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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체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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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체친시기
슈체친휘장
슈체친 항구
재건된 슈체친 구시가지의 모습

슈체친(폴란드어: Szczecin, 독일어: Stettin, 카슈브어: Sztetëno, 라틴어: Stetinum)은 폴란드 북서부에 있는 항구 도시로 서포모제주의 주도다. 1945년까지는 독일령으로 슈테틴으로 불렸다. 오데르강을 끼고 있다. 폴란드에선 그단스크에 뒤를 이어 제2의 규모의 항만 도시로 기계 공업 등이 발달해 있다. 역사적으로 프로이센의 영향력에 있었다. 러시아 제국의 황제인 예카테리나 2세의 출생지로 유명하다.

개요[편집]

역사[편집]

고대[편집]

슈체친에서는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해 왔으며 기원전 1300년에서 기원전 500년사이 후기 청동기 및 초기 철기시대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8세기에 서슬라브족의 분파인 포메라니아 슬라브족이 현재의 두칼성 자리에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10세기에 피아스트 왕조의 창시자 미에슈코 1세(930~992)가 슈체친을 포함한 포모제(Pomorze)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후 카지미에시 1세 오드노비치엘 시기에 포모제 지역이 반란으로 떨어져나가면서 한동안 독립을 유지하다가 볼레스와프 3세가 다시 포모제를 수복한다. 그러나 이후 폴란드 공국 분할 시대(1138~1320년) 도중인 1164년 신성 로마 제국의 공국중 하나인 작센 공국의 침략을 받고 작센 공국의 속국이 된 이후로, 이후부터 폴란드의 왕조들은 2차 대전 이전까지 이곳을 되찾지 못했다. 이후 1181년에 신성로마제국의 직속 봉신국이 되었으나 1185년에 덴마크가 점령하였지만 1227년 되찾아 다시 신성로마제국령이 되었다. 30년 전쟁 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스웨덴 제국이 획득했으나, 대북방전쟁 이후 스웨덴프로이센 왕국이 맺은 스톡홀름 조약에 따라 프로이센에 할양했다. 지배 세력은 자주 바뀌었지만 슈체친이 속한 포모제(Pomorze) 지역은 포메라니아 가문(그리핀 가문)이 대를 이어 통치했다. 항만을 낀 이점을 살려 무역과 상업 중심지로 발전하던 슈체친은 1243년 자치권을 부여받은 도시가 되었으며, 1360년에는 한자동맹에 가입해 더욱 번영하였다.

1648년, 스웨덴 왕국이 슈체친을 장악해 1720년까지 지배했다. 1701년에 성립한 프로이센 왕국이 1720년에 슈체친을 지배했으며, 1871년에는 독일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1945년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기까지 슈체친은 ‘슈테틴(Stettin)’이라는 독일어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근대[편집]

19세기 중반에 슈체친은 비약적인 산업화를 이루었다. 조선 · 화학 · 기계 · 식품공업이 발달하였고 독일 자동차회사 슈퇴버(Stoewer)가 공장을 건설해 1899년부터 1945년까지 자동차를 생산했다. 슈체친의 인구는 1813년 2만 7,000명에서 1900년 21만 명, 1925년에는 25만 5,500명으로 늘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슈체친에서는 독일군과 연합군의 전투는 도시 65%가 파괴되었다. 도심과 항구는 완전 피해를 입었다. 1945년 4월 26일, 소련군이 슈체친을 점령했다.

현대[편집]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후 폴란드에는 공산주의 정권 세워지고 폴란드의 동부 영토일부가 소련에 편입됨에 따라 동부에 살던 폴란드계 주민과 우크라이나인들이 슈체친으로 대거 이주했다. 1947년 폴란드에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후 44년간 폴란드는 소련의 위성국가로 존속했다.

소련은 정책적으로 발트해 연안 도시에 대규모 투자를 하면서 슈체친은 폴란드 조선 · 해운 산업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 1970년 슈체친 · 그단스크 등 폴란드 북부 도시들에서 공산주의 체제에 반발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으나 군대와 경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시위로 47명이 사망하고 1,000여 명이 부상했다.
  • 1980년 조선소 노동자였던 레흐 바웬사가 자유연대노조를 출범시키면서 폴란드에 민주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 * 1981년 내려진 계엄령에 대항해 부두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총파업이 일어났다.
  • 1989년 집권 인민공화국 정부와 민주화 세력 간에 개최된 원탁회의 결과 맺어진 ‘국민화해 협정’으로 민주화되어 폴란드공화국으로 바뀌었다.
  • 1999년 단행된 폴란드 행정구역 개편으로 슈체친은 자호드니오포모르스키에주의 주도가 되었다.

지리[편집]

폴란드 최북서단, 독일과의 국경에 접해 있으며 오데르강의 양안에 시가지가 넓게 분포되어 있다. 발트해에 접해 있으며 시의 북쪽에는 슈체친 만이 위치해 있으며 오데르강은 이곳을 통해 발트해로 유입한다. 시의 동단에는 돔비에 호가 위치해 있다.

슈체친은 해양성 기후를 갖고 있으며 일부 습한 대륙성 특성을 갖고 있으며 서부 포메라니아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겨울은 인근 해안보다 춥고 여름은 따뜻하지만 특히 발트해로 인해 어느 정도 온화하다.

슈체친의 평균 기온은 8~8.4°C이며 가장 더운 7월은 기온이 15.8°C~20.3°C이고, 가장 추운 1월은 -4.1°C~2.6°C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537mm이다.

도시 건축[편집]

슈체친의 건축 양식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유행했던 학술 예술과 아르누보 경향에 기인했다. 1945년 이후 건설된 많은 지역, 특히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도심 지역에서는 사회적 현실주의가 널리 퍼져 있다.

도시에는 녹지가 많다. 공원 과 도로 분리대, 회전교차로에는 나무를 많이 심었다. 슈체친의 도시 계획은 파리 의 계획과 유사한데 그 이유는 슈체친이 나폴레옹 3세 치하에서 파리를 재설계 했던 Georges-Eugène Haussmann 의 설계에 따라 1880년대에 재건되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도시를 재건하는 동안 폴란드 공산주의 당국은 도시의 건축물이 옛 폴란드 피아스트 시대를 반영하기를 원했다. 당시 건축물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딕 양식의 건축물과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을 보존 가치가 있는 것으로 선정하였다. 독일의 흔적은 피아스트, 폴란드인의 순교, 그리고 폴란드 시민에 대한 나치의 잔학 행위를 종식시킨 소련과 폴란드 군대에 대한 감사의 상징으로 대체되었다.

원래 "Piast Palace"로 이름이 변경된 이전 그리핀 거주지의 유적도 이후 시대의 모든 흔적을 제거한 채 르네상스 스타일로 재건축되었다. 일반적으로 르네상스 이후 건물, 특히 19세기와 20세기 초의 건물은 1970년대 이전까지 보존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구시가지는 1990년대 후반에 새로운 건물로 재건되었으며, 그 중 일부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파괴된 건물을 재건축한 것이었다.

슈체친에는 슈체친 펌프 또는 베를리너(Berliners)로 알려진 현존하는 28개의 역사적인 물 펌프가 있는데, 이 펌프는 다채롭고 복잡한 디자인으로 인해 인기 있는 관광 명소이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동유럽 같이 보기[편집]

동유럽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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