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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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르모(이탈리아어: Palermo, 시칠리아어: Palermu)는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섬에 있는 도시로 면적은 158.9km², 인구는 약 68만 명이다. 시칠리아주의 주도이며 티레니아해에 면하는 항구도시이다.[1]
개요[편집]
팔레르모는 남부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중심 도시로 시칠리아섬 최대의 도시이다. 시칠리아섬 북서부의 티레니아해에서 팔레르모만에 위치해 있으며 역사, 문화, 건축술, 미식 등으로 유명하다. 역사가 2,700년 이상으로 유서깊은 도시이다. BC 8세기경의 페니키아 식민도시가 시의 기원인데, 나중에는 카르타고의 요새가 되었고 그 후에는 로마·비잔틴 등의 지배를 받았다. 9세기에 아랍의 지배를 받고 난 뒤부터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11세기에 노르만왕(王) 로제르에게 정복되어 시칠리아 왕국이 건설되었는데 팔레르모는 이 왕국의 수도로서 번영이 계속되었다. 특히 프리드리히 2세 시대에는 유럽의 학문, 예술 중심지의 하나가 되었다. 그 뒤 앙주, 아라곤, 사보이, 부르봉 왕조와 외래(外來) 왕조의 지배가 뒤따랐고, 1860년 가리발디에게 점령되면서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었다. 시칠리아의 행정 수도인 팔레르모는 지역의 경제, 재정, 관광과 상업의 본거지다. 도시는 최근에 팔레르모 국제공항을 건설했고 팔레르모의 경제성장은 몇 년째 많은 경영자와 사업가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지역 경제가 주로 의존하고 있는 산업은 관광과 서비스업, 무역, 조선업과 농업이다. 팔레르모에는 시칠리아섬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대학인 팔레르모 대학이 있다. 이 대학교는 공식적으로는 1806년에 세워졌지만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이미 15세기 후반부터 의학과 법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 대학 식물학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오르토 보타니코 디 팔레르모(팔레르모 식물원)는 방문객들에게 항상 개방되어 있다. 팔레르모는 역사, 문화, 미술, 음악 및 음식으로 유명해 시칠리아섬의 문화 및 관광의 중심지이다. 지중해의 쾌창한 날씨, 풍족한 식재료를 바탕으로 한 요리와 유명 레스토랑, 로마네스크 양식 · 고딕 양식 · 바로크 양식의 교회, 궁전과 건물, 밤의 유흥 및 음악으로 인해 매료된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방문하고 있다. 팔레르모는 산업 분야에서 관광, 서비스, 상업 및 농업가 발달된 시칠리아의 산업 및 상업 중심지이며 서쪽에 국제공항도 가지고 있다. 또한 여느 이탈리아 도시들처럼 지하경제가 존재한다. 축구 구단인 팔레르모 FC의 연고지이다.[2][3]
지리[편집]
팔레르모는 티레니아해(Tyrrhenian 海) 팔레르모만에 인접한 시칠리아섬 북서쪽에 위치해 있다. 팔레르모는 파피레토, 케모니아, 오레토강으로 둘러싸여 형성된 분지형 지역이다. 이 유역은 9세기 아랍인들에 의해 황금 분지(Conca d'Oro)로 불렸다. 도시 북쪽에는 606m 높이의 펠레그리노산이 위치하고, 산맥은 티레니아해로 뻗어 있다. 팔레르모는 특히 몬테펠레그리노(Monte Pellegrino)의 바다 전망이 뛰어난 천연 항구의 본거지다.[4]
역사[편집]
고대[편집]
팔레르모 지역에 인간이 정착한 것으로 보이는 증거는 최소 중석기 시대때인 기원전 8000년쯤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인간의 형태를 묘사한 것을 대표하는 아다우라 동굴군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스의 역사가인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이베리아반도(카탈루니아로 추정)로부터 온 사람들이 시치아니 (시칠리아섬 중앙)에 도착했다고 한다. 기원전 734년 페니키아인들은 팔레르모의 천연 항구에 정착지를 건설했다. 몇몇 사료들에서 페니키아인들은 그 정착지를 지즈(Ziz)라고 불렀다. 선진화된 문화를 가진 시칠리아섬 동쪽에 위치한 도시국가 시라쿠사의 그리스인들은 지즈 대신에 파노르무스(Panormus)라고 불렀다. 이 그리스 명칭의 뜻은 종합 항구(All-port)라는 뜻이며 그렇게 부른 이유는 그곳이 정말 뛰어난 자연 항구였기 때문이다. 팔레르모는 페니키아의 후손들과 그들을 계승한 카르타고인들에게 넘겨졌다.
이 기간동안에 팔레르모는 교역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그리스인들과 카르타고인들 사이에 시칠리아 전쟁이 일었났고 이로 인해 팔레르모에 혼란을 야기했다. 이후 팔레르모에서는 히메라 전투에서 패배한 하밀카르의 함대가 조직되기도 했다. 결국 팔레르모는 피로스 전쟁으로 인해 에페이로스의 지배자 피로스에게 넘어가 그리스 식민지가 되기도하였다. 그러나 후에 1차 포에니 전쟁에 참여한 로마인들은 30년 만에 팔레르모를 로마 공화정에 항복하게 했다. 이 후에 팔레르모는 로마 무역에 중심지로 성장하기 전까지는 매우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로마 시대 동안에 팔레르모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중세[편집]
로마제국이 무너지고 팔레르모는 게르만족 일파의 지배하에 놓였다. 첫 번째는 가이세리크(Geiseric)왕이 이끄는 반달족에게 기원 440년에 넘어갔다. 반달족들은 기원 455년에 북아프리카지역의 모든 로마의 속주들을 차지했다. 그들은 나중에 코르시카, 사르데냐와 시칠리아까지 획득했다. 하지만 반달족들은 곧 급속하게 동고트족에게 세력을 내줬다. 테오도리쿠스 통치하의 동고트족은 488년에 정복을 시작했고(고트족들 역시도 게르만족 임에도), 로마 문화를 지원하고 정부를 대신했다. 고트 전쟁이 동고트족과 동로마제국의 전쟁이 일어났다. 시칠리아는 동로마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임명한 벨리사리우스장군에게 정복당한 첫 지역이기도 하다.
동로마제국은 튀니지로가 아글라브 왕조의 지배자인 지야아드 알라에게 도움을 청하고 구걸하고 시칠리아를 831년에 무슬림에게 내줘 904년까지 격렬한 저항을 하게한 제독 에우페미우스에게 배신을 당했다. 시칠리아에는 이슬람 왕조가 들어서게 됐다. 무슬림들은 120년동안에 섬을 지배했다. 팔레르모 (아랍의 지배 기간동안에는 "발람")는 시라쿠사를 대신해 시칠리아섬의 주요 도시로 바뀌었다. 팔레르모는 코르도바, 카이로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였고 100년뒤에는 번영하던 아랍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아랍시대의 농업혁명 흔적은 시칠리아 요리법에 중요한 부분으로 남아있다.
팔레르모의 아랍왕조는 내분이 발생했고 1072년에 기독교들에게 재정복을 당하였다. 기독교와 후에 지역민들에게 존경받는 로베르 기스카르가 있는 오트빌 가문이 군대를 이끌고 도시에 입성했다. 노르만인들이 아탈리아 반도 남부와 시칠리아섬을 지배하고 있던 시칠리아 토후국을 시칠리아 왕국으로 바꾼 루지에로 2세의 지배하에 놓였다. 시칠리아 왕국은 팔레르모를 수도로 삼았고 궁중인 노르만 왕궁을 건설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팔레르모 성당같은 건물들이 많이 지어졌다. 시칠리아 왕국은 잉글랜드 왕국 같이 유럽에서 부유한 국가가 되었다.
1194년에 시칠리아는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놓였고 팔레르모는 프리드리히 2세의 우선된 도시였다. 팔레르모의 무슬림들은 신성로마제국의 법에 따라 이민을 가고 축출당했다. 후에 시칠리아는 앙주와 아라곤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13세기까지 팔레르모의 인구는 51,000까지 감소했다. 팔레르모는 1479년부터 1713과 1717부터 1718년까지 스페인 왕국의 지배를 받았고 사보이는 1713년부터 1717년까지 그리고1718년부터 1720년까지 관리했고 오스트리아로부터 1720–1734까지 관리를 당했다.
근대[편집]
위트레흐트 조약이후에 시칠리아는 사보이로부터 부르봉 왕가에게 이양되었다. 카를 3세는 팔레르모에서 시칠리아 왕국의 대관식을 하기로 하였다. 찰스 3세는 무역과 산업 활성으로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주택지구를 더 건설하였다. 하지만 팔레르모는 궁중이 있는 나폴리같이 지방 도시에 불과했다. 찰스 3세의 아들인 페르디난도 1세는 주민들을 싫어했지만 1798년에 프랑스 혁명의 발발하여 팔레르모로 대피했었다. 그의 아들 알베르토 왕자는 팔레르모에서 죽고 묻혔다. 1820년부터 1848년까지 시칠리아 전 지역은 쥐세페 라 마사가 1848년 1월 12일까지 일으킨 민중 반란사태로 대격변을 겪었다. 의회와 헌법이 선언되었고 첫 대통령은 루게로 세티모였다. 곧 부르봉 왕가는 팔레르모를 1849년 5월에 다시 정복하였고 나중에 주세페 가리발디가 나타날때까지 지배를 당했다. 주세페 가리발디는 1860년에 5월 27일날 그의 수천의 군대를 이끌고 도시에 입성했다. 몇년후 국민투표를 통해서 팔레르모는 새롭게 건설된 이탈리아 왕국의 편입하게 되었다.
팔레르모는 통일 이후로도 시칠리아 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새로운 문화와 경제, 산업의 성장은 많은 가문의 성장을 자극했다. 예를 들어 플로리오 가문 , 두크로트 가문, 루텔리 가문, 산드론 가문, 휘타케르 가문, 우트베지오 가문을 비롯한 여러 가문들이 있다. 20세기 초에 팔레르모는 도시 성벽을 넘어 비아 델라 리베르탈른(Via della LibertàIn)과 같은 도로를 북쪽을 따라 확장시켰다. 이 도로는 곧 이탈리아에서 아르누보 양식의 많은 건물들로 유명해졌다. 이 건물들의 상당수는 유명 건축가인 에르네스토 바실레가 디자인한 것이다. 이탈리아의 유명 호텔인 The Grand Hotel Villa Igiea는 에르네스토 바실레가 플로리오 가문을 위해 디자인한 것으로 팔레르모 아르누보 양식의 좋은 예이기도 하다. 팔레르모 대극장은 같은 시기에 지오반 바티스타 필리포 바실레(Giovan Battista Filippo Basile)에 의해 디자인되었는데, 당초 루텔리 가문의 회사인 루텔리 & 마치(Rutelli & Machi)사의 건물 용도로 건설되었고 1897년에 문을 열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팔레르모는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1943년 7월, 연합군은 팔레르모 항과 그 주변 지역에 엄청난 양의 폭격을 가했고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종전 후 6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도시 중심지는 전부 복구되지 않았고, 움푹 패인 벽이나 폐허가 된 건물들은 여전히 일상적인 모습이다.
1946년 팔레르모는 노르만 왕궁에서 시칠리아 지역의회로부터 1947년에 특별지위지역으로 공표되었다. 이를 통해 팔레르모의 미래는 다시 밝아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후 수많은 기회가 수십년 째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무능, 기술력 부족, 부패 그리고 재량권 남용으로 인해 대부분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오늘날 시칠리아의 주요한 문제는 대도시 주변을 지배하는 살바토레 줄리아노와 같은 마피아 또는 도적들이며, 이탈리아의 많은 주가 그렇듯이 마피아 가문들은 해당 지역과 경제를 관리하는 문제를 공유하고 있다. 팔레르모 약탈사건(Sack of Palermo)이라고 불리는 사건은 이러한 문제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또한 최근 들어서는 투기 목적으로 가난한 지역에 건물들이 무계획적으로 지어지고 있다. 시칠리아 경제에서 농업 중요도의 지속적인 감소는 도시로의 엄청난 이주를 야기했다. 대표적인 예가 팔레르모인데, 그 규모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이들의 거주지는 재건축된 도시 중심부 대신 북쪽 방향으로 엄청나게 확장되고 있으며 그 결과 새로운 거주지구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지속적인 도시 확장에 대비한 계획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새롭게 건설된 거주지구에는 공원, 학교, 공공건물, 도로망이 부족하며 심지어 현대 도시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오락시설마저 없는 실정이다. 마피아들은 이들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으며 이것이 시골에서 이주해온 주민들을 범죄조직으로 이끄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마피아들은 도시의 부패한 공무원들(팔레르모의 전 시장인 비토 치안치미노(Vito Ciancimino)가 대표적 예로, 그는 마피아들로부터 뇌물수수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에게 뇌물을 주고 이탈리아의 중앙정부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다.[5]
명소[편집]
팔레르모는 도심 지역에 많은 유적이 집중돼 있어 도시 개발을 신중하게 진행하고 있다. 오늘날까지 성벽이 상당 부분 남아있고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페니키아 도시의 고대 중심부인 팔레폴리스와 네아폴리스를 둘러싸고 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거리는 초기 성곽 도시를 가로지르는 주요 도로였다. 거리에 위치한 팔라초 데이 노르마니는 아랍인들의 성이었는데 노르만 시기까지 사용됐다. 인근에 위치한 누오바 문은 카를로 5세의 대 튀니지 전승을 기념하여 1535년에 세워졌다. 성곽 동쪽 가장자리에는 비아 로마와 마리나 광장에 인접한 고대 항구가 있었다.
팔레르모에는 12세기 시칠리아 노르만 왕국에서 시작된 번영기의 주요 건축물들이 있다. 아랍-노르만 건축양식은 서유럽-이슬람-비잔틴간 다문화적 융합이라는 이 지역만의 중요한 특징을 나타낸다. 건축 형태, 구조, 자재만이 아니라 심미·장식적 기법에서도 혁신적인 재합성이 두드러진다.
북쪽 연안에 있는 아랍-노르만 팔레르모(Arab-Norman Palermo), 체팔루(Cefalù) 및 몬레알레(Monreale) 대성당은 6.235ha 규모에 이르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가운데서도 탁월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서구와 이슬람, 비잔틴 문화의 사회-문화적 융합을 보여주며, 교류와 융합에 기초해 탄생한 건축 및 예술적 표현 방식이 지중해 전역으로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이 유산은 시칠리아 노르만 왕국 시대에 건축된 9개 동의 종교 및 도시 건축물이다. 이 가운데 팔레르모에는 2채의 궁전, 3채의 교회와 1채의 성당, 1개의 다리가 있다.
팔레르모 대성당은 1185년에 건립됐고 14, 15세기를 거쳐 그 후 시기까지도 증축됐다. 예배당은 아랍 양식의 아치형 나무 지붕이 특징이다. 반면 돔과 벽 상층에는 콘스탄티노플 출신 그리스 인력들이 작업한 모자이크로 덮여있다. 산카탈도(San Cataldo) 성당과 산조반니 델리 에레미티(San Giovanni degli Eremiti) 성당은 작은 붉은 돔이 특징이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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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팔레르모〉, 《위키백과》
- ↑ 〈팔레르모〉, 《나무위키》
- ↑ 〈팔레르모(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 〈팔레르모(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 ↑ 〈팔레르모〉, 《요다위키》
참고자료[편집]
- 〈팔레르모〉, 《위키백과》
- 〈팔레르모〉, 《나무위키》
- 〈팔레르모〉, 《요다위키》
- 〈팔레르모(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팔레르모(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