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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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동(世宗洞)은 세종특별자치시에 속한 법정동이다. 2022년 7월 1일자로 연기면에서 분리되어 세종동으로 전환하였다. 전국의 법정동 중 유일하게 광역자치단체와 이름이 같다.[1] [2]
목차
[숨기기]개요[편집]
세종동의 면적은 23.46㎢이며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양화리와 진의리 일부, 송원리, 나성리, 송담리, 방축리(옛 남면 소재지), 갈운리, 월산리, 보통리, 연기리 일부, 공주시 장기면 금암리, 산학리 일부, 반포면 원봉리 일부, 금남면 영곡리, 성덕리, 반곡리, 봉기리, 부용리 일부, 동면 용호리, 합강리, 문주리 일부 중 산이나 강 등 거주지역이 아닌 남는 땅들을 몽땅 병합해 만든 행정구역이며, 행정중심복합도시 S-1생활권에 해당한다.
행정중심복합도시 내의 금강변과 미호강변 모두 세종동 영역이며, 세종호수공원, 세종중앙공원, 국립세종수목원, 국토지리정보원 우주측지관측센터, 한나래·한글·합강공원과 합강오토캠핑장이 있다. 국립박물관단지가 조성될 예정이고, 선제적으로 국립어린이박물관이 2023년 12월 개관했다.
'세종동'이라는 명칭을 붙은 데서 알 수 있듯, 행정중심복합도시의 정중앙에 있는 동이며, 마을 명칭은 '모롱지마을'이다. 이곳에 국회 세종의사당 설치 예정 부지가 있다.
2024년 1월 4일 오전 5시 24분경 금빛 노을교에서 29중 추돌 사고가 발생해 5명이 다쳐 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받았다. 또한 오전 6시 27분경에는 700여 m쯤 떨어진 바로 옆 아람찬교에서도 12중 추돌 사고가 발생해 9명이 다쳐 병원으로 옮겨졌다. 두 다리 모두 평소 습하고 안개가 많이 끼는 지역이라 100m 앞도 가늠하기 힘든데다 전날 0.5mm의 비가 내렸고 새벽에 약한 눈발까지 날리면서 기온도 영하 6도로 떨어져 블랙아이스가 형성된 탓에 사고가 난 것으로 보고 있다.
자연환경[편집]
월산을 중심으로 동쪽에 미호강이 흐르며, 서쪽에 금강이 흐른다. 제실산과 오산, 영적산, 정월산, 모룽지산이 위치한다.
교육[편집]
세종예술고등학교[편집]
세종특별자치시 세종동에 위치한 공립 예술고등학교이다. 2018년 3월 1일 개교하였으며, 세종특별자치시 내 최초이자 유일한 예술고등학교이다. 세종특별자치시 내에는 2018년 이전까지 예술고등학교가 없었다. 때문에 세종시에 거주하는 예술고 지망 학생들은 천안에 위치한 충남예술고등학교나 충북예술고등학교, 대전예술고등학교 등으로 진학해야 했는데, 문제는 세종시에서 천안/청주/대전 간 거리가 꽤 되는지라 통학하는데 상당히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또한 세 학교 모두 과가 3개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입시의 폭도 꽤 좁은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세종시에서도 예술고등학교를 설립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고, 2016년 개교 예정이었으나 모종의 사정으로 2년이 미뤄져 결국 2018년 3월 1일부터 개교하게 됐다. 따라서 세종시에 거주하는 2018학년도 예술고 입시생들부터 세종예술고등학교로 진학할 수 있게 됐다.
설립 시기가 늦어 역대 재학생들의 나이도 많이 어린 편이다. 1기가 2018년에 입학한 2002년생이며, 2023년 입학한 1학년인 6기가 2007년생이다. 이 때문에 전국 예고들 중 역대 재학생들 중 20세기 출생자가 단 한 기수도 없는 몇 안 되는 학교 중 하나다. 세종예술고등학교가 설립된 이후 세종시 내의 예술고 지망생들은 대부분 여기로 진학한다. 충남, 충북권 학생들은 기존대로 충남예고나 충북예고로 많이 가는 편이다. 개교한 지 얼마 안 된 새 학교다 보니, 시설적인 면에서 퀄리티가 좋다. 실용음악과 학생들에게 개인연습실이 제공되는 것은 물론, 전문적인 녹음 스튜디오까지 갖추고 있다. 학교 규모도 예고들 중 가장 큰 편에 속한다.[3]
출신 인물[편집]
임대수(1882)[편집]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며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1882년 2월 12일 충청도 공주목 삼기면 송담리 표석골(現 세종특별자치시 세종동)에서 아버지 임헌직(林憲稷, 1848. 5. 2. ~ 1907. 11. 14.)과 어머니 전주 이씨(1846. 12. 9. ~ 1901. 1. 23.)[4] 사이에서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충청남도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19개 군을 전전하며 전공을 세웠다. 1907년 정미 7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군이 해산되자 50여 명의 부하를 모집해 다시 의병을 일으켰고, 전의군 군내면 읍내리(現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읍내리) 전의역과 직산군 경무소, 정산군 헌병주재소 등을 습격했다. 특히 은진군에 주둔하던 일본군 헌병대의 헌병분견소를 습격해 총기 및 탄약, 서류 등을 탈취했으며, 구금되어 있던 항일운동가들을 구출했다. 이후 1907년 8월부터 1908년 2월까지 충청남도 공주군, 천안군, 청양군, 당진군, 보령군, 비인군, 한산군, 임천군, 면천군, 신창군, 아산군, 평택군 등을 전전하며 활약해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고, 구속되어 있던 수백 명의 항일운동가를 구출해냈다.
그러나 1911년 6월 16일 충청남도 공주군 의당면 태산리(現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태산리)에서 일본 제국 경찰과 교전하던 중 동지 6명과 함께 전사, 순국했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유해는 1997년 10월 16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4]
임우철[편집]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며 200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했다. 1920년 9월 24일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진의리(現 세종특별자치시 세종동)에서 태어났다. 연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1936년 4월 대전공립공업전수학교 토목과에 입학하였다. 거기서 그는 일본인 교장이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하라고 추천했을 정도로 우수한 성적을 기록했으며, 1939년 3월 졸업 이후 조선총독부 내무국 경성토목출장소에 고원으로 채용되어 공사계에서 근무를 시작하였다. 1941년 2월 경성토목출장소를 의원면직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코교쿠샤(攻玉社) 고등공업학교 토목과 야간부에 입학하며 재학한 후 5월부터 주간에는 도쿄시 토목국 건설과에서 근무를 시작하였다.
이후 김명기, 금림좌목, 금성응춘 같은 동급생들과 같이 1942년 12월까지 내선일체의 허구성을 비판하였고 궁성요배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귀국한 이후에는 회사를 설립하고 민족자본을 육성하였다. 공업학교 교원이 된 후 청소년 육성, 한국어 보급을 주장하는 등 민족의식을 함양하다가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고, 결국 1943년 12월 4일 전주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및 불경죄로 징역 2년 6개월형(미결 구류일수 중 25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공훈을 기리기 위해 그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5]
관광[편집]
- 세종호수공원 - 세종호수공원은 국내 최대 규모의 인공호수에 각종 문화예술 행사가 열리는 축제섬과 공연 시설을 갖춘 수상무대섬, 모래 해변에서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물놀이섬, 다양한 수생식물과 생태습지가 있는 물꽃섬과 습지섬 등 5개의 인공 섬이 조성되어 있으며, 전월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수려한 경관과 산책로·자전거도로 등을 갖추어 시민들이 즐겨 찾는 도심의 휴식처이다.[6]
- 국립세종수목원
- 세종역사민속박물관
- 한나래공원
- 강산공원
- 세종지구공원
- 합강공원오토캠핑장
- 봄내공원
- 조성습지공원
- 한글공원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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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세종동〉, 《위키백과》
- 〈세종동〉, 《나무위키》
- 〈세종예술고등학교〉, 《나무위키》
- 〈임우철〉, 《나무위키》
- 〈두산백과: 세종특별자치시의 관광〉,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