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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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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지도(寶物地圖, treasure map)

보물지도(寶物地圖, treasure map)는 보물이 있는 위치를 알려주는 지도이다.

창작물에서는 지도를 찾아내서 보물 찾으려 다니다가 곤란한 일을 겪는 경우도 많다. 보물을 독차지하기 위해 동료를 배신하는 경우도 많으며, 내분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런 일을 막기 위해서 보물지도를 조각내서 팀원들이 나눠서 소지하는 클리셰도 있다. 고생고생해서 찾았더니, 먼저 가져간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OTL.

홍보를 목적으로 보물지도를 제작 하기도 하며, 관광지에서 여행의 재미를 주기 위해 수첩 형태로 보물지도를 제작하기도 한다.

보물지도의 특성 때문에 책 제목에 보물지도가 들어가는 자기계발 도서도 많다.

관련 항목
  • 빌의 보물지도
  • 더 시크릿 보물사냥
  • 오크 섬의 보물
  • 구리 두루마리

보물지도[편집]

사실 오래된 지도들은 그 자체가 보물이 된다.

대동여지도[편집]

채색필사본 대동여지도. 감정가는 25억 원으로 역대 진품명품이 방영된 이래로 최고 감정가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는 조선지리학자김정호가 1861년에 제작한 지도로 보물 제850호로 지정되어 있다.

프로토타입은 이름을 단순하게 '동여도'라고 하는 판각지도로 한국의 옛 지도 중 가장 정밀하다고 한다. 제작 시기는 대략 철종 7년(1856) - 철종 12년(1861) 사이이고, 한 장의 축척은 가로 80리/세로 120리. 사실 동여도는 얼마 전까지도 누가 만들었는지 설이 분분하다가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의 프로토타입이라는 설에 무게중심이 쏠렸다.

대동여지도는 축척은 동여도와 동일한데, 전체 지도 도엽은 목판 121매, 제책한 책은 213면에 부록지도를 몇 장 더 추가하여 상당히 두껍다. 이는 지도의 대량생산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기 때문. 지도를 모두 합치면 대략 가로 360 cm, 세로 685 cm이다. 100리를 1척, 10리를 1촌으로 제작하였으나, 1촌 1보라는 단위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조선 후기에 도량형에 혼란이 왔기 때문에 알 수 없고, 따라서 축척이 얼마인지 계산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전혀 추측이 불가능하지는 않은데, 대략 1:160,000 에서 1:216,000이라는 설이 있다. 1:180,000이라는 주장도 있다.

도로는 곧고 가느다란 선으로, 하천은 비교적 굵은 곡선으로 나타내었으며, 하천을 줄 2개로 그렸을 경우 배를 탈 수 있음을 나타낸다. 도로에는 10리마다 '방점'이라 불리는 점을 찍어 거리를 알 수 있게 하였다. 산줄기는 더 굵은 곡선으로 나타내었으며, 산세가 클수록 산봉우리를 그렸지만 등고선이 없어 산의 정확한 높이는 알 수 없다. 하지만 10리를 표시할 때 일반적인 평지보다 산지의 경우 조금 더 짧게 표기하는 등 대략적인 산세는 가늠이 가능하다. 각 고을의 경계는 점선으로 나타내었다. 또한 읍치, 역원, 조창, 군부대, 봉수대 등 여러 시설을 각각의 기호를 사용하여 나타내었다.

TV쇼 진품명품 1000회 특집에는 전세계에서 3부밖에 없다는 대동여지도 채색본이 등장한 바 있다. 군현 단위로 채색되어 조선시대의 행정구역 상황을 더욱 자세하게 알 수 있다.

459장의 그림지도[편집]

연산현지도
가태사가마솥
대흥군지도
태안지도
남원부지도
천안군지도
해남현지도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가 탄생한 지 10년쯤 뒤인 고종(高宗) 9년(1872)에 전국적으로 만들어진 459장의 지도(地圖)는 각 고을마다 그림으로 채색된 아름답고 화려한 지도(地圖)로서, 마치 개항(開港) 전 조선(朝鮮)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기록 필름과 같다.

충청도(忠淸道) 연산현지도(連山縣地圖)에는 하천가에 가마솥이 표시되어 있다. 실제 이 가마솥은 논산시(論山市) 연산면(連山面) 개태사(開泰寺)에 보관되어 있다. 원래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대중공양(大衆供養)을 위해 만든 솥인데 고종(高宗) 7년(1870)의 대홍수 때 2km 정도 떠내려가 하천가에 있게 된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예산군(禮山郡) 대흥면(大興面)인 대흥군지도(大興郡地圖)에선 항아리 모양의 태실(胎室)이 눈에 띈다. 실제로 대흥면사무소(大興面事務所) 뒷마당엔 현종(顯宗) 태실(胎室)과 영조(英祖)의 옹주(翁主) 태실(胎室)이 옮겨진 채 보존되어 있다.

태안지도(泰安地圖)에는 굴포(堀浦) 부근에 점선 표시가 있는데 굴포(堀浦) 지역을 팠던 운하(運河)를 표기한 것이다. 세곡선(稅穀船)에 침몰(沈沒)하는 일이 빈번(頻繁)하자 고려(高麗) 인종(仁宗) 12년(1134)부터 뚫기 시작했는데, 이 운하(運河)는 이후 500년에 걸쳐 여러 번 시도되었지만 실패했다. 결국 공사(工事)가 불가능해지자 육지였던 안면도(安眠島)를 굴착해 섬으로 만들었다.

459장 중에 가장 아름다운 지도(地圖)로는 남원부지도(南原府地圖)를 들 수 있다. 당시 조선(朝鮮)은 보이는 풍경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진경산수(眞景山水) 화풍(畫風)이 유행했는데 군현(郡縣) 지도(地圖) 제작을 맡은 화원(畫員)이나 관리(官吏)들도 이런 화풍(畫風)에 영향을 받았다. 이 지도(地圖)는 남북간의 거리에 비해 동서간의 거리가 길게 표시되어 있다. 지도(地圖)의 중앙에 크게 그려진 읍성(邑城)도 실제 크기의 약 25배 정도 확대되어 있다.

남원(南原)의 지도(地圖)에는 광한루(廣寒樓) 옆에 울창한 숲이 보인다. '동림(東林)'이라고 씌어 있는데 현재는 이 동림(東林)이 없다. 다만 동림교(東林橋)와 동림사(東林寺)라는 이름에서 옛 자취를 가늠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동림(東林)은 풍수지리(風水地理)에 따라 허(虛)한 기(氣)를 보충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된 비보림(裨補林)이었다. 다만 기(氣)를 보충하기 위한 비보(裨補)는 단순히 풍수지리(風水地理)의 의미에 국한되지 않고 하천의 범람을 막는 실질적인 기능을 했다.

당시 읍성(邑城)은 정치, 경제, 사회의 중심지였다. 그래서 주민 편의를 위해 각 마을과의 거리를 고려해 터를 잡았다. 읍성(邑城) 안의 건물도 주민 편의를 따랐다. 천안군지도(天安郡地圖)를 보면 안쪽에 객사(客舍)와 동헌(東軒)이 있고 주민들이 드나들기 쉬운 바깥쪽에 행정청(行政廳)이 위치한다.

459장의 지도(地圖)엔 조선후기(朝鮮後期)의 변화된 사회상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의 경제적인 변화를 읽을 수 있는 중요한 단서는 바로 시장(市場)이다. 시장(市場)이 지도(地圖)에 표시된 것도 처음인데, 『용성지(龍城誌)』에는 당시 유명했던 시장(市場)과 개시일(開市日)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각 장(場)마다 개시일(開市日)을 달리해 하나의 시장권(市場圈)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시장(市場)의 발달은 도로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지도(地圖)에는 굵기를 달리한 도로들이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고 거리까지 기록되어 있다. 당시 거리는 발로 쟀는데 두 발자국이 한 보(步)였고 360보(步)가 1리(里)였다. 주로 하급관리(下級官吏)들이 직접 왕복하며 쟀는데 이런 거리 측정은 여러 편의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도로의 발달과 함께 도로 곳곳에 점(店)이라는 새로운 숙박 시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원래 관원(官員)들이 숙박하던 역원(譯院)이 있었는데 양란(兩亂) 이후 경제적 부담으로 제대로 기능을 못하자 이런 민간 숙박업소가 생겨난 것이다. 도로와 숙박 시설이 발달하며 시장(市場)은 더욱 활성화되어 쌀이나 포목(布木) 등을 교환하던 수준에서 벗어나 다양한 상품을 유통시켰다.

조선후기(朝鮮後期)의 장(場)은 물물교환을 비롯한 경제활동에만 국한되는 장소가 아니었다. 관(官)에서는 장날을 이용해 민심을 파악하며 정부의 전령(傳令)이나 행정적인 정보들을 알렸고 백성들은 놀이와 축제의 장(場)으로, 혹은 정부(政府)나 관리(官吏)에게 불만을 토로(吐露)하는 저항의 공간으로 활용했다. 그래서 장시(場市)에 괘서(掛書)나 벽서(壁書), 흉서(凶書)들이 나붙기도 했다.

조선시대(朝鮮時代) 나주목(羅州牧)은 현재의 나주(羅州)보다 훨신 넓은 지역을 관할하여 많은 섬들이 나주목(羅州牧)에 속해 있었다.

지도진지도(智島鎭地圖)에는 섬 꼭대기에 요망대(瞭望臺)라는 감시 초소도 있다. 부둣가엔 전선(戰船)이 크고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배 밑이 평평한게 전통적인 우리 배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459장의 지도(地圖)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지시에 의해 고종(高宗) 9년(1872) 3월에서 6월 사이 만들어졌다. 3개월 만에 급히 만들어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시의 긴박한 정세(政勢) 때문이었다.

서구세력(西歐勢力)이 무력을 앞세워 밀려오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쇄국정책(鎖國政策)을 고수(固守)했는데 고종(高宗) 5년(1868)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부친(父親)인 남연군(南延君) 묘(墓)를 도굴(盜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서양(西洋)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화친(和親)하는 것이요, 화친(和親)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라고 새긴 척화비(斥和碑)는 지도(地圖)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459장 중 139장이 군사시설(軍事施設)에 관한 지도(地圖), 특히 해안가의 수군시설(水軍施設)에 관한 내용이 중심이다. 경기도(京畿道) 대부지도(大阜地圖)에는 해로(海路)가 점선으로 나타나 있고, ‘이양선(異樣船)이 지나간 자리’까지 기록되어 있다.

해남현지도(海南縣地圖)와 순천부지도(順天府地圖)에는 거북선도 등장해 고종(高宗) 9년(1872)까지 거북선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거북선은 고종(高宗) 27년(1890) 마지막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로 부임한 김동훈의 시집(詩集)에도 등장하는데 당시 진남관(鎭南館) 앞에 있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은 일본(日本)의 『조선시보(朝鮮時報)』에도 나타나 있는데, 거북선이 고종(高宗) 31년(1894)까지 경상도(慶尙道)에 9척, 전라도(全羅道)에 3척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당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국방정책(國防政策)의 핵심은 포군(砲軍)을 증설(增設)하는 것으로, 지도(地圖)에 표시된 포수청(砲手廳)은 이같은 사실을 잘 보여준다. 포수청(砲手廳)은 해안뿐 아니라 내륙지방에도 나타나는데, 이는 포군(砲軍)이 일반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병인양요(丙寅洋擾) 이후 조총(鳥銃)을 쏘는 포수(砲手)들을 집중적으로 양성하여 초기엔 강화도(江華島) 일대나 한양(漢陽)에 집중 배치했다. 그러다 남연군(南延君) 묘(墓) 도굴(盜掘)사건 이후 서해안 일대로부터 증설(增設)되어 고종(高宗) 8년(1871) 신미양요(辛未洋擾) 이후 전국 각지에 배치되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화약무기(火藥武器) 개발에도 박차를 가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시종(侍從)이던 김규락(金奎洛)의 『운하견문록(雲下見聞錄)』에는 "중국(中國)에서 수천 근(斤)의 대포(大砲)를 들여오고 일본인(日本人)을 통해 조총(鳥銃) 기술을 습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때의 군비증강(軍備增强) 노력은 이후로 이어져 고종(高宗) 친정기(親政期)엔 중국(中國)에 영선사(領選使)를 파견하여 중국(中國)으로부터 직접 군사시설(軍事施設)을 배워오게 된다.

군현(郡縣) 지도(地圖)가 제작되던 고종(高宗) 9년(1872) 조선(朝鮮)은 안으로 개혁정치(改革政治)를 통해 국권(國權)을 강화하고 밖으로는 밀려오는 외세(外勢)의 위협에 대처해야 하는 시기였다. 따라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만든 459장의 지도(地圖)에는 당시의 위기의식과 국방강화(國防强化)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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