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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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독일어: Wien, 바이에른어: Wean, 프랑스어: Vienne, 체코어: Vídeň, 헝가리어: Bécs, 문화어: 윈)은 오스트리아의 수도이다. 영어 명칭인 비엔나(영어: Vienna)로도 알려져 있다. 도나우강이 도시를 관통하며 인구는 약 200여만 명이고 대도시권 광역 인구는 약 290여만 명으로 국가 인구의 3분의 1이 거주하고 있으며 문화, 경제, 정치의 중심지이다. 비엔나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이자 유럽연합에서 인구 기준으로 6번째로 큰 도시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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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 행정 단위: 오스트리아 수도
- 면적: 414.65 km²
- 언어: 독일어
- 정부 공식 홈페이지: https://www.wien.gv.at/
빈은 오스트리아 북동부 도나우강 상류 우안에 위치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이며, 삶의 질 1위의 도시로 선정된 살기 좋은 도시이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자리 잡은 역사의 도시이자 관광의 중심지이다. 빈은 BC500년에 켈트족이 정착하면서 형성된 도시로 1440년 합스부르크(Habsburg)왕가가 들어오면서 정치, 문화, 예술, 과학과 음악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사실상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로 자리매김했다. 도나우강은 북서 유럽과 남부 유럽을 연결하는 교통의 동맥이며, 13세기 이래 빈 남서쪽 70km 지점에 있는 젬메링 고개의 개통에 따라 빈은 동알프스 및 이탈리아와의 교통이 용이하게 되었다. 1805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가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신탁통치를 받으며 수도로서의 기능을 독일 베를린에 넘겨주었다가 1954년 독립하면서 다시 수도가 되었다. 베토벤(Beethoven)과 모차르트(Mozart)등 유명한 음악가들을 배출한 음악의 도시로 알려져 있으며 세계적인 관현악단의 연주와 오페라단의 공연이 끊이지 않는 음악의 도시이다.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훌륭한 고딕 양식의 건축물로 꼽히는 슈테판 성당(Stephansdom)과 합스부르크(Habsburg)왕가의 여름 별궁으로 사용되었던 쇤부른 궁전(Schloss Schonbrunn), 빈 공원(Wiener parks)등이 유명하다. 석유 수출국 기구(OPEC)와 유럽 안보 협력 기구(OSZE), 국제 원자력 기구(IAEA)등과 같은 중요한 국제 기구들의 본부가 이곳에 위치한다.[2]
지리 및 기후[편집]
빈은 오스트리아의 북동부에 자리 잡고 있다. 유럽에서 두 번째로 긴 강인 도나우강(영어로는 다뉴브강)의 상류 오른쪽 연안에 위치한다. 빈은 알프스산맥 동쪽 끝자락인 빈 분지 위에 지어졌다. 유럽의 한가운데 있다는 이점으로 서유럽과 동유럽 모두와 교통이 발달되어 있다. 오늘날 빈 도심에 해당하는 가장 오래된 정착지는 도나우강의 남쪽 둔치를 따라 형성되었으며 나중에 강 반대편으로 확장되었다. 해발고도는 최저 151m에서 최고 542m다. 면적은 414.65km²에 달해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넓은 도시다.
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르면 빈의 날씨는 서안 해양성 기후로, 선선한 여름과 비교적 따듯한 겨울이 특징이다. 강수량은 7월과 8월에 집중되어 있으며 각각 66.6mm와 66.5mm 수준의 비가 내린다. 6월부터 9월까지의 평균 최고 기온은 약 21°C에서 27°C 사이이며, 최고 기온 기록은 38°C()를 넘어가고, 9월의 최저 기온은 5.6°C이다. 겨울 평균 기온은 0°C를 조금 넘는다. 봄은 일교차가 심하고 가을은 서늘하며, 11월에는 눈이 내릴 가능성이 높다. 강수량은 일반적으로 연간 약 550mm로, 지역별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서쪽 비엔나 숲 지역은 연간 700mm에서 800mm로 가장 습기가 많은 지역이며, 동쪽의 평평한 평야는 연간 500mm에서 550mm로 가장 건조한 지역이다. 겨울에는 눈이 자주 오지는 않지만, 오스트리아의 서부 및 남부 지역과 비교하면 많은 편이다.
역사[편집]
초기[편집]
오늘날 빈 지역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처음 나타난 것은 기원전 500년 즈음으로 켈트족이 다뉴브강 유역에 정착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기원전 15년 로마인들은 로마 제국을 게르만족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자신들이 빈도보나라고 이름 붙인 개척지를 요새화했다.
빈과 켈트족의 밀접한 관련성은 몇 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아일랜드인 수도승 성 콜먼은 멜크 수도원에 묻혔으며 성 퍼질은 잘츠부르크에서 40년 동안 주교 자리를 맡았다. 그런가 하면 12세기 무렵 아일랜드 베네딕도회는 수도원을 겸하는 거주지를 만들었다. 이러한 연관성은 한때 수많은 아일랜드 수도승들이 활동했던 쇼텐 대사원을 통해 보여지듯이 빈의 일부가 되었다.
976년, 바벤베르크가의 레오폴트 1세는 오스트리아 변경백국의 지도자가 된다. 레오폴트 1세가 다스린 영토는 다뉴브강을 중심으로 바바리아 지방 동쪽 경계와 맞닿아 있었다. 이 지역이 훗날 오스트리아 공국으로 성장한다. 변경백국의 작위 계승자들은 다뉴브강을 따라 영토를 확장했는데, 최종적으로 빈과 그 동쪽 지역에 이르게 된다. 1145년, 하인리히 2세는 가문의 거처를 니더외스터라이히의 클로스터노이부르크에서 빈으로 옮긴다. 이때부터 빈은 바벤베르크가의 주무대가 되었다.
합스부르크가는 1440년부터 빈에 살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빈은 신성 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수도이자 예술, 과학, 음악, 요리의 중심지로 등극한다. 1485년부터 1490년까지 헝가리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 빈은 기독교 진영과 오스만 제국의 전쟁터였다. 1529년 빈 공방전과 1683년 빈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은 두 번의 패배를 기록한다. 1679년 역병이 창궐해 인구 3분의 1이 사망했다.
근대[편집]
나폴레옹 전쟁이 벌어지던 1804년 빈은 새로 등장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이후 1814년부터 2년에 걸쳐 빈 회의를 개최하는 등 유럽과 세계 정치에서 영향력을 넓혀나갔다. 한편 1848년 합스부르크 왕조에 불만을 품은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으나 진압 당했다.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협정 이후, 빈은 오헝제국의 수도로 남게 된다. 이 시기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 고전 음악의 거장이 다수 등장해 빈악파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19세기 후반 시 정부는 원래 보루와 글라시였던 곳을 순환도로로 재개발하며 현대적 도시의 기반을 다졌다. 이 도로를 링슈트라세라고 부른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빈은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1919년 제1공화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치 독일에 강제 합병 당하기 전까지 상류층 문화와 모더니즘의 본고장으로 남았다. 브람스, 브루크너,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같은 작곡가들을 길러냈다. 이 밖에도 빈 분리파, 정신분석학, 제2 빈악파, 모더니즘 건축, 비트겐슈타인을 필두로 한 빈 학파 철학 등 여러 분야에서 서양 문명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13년의 빈은 아돌프 히틀러, 레온 트로츠키, 조시프 브로즈 티토, 지그문트 프로이트, 이오시프 스탈린 등이 도시 중심부 몇 킬로미터 반경 안에 동시에 거주하던 곳이었다. 심지어 그 중 일부는 같은 카페에 자주 모습을 보였다. 이 무렵 오스트리아인들은 빈을 사회주의 정치의 중심지로 여기며 붉은 빈이란 별명을 붙였다. 1934년 오스트리아 내전에서, 엥겔베르트 돌푸스 총리는 사회주의 민병대가 점령한 칼 마르크스 호프와 같은 공영 주택을 포격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1938년, 대중의 인기를 누리며 빈에 입성한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헬덴 광장의 발코니에서 연설을 했다. 이때부터 나치는 빈에 살던 유대인들을 괴롭히고, 그들의 집을 약탈하며, 외딴 곳으로 내몰거나 처형했다. 1938년 벌어진 강제 병합에 의해 오스트리아는 나치 독일의 일부가 되었고, 빈은 베를린에게 수도의 지위를 내줘야 했다.
한편 전쟁 동안 빈은 하인리히 마이어가 주축이 된 레지스탕스 운동의 진앙지였다. 이들은 비밀리에 추축국의 주요 장비인 V-1, V-2, 티거 전차, 메서슈미트 도면을 입수해 연합국에 넘기기도 했다. 이들 대부분은 나중에 발각되어 게슈타포에게 처형 당하고 만다.
현대[편집]
전후 빈은 1945년 9월까지 소련 점령 지역의 일부였다. 베를린과 마찬가지로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으로 이뤄진 위원회가 빈을 네 구역으로 나눠서 감독했다. 차이점은 도심 지역인 1구를 각 국가가 한 달씩 교대로 통제하는 국제 지대로 설정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방법은 "지프에 탄 네 명의 군인" 방식으로 유명한데 사실상 네 국가 모두가 매일 서로를 감시하는 구조였다. 1948년 베를린 영공 차단 사태로 인해, 서양은 소련이 빈에서도 같은 행동을 반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를 품게 되었다. 넷으로 나뉜 빈은 그레이엄 그린의 1949년 작품 《제3의 사나이》의 배경이 되었다. 이 영화는 소설로 탈바꿈해 출판되었다. 이러한 냉전 시대의 분위기는 필립 커의 1991년 소설 《독일의 레퀴엠》에서도 묘사된 바 있다.
1955년 5월 오스트리아 국가 조약이 체결되면서 갈라졌던 빈이 하나가 되었고, 복원 작업을 거친 국립 오페라 극장과 부르크 극장도 운영을 재개했다. 소련은 연합군이 철수한 뒤, 오스트리아가 중립을 선언할 것을 연방 정부로부터 확실히 보장받기 전까지 오스트리아 국가 조약에 서명하지 않았다. 1955년 10월 말 통과된 이 중립에 관한 법은 현대 오스트리아가 북대서양 조약 기구나 소련 진영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을 것을 담보하며, 1995년 오스트리아가 EU에 가입을 망설인 이유 중 하나로 여겨진다.
1970년대, 오스트리아 총리 브루노 크라이스키는 국제 기구들을 위한 업무 단지인 빈 국제 센터를 개관했다. 빈은 유엔 (유엔 산업 개발 기구, 유엔 빈 사무국, 마약 범죄 사무소), 유엔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 기구, IAEA, OPEC, OSCE와 같은 단체의 사무국을 유치하며 이전의 외교적 영향력을 되찾았다. 빈은 2018년에 이어 2019년에도 살기 좋은 도시에 뽑혔다.[3]
경제[편집]
빈은 오스트리아 경제의 중심지이다. 광물, 오일, 천연가스와 기계, 건설, 통신, 운송 및 식품 산업 등이 빈의 주요 산업이며, 주요 기업으로는 OMV사(석유), 지멘스 그룹, 텔레콤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 연방철도 등이 있다.
빈이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선정된 데에는 쾌적하면서도 저렴한 공공주택이 많은 것도 한 요인이다. 빈은 1920년대부터 공공주택이 존재하였는데, 빈 시민 중 62%는 공공주택에 살고 있다.
1990년대에 경쟁 절차를 도입하여 개발자들이 품질이 좋고 에너지 효율이 높은 주택을 공급하게 되었고, 공공구역에는 주차장을 최소화하고 놀이터, 사우나, 유기농 식물 판매점 등 편의시설을 지어 주거환경을 개선하였다.
교통[편집]
빈은 U-반(U-Bahn, 지하철), S-반(S-Bahn, 도시통근철도), 트램(노면철도) 등 도시철도가 주요 대중교통수단이다. 고속철도는 레일젯으로 오스트리아의 주요 도시들과 부다페스트, 프라하, 뮌헨과 연결된다. 빈에는 서유럽이나 동유럽의 주요 도시로 가는 열차가 많아 유레일 패스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많이 들르는 교통의 요지이다.
자동차로는 주변국 수도인 체코의 프라하,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 등까지 두세 시간이면 이어져 동유럽 여행의 출발지가 되기도 한다. 빈 국제공항은 오스트리아는 물론 동유럽으로 통하는 주요 관문이며, 빈 시내 외곽에 있지만 공항직항철도인 CAT를 이용하면 시내까지 20~30분 내에 이동이 가능하다.
빈은 도시 주변을 감도는 환상(環狀)도로 중심으로 볼거리가 집중되어 있다. 예전에 빈 구시가지는 방어를 위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성벽이 철거되면서 도로가 형성되었고 그 모양이 반지 모양이라 링(ring)이라 부르게 되었다. 링을 순환하는 두 개의 트램을 이용하면 환상도로 주변의 관광명소를 편리하게 둘러볼 수 있다.
요금체계는 한 장의 티켓으로 U-반, S-반, 트램, 버스와 같은 시내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다. 빈 시내로는 U-반 6개 노선이 지나가며, 트램은 U-반이 연결되지 않는 곳을 갈 때 이용하면 편리하고, 버스는 주로 교외를 갈 때 이용되며, 티켓은 정류장의 자동발매기에서 구입할 수 있다.[4]
관광[편집]
빈의 랜드마크 중 하나는 오스트리아 최고의 고딕식 성당인 슈테판 대성당이다. 12세기 처음 지어질 당시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되었지만, 본당의 경우 1359년 고딕 양식으로 재건축되기 시작했고, 1433년 남탑과 1579년 북탑이 르네상스 양식으로 완성되었으며, 18세기에는 성당 내부가 바로크 양식으로 꾸며졌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궁전인 호프부르크 왕궁은 원래 중세시대의 성이었지만 왕가의 힘이 커지면서 왕궁으로 변모하였다. 현재 왕궁 건물은 대통령 집무실과 국제 컨벤션센터로 활용되고 있다. 궁전 안에는 스페인승마학교와 보물창고 등이 있고, 신왕궁 안에는 민속박물관, 악기박물관 및 무기박물관 등이 있다.
베르사유궁전과 더불어 유럽에서 가장 화려한 궁전 중의 하나인 쉔브룬궁전은 1569년 막시밀리안 2세에 의해 건축되었고, 1696년 건축가 베르나드 피셔 본 에라흐에 의해 재건축되기 시작하여 1700년 완공되었다.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 시절, 건축가 니콜라우스 파카시에 의해 1749년 여왕의 거주 궁으로 만들어져 지금의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 궁전에는 1,441개의 방이 있고 화려한 로코코 양식으로 장식되어 있다.
벨베데레궁(宮)은 오이겐 왕자의 여름 거주지로서 건축가 힐데브란트에 의해 1714년부터 1723년에 걸쳐 바로크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지금 궁전 건물은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상궁은 19~20세기 오스트리아 현대미술을 전시하고 하궁은 중세 바로크시대 미술품을 전시하고 있다.
그리스신전을 본 떠 1871년부터 1883년에 걸쳐 건축된 국회의사당, 1872년부터 1883년에 걸쳐 건축된 네오고딕 양식의 시청사, 도나우 섬에 위치한 도나우 타워 등도 관광 명소이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미술 수집품들을 전시한 미술사박물관, 공룡 화석과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자연사박물관, 빈 시내에서 가장 가까운 숲 지역인 그린칭 등도 가볼 만한 곳이다.
시내에 있는 빈 중앙묘지는 클래식 음악의 성지라 할 수 있는 곳으로, 빈에서 활동한 유명 음악가들의 무덤들이 밀집해 있다. 빈은 런던이나 파리 못지않게 유적과 문화유산이 많아 도시의 중심부인 구시가지가 전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5]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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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서유럽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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