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르타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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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프랑스어: Bretagne, 브르타뉴어: Breizh, 갈로어: Bertaèyn)는 프랑스 북서부에 위치한 레지옹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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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브르타뉴의 면적은 27,208,㎢ 인구는 3,237,097명(2012년 기준)이다. 브르타뉴반도에 위치하며 서쪽으로는 대서양, 동쪽으로는 노르망디, 페이드라루아르와 접한다. 주도는 렌(Rennes)이다. 행정구역은 4개 데파르트망(Department) 모르비앙주, 일에빌렌주, 코트다르모르주, 피니스테르주를 관할한다.
일찍이 갈리아인은 이 지방을 아르모리카(Armorica:연해지방이란 뜻)라고 불렀다. 5세기에 켈트인이 색슨인의 압박을 피하여 브리타니아로부터 이주한 후, 정착한 이들 켈트인을 브리튼인(Britons), 그 지방을 역시 브리타니아라고 부르게 되었다. 오늘날의 지방명 브르타뉴는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순수 켈트족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몇 안되는 켈트어파 언어를 쓰고 있다. 서부에서는 토착어인 브르타뉴어를 소수가 쓰나, 국가의 유일한 공식어인 프랑스어에 밀려 지금은 줄어들고 있는 추세이다. 동쪽에서는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브르타뉴어는 1999년 통계청의 자료에 의하면 18세 이상 인구 중에서 26만 명이 브르타뉴 지방에서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프랑스 전역을 기준으로 하면 29만 명 정도가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현대 프랑스 레지옹으로서의 브르타뉴와 역사적 지역구분인 브르타뉴는 약간 의미가 다르다. 전통적인 브르타뉴의 영역보다 현대 프랑스 레지옹으로서의 브르타뉴가 더 작으며, 브르타뉴 레지옹은 전통적 브르타뉴 영역의 약 80%로 구성되어 있다. 나머지 지방은 페이드라루아르 주를 구성한다.
브르타뉴 공작령이 있던 시절의 수도는 낭트(Nantes)였고 지금도 브르타뉴 지방의 문화적 수도로 간주된다. 하지만 낭트와 그 주변 지역은 현행 행정구역상 브르타뉴 레지옹 소속이 아니라 페이드라루아르(Pays de la Loire) 레지옹 소속이다. 그래서 현 브르타뉴 레지옹의 '수도'(행정중심지)는 낭트가 아닌 렌(Rennes)이라는 도시이다.[2][3]
자연환경[편집]
브르타뉴반도는 프랑스의 가장 큰 반도로 대서양을 향해 북서쪽으로 쭉 뻗어 나와있다. 북쪽으로는 영국 해협이 있고 남쪽으로는 비스케이만이 이어진다. 서쪽 이롸즈해에 웨상섬이 있다.
브르타뉴의 해안선은 많은 곶과 만들이 복잡하게 들고 나 있다. 모르비앙만은 자연적인 항만을 형성한다. 브르타뉴 반도 주변에는 800여 개에 달하는 크고 작은 섬이 있으며 그 가운데 가장 큰 섬은 남부의 베이유일섬이다. 전체 해안선은 약 2,860km이다.
브르타뉴반도는 매우 오래된 지반인 아르모니카 육괴 위에 놓여져 있어 낮은 구릉들이 많은 지형을 보인다. 아르모니카 육괴는 브르타뉴와 노르망디, 페이드라루아르까지 놓여 있다. 브르타뉴와 노르망디 사이에는 몽생미셸섬으로 유명한 쿠에농강이 흘러 두 지역의 자연적인 경계를 이룬다.
브르타뉴반도는 온대 서안 해양성 기후에 속한다. 여름철 한낮 기온은 30°C 정도이고, 겨울에도 비교적 온화한 날씨를 보인다.[4]
역사[편집]
선사 시대[편집]
브르타뉴반도에는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브르타뉴에 살았던 가장 오래된 인류는 네안데르탈인이다. 이들의 인구수는 그리 많지 않았으며 서유럽 전역에서 발견되는 네안데르탈인들과 유사한 문화를 지녔지만, "콜롬바니안"이라 불리는 브르타뉴 네안데르탈인 특유의 문화도 있었다.
호모 사피엔스가 브르타뉴반도에 나타난 것은 약 3만 5천 년 전의 일이다. 이들은 샤텔페롱 문화와 유사한 석기를 사용하였다.
갈리아[편집]
원사시대 브르타뉴반도에는 켈트족에 속하는 다섯 부족이 살았다. 이들은 오늘날 도서 켈트어군에 속하는 브리튼 제도의 여러 켈트 부족들과 경제적으로 강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브르타뉴 지역은 기원전 51년 무렵 로마 공화정의 일부로 편입되기 시작하였으며, 기원전 13년 무렵에는 로마의 속주 가운데 하나인 갈리아 루그두넨시스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켈트족의 도시들은 로마식으로 재건축되었다. 당시의 주요 도시로는 콘다테(렌), 보르지움(카라이-플로게), 다리오리툼(반), 콘데빈쿰(낭트)와 같은 도시들이 있다.
3세기에 들어 브르타뉴는 프랑크족, 알레만니와 같은 게르만족들과 여러 해적들의 공격을 받았다. 이로 인해 지역 경제는 붕괴되고 렌, 낭트, 반과 같은 도시들은 버려지게 되었다.
브리튼인[편집]
4세기 말 오늘날의 웨일스와 영국 남서 반도에 살던 브리튼인들이 아르모리카로 이주해 왔다. 연원은 불확실하지만 이렇게 모여든 브리튼인과 앙주 지역 유력자들은 코난 메리아독을 중심으로 결집하였다. 5세기에서 6세기에 걸친 앵글로-색슨의 영국 도래는 브리튼 지역에 살던 켈트 부족들을 압박하였고, 상당수의 브리튼인들은 브르타뉴를 비롯한 영국해협 남쪽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840년 무렵 브르타뉴의 노미외는 브르타뉴 공국의 첫 번째 공작이 되었고 프랑크 왕국의 신하가 되었다.
중세[편집]
중세 시기 브르타뉴반도는 브르타뉴 공국의 영지였다. 브르타뉴 공국은 형식상 프랑스의 신하이자 영토였으나, 실제로는 독립적인 자치를 행사하였다. 브르타뉴 공국은 851년 젱랑 전투를 통해 프랑스에서 독립하여 브르타뉴 왕국이 되기도 하였으나, 942년 루이 4세에게 항복하고 다시 공국이 되었다.
9세기 무렵부터 바이킹이 영국, 노르망디, 브르타뉴 등의 북해 연안을 침공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브르타뉴 공국은 노르망디, 앙주와 같은 동쪽 영토를 잃었다. 바이킹은 브르타뉴 남쪽 보르뉴만 지역에 염전을 만들고 유럽 각국에 소금을 유통하기도 하였다.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침공할 당시 브르타뉴 공국은 노르당디의 동맹군으로 참전하였다.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 백년전쟁이 벌어지자, 이 여파로 브르타뉴 공국의 계승권을 놓고 전쟁이 일어났다. 잉글랜드의 후원을 받은 몽포르 가와 프랑스 국왕의 후원을 받은 블루아 가 사이의 전쟁에서 몽포르가 승리하였고 이는 백년전쟁의 향방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백년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 왕가는 이를 계기로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화를 이루기 시작하였으나, 브르타뉴 공국은 15세기까지 여전히 독립적인 자치를 행사하였다. 브르타뉴 공국은 프랑스 왕가의 중앙집권화에 반대하여 공익 동맹을 결성하기도 하였다.
프랑스의 합병[편집]
1488년 브르타뉴 공국과 프랑스 왕국 사이에 있었던 광기 전쟁이 끝났다. 이 결과,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는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의 허락 없이는 자신의 딸 안의 혼처를 정할 수 없었다. 1488년 프랑수아 2세가 낙마로 급사하자 안은 브르타뉴 공국의 영주가 되었고, 1490년 신성 로마 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와 혼인하였다. 샤를 8세는 랭을 포위하고 결혼의 취소를 요구하였다. 샤를 8세는 안과 막시밀리안 1세의 결혼을 취소시키고 자신이 안과 결혼하였다. 둘 사이에는 세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 어려서 죽었다. 샤를 8세가 후사 없이 죽자 왕위는 루이 12세에게 넘어갔고, 안은 루이 12세와 재혼하였다. 안은 루이 12세와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고 장녀인 클로드는 발루아 가의 프랑수아와 결혼하였다. 1514년 안이 죽자 브르타뉴 공작의 지위는 딸인 클로드가 계승하였다. 루이 12세는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8세의 여동생인 메리 튜더와 재혼하였으나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후사 없이 사망하였고, 프랑스의 왕위는 클로드의 남편인 프랑수아에게 넘겨졌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가 된 그는 1532년 브르타뉴와 프랑스의 동군연합을 천명하였다. 프랑수아 1세는 브르타뉴에 대해 소금에 대한 세금의 면책 특혜를 제시하였는데, 당시 소금세는 프랑스 내에서 악평이 높은 세금이었다. 이후 앙시앵 레짐 시기 프랑스의 국왕은 브르타뉴 공국의 영주를 겸했지만, 브르타뉴는 독자적인 자치권을 지니고 있었다. 프랑스의 궁정 내에서 브르타뉴 귀족들은 프린스 에트랑제(Prince étranger, 외국의 귀족) 신분을 지녔다.
근세 프랑스 시기 브르타뉴는 프랑스 해양 무역로의 주요 거점이었다.
1789년 이후[편집]
1789년 프랑스 혁명의 결과 공국은 해체되고 브르타뉴는 다섯 개의 데파르트망으로 분리되었다. 또한 앙시앵 레짐 시기에 주어졌던 염세 면제 혜택 역시 철회되었다. 혁명 후 3년이 지나자 브르타뉴는 왕당파와 카톨릭 세력의 반혁명 거점이 되었다. 브르타뉴의 반혁명 활동은 18세기 말까지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19세기에 들어 브르타뉴는 무역 거점으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었고 많은 수의 주민들이 프랑스 내의 다른 레지옹으로 이주하였다.
문화[편집]
브르타뉴반도에는 선사 시대 거석 문화 유적이 많다. 고인돌을 뜻하는 dolmen 이나 선돌을 뜻하는 menhir와 같은 말은 브르타뉴어에서 비롯된 것이다. 카르나크 열석은 브르타뉴에 있는 거대한 거석 유적이다.
중세시대 건축물도 많이 남아있다. 로마네스크 양식이나 프랑스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들은 주로 이 지역에서 나는 사암이나 화강암으로 지어졌다. 도시나 마을엔 중세시대의 성들이 남아있고, 게랑드, 콩카르뉴, 생말로, 푸제르, 반, 디낭과 같은 도시는 아직도 중세시대 성벽이 둘러싸고 있다.
1970년대에 이르러 브르타뉴의 전통 민요가 다시 조명되면서 각광을 받게 되었다. 백파이프, 켈트 하프와 같은 악기의 연주와 함께 노래하는 켈트 음악은 유럽의 근대 음악과는 다른 독특함이 묻어난다. 1999년 8월 브르타뉴의 로리앙에서 켈트 페스티벌이 열렸다.
분리주의[편집]
분리 독립운동이 있기는 하지만 스코틀랜드나 카탈루냐와는 달리 독립 운동이 강하게 일어나기 힘들다. 예전부터 동군연합으로 시작해 중앙이 지방 고유의 언어, 문화, 민족주의에 기반한 정치 세력과 교섭하며 근대 국가를 형성해 왔으며, 따라서 지역 자치 전통도 현대까지 강한 영국이나 스페인과는 사정이 다르다. 일단 프랑스라는 나라 자체가 중세 후기 부터 지속적으로 수백년에 걸쳐 꾸준한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중앙 집권화를 추구해온 나라이고, 프랑스에서 브르타뉴가 차지하는 정치경제적 비중 또한 스코틀랜드가 영국에서 가지는 영향력이나, 경제적으로는 아예 중앙보다 한수 위인 스페인 내 카탈루냐의 위상과 비교도 안된다.
게다가 현대 들어와서 브레통 민족주의는 공공연하게 이야기 하기 힘든 역사적 사연이 있다. 실제로 20세기 초반의 브르타뉴 민족주의 운동은 현대보다 더 강하고 활발했는데, 소수민족을 탄압하던 프랑스 중앙정부 국수주의의 대항마로 당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서도 유행하던 낭만주의적, 범켈트 민족주의를 추구하다가 1930년대 들어서는 아예 파시즘을 정식으로 받아 들였다. 그러다가 2차대전 당시 브르타뉴 민족당을 중심으로 한 브르타뉴 민족주의 세력이 대거 나치 독일와 협상해 프랑스에서 브르타뉴를 분리 독립시키든지 아니면 그냥 비시 프랑스 체제 내 자치권 확대를 목표로 친나치 부역에 가담했다. 물론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브르타뉴인들도 많았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개인 자격으로, 아니면 그냥 레지스탕스 전국 조직 내 브르타뉴 지부로 활동했던 반면 브르타뉴 민족주의 단체들과 그 지도자들은 대부분 나치에 협조했다.
브르타뉴 민족당을 비롯한 브르타뉴 민족주의 단체들은 따라서 전후에 레지스탕스 신화를 만들고 퍼뜨릴 필요가 있는 프랑스 제4공화국과 샤를 드골의 정부와 지방 분리주의를 경계하던 정치적 분위기 사이에 완전 흑역사가 되어 버렸다. 즉 프랑스 중앙정부가 소수민족들의 자치독립 주장을 원천차단하고 지방문화를 탄압하는데 나치 부역자 몰이가 전가의 보도로 사용되었다.
특히 1970년대에는 브르타뉴어 이름을 가진 신생아는 출생신고를 받지 않을정도로 정부로부터 탄압을 당했는데도 이슈화가 안될 정도였다. 지금도 갈리아와 구별되는 브르타뉴 켈트 민족 어쩌고 했다간 네오 나치로 몰려서 린치당하기 딱 좋다. 민족 독립 한번 이루자고 줄 한번 잘못 탔다가 백년 대계가 꼬인 사례. 현대 들어와 그나마 존재하는 브르타뉴 민족주의 단체인 브르타뉴 민주연맹과 브르타뉴당은 둘 다 자치권 확대, 고유 언어 보존 및 교육 확대 같은 비교적 온건한 주장만 하고 스코틀랜드 국민당이나 카탈루냐 공화좌파당, 바스크 지방 연합 같은 민족주의 정치 세력들처럼 본격적인 분리주의는 꿈도 못꾸며, 무엇보다 프랑스 국회에 의석이 아예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행정구역[편집]
브르타뉴에는 총 4개의 데파르트망 (주)가 설치되어 있다.
- 모르비앙주 - 프랑스 북서부에 위치한 주로, 주도는 반이며 인구는 702,487명(2007년 기준), 면적은 6,823㎢, 인구밀도는 103명/㎢,이다. 주 이름은 브르타뉴어로 "작은 바다"를 뜻한다.
- 일에빌렌주 - 프랑스 북서부에 위치한 브르타뉴 지방의 주로, 주도는 렌이며 인구는 955,846명(2007년 기준), 면적은 6,775㎢,, 인구밀도는 141.1명/㎢,이다.
- 코트다르모르주 - 프랑스 북서부에 위치한 주로, 브르타뉴 지방 북부에 위치한다. 주도는 생브리외이며 인구는 576,049명(2009년 기준), 면적은 6,878㎢,, 인구 밀도는 83.8명/㎢,이다.
- 피니스테르주 - 프랑스의 주로, 브르타뉴 지방 최서단에 위치한다. 주도는 캥페르이며 인구는 886,500명(2007년 기준), 면적은 6,733㎢,, 인구 밀도는 131.7명/㎢,이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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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서유럽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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