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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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獨逸, Deutschland)은 유럽 중부에 있는 국가이다. 수도는 베를린(Berlin)이다. 여러 개의 독립국이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을 거쳐 독일제국으로 성립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으로 나뉘었다가 1990년 통일되었다.
목차
개요[편집]
독일연방공화국(Bundesrepublik Deutschland), 약칭 독일(Deutschland)은 중부유럽과 서유럽에 위치한 연방 공화국이다.
유럽 최고의 경제대국으로, 프랑스와 함께 현 유럽연합 체제를 주도하는 국가이다. 과거 독일과 여러번 경쟁하던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러시아 같은 유럽의 강대국들도 현재는 독일만큼의 경제력을 갖추지 못한다.
1949년 종전과 함께 미국·영국·프랑스·소련으로 이루어진 전승 4개국의 분할통치를 받다가, 서독과 동독으로 분단되었다. 이후 서독은 1950년대부터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하였다. 냉전이 정점에 이른 1961년에는 동독 측에서 일방적으로 베를린 시를 가르는 베를린 장벽을 설치하여 긴장이 고조되었다.
1970년 이후 서독의 동방정책으로 대치가 완화되고 경제적 교류가 진행되었고,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에 따른 동독의 공산정권 붕괴로 1990년 독일 재통일이 이루어졌다. 통일 후 독일은 유럽연합의 핵심 회원국으로 경제강국에서 정치·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인구 8,200만 명, GDP 4조 달러로 유럽연합 최대 국가가 된다.
독일어가 영어나 프랑스어, 스페인어만큼 세계적으로 많이 쓰이는 언어가 아님에도 EU 3대 공용어 중 하나인데, 이는 스위스나 오스트리아, 리히텐슈타인처럼 유럽 내 독일과 인접한 국가들이 독일어를 많이 쓰기 때문이다.경제적으로는 GDP(명목) 4위, GDP(PPP) 5위, 특별인출권 유로화, 1인당 GDP 18위, 국제통화기금 투표권 4위, 금 보유고 2위, 무역량 총합 3위, AIIB 지분율 4위이다. 국방 분야에서는 국방비 세계 8위, 군사무기 수출은 세계 5위다.
국가 상징[편집]
국호[편집]
독일의 영어명인 Germany는 로마의 정치인이자 장군인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라인강 동부의 게르만족이 사는 지역을 '게르마니아(Germania)'로 부른데서 유래한다. 또한 독일어 국명인 도이칠란트(Deutschland)는 '사람들의 땅(diutisciu land)'에서 유래한다. 프랑스어로는 '알마뉴'(Allemagne), 폴란드어로는 '니엠치'(Niemcy), 중국어로는 '더궈'(德国)라고 한다.
현재의 독일 지역에는 기원전부터 여러 게르만계 부족이 거주하였고, 서기 100년경 문헌에 게르마니아가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10세기에 이르러 게르만족은 신성로마제국의 핵심 민족이 되었고, 16세기에 북독일은 종교개혁의 중심지가 되었다. 1806년 나폴레옹 전쟁으로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되면서 여러 제후국과 도시국가로 분열되었다가, 1871년 북부의 프로이센이 중심이 되어 독일제국(German Empire)을 형성하여 중부유럽의 강국으로 군림하였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쓰이는 독일이라는 한국어 명칭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어식 한자 음차 표기인 '도이쓰'(일본어: 独逸)를 받아들여 이를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며, 그 전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덕국(德國)이라 불렀다. 해방 후에는 일제강점기의 잔재를 없애고 독일어 원발음에 좀 더 가깝게 하기 위해 도이칠란트로 표기하기도 했으나 대한민국에서는 이 표기법이 정착하지 못하였고, 현재는 대한민국 주재 대사관에서도 스스로를 '주한 "독일" 대사관'으로 일컫고 있다.
국기[편집]
독일의 국기는 분데스플라게(Bundesflagge, 연방기)로 검정, 빨강, 금색의 가로선으로 된 삼색기이다.
검정은 억압과 탄압에 대한 분노와 어둠을, 빨강은 자유를 동경하는 정신을, 금색은 진리와 지혜를 뜻한다. 1813년 해방 전쟁에서 나폴레옹에 대항한 의용군의 군복색에서 이 3색이 왔다고 보기도 한다. 프로이센 왕국의 장군, 루트비히 아돌프 빌헬름 폰뤼초(Ludwig Adolf Wilhelm von Lützow) 육군 소장(Generalmajor) 의 휘하로 모인 독일 전역의 의용병들은 저마다 다른 군복이나 사복을 들고왔기 때문에 통일성을 주기 위해 옷을 검정으로 물들였고 놋쇠 단추를 금색으로 달았고 소매를 빨강으로 썼다. 당시에 이 3색은 예속의 어둠에서 피의 살육을 지나 자유의 금빛으로 향한다는 의미를 가졌다.
이 흑적금 국기는 1848년의 3월 혁명으로 인해 탄생한 프랑크푸르트 의회에 의해 처음으로 통일된 독일 국기로 지정되었으나 이로 인해 공화주의와 자유주의, 민주주의의 상징이 된 탓에 혁명 실패 이후 폐지되었다. 그리고는 검정, 하양, 빨강으로 구성된 삼색기로 바뀌어서 이것이 북독일 연방을 이어 독일 제국의 국기로 지정되었다. 1918년 제정이 폐지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성립되었을 때도 1919년까지 잠깐 독일 제국의 검정, 하양, 빨강의 삼색기가 사용되었다. 1919년 검정, 빨강, 금색의 국기가 국기로 재지정되었으나 1933년 아돌프 히틀러의 대독일국 체제가 세워지면서 폐지되고 다시 독일 제국의 국기가 잠시 쓰였다가 1935년 하켄크로이츠가 들어간 빨간 국기로 바뀌었다. 1945년에 나치 독일이 패전하며 하켄크로이츠는 국기의 지위를 잃었고, 1949년 흑적금 국기가 다시 서독과 동독의 국기로 지정되었다. 현재 하켄크로이츠기는 다른 나치의 상징들과 마찬가지로 달거나 쓰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독일 제국의 흑백적 국기는 금지되지는 않았으나 독일 제국의 군국주의에 부정적인 독일인들은 독일 제국의 국기도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독수리가 붙어 있는 연방국가 직무기(Dienstflagge der Bundesbehörden) 혹은 연방직무기(Bundesdienstflagge)라는 정부기도 있는데, 연방 정부의 부서에서만 사용되고 민간이나 주 정부의 사용은 금지되어 있다. 이 독수리 문양은 국장과 다르다. 가끔 현재의 독일과 서독을 구분하기 위해 연방직무기를 서독의 상징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 깃발의 용도는 서독이나 통일독일이나 완전히 같기 때문이다. 또 이 깃발이 서독 국기고 통일되면서 독수리 문양이 빠진 것으로 잘못 아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가로로 다는 형태가 일반적이지만 세로로 달기도 한다.
독일이 동서독으로 분단된 후 1959년 동독은 이 국기의 중앙에 각각 농민, 노동자, 지식인을 상징하는 호밀, 망치, 컴퍼스가 그려진 국장을 추가하여 서독과 구분되게 하였다. 동독이 서독에 흡수통일될 당시 이를 환영하던 동독 국민들은 동독 국기에서 국장이 있는 부분을 동그랗게 오려내거나 검은 테이프 등으로 문장에 X자를 쳐서 서독 국기처럼 만들고 서독 국민들과 깃발을 흔들기도 했다. 냉전이 격화되던 초기에 서독 정부는 하켄크로이츠와 동독 국기를 거의 동급으로 취급하며 동독 국기의 사용을 법으로 금지했지만, 1969년 금지에서 해제한 후로 통일 이후에도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동독 국기의 사용을 허락하고 있다. 지금도 베를린 등 동부 지역에서는 종종 동독 국기를 볼 수 있다.
독일에서 국기의 금색을 금색(Gold)이 아니라 노랑(Gelb)이라고 하는 건 국기 모독으로 간주한다. 1959년 6월 독일 연방대법원(Bundesgerichtshof)의 판결에 따르면 독일의 국기를 노랑으로 부르는 것은 나치 시기 민주주의 비방 중 하나며 나치 옹호와 동급으로 여긴다. 과거 나치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검정, 빨강, 금색의 국기의 금색을 노랑, 겨자색, 똥색 등으로 부르며 비하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국기 모독으로 인한 금지와는 별개로 '국기 색은 흑, 적, 금이다.'라는 규정 자체는 아예 기본법에 못박아 놨다.
1990년부터는 '금색'을 강조하기 위해 어두운 색상이 사용된 독일 국기도 자주 보였으나 1996년에 연방 표준이 정립된 후에는 쓰이지 않는다.
독일에서도 북유럽처럼 치우친 십자가 국기를 쓰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무산되었다. 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가담했던 요제프 비르머(Josef Wirmer)가 암살에 성공했을 경우 하켄크로이츠를 없애버리고 대신 쓰려고 만든 것도 있었다.
독일 현지에서는 정부기관 등 공식적인 위치에 걸려있는 것을 제외하면 야외에서 국기가 많이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자국에 대한 자부심을 표출하는 것이 꺼려졌기 때문이다. 대신 지역별 주기가 걸려있는 게 많이 보인다. 물론 길거리에서 현 독일 국기를 들고 다녀도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당연히 하켄크로이츠가 있는 국기는 불법이다.
국가[편집]
독일의 국가(國歌) 제목은 "독일인의 노래(Das Lied der Deutschen)"이며, 흔히 약칭 "독일의 노래(Deutschlandlied)"라고 부른다.
요제프 하이든이 작곡한 현악 사중주 황제의 선율에 가사를 붙인 곡이다. 이 곡에는 황제를 찬양하는 가사가 붙여져 Gott erhalte, Gott beschütze(하느님 보우하소서, 하느님 보호하소서)라는 제목으로 1797년부터 신성 로마 제국 및 오스트리아 제국 합스부르크 가문의 찬가이자 국가로 사용되었다. 이후 1841년에 시인 팔러슬레벤이 같은 곡에 기존 황제를 찬양하는 가사 대신 독일을 찬양하는 애국적인 가사를 붙여서 "독일의 노래(Deutschlandlied)"라 했고, 독일의 애국가요로 널리 애창었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패망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제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서자,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정부는 황실을 찬양하는 가사의 이 곡 대신 다른 곡으로 국가를 바꾸었다. 독일 제국에서도 제정이 무너지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섰는데,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는 오스트리아가 기존 국가를 다른 곡으로 바꾸자 오스트리아 정부의 양해를 구하고 "독일의 노래(Deutschlandlied)"를 공식 국가로 채택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에서는 기존 국가에 대한 향수가 엄청났기 때문에 새 국가가 국민들에게 호응을 얻지 못했고, 결국 1929년 기존 하이든 곡에 새로운 가사를 붙여 국가로 재지정했다. 그리하여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같은 곡에 가사만 다른 국가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후 1938년 독일에게 오스트리아가 합병되면서 독일의 가사를 사용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다시 독립한 오스트리아는 1946년 새로운 곡으로 국가를 교체하였고, 동독 역시 1949년 새로운 국가를 제정하였으나, 서독에서는 이 곡을 계속 국가로 사용했고, 1990년 통일 독일의 국가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독일 국가로서 '독일의 노래(Deutschlandlied)'의 가사는 1841년에 원래 3절로 작사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대적 상황이 변함에 따라 1952년부터는 원 가사의 3절만 부르고 있다.
독일이 축구강국이라 축빠들은 월드컵이나 유로 대회에서 이 곡을 자주 듣는다. 라 마르세예즈나 God Save the King, 마멜리 찬가처럼 친숙한 곡인 셈. 또한 포뮬러 1 팬들에게도 친숙한 노래인데, 2000년대 초중반엔 미하엘 슈마허가, 2010년대 초중반엔 제바스티안 페텔이 우승하는 경우가 많아 자주 국가가 연주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2014년부터는 강력한 레이스카를 보유한 메르세데스 팀이 우승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아 역시나 독일 국가가 자주 연주되고 있다. 일부 팬들은 반 농담으로 아예 독일 국가를 포뮬러 1 공식 주제가나 공식 엔딩곡이라고 부를 정도.
높지 않은 키(E♭)로 느리게 진행되는 장엄한 곡조 덕에 인기있는 국가 중 하나로도 꼽힌다.
비공식 국가 취급받는 노래로는 스콜피온즈의 Wind of Change가 있다. 독일 재통일을 상징하는 곡이다.
지리[편집]
독일의 면적은 35만 7,022㎢로 한반도의 1.6배, 남한의 3.5배이다. 국이 가운데 육지 면적은 349,223㎢, 내수면 면적은 7,798㎢이다. 독일은 유럽에서 7번째로, 세계에서는 63번째로 넓은 나라이다. 국토는 유럽 중앙부에 위치하여 북쪽으로 덴마크와 북해, 발트해, 동쪽으로 폴란드와 체코, 남쪽으로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서쪽으로 프랑스, 룩셈부르크, 벨기에, 네덜란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지형[편집]
독일의 지형은 4개의 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4개의 지역은 북부의 북독일 평야(North German Plain), 남쪽으로 고도 200~1,000m의 구릉성 산지인 독일 중앙고지, 다시 그 남쪽에 펼쳐지는 구릉·대지 및 평탄지로 구성된 남독일, 그리고 독일의 알프스(German Alps) 산지로 나누어지며, 각 지역은 기후와 강수량뿐 아니라 토양과 식생도 상이하다.
- 북독일 평야
북독일 평야는 전역이 빙하 퇴적물로 뒤덮인 곳으로, 서부에서는 모래 크기 입자의 퇴적 토양이 평평한 지형을 이루고, 저지대에는 소택지와 수생식물이 퇴적하여 형성된 이탄지가 넓게 분포한다. 북독일 평야는 산성토양으로 철분을 함유하여 식물의 생육에 적합지 않아 축산업을 주로 한다. 연안부에는 간척지가 조성되었는데 땅이 비옥하여 목초지로 이용하고, 그 배후에는 메마른 농토와 '하이데(Heide)'로 불리는 황무지가 펼쳐져 있다.
- 독일 중앙고지
라인고지(Middle Rhine Highlands)로 불리는 중앙고지는 비옥한 퇴적지형으로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였다. 빙하가 형성한 계곡을 따라 만들어진 하천은 대부분 동서방향으로 건설된 운하로 연결되어 있다. 중앙고지는 동서로 연속되는 1,500m 이하의 산지지형으로, 라인협곡(Rhine Gorge) 및 베저강·엘베강의 곡지가 남북으로 가로지르고 있다. 베저강은 오랫동안 남북을 잇는 교통로로 활용되어 왔다. 이곳에는 라인강과 그 지류 모젤강(Mosel River)이 흐르며 빙엔에서 본에 이르는 구간에 협곡이 많이 형성되어 있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뢴산맥(Rhön)과 튀링겐주에 있는 튀링거숲(Thüringer Wald) 사이에는 고지대와 저지대가 교차하는 복잡한 지형이 형성되어 있다.
- 남독일
남독일은 서쪽의 보주산맥에서 동쪽의 보헤미안숲(Bohemian Forest)까지 펼쳐진 지역으로 북쪽의 중앙고지, 남쪽의 독일 알프스 사이에 위치한다. 마인강·네카어강 유역은 독일에서 가장 비옥한 지대 중 하나로, 기후가 온난 건조하여 포도와 밀의 산출이 많다.
네카어강 유역에는 슈투트가르트·하이델베르크, 마인강 유역에는 뉘른베르크·밤베르크·뷔르츠부르크·프랑크푸르트 등 여러 도시가 발달하였다. 스위스 바젤에서 마인츠에 이르는 단층에 의해 토양이 함몰된 형태인 라인지구대는 오래전부터 교통망으로 이용하였다.
라인강 동쪽으로는 숲이 울창하여 '검은 숲'이라고도 불리는 슈바르츠발트 숲과 산악지형이 위치하고, 서쪽으로는 보주산맥과 하르트산맥(Harz Mountains)이 수직에 가까운 급경사를 이룬다. 라인지구대에는 단층 운동에서 수반되는 화산활동으로, 화산 산지나 온천이 많이 있다. 보름스에서 마인츠를 거쳐 빙엔에 이르는 구간은 독일에서 가장 비옥한 퇴적지형으로 포도재배 등의 농업이 활발하다.
- 알프스 산지
남부의 알프스 산지는 바덴뷔르템베르크주를 포함하여 슈바벤(Swabian)과 프랑코니아(Franconia) 지역으로 직선으로 곧게 뻗은 언덕과 산맥으로 구성된다. 독일이 점한 알프스 산맥은 국경지역에 위치해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에 비해 면적이 작지만, 해발 2,962m로 독일에서 가장 높은 추크슈피체산이 있으며 많은 빙하호가 분포하여 경관이 뛰어나다. 또한 남부 산지는 유럽에서 두 번째로 긴 강인 도나우강의 발현지로, 바바리안 숲(Bavarian Forest)을 사이에 두고 체코와 국경을 접한다.
기후[편집]
독일은 일반적인 상식과는 달리 남부 지방이 북부 지방보다 겨울이 더 춥다. 그 이유는 북부 독일은 해안가와 인접해 있기에 서안 해양성 기후를 띠지만 남부 독일은 알프스 산맥과 가까워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위도 상으로는 더 남쪽에 있어서 따뜻할 것 같은 남부 독일 지역이 위도 상 더 북쪽인 북부 독일 지역보다 오히려 겨울이 더 춥고 연교차도 크다.
실제로 북부 독일의 함부르크는 북위 53° 33′ 55″에 위치해 있지만 1월 평균기온은 영상 1°C로 위도 상으로 한참 남쪽인 대한민국 대구광역시(북위 35° 52′ 17″)의 1월 평균기온(0.6°C)과 비슷한 수준이다. 수도 베를린 또한 북위 52° 31′ 07″로 상당히 위도가 높은 곳에 위치해 있지만 베를린의 1월 평균기온은 영상 0.6°C로 역시 위도 상 한참 남쪽인 대한민국 대구광역시의 1월 평균기온과 정확히 일치한다. 반면, 남부 독일의 대표 도시인 뮌헨의 경우는 위도 상으로 북위 48° 08′으로 더 남쪽에 있지만 1월 평균기온은 -2.2°C로 오히려 함부르크나 베를린보다 더 춥다. 뉘른베르크 역시 위도는 북위 49° 27′으로 함부르크나 베를린보다 더 남쪽에 있지만 1월 평균기온은 -0.1°C로 더 춥다.
서안 해양성 기후 치고는 추운 편이며 서유럽 주요 국가들 중에서는 겨울이 혹독한 국가로 알려져있다. 습도도 높고 일조량이 적어 우울한 느낌이 들고 춥게 느껴지는데다, 서울 등에 비해 평균적으로 따뜻하지만 위도가 높아 한번 한파가 몰아닥치면 -15도 아래로도 내려갈 정도다. 2017-2018년에 북극 한파가 닥쳤을 때도 일부 지역은 -30도 아래 까지 내려가기도 했다. 물론 이건 극히 드문 경우지만.
다만 여름은 남부나 북부 모두 서늘한 편이며 연중 강수량이 고르다는 것도 똑같다. 그리고 독일이 암만 춥다고 해도 대한민국이나 북한보다는 겨울이 더 따뜻한 편이다. 열섬현상이 비교적 덜해서 가끔 서울 등 대도시보다 낮은 극값이 나오기도 하지만. 가장 추운 곳 중 하나인 뮌헨 역시 독일에서나 제일 추운 곳이지 한국의 서울특별시 기온과 비슷한 수준이고 대부분의 지역은 대체로 한국의 중남부 지역 겨울철 기온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다만 비가 자주 오는 곳이라 습도가 높은 편이기에 한국에서와는 다르게 뼈가 시리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식생[편집]
독일은 원래 원시림이 무성한 곳이었으나, 15~16세기부터 농경지 조성을 위해 산림과 습지를 대대적으로 개간하였다. 이에 따라 현재는 국토의 약 50% 정도가 경작지이며, 30%는 산림 그리고 14%는 거주지와 산업시설이 들어서 있다. 평야와 구릉지의 숲에는 참나무와 너도밤나무 등의 낙엽송이 전체 수목의 약 40% 정도를 차지한다. 고지대와 북부지역을 포함해 전체산림 면적의 60%는 소나무와 가문비나무 등 침엽수림이다. 침엽수림 면적이 넓은 이유는 계획적인 조림사업에 따른 것이다.
저지대와 습지에는 다양한 종의 양치류와 이끼류가 풍부하고, 청색 수레국화는 독일의 국화(國花)이다. 숲에는 노루, 여우, 오소리, 토끼, 멧돼지, 야생양의 일종인 무플론 등 유럽중부에서 흔히 서식하는 동물이 분포한다. 가파른 산지에는 독수리도 불 수 있으며 일부 지역에는 유라시아 비버도 서식한다. 정부는 생태계 보존을 위해 전국에 17곳의 생태계 보존구역과 105개의 자연공원을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역사[편집]
역사적으로 지금의 지역에 독일(獨逸) 또는 도이칠란트(Deutschland)라는 하나의 단일 국가가 등장한 것은 1871년 독일 제국이 지금의 독일 지역과 프로이센, 알자스, 로렌 지역을 합쳐 성립된 때이다. 이전에 지금의 독일 지역은 여러 개의 영방국가로 나뉘어 있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프로이센 지역은 폴란드에, 알자스와 로렌은 프랑스에 넘어갔다.
역사가들 사이에서 독일의 역사의 시작점은 논란의 대상이다. 843년 베르됭 조약 이후 세워진 동프랑크 때로 보는 관점, 911년 콘라두스 1세가 독일 왕국의 왕으로 뽑힌 때로 보는 관점, 936년 오토 1세가 독일의 왕으로 뽑힌 때로 보는 관점, 962년 오토 대제가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인정받아 신성 로마 제국이 성립한 때로 보는 관점 등등이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베르됭 조약 이전에 샤를마뉴(카를 대제)가 즉위한 시점을 독일의 기점으로 보는 역사가들도 있다.
동프랑크 왕국 이후 "독일"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갖춘 나라가 세워진 것은 911년 동프랑크의 네 게르만 부족인 프랑켄, 슈바벤, 바이에른, 작센이 모여 독일 왕국을 세웠을 때이다. 925년에는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쓰던 로타링기아 지역이 독일 왕국으로 편입되었다. 하인리히 1세가 오토 왕조를 창건한 뒤, 그 아들 오토 1세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어 독일 왕국 뿐만 아니라 지금의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북부 지방까지를 통치했다. 오토 왕조에 이어 잘리어 왕조와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통치 아래서 기독교(로마 가톨릭교회)는 엘베 강 너머로 전파되었으며, 엘베 강 동쪽 지역도 개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곧 벨프 가문과의 대립으로 권력을 상실하고,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성장, 종교 개혁과 30년 전쟁 등을 계기로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바이에른 등을 비롯한 2000개에 가까운 영방 국가로 쪼개졌다. 남부의 오스트리아는 명목 상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국을 겸하면서 북동부에서 성장하던 프로이센과 대립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은 1806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의 정책으로 해체되고, 독일 서부 지역에서는 나폴레옹 법전을 받아들인 라인 연방이 세워져 프랑스의 간섭을 받았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영국과 러시아의 주도로 독일 지역에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39개의 국가들이 모인 "독일 연방"이 세워졌다가, 1871년 빌헬름 1세와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통일된 "독일 제국"이 세워졌다.
독일 제국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기존의 열강들과 대립하다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으나 결국 패배하고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한 조항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호엔촐레른 왕가가 추방당한 뒤 세워진 바이마르 공화국은 국제 연맹에 가입하고 경제 회복을 위해 노력했으나, 세계 대공황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경제난의 책임을 유대인과 집시에게 전가한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는 1933년 국민 절대다수의 지지를 받으며 집권했으며, 제3제국, 즉 나치 독일을 선포했다. 나치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을 폐기하고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을 무단으로 점령했으며, 1939년 중앙 유럽을 지배하기 위해 일본, 이탈리아 등과 손을 잡고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으며, 수백만명에 이르는 유대인을 학살했다. 1945년 나치 독일은 멸망했으며, 독일 지역은 영국, 프랑스, 미국, 소비에트 연방이 분할하여 영국·프랑스·미국령은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 소비에트 연방령은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으로 분단되었다. 분단된 독일의 두 나라는 나치 독일의 잔재를 청산하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경제를 발전시켜 나갔으나, 동독은 재정 관리에 실패하여 곧 경제가 악화되었다. 결국 동독은 합의를 통해 1990년 10월 3일 독일 연방 공화국의 주로 가입하는 형식으로 흡수되었고, 독일은 재통일되었다.
현재 독일은 유엔의 회원국이자 G20의 일원이며, 서독 시대의 체제를 계승하여 유럽 연합과 북대서양 조약 기구의 회원국 지위를 가지고 있다. 또 1936년과 1972년(서독)에 하계 올림픽을 개최했으며, 1974년(서독)과 2006년에 FIFA 월드컵을 개최하여 국제적인 위상을 높여가고 있다. 그러나 낙후된 구 동독 지역의 개발, 서독 지역과 동독 지역 간의 지역 감정 해결, 외국인 노동자 이주 문제가 당면 과제로 남아 있다.
선사 시대[편집]
1907년 호모 헤이델베르겐시스가 발견되었는데 이로서 독일 지역에 구석기 시대부터 인류가 존재했었다는 설이 입증되었다. 중석기 시대에 그들은 사냥을 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은 조개를 채집하기도 했으며, Sippe 씨족집단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신석기 혁명의 여파는 독일 지역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으며, 라이프찌히에서 신석기 유물이 발견됨으로써 입증되었다. 이때부터 씨족 중심의 원시 사회는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했고, 귀족 집단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기원전 700년경 소아시아로부터 철이 들어왔고, 이 때부터 본격적인 계급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농업과 목축업이 분업되었다. 소아시아로부터 들어온 철기문명은 우선 무기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켰고, 농업생산력을 발전시켰는데, 이 때부터 전쟁으로 생긴 노예가 그 노동을 담당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 노예가 로마 제국처럼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고대 사회[편집]
게르만족 사회[편집]
기원전 4세기에서 3세기경에 게르만족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혈통적이라기보다는 경제·사회·문화적 발전에 따른 복속과 통합 과정으로 인해 생겼다. 게르만족은 처음 부족연맹체로써 등장했다. 바이에른족, 알레마니족, 프랑켄족, 튀링겐족, 프리젠족, 작센족 등 같은 부족에 속한 사람들은 관습·종교·문화·법적 전통을 갖는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고, 혈족명으로 다른 부족과 구별하였다.
게르만 부족은 기원전 500년경 까지 발트해 연안에 거주하다가 기원전 100년경 현재의 독일지역으로 남하하였다. 당시 게르만족은 스칸디나비아 남부, 독일 동부의 오데르강과 비스와강, 현재의 덴마크 영토인 유틀란트(Jutland) 반도, 엘베강과 라인강 연안에 부족단위로 흩어져 살았다. 라인강은 당시 게르만 부족과 로마제국간 경계선의 역할을 했는데, 기원전 70년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라인강 너머 게르만의 일부 부족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로마제국은 북부로 영토 확장을 꾀하면서 게르만족과 끊임없이 충돌하였다.
서기 9년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시절 로마군은 독일 북서부 지역에 있는 토이토부르크 숲(Teutoburg Forest)에서 게르만의 족장 아르미니우스에게 대패하였다. 이후 전세가 역전되어 게르만족이 로마제국을 빈번하게 침범하자 로마는 라인강을 따라 약 300km에 달하는 방벽을 설치하였다. 375년 훈족의 침입과 로마제국의 쇠퇴를 틈타 게르만족은 현재의 프랑스와 독일 지역으로 이동해 정착하였다. 게르만계의 앵글로색슨은 영국에 정착하였고, 일부는 이탈리아와 스페인까지도 진출하였으나 곧 현지에 동화되었다.
프랑크 왕국[편집]
486년 게르만의 족장 클로비스는 부족을 규합하여 프랑크 왕국을 세웠다. 250년간 유지된 프랑크 왕국은 게르만족이 세운 최초의 문명화된 왕국으로, 8세기경에는 베네딕토회 선교사 성보니파시오(Saint Boniface)를 통해 기독교가 보급되었다. 768년에는 프랑크 왕국의 2대 왕 샤를마뉴가 카롤링거왕조를 세우고, 바바리아(Bavaria), 롬바르디(Lombardy), 삭소니(Saxony) 지역을 복속시켰다. 이어서 샤를마뉴는 네덜란드·벨기에·스페인 북부와 이탈리아의 약 절반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하였다. 그가 이탈리아 북부 지역을 대부분 통합하자 800년 로마의 교황 레오 3세는 로마제국의 왕관을 수여하였다.
그러나 카롤링거 왕조는 엄격한 법률과 체계적인 정치시스템 보다는 황제의 리더십에 의존하는 구조였다. 이에 따라 840년 샤를마뉴의 아들 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Ludovicus I Pius, 778~840.6.20, 재위 813~840)가 사망하자 843년 베르됭조약에 의해 왕국은 동서로 분열되었다. 서프랑크왕국은 이후 프랑스의 기원이 되었고, 동프랑크왕국과 문화·언어적으로 다른 국가로 발전하였다. 현재의 독일과 오스트리아 지역에는 동프랑크왕국이 들어서 서쪽으로 라인강, 동쪽으로는 엘베강, 남북으로는 알프스에서 북해에 이르는 영토를 차지하였다. 당시 동프랑크는 프랑코니아(Franconia), 삭소니(Saxony), 바바리아(Bavaria), 슈바벤(Swabia), 로렌느(Lorraine) 등 여러 공작령으로 구성되었다. 이들 공작령은 중앙의 지배를 받지 않는 독립적인 국가로 유지되어 동프랑크는 명목상의 왕국에 불과하였다.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은 3등분되었으며, 서프랑크는 오늘날의 프랑스, 중프랑크는 지금의 이탈리아, 동프랑크는 지금의 독일의 기원이 되었다.
중세사회[편집]
신성 로마 제국 시대[편집]
919년에 작센의 하인리히 공작이 독일국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많은 가신을 보유하고 있었다. 헝가리와 상대로 전쟁을 하여 영토를 확장했으며, 928∼929년에 슬라브(폴란드)를 공격했다. 그는 마자르(헝가리)에 대한 곡물 납부를 거부하기도 했다. 그가 하인리히 1세이며, 그의 아들이 오토 1세이다.
936년에 오토1세가 부족의 동의를 얻어 동프랑크의 왕이 되었다. 오토1세는 즉위 후 왕권강화를 위해 교회를 왕권의 후견인 혹은 지주로 삼는 정책을 취하면서 한편으로 카롤링거 왕조의 전통에 따라 주교와 수도원장의 임명권을 주장하였다. 오토1세는 951년과 961년 두 번에 걸쳐 이탈리아왕국을 침공해 병합하여, 962년 교황 요한 12세(Papa Giovanni XII)로부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대관되었다. 오토 1세는 955년 레히펠트전투에서 마자르족을 격퇴하고 엘베강과 오데르강 사이에 거주하는 슬라브족도 복속시켰다. 996년에는 그레고리오 5세가 독일인으로는 최초로 교황에 등극하면서 게르만 민족이 중심이 된 신성로마제국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1046년 바이에른공국왕국의 대공이며 슈바벤의 공작인 하인리히 3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하였다. 하인리히 3세는 황제권 강화를 위해 교회세력을 통제하여 4명의 교황을 교체하였고, 성직매매와 수도사의 결혼을 금하는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아들인 하인리히 4세는 개혁적인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성직자 임명권을 두고 대립하다 1077년 카노사의 굴욕을 당하며 교회개혁은 실패로 돌아갔다. 하인리히 4세 이후에도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교황의 대립이 지속되면서 황제의 권한은 약화되고 제국 전역은 실질적으로 각 지역의 영주들이 지배하였다.
1152년 왕위에 오른 프리드리히 1세는 이탈리아를 확고히 지배하고, 동방식민운동을 전개하여 엘베강과 잘레강 너머 슬라브족의 본거지를 점령하여 독일민족의 거주지를 동쪽으로 크게 확장하였다. 당시 십자군전쟁을 치르기 위해 결성된 튜턴 기사단(Teutonic Order) 등, 여러 독일기사단은 동쪽의 식민지 개척에 나서 현재의 폴란드와 체코, 동북부의 실레시아(Silesia) 및 발트 지역까지 진출하였다. 1347~1351년에는 유럽인구의 30~60%가 사망한 페스트가 돌아 신성로마제국은 경제·문화·종교적으로 위축되었고, 혼란을 틈타 반유대인 정서가 널리 퍼져 유대인들이 폴란드와 발트지역으로 대거 이주하였다. 유럽을 휩쓴 흑사병은 교황과 교회의 권위도 크게 위축시켰다.
1438년부터 합스부르크 왕가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세습하여 1806년까지 제국을 지배하였다. 합스부르크는 오스트리아 등 일부 지역의 통치에만 전념해 신성로마제국의 분권화는 더욱 심해졌다. 지방분권화가 심화되면서 상업도시들이 번창하였고 일부는 자유제국도시(Free imperial cities)로서 고도의 자치권을 누렸다. 북부 독일의 도시에서는 상인조직인 길드가 주축이 되어 북해와 발트해를 중심으로 한 무역망인 한자동맹이 탄생하였다. 상업의 발달로 도시에서는 상공업 계층이 확대되어 점차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발전하였다.
1806년에 나폴레옹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하였다.
절대주의 시대[편집]
17세기부터 유럽 대륙 전반에 걸쳐 절대 왕정·상비군 제도·관료제·중상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절대주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독일의 절대주의는 봉건 국가의 최고이자 최후의 형태로서 발달하였다. 사회·경제적 측면에서는 소규모 상품 생산 체제가 해체되기 시작하면서 제조업 자본주의가 발달하여 분산된 제조업이 등장하였다.
18세기초 합스부르크 왕가와 부르봉 왕가의 갈등이 본격화하면서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 등 숱한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이 전쟁의 결과는 합스부르크의 영향력 확장이었다. 이때에 오스트리아는 중앙관료체제가 성립되었고,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다. 오스트리아의 예술과 문화도 발달하기 시작했다.
17세기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선제후를 중심으로 호엔졸레른 왕가가 브란덴부르크-마크를 중심으로 서서히 발달한다. 이 나라가 바로 훗날 군국주의의 대명사로 19세기 독일사를 주도해나간 프로이센 왕국이다.
16세기초 독일의 전환기[편집]
15·16세기부터 프랑스 혁명 때까지는 이른바 매뉴팩처(manufacture) 자본주의가 형성되던 시기이다. 이때의 주요한 산업형태는 "선대제(putting-out-system;Verlag)" 체제이다. 선대제는 원거리무역으로 갑부가 된 상인이 직접 생산에 관여하는 체제로 상인이 수공업자에게 원료와 자금을 제공하며, 생산도구는 노동자가 소유한 채, 노동자가 상인에게 약속한 물품을 넘기는 방식이다. 16세기 초 무렵, 생산력이 발달하기 시작하는데, 주석, 구리 광산이 개발되기 시작했으며, 제련소·제철소·섬유 생산이 늘어났다. 생산수단과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 계층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이 때부터이다.
농업에서도 자연 경제 중심 체제가 뚜렷하게 화폐경제로 이행되기 시작했고(화폐지대의 출현), 부유한 농민층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토지에 목을 매달고 살던 기사와 하급귀족들이 몰락·해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기사와 하급 귀족 중 일부는 근대적 관료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독일에서 성직자 수는 계속 증가했는데, 이는 독일이 로마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반증이며, 종교개혁이 독일에서 시작된 배경을 이루게 된다.
16세기에는 합스부르크왕가의 권력이 확장된 시기였다. 그들의 권력확장은 주로 전쟁에 기인한 것이라기보다, 결혼과 외교에 의존한 확장이었다. 보헤미아·헝가리·독일·스페인 등이 합스부르크로 편입되었다.
초기 부르주아 혁명의 단초는 이때 나타나기 시작한다. 독일을 비롯한 북부유럽은 국민문학이 발달하였는데,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으로 대표되는 북방 르네상스이다.
- 정치적 변동1250년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프리드리히 2세가 죽으면서 호엔슈타우펜 가문은 종말을 고했고, 룩셈부르크 왕가에 이어 오스트리아의 제후였던 합스부르크 가문이 대신 황제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황제는 이탈리아 문제와 국내 문제에 매달려 제대로 왕 역할을 하지 못했고, 수 십년동안 황제가 없는 대공위 시대가 연출되기도 했다.
황제가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은 연방제후들의 준동이 큰 역할을 담당했고, 그럴수록 황제권은 약화되는 악순환을 거듭하였다. 정치생활의 중심이 제후들의 연방국가로 이동한 것이다. 농민 반란 실패 후 융커들의 권한이 강화되면서 중앙 권력은 더욱 약해졌다.
대공위 시대 이래 독일에서는 연방국가를 중심으로 한 권력체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중앙권력이 2원화된 형태로 6세기 가까이 유지되었다. 농민 반란은 부르주아나 농민에게 더 고통을 안겨다 주었다. 또한 로마 가톨릭교회가 독일내에서 세력을 잃었다.
종교개혁과 절대왕정[편집]
종교 개혁은 16·17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기독교 내의 개혁 운동이다. 로마와 아비뇽의 대립은 14세기경부터 교회의 추락을 볼러왔다. 그리하여 피사·콘스탄츠·바젤 등지에서 공의회(公議會)가 열렸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러한 교회의 부패에 불만을 가진 마르틴 루터와 그의 지지자들이 본격적인 종교 개혁을 주장하였다. 위클리프와 후스의 개혁도 종교 개혁에 포함된다.
르네상스가 예술과 문화 측면에 국한 되었으나, 종교 개혁은 대중에게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종교 개혁은 근대 시민 국가의 형성 과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 원인
교황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대성전 건축을 위해 푸거가에 엄청난 돈을 빌렸다. 스페인의 카를 5세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입후보를 위해 역시 푸거가로부터 돈을 빌렸으나, 돈은 곧 떨어졌고 모자랐다. 그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각해낸 것이 면벌부 판매였다. 특히 면벌부는 독일에 집중적으로 팔렸는데, 성직자가 많았다는 것 외에도 이를 제어할 중앙권력이 없었다는 점도 주요한 요인이었다. 중앙 집권이 확립되어 가던 영국이나 프랑스에는 팔지 못했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이면서 독일의 종교개혁은 시작되었다. 루터는 인간은 내면적인 신앙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중세초기의 순수 기독교 사상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1518년에 루터는 소환되었고, 1519년에는 에크라는 신학자와 토론하게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루터는 로마와 결별할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지만, 이 토론에서 패배함으로써 자신이 꿈꾸는 '순수한 기독교' 사회건설을 위해서는 로마와 결별해야 한다고 결심하게 된다.
레오 10세는 1521년에 루터를 파문하게 된다. 그러나, 작센공 프리드리히가 마틴 루터를 숨겨준다. 루터는 이때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한다. 이 번역은 역사상 최초의 모국어성서로서 독일어의 문법 확립에도 큰 기여를 했다. 대중이 성서와 문자를 인식하게 되면서, 독일의 민족주의 형성에 이바지하게 된다. 근대적 자본주의 이행에 나타나는 사상의 단초는 이때부터 형성된다. 루터의 사상은 신앙에 의한 의인화(sola fide), 신앙에 의한 구원으로 집약되며, "성서는 모든 대중이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일반대중이 성직자라는 중개자를 통해서 신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날 수 있다고 믿음으로써 근대적 개인주의 사상이 자라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독일에는 3가지 집단이 등장하는데, 크게 지배층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 가톨릭 세력과 프로테스탄트가 그것이다. 1522년에는 루터에 자극받은 이들 기사단이 슈말칼덴 동맹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토마스 뮌처 사상에 영향을 받은 혁명적 집단도 존재하였다. 이들은 1524년에 농민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 결과
루터의 개혁은 북중부독일과 스칸디나비아 반도 지역에만 국한되게 되었다. 농민 전쟁 발 발시점을 계기로 농민과 루터와의 관계는 벌어졌으며, 루터는 정치화한다. 영방교회제 확립을 위해 루터를 지배층들이 끌어들였고, 루터는 이들 세력과 결합하였다. 1529년 이미 에라스무스(Erasmus)와 결별했던 루터는 츠빙글리파와도 결별한다. 루터는 슈말칼덴 전쟁 직전인 1546년에 죽었다.
그러나 엘베강 동부 지역은 종교 개혁에도 불구하고 봉건적 계급 사회가 계속 유지되었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에도 독일의 종교적 분열은 계속되었고, 반동권력에 의해 상황은 어려워지기만 하였다.
30년 전쟁[편집]
30년 전쟁은 독일 땅으로 외세의 복잡한 갈등을 끌어들인 결과였다. 영방군주들이 외세와 결탁하여 세력다툼을 일삼게 된 것이다.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대제국을 이룩한 합스부르크 왕조 및 가톨릭 연합세력, 그리고 초기 부르주아와 다른 귀족들간의 연합세력이 대립을 펼쳤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독일내 주도권 쟁탈전을 벌이게 되었지만, 프로이센은 일개 제후국에 불과한 처지였고, "왕국"의 호칭도 갖지 못한 상태였다.
전쟁의 시작은 보헤미아인들이 합스부르크에 저항하면서 시작되었다. 30년 전쟁은 보헤미아와 Platz간의 대립에서 덴마크와 네덜란드의 개입을 거쳐 스웨덴의 개입, 마지막으로 프랑스군이 개입이라는 순서로 전개되었다. 이 전쟁으로 독일 전체는 피폐화되었고, 독일 인구의 1/3이 죽었다. 결국 1648년에 베스트팔렌 조약이 맺어졌다.
조약으로 스위스와 네덜란드의 독립이 확정되었으며, 프랑스는 알자스-로렌을 차지하고, 프로이센이 확장되었다. 이때 확장된 영토를 배경으로 프로이센은 18세기초에 왕국이 될 수 있었다. 브레멘과 베르뎅은 스웨덴이 점령했으며, 프랑스와 스웨덴은 독일 제국 의회에 선거권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이 두 강국이 독일의 내정에 간섭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었다.
프로이센 왕국[편집]
프로이센 왕국은 호엔촐레른 왕가가 지배했던 독일 북부 지역에 위치한 왕국으로 1871년에 성립해 1918년까지 존속했던 독일 제국의 중심적 역할을 한 국가였다.
30년 전쟁이 끝난후, 신성 로마 제국의 영방국가 중 비교적 전쟁의 피해가 적었던 프로이센이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특히, 프리드리히 2세때 크게 성장하는데 프리드리히 2세때 오스트리아 제국의 합스부르크왕가와의 7년전쟁(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통해 석탄과 철이 풍부한 슐레지엔 지방을 차지하여 유럽의 강대국으로서 지위를 굳히게 된다.
또한 국내 산업을 육성하는 정책을 펴서 계몽사상에 심취해 있어서 농노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고문을 폐지하는 등 정책을 실시한다. 하지만, 농노제는 여전히 프로이센의 사회적 저기반으로 남아있었는데, 이는 여전히 프로이센의 사회적 지배계층 세력이 '융커'라 불리는 토지 귀족들이었고, 프리드리히 2세 또한 나라안에서 절대적 권력을 가진 군주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대제 이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때에 들어서면서 프로이센은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왕은 암우하였으며, 군대는 나약해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였으며, 예나 전투와 아우스터리츠 전투 등 전쟁에서 패한 뒤, 1807년 틸지트 조약을 체결하여 영토의 반을 잃고, 잃은 영토들은 나폴레옹이 라인연방이라는 꼭두각시 정부를 만들었으며, 많은 배상금을 지불하고, 대륙 봉쇄령에 따른 대영제국과의 무역금지와 프랑스군 주둔 등의 경제적 압박을 당하여 사실상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 속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샤른호스트나 클라우제비츠, 슈타인, 하르덴베르크 등에 의한 근대화를 위해 실시한 개혁에 의해 농노 해방과 행정 기구의 쇄신을 실시했다.
프랑스에 의한 지배는 독일인들에게 민족으로서의 자각심을 불어넣어,이때부터 프랑스로부터의 해방자로서의 역할을 프로이센에게 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같은 열광적인 민족주의자들이 나타나 민족주의를 고취했기 때문에 독일 통일을 목표로 하는 운동이 시작되었지만, 프로이센은 아직 그러한 일부 자유주의자들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대 개혁을 단행한 프로이센은 대프동맹에 중심적 역할을 했으며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을 물리치면서 다시 강대국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1815년 빈 회의에서 프로이센은 구 폴란드 분할로 획득한 영토의 일부를 사실상 러시아에게 양보하게 되었으나, 그 대신 베스트팔렌지역을 획득하였고, 동년에는 독일 연방에도 가맹하여 맹주인 오스트리아 제국과 세력을 양등분하였다.
이무렵, 러시아 제국 및 오스트리아와 신성동맹을 체결한 프로이센은 자유주의적 독일 통일 운동을 억압하면서 개혁은 정체되었고 절대주의가 난입하게 되어, 지주 지배체제가 다시 강화되었다.
독일의 경제적 통합[편집]
39개의 군소국가로 분리되어있던 상황에 1818년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관세 동맹이 결성됨으로써 독일 연방 내의 국가들이 서로 무역할 때 부과되었던 번거로운 관세들이 폐지되었기에 독일경제는 이전과 비교도 안될 정도로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통해 관세동맹은 독일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한 셈이다.
통일의 기운은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으로 영향을 받았는데, 2월 혁명이 일어나자 그 영향으로 프랑크푸르트 국민 회의가 열리고, 이곳에서 자유주의적 평화통일방안이 논의되었으나 실패하였다.
독일 통일 전쟁[편집]
자유주의적 통일을 주장했던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가 실패한 이후 독일의 정치적 통일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1862년 프로이센의 수상으로 임명된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의회와 자유주의 세력의 반대를 억누르고 철혈정책을 추진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1866년 오스트리아 제국을 맞아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크게 이겨 북독일 연방을 성립시켰다.
이어서 나아가서는 1871년 7월 14일에 프랑스와 전쟁이 일어났다. 프랑스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전쟁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프랑스군은 마르스라투르 전투와 그라블로트 전투에서 참패해 괴멸되었다. 스당 전투에서 나폴레옹 3세는 포로가 되었고, 파리 시민들은 파리 코뮌를 세우고 계속 독일군에 저항하였으나 4개월 만에 항복하고 만다. 프로이센군은 파리에서 시가행진을 하였다.
프랑스를 격파하고 이 전쟁에 승리한 프로이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통해 알자스지방과 로렌지방을 되찾고, 베르사유 궁전에서 빌헬름 1세를 황제로 즉위하여 독일 제국의 수립을 선포함으로써, 독일의 통일과 독일제국 수립을 성립시켰다.
독일제국[편집]
- 성립과 비스마르크 체제
1871년에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은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후들에게 추대되는 형태로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가 독일 황제로 즉위하여, 독일 제국이 성립했다.
그 후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에서 패전한 프랑스의 복수를 염려하여,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서구 열강과 복잡한 동맹 관계를 구축해 프랑스를 고립화시키는 외교 정책을 취했다. 이것을 비스마르크 체제라고 부른다. 이 비스마르크 체제로 프랑스를 견제하는데 있어서 성과가 있었다.
해외 식민지로서는 남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나미비아), 동아프리카(탄자니아·르완다·부룬디), 카메룬, 토고, 남양 군도, 뉴기니 북동부 및 부근의 크고 작은 섬들(나사 마크 제도), 사모아, 중국의 산둥 반도 등을 획득했다.
- 빌헬름 2세의 해외 팽창주의 정책
1888년, 빌헬름 1세가 사망하고 황태자 프리드리히 3세가 즉위했으나 제위 6개월만에 후두암으로 사망한다. 이어서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 빌헬름 2세가 즉위함으로써, 1888년은 '3황제의 해'라고 불린다. 그해에 즉위한 빌헬름 2세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대립하여 1890년, 비스마르크는 은퇴한다. 비스마르크가 실각하자마자 친정을 실시한 빌헬름 2세는 3B정책(베를린(Berlin)과 비잔티움(Byzantium), 바그다드(Baghdad))을 추진하여 제국주의적인 팽창정책을 추진했다.
그로 인해, 카이로(Cairo)와 케이프타운(Cape Town), 캘커타(Calcutta)를 연결하려는 3C정책을 내세웠던 대영제국과 영구 부동항을 확보하려는 러시아 제국, 그리고 프랑스와의 모로코 사건 등과의 대립으로 무리한 팽창 정책으로써, 결국 비스마르크 체제가 무너지게 되었고 이러한 여러 가지로 열강세력들과 충돌하게 되어 훗날,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져 발발하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편집]
1914년,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이에서 긴장이 높아가던 중 세르비아의 한 민족주의자 청년이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암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라예보 사건) 이를 계기로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였다. 그러자 세르비아를 지원하였던 러시아 제국은 오스트리아와 동맹국이었던 독일에 대항해 총동원령을 내렸으며, 독일은 러시아, 프랑스, 영국, 벨기에에 선전포고, 공격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독일은 짧은시간내에 전쟁이 끝날것이라는 예상을 했지만, 마른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전쟁의 양상은 참호전과 장기전으로 되어갔다.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주변국가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참전하였고, 독일이 제해권을 빼앗기 위해 무제한 잠수함 공격을 가했고, 전쟁의 양상은 점점 더 치열해져 갔다.
여기서 미국 상선이 독일 잠수함에 의해 격침당하자 미국은 1917년에 독일 제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그리고 미국은 대규모 군대가 파견되어 서부유럽 전선에 참전하게 되며 전쟁양상은 독일제국이 불리하게 되어간다. 이 무렵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와 독일과 단독강화를 맺고 전선에 이탈하였으며, 1918년에 같은 동맹국이던 오스만 제국이 탈퇴했다. 특히 러시아 혁명으로 통해 동맹국 오스트리아와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 크게 영향을 받아 반전 운동이 생겼고, 독일 킬 군항에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11월 혁명으로 퍼져 나가자, 독일제국 황제 빌헬름 2세는 퇴위하고 추방당하여 네덜란드로 망명한다. 1918년 11월, 독일 임시정부는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많은 사상자가 생겼고 엄청난 피해를 남겼다. 이후 베르사유 조약으로 통해 독일제국이 가지던 식민지 영구히 상실, 막대한 배상금 지불, 군비축소, 알자스-로렌 지방 프랑스에 반환 등 패전국 독일에 대한 가혹한 조약으로 인해 뒷날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원인의 씨앗이 된다.
바이마르 공화국[편집]
독일 혁명이 일어나자 독일은 공화국으로 선포되고 왕정이 무너졌다. 그러나 권력 투쟁은 이어졌는데 급진 좌익세력이 바이에른에서 권력을 잡았지만, 독일 전체를 장악하지는 못하였다. 독일 혁명은 1919년 8월에 바이마르 공화국이 공식 출범하면서 끝을 맺는다. 1919년 8월 11일에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대통령이 바이마르 헌법에 서명하면서 헌법이 발효하였다.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은 가혹한 화의 조건을 강요받은데다 마침 대공황까지 닥쳤으며, 불안정한 정부들이 세워지고 무너지기를 거듭하자 독일 사람들은 점차 의회 민주주의 정치 체체와 주류 정당들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극우 세력(카톨릭, 국가주의자, 민족주의자)들은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까닭은 정부 전복을 원하는 자들 때문이라는 소위 등 뒤의 칼 찌르기 이야기(Dolchstoßlegende)를 퍼뜨리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바이마르 정부의 수뇌부는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독일 민족을 배신하였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스파르타쿠스단과 같은 급진 좌익 공산주의자들은 평의회 공산주의(Räterepublik)를 지지하며 "자본주의 지배"를 철폐하기 위한 혁명을 원하였다.
새 바이마르 정부에 대한 불만 때문에 독일 공산당이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여러 보수주의자들은 반동적이거나 혁명적인 극우로 쏠렸는데, 그 가운데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 있었다. 1932년에 공산당과 나치가 의회 다수(1932년 7월 기준으로 총 296석)를 차지하였다. 여러 내각이 실패를 거듭한 끝에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별다른 대안이 없음을 알고 우익 고문들의 압박으로 1933년 1월 30일에 아돌프 히틀러를 독일의 총리로 임명한다는 중대한 결단을 내린다.
나치독일[편집]
1933년 2월 27일 독일 국회의사당이 불길에 휩싸였으며 뒤를 이은 비상 법령으로 시민 기본권이 폐지되었다. 의회에서 수권법이 통과되면서 히틀러는 무제한적인 입법권을 부여받았다. 이때 사회민주당만이 반대표를 던졌는데, 독일 공산당 의원들은 이미 투옥된 상황이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권력으로 모든 반대 세력을 무너뜨리고 몇 달도 안되어 중앙집권적인 전체주의 국가를 세웠다. 군사 재무장에 역점을 두어 산업이 회생하였다. 베르사유 조약 당시 독일은 자르와 라인란트를 잃었는데, 1935년에 독일은 국제 연맹이 관리하던 자르 지방을 되찾았으며 1936년에는 라인란트 팔츠를 군대로 장악하였다.
군사 재무장과 더불어 독일의 외교 정책은 더욱 공격적이고 확장적인 방향을 취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독일은 1938년과 1939년에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각각 점령하였으며, 폴란드 침공을 준비하였다.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 글라이비츠 방송국 공격 사건) 1939년 9월 1일, 독일 국방군은 폴란드에 9월 작전을 개시하여 폴란드는 순식간에 독일과 소련의 붉은 군대에 점령당하였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하면서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독일과 여타 추축국은 유럽 대륙의 상당 지역을 장악하였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독소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하였다. 같은 해에 일본이 진주만의 미군 기지를 기습하였으며, 일본과 동맹을 맺은 독일은 미국에 선전포고하였다. 독일 군대는 소련 영내로 신속히 진군하였으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전황이 뒤집혔다. 이후 독일군은 동부 전선에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1943년 9월에 독일의 동맹국인 이탈리아가 항복하자 독일군이 이탈리아를 점령하면서 독일은 새로운 전선을 감당해야 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역시 서부 전선을 열면서 2차 대전의 전환점이 되었는데, 독일은 얼마 안되어 패배하였다. 1945년 5월 8일, 붉은 군대가 베를린을 점령한 뒤 독일군이 항복하였다. 이 전쟁에서 독일인 군인 및 민간인(중앙유럽의 독일계 인구도 포함하여) 7백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독일 제3제국은 나중에 홀로코스트라고 불린 대학살을 통하여 수많은 반대 세력과 소수 집단을 직접 탄압하기 위한 정책을 실행하였다. 홀로코스트로 1,700만 명이 살해당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유대인 600만 명, 집시와 폴란드인, 소련의 전쟁 포로를 비롯한 러시아인, 동성애자, 장애인, 정치적 반대 세력 상당수도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과 나치의 학살로 유럽에서 죽은 사람의 수가 4천여 만 명이 넘는다. 전후 나치의 전쟁 범죄를 심판한 뉘른베르크 재판이 열렸다.
분단과 통일[편집]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수많은 독일 국민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독일은 오데르-나이세선 동쪽 영토를 잃고 옛 동부 영토와 다른 지역에서 독일인 1,500만 명이 추방되었으며, 독일 여성 2백만 명 이상이 강간당하고, 여러 주요 도시가 파괴되었다. 남은 영토와 베를린은 연합국이 4개 군사 점령 지구로 분할하였다.
1949년 5월 23일에 독일 영토 가운데 프랑스, 영국, 미국이 통제하는 서방측 지구가 통합하여 서독이 들어섰으며, 같은 해 10월 7일에 소련측 지구는 독일 민주 공화국이 되었다. 주로 두 나라를 각각 '서독'과 '동독'으로 칭하였으며, 베를린 역시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으로 갈라졌다. 동독은 동베를린을 수도로 삼았으며, 서독의 경우는 본이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서독은 두 나라로 갈라진 당시 상태가 언젠가는 종식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했으므로 수도 본의 지위를 임시적인 것으로 규정하였다.
서독은 "사회 시장 경제" 체제와 더불어 연방제 의회 공화국 체제를 수립하였으며, 미국, 영국,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1950년대 초부터 서독은 장기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1955년에 서독은 북대서양 조약기구에 가입하였으며, 1957년에는 유럽 경제 공동체에 창립 회원국이 되었다.
동독은 동구권에 속한 나라로 바르샤바 조약과 붉은 군대 점령군을 통하여 소련의 정치/군사적 통제를 받았다. 동독은 인민민주주의 체제를 표방하긴 하였으나 권력은 공산주의 세력인 독일 통일사회당(SED)의 정치국원들이 독점하였다. 이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거대한 비밀 정보 기관인 슈타지와 그 밖의 여러 통일사회당 하부 조직을 통해 사회 전반을 통제하였다. 그 대신 국가는 싼 값에 대중의 기초 생활 필수 재화를 제공하였다. 동독은 소련식 계획 경제 체제를 세웠으나 나중에는 경제상호원조회의(코메콘)에 가입하였다. 동독에서는 주로 동독의 사회 보장 제도의 이익과 더불어 서독이 언제든 침공할지 모른다는 내용을 선전하였으나, 동독 시민 절대다수는 서방의 정치 자유와 경제 번영을 부러워하였다. 동독인이 서독으로 월경하지 못하게끔 막고자 1961년에 건설한 베를린 장벽은 냉전의 상징이 되었다.
1970년대 초 서독 빌리 브란트 총리가 동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동서독간의 대립이 어느 정도 완화되었는데, 이 정책에는 독일이 2차 대전에서 영토를 잃은 사실을 사실상 인정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1974년 FIFA 월드컵에서 서독과 동독이 동반진출한 바도 있었다.
1989년 5월 2일, 헝가리가 철의 장막을 해체하기로 결정하고 8월 23일에 국경을 개방하자 9월 11일에 동독인 수천 명이 헝가리 국경을 통해 서독으로 탈출하였다. 이 사건이 동독에서 큰 반향을 일으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동독 당국은 11월에 뜻밖에도 국경 제한을 해제하여 동독 시민들이 서방을 다녀갔다. 당초 동독은 자신이 국가로서 계속 존속할 수 있게끔 통제 정도만 조절하기 위한 의도로 국경 개방 조치를 단행하였으나, 이 일로 말미암아 동독에서 벤데 개혁이 가속화되었으나 결국 1년 뒤인 1990년 9월 12일에 2+4 조약으로 귀결되어 전후 당시 독일을 점령하던 4개국은 항복 문서에 따른 자신들의 권리를 폐기하고 독일에 완전한 주권을 돌려주었다. 덕분에 1990년 10월 3일에 독일은 재통일을 이루었으며, 옛 동독에서 새로이 편성된 다섯 주가 독일 연방공화국에 귀속되었다.
베를린의 수도 인정과 유럽 연합 통합[편집]
1994년 3월 10일에 의회에서 가결한 본-베를린 법에 의거하여 베를린은 통일 독일의 수도로 지정되었으며, 본은 연방 도시(Bundesstadt)라는 특수한 지위를 부여받고 일부 연방 부서가 이 곳에 남았다. 정부 기관 재배치는 1999년에 완료되었다.
그러나 통일 이후 고물가, 실업 증가, 시장경제 환경으로 인하여 옛 동독 사람들의 부적응과 같은 여러 문제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2000년대 들어 독일은 고령화에 따른 사회적 비용 증가를 역제하기 위해 대대적인 조세개혁을 단행하였다. 연방정부는 2003년부터 <아젠다 2010(Agenda 2010)>으로 이름 붙인 사회개혁 프로그램을 실행하여 사회보건정책을 대대적으로 개혁하고,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기후변화 정책을 대폭 확대하였다. 1999년 유럽연합 11개 국가에 유로화(Euro)가 공식적으로 도입되면서 독일은 유로존(Eurozone)의 최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였다.
1990년대 들어 유럽연합이 안보방위정책을 강화하면서 독일은 자연스럽게 군사적 활동에 대한 제약이 줄어들었다. 1999년 2차 대전 이후 처음으로 독일군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일원으로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참전하였다. 2000년대 들어서는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자 독일은 이에 호응하여 아프가니스탄에 병력을 파견하였다. 이후로도 2016년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결정으로, 독일은 유럽연합에서 프랑스와 함께 안보와 군사부분을 주도하는 국가가 되었다.
1998년 독일사회민주당(SPD: Social Democratic Party) 소속으로 총리에 오른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2003년부터 노동시장 유연화를 담은 하르츠 개혁(Hartz reform)과 사회적 시장경제의 현대화를 담은 <아젠다 2010(Agenda 2010)>을 추진하였다. 2005년 기독민주당(CDU: Christian Democratic Union) 대표로 총리가 된 앙겔라 메르켈도 전임 정부에 이어 지속적인 개혁정책을 진행하였다. 메르켈 총리는 2009년 동독지역 재건비용에 따른 재정지출을 완화하기 위해 재정적자 규모를 국내총생산(GDP)의 0.35% 이내로 규정한 부채제동(Dept Brake)을 결정하였다. 부채제동은 의회의 승인을 얻고, 헌법의 성격을 갖는 기본법(Basic Law)에도 명시되었다. 이외에도 메르켈 정부는 이민정책 개편과 산업 4.0(Industry 4.0)으로 불리는 산업정책을 통해 정보통신과 기후변화대응 등 여러 성장 동력을 마련하였다. 메르켈 총리는 전임 정부에서 계획한 탈원전 정책을 이어받아 점진적으로 원전을 폐기하고, 새로운 에너지원 확보를 이해 2011년부터 러시아~발트해를 잇는 노드스트림(Nord Stream) 파이프라인을 연이어 건설하였다.
2000년대 들어 메르켈 총리의 정치적 리더십을 배경으로 독일은 프랑스를 대신하여 유럽연합의 중심 회원국이 되었다. 2007년 주요 8개국 정상회담인 G8을 유치하였고, 같은 해 유럽연합의 정상회담 의장국으로 새로운 조약 수정안을 제안하여 2009년 리스본 조약을 성사시켰다. 2008년 유로존 금융위기시 독일은 경제회복을 위해 약 600억 달러의 재정을 투입하여 실업률을 낮추고, 유로존 위기극복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와 같이 독일은 2000년대 들어 통일 후유증을 극복하고 정치·경제·외교 등 다방면에서 유럽의 선도국으로 발전하고 있다.
정치[편집]
독일 연방공화국은 16개의 주가 각자 헌법·정부·재판소를 두는 연방 국가로서, 국가 원수는 대통령이다. 그리고 행정부의 수반은 총리이다. 따라서 연방수상이 내각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다. 총리는 연방 의회의 과반수를 얻은 자로서, 임기는 4년이다. 입법 기관은 연방 상원과 연방 하원으로 이루어진 양원제로서 상원은 연방 의회의 의결에 대한 거부권이 없다. 연방 의회 의원은 비례대표제와 소선거구제를 병용한 직접 선거인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로 선출되며, 임기는 4년이다. 현 연방 의회 의원 수는 672명(지역구 배정 초과 의석 때문에 매 총선거마다 총수는 달라진다.)이다. 한편 연방 상원은 각 주와 특별시에서 인구 비례에 따라 임명된 대표로 구성되며, 주 정부는 연방 상원을 통하여 연방의 입법과 행정 업무에 참여한다. 입법권은 연방 의회와 연방 상원 모두에 있으나 실질적 권한은 연방 의회에 있다. 정당으로는 독일 기독교 민주연합(CDU)과 그 자매당인 바이에른 기독교 사회연합(CSU), 독일 사회민주당(SPD), 독일 자유민주당(FDP) 등의 기성 정당이 있으며, 1980년대 서독에서 등장하여 기성 정당에 많은 자극과 영향을 준 독일 녹색당, 동독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후신인 독일 민주사회당(PDS), 1990년 구 동독지역 진보 세력이 창당한 동맹 90 등이 있다.
1949년부터, 독일의 정치 구도는 크게 기독교 민주연합과 사회민주당이 양분하고 있으며 모든 총리들은 이 두 정당들 중 하나에서 배출했다. 허나 상대적으로 더 규모가 작은 자유민주당이나 동맹 90, 녹색당 등도 여러 차례 연립 정부에 참여하며 점차 입지를 넓히고 있는 형편이다. 1982년 10월에 중도 자민당의 내각 사퇴로 슈미트 정권이 붕괴하고 콜 총리가 이끄는 중도 보수 연립 정권이 들어섰다. 1994년 10월 총선 결과 콜 총리의 집권 여당이 승리하여 제5차 콜 정권이 탄생하였다. 독일은 통일 후 중부 유럽 국가에 대규모 경제 지원을 제공하고 이들의 대서방 관계설정에 선도적 역할을 자처하는 한편 세계 무대에서의 영향력 증대를 꾀하고 있다. 1998년 총선에서 사민당이 승리함으로써 슈뢰더 사민당 당수가 새로운 총리가 되었고 2002년 재취임했다. 2005년 총선이후 기민련의 앙겔라 메르켈이 독일 최초의 여성총리로 취임하였다. 2007년부터는 좌파 계열 정당인 좌파당이 독일의 주요 정당들 중 하나로 떠올랐으나, 단 한번도 정부 운영에 참여해보지는 못했다. 2017년 총선에서는 극우 포퓰리즘 계열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이 처음으로 의회에 의석을 얻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표를 득표하는 데에 성공했다. 현재는 올라프 숄츠가 독일의 총리에 선출되면서 좌파 정당인 독일 사회민주당, 녹색 정치 정당인 동맹 90, 자유주의 정당인 지유민주당과 함께 연립내각을 구성하여 오늘날 의회를 장악하고 있다.
독일의 주요 정당[편집]
독일 연방하원 2017년 독일연방공화국 국회의원 총선거 의석수 순서대로 정렬했다.
- 독일 기독교 민주연합/바이에른 기독교 사회연합(CDU/CSU. 246석. 기독교민주주의, 자유보수주의 정당. 현재 야당)
- 독일 사회민주당(SPD. 153석. 사회민주주의 정당. 현재 여당
- 독일을 위한 대안(AfD. 92석. 유럽회의주의, 극우 정당. 현재 제 1야당.)
- 독일 자유민주당(FDP. 80석. 자유주의, 고전적 자유주의 정당.)
- 좌파당(Die Linke. 69석.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을 계승한 민주사회주의 정당.)
- 동맹 90/녹색당(Bündnis 90/Die Grünen. 67석. 환경주의, 다원주의 정당. 현재 지지율 2위)
- 파란당(Blau. 2석. 민족보수주의 정당. AfD의 우경화에 반발한 의원 두명에 의해 창당됨)
연방 하원엔 진출하진 못하였으나 주의회, 유럽 의회에 진출한 주요 군소정당은 이렇다.
- 독일 국민민주당(NPD. 신나치주의 극우 정당.)
- 당(Die PARTEI. 장난 정당)
- 자유유권자(FW. 혼합정치, 보수주의 정당.)
- 독일 해적당(Die Piraten. 해적당.)
연방의회[편집]
- 연방의회의 구성
연방의회(Bundestag)를 구성하는 의원입후보자는 반드시 정당(Partei)의 소속을 전제로 하여야 한다. 연방의회의원은 총원 656명으로 이 중 328명은 전국의 328개의 지역 선거구에서 실시하는 상대다수대표선거에 의해 선출된다. 그리고 나머지 328명의 연방의회의원은 정당을 중심으로 한, 각 정당이 주 단위로 작성한 전국구후보자 명단에 따라 선출된다.
- 연방의회의 지위와 권한
연방의회는 첫째, 선거를 통해 선출됨으로써 국민의 대표기관의 지위를 갖는다. 둘째, 의원내각제 하에서 입법권과 함께 정부의 구성권 및 통제권 등을 가져 국정운영중심기관으로서 지위를 갖는다. 셋째, 연방의회의 정부불신임권, 입법적 통제, 국정조사권, 출석요구권, 질문권 등을 지님으로써 국정통제기관으로서의 지위를 갖는다.
이와 관련하여 연방의회의 구체적인 권한으로는 입법권, 국가기관 창설권, 연방헌법재판소 구성권 등이 있다. 입법권의 실행은 연방의회의 본질적인 의무이자 권리라고 할 수 있으며, 연방의회는 연방정부나 연방참사원이 법률안제출권만 가지고 있는 것과는 달리 법률안의 제출권과 의결권을 모두 갖고 있다. 연방의회의 국가기관 창설권은 연방대통령 선출권, 연방총리 선출권, 연방헌법재판소(독일어: Bundesverfassunggericht) 구성권으로 이루어진다. 특히 연방총리와 관련하여, 연방대통령의 추천으로 또는 피추천자가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연방의회가 과반수로서 선출할 수 있다. 연방헌법재판소 구성권과 관련하여서는 연방의회는 연방참사원과 함께 연방헌법재판소의 구성원을 반수씩 선출하는 권한을 가진다.
- 연방의원의 의무와 권리
기본법 상 연방의원은 최선의 지식과 양심으로 그리고 전력을 다해 의원으로서의 직무를 국민전체의 이익과 복지를 위해 행사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또한 독일연방의회의사규칙에는 출석의무나 규칙 등을 준수하여 행동할 개별적 의무들을 규정하고 있다. 이외에도 기본법에 명시적으로 규정되어 있지는 않으나 당연히 인정되는 의무로서 청렴의 의무, 이권불개입의 의무 등을 지닌다. 한편 연방의원은 독일 기본법 제46조 제2항, 제3항을 통해 불체포특권(독일어: Immunitat)을 인정받는다, 동시에 기본법 제46조 제1항을 통해 면책특권(독일어: Indemnitat)을 인정받는다.
연방참사원[편집]
연방참사원은 연방에 대한 주의 영향력이 주된 매개체로서 연방국가적 질서가 현재 그 실효성을 확보하게 되는 본질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연방참사원에서 각 주는 그들이 파견한 대표자 수에 따른 투표권을 가지는데, 각 대표자는 자신의 임의대로 표를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파견한 주정부의 명령에 의해서 이를 행사하는 명령위임관계에 속해 있다. 그리고 연방참사원은 입법과 행정, 나아가 통치기능에도 관여할 수 있는 특수한 지위를 가져 상이한 기능과 권력이 결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 연방참사원의 구성
연방참사원의 구성은 일반국민의 투표에 근거한 연방의원으로 구성된 연방의회와는 형성의 본질에서부터 다르다. 독일연방공화국을 구성하고 있는 16개 주의 정부각료 또는 그들이 파견한 행정공무원 즉, 지방정부에 의해서 임명 및 해임되는 지방정부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독일연방의회는 전통적인 의미의 양원제(독일어: Zweikammersystem)와는 다르고, 연방참사원은 상원과는 다른 개념이다. 연방참사원 구성에 있어서 독일연방공화국의 각 주는 인구 비례에 의해 최소 3명에서 최대 7명까지의 주 대표를 연방 참사원에 파견할 수 있으며 각 지방이 파견할 수 있는 구성원의 수는 그 지방이 가지는 표수에 따른다.
- 연방참사원의 지위와 권한
연방참사원은 독자의 개별예산을 가지며 자기의 사무를 스스로 규율하는 독립된 최고 연방기관으로서의 지위를 지닌다. 또한 그 구성에 있어서 각 주로부터 파견된 대표자들로 구성됨에 따라 주 대표기관으로서의 지위를 지닌다. 뿐만 아니라 지방이 연방에 영향력을 행사함에 있어 중요한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하며, 지방의 실질적인 참여를 통해 연방정부와 연방의회를 견제하는 견제자로서의 지위를 지니고 있다. 연방참사원은 연방법률에 의해 규정된 협력권(독일어: Mitwirkungsrechte), 연방정부의 법률안에 대한 의견을 제출하는 등 연방입법에의 참여권, 연방집행에 있어서 특정 법규명령에 동의권을 갖는 연방집행에의 참여권 등을 갖는다. 또한 연방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권과 함께 연방헌법재판소 구성원의 1/2을 조직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연방정부[편집]
독일의 연방정부(독일어: Bundesregierung)는 연방총리와 연방장관으로만 구성되는 내각(독일어: Kabinett)과 비슷한 의미를 갖는다. 대신 행정부 및 산하 행정기관은 모두 행정기관으로 표현된다. 정부의 개념과 행정기관의 개념이 비교적 엄격히 구별되는 것이다. 기본법 제65조에 의하면 연방정부는 연방총리가 국정운영의 이념과 정책의 기본노선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책임을 지는 총리원칙(독일어: Kanzlerprinzip), 연방의 모든 법안이나 주요 정책은 내각회의의 심의와 결정을 거쳐야 된다는 내각 원칙(독일어: Kabinettsprinzip), 연방총리의 국정 운영 기본 노선과 내각 결정의 테두리 안에서 각 부처 장관들이 자신의 관할권을 재량껏 발휘하고 이에 대해 책임을 지는 부처원칙(독일어: Ressortprinzip)에 따라 정책을 결정한다.
- 연방정부의 구성과 임기
연방정부는 연방총리(독일어: Bundeskanzler)와 연방장관(독일어: Bundesminster)으로 구성된다. 먼저 연방총리는 통치구조 내에서 사실상의 권한을 가짐과 동시에 정책결정과 집행에 있어서의 주도권을 가진 중심적 통치기관으로서, 연방대통령의 추천으로 연방의회에서 토의 없이 선출하거나 연방대통령이 추천한 후보가 연방의회에서 재적위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선출되지 못할 경우 대통령의 연방총리 추천권이 사라지고 연방의회가 14일 내에 선출할 수 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즉시 새로운 투표가 이루어지며 최다득표자가 연방총리로 선출된다. 연방장관은 연방정부의 구성에 있어 양대 축의 하나로 볼 수 있으며 연방총리의 일반방침에 따라 독자적으로 자기 책임으로 소관 사무를 처리하는 지위를 가진다. 이러한 연방장관은 연방총리의 제청으로 연방대통령이 임명한다.
연방정부의 임기와 관련하여서는 별도의 규정을 두고 있지 않으나 기본법 제69조 제2항에서 "연방총리나 연방장관의 임기는 언제나 새로운 연방의회의 집회와 동시에 종료하며, 연방장관의 임기는 연방총리의 임기가 다른 사유로 종료되는 경우에 함께 종료된다"고 규정하여 사실상의 임기를 규정하고 있다. 또한 불신임결의(독일어: Mibtrauensbeschuluss)에 의하여 임기가 종료될 수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기본법 제67조 제1항에서 "연방의회는 제적의원의 과반수로 후임자를 선출하고 연방대통령에게 연방총리의 해임을 요청하는 방법으로 연방총리에 대한 불신임을 표할 수 있다. 연방대통령은 이 요청에 따라야하고 당선자를 임명하여야 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그리고 연방정부 전체 내지 연방총리 및 각각 연방장관은 임의적으로 사퇴할 수 있다.
- 연방정부의 지위와 권한
의원내각제의 이원성의 원칙에 따라 실질적인 행정권은 연방총리와 연방장관으로 구성되는 연방정부가 갖는다. 연방정부는 연방의회에 종속되지 않는 최고의 연방기관으로서 연방의회와 별개의 대등한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고, 직무규칙의 제정권을 가진다. 또한 연방총리와 연방장관은 다른 유급공직, 영업 및 직업에 종사할 수 없으며 기업의 이사회 또는 연방의회의 동의 없이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의 감사가 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독일 연방의 중요한 대내외적 정책결정과 정책집행의 중심기관으로서의 지위를 가지며 이를 위해 기본법은 연방총리와 연방장관에게 업무의 분담에 관해 규정하고 있다.
연방정부는 법규명령, 일반행정명령권 및 규칙제정권을 가지며 법률동의권을 가진다. 또한 연방의회, 연방참사원 및 그 위원회의 참석권과 지방행정에 대한 지시감독권을 가진다.특히 연방총리는 조각권과 함께 시정방침의 결정권, 신임투표요청권을 가진다. 연방장관은 소관업무에 있어 자기의 책임으로 자주적으로 관리·운영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연방대통령[편집]
- 연방대통령의 선출과 임기
연방대통령(독일어: Bundespräsident)은 연방회의(독일어: Bundesversammlung)를 통해 선출되며 656명의 의원 전원과 각 주의회에서 비례선거원칙에 따라 선출된 동수의 주대표자, 총 1,312명으로 구성되며, 피선거권을 갖기 위해서는 연방의회의원의 선거권을 가진 만 40세 이상의 독일국민이어야 한다. 당선되기 위해서는 연방회의 구성원 과반수의 득표가 필요하다. 2회의 투표에서도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할 경우 제3회 투표에서 상대다수로서 최다수의 표를 획득한 자가 선출된다.
연방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며 1차에 한해 연임이 인정된다. 연방헌법재판소에 의한 탄핵도 가능하며 연방 대통령이 유고 또는 임기 만료 전에 궐위된 경우에는 연방참사원 의장이 권한을 대행하게 된다.
- 연방대통령의 지위와 권한
연방대통령은 국가의 상징적인 존재이고, 최고의 국가기관이라는 지위를 지닌다. 연방대통령은 그 중립성이 보장되어야 하며 면책특권을 가진다.
연방대통령은 국제법상 연방을 대표하여 외국과의 조약을 체결하고 외교사절을 신임하고 접수한다. 또한 법률에 다른 규정이 없는 한 연방 판사, 연방공무원, 장교 및 하사관을 임면한다. 그리고 지극히 제한적인 요건 하에서 연방의회 해산권(독일어: Auflosungsrecht)을 가지며 독일 기본법 제63조, 제64조 제1항에 따라 연방총리의 추천 및 임명권과 연방장관에 대한 임면권을 가지나 현실적으로는 선거에 의해 결정된 정당분포에 의존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이외에도 법률안서명공포권, 연방의회소집요구권, 법률안 심사권, 기관쟁의 제소권 등을 가진다.
건설적 불신임 제도[편집]
독일 연방공화국 기본법 제67조에 포함되어 있는 건설적 불신임 제도(독일어: Konstruktives Mißtrauensvotum)는 하원이 과반수의 찬성으로 후임 총리를 선출하는 경우에만 현재의 총리를 해임할 수 있도록 하원의 권한을 제한하는 제도이다. 건설적 불신임 투표는 총리에 대한 불신임 투표가 후임 총리의 지명과 함께 시작되는 것을 요구한다. 만약 이러한 요구가 과반수 찬성으로 받아들여 진다면, 총리는 지명된 후임을 위해 사임을 해야 한다. 이러한 건설적 불신임 제도는 내각의 단순 부정적 사퇴의 방지와 이를 통한 내각의 지위 강화 및 정국안정이 주된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외교[편집]
독일은 1949년에 결성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1958년에 출범한 유럽연합의 전신인 유럽경제공동체(EEC)의 창설국이며, 1999년 이후 유로존의 회원국으로, 유럽통합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G7, G20, OECD, 세계무역기구(WTO) 등 주요 국제기구의 핵심 회원국이다. 이외에도 유럽 49개 국가간 협력기구인 유럽평의회,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Organization for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 등 유럽내 여러 통합기구의 회원국이다.
독일 외교정책의 최우선 과제는 유럽연합에서 정치·경제적 위상에 걸맞은 활동과 자국의 이해관계 관철이며 군사적으로는 NATO를 통한 유럽의 안보협력이다. 독일은 유럽연합 27개 회원국 중에서 재정 기여가 가장 많은 국가이며, 통상·환경·외교안보·연구개발 등 여러 분야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유로존의 통화정책을 담당하는 유럽중앙은행은 독일연방은행을 벤치마킹하여 만들어졌을 정도로 경제·통화 부분에서도 독일은 유럽연합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독일은 UN과 OECD 등 주요 국제기구의 일원으로, 국제사회에서 인권·환경·제3국에 대한 개발협력 지원 등 보편적 가치추구를 외교정책의 목표로 삼고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UN의 개혁을 통해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에 포함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2007년 미국과 NATO가 주도한 아프가니스탄 국제평화지원군에 미국·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견할 정도로 국제사회의 평화구축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2017년 UN에서 통과된 핵무기금지조약(Treaty on the Prohibition of Nuclear Weapons)에는 NATO의 기본입장을 수용하여 참여하지 않고 있다.
독일의 외교정책은 연방외교부(Federal Foreign Office)가 담당한다. 외교부는 연방차원에서 국방부(Ministry of Defense)와 경제협력개발부(Ministry of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등 여러 부처가 실행하는 대외정책을 조정하고, 국제조약 체결 등 주요한 대외이슈를 전담한다. 대외조약 체결은 연방의회(Bundestag)의 비준을 거쳐야하므로 연방의회 역시 해당 상임위원회를 통해 외교정책에 깊숙이 개입한다. 독일은 민간 싱크탱크(private think tank)도 외교정책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독일외교위원회(DGAP: German Council on Foreign Relations)는 대외정책 평가와 여론수렴 등을 통해 연방정부에 압력을 행사하는 대표적인 예이다.
- 대한관계
한국과 독일의 교류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1883년 11월 조선은 독일과 통상우호 항해조약을 체결하여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조약을 통해 양국은 상대국에 영사관을 설치하고, 관세를 확정하는 등 해상무역에 관한 규정 등을 합의하였다. 조선은 독일에 항구를 개방하고 자유 왕래와 토지매매·임대 권리를 부여하였으며, 1884년 11월 독일은 서울에 총영사관을 설치하였다. 이듬해 총영사관은 공사관으로 승격되었고, 조선에서는 1901년 주독 전권공사를 독일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이 외교권을 상실하면서 양국과 외교관계는 중단되었다.
이후 1963년 12월 한국과 독일은 광부파견협정을 체결하였는데, 본 협정은 독일이 유럽 이외의 국가와 인적교류를 실행한 최초의 협정이었다. 1971년 7월에는 양측이 간호사파견협정을 체결하였다. 인력파견협정을 통해 1977년까지 한국에서는 8천여 명의 광부와 1만여 명의 간호사를 독일에 파견하였다. 독일은 본 협정을 통해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였고, 한국은 당시 30%에 달하던 실업률을 낮추고, 경제발전을 위해 필요한 외화를 조달할 수 있었다. 특히 독일에 파견된 한국 간호사의 절반은 계약 만료 후 독일에 체류하면서, 이후 서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교민사회를 형성하여 한·독 우호관계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1990년대 이후 한국은 경제성장을 배경으로 국제사회에서 정치·문화적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독일과 다자주의, 국제경제와 금융질서, 평화유지 활동, 기후변화대응 등 상호간 관심분야에서 협력이 증대하고 있다. 이러한 양측간 긴밀한 협력으로 고위급 인사의 상호방문이 빈번하다. 한국은 역대 대통령이 모두 재임 중 독일을 방문하였다. 1964년 박정희 대통령, 1986년 전두환 대통령, 1989년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하였다. 1990년대 이후에도 1993년 김영삼 대통령, 2000년 김대중 대통령, 2005년 노무현 대통령, 2011년 이명박 대통령, 2014년 박근혜 대통령 그리고 2017년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하였다. 이외에 한국의 역대 외교부 장관은 모두 독일을 방문하였다.
독일 측에서는 1993년 헬무트 콜 총리, 2000년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 2010년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한국을 방문하였다. 2016년에는 동독의 마지막 총리인 한스 모드로(Hans Modrow, 1928~)가 방한하였다. 이외에 1990년대 이후 역대 대통령과 외무장관들이 대부분 한국을 방문하였다.
한국과 독일은 정부간 교류 이외에도 산업계를 중심으로 민간교류도 매우 활발하다. 1950년 민간차원에서 한·독협회(Koreanisch-Deutsche Gesellschaft)가 구성되었고, 1966년에는 독·한협회(Deutsch-Koreanische Gesellschaft)가 독일에서 결성되었다. 1981년에는 한국무역협회 유럽지부와 뒤셀도르프 상공회의소가 공동으로 독․한경제협회(Deutsch-Koreanische Wirtschaftsvereinigung)를 설립하였고, 같은 해 서울에 한·독상공회의소(Korean-German Chamber of Commerce and Industry)가 출범하였다.
2019년 한국은 독일에 약 87억 달러를 수출하였는데 주요 수출품목은 승용차․배터리․자동차 부품․전자․IT 기기 등이다. 2019년 독일의 대한수출은 199억 달러로 주요 수출품목은 승용차·의약품·자동차 부품·의료기기·정밀기계 등이다. 2011년 한국-유럽연합(EU)의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되면서 독일로부터 수입이 증가하여 무역수지 적자가 커지고 있다. 2019년 신고기준 독일에 대한 한국의 투자규모는 1,457건에 걸쳐 65억 달러인 반면, 독일의 대한투자는 2,154건에 141억 달러로 2배 이상 규모가 크다.
국방[편집]
독일 연방군(Bundeswehr)은 육해공군과 공동지원서비스(Joint Support Service), 공동의료서비스(Joint Medical Service) 그리고 사이버정보서비스군(Cyber and Information Domain Service)으로 구성된다. 독일 현역병은 2020년 약 18만 명이며 이외에 8만여 명의 민간지원과 3만 여명의 예비군을 두어 유럽에서는 프랑스에 이어 가장 큰 병력규모이다. 군사비 지출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1.2~1.3% 수준으로 세계적으로 10위권 이내의 군사강국이며, 세계 5위권의 방산 수출국이다.
독일은 2011년 7월 1일 징병제를 폐지했다. 공식 명칭은 징집 유예지만 유럽인들의 성향이나 징병제의 비효율성 등 여러모로 봤을 때 독일이 다시 징병제 국가가 될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한다. 더군다나 나치 정권 때문에 큰 죄를 짓고 자신들도 고통받은 이후 나치의 나자와 국가사회주의의 국자, 그리고 팽창주의라든가 과거 영토 회복같은 것만 들어도 당장 편집증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 정상인 독일인들로서는 나치 독일과 연관성이 깊은 징병제에 대해서는 두 번 다시 시행하고 싶지 않은 제도가 되는 셈. 모병제로 전환해서 군대에 남은 병력도 평화유지군에 도움을 주는 임무 위주로 활동한다고 한다. 현역 군인으로 징집된 인원들은 늘 징병제 폐지 과정이 그렇듯 지원자에 한해서 직업군인으로 전환되며, 전역을 원하는 인원은 순차적으로 전역을 한다. 또한 대체복무로 해왔던 사회봉사요원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모집공고를 실시했다.
냉전 이후의 군축을 통해 독일은 고도로 훈련된 소수정예군을 가지는 걸 원했겠지만, 현실은 예비 총열도 못 사서 해외 훈련에 파견나간 복서 장갑차의 RWS에다 기관총 총열 대신 빗자루대를 꽂아놓고 훈련을 할 정도였다. 거기다 유로파이터, NH-90 같은 각종 악재들이 겹치면서 국방력 강화 계획에 차질이 생겼고, 이를 통해 대체하려고 했던 F-4F 팬텀이나 도르니어 205 등 노후화된 장비들을 몇 년 더 연장해서 사용했고, H&K G36의 과열로 인해서 총몸이 녹는 문제 등 여러 가지 악재가 겹쳤는데 신속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알고 있던 독일 정부는 2025년까지 공업 인프라를 재가동하고 모든 장비를 재보급하기로 했으며 국방비도 1.5%까지 증가시킨다고 했으니 예전보단 차차 나아질 전망이다.
동부 우크라이나 사태 등으로 유럽에 신냉전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지만 독일군의 정규군 전력은 냉전 시기와 비교하기 초라할 정도인 3개 사단으로 축소되었고 상당수의 병력이 아프간, 소말리아, 동유럽 등으로 파병나간 상태다. 이마저도 아프간 등 파병지에서 근무 실태가 드러남에 따라 실전 능력을 고려하기 전에 군인으로서의 기초가 안 되어있다는 평이다.
어느 정도 실상을 알고 있는 밀덕판에선 2차 대전, 냉전기의 강한 독일군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현재는 퇴물, 이빨 빠진 호랑이, 속빈 강정으로 여겨진다. 그렇다고 병영부조리가 사라진 것도 아니다. 병영부조리/해외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 가혹행위는 현대 독일군에서도 문제가 된 바 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안보 위협을 느낀 독일은 2월 27일경 군비 증강을 공식 선언했다. 우선 2022년 예산에서 별도 특별 기금을 마련하여 1000억 유로의 자본을 기존 국방비와 별도로 투자하고, 앞으로도 매년 국방비를 1000억 유로 이상, 그리고 GDP 대비 2% 이상 사용하기로 발표했다.
행정구역[편집]
독일은 16개 주(州)로 구성된 연방제 국가이다. 주를 칭하는 공식 명칭은 연방주(Bundesland). 구체적으로는 10개의 '주(Land)', 3개의 '자유주(Freistaat)', 3개의 '도시주(Stadtstaat)'가 있는데 즉 연방주는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이들을 통칭할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자유주, 도시주는 특징을 드러내는 명칭에 불과할 뿐, 일반 주에 대해 특별한 지위가 부여된 것은 아니다.
도시주 지위를 가진 3개 도시는 각각 베를린, 함부르크, 브레멘이다. 베를린은 잘 알려진 대로 독일의 수도(Bundeshauptstadt)로서, 1990년 동서독 통일과 동시에 도시에서 도시주로 승격된 경우다. 베를린의 경우 도시주이긴 하지만 공식 명칭에 주(Land)가 들어간다(Land Berlin). 한국어로 번역하면 베를린주(州)가 되는 것인데, 나머지 두 도시주에는 주 대신 자유한자시가 붙는 것을 감안하면 베를린에게 수도로서 특별한 지위가 부여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단, 베를린의 경우 독일 제국 산하의 프로이센 왕국이나 바이마르 공화국 산하의 프로이센자유주 시절부터 브란덴부르크에서 분리된 독립적인 행정구역이었다. 베를린은 1881년 이후부터 브란덴부르크나 라인란트, 베스트팔렌,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등 이후 독일의 연방주로 발전하는 지역들과 대등한 지위를 가졌다. 하지만 패전 후 베를린 분단으로 서독측에는 서베를린만 남았고, 연합국측의 간섭 등 여러 정치적인 이유로 공식적으로 한 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원래 가졌어야 할 주의 지위를 통일 후에 비로소 되찾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함부르크와 브레멘은 공식명칭에 주 대신 자유한자시가 들어간다. 즉 공식명칭이 베를린주의 경우와는 다르게 함부르크자유한자시(Freie und Hansestadt Hamburg), 브레멘자유한자시(Freie Hansestadt Bremen)가 된다. 이는 과거 한자동맹 시절부터 무역 허브로서 고도의 자치권을 누려왔던 두 도시의 특수성이 인정되었기 때문으로, 일개 도시임에도 다른 주에 편입되지 않고 독립된 연방주의 권한이 부여된 것이다.
자유주 명칭을 사용하는 주는 바이에른, 작센, 튀링겐이 있다. 이 주들은 지방자치의 전통이 오래되었고, 타 주에 비해 지역색이 굉장히 강하다는 특징이 있다. 특히 가장 이질적인 바이에른은 독일의 공식 국호를 칭할 때 독일연방공화국 대신 '독일과 바이에른(Deutschland und Bayern)'이라고 칭할 정도로 연방 내에서 따로 노는 경향이 있다.
13개 주 중 작센, 튀링겐, 브란덴부르크,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작센안할트는 동독의 영토였던 지역이다. 통일된 지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독일 신문, 방송, 라디오에서는 자주 서독 소속이었던 주들을 오래된 주(구 연방주), 동독에서 편입된 5개 주를 새로운 주(신 연방주)로 부르고 있다.
독일의 주는 1871년 독일 통일 이전 독일 내의 왕국과 공국의 영역과 일치했다. 독일 제국이 그랬고,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도 마찬가지다. 프로이센 왕국 혹은 프로이센 주가 독일 전체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시절도 있었다. 프로이센 주 하나의 권력을 차지하면 국가 전체의 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나치의 집권을 돕기도 했어서 패전 이후 프로이센과 같이 지나치게 영향력이 큰 지역이 있는 것을 막기 위해 주가 완전히 재편되었다. 서독은 바이에른, 슐레스비히홀슈타인, 함부르크, 브레멘을 제외하면 전후에 경계가 온전하게 남아있는 주가 없을 정도로 완전히 바뀌었고, 동독은 현재와 같은 5개 주로 바뀌었지만 중앙의 세력이 커서 주가 별 의미가 없어진 탓에 없애 버렸다가 1990년 통일 직전에 다시 생겨났다. 과거 베를린은 분단으로 분리되고 나서 연합군 점령 지대로 취급되어 서독이 서베를린, 동독이 동베를린의 행정권만 대행했고 주도 아니었으나 1990년 통일과 동시에 주가 되었다.
경제[편집]
2022년 기준 독일은 유럽 최대의 경제 대국이다. 명목 GDP로 따졌을 때 독일은 전세계에서 네 번째에 위치한 고도화된 경제 대국이며, 유럽에서는 독일을 제외하고 경제를 논하기 힘들 정도다. 특히 독일은 2020년 기준 OECD에서 노동시간이 가장 적은데도 불구하고 1인당 GDP와 GDP가 매우 높다는 점이 굉장히 이례적이다.
독일은 공업기술, 의학, 약학, 그리고 그 밖에 여러 산업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는다. 경제 안정성이 인구가 8,000만 명이 넘는 나라치고 굉장히 높은 편으로, 독일과 비슷한 수준의 경제 안정성을 가진 나라는 핀란드나 스위스와 같이 인구가 1,000만 명도 안 되는 소국들 뿐이다. 이러한 탄탄한 산업 구조는 독일의 강점 중 하나이다.
전체 경제에 대한 기여의 정도에 따른 보상이 공평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무직과 기술직 간 임금 격차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며,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있고 소득에 비해 물가가 높지 않으며 지역 단위의 중소기업과 자영업이 활성화돼 있어 사회 경제적 구조가 매우 안정적이고 조화로운 편이다. 이러한 안정적인 사회 구조는 개인과 기업이 지속적으로 기술을 개발하고 축적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복지가 잘 된 편인데도 출산율이 상당히 낮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대체 출산율을 얼추 맞추고 있는 영국과 프랑스에 인구와 경제력에서 밀릴 것이라 보는 전문가들도 많다. 게다가 구인난도 심각한 상황이다. 독일의 실업률은 2017년 5월에 5.7%로 독일 통일 이후 최저치를 나타냈다. 독일연방통계청은 2018년 5월 30일 독일의 5월 실업률이 5.2%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2020년 1월 기준으로 실업률은 3.2%로, EU 전체에서 4번째로 낮았다.
이코노미스트는 독일의 동서간 경제, 사회, 정치의 양극화가 통일 전 동독과 서독의 격차보다 더 심각하다고 보도했다. 또한 이코노미스트는 미중무역전쟁과 브렉시트, 한일 무역 분쟁 등으로 인해 보호무역의 기조가 강해지면서 수출의존도가 높은 독일의 경제가 큰 위기에 처해 있다고 했다.
독일 연방 통계청이 2020년 1월 15일에 2019년 독일의 국내총생산이 0.6%를 나타냈다고 밝히면서 2013년 이후에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4분기 국내총생산은 제로이다.
2020년에 코로나19가 전세계로 확산되는 가운데, 독일 내부에서 경제적 타격을 우려했다. 3월 26일에 독일경제연구소는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 독일의 올해 GDP이 전년보다 10% 줄어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4월 8일에 독일 민간경제연구소들은 2020년 2분기 독일 경제가 -9.8% 성장할 것으로 예상했다. 독일에서 코로나19 확산 사태 이후 남녀 간 임금 차가 벌어질 것으로 전망한 연구 결과가 나왔다.
코로나19의 여파로 독일의 4월 산업생산이 역대 최대 낙폭을 기록했다. 독일이 최저임금을 2년 후 10.45유로(14,090원)까지 단계적으로 올리기로 했다.
미성년자 빈곤율도 의외로 높다. 독일의 대형 은행들이 마이너스 금리의 여파로 고객들에게 예금을 다른 은행으로 옮기라는 권유를 하는 상황이 발생되고 있다.
독일의 물가가 오르자 시민들이 항의시위를 했다.
독일내 제조업이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2022년 1월 14일에 독일 연방 통계국이 독일의 2021년 경제가 2.7% 성장에 그쳤다고 밝혔다. 게다가 독일의 경제성장률이 최저로 나타났다.
2022년 10월 11일 발표된 IMF 경제전망에 따르면, 2022년도 독일 경제성장률은 1.5%에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비록 7월 전망보다 0.3%p 상향된 수치이긴 하지만, 유로존 평균이 0.5%p 상향되어 3.1%, 영국 경제성장률 전망치가 0.4%p 상향되어 3.6%인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저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독일의 2023년 경제성장률 예상치 또한 -0.3%로, 3달 전 전망치보다 1.1%p 하향되었다. 유로존 평균이 3달전보다 0.7%p 하향되어 0.5%, 영국이 0.2%p 하향되어 0.3%인 것을 감안하면 더더욱 저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무역[편집]
독일은 수출과 수입 모두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 3위에 위치하는 무역대국으로 전 세계 교역량의 약 7%를 점한다. 특히 유럽연합 내에서는 절대적인 산업경쟁 우위로 에너지 등 몇몇 분야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산업부분에서 무역흑자를 기록한다. 수출규모는 2019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약 47%를 점하며, 산업생산의 약 40%가 수출일 정도로 타 유럽국가보다 수출비중이 높고, 유럽연합 이외의 지역으로 수출지역도 다변화되어 있다. 이에 따라 독일 내 고용인력 4명 중 1명은 수출 혹은 이와 관련된 산업에 종사한다. 한편 서비스 분야의 수출과 수입규모는 제조업의 20~25% 수준이다.
정책적 측면에서 자유무역협정과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 등 여러 유형의 무역협정은 유럽연합의 권한이므로 독일정부가 개별적으로 제 3국과 무역 및 투자협정을 체결하지 않는다. 반덤핑 조사와 무역제재 등 통상조치 역시 유럽연합의 권한이므로 정부차원의 개입은 없다. 다만 독일은 유럽연합 내에서 교역량이 가장 많은 회원국으로 유럽연합의 통상정책에 직간접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 수출
독일의 주요 수출품목은 자동차·자동차 부품·기계·비행기·화학제품·의료와 전자기기·전자장비·제약·운송장비·기타금속·식품·고무와 플라스틱 등이다. 특히 자동차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지니며 전 세계 자동차 수출의 19%를 점한다. 유럽 대부분의 국가와 유사하게 독일 역시 유럽연합 회원국과의 역내교역이 약 70%에 육박하는데, 단일국가로는 미국과 중국에 대한 수출이 가장 많다. 이외에 주요 수출국은 유럽연합 회원국인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폴란드, 오스트리아, 벨기에 등이며 비유럽연합 국가로는 영국과 스위스이다.
- 수입
독일의 주요 수입품목은 자동차와 운송장비·자동차 부품·석유와 천연가스·의료약제·기계장비와 부품·반도체·전자기기 부품 등으로, 에너지와 전기·전자·기계류 제작을 위한 중간재 수입이 많다. 주요 수입국은 중국, 미국, 네덜란드, 프랑스, 폴란드, 이탈리아, 체코, 스위스, 오스트리아, 벨기에 등이다. 폴란드와 체코가 주요 수입국에 위치하는 것은 인건비가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운송 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현지생산이 많기 때문이다. 서비스 부분의 수출과 수입은 비즈니스 서비스·운송·관광·컴퓨터·정보통신 서비스·금융보험서비스·로열티 라이선스 등이다.
전자산업[편집]
다른 공업에 비해 전자산업은 비중이 낮은 편이다. 물론 과거 서유럽 아날로그 컬러 TV의 전송방식인 PAL을 개발한 회사인 텔레풍켄 등 가전 회사가 많았고, 이름도 날렸지만 지금은 후발주자들에게 많이 밀려 쇠락한 상태다. 물론 GRUNDIG 같이 만들고 있는 회사가 분명 존재하지만 세계적으로 알아주진 않는다. 다만, 지멘스라던가 최고급 가전제품 분야에서는 빌트인 가전에 특화한 밀레가 있다. 한국의 가전업체가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선 지 꽤 되었지만 아직도 최고급 아파트와 빌라엔 밀레 가전을 탑재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렇다고 독일 전자산업이 약한 건 아니다.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다 뿐이지 유럽이든 전 세계이든 이들에게 견주거나 앞서다고 확신할 수 있는 국가는 미국 뿐이다. 또한 대놓고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숨은 강자이다. 히든 챔피언이라는 기업보고서도 존재할 정도. 또한 나노산업도 강하다.
세계 최대 소프트웨어 기업인 SAP, 시스템반도체의 강자 인피니언이 전자산업을 이끌어나가며 SRJ랭킹 기준으로 독일의 전자공학 연구수준은 일본보다 앞선다. 전자산업자체가 약한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가정용 전자제품군은 별로 잘 알려지지 않은게 사실이긴하다.
농축업[편집]
세계 3위의 보리, 호밀 생산국가이며, 세계 3위의 돼지고기 생산국가이자, 세계 6위의 우유 생산 국가이다.
공업[편집]
세계은행에 따르면 독일은 중국,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 4위의 제조업 생산국가이다. 이는 세계 3위인 일본과 비슷한 수치이며, 한국의 수출액보다 3배 가까이 많은 수준이다. 이러한 제조업을 바탕으로 중국, 미국에 이어 세계 3위의 수출국가이며, 연간 상품 수출액이 1조 달러가 넘는 3개국 중 하나이다. 중국, 미국과 GDP 규모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생각해보면 어마어마한 수치이다.
항공·우주[편집]
세계 2위의 민항기 제조사인 에어버스의 공장이 함부르크에 위치해있으며 프랑스와 함께 에어버스 항공기의 최종 조립을 하는 유럽 국가이다. 또한 에어버스 헬리콥터 역시 프랑스와 독일의 회사이다.
건축·토목[편집]
독일의 호흐티프(hochtief)는 프랑스의 건설사인 빈치등과 세계 순위권을 다투는 건설사이다. 스페인 건설사 ACS 그룹이 인수했다.
패션·귀금속[편집]
시계, 특히 뻐꾸기 시계가 독일제가 유명하다. 손목시계는 스위스가 전 세계에서 가장 알아준다면, 뻐꾸기 시계나 괘종시계의 경우는 독일제가 가장 뛰어나다. 물론 90%가 태엽식.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 된 뻐꾸기 시계들도 독일에 있다. 그렇다고 손목시계를 못 만드냐면 그것도 아니라서, 최고급 시계 중 하나인 A. Lange & Söhne가 바로 독일제이다.
이밖에도 중저가형 시계 중 국내에서도 매니아층이 있는 노모스, 스토바 등의 브랜드 역시 독일의 시계이며 아디다스, 푸마, 몽블랑 등의 패션 브랜드도 유명하다.
차량·이륜차[편집]
독일의 공업기술은 현대 기술력의 상징이라 볼 수 있는 자동차 부분에서 아주 우수한 모습을 보인다. 대중 브랜드인 폭스바겐을 비롯하여 메르세데스-벤츠, BMW, 아우디, 등의 자국산 프리미엄 브랜드들은 우수한 품질과 성능, 가치 덕분에 부가가치가 매우 높고, 세계 각국의 자동차 브랜드들이 몇 개 대기업에 인수된 오늘날에는 최고급 자동차 브랜드인 벤틀리, 하이퍼카 브랜드 부가티, 스포츠카 브랜드인 포르쉐와 람보르기니, 이탈리아의 프리미엄 바이크 제조사인 두카티 등이 폭스바겐 산하로 있고, 영국의 초고가 브랜드인 롤스로이스와 대중차 브랜드인 미니가 BMW 산하로 포함되어 있어서 사실상 유럽의 고급 자동차 시장은 독일 자본이 지배하고 있다. 거기다 일부 상용트럭 브랜드까지 아예 독일 회사거나 폭스바겐 그룹 산하에 있는 경우가 있어서 어느 방면을 가리지 않고 자동차 산업의 규모가 상당히 크다.
화학·생명[편집]
세계 5대 회사 중 하나인 바스프가 독일 기업이다. 아스피린을 발명한 바이엘도 있으며, 또 퍼실로 유명한 헨켈이 있다.
장비·공구[편집]
산업용 장비와 공구 등은 지멘스와 쿠카, 라인메탈, 티센크루프, 칼 차이스, MAN, 보쉬, 힐티 등 업계 최고를 자랑하는 기업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어 공구 분야에서는 절대본좌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특히, 초대형 노천광산 채굴 중장비인 배거 288과 그 후속작인 배거 293 등을 통해 독일 기계공업의 외적인 역량을, 주요 대기업들의 공장이나 마천루에 들어가는 지멘스의 자동화 설비나 솔루션 등을 통해 일반인들에게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인정받는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기술력은 당연히 무기 만드는데도 고스란히 적용되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 전선을 누비던 전차와 대포는 말할 것도 없고, 냉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에서 만든 육상무기는 하드웨어적인 면에서 미국조차 쉽게 압도할 수 없는 성능을 자랑한다.
독일 제품들은 어지간해선 잘 고장나지 않아도 구조적 효율성, 합리성을 위해 정비성을 희생하는 경향이 있다 보니 한 번 고장나면 손을 못 쓰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엔 엄청난 수리 비용 또한 한몫한다.
다만 유럽 체형에 맞춰서 그런지, 아니면 내구성에 너무 신경을 쓴 탓인지, 특히 일본제에 비해서는 무게가 무겁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가벼움과 견고함 둘 다 찾는 이발사&미용사들의 미용 가위 같은 경우, 국내에서는 일본제 가위의 점유율이 높다고 한다.
광학 장비에 관해서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세계적인 렌즈회사인 칼 차이스, 슈나이더, 로덴스톡과 이들에 원료를 공급하는 특수유리 회사 쇼트가 독일 회사이다. 참고로 칼 차이스의 특수렌즈는 산업용으로도 많이 쓰이는데, 대표적인 게 반도체 웨이퍼에 회로를 그릴 때 쏘는 광선을 통과시켜주는 렌즈이다.
제지·섬유[편집]
광활한 숲을 기반으로 세계 4위의 종이 생산국가이다.
금융·은행[편집]
1960~1970년대에는 유럽 최대 금융강국이었으나 영국에게 금융강국 주도권을 뺏겼다. 그럼에도 프랑크푸르트는 유럽에서 런던 다음가는 금융도시이며 브렉시트로 인해 EU에서 금융 중심지로 급부상 중이다. 그리고, 브렉시트 여파로 인해 독일로 자본투자가 활발해지고 있으며 2020년 기준으로 프랑크푸르트는 세계 6위 금융지로 선정됐다. 세계적인 보험사 알리안츠와 세계 1위 재보험사 뮤닉 리의 본사가 있는 뮌헨도 금융업이 발전했다. 선박금융으로 유명한 함부르크 상업은행(구 HSH Nord bank)의 본사가 있는 함부르크는 선박금융이 발전했고 유명 보험사 한제메르쿠어가 함부르크에 본사를 두고 있다.
최근 독일이 금융업에 법인세 인하로 인해 자본투자가 활발해지고 있으며 4차산업의 핵심인 스타트업도 성장하고 있다.
에너지[편집]
독일은 천연가스·원유·석탄 등의 등 화석연료, 원전·태양광·바이오매스 등 신재생에너지와 수력발전이 주요 에너지원이다. 2020년 독일의 에너지 소비는 석유 34%, 천연가스 27%, 석탄 8% 등으로 전체소비 에너지원의 약 70%를 화석연료에 의존한다. 신재생에너지는 17% 정도이며 나머지는 원자력과 갈탄 등이다. 1990년대 이후 온실가스 배출 감소를 위해 석유소비가 줄면서 상대적으로 청정 에너지원인 천연가스 소비가 증가하였다. 풍력과 태양광 등 신재생 에너지원은 발전부분에서 주로 소비하는데 전력생산 에너지원의 약 45%는 신재생에너지이다.
독일은 1980년대부터 에너지 전환(Energiewende) 정책을 통해 온실가스 저감을 위한 친환경 에너지원의 사용을 확대하여 왔다. 에너지 전환의 목표는 석탄과 같은 화석연료와 원자력을 점진적으로 줄이고 바이오매스·풍력·태양광·수력발전 등 저탄소, 신재생에너지의 소비 확대이다. 에너지 전환의 핵심은 풍력과 태양광 에너지의 효율성 증대를 위한 기술개발로 풍력발전을 위한 터빈 분야는 세계적인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전력생산의 경우, 신재생에너지원 비중을 2030년까지 65%까지 확대하고, 에너지 전환에 따라 전력생산의 약 8%를 점하는 원자력발전소는 2022년까지만 유지하고, 이후 신재생에너지원으로 대치하는 계획이다.
2019년 독일은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에너지 소비가 많은 국가로, 국내소비 에너지의 약 70%를 러시아·영국·노르웨이에서 수입에 의존한다. 석유는 러시아에서 폴란드를 경유하는 드루즈바 파이프라인(Druzhba pipeline)과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Trieste)로 연결된 트랜스 알파인 파이프라인(Trans Alpine pipeline)을 통해 들여온다. 이외에 빌헬름스하펜 항구(Wilhelmshaven port)를 통한 해상 루트를 이용한다.
천연가스는 국내소비의 97%를 러시아, 노르웨이를 통해 들여온다. 러시아 천연가스는 폴란드를 경유하는 야말-유럽 파이프라인(Yamal-Europe pipeline)과 북해에 건설된 노드 스트림 파이프라인(Nord Stream pipeline)을 통해 들여온다. 노르웨이와는 노르파이프(Norpipe)를 통해 천연가스를 수입한다. 독일로 들어온 천연가스는 국내 소비 분량을 제외하고 덴마크·네덜란드·프랑스·오스트리아․체코 등으로 재공급되므로 독일은 유럽의 에너지 안보측면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
석탄은 독일에서 풍부한 자원으로 여전히 전력생산의 약 19% 정도를 석탄발전에 의존하여 유럽연합 내에서 폴란드에 이어 석탄소비가 두 번째로 많다. 그러나 독일은 환경오염과 온실가스 배출을 이유로 2018년에 마지막 광산을 폐쇄하였고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또한 2038년까지 석탄발전소를 모두 폐쇄하고 태양광과 풍력발전으로 대치하는 것을 계획하고 있다.
유럽연합에서 스웨덴·덴마크 등 북유럽국가와 함께 기후변화대응에 가장 적극적인 국가로, 에너지 전환과 기후변화대응을 연계한 정책을 오래전부터 실행하여 왔다. 독일정부는 2050년까지 1990년 대비 온실가스 배출규모를 80∼95%까지 줄이고, 신재생에너지 사용비중을 60% 수준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또한 2019년 '기후변화프로그램 2030' 계획을 수립하여 에너지 효율 빌딩 리모델링과 전기 차량에 보조금을 확대하는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이외에도 온실가스 배출규모가 큰 공공운송 수단의 에너지원 전환과 신기술 개발투자도 확대하고 있다.
운송교통[편집]
독일은 유럽의 정치·경제 중심지이며 지리적으로도 유럽 중앙에 위치하여 오래전부터 운송망이 잘 구축되었다. 독일의 운송망은 도로·철도·항공·내륙과 해상운송 등으로 다양하다.
- 도로
도로망은 연방정부에서 관리하는 고속도로인 아우토반과 연방도로(Bundesstraßen) 그리고 각 주에서 관리하는 주도로(Landesstraße)로 구성된다. 이외에 지방도로는 각 지자체에서 관리한다. 아우토반은 독일연방 도로 시스템으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긴 연장을 갖는 자동차 전용도로로 주요 도시들 간에 촘촘하게 구축되어 있다. 또한 속도제한을 두지 않는 도로로 유명한데, 최근 들어 소음 감소과 안전을 위해 일부 구간에는 속도제한을 두거나 130km 정도의 권장속도를 유도하고 있다. 무료로 통행할 수 있지만 2005년부터 대형트럭에 한해 요금을 징수하고 있다. 잘 갖추어진 고속도로로 도시 간 고속버스가 핵심적인 장거리 교통수단이다. 1980년대 이후 철도의 개설로 이용객이 잠시 줄어들었으나, 2012년 이후 탈규제화 조치로 프릭스버스(Flixbus)와 같은 대규모 버스회사가 탄생하여 저렴한 장거리 교통수단으로 다시 각광받고 있다.
- 철도
철도는 도시간 고속철인 이체(ICE)와 도시간 철도(IC)로 구성되며 독일국영철도회사에서 인프라 건설과 운영을 담당한다. 독일철도회사는 1994년 민영화법에 따라 민간기업으로 전환되었지만 정부가 대주주로 사실상 국영기업의 성격을 갖는다. 이외에 약 3,000~4,000km에 달하는 지방철도는 약 280여 개의 민영회사와 지방철도회사가 운영한다. 연방과 주정부는 독일철도회사와 민영회사에 보조금을 지급한다. 고속철인 이체는 1990년대부터 도입되어 주요 도시를 연결하며, 취리히․빈․코펜하겐․파리․암스테르담브뤼셀 등 인근 서유럽의 주요 도시로도 직접 연결된다. 시속 200km 내외로 운행하는 도시간 철도는 작은 도시까지 노선이 촘촘하게 구축되어 있다.
도시인근의 광역권은 에스-반(S-Bahn)으로 불리는 철도가 운행되는데 고속철 형태부터 일반열차까지 다양하다. 베를린, 함부르크 등 일부 대도시에는 유-반(U-Bahn)으로 불리는 지하철이 운행되며 도심트램(Straßenbahn)과 버스 등의 대중교통과 연계된다.
- 항공
독일은 유럽 내 항공운송의 중심지이다. 2000년대 이후 유럽연합의 항공운송 자유화 조치로 저가항공사가 급속히 증가해 도로와 철도교통을 대치하고 있다. 독일 최대 공항인 프랑크푸르트공항은 국적기인 루프트한자의 허브공항이다. 프랑크푸르트공항은 런던 히드로공항 및 샤를드골공항과 함께 유럽에서 가장 승객이 많이 몰리는 공항이다. 승객운송 기준 제 2위의 공항인 뮌헨국제공항과 2020년에 문을 연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국제공항(Berlin Brandenburg International Airport) 역시 핵심 공항이다. 이외에도 뒤셀도르프, 함부르크, 하노버, 쾰른, 슈투트가르트 등 주요 도시에 국제공항이 위치한다.
- 해운
독일은 오래전부터 라인강과 엘베강을 통한 내륙수상운송이 활발하였는데 쾰른과 같은 도시는 라인강을 통한 무역으로 번영하였다. 총길이 98km에 달하는 북부의 북해발트해운하는 발트해와 북해를 잇는 중요한 내륙수로이다. 20세기 들어 운하의 물류기능은 이전보다 약화되었는데, 대신 크루즈 관광코스로 인기가 높다. 해안과 내륙운하에 약 20여 개의 항구가 있는데, 최대 규모의 항구인 함부르크항(Hamburg Port)은 무역학으로 각별하게 중요한 곳이다.
인문사회[편집]
민족구성과 인구변화[편집]
독일을 구성하는 게르만족은 원래 스칸디나비아반도로부터 발트해 연안, 엘베강 동쪽 지역에 거주하였던 민족이다. 이후 서쪽으로 이동하여 엘베강 유역에 정착하고, 다시 라인강과 도나우강 까지 진출하여 여러 부족으로 결집하여 로마제국과 대면하였다. 게르만족이 현재의 독일에 정착한 것은 기원전 500년에서 서기 500년 사이로, 서기 100년경부터는 로마인들이 '게르마니아' 혹은 야만족이라는 의미의 '바바리안(Barbarians)'으로 불렀다. 게르만족은 독일 땅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선주민인 켈트족을 서쪽으로 몰아내거나 흡수하였다.
8~9세기에 이르러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게르만 부족이라는 연대의식이 생성되어, 9세기에는 현재의 독일 영토인 동프랑크 왕국(Ostfrankenreich)에 거주하는 슬라브인과의 구별이 뚜렷해졌다. 10세기 이후 독일인은 크게 서게르만의 일파인 프랑크족과 프리슬란트(Friesland), 북동부 엘베강 유역의 작센(Sachsens), 남부의 바이에른(Bayern), 알자스(Alsace)와 스위스 북부의 알라마니(Alamanni), 중동부의 튀링겐(Thuringen) 등 6개 지역에 걸쳐 부족단위로 생활하였다.
중세 들어 독일인들의 거주지는 동쪽으로 확대되어 동부의 엘베강과 그 지류인 잘레강을 사이에 두고 슬라브 민족과 대치하였다. 이후 12세기 후반부터 인구가 증가하면서 엘베강 동부 슬라브족 거주 지역까지 영토가 확대되었으나, 1350년경 페스트가 돌면서 인구가 감소하여 현재의 독일지역으로 거주지가 고정되었다. 오늘날 독일의 슬라브인들은 주로 엘베강 동부에 극소수가 거주한다.
중세 이후에는 유대인과 프랑스 지역의 신교도인 위그노가 독일로 들어왔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독일내 유대인은 50만 명에 달하였으나 전쟁 중 많은 수가 사망하거나 독일을 떠나 현재는 20만 명을 조금 넘는 수준이다. 덴마크와 인접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Schleswig-Holstein)는 원래 19세기 말까지 덴마크 영토로 본 지역에는 약 5만 여명의 덴마크인이 살고 있다.
독일은 1950~60년대 유례없는 경제성장으로 노동력이 부족하였다. 이에 따라 독일 정부는 1955년부터 1968년까지 이탈리아를 필두로 스페인·튀르키예·모로코·포르투갈·유고슬라비아 등과 초청노동자협정(Guest Worker Treaty)을 체결하여 외국인 노동자를 받아들였다. 특히 튀르키예의 노동인력은 상당수가 근로계약 이후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독일에 정착하여 후손을 포함해 독일인구의 약 1.8%를 점한다.
1990년대 이후에는 난민과 망명자 유입, 그리고 유럽통합의 심화에 따른 유럽연합 회원국으로부터의 노동이민으로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였다. 2004년부터는 폴란드와 체코 등 중동유럽 국가들이 대거 유럽연합에 가입하면서 이민자가 몰렸고, 2008년 유로존 금융위기 이후에는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지에서도 취업이민이 급증하였다. 이에 따라 2020년 독일인구의 약 8,400만 명 중 1,600만 명이 독일 밖에서 출생한 이민자와 후손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이에 따라 독일은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외국인 취업자를 포함한 이민자 비중이 높은 국가가 되었다.
언어[편집]
공용어로는 독일어를 쓴다. 독일어는 국가, 지역마다 방언이 나누어져 있지만, 전반적으로 표준 독일어가 많이 사용된다. 독일어는 유럽연합의 공용어 중 하나이자 영향력이 매우 큰 언어다.
전반적으로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많이 있는 편이라서 영어가 잘 통한다. 독일은 2021년 영어를 잘하는 나라의 순위를 매긴 EF EPI 2021에서 세계 112개 국가 중 11위를 차지할 정도로 우수 등급에 속한다. 인구도 많고 영어를 자주 쓰는 환경에 노출된 국가도 아닌 편을 감안하면 상당히 잘하는 편이다. 독일보다 위에 있는 상위 10개 국가들은 모두 독일보다 인구가 적은 나라들뿐이다. 이는 독일어와 영어가 인도유럽어족 - 게르만어파 - 서게르만어군 분류에 속하는 서로 가까운 친척 언어인 영향도 있다. 아무래도 모국어인 독일어가 영어와 비슷하니 더 쉽게 배우는 편이다. 반면 영어 화자는 독일어를 배우는 것을 다소 어려워 하는 편이다. 독일은 토익 평균 점수 세계 2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참고로 1위는 캐나다. 캐나다는 영어권 국가지만 퀘벡 주에서는 프랑스어가 일상 언어이기 때문에 통계에 포함되었다.
독일은 학교에서 라틴어는 물론 프랑스어나 스페인어를 제2외국어로 배우는 나라이다. 과거에는 프랑스어가 인기 있었으나 요즘엔 스페인어의 인기에 밀리는 추세이다. 독일에서 프랑스어나 스페인어를 배우는 건 한국으로 치면 학교에서 다른 언어를 선택해서 배우는 것과 유사하다. 학교에서 러시아어나 튀르키예어를 가르치는 경우도 있다. 통일 이전에 구동독 지역은 러시아어가 제1외국어로 지정되었다고 하는데, 통일 이후의 지금은 제1외국어는 무조건 영어다. 프랑스어도 많이 가르치고 있으며 북부에는 덴마크어, 프리지아어 사용자가 일부 존재한다. 동부에서는 소르브어라는 언어를 사용하는 소르브인도 거주하고 있다. 구소련에서 이주한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독일계 후손들도 많이 존재하고 있다. 1990년대에 구소련의 독일계 후손들이 독일로 많이 이주했지만, 대부분이 독일어를 거의 구사하지 못했다.
독일어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튀르키예어만 써도 사는 데에는 별 지장 없다. 웬만한 깡촌이 아닌 이상 관공서부터 튀르키예어를 사용하는 튀르키예계 독일인 공무원이 있고, 튀르키예 요리를 먹을 수 있는 식당은 한국의 김밥천국 수준으로 널려 있으며 튀르키예 물건을 판매하는 슈퍼마켓과 카페트 가게도 있으며, 심지어 튀르키예에선 관광지에서나 파는 물담배도 쉽게 구할 수 있다. 모스크도 곳곳에 있고. 심지어 베를린은 튀르키예 제3의 도시라고 할 정도고 출산율 차이로 인해 한 도시 내에서 독일인의 비율보다 튀르키예인의 비율이 늘어나고 있고 이미 추월한 도시도 존재한다. 이 때문에 독일 내에서는 독일의 정체성에 대해 논란이 일어나기도 한다. 심지어 독일어 화자가 줄어들고 있어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종교[편집]
마르틴 루터에 의해 종교 개혁이 일어나 개신교가 탄생한 곳이다.
2022년 현재 종교별로 가톨릭 16.2%, 개신교 18.1%, 이슬람교 3.9%, 무종교 60.8%다. 무종교인 비율이 높은데 특히 젊은 층은 사실상 거의 다 무종교인이다. 20세기 중반 ~ 21세기 초반에 들어서 무종교인은 증가하고 기독교를 포함한 다른 종교인들의 비율은 대부분 점점 감소하는 추세이다. 무슬림들은 대부분 터키나 구 유고 출신 이민자나 난민 및 그 후손 출신이다. 특히 무종교인은 20세기 후반 ~ 21세기에 매우 빠르게 증가했으며 개신교와 가톨릭 인구 모두 2010년대 후반에 20% 미만으로 감소했다.
독일은 1919년 바이마르 헌법을 통해 정교분리가 이루어져 국교는 없다. 다만 역사적 전통을 존중하여 국가는 교회의 재산권과 신자에 대한 종교세 부과를 인정하며 교회활동의 유지비용을 일부 지원한다.
개신교 루터교회는 독일 인구의 16.2%인데 전통적으로 북부 지역에서 강세다. 가톨릭은 18.1%를 차지하고 남부·서부에서 강세다. 동부의 구 동독지역은 국가무신론의 영향으로 종교적 색채가 엷다.
전통적으로 상공업이 발달한 지역에서는 루터교회가 우월하고 농촌 지역에서는 가톨릭이 우세한 점이 특징이었는데, 2차대전 이후 가톨릭 우위 지역인 바이에른의 빠른 산업화로 더 이상 이렇게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상공업이 발달하였던 신교 지역이 2차대전 후 대부분 동독 지역에 편입되어 공산주의 치하에서 종교가 쇠퇴했던 점도 있고 상대적으로 덜 발달되었던 가톨릭 지역은 자본주의 서독 지역에 대부분 남아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상대적으로 종교전통이 보존된 점도 한몫한다.
다른 나라와는 달리 신· 구교 간에 협력이 잘 이루어지는 것도 독일 교회의 특징이다. 그 외에 소수 교파로서 장로회· 침례회나 독립 루터회 등 자유교회(Freikirche)를 믿는 사람들도 있다. 구 동독 지역에선 전통적으로 개신교가 우위였지만 이웃한 체코와 마찬가지로 공산정권 40년의 영향으로 무종교인 비중이 높다. 그래서 과거에는 개신교:가톨릭 비중이 2:1이었는데 지금은 1:1로 바뀌었다.
독일 가톨릭교회는 교회세와 각종 지원을 통해 바티칸 재정의 20% 이상을 지원하면서 가톨릭계 안에서 독자적 영향력을 확보해오고 있다. 그럼에도 여성 사제 및 사제의 결혼, 이혼 및 재혼, 동성애 문제 등에 있어서 급진적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일부는 특히 1996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재임기간 중에는 교회 안에 270개 낙태 상담소를 설치한 뒤 여성들에게 확인서를 발부하기 시작하면서(속칭 낙태 면죄부 사건) 교황청과 3년 동안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이 사건은 교회가 분열되는 사태로 발전될 조짐까지 보였으나 마침내 독일 주교회의가 교황의 최후 통첩을 받아들여 낙태확인서 발급을 중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3년 동안 지속되던 교황청과 독일 천주교회 간 다툼에 종지부를 찍게 됐다.
이런 풍모는 오늘날에도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다. 독일의 한 대교구의 종교개혁 기념 미사 중에 보수파 청년들이 항의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루터회 교인이자 동성애자인 귀도 베스터벨레 외무장관의 합동(가톨릭과 루터교회 공동 주최) 장례예식이 가톨릭 성당에서 치뤄지기도 했다. 이런 측면 때문인지 전통 가톨릭 성향의 신자들 중 일부는 '독일은 이상한 신학의 발원지다', '(게르만계인 한스 큉과 엮으며) 게르만은 영적으로 이상한 것이 나오는 동네다', '게르만(독일) 애들은 영성이 이상하다'며 경계심을 갖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독일 가톨릭교회가 막나가는 곳이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다. 워낙 철학적 기반이 탄탄한 국가이다 보니, 현대 가톨릭 신학에서 사실상 대장님 소임을 맡고 있다. 게다가 철학뿐만이 아니라 인문학이 전반적으로 모두 발달해서 우수한 신학자들이 무더기로 나왔다. 그리하여 20세기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꼽히는 카를 라너, 교황이자 초 네임드 신학자인 베네딕토 16세, 루돌프 슈낙켄부르크 등 다른 나라 가톨릭교회가 부러워 죽는 수퍼스타 라인업을 자랑한다. 그리고 상기한 비판 중 '기념'은 그 대상이 긍정적일 때만 쓰는 말이 아니다.
독일 개신교는 2차대전 이후 EKD라는 교회협의회 체제로 개편되었으며, 11개의 지역 연합교단, 7개의 루터교단, 2개의 개혁교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소속된 신자들은 7%정도를 종교세로 납부해야 한다. 2011년 조사 기준으로 개신교 신자가 많은 지역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55.7%)과 니더작센(51.5%)으로 나왔다. 다만 실제 출석률은 대다수 유럽 국가들이 그렇듯 한 자릿수대에 불과하다. 한국 개신교와 정반대로 독일에는 국민선동금지법이 있어서 근본주의적인 설교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2015년에는 동성애와 종교다원주의를 비판한 브레멘의 한 목사가 고소당하는 일도 있었다. 독일 정부는 18세 이하의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성 정체성을 바꾸기 위한 치료를 금지하기로 하고 관련 법안을 마련했다.
개신교 신학에서도 독일의 위상이 굉장히 높은 편이다. 일찍이 마르틴 루터가 탄생하기도 했고,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디트리히 본회퍼, 루돌프 불트만 등의 신학자 라인업을 자랑한다.
독일에서도 기독교외에도 소수의 유대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를 믿는 사람들도 있다. 이 중 독일내의 이슬람교는 알바니아, 코소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터키,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지 에서 건너온 사람들에 의해 주로 믿고 일부 독일인들중에도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비율도 있다. 특히 외국인 노동자로 독일에 정착했던 터키인들이 이슬람 신자의 절대 다수를 점하고 있다. 그리고 독일 내에서는 유럽 난민 사태로 무슬림비율이 높아지자 독일은 교회세를 본따서 모스크세를 걷고 터키, 이란, 사우디의 영향력을 차단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또한, 독일정부는 외국인 성직자에 대한 입국요건으로 독일어 구사 능력을 추가하는 방안을 추진중이다. 유대교도 있었지만, 나치 독일의 탄압, 학살 등으로 유대인들의 수가 많이 줄어들었다. 불교, 힌두교를 믿는 사람들도 적지만 있다.
그러나 독일에서 이슬람은 이슬람주의가 확산하면서 특히 논란이 많다. 그 이전에는 서독에 60년대부터 들어온 터키계 독일인들이 90년대 초 독일 통일 이후 동독 주민들과 마찰을 빚은 것이 사회 문제가 되긴 했었으나 지금처럼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독일 내 이슬람 이미지에 결정타를 날린 계기는 쾰른 집단 성폭행 사건 및 이를 두고 이슬람주의 선교사들이 강간범을 옹호한 일이었다. 이후 터키의 강경 이슬람 성향 대통령 에르도안과 독일 사이의 외교적 갈등과 메수트 외질 논란으로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이 최악의 성적을 거두면서, 이슬람 이미지가 바닥을 쳤다.
사회보장[편집]
독일은 1880년대 독일제국 시대부터 노후연금과 의료보험을 도입하였다. 사회보장 지출비용은 2019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25.9%로 OECD 평균 20%를 상회하며, 유럽에서는 프랑스·핀란드·덴마크 등과 함께 사회보장비 지출 최상위국에 위치한다. 독일의 사회보장 시스템은 모든 시민이 질병·장애·실업·은퇴와 무관하게 기본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구축하는데 있다. 독일의 사회보장은 연금·의료·고용·장기요양·산재 등 5대 사회보험을 기반으로 운영되며, 자영업자를 포함한 고용자는 산재보험을 제외한 4대 보험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한다. 이외에 농임업과 예술계 종사자에 대한 사회보험이 별도로 운영된다. 개인은 공세전 총소득의 약 40% 정도를 보험료로 납부하는데, 고용자의 공동분담으로 실제로 개인부담은 총소득의 20% 정도이다. 구체적으로 산재보험을 제외한 4대 사회보험의 재원은 개인소득에서 53% 그리고 고용주 부담 47%로 충당한다. 자영업자의 경우 연금·의료·장기요양 보험금을 본인이 100% 부담한다.
연금가입은 의무이며 연금납부액은 총 급여의 18,7%로, 고용자와 고용주가 각각 9.3%씩 부담하고, 연금 수혜를 받기 위한 의무가입 기간은 최소 5년이다. 연금은 65세부터 지급되며 소득 대체율은 실소득의 67% 수준이다. 독일은 인구 고령화와 늘어나는 연금수급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23년부터 매년 2개월씩 수급시기를 늦추어 2029년에는 67세 이후부터 연금을 지급할 계획이다. 독일 국민의 약 85%는 국민건강보험(Gesetzliche Krankenversicherung) 가입자로 입원·치과치료·통원·왕진 등 여러 의료혜택을 받는다.
실업보험은 총 급여의 2.4%를 납부하며, 최대 납부 상한액은 동서독 지역간 차이를 두고 있다. 실업보험은 연령과 고용 기간을 고려하여 최소 6개월에서 2년까지 지급되며, 실업보험 지급기간에도 주거와 생활을 위한 파트타임 노동은 허용된다. 1995년부터 실행되고 있는 장기요양보험은 노령층과 사고에 의한 장기적인 의료 치료시 지급되는 보험이다. 장기요양보험은 개인은 총임금의 3.05%를 보험료로 납부하며, 납부 상한선은 동서독 지역이 동일하게 정해져 있다 산재보험은 1884년부터 실행된 오랜 역사를 가진 사회보험으로 고용주가 의무적으로 가입하고 전액을 부담한다. 산재보험은 직장 내 산재는 물론이고 학교에서 자녀의 상해시에도 지급된다.
독일은 사회보험 이외에도 수당·보조금·진흥비 지원 등을 통한 여러 사회적 안전망이 구축되어 있다. 저소득층에 대해서는 주거임대와 대출을 위한 경제적 지원이 있으며, 대부분의 독일 학부모는 자녀의 교육과 육아를 위한 다양한 지원프로그램의 혜택을 받고 있다. 사회보험 가입 여성은 출산에 따른 보건의료 서비스가 지원되며, 사회보험 비가입자도 요청시 동일한 서비스를 지원 받을 수 있다. 이외에도 학부모, 병가, 자녀의 질병 등 여러 부분에서 정부의 지원프로그램이 운영된다.
교육[편집]
독일의 기본법에 따르면 교육정책의 목표는 모든 국민에게 평생 동안 교육의 기회를 부여하고, 국민은 누구나 자신의 기호와 능력에 따라 학교, 직업훈련소 및 직업을 택할 권리가 있다. 기본법에 의해 교육정책은 주(州)정부의 고유 권한으로 16개 주정부에서 독립적으로 정책을 실행한다. 따라서 연방정부의 연방교육문화과학부는 시민에 대한 보편적 서비스, 고등교육기관과 학생에 대한 재정 그리고 연구개발 지원 등을 통해 주정부의 교육정책에 간접적으로 개입한다. 또한 연방차원의 교육정책 및 주정부간 정책조정은 16개 주정부의 교육문화장관들의 정례회합인 교육문화장관상임위원회(Kultusministerkonferenz)를 통해 이루어진다.
독일의 교육시스템은 유아·초등·중등·고등으로 구성된다. 6세 이전 취학전 교육은 의무교육이 아니며, 각 주에서 자격을 부여받은 사립형태의 유치원과 비영리단체·교회·복지기관에서 담당한다. 사립기관이 부족한 지역에서는 지방정부가 유아교육기관을 운영하기도 한다. 6세부터 시작되는 초중등 교육은 의무교육이다. 초등교육은 4년이며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에 한해 6년이다.
초등교육을 마친 학생은 중등교육과정을 진학할 때, 졸업 후의 진로에 따라 세 가지로 나누어져 진학한다. 김나지움(Gymnasium)은 대학진학을 목표로 한 9년 과정의 일반적인 중등교육과정이다. 6년 과정의 실용중등학교(Realschule)는 공무원 혹은 회사원 등의 직업을 갖기 위한 기초적인 교육과정이며, 5년 과정의 직업중등학교(Hauptschule)는 기초적인 실업교육이다. 이외에 1970년대에 만들어진 종합중등학교(Gesamtschule)는 여러 중등과정을 혼합한 인문실업학교이다. 실용중등·직업중등학교를 마친 학생들은 직업교육과 대학교육을 함께 준비하는 전문고등학교(Fachoberschule) 및 직업전문 교육기관인 상급직업학교(Berufsoberschule)로 진학하기도 한다.
독일 고등교육기관은 대학교(Universities)와 이에 상응하는 연구기관(Institutions), 응용과학대학교(Universities of Applied Science), 미술음악대학(Colleges of Art and Music) 등 세 가지 범주로 구성된다. 전체 대학생의 약 2/3이 재학하는 대학과 연구기관은 학문연구를 위한 전통적인 고등교육기관이다. 반면에 응용과학대학은 엔지니어링·컴퓨터공학·디자인·비즈니스·사회적 서비스 등 실용학문 위주로 운영되며, 대부분 의무적인 현장 인턴과정이 포함된다. 이외에 예술음악대학은 현장과 연계된 학문분야로 별도의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대학과 연구기관 그리고 응용과학대학에서는 박사학위를 운영하며, 일부 예술음악전문대학도 박사학위를 수여한다.
독일은 유럽에서도 가장 뛰어난 교육과 연구 인프라를 갖고, 공학·철학·문학·법학 등 많은 학문분야가 세계적으로 높은 학문수준을 인정받고 있다. 독일의 대학교는 19세기 정치가·철학자이자 교육학자인 빌헬름 폰 훔볼트(Wilhelm von Humboldt)의 교육철학이 깊숙이 영향을 미쳤다. 그는 1810년 베를린훔볼트대학교를 세워 독일 고등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후 시대가 변화하면서 독일의 고등교육은 새로운 교육 수요를 수용하여 대학의 기능과 유형이 다양화되었다.
언론과 방송[편집]
독일은 전국지역을 대상으로 한 8개의 일간지와 5개의 주간지가 있으며, 이외에도 수백여 종의 지역 일간지가 발행된다. 주요 도시에는 대부분 2개 이상의 지역 일간지가 있고, 소도시와 지역에도 지역일간지가 발행된다. 뮌헨에서 발행되는 《쥐트도이체 차이퉁, Süddeutsche Zeitung》은 최대 발행부수의 일간지이며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 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은 정론지로 명성이 높다. 이외에 《디벨트, Die Welt》, 《타게스슈피겔, Der Tagesspiegel》, 《디 타게스자이퉁, die tageszeitung》 등도 주요 일간지이다. 타블로이드 신문으로는 《빌트, Bild》가 높은 구독률을 가진다. 함부르크에서 발행하는 《디 자이트, Die Zeit》는 가장 널리 읽히는 주간지이며, 《프로이시셰 알게마이네 차이퉁, Preußische Allgemeine Zeitung》 등도 주요한 시사일간지이다.
독일의 방송시장은 유럽에서 규모가 가장 크며 90%의 이상의 가구가 TV 이외에 위성방송과 케이블TV를 시청한다. 독일은 1935년부터 세계최초로 공영방송을 운영한 국가로 1980년대 까지 두 개의 공영방송인 ARD(제1TV)와 ZDF(제2TV) 체제를 유지하였다. 이후 1984년부터 RTL plus와 SAT1 등 상업방송이 개시되어 공영․상업방송으로 이원화되었다. 가장 오래된 공영방송인 ARD는 9개의 지역공영방송국의 연합형태로 운영되며 전국규모의 채널인 Das Erste를 운영한다. ZDF는 1963년에 설립된 제2 공영방송으로 TV 방송국만 운영한다.
공영방송인 ARD와 ZDF는 정부로부터 독립성을 보장받되 방송위원회(Broadcasting Councils)의 감독을 받는다. 방송위원회는 연방과 주정부 그리고 여러 공적기능을 감시하는 사회단체 대표들로 구성된다. 그러나 방송위원회 위원은 연방정부에서 선출되거나 정당에서 직접 임명하는 경우가 많아 공영방송에는 정당의 입김이 개입된다. 상업방송은 RTL 그룹의 RTL plus와 VOX 등이 있으며 각 지역마다 케이블 방송사가 있다.
난민 문제[편집]
독일은 서유럽에서 프랑스와 함께 난민과 망명자에 수용적인 국가로 냉전시기에는 러시아를 포함한 공산권 국가에서 온 많은 정치적 망명자를 수용하였다. 과거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1955~1973년, 그리스·포르투갈·유고슬라비아·튀르키예·튀니지·모로코 등과 초청노동자협정(Gastarbeiter)을 체결하여 많은 외국인 노동자가 유입되었고, 일부는 계약종료 후 현지에 정착하였다. 당시 다수의 무슬림이 유입되어 이들 중 상당수가 시민권을 얻고 정착하여 이슬람 문화가 존재하였지만, 현지인과 종교·사회적 갈등이 표면화되지는 않았다. 또한 2000년대 이후에는 유럽통합의 영향으로 폴란드·이탈리아·스페인 등 유럽연합 회원국의 이주 노동자들이 다수 유입되었다.
그러나 1988~1990년, 약 40만 명이었던 망명 신청자가 발칸반도 지역 분쟁이 일어난 1991년을 기점으로 1993년까지 100만 명을 넘으며, 망명 신청자중 약 20%가 독일에 집중되었다. 2000년대 들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아프리카 등 여러 국가에서 난민이 지속적으로 유입되다가, 2015~2016년에는 아랍의 봄에 따른 내전으로 시리아와 이라크 등에서 약 130만여 명에 달하는 난민이 들어왔다.
2001년 발생한 미국대폭발테러사건과 이후, 유럽 각지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테러가 잇따르면서 독일 현지에 거주하는 이슬람 난민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팽배해졌다. 동독 지역에서는 이슬람 난민의 대거 유입에 따른 반작용으로 극우주의자가 증가하여 난민을 대상으로 한 증오범죄가 급증하였다.
연방정부 차원에서는 사회적 불안감과 더불어 난민의 주거 및 사회적 보호, 의료지원 등의 재정 부담이 가중되었는데, 2018년에는 약 237억 달러의 예산이 소요되었다. 난민수용 한계에 봉착한 연방정부는 주정부의 재정 형편과 인구밀도를 고려하여 독일 전역에 난민 분산수용을 실시하면서 연방과 주정부간 정치적 갈등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독일은 많은 난민의 유입으로 정치적·재정적 부담과 이질적 종교와 사고를 갖는 난민의 사회적 수용 문제를 안고 있다.
치안[편집]
독일의 치안은 전반적으로 양호하다. 유럽에서 판을 치는 소매치기도 적고 강도 같은 흉악 범죄도 적다. 특히 독일인 특유의 신고정신이 투철해 범죄를 목격하면 즉각 신고하고 증인이 돼 준다. 최순실 사건 당시 정유라가 살던 독일 슈미텐 동네 주민이 모녀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자 언론에 적극적으로 증언하고 심지어 정유라의 옆집 노인은 평소 수상한 정유라의 행적을 노트에 기록까지 하는 등 독일인 특유의 신고정신이 국내에서도 화제였다.
다만 집창촌이나 슬럼가 주변의 위생 상태나 치안은 그다지 좋지 않고 이민자가 많은 동네의 치안도 썩 좋지 않다. 바이커 갱도 있고 이민자가 갱단을 조직해 범죄를 저지르기도 해 이런 이민 문제 때문에 독일인의 반감이 늘어나 네오나치가 다시 고개를 든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이민자 갱단 가운데 특히 유명한 조직으로 레바논 마피아, 체첸 마피아, 터키 마피아, 알바니아 마피아가 있다.
독일의 조직범죄에 있어, 토착 독일인들은 마피아형 범죄조직보다는 바이커 갱에 많이 가담하는 것으로 보이며 그 외 그때그때 한탕하는 자잘한 갱단 활동 정도가 있다. 마피아형 타입의 범죄조직은 외국계 이민자들이 우세하다. 그 중에서도 레바논 마피아를 위시한 중동계, 모로코 마피아를 위시한 북아프리카계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그 외에 러시아 마피아, 체첸 마피아, 발칸의 세르비아 마피아, 알바니아 마피아가 활동하고 있고, 이탈리아 마피아도 활동하고 있다. 그 외에 베트남 갱이나 아프간 갱 등이 활동하는 중이다. 토착 독일인들은 프랑스나 영국, 이탈리아처럼 마피아형 조직을 만들지 않았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사이에 'Ringvereine'이라는 조직이 있었는데 나치의 탄압을 받았고, 결정적으로 독일 패전이후 소련군정의 탄압을 받아 사라졌다. 1995년에 나온 베를린 경제 및 법학 대학의 범죄학 교수 클라우스 폰 람페의 논문을 보면 전통적으로 미국 같은 곳에서 말하는 마피아나 야쿠자 같은 범죄조직이 독일에는 '없다'고 말하고 있으며, 단지 외국계 마피아가 독일에서 활동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축구 경기가 있는 날엔 훌리건의 난동이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한다. 2000년대 들어 난민과 이슬람에 의한 각종 범죄나 테러 사건이 발생해 사회 문제다. 특히 2016년은 쾰른 집단 성폭행 사건, 뮌헨 총기 난사 사건, 독일 열차 테러, 베를린 트럭 테러 같은 대형 사건이 연달아 발생해 독일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문화[편집]
독일의 문화는 종교적, 세속적 측면들이 섞여 있으며, 기나긴 유럽 역사 동안 여러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거쳐오며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역사적으로 독일은 ‘시인과 사유자들의 땅’이라고 불렸으며, 독일의 작가들과 철학자들은 서구 사상에 지대한 공헌을 하기도 했다. BBC에서 조사한 국제 연구 조사에 의하면, 2013년과 2014년에 독일은 세계에 가장 긍정적인 효과를 끼치는 국가로 조사되었다. 독일은 옥토버페스트와 크리스마스 리스, 크리스마스 마켓, 글뤼바인, 크리스마스 트리, 스톨렌 등 크리스마스 풍습 등으로 유명하다. 2016년 UNESCO는 41개에 달하는 풍습들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였다. 독일은 연방국가답게 공휴일도 주마다 따로 정하는데, 그들 중에서도 10월 3일은 독일 통일의 날로 정해 전국에서 기념하고 있다.
음악[편집]
독일은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작곡가들을 여럿 배출한 바 있다. 제바스티안 바흐, 프리드리히 헨델, 디트리히 북스테후데 등은 바로크 기에 활동한 유명한 작곡가이며, 세계적인 작곡가 베토벤은 고전기와 낭만기 중간의 음악사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낭만기에는 카를 마리아 폰 베버, 펠릭스 멘델스존, 로베르트 슈만, 브람스 등 여러 작곡가들이 활동하였다. 특히 바그너는 오페라 음악에 기여를 하였고, 리하르트 스트라우스는 후기 낭만기와 현대 초기에 뛰어난 작곡가로 이름을 날렸다. 20세기와 21세기 초에는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과 볼프강 림 등의 작곡가들이 활동하였다.
2013년 기준으로 독일은 유럽에서 2번째 가는 음악 시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세계에서는 4위를 차지했다. 20세기와 21세기 독일 대중음악은 주로 팝, 헤비메탈, 펑크, 팝 락, 인디 음악 등이 번성하였으며, 특히 독일의 전자 음악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도 하였다. DJ들과 예술가들, 폴 반 다이크나 파울 칼크브레너 등은 테크노 음악 등으로 세계적으로 진출하고 있다.
문학[편집]
독일은 10명이 넘은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문학의 나라이다. 독일 현대문학은 17세기 바로크 시대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8세기 후반은 바이마르 고전주의(Weimar Classicism)시대로 낭만·계몽·고전주의가 혼합된 독일 특유의 문예사조가 일면서 문학의 전성기를 가져왔다. 특히 1765~1785년, 20년 동안은 ‘슈투름 운트 드랑’으로 불리는 독일문학의 질풍노도의 시대로 걸출한 문호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18세기 철학자이며 시인인 요한 하만은 독일문학의 낭만주의 시대를 연 인물이다. 같은 시기 활동한 철학자·과학자이며 낭만주의 작가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1774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을 발표하여 독일문학을 전 유럽에 각인시켰다. 고전주의 극작가이며 시인인 프리드리히 실러는 괴테와 문학적으로 교류하면서 《크세니엔, Xenien》 시집을 발표하고, 1799년부터 《발렌슈타인, Wallenstein》, 《마리아 슈트라우트, Maria Stuart》, 《오를레앙의 처녀, Die Jungfrau von Orleans》, 《빌헤름 텔, William Tell》 등 독일문학의 정수로 뽑히는 희곡을 연이어 발표하였다. 이러한 독일의 낭만주의 사조는 19세기 초 까지도 문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빈회의(Vienna Congress)에서 나폴레옹 전쟁까지 19세기 초중반은 ‘비더마이어’로 불리는 시기로 문학·음악·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여유로움과 예술적 저변이 확대되었다. 이 시기에는 아네테 폰 드로스테휠스호프,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에두아르트 뫼리케 등 여러 시인들이 아름다운 서정시를 많이 발표하였다. 1830~1850년은 ‘청년독일파’의 시기로 카를 구츠코브, 하인리히 라우베, 하인리히 하이네 등 여러 젊은 문인들이 문학적으로 교류하면서 활발한 창작활동을 하였다.
1902년에는 역사가 크리스티안 몸젠을 필두로 루돌프 오이켄 등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독일 문학계에서 6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배출될 정도로 황금기를 누렸다. 20세기 들어 독일을 대표하는 문인은 프란츠 카프카이다. 그의 저서 《재판, The Trial》은 프랑스 《르몽드》 신문에서 20세기 100권의 책에서 세 번째로 선정될 정도로 20세기 문학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2차 대전 이후에는 1972년과 1999년에 각각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하인리히 뵐과 귄터 그라스와 같은 세계적인 작가들이 활동하였다. 20세기 독일 문학계에서는 전통적인 소설과 시 이외에도 스릴러·SF와 판타지 장르에서도 걸출한 작가들이 배출되었다. 스릴러 소설로 인기를 얻은 잉그리드 놀(Ingrid Noll), SF소설에서는 안드레아스 에슈바흐(Andreas Eschbach)와 프랑크 셰칭(Frank Schätzing) 등이 인기작가로 많은 판매부수를 기록하였다. 특히 프랑크 셰칭이 2004년에 쓴 《벌레, The Swarm》는 독일에서 가장 많이 팔린 SF소설로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철학[편집]
근현대 사상의 흐름과 발전에 독일은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해 왔다. 그 첫 번째 흐름은 임마누엘 칸트와 게오르크 헤겔로 대변되는 독일 관념론 철학이다. 근대가 시작되어 18세기까지 유럽을 지배하던 철학의 두 가지 흐름은 영국의 경험론과 대륙의 합리론이었다. 독일 관념론은 이 두 철학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그 한계를 극복하려고 하였다. 칸트는 인간 이성에 대한 비판철학을 통해 합리론과 경험론을 종합하여 근대 철학의 토대를 확립하였다. 헤겔은 변화의 주체로서의 '절대 정신'과 방법론으로서의 '변증법'을 제시하여 근대 철학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헤겔의 합리적 절대 관념론은 19~20세기의 마르크스주의와 실존주의 철학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카를 마르크스는 헤겔처럼 변증법을 역사에 적용하지만 그 변화의 주체를 절대 정신이라는 관념이 아니라 경제적 생산력과 인간의 구체적 실천에서 찾았다. 마르크스주의는 유물론이라는 점에서 관념론과 대비되지만, 합리성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이성 중심 철학의 정점으로 평가할 수 있다. 헤겔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 아르투르 쇼펜하우어는 마르크스와 달리 구체적 현실과 개인의 비합리적 의지를 강조하였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더 나아가 근대적 서양철학 전체를 비판하는 철학을 전개하였다. "신은 죽었다."라는 그의 언명처럼, 전통적 형이상학의 근간을 부정하고 개인적 가치와 진리의 상대성을 강조하였다. 니체의 철학은 20세기 후반에 꽂을 피운 포스트모더니즘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자연과학의 발달과 급격한 사회변동은 20세기 현대철학에 큰 영향을 미쳐 20세기 독일 사상계는 실증주의와 인간소외 문제 해소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대표적인 조류는 생의 철학, 현상학, 실존주의, 비판이론이다. 생의 철학은 헬름 딜타이가 자연과학과 구분되는 정신과학을 정립하고자 했다. 그는 자연이 설명의 대상이라면 정신은 이해의 대상이라고 주장하면서 인간의 역사성에 대한 통찰이 정신과학의 기본이라고 보았다. 딜타이의 생의 철학은 독일의 철학자이며 사회학자인 게오르그 짐멜과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을 통해 정점에 달하였고, 이후 해석학, 현상학, 실존주의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20세기 중반 들어 마르틴 하이데거와 카를 야스퍼스는 실존철학을 제시하여 인간의 고유한 존재성과 주체적 실천을 강조하였다. 20세기에는 프랑크푸르트 학파(Frankfurter Schule)가 중심이 된 비판이론이 사상계의 주류로 등장하였다. 비판이론을 제시한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사회과학과 인문학 지식에 근거를 두고 사회문화에 대한 비판과 성찰에 주력하였다. 이들은 현대 산업사회가 도구적 이성의 확장을 허용하여 인간실존이 위협받는다고 보았다. 이후 비판이론을 계승한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와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는 산업사회의 근본적 개혁을 표방하여 신좌파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하버마스는 이성과 토론에 기초한 합리적 사회발전을 강조하고 의사소통이론을 발전시켰다.
예술[편집]
독일 예술은 여러 면에서 서양 미술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독일의 르네상스기에는 알브레히트 뒤러, 한스 홀바인, 마티아스 그뤼네발트, 루카스 크라나흐 등의 예술가들이 활동하였으며, 바로크기에는 루벤스, 요한 밥티스트 치머만이, 낭만기에는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칼 스피츠베그가, 인상주의에서는 막스 리베르만, 초현실주의에는 막스 에른스트 등의 화가들이 활동하였다. 19세기 들어서는 여러 화가 모임들이 생겨났고, 이로 인하여 뮌헨과 베를린의 화풍에 영향을 미쳤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표현주의에 대항하여 신객관주의가 떠올랐으며,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이후에는 신표현주의가 유행을 탔다.
독일의 건축은 카롤링거 양식과 오토 양식 등이 있는데, 이후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도 후대에 점차 전파되었다. 독일 민간 건축의 특징은 목재 프레임 구조를 먼저 지은 후 그 사이에 벽토를 채워넣어 만드는 것이다. 유럽에 산업화의 물결이 밀어닥치자, 이에 대항하여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고전주의 양식이 잠깐 유행하였다. 1910년대에는 표현주의 건축이 유형을 탔고, 아트 데코와 다른 현대 건축에도 영향을 주었다. 독일은 세계의 모더니즘 건축의 선도국들 중 하나이기도 하였는데, 20세기 전반에 걸쳐 수많은 모더니즘 건축가들이 독일에서 배출되기도 하였으며 유리로 뒤덮인 초고층건물의 모습을 이때 처음 설계하기도 했다. 독일의 유명한 건축가들에는 고트프리드 뵘, 프라이 오토 등이 있다. 독일의 디자인도 매우 세계적인 수준인데, 베를린 패션위크는 독일 디자인업의 상징 격으로 매 2년마다 한 번씩 열린다.
음식[편집]
독일의 요리는 지역과 지역마다 다르고, 지역들마다 인접한 이웃 국가들의 식문화와 상당히 유사하다. 남부 지역들, 예를 들어 바바리아와 스와비아는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의 식문화와 매우 흡사하기도 하다. 또한 해외에서 들어온 음식들, 예를 들어 피자, 초밥, 중화요리, 그리스 요리, 인도 요리, 케밥 등도 매우 인기가 많다.
독일 요리의 주식은 빵으로, 독일 제빵업계는 현재 600여개가 넘는 빵들을 생산하고 있으며 1,200개가 넘는 종류의 파스트리와 롤빵들을 굽고 있다. 독일의 치즈 생산은 유럽 전체 치즈 생산의 22%를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거대하다. 2012년 기준, 독일에서 생산된 육류의 99%는 돼지고기, 닭고기, 소고기였다고 전해진다. 독일인들은 이렇게 잡은 고기들을 이용하여 1,500여개가 넘는 소시지들을 생산하는데, 유명한 소시지 종류로는 브라트부르스트와 바이스부르스트 등이 있다. 음료의 경우, 현대에 들어서는 포도주가 점차 인기를 얻고 있지만 국민 전체로 보았을 때에 독일의 국민음료는 바로 맥주이다. 독일인들은 2013년 기준으로 1인당 110리터에 달하는 맥주를 소비하였으며,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치의 맥주 소비량을 자랑하고 있다. 워낙 맥주가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국민 음료였기에, 16세기에 독일의 왕 빌헬름 4세는 맥주 순수령을 내려 전국의 맥주 질을 상향시키고자 하기도 했다.
2018년 미슐랭 가이드는 독일에 3스타 레스토랑 11개를 선정하였고, 독일에 있는 별 개수들을 모두 합치면 300개가 넘는다.
스포츠[편집]
독일은 1936년 베를린 하계올림픽, 1972년 뮌헨 하계올림픽 그리고 1936년과 1940년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을 개최한 스포츠 강국이다. 축구·농구·핸드볼 등 구기종목이 인기가 많으며, 테니스·사이클, 동계스포츠인 아이스하키와 모터스포츠도 널리 즐긴다. 육상과 수영도 선수층이 넓어 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 등에서 다수의 메달을 획득하였다.
축구는 독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로 국가대표팀은 월드컵축구대회에서 4회 우승하였고, 대륙간 대항전인 FIFA컨페더레이션스컵 역시 4회의 우승기록을 갖고 있다. 여자축구도 강국으로 월드컵에서 두 번이나 우승하였다. 독일에는 약 26,000개의 프로와 아마추어 축구클럽이 있으며 1부 프로리그인 분데스리가는 영국·스페인·이탈리아의 1부 리그와 함께 유럽을 대표하는 프로리그이다. 독일은 1974년과 2006년 두 번에 걸쳐 월드컵을 유치하였다.
농구도 인기스포츠로 1부 프로리그인 분데스리가가 운영되며 여러 독일출신 농구선수들이 미국 NBA에서 활약하였다. 국가대표 농구팀은 1993년 유럽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바 있으며 세계선수권대회를 포함해 각종 국제대회에서 여러 번 상위에 입상하였다. 독일은 덴마크와 함께 핸드볼의 발상지로, 핸드볼은 독일에서 축구에 이어 가장 저변이 넓은 스포츠이다. 독일남자핸드볼 대표팀은 국제핸드볼연맹(IHF)이 주최한 세계선수권대회와 유럽핸드볼선수권대회에서 여러 차례 우승하였다.
폭넓은 동계스포츠 인프라와 저변으로 독일은 동계올림픽에서 매번 상위권에 위치하였다. 특히 아이스하키가 인기가 많다. 14개 팀으로 구성된 프로 아이스하키 1부 리그인 도이체 아이스하키 리가(Deutsche Eishockey Liga)가 운영되며 많은 선수들이 북아메리카프로아이스하키리그(NHL)에 진출하였다. 국가대표팀은 세계 10위권 이내의 강팀으로 2020년에는 만하임과 쾰른이 공동으로 세계선수권을 개최하였다.
또한 세계적인 자동차 생산 국가로 모터스포츠가 활발한데, 독일 자동차 제조사인 포르쉐와 아우디는 프랑스의 스포츠카 경주인 르망 24시(24 Hours of Le Mans)에서 수십여 차례 우승을 하였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포뮬러 원에서 일곱 차례의 우승으로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은 우승을 차지한 미하엘 슈마허(Michael Schumacher)는 독일 모터스포츠를 대표하는 선수이다. 이외에도 세바스티안 페텔(Sebastian Vettel) 등 걸출한 독일 출신 드라이버들이 포뮬러 원에서 활동하고 있다.
자동차[편집]
전 세계 최초로 현대적인 자동차와 오토바이(다임러, 벤츠)를 만든 국가이며, 자국산 자동차를 무척 좋아한다. 독일은 유럽에서도 고급 자동차가 많은 나라이며, 소형차라도 깨끗이 닦여 광택을 번쩍번쩍나게 유지하고 거리를 달린다.
독일을 처음 방문하는 한국인들은 공항 출구에 길고 아름답게 줄지어 서 있는 벤츠나 아우디 택시를 보고 놀라지만 독일인 입장에서는 벤츠, 아우디, 폭스바겐, 포르쉐, BMW 모두 국산차이므로 놀랄 것도 없다. 독일에서 오스트리아나 프랑스 등으로 국경을 넘어가면, 이 나라들이 독일보다 경제력이 많이 떨어지는 국가가 아님에도 당장에 먼지쌓여 지저분한 모습으로 달리는 차나 낡은 차가 많아지고 전체적인 차들의 가격 및 차급이 떨어져 경차 비율이 확 높아진다.
독일에서도 벤츠, 아우디, 포르쉐, BMW는 고가 자동차다. 2016년 기준 독일 내 가장 많이 팔린 자동차 브랜드는 폭스바겐으로 19.6%를 차지했으며 그 뒤를 벤츠(9.3%), 아우디(8.6%), BMW(7.8%)가 잇고 있다. 비싼 차지만 많이 구매해 주는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EU 시장 내에서 관세도 없이 수입해 들어오는 타 유럽 국가 브랜드 자동차와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절반 가까이를 자국 차량으로 소비하는 독일 자동차 시장을 보면 자국 차량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독일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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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호수 지도[편집]
독일 주변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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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 〈독일〉, 《나무위키》
- 〈분데스플라게〉, 《나무위키》
- Deutschlandlied, 《나무위키》
- 〈독일/경제〉, 《나무위키》
- 〈독일/국호〉, 《나무위키》
- 〈독일〉, 《두산백과》
- 〈독일의 지형〉, 《두산백과》
- 〈독일의 기후와 식생〉, 《두산백과》
- 〈독일〉, 《위키백과》
- 〈독일의 역사: 국가기원〉, 《두산백과》
- 〈신성로마제국 시대의 독일〉, 《두산백과》
- 〈독일의 통일 이후〉, 《두산백과》
- 〈독일의 역사〉, 《위키백과》
- 〈독일/외교〉, 《나무위키》
- 〈독일/행정 구역〉, 《나무위키》
- 〈독일의 군사〉, 《두산백과》
- 〈독일의 대한관계〉, 《두산백과》
- 〈독일의 외교〉, 《두산백과》
- 〈독일의 내각제〉, 《두산백과》
- 〈독일의 에너지〉, 《두산백과》
- 〈독일의 운송교통〉, 《두산백과》
- 〈독일의 무역〉, 《두산백과》
- 〈독일/문화〉, 《나무위키》
- 〈독일의 문학〉, 《두산백과》
- 〈독일의 음악〉, 《두산백과》
- 〈독일의 사상〉, 《두산백과》
- 〈독일의 미술〉, 《두산백과》
- 〈독일의 스포츠〉, 《두산백과》
- 〈독일의 민족구성과 인구변화〉, 《두산백과》
- 〈독일의 교육과 연구〉, 《두산백과》
- 〈독일의 사회보장〉, 《두산백과》
- 〈독일의 언론과 방송〉, 《두산백과》
- 〈독일의 난민 문제〉, 《두산백과》
같이 보기[편집]
서유럽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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