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예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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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예보(보스니아어: Sarajevo, 크로아티아어: Sarajevo, 세르비아어: Сарајево / Sarajevo, 문화어: 싸라예보)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이다. 면적은 141.5㎢, 도시 인구는 약 27만5천 명이고 사라예보 대도시 지역의 인구는 약 56만 명이다. 역사적으로 1914년 6월 발생한 오스트리아 황태자의 암살사건(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하여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곳이기도 하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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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 행정 단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수도
- 면적: 141.5 km²
- 지역어: 보스니아어, 세르비아어, 크로아티아어
- 정부 공식 홈페이지: https://www.sarajevo.ba/en
사라예보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로 이 나라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발칸반도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보스나강의 지류인 밀랴츠카강이 시내를 관통해 흐르고 삼림이 빽빽한 산에 둘러싸여 있다. 평균 해발고도가 500m에 달하며 산으로 둘러싸인 사라예보 평원에 위치해 있다. 지리적으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문화권이 접하는 곳에 위치하여 그리스도교나 이슬람교의 건물이 함께 어우러진 광경을 엿볼 수 있으며 다양한 문화와 종교가 거쳐 가 유럽의 예루살렘이라 불린다. 도시 전체 인구 가운데 보스니아계 주민이 약 80%로 가장 많고, 세르비아계가 약 4%, 크로아티아계가 약 5%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1461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세워진 이래로 긴 역사를 자랑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암살되어 제1차 세계 대전의 시발점이 된 사라예보 사건으로도 유명하다. 대한민국에는 1973년 이에리사가 주축이 된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의 단체전 우승으로 알려진 도시다. 1984년 동계 올림픽 개최지이며, 보스니아 전쟁 중에 포위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사라예보 국제공항이 있는 교통의 중심지이자 1531년 대학교가 세워진 교육의 중심지이다. 보스니아 전쟁 종전 이후에 안정을 되찾으면서 관광지로도 다시 부상하고 있다. 사라예보는 볼거리가 풍성하다. 시내에 오스만제국 시대의 모스크가 곳곳에 있고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시대의 건축물도 많이 남아 있다. 1984년 동계올림픽이 열린 도시답게 겨울스포츠를 즐기기에도 적합하다.[2]
사라예보는 오랜 역사와 전통의 고등 교육 기관들을 보유하고 있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1573년 이슬람교 철학 학교가 세워졌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지배 시기인 1887년에는 이슬람 법 체계인 샤리아(Sharia) 법학교가 설립되었다. 1940년 농림학과를 설치하면서 시작된 사라예보 대학교는 도시 최초의 세속 대학교이다. 25개의 학부 및 아카데미, 그리고 5개의 연구소가 사라예보 대학교에 소속되어 있다. 그 외에도 사라예보 과학기술대학교, 사라예보 국제대학교 등의 대학교가 있다. 도시의 대중교통수단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885년부터 운영해 오고 있는 트램이다. 버스, 트롤리버스와 함께 보편적인 대중교통수단으로 이용된다. 산과 산 사이의 계곡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사라예보는 길이 좁고 자동차의 교통이 제한적인 편이다. 시내를 흐르는 밀야츠카 강변에는 이 사건을 기념하는 작은 박물관이 있고 시내에는 이슬람풍의 거리와 시장, 다수의 모스크·성당 등이 있다. 또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1992년 3월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분리, 독립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발생한 이슬람계,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 민족 간의 분쟁으로 사라예보는 내전의 중심지가 되었다.[3]
지리 및 기후[편집]
사라예보는 삼각형 모양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중심 가까이에 있다. 대사라예보는 사라예보시와 인근의 일리자, 하지치, 보고슈차와 일리야시 등을 포함한다. 디나르알프스산에 둘러싸여 있고 보스니아의 사라예보 골짜기 안에 자리 잡고 있다. 평균 고도는 해발 518m이다. 밀랴츠카강을 따라 그 유역에 위치한다. 도시 주위를 다섯 개의 산이 둘러싸고 있다. 다섯 산 중에서 가장 높은 산은 해발 2,088m인 트레스카비차산이고 2,067m인 벨라슈니차산, 1,913m인 야호리나산, 1,627m인 트레베비치산, 1,502m인 이그만산이 있다. 뒤의 네 산은 1984년 동계올림픽이 열려서 사라예보의 올림픽산이라 불린다. 밀랴츠카강은 동쪽에서 흘러와 시내 중심을 통과한 뒤 시의 서쪽에서 보스나강과 합쳐진다. 사라예보 서쪽 일리자 근처에 있는 브렐로보스네는 보스나강의 원천으로 사라예보의 또 다른 자연 랜드마크이다. 또한 코셰브스키포토크 같은 작은 강도 시내를 통과해 흐른다.
사라예보는 사계절이 있고 연중 강수량이 고르다. 아드리아해가 가까이 있어서 사라예보의 기후를 상당히 누그러뜨린다. 연평균 기온은 10°C이고 가장 추운 1월 평균 기온은 영하 0.5°C, 가장 더운 7월 평균 기온은 19.7°C이다. 평균적으로 1년에 32°C를 넘는 날은 7일이고, 영하 15°C 아래로 떨어지는 날은 4일이다. 1년에 평균 75일 비가 온다.
역사[편집]
사라예보 지역의 가장 이른 시기의 유물은 신석기시대 부트미르 문화의 유물이다. 시내 서쪽 일리자에서 1893년 독특한 도자기와 토기 유물이 발견되었다. 사라예보에서 일리리아족도 문화를 꽃피웠다. 이들이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에게 서기 9년에 패배함으로써 이 지역은 로마인들이 지배하게 되었다. 로마인 다음에 고트족이 들어왔고 이어서 슬라브인들이 7세기에 정착했다.
사라예보는 1450년대에 오스만제국에 의해 세워졌고 1461년이 도시 창건 연도로 정해졌다. 오스만의 초대 보스나 총독인 이사베그이샤코비치는 여러 마을들을 묶어 하나의 도시로 탈바꿈시켰고 모스크, 시장, 공중목욕탕, 호스텔, 총독관저(사라이)를 지음으로써 수도로 만들었다.
이 모스크는 메흐메드 2세 술탄을 기려서 '차레바자미야'(차르의 모스크)라 이름 지어졌다. 15세기에 사라예보는 보스나사라이라는 이름의 확고한 도시가 되었다. 1541년에 가지 후스레브베그의 군수참모인 베킬하라가 오늘날까지 하지이스카 모스크라고 알려져 있는, 순례자의 모스크를 세웠다.
제2대 총독 가지 후스레브베그 아래서 사라예보는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후스레브베그는 도시 외형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16세기 중엽에는 모스크가 100개가 넘었다. 오스만제국의 전성기 때 사라예보는 이스탄불 다음으로 발칸 지역에서 크고 중요한 도시였다.
1697년 합스부르크 군주국이 오스만제국을 공격하고 사라예보를 점령한 뒤 모조리 불태웠다. 1830년대에 보스니아봉기의 몇 전투가 사라예보 주변에서 벌어졌다. 이 봉기는 후세인 그라다슈체비치가 이끌었다. 사라예보의 한 주요 거리 가 그를 기려서 즈마이오드보스네(보스니아의 용)라고 명명되었다. 봉기는 실패로 끝났고 오스만제국의 보스니아 지배는 몇 십 년 더 계속되었다.
1878년에 베를린 조약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점령했고 1908년에 완전히 편입시켰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사라예보를 새로운 발명인 트램 같은 것을 시험해보는 장소로 삼았다. 도시는 오스만의 시장과 현대적인 서구 건축물이 혼합된 독특한 모습을 띠게 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시기에 많은 공장과 건물이 지어졌다. 여러 기관이 서구화되고 근대화되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사라예보 주민들이 라틴 문자를 쓰기 시작했다. 사라예보 성심 성당이 네오고딕과 로마네스크 양식 요소들을 이용하여 세워졌다. 국립박물관, 사라예보양조장, 시청이 또한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보스니아는 1908년에 공식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아내 소피와 함께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보스니아의 유고슬라비아인 청년 가브릴로 피린치프에게 암살되었다. 이어서 사라예보에서 반세르비아 소요가 일어나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 전쟁 후에 보스니아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편입되었고 사라예보는 드리나 지방의 수도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사라예보는 1941년 4월 추축국에 함락되었다. 추축국은 독립된 크로아티아국을 세웠고 사라예보를 여기에 포함시켰다. 보스니아 유대인의 85%가 나치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사라예보는 1943년부터 1944년까지 연합국의 폭격을 당했다. 유고슬라비아 빨치산운동이 사라예보에서 벌어졌다. 레지스탕스는 블라디미르 발테르 페리치가 이끌었는데 그는 사라예보 해방을 지휘하다가 죽었다.
전쟁이 끝나고 사라예보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 안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공화국 수도가 되었다. 공화국 정부는 사라예보에 집중 투자했고 많은 새로운 주거 지역을 노비그라드 구역과 노보사라예보 구역에 지었다. 사라예보는 유고슬라비아에서 중요한 산업 중심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희생자들을 위한 기념물인 브라차 기념공원이 1981년 문을 열었다.
사회주의유고슬라비아 시기에 사라예보 최고의 순간은 1984년 겨울올림픽을 유치한 때였다. 올림픽 이후에 관광 붐이 일어나 1980년대는 사라예보의 가장 융성했던 시기가 되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1992년 3월에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발생한 민족 간의 분쟁으로 사라예보는 내전의 중심지가 되었다. 1992년과 1995년 사이에 보스니아전쟁이 일어나 대량 파괴가 발생했다. 오늘날에는 많은 현대식 건물이 사라예보의 스카이라인을 이루고 있는데 보스말시센터, BBI센타르, 사라예보시센터, 아바즈트위스트타워 등이 대표적이다.[4]
행정[편집]
사라예보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라는 국가의 수도이면서 그 하위 단위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연방의 수도이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연방의 10칸톤 중 하나인 사라예보 칸톤의 중심이다. 또한 법적으로는 레푸블리카스릅스카(세르비아 공화국)의 수도이기도 하다. 모든 국가기관과 외국대사관이 사라예보에 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내각,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의회,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대통령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헌법재판소도 있다. 사라예보시는 센타르, 노비그라드, 노보사라예보, 스타리그라드 등 4개의 구로 이루어져 있다. 각 구는 자체의 지방정부를 갖고 있다.
경제[편집]
사라예보는 제조업과 관광을 중심으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발달한 지역이다. 사라예보 칸톤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국내총생산(GDP)의 약 25%를 생산한다. 1997년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중앙은행이 사라예보에서 문을 열었다. 사라예보 증권시장은 2002년에 거래를 시작했다.
사라예보는 공산주의시기에 큰 산업기지를 가졌지만 몇 개의 기업만이 성공적으로 시장경제에 적응했다. 사라예보의 기업들은 오늘날 담배, 가구, 양말, 자동차, 통신장비 등을 생산한다. 사라예보에 기반을 둔 회사로 BH 텔레콤, 보스날리예크, 에네르고페트롤, 사라예보담배공장, 사라예브스카피바라 등이 있다.
교통[편집]
사라예보는 산들 사이의 골짜기에 자리 잡은 사라예보는 인구가 밀집하게 되었다. 길이 좁아 주차공간이 부족하여 자동차 통행이 제한되는 대신 보행자나 자전거 탄 사람들에게는 유리하다. 사라예보를 다른 도시와 연결하는 주요 도로는 티토바거리와 동서즈마이오드보스네(E761) 고속도로이다. 사라예보는 제니차, 바냐루카, 투즐라, 모스타르, 고라주데, 포차 같은 다른 주요 도시들과 고속도로나 국도로 이어진다.
사라예보의 전기 트램은 1885년부터 운행되었고 오늘날 가장 오래된 대중교통 수단이다. 사라예보는 유럽에서 최초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24시간 트램을 운행한 도시이다. 트레베비치 케이블카는 1984년 동계올림픽 때 사라예보의 주된 랜드마크였고 2017년 새로 지어져 2018년 4월 다시 문을 열었다.
사라예보는 매일 국제선 철도가 운행된다. 자그레브와 플로체와는 하루 두 번 운행된다. 또한 사라예보와 국내의 주요 도시와도 열차가 운행된다. 사라예보 철도역은 시내 중앙 북쪽에 있다.
사라예보 국제공항은 부트미르공항이라고도 하며 시내 남서쪽 가까이에 있다.
도시 경관[편집]
사라예보는 관광객이 매년 급증하고 있다. 2019년에 57만3227명이 사라예보를 방문했다. 자연환경이 빼어날 뿐 아니라 문화유적이 많기 때문이다. 600년 사라예보의 역사에서 동양과 서양의 제국의 영향을 깊이 받아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사라예보 서쪽 외곽의 브렐로보스네 공원, 시내의 사라예보 성심 성당, 가지후스레브베그 모스크 등은 대표적인 명소이다.
시내 오슬로보제냐알리야이제트베고비치 광장은 현지인들이 체스하는 장소로 널리 이용된다. 벨리키 공원은 사라예보 시내에서 가장 큰 녹지이다. 근처에 보스니아전쟁 중에 숨진 사라예보의 어린이들을 기리는 기념물이 있다.
하스타하나는 마리인드보르에 있는 공원으로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현지어로 코니야추프리야라고 하는 '염소의 다리'는 시내 동쪽 외곽에 있는 관광 명소로 밀랴츠카강 위에 놓여 있다. 사라예보의 우정공원에 2012년 12월 24일 전쟁에서 자식을 잃고 슬퍼하는 두 어머니의 동상이 세워졌다.
사라예보는 아바즈트위스트 타워, 프린체바 레스토랑, 트레베비치산 비디코바츠 전망대, 즈마예바츠 전망대, 노란 요새 전망대, 흰 요새 전망대, 알타 쇼핑센터, BBI센터, 호텔헤코딜럭스 등 곳곳에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사라예보의 상징으로 트레베비치 케이블카가 있다. 2018년에 새로 지은 이 케이블카는 시내 중심에서 트레베비치산으로 관광객들을 올려주어 사라예보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 중 하나이다.
사라예보에는 박물관, 미술관이 많이 있다. 사라예보 박물관, 아르스아에비 현대미술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역사박물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문학과극예술박물관, 국립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박물관 등이 그것이다. 국립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박물관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세파드유대인 문서인 사라예보하거다를 전시하고 있다.
알리야이제트베고비치 박물관은 2007년 10월 19일 개관한 박물관으로 정치가요 저술가, 법률가였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초대 대통령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를 기념한다. 사라예보에는 또 1921년에 세워진 국립극장과 청소년극장이 있다. 이 밖에 문화센터, 시도서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미술관, 보스니아연구소 등이 있다.
사라예보는 밀랴츠카강이 시내를 관통해 흐르는 만큼 다리가 많이 놓여 있다. 라틴 다리 북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을 촉발한 암살 사건이 발생했다. 그 현장 가까이에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지배하던 시절의 유물과 사진이 전시되어 있는 사라예보1878~1918 박물관이 있다. 사라예보의 문화유산 보존을 책임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문화, 역사, 자연유산보호연구소가 활동하고 있다.
사라예보는 고등교육의 역사가 길고 풍부하다. 1537년에 가지후스레브베그가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인 수피철학교를 세웠다. 1887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때에 샤리아 법률학교가 세워졌다. 1940년대에 사라예보대학이 설립되었다. 오늘날 사라예보대학, 사라예보과학기술대학, 사라예보국제대학,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아메리칸대학, 사라예보경영대학원 등이 사라예보에 있다.
사라예보에는 보스니아내전의 참상을 엿볼 수 있는 역사적인 현장이 있다. 사라예보 국제공항 활주로 남쪽 끝 부근에 있는 사라예보 터널은 세르비아군에 포위된 보스니아군이 교외의 보스니아 점령지와 연결하기 위해 땅속에 뚫은 굴이다. 오늘날 이곳에 사라예보 터널박물관이 있다. 또한 근처 일리자에는 온천과 아쿠아파크가 있는 테르말나리비예라일리자가 있다.[5]
사라예보 사건[편집]
사라예보 사건은 1914년 6월 28일 현재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폰 외스터라이히에스테 대공과 조피 초테크 폰 호엔베르크 여공작 부부가 청년 보스니아라는 민족주의 조직에 속한 18세의 청년이자 대학생이었던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제1차 세계 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
프린치프는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으로 전 남슬라브인들의 통일, 구체적으로는 보스니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독립국인 세르비아와 합칠 것을 원하였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군대의 사열을 보기 위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자 가브릴로 프린치프와 네델코 차브리노비치 및 4명의 혁명가 학생들이 음모를 준비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제국 내에서 게르만인과 슬라브인이 평등하게 지내게 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나 세르비아 민족주의 단체는 이러한 온건 정책이 오히려 세르비아인의 결집 의지를 약화시킨다고 여겼다.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 슬라브계 민족이 동등하게 동맹에 참여할 수 있는 제3의 왕국을 수립하려는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구상은 통일된 단일 민족 국가를 열망하는 세르비아인들에게 위협이 되었다.
황태자 부부가 탄 차는 일차적으로 밀랴츠카 강 인근에 있던 네델코 차브리노비치가 던진 폭탄을 맞아 테러를 당했으나, 뭔가가 날아오는 것 같이 보였던 운전사가 속도를 높이는 바람에 차 뒷바퀴에 맞고 뒤따라오던 차 밑에서 터져, 16명이 중상을 입었다. 한편 페르디난트는 자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다쳤을 거라고 생각했고 모든 사람들이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병원으로 가기로 했다. 경로를 변경해 다른길로 가기로 했으나, 실수로 운전사에게 미리 말하지 않아 운전사는 길을 잃고, 라틴 교 인근의 골목에 숨어 있던 프린치프가 달려나와 총 두 발로 황태자 부부를 암살했다. 사건이 있은 직후 시민들은 세르비아인을 습격하고 그들의 가게를 약탈하였다.
사건이 발생한 사라예보는 오스트리아의 영토였으며 프린치프 또한 오스트리아령 보스니아에 사는 세르비아인일 뿐 세르비아 국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세르비아 왕국이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으며 남슬라브 운동을 은근히 부추기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 사건을 구실로 세르비아와 전쟁을 결심했다. 오스트리아는 바라던 바를 이루었기 때문에 7월 28일,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했고, 러시아가 7월 29일 총동원령을 내렸다. 독일의 빌헬름 2세는 러시아와 프랑스 제3공화국에 동시에 최후통첩을 발했다. 8월 1일,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이후 각국은 서로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나 전쟁은 7월 28일부터 시작된 것이었다.[6]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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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사라예보〉, 《위키백과》
- 〈사라예보 사건〉, 《위키백과》
- 〈사라예보〉, 《나무위키》
- 〈사라예보〉, 《요다위키》
- 〈사라예보(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사라예보(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
동남유럽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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