리폴리, 티레, 라티키아에 식민지를 세웠다. 그들은 또한 예루살렘카이사레아에도 영토를 확보하였고, 게다가 카이로, 알렉산드리아에도 작은 식민지 (적은 자치도를 지닌)가 있었던 것은 물론 콘스탄티노폴리스에도 가지고 있었는데,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는 그들에게 특별한 계류소와 무역 특권을 부여해주었다. 이 모든 도시들에서 피사인들은 특혜와 면세권을 받았지만, 공격을 받을 시에 이들의 방어에 기여를 해야만했다. 12세기 콘스탄니폴리스의 동부 지역에 있는 피사 지구의 거주민은 1,000명까지 늘어났다. 해당 세기의 몇 년간 피사는 베네치아 공화국을 능가하는 가장 우세한 대상이자 비잔티움 제국의 동맹이였다.

서부 지중해에선,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1085년 피사에게 발레아레스 제도에 대한 종주권을 부여해주었지만, 피사 상인들은 1113–15년 발레아레스 원정의 시초자 중 한 명이였을 뿐이였고, 그곳의 타이파를 영구적으로 몰아내는데는 실패했다.

쇠퇴[편집]

피사 공화국의 국제적인 위상은 1284년 제노바에게 멜로리아 해전에서 함대가 괴멸하면서 영원히 상실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 피사의 대부분의 갤리선들이 파괴되었고 많은 선원들이 포로로 잡혔다. 1290년 포르토피사노를 향한 제노바 함대의 공격으로 피사의 독립 국가로서의 위치가 봉해져버렸다. 1323년과 1326년 사이에는 아라곤 연합왕국에 의해 사르데냐에서 축출당했다.

1399년 가브리엘레 마리아 비스콘티의 지배가 끝난 후, 피사는 1402년 피렌체 공화국에게 매각되었고 1406년에 자치권을 상실했다. 1494년 프랑스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원정때 피렌체로부터 독립하였다. 1497년에 피렌체의 침략이 있었으나 격퇴에 성공하며 독립을 유지하였다. 16세기 초부터 피렌체가 다시 침공해왔다. 1508년에 베네치아의 세력약화를 목적으로 캉브레 동맹전쟁(1508~16)이 시작되었는데, 아냐델로 전투(1509년 5월)에서 베네치아가 패배하였다. 이 전투의 패배로 베네치아 세력이 약해지자 든든한 지원국을 잃어버린 피사 공화국은 1509년 6월 피렌체에 항복하였고 다시 피렌체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밀라노 공국[편집]

밀라노 공국은 1395년부터 1797년까지 이탈리아반도 북부의 도시 밀라노를 거점으로 삼은 도시국가이다. 신성로마제국의 일부로서, 역사의 대부분이 이탈리아 외부에서 온 주요 강대국들의 지배 아래 들어간 적이 많다. 비록 몇 세기 동안 영토의 변화가 있었지만 옛 이탈리아 왕국의 중심지인 밀라노와 파비아를 포함하여 롬바르디아의 대부분을 회복하였다.또한 16세기에 공국이 분할되어 해체되기 전까지 파르마를 병합하여 영토로 삼기도 하였다.

역사[편집]

귀족 세력의 지지를 받은 비스콘티 가는 1311년부터 사실상 밀라노의 참주 노릇을 하였다. 당시 밀라노는 수공업과 공업 그리고 농업의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었다.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는 일족의 광활한 영지(롬바르디아, 피에몬테와 베네토의 일부, 이탈리아 중부의 몇몇 도시 등)를 하나로 통합하였으며, 1395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의 벤첼로부터 공작의 작위를 하사받았다. 그러나 잔 갈레아초의 아들 조반니 마리아 비스콘티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영지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자 결국 1412년에 그는 암살당하고 공국은 해체되었다.

조반니 마리아가 죽자 그의 남동생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가 뒤를 이었다. 필리포는 나라를 다시 재건하였고 아버지가 추진하였던 영토 확장 정책을 재개함으로써 베네치아 공화국과 대립각을 세웠다. 두 나라 간의 전쟁은 10년(1423년 - 1433년)이나 계속되다가 페라라 화약의 체결로 종식하였다. 이때 필리포는 베네치아에 브레시아와 베르가모를 할양하였다.

1447년 필리포 마리아의 죽음으로 비스콘티 가문의 남계 후손이 끊기자 밀라노에서는 권력 싸움이 벌어졌다. 공화국 체제로 할 것을 선포한 밀라노 정부는 비스콘티 가의 용병대장인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에게 보호를 요청하였지만,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오히려 무력을 동원하여 1450년 공화국 선포를 한 지 3년 만에 스스로 밀라노 공을 사칭하며 영주가 되었다.

이러한 밀라노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베네치아는 롬바르디아로의 지배력 확대를 기도하였고, 아라곤 왕 알폰소 5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와 손을 잡아 스포르차 가에 대항하였다. 이후 4년 동안 전쟁이 지속되었으며, 그 사이에 오스만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였다(1453년). 결국 1454년에 밀라노와 베네치아 사이에 로디 평화조약이 맺어져 이탈리아의 오랜 전란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조약에 따르면 스포르차 가는 밀라노의 세습 군주로 인정받았으며, 베네치아는 에게해의 영토를 일시적으로 반환하는 대신 아다강으로 세력을 넓혔으며, 아라곤 왕국은 나폴리의 왕위에 대한 소유권을 최종적으로 인정받았다. 또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이탈리아 신성동맹을 맺게 되었다. 로디 평화조약을 통해 달성된 이탈리아 내 정치적 균형은 로렌초 일 마니피코의 죽음(1492년)과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1494년)이 일어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아들 갈레아초 마리아는 폭정을 펼쳐 백성들의 원한을 사 살해당하였으며, 그의 어린 아들 잔 갈레아초는 숙부인 루도비코 일 모로에게 정권을 찬탈당하였다.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아들이기도 한 루도비코 일 모로는 스스로를 조카인 잔 갈레아초 스포르차의 후견인임을 내세워 처음에는 조카의 섭정으로 있다가 그의 지위를 빼앗아 파비아 성에 감금한 후 1494년에 독살을 사주하였다.

1535년 프란체스코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스포르차 가문은 사실상 단절 상태가 되었다. 이후 밀라노 공국의 상속권을 놓고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 왕국이 계속해서 대립하다가 결국 70년에 걸쳐 전쟁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는 자신의 아들인 펠리페 2세에게 공국 전체를 할양하였다. 마침내 1559년 4월에 체결된 카토 캉브레지 조약으로 전쟁은 종결되고, 프랑스 왕국은 스페인이 밀라노 공국을 복속시키는 것을 인정하였다. 이후 밀라노 공국은 스페인 등 각국의 지배를 받았으나, 1797년에 프랑스에 정복되어 캄포포르미오 조약에 따라 멸망하고, 프랑스의 괴뢰국인 치살피나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후 이탈리아왕국의 일부가 되었고, 오스트리아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이탈리아 왕국(1861년 건국)의 일부가 되었다.

산마리노 공화국[편집]

산마리노 공화국, 약칭 산마리노(이탈리아어: San Marino)는 전면이 이탈리아에 둘러싸인 내륙국가이다.

산마리노는 외교권을 가지고 있으며, 1600년에 제정된 법을 기초로 한 산마리노 헌법은 고대 로마 공화국의 전통을 이은 집정관이 이끄는 회의제 정부를 구성한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이 이탈리아 도시국가 문서는 역사에 관한 글로서 검토가 필요합니다. 위키 문서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편집할 수 있습니다. [편집]을 눌러 문서 내용을 검토·수정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