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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18일 (수) 11:04 판
강리도(疆理圖)는 조선 태종(太宗) 2년(1402년)에 제작된 세계 지도이다. 정확히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壹疆理歷代國都之圖)라고 한다. 지도 이름은 역대 나라의 수도를 표기한 지도라는 뜻이다. 김사형 및 이무, 이회 등이 제작하고 권근이 발문을 썼다. 원본은 현재 전하지 않으며 일본에 필사본 2점이 보관되어 있다. 현존하는 것은 사본 뿐이지만 여기에 적혀 있는 지명으로 유추하면 늦어도 1592년까지의 정보가 혼입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다.
몽골 제국을 대표하는 지도로써도 유명하며, 이슬람의 선진과학과 중국의 선진과학이 결합된 산물이기도 하다.
6백년 전에 이미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까지 아우른 세계지도를 작성했다는 데에서 이 지도의 가치는 매우 높다. 그러나 아직 대륙과 시대 인식이 넓지 않았던 터에 아메리카 대륙과 오스트레일리아(호주) 대륙은 이 지도에는 없다. 이 지도는 15세기 말까지 세계지도로써는 유럽의 것보다도 훨씬 우수한 것이었다.
내용
태종 때 만들어진 원본은 소실되었고, 일본 교토의 류코쿠대학과 나가사키현 시마바라시의 혼코지(本光寺)에 세조 때 만들어진 필사본이 보관되어 있는데 이 필사본은 임진왜란 또는 일제 강점기에 건너간 것으로 보이며 류코쿠 대학에 보관되어 있는 필사본은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가 지도를 약탈하여 자신의 개인 사찰인 구마모토의 혼묘지(本妙寺)에 보관하던 것을 대학에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지도의 기원은 성교광피도, 혼일강리도, 대명혼일도 등 중국에서 제작한 지도와, 자신의 지역들을 조사하도록 하여 올리도록 각 군현에 명령하여 만든 군현지도, 일본에 사신을 보내 받아온 일본 지도를 총 편집하여 만들었다. 조선 - 명나라 건국 초기인 15세기에 만든 지도이나 표시된 세부 지명들을 보아 고려 - 원나라 시대인 14세기의 지리적 정보 위주로 제작됐다.
중국에서 제작한 지도를 기반으로 했고 조선도 중국의 화이관을 인정했기 때문에, 중국이 전세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과장되어 있다. 그리고 한반도 도 중국에 비하면 작지만 나머지 전세계에 비하면 굉장히 크게 과장돼 있다. 그에 반해 인도 반도와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 대륙은 조선보다도 작게 그려져 있으며 일본은 조선 남쪽의 작은 섬나라로 표기되어 있다. 일본의 경우, 지도를 살펴보면 지명과 같은 위치적 정보가 정확하나, 실제 크기가 왜곡되어 있는 것은 소중화 사상이 이유로 보인다. 이 지도와 전체적으로 디자인이 비슷한 중국의 <대명혼일도>에서는 (한일 둘 다 모양이 부정확하긴 하지만) 일본을 조선보다 큼지막하게 그려놓은 것과 대비된다.
전세계 중 중국과 한국 부분의 면적을 과장했기 때문에 위도와 경도는 무시됐다. 알 이드리시의 세계지도 같이 비슷한 시대 유럽, 이슬람권의 세계지도는 당시에도 위도와 경도 구분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과 대비된다. 이 지도 자체가 몽골 제국 시절에 이슬람에서 들어온 지리정보를 반영한 것이므로 위도와 경도는 동아시아에도 알려져 있었다고 봐야 하지만, 지도 제작자 입장에서 '중요한 지역'이 커 보이게 그리기 위해 일부러 무시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서역 부분의 경우 조선 건국 얼마 전까지 유라시아 동서를 지배하며 연결했던 몽골제국, 즉 원나라에서 받아들인 지도를 이용했다. 이 지리정보는 아랍에서 받아온 것이므로 당시 유럽과 아랍의 지리적 인식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특히 유럽의 지명은 아랍어에서 왔다. 그리고 주로 아랍과 유럽은 1300년대의 지명이라고 한다. 유럽은 지중해 부분이 물로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터키, 그리스,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티그리스 강 근처의 바그다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나일강, 예루살렘 등등을 한자어 지명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말라카 해협에 대한 묘사도 있다. 심지어 킬리만자로 산도 등장한다. 고화질 버전으로 확대하면 아프리카에서 묘사된 거대 호수 아래에 서쪽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오렌지 강이 나온다. 오렌지 강을 정확하게 묘사한 동서양 최초의 지도라고 한다. 남아공 국회에서 이 지도를 복사해 전시한 적이 있다.
이 지도는 당시 조선의 대외 인식, 천원지방의 세계 인식을 엿볼 수 있다는 점, 1400년대 초에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까지 표현한 지도를 만들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당시는 지리상의 발견 이전의 시대이기에 구대륙의 인류는 신대륙의 존재를 몰랐다. 그래서 이 지도는 유럽과 아프리카는 있을지언정 신대륙이 없다. 한 마디로 진짜 오래 된 지도란 뜻. 우리나라보다 서구권에서 이 지도에 주목하는 이유가 이것으로, 당시 지도 중에서는 가까운 서구권, 이슬람권보다도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아프리카 부분이 주목받는데, 서구 지도에서 15세기 중엽이 넘어가야 수정되는 아프리카 대륙의 남쪽 끝이 동쪽을 향한다는 오류를 범하지 않고 남쪽을 향한다고 정확히 나타내는 등 당시의 지도들 중에선 꽤나 정확한 것을 볼 수 있다. 스와힐리 해안에서 무역을 하던 페르시아인이나 아랍인이 모잠비크를 넘어 내륙 지방을 탐사한 정보가 반영된 후 이슬람측 원 사료 출처가 유실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2016년 KBS 다큐멘터리 "문명의 기억-지도"에 따르면 일본 류코쿠 대학에서 10년 동안 이 지도에 대해 연구 중으로 역사, 공학, 지리학 등 다수의 전문가들이 모여 X선과 적외선 분석 장치 등을 통해 지도의 염료 복원에 매달린 결과 과거 2,000 곳에서 3,000 곳 정도로 판독했던 지명 수에서 현재는 5,000여 곳의 지명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중국 지역의 복원을 통해 지도에 쓰인 지명들이 지도 제작으로부터 80여년 전인 1320년 무렵임을 밝혀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아프리카 부분에서 알렉산드리아 항구가 있고 파로스의 등대가 그림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나일강의 근원을 아랍어로 '자바랄 까마르' 즉, 달의 산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 기록의 근원은 고대 그리스의 프톨레마이오스 세계지도를 비롯한 지리학에서 나온것이라 한다. 결국 혼일강리역대국도의 한반도를 제외한 나머지 세계 부분은 멀리는 고대 그리스의 지리학을 계승한 아랍인들이 인도양 바다를 자유롭게 오가면서 얻은 지리정보가 아직 명나라가 해금정책을 펼치기 전인 원나라를 통해 중국에 전해졌고, 이것이 다시 고려 말에 전래된 정보를 기반으로 조선 초에 제작되었을걸로 추측된다.
현존하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태종 대에 처음 만들어진 것을 세조 때 모사한 것이다. 이는 지도에 등장하는 한반도의 지명에 세종 이후 개척된 4군 6진이 기록되어 있고, 특히 세조 1년(1455년) 이후의 지명인 고무창(古茂昌), 고여연(古閭延), 고우예(古虞芮), 자성(慈城)이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위의 지명들이 사용되던 1455년(세조 1년) ~ 1459년(세조 5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태종 대의 원본 지도에 그 동안 변화된 몇몇 지형 정보들을 추가하여 세조 때 필사본을 추가로 제작하였는데 세월이 지나 원본은 소실되고 모사본만 살아남은 것이다.
한편 규슈 혼코지 소장본은 류코쿠 소장본과 다소 차이가 있는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일본의 지리 정보에 대한 변화이다. 류코쿠본의 경우 일본이 조선의 정남쪽에 가로로 길게 뻗쳐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혼코지본은 조선의 동남쪽에 서남~동북쪽으로 대각선으로 뻗쳐 있는 실제의 지형과 좀 더 유사한 지도이다. 물론 이것은 지도가 일본에 수입된 이후 자국의 지리 정보를 첨부하여 지도를 교정한 것이다.
제작과정
태종 2년(1402년) 5월에 문신 이회가 자신이 직접 그린 《조선팔도도》(朝鮮八道圖)를 태종에게 바쳤고, 이로부터 석 달 뒤 의정부좌정승 김사형과 우정승 이무, 검상(檢詳) 이회 등이 주도하여 제작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완성되었다. 지도 제작 당시 참찬이었던 권근이 지도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과 제작 동기를 밝힌 발문을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 천하는 지극히 넓다. 내중국에서 외사해까지 몇 천ㆍ만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이를 줄여서 폭 몇 자의 지도로 만들자면 그게 상세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지도로 만들면 모두 소략해져버린다. 다만 오문(吳門) 이택민의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는 매우 상세하고, 역대 제왕의 연혁은 천태승(天台僧) 청준(淸濬)의 《혼일강리도》에 실려 있다. 건문(建文) 4년 여름에 좌정승 상락(上洛) 김공(김사형)과 우정승 단양 이공(이무)이 섭리(燮理)의 여가에 이 지도를 참조하여 연구하고, 검상 이회에게 명하여 자세히 교정하도록 하여 한 장의 지도를 만들게 하였다. 요수 동쪽과 본국의 강역은 이택민의 지도에도 많이 생략되어 있다. 지금 특별히 우리 나라의 지도를 증광하고 일본을 첨부해 새로운 지도를 만들었다. 정연하고 보기에도 좋아 집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지도를 보고 지역의 멀고 가까움을 아는 것은 다스림에도 하나의 보탬이 되는 법. 두 공(公)께서 이 지도를 존중하는 까닭은 그 규모와 국량이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근은 재주 없는 몸으로 참찬을 맡아 두 공의 뒤를 따랐는데, 이 지도의 완성을 기쁘게 바라보게 되니 몹시 다행스럽다. 내가 평소에 방책을 강구해보고자 했는데 뜻을 맛보게 되었고, 또한 훗날 자택에 거주하면서 와유(臥遊)하게 될 뜻을 이루게 됨을 기뻐한다. 따라서 이 지도의 밑에 써서 말한다. 시년(是年) 가을 8월에 양촌 권근이 기록하노라.
발문에서 권근은 김사형과 이무가 기획하고 이회가 실무를 맡았다고 설명했는데, 여기서 중국의 《혼일강리도》에 일본의 지도를 추가하여 제작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1398년경 명(明)에서 제작한 《대명혼일도》와 유사한 모습을 띠고 있는데, 이 《대명혼일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전에 이미 이회가 그린 《조선팔도도》가 있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제작하는 데에 실제 주역은 이회였다고 할 수 있다. 이회 자신이 이미 앞서 《조선팔도도》를 제작한 경험이 있는 만큼 중국과 비례하는 조선의 지도를 그리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권근이 지도 제작에 참조했다고 한 《성교광피도》는 이슬람 계통의 세계지도로 추정되는데, 실제로 드문드문 아랍어 지명이 보이고 아랍 계통의 지구의를 따라 바다는 녹색, 하천은 청색으로 표기되어 있다. 지도에는 중국 역대 왕국의 수도가 표기되어 있다. 시대의 지명을 반영하고 있으나 기본적인 지리 정보는 원(元) 시대에 중국을 거쳐 유입된 아라비아 계통의 지도로부터 얻은 것으로 보인다.[4][5] 하지만 아라비아 계통의 지도가, 땅은 둥글다는 지구설에 기초해 원형으로 제작된 것과는 달리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동양의 전통적인 천원지방(天圓地方) 관념에 토대를 두고 사각형으로 제작되었다.
지도의 구성
각 필사본의 크기와 내용은 조금씩 차이가 있다. 우선 크기만 보면, 가장 큰 것은 혼코우지 소장본으로, 가로 280cm, 세로 220cm의 종이에 그려져 있다. 한편, 류코쿠대학 소장본은 가로 163cm, 세로 150cm의 비단에 그려져 있어 혼코우지 소장본보다 훨씬 작다.
이 류코쿠대학 소장본을 중심으로 지도의 구성을 살펴보면, 전체적으로 육지는 엷은 황갈색, 바다는 녹색, 하천은 청색으로 채색하여 구분하였다. 국가명과 수도를 비롯한 각 지명은 원과 사각형의 빨간색 기호로 기재하였다.
지도의 맨 위에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의 제목이 전서(篆書)로 크게 써져 있다. 또한 그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역대제왕국도(歷代帝王國都)'의 소제목 하에 수도 목록이 있는데, 몽골제국 치하의 성(省), 도(道) 등이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몽골 지도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지도의 중앙에는 거대한 중국이 표현되었다. '요도(堯都)', '순도(舜都)', '낙양(洛陽)' 등 중국 역대 왕조의 수도가 빨간색 원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대부분의 지리 정보는 원나라의 것이다. 일부 지명만 명나라의 것으로 고쳤다.
중국의 오른쪽에는 실제 면적보다 크게 표현된 한반도가 있다. 한반도 중앙에 한양도성이 기호 형식으로 표현되어 있고, 그 안에 빨간색 바탕에 검은 글자로 '조선(朝鮮)'이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조선의 해안선은 상당히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북쪽의 국경은 평평한 가로선 형태로 실제와 다르게 그려져 있는데, 이러한 형태는 조선 후기의 지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반면 중남부 해안선은 비교적 정확한 편이고, 산맥의 줄기, 팔도 군현, 섬 이름도 상세하다. 대마도(對馬島)는 일본보다 조선에 더 가깝게 그려져 있는데, 이는 다른 조선 지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일본 열도는 한반도의 아래쪽에 실제보다 작게 그려져 있다. 교토의 위치에 '일본(日本)' 국명이 표기되어 있고, 그 주변으로 각 지명이 표기되어 있다. 실제와 다르게 큐슈(九州)는 북쪽에, 아오모리(靑森)가 남쪽에 있다.
투르키스탄 서부, 이란 고원, 아라비아 반도, 이집트, 아나톨리아 반도의 묘사는 정확하고 상세하다. 유라시아 서북부의 지명은 드문드문 기재돼 있는데도 이들 지역의 지명은 매우 자세하다. 이 범위는 일 칸국과, 일 칸국에 북쪽으로 접해 있던 주치 울루스의 영역과도 일치하는 데에서, 이들 정보도 일 칸국으로부터 얻은 것으로 보인다.
아프리카에는 35가지의 지명이 적혀 있으며 지중해가 바다 아닌 호수로 표시되거나, 아프리카 중심부가 대부분 호수로 채워진 게 흥미롭다. 아프리카 대륙 한가운데에 '황사(黃砂)'라 하여 사하라 사막에 대한 정보도 나타난다. 아프리카의 해안선에 대해서는 유럽의 바스코 다 가마 등의 정보보다도 앞선다. 특히 남단에 대한 정보는 정확하며 오렌지 강으로 보이는 강도 그려져 있다. 아프리카 중앙부에 대해서는 거의 생략되어 있는데, 14세기 후반까지 존재하고 있었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등대가 그려져 있어, 이집트(아랍어로는 「미스르」 مصر Miṣr)를 영유하고 있던 맘루크 왕조의 수도 카이로나, 동아프리카의 중심적 도시로 12세기부터 16세기까지 소말리아 남쪽을 지배했던 베르베르인 계통의 파흐르딘 가문 정권의 수도였던 모가디슈 등의 지명도 보이고 있다. 지중해의 모양도 정확하게 그려져 있는데, 다른 바다(검게 그려져 있다)와는 다르게 육지와 같은 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마그리브(아프리카 북안)와 이베리아 반도는 정확한데, 제노바와 베네치아가 그려져 있지 않다. 유럽의 지명은 100개가 넘게 쓰여있으며 독일의 라틴어 표기인 Alemania를 의도한 Alumangia 등도 보인다.
하단에는 권근이 48행 285자의 지문(誌文)을 썼다. 이 지문은 혼코우지 소장본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권근의 문집인 『양촌집(陽村集)』에도 수록되어 있는데, 지도 제작 목적이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천하는 매우 넓다. 안으로는 중국으로부터 밖으로는 사해(四海)에 이르기까지 그 거리가 몇 천 몇 만 리인지 알 수가 없다. 이를 줄여 몇 자[尺] 폭에 그리려면 상세히 만들기가 어렵기 때문에 지도가 대체로 소략하다. 〈중략〉 그 완성도가 정연하고 보기에 좋아 '문을 나서지 않아도 천하를 알 수 있다.'라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로서, 무엇보다 지도와 서적을 보고 지역의 원근을 아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이라 하겠다.
권근의 서술에 따르면, 기존 지도에 담긴 지리정보로 천하의 지리를 아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지도와 지리지(地理誌)를 통해 '지역의 원근'을 아는 것은 국토 영역, 인구, 물산, 토지 등을 파악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치국에 도움이 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지리 인식은 천문 파악과도 관련되었다. 조선 초기에 천문과 지리 부문에서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등이 제작된 것은 새로운 국가 조선의 기초를 다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제작 시기보다 앞선 1395년(태조4)에 만들어졌고, 그 발문 역시 권근이 지었다.
지도 작성에 사용된 정보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류코쿠 대학본과 혼코지본에는 지도 하단부에 권근이 쓴 발문이 붙어 있다.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에도 비슷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권근에 따르면 해당 지도를 작성하는 데에 있어서 네 종의 지도를 참고하였다고 하였다.
- 이택민(李澤民)에 의한 성교광피도(聲教廣被圖, 세계지도)
- 청준(淸浚)에 의한 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
- 이름을 알 수 없는 조선인에 의한 한반도 지도
- 이름을 알 수 없는 일본인에 의한 일본 지도. 행기도(行基圖)로 보는 설도 있다.
명 건문(建文) 4년에 해당하는 조선 태종 2년(1402년) 조선 조정의 김사형(金士衡), 이무(李茂), 이회(李薈)는 2종의 중국 지도를 수합하여 새로운 지도를 만들었다. 이택민의 지도는 만주 남부로 흐르는 요하의 조금 앞까지밖에 그려내지 못하였는데, 한반도 전체와 일본까지도 포함된 지도였다. 이것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이다. 다음은 그 성립 과정을 해설한 것이다.
역사적 가치
기존의 연구들을 통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지도를 통한 동서 문화의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로 평가되었다. 중세 이슬람의 지도학이 중국으로 유입되고 그것이 조선에서 변형된 형태로 제작되었기 때문에다. 중세 이슬람시대에는 광활한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고대 로마의 지도학을 수용하여 지리학·지도학을 발전시켰다. 특히, 유라시아 대륙을 제패했던 몽골제국의 문화 전파가 지도 제작에 큰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에 따라 지도에는 서남아시아의 아라비아 반도가 길쭉하게 그려져 있고, 유럽의 지중해와 이베리아 반도 등도 표현되어 있다. 무엇보다 15세기 초에 아프리카 대륙이 실제 지형과 거의 비슷하게 그려졌다는 것은 경이롭다.
하지만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이슬람 지도학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현재 전하는 이슬람의 세계지도와는 또 다른 특징들을 갖고 있다. 이슬람 세계지도는 남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두는 반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북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또한 이슬람 지도에서는 아프리카 남단을 동쪽을 향하도록 그리지만, 「혼일강리역대국도」에서는 지금의 실제 모습에 가깝게 묘사되어 있다. 이미 중국에서 수정된 내용으로 그려졌던 「성교광피도」를 바탕으로 하여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지금의 모습에 가까운 지도를 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그 당시 세계의 가장 정확한 지리 정보를 담은 지도로 평가되고 있다.
기타
비슷한 지도로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混一歷代國都疆理地圖)가 있다. 이 지도는 1500년대 것이고 유럽과 아프리카, 아랍 등 서역은 생략하고 중국과 조선 중심으로 그려져 있다.
동영상
참고자료
-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위키백과》
-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나무위키》
-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조선의 의정부 관료들, 세계지도를 만들다]〉, 《우리역사넷》
-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역사이야기> "천하는 넓다네" '혼일강리도'의 시선〉, 《K-공감》, 2015-02-02
- 이병우 기자, 〈“일본 류코쿠대 ‘혼일강리도’ 1480년대 제작”〉, 《고양신문》, 2013-10-10
- 김선흥 기자, 〈세계가 주목하는 조선의 지도, 정작 한국은... - 〉, 《오마이뉴스》, 2019-04-17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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